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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수필

나는 글자를 모은다 / 은옥진

작성자이상목|작성시간26.06.16|조회수22 목록 댓글 0

나는 글자를 모은다 / 은옥진

 

나는 글자를 모은다 / 은옥진




컴퓨터 전원을 누른다. 빨간 불이 켜진다. 깜박이는 불빛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웅-소리를 내면서 모니터가 밝아진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열 손가락이 나도 모르게 둥그스름하게 구부러지면서 내 가슴을 자판인 양 톡톡 토도독 두들긴다. 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이 온몸에 퍼진다. 흔한 일상이건만 왠지 모니터를 바라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얼마 만인가.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서 깜냥에 글 쓴다고 나선지 어느덧 십 수 년이 지났다. 스트레스로 온몸에 열꽃이 피어나도 쓰고 싶은 마음 하나였다. 하루 세 차례 끼니 챙기는 일 아니고는 시집간 딸들마저도 멀리 하면서 한 줄 또 한 줄 허투루 하지 않았다. 해가 가면서 제법 불어나는 글줄이 보람이었다.


좋은 글 한 편 쓸 수 있는 날이 언제일까 기다리던 지난 해 봄이었다. 예기치 않은 큰 수술을 받게 되면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원고청탁을 받을 때마다 구차스런 이 핑계 저 핑계를 댔다. 그런 날이면 성실치 못한 자신의 대답이 아픔으로 가슴을 허비었다.


매화향 분분하던 올해 봄이다. 꽃마중 가겠다고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다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루하루 좋아지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허리통증으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스물네 시간 내내 진통제를 맞고 있어도 수그러들지 않기를 석 달여, 병치레가 잦았어도 이토록 혹독한 통증은 처음이었다. 


35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왔다. 기상캐스터는 몇 십 년 만의 기록이라고 전했지만, 에어컨의 냉기마저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쇠약해졌다. 속수무책,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혹서는 언젠가는 지나갈 테지만 가늠할 수도 없는 통증은 막막했다. 긴 여름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봄 가고 여름 가더니 어느새 가을도 깊어졌다. 나름대로 글 줍기에 매진한다고 했지만 게으름 피운 날들이 어찌 없었을까, 거동을 못하다 보니 지난날이 아쉽기만 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현종 시인의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떠올린다. 언제까지 가버린 날들을 반추하며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록 불편한 상황이어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읊조리며 현실에 어울리는 방도(方途)를 찾고 싶었다.


처음 한동안은 열망해오던 ‘음악과 독서’에 빠졌다. 진수성찬도 몇 날이지 송충이는 솔잎이 제격인가 보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운 채로 워드를 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미의 말을 귀담아 들은 큰아들이 며칠 동안이나 인터넷을 검색해봤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없더라고 했다. 막내아들까지 머리를 맞대고,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그 모양대로 마분지에 본을 떠서 가위로 재단을 하고, 테이프로 잇고, 각을 세워 내 몸판에 씌워봤다. 그럴싸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던가.


여러 날 벼르던 막내가 마침내 ‘침상용 컴퓨터책상’ 들고 나타났다. 어미의 생각을 이루어준 것이다. 하얀 페인트로 말끔하게 단장을 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어린애들이 바닥에 놓고 쓰는 두레기상 같다. 그 책상을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몸판 위에 놓고, 그 상판 위에 자판기를 세워 왼손으로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자판을 두드리게 한다. 모니터가 놓인 데스크는 침대 오른편으로 놓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돌리면 모니터에 뜨는 글씨를 읽을 수 있으니 안성맞춤이다. 누워서 모니터를 바라보게 되어 눈이 조금 피로한 것 외에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ㄱ ․ ㄴ ․ ㄷ.


한 자, 한 자씩 모니터에 떠오를 때면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빨리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라는 신호 같기도 하고, 밝은 미래를 예견하는 손짓 같기도 하다. 때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연필 쥔 내 손을 꼭 잡고서 ㄱ ㄴ ㄷ을 익히게 하는 앎의 길잡이가 되셨고, 이제는 어려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삶의 수용으로써 ㄹ ㅁ ㅂ을 새롭게 익히고 있다.


두 손을 써 오던 그동안에 비해 속도감이 없는 독수리 타법이라지만 어떠하랴. 자음 하나 모음 하나가 어우러져 글꼴을 이루고 한 글자 또 한 글자 나란히 옆줄로 늘어서니 티끌 모아 태산이 되고, 빗방울 모여 강을 이루듯 글자가 모아진다. 어제처럼 오늘도 나는 글자를 모은다. 다른 사람이 보면 웃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기쁨이요 감사가 넘치는 것을.


그악스럽던 통증도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다. 아직도 나를 못 잊어 그럴까, 가끔씩은 통증이 성깔을 부리지만 잘 지내보자고 다독인다. 그러노라면 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우는 날도 머지않았으려니 싶다.


며칠째 모니터를 바라보며 해실거리는 나한테 아들들은 “우리 어머니 명작 탄생 중”이라면서 너스레를 떤다. 명작은 아니어도 자판을 넘나드는 손길이 바빠지니 어찌 대견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내 삶의 순항은 계속될 것이니 한 10년쯤 훨씬 지나서 옛 이야기 하듯 그때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바람처럼 스쳐 지났노라고.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 인 것을’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마우스를 이동시켜 커서를 ‘저장’에 맞춰놓고, ‘끄기’를 클릭한다. 웅-소리와 함께 오늘도 보이지 않는 글의 낱알이 ‘저장’에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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