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가마와 꽃상여> -무섬 마을을 돌아 보고- /구연식
영주 무섬마을은 조선 중기(17세기)에 입향시조(入鄕始祖) 박수(朴燧)와 김대(金臺)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세거(世居) 집성촌이다.
태백산에서 싣고 온 금모래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싣고 온 은모래 서천이 만나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서로 안고 휘감아 돌아 산수의 경치가 절경을 이룬다.
금모래와 은모래가 만든 황금 설탕을 오늘도 무섬마을에 듬뿍 쌓아놓아 부자마을을 만든다. 마을은 동쪽으로만 육지로 이어져 있을 뿐 삼면은 물로 둘러싸여 있어 외나무다리가 유일한 통로로, 주민들은 400여 년간 짚신에서 고무신 그리고 케미컬 슈즈로 밟고 다녔다.
지금도 40여 채 전통 가옥들이 오순도순 이마를 맞대고 살아가는 곳이다.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는 첫새벽 닭이 울면 바빠진다. 아침 물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가려도, 소나기가 억세게 퍼부어도, 낙엽들이 돌개바람에 휘날려도, 함박눈이 아스라이 내려와도 할머니의 허연 머릿속 꼬불꼬불한 가르마처럼 살며시 얼굴을 드러낸다. 이렇게 외나무다리는 사시사철 하루를 시작하는 마을의 싸리문을 열어 준다.
무섬마을 고샅길을 걷다 보면 작은 팻말 또는 홍보 광고지에는 ‘꽃가마와 꽃상여가’가 눈에 띈다. 그리고 외나무다리 입구에는 거대한 모래탑을 만들어 한쪽에는 꽃가마를 다른 쪽에는 꽃상여 모래 조각상 포토 존을 설치해 놓아, 사진 찍기에 줄을 길게 섰다.
외나무다리의 또 다른 상징과 애환을 절규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꽃상여는 남녀 공통이지만, 꽃 가마는 과년이 된 여자에게 혼인 예식의 표상이다.
전통사회에서 우리 민족은 혼기가 찬 딸에게 시집을 보낼 때는 불문율이 있다. 일부종사의 원칙에서 족보와 호적에서 사라지게 된다. ‘눈멀어 삼 년, 귀먹어 삼 년, 벙어리 삼 년’을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한다면서 일방적 희생을 강요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시댁 대문 문턱을 밟고 나오지 말고, 그 집 귀신이 되어서 그 집 선산에 묻히라고 한다. 마음에도 없고 가슴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억지소리로 어쩌면 생의 마지막이 될 줄 모르는 딸내미를 쓰다듬으면서 꽃가마를 부여잡고 시집을 보냈다.
친정어머니는 산마루에서 가마가 가물가물할 때까지 서 있다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집에 돌아와 딸내미 시댁 쪽 하늘을 바라보다가, 지쳐서 마루 기둥에 기대어 스르르 잠이 든다.
그렇게 낯설고 물선 이곳 무섬마을에 시집온 새댁은 뒷간 갈 때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면, 친정집 마루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치마폭에서 달을 보던 추억에 사로잡혀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달 얼굴이 어머니 얼굴로 착각되어 앞치마로 눈물 닦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달이 뜨지 않거나 구름 낀 날은 공연한 방정맞은 생각에 불안한 마음으로 잠을 설치게 한다. 검정 고무신 수십 켤레가 닳도록 걸었던 외나무다리를 마을의 제방에서 바라보니 구불구불하고 길게 늘어져서, 친정어머니가 혼숫감으로 지어 주었던 저고리의 옷고름 같아 또 한 번 목젖을 울컥하게 한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피붙이의 새로운 정이 솟아나고 체념 속에 서러운 정도 무디어져서 차츰 멀어지게 된다.
무섬마을은 육지 속의 오지로 특히 여자들에게는 외지에서 시집와 이곳에 갇혀 살았으며,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한과 서러움으로 녹이면서 한세월을 보낸다.
어느덧 자식들의 울타리 속에서 잊으면서 노년을 맞게 된다. 그 옛날 친정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남매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친정집 담장은 무너지고, 마당에는 잡초가 지나간 세월의 한 인양 무성하여 콩나물시루처럼 꽉 채워져 발 디딜 틈도 없다.
이제는 꽃가마 타고 왔던 외나무다리를 꽃상여 타고 나갈 날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마을 앞 무섬천 물처럼 가슴을 후벼 파고 흘러갔다. 하고 많은 사연도 저 모래알보다 더 많아 북망산천 가는 길에 깔아도 남을 것 같다.
이렇게 지형지물은 그 시대 인간 삶의 형태에 따라서 관점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편협된 사상을 모두에게 공유시키려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영주 무섬마을의 불모지에 처음 입주해서 현재까지 무위자연 속에서 순수한 인간 삶의 터전을 닦고 유지해 왔음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남존여비의 전통사회에도 여성권리 옹호, 문맹 퇴치와 일제강점기에 민족부흥에 앞장섰던 ‘아도서숙(亞島書塾)’ 등은 오지의 민족유적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렇게 민족문화 유산들은 대승적 차원에서 평가하고 유지됨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것을 뒷바라지했던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작은 고통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위대한 금자탑도 아래의 작은 지대석(址臺石)들의 인고 없이는 불가능하다. (202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