수필에서의 연상작용 / 엄현옥
연상작용(Association)은 어떤 생각이나 개념이 다른 생각이나 개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과정으로, 문학작품에서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불어오는 중요한 요소다. 작가는 문학 작품에서 특정 이미지나 상황이 다른 이미지나 감정으로 확산시키는 연상작용을 통해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에 의한 연상작용은, 대상과 사건에 대한 생각이 논리적이고 일관된 방식이 아니라, 마인드맵을 따라가듯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따라서 연상작용은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깊이 있는 상호작용을 가능케 한다.
수필 속에서 작가의 연상작용은 작품의 깊이와 복합성을 더하고, 독자가 텍스트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독자는 작가가 설계한 연상을 통해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행위를 넘어 작품 내에서 제공된 단서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수필과비평》 9월호에 발표된 작품 중 평면적이고 단순한 나열을 벗어나 작가의 다층적인 내면을 반영한 작품들에 시선이 머물렀다. 작품 속 이미지나 특정 장면이 독자에게 어떤 연상 효과를 일으키는지, 그 효과가 작품의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논의하고, 주제와 이미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김삼복의 〈호반우〉의 발단은 ‘희준犧尊’이라는 유기 그릇이다. ‘희준’은 통통한 몸에 짧은 네 다리로 서 있는 소가 그릇을 받들고 있는 형태의 아담한 제기다. 그것은 장식품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부터 왕실과 양반 가문에서 사용되던 귀한 도구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
작가의 연상작용은 ‘희준’에서 출발해 ‘심우도’로 이어진다. 심우도의 검은 소는 무명無明, 즉 깨닫지 못한 상태를 상징한다. 검은 소는 세속적인 욕망과 번뇌에 사로잡혀 참된 자아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검은 소가 수행을 거쳐 마음이 청정해지면 깨달음을 상징하는 흰 소로 거듭나 비로소 참된 자아에 도달한다.
‘희준’이라는 유기그릇, 심우도의 ‘소’에서 시작된 작가의 연상은 정지용 시인의 얼룩빼기 황소를 자연스럽게 불러온다. 시에서의 황소는 고향의 자연과 평화로운 삶의 상징이며 시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중요한 요소다. 나아가 지금은 멀어진 과거, 즉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회상하고 향수를 달래기 위한 중요 장치다.
시인의 황소는 멍에를 메고 흙을 갈던 우리 민족의 듬직한 일꾼 ‘칡소’로 이어진다. 고향의 점박이 황소는 평생 일에서 헤어나지 못한 아버지 삶에 도달한다. 사고의 확산으로 가지를 치던 작가의 연상작용은, 드디어 작가가 펼치고자 한 상념에 이르렀다. 고삐에 묶인 채 쟁기를 짊어진 소의 노동은 아버지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아버님이 고르게 썰어놓은 논을 바라본다. 청명한 사각 하늘이 들어 있다. 거친 논을 썰어놓고 며칠을 기다리면 무논은 호수가 된다. 얼마나 맑은지 지난밤 개구리 떼들의 질펀한 자리가 무색할 정도다. 밀짚모자에 선글라스를 끼고 이앙기 꼭대기에 앉아 논둑을 장악하신다. 한 치 흐트러짐이 없이 가로지르는 이앙기 끝으로 파릇한 모들이 총총히 들어선다. 젊은 졸병들을 사방에 거느린 장군이 따로 없다. 당신이 지나간 자리는 푸른 모들이 학익진처럼 펼쳐진다. 한 달을 팽팽한 들판에서 땡볕과 전쟁하며 모판을 사수한다.
- 김삼복의 〈호반우〉에서
〈호반우〉는 농부인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소에 대한 깊은 애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와 노동의 가치, 삶의 본질을 이끌어낸다. 작가는 아버지와 소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주제에 접근한다.
작가는 아버지의 삶과 깊이 연관된 존재로 묘사된 소를 단순한 가축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삶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긴다. 아버지가 소를 통해 땅을 일구는 모습은 작가의 눈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중요한 가치였다. “온순한 호반우도 눈이 붉어질 때가 있다.”는 부분에서는 소가 상징하는 인내와 고통이 아버지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연상작용을 통해, 작가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발전시킨다.
〈호반우〉에서 소는 아버지의 삶을 투영하며 자연의 이치와 순환, 그리고 인간의 삶 속에서의 의미를 상징하는 존재로 제시된다. 소의 노동은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이루어온 삶의 과정과 중첩되며, 이 과정에서의 과거의 기억을 통한 연상작용은 아버지의 삶의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에 도달한다.
천 년 동안 잠들어 있다는 고향의 잠룡은 어디 있는가? 어쩌면 벌써 일어나 여의주를 물고 타래치는 중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잠룡은 칡소의 옷을 빌려 입고 논둑을 다지고 물꼬를 여닫으며 땅을 섬겼으리라. 호반우는 그렇게 넓은 토지를 네 발로 지켜냈으리라. 낡은 터에서 거북정자로 여우 바위에서 모담 언덕으로 선을 긋고 면을 만들며 삶을 채워냈을 것이다. 못물로 가득 찬 사각 논들은 아버님의 미완성 원고지, 위기도 지나고 절정도 끝나가는 데 당신의 위대한 결말의 마침표가 나는 벌써 두렵다.
- 김삼복의 〈호반우〉에서
아버지의 삶이 마치 미완성 원고지와 같다는 결미의 비유는, 당신의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세상 모든 일에는 결말이 있는 법, 언젠가 미완성의 삶이 마무리될 때, 아버지의 헌신과 노동이 가져온 결과물은 어떤 것이 될지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이 담겨 있다. 작가 심연의 지도를 따라 소환한 특정한 이미지들을 따라 정연하게 전개된 〈호반우〉는 아버지의 삶이라는 깊은 의미에 도달한다.
〈호반우〉에서 연상작용은 작가가 자연에서 인간의 삶으로, 그리고 개인적인 기억에서 보편적인 삶의 의미로 사유를 확장하는 중요한 도구다. 작가는 호반우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조망하고, 아버지의 삶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탐구한다. 이러한 연상작용은 수필의 주제를 심화하고, 독자에게도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강력한 문학적 장치로 작용한다.
최운숙의 〈위로〉는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인간적인 감정과 의식을 섬세하게 탐구한다. 작가는 과거의 기억과 그 안에서의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위로라는 주제에 도달한다. 작가는 ‘금동대향로’의 정교함을 묘사하며 서두를 연다. 이 글의 상징적 이미지로 작용하는 ‘금동대향로’ 앞에서 멈춘 작가의 시선은 정교하게 조각된 다섯 악사가 실제 연주하는 환영을 본다. 그들이 펼치는 선율은 향로의 연기와 함께 퍼지더니 고향집 마당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자연스럽게 가족사와 연결시키고, 아버지의 장례식과 굿판의 기억을 불러온다.
차일을 친 마당에 젯상이 차려있다. 종이로 사람 모양을 오린 넋이 보이고, 상 뒤 병풍에는 아버지의 옷이 걸렸다. 촛불이 켜져 있고, 실을 감아 세워놓은 수저가 밥그릇에 꼿꼿하다. 그 옆에 쌀을 담고 대나무 가지에 종이를 단 손대가 꽂혀 있다. 배 모양의 작은 상여도 보인다.
아버지는 안방 윗목에 반듯하게 누웠다. 숙부가 얼굴과 몸을 깨끗하게 씻기고 수의를 입혔다. 나란히 버선을 신겨드리고, 입에 쌀과 동전 세 닢을 넣어드렸다. 땅 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매미처럼, 아버지는 저승길 양식과 노잣돈을 넣고 부활의 길에 섰다. 뭍에서 공부하던 나는 뱃길을 달려와 아버지를 부르며 다시 살아나달라고 애원한다. 병풍 하나를 두고 생과 사가 함께 한다.
- 최운숙의 〈위로〉에서
아버지의 장례일, 생전에 고치지 못한 아버지의 병을 엄마가 씻김굿으로 위로하는 장면이다. 무당은 무명베에 지은 매듭을 하나씩 풀며 굿판을 이어간다. 고조된 무악소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생사를 넘나들며 병마의 고통을 털어내기를 염원하며 벌이는 굿판은, 돌아오지 않을 망자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이 과정에서 연상작용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 향로에 담긴 상징적 의미와 과거의 기억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수의를 입히고, 노잣돈을 넣어드리는 과정은 의례적인 장례 절차를 넘어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한 의식이다. 이 과정에서 배경으로 작용하는 무당의 굿과 무악의 소리는 이러한 감정을 더 생생하게 불러일으키며, 죽음과 그에 대한 위로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한다. 다가올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고민하며 남편과 함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장기기증 신청을 한다. 이 과정에서 연상작용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는 결국, 자유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얻는 위로로 귀결된다.
〈위로〉의 결미는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유로 나아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삶과 죽음을 연결하며, 궁극적인 주제에 도달한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위로를 의미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라는 중심 주제를 담아낸다.
〈위로〉에서 ‘금동대향로’라는 특정한 대상의 관찰에서 기인한 최운숙의 연상력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거쳐 삶의 마지막 문을 불러온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에 대한 의식,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준비 과정을 통해, 죽음이 주는 위로에 대한 성찰에 다다른다.
장미숙의 〈숨바꼭질〉은 작가가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글을 찾기 위해 사유의 여정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다. “글을 찾으러 길을 나섰다.”는 문장으로 시작한 이 글은 좋은 글을 쓰겠다는 조급한 마음을 드러낸다. 자신의 글밭이 황폐해졌음을 느낀 작가에게 걷기는 글쓰기를 위한 영감을 찾기 위한 수단이다.
첫 번째 연상작용은 야생화가 만발한 산책길에서 시작된다. 야생화의 강렬한 색과 형태를 보며 글쓰기를 위한 영감을 떠올리고 글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글감은 쉽사리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작가는 숨바꼭질과 글감을 찾기 위한 작업을 비유하며, 글을 찾는 과정의 어려움과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연상작용을 통한 사유의 흐름은 작가의 발길을 따라 더욱 깊어진다. 산책에서 만난 다양한 장면들은 글쓰기를 향한 작가의 사유를 자극하는 요소들로 등장한다. 시멘트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방향을 잃은 지렁이의 몸짓도 작가의 눈에는 예술가의 퍼포먼스로 보인다. 녀석에게 닥칠 비극을 예상하지만 끝까지 지켜볼 수는 없다. 산속으로 이어지는 발길에서도 단어는 쉽사리 채집되지 않는다. 화사한 옷차림으로 신바람이 난 어르신들의 트로트 소리도 귓전을 맴돌 뿐 결정적인 글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들은 작가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통해 글을 완전하게 잡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런 에피소드는 글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글을 찾기 위한 노력과 그 과정에서의 빈번한 실패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숨바꼭질과 글쓰기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숨바꼭질에서는 숨어야 할 장소를 창의적으로 선택해야 하고 술래는 숨은 사람을 찾는 방법에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창의적인 표현이나 서사를 만들어내야 한다.
글은 숨바꼭질에는 명수입니다. 찾으려고 하면 숨어버리고 방심하면 나타나 뒤통수를 칩니다. 재빨리 낚아채서 지각의 영역으로 넘기면 어쩌다 제법 모양을 갖춘 의미도 되지만 속이 텅 빈 활자로 남는 경우도 흔합니다. 의식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때는 한없이 무거운 글이 빠져나갈 때는 바람 같습니다. 가벼운 하품 한번에도, 잠깐의 잡생각에도 냅다 달아나버리니 말입니다. 그렇게 집을 나가버린 글이 수도 없습니다. 더러는 잃어버리기도 하고 더러는 떠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허덕허덕 나가버린 글을 찾아 헤매는 꼴이라니요.
- 장미숙의 〈숨바꼭질〉에서
과정 중심의 놀이인 숨바꼭질은 놀이 자체에 목적이 있으며 승패가 즉시 가려진다. 숨바꼭질은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기는 사회적인 활동인 반면, 글쓰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물론 독자와의 교감을 목표로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혼자서 시작하고 완성해야 하는 일이다.
완성된 글은 독자에게 전달되는 의미가 중요할 뿐 승패는 무의미하다. 작가의 의식에서 빠져나가버린 글은 바람처럼 허무하게 사라진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찾으려면 숨어버리고 방심하면 뒤통수치며 나타나는 숨바꼭질과 다르지 않다. 재빨리 잡아낸 묵직한 상념들도 순간의 잡생각에 달아날 때 그것들을 찾아 헤매는 것은 작가의 숙명이다.
잠시 쉬기 위해 머문 그늘의 나무의자에서 할아버지를 본다. 이어폰을 꽂은 채 졸고 있는 어르신의 깊은 주름을 헤아리는 듯 흰 머리 아래 태양빛이 비춘다. 할아버지의 주름으로 이어진 연상작용은 그것을 매개로 과거의 경험과 감정을 불러온다. 주름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이 채운 시간과 삶의 결정체다. 작가는 할아버지의 주름에서 연상의 실마리를 찾으며, 한 인간이 살아온 길과 그 속에 담긴 연륜과 서사를 상상한다. 글감을 찾기 위한 작가의 연상작용은 단순한 글의 외형적 형태가 아닌, 그 속에 담긴 깊은 의미와 경험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주름골 마디마디에 숨은 글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주름은 연상의 실마리입니다. 곧 주름의 파노라마가 펼쳐집니다. 어디선가 보았던 주름들, 가장 가까운 이들의 주름, 그러고 보니 주름만큼 한 사람이 살아온 길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듯합니다. 아, 물론 인위적으로 주름을 없애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죠. 할아버지의 주름 속에도 개성과 독특함을 가진 서사가 숨어 있겠지요.
글을 찾으러 나왔다가 흔적만 잡고 돌아갈 것 같습니다. 흔적은 무수한데 숨어버린 글을 찾기란 요원하네요. 절실한 무언가가 없어서일까요. 인식의 창이 깨지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현상이 아닌 두꺼운 사고의 벽에 숨어 있는 것일까요. 글이 집을 나간 게 아니라 어쩌면 글의 집에서 퇴출당한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해집니다. 쭉정이나마 건지려던 마음을 탈탈 털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행여 오는 길에 한 조각의 글이라도 보인다면 얼른 낚아채서 생각 샘에 가둬야겠습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집니다.
- 장미숙의 〈숨바꼭질〉에서
작가는 결국 글을 완전히 찾지 못한 채 귀가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작가는 단순히 글을 찾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사유와 성찰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산책에서 일별한 대상들과의 연상작용을 통해 일상적인 경험과 관찰이 글쓰기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글을 찾는 여정이 곧 주제를 탐구하는 과정임을 인식한다. 작가가 의도한 글의 흔적을 찾지 못한 불안감이 있지만,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미루어 그 과정에서 얻은 통찰과 깨달음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숨바꼭질〉에서 장미숙이 산책에서 만난 풍경들은 다양한 연상을 연결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글의 소재를 찾기 위한 일조차 화소로 확장시키며 독창성을 확보한다. 이 글에서의 연상작용은 단순히 무작위적인 생각의 나열이 아니라, 주제를 탐색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작용한다. 작가는 산책 과정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장면과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글의 흔적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는 단순한 창작의 행위가 아닌, 존재와 경험을 탐구하는 여정이라는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생각한다.
봉혜선의 〈책등이 사는 나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인 서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작가에게 책등을 보이며 꽂힌 책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그들만의 목소리와 성격을 가진 각기 다른 존재다. 나아가 책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그것들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소장한 책에 대한 기억과 상상의 조화를 통해 작가가 책에 대해 깊은 애정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억과 상상의 공간인 책장 앞에 선 봉혜선의 연상작용은, 독자에게 저마다의 서가에 꽂힌 책등을 떠올리며 그것이 내포한 의미와 개별적인 경험과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이러한 연상은 책장 앞에서 펼친 책에 대한 기억과 경험을 통해 소재 자체가 갖는 의미를 확장하고, 독자에게 개별적이고도 풍부한 해석의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가 배열된 책등을 보며, 그들이 그동안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책들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 존재로 변모한다. 이청준, 이승우, 최윤 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저자가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품게 했듯이 책장은 저자의 기억과 경험이 축적된 공간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작가별로 분류해 둔 칸에서 들리는 건 작가 나름의 주장이다. 타인에게 말 걸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을 이룬, 자아를 드러내고 자아를 뛰어넘으려 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낸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훑는 눈길은 오래 머문다. 슬픔을 자아내 동감하던 초창기 소설들과 여성 목소리가 높은 데도 있다. 글의 세계로 이끈 이청준 류는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던 붓을 펼치기도 전에 꺾이게도 했다. 이승우, 최윤으로 이어지는 더 용기를 북돋게도 한, 한때 탐닉했던 작가들의 이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더듬는다. 긴장할 것 없는 친정 같은 안온함이 감돈다. 오래 같이 있어주어 언제나 믿는다.
- 봉혜선의 〈책등이 사는 나라〉에서
작가는 책장의 특정 구역에서 작가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는 실제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제목과 저자의 이름, 그리고 책을 통해 경험한 감정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특히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가 높이 들리는 부분에서는 과거의 독서 경험이 강하게 되살아난다. 이러한 연상작용은 단순한 기억의 재생이 아닌, 저자가 책을 통해 얻은 감정적 반응과 연결되며,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깊은 정서적 상호작용을 형성한다.
책장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봉혜선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작가는 책장 앞에서 책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며, 책들이 각각의 제목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고 묘사한다.
아직 내게 선택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무엇에 이끌린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은 종합 시집이니 티저 시집이니 선집도 여럿이다. 저들끼리 대화하는 방식은 제목으로이다. 어느 책은 묻고 어느 책은 대답한다. 싯구 같은, 댓구 같은 책끼리도 모아두었다. 《시 읽기의 즐거움》에서 환호하다가 《시 읽기》의 괴로움에서 좌절하기도 여러 번이다. 《그늘이 발달을 하는가》하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충고에서 헤매기도 한다.
- 봉혜선의 〈책등이 사는 나라〉에서
이 과정에서 작가는 책들을 다시 읽고 싶어지거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이는 작가의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책장 앞에서의 경험을 통해 연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 〈책등이 사는 나라〉에서는 책의 표지나 내용 이전에 책등의 제목만으로 기억과 감정을 자극하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이 글에서의 연상작용은 책이 작가 개인의 경험과 사유가 담긴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 독자에게 더 깊이 있는 경험과 의미를 제공한다. 〈책등이 사는 나라〉에서 봉혜선이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중요한 과정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한 편의 수필에는 개인의 일상적인 경험과 기억이 승화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조남숙의 〈피아노 광상곡〉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아노와 관련된 기억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그것이 현재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수필의 형식은 걷기라는 행위를 토대로 각각의 ‘바퀴’는 시간의 경과를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바퀴는 과거의 특정 기억과 연관되며, 이는 다시 현재의 감정과 생각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바퀴에서는 피아노를 배우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세 번째 바퀴에서는 임신 중 피아노를 연주하던 기억을 회상한다. 이러한 기억들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의 감정 상태와 연결된다.
여섯 개의 소제목으로 이루어진 이 글은 연상작용을 통한 시간의 흐름이 단순한 일직선이 아니다. 걷는 행위와 관련된 내용을 소제목의 첫 문단에, 피아노에 대한 기억을 둘째 문단에 각각 배치했다. 이러한 구성은 첫 문단만을 이어 읽거나, 두 번째 문단만으로 연결해도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무리가 없다. 속도의 완급을 조절하며 걷는 행위와 피아노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내며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유기적인 흐름을 이루는 매끄럽고 치밀한 구성이다.
이 글에서 피아노는 연주를 위한 악기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기억하고 재구성하게 하는 매개체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성인이 되어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지며, 현재의 삶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확장된다. 피아노 연주는 작가에게 있어 일종의 치유 과정이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피아노 광상곡〉에서의 연상작용은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피아노 학원에서의 경험은 단순한 음악 학습이 아닌, 삶의 다양한 감정들과 연결되어, ‘상록수’ 노래를 부르던 선배의 떨리는 목소리와 같은 구체적인 기억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당시의 감정을 떠올리며, 그것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반추한다.
- 여섯 바퀴
마지막이 정말 마지막이 아닐 때가 있죠. 더 걷고 싶은 날이 있거든요.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싫은 것을 털어내기 위해, 미운 것을 맘껏 욕하기 위해, 과거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붙잡기 위해, 현재라는 존재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해, 미래에 피어날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삶은 어디로 흐를까요. 내 심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하루를 마주할까요. 내 의식은 가늠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을 붙잡을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관계를 침착하게 만질 수 있을까요. 내 얼굴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에 반응할까요. 내 사랑은 그동안 한 일을 알고 있을까요.
피아노는 내 마음대로, 일정한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삶을 연주하려 했던 나를 알고 있을까요. 어둡고 쓸쓸하고 무서운 생각에서 밝고 다정하고 즐거운 보헤미안 리듬으로 변화하려 했던 나를 잊지 않을까요. 쉼 없이 움직이고 꿈틀거리는 욕망으로부터 둥실둥실 하늘로 떠다니던, 더욱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노래했던 선율을 기억할까요. 그럴까요.
-조남숙의 〈피아노 광상곡〉에서
위에서 인용한 〈피아노 광상곡〉의 결미 부분에서는 걷기라는 일상적인 행위가 거듭 강조된다. 걷기는 작가에게 있어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오고,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에 대한 사유로 확산된다. 일상의 루틴으로 보이는 걷기와 피아노 연주라는 두 가지 행위는 연상작용을 통해 촘촘하게 연결되며,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어떻게 삶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피아노 광상곡〉에서의 연상작용이 단순히 과거만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조망하는 중요한 장치임을 시사한다.
인용한 작품들을 통해 연상작용이 문학 작품에서의 역할과 그것이 문학의 본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작가의 연상작용은 작가가 의도한 주제를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돕는 중요한 기법이며, 독자가 텍스트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며, 독자가 작품을 통해 다양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작가의 사고는 연상의 테두리 안에서 작용하기 마련이며, 개연성을 통한 공감에 이르기 위해 자유 연상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경험을 통한 사유는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자연스럽게 불러오도록 연결되어 있으며, 작품의 메시지 전달과 감정적 교감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