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담장 서울 전일중학교 강예진
손등 위로 섬유의 재질이 느껴진다. 귓속에서 자꾸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햇살이 내 눈을 간지럽힌다. 아아, 이 느낌 뭔지 알 것 같다.
‘아침이구나.’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오늘따라 더 발이 무거운 게 날씨와는 다르다. 밖으로 나오자 조그만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여름이 온 것을 알려주듯 짙푸른 담쟁이넝쿨 안에 할머니와 닮은 나팔꽃이 입을 벌리고 있다. 천천히 담장으로 다가간다. 조금씩 화려해져 가는 나팔꽃에 마음이 시큰하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은 한없이 높다란 담장으로 막혀 있었다. 아침에 항상 일어나 보면 나를 반겨주는 것은 오직 무거운 적막뿐이었다. 어린 나로서는 그런 고요함이 매우 싫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높은 담장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할머니, 놀러가도 돼요?”
나는 거의 매일 담장 앞에서 할머니를 불렀던 것 같다. 그러면 할머니는 따뜻함이 서린 목소리로 이렇게 맞아 주었다.
“그래,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과자 사놨다. 빨리 와서 먹어라.”
할머니와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노는 것은 나의 일상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잘 가지 않던 시간은 참 빨리 지나갔다.
내가 할머니에게 맡겨진 건 어렸을 때이다. 우리 집은 골목 깊숙이 숨어 있었고 집안 형편상 엄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어린 나를 옆집 할머니에게 거의 맡기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절대로 친해지지 않을 것만 같던 할머니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어릴 적 단짝이 되어 주었다. 하루 종일 놀아도 지루하기는커녕 재미있었고, 가지고 있던 비밀도 모두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누구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높게만 보이던 담장이 점차 작아질 무렵, 나와 할머니의 관계는 점점 틀어졌다.
“아니, 머리가 왜 이렇게 기니? 좀 잘라라. 치마는 또 왜 이 모양이고….”
학교에 갈 때마다 혀를 쯧쯧 차며 나를 위해 해주는 말은, 내게는 지루한 잔소리로 들려왔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무시하는 일. 방에만 앉아 있으면 할머니의 잔소리 따위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할머니가 아닌 반 친구가 있었으니까.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학교에서 돌아와 마당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요즘 우리 예진이 얼굴 보기 힘드네. 좀 놀다 가지 않을래? 좋아하는 과자도 사놨는데….”
정말이지 할머니와 언제 이야기를 나눴는지 제대로 기억에 없었다. 오랜만에 본 할머니 얼굴에는 주름이 더 자글자글하게 피어 올라와 있었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 나는 가슴 한쪽이 답답해졌다. 조금 미안한 마음에 할머니를 따라갔다. 하지만 미안함도 잠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과자를 먹으면서 TV를 보고만 있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어색한 공기에 숨이 막혀왔다.
“요즘 학교생활은 어떠니?”
어색한 공기를 뚫고 먼저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냥, 똑같지 뭐….”
나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근데 너 입에 그게 뭐냐. 시뻘겋게 해 가지고…. 빨리 지워라. 왜 그런 걸 바르나 몰라.”
또 시작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끊는 할머니가 미웠다. 항상 내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그동안 속상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내게로 밀려 들어왔다.
“할머니가 뭔 상관이에요. 나만 이러는 줄 알아요? 진짜 짜증나!”
마음속에 있던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할머니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지금 바로 사과하자니 자존심이 안 된다고 소리쳤다. 나는 결국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른다. 문득 거울을 보니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다음번에 만났을 때 사과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그 뒤로 할머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시험이다, 수행평가다 해서 나름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일하고 돌아온 엄마의 손에는 작은 선물용 음료수 박스가 들려 있었다. 나는 궁금했다. 웬 음료수? 엄마는 간식을 잘 사주지 않는다. 특히 이런 선물같이 생긴 게 내 것일 리가 없었다.
“엄마, 이거 누구 거야?”
엄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엄마는 차마 말할 수 없는지 조금 얼버무렸다.
“어… 그게, 옆집 할머니께서 아프신가봐. 치매 진단을 받으셨다는데, 이거 네가 좀 갖다 드려.”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심히 지내던 시간 속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있었다. 나는 곧장 담장으로 다가갔다.
“할머니, 저 예진이에요. 놀러가도 돼요?”
나는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당에 계신 할머니가 분명히 나를 보았을 텐데 못 알아보는 듯했다. 머리가 다시 어지러웠다. 혹시 할머니를 저렇게 만든 것이 나인 것만 같아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할머니….”
사랑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오고, 우리들은 다만 그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볼 뿐이라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담장에 핀 나팔꽃 위로 자꾸만 눈물이 투두둑, 떨어진다. 지금, 할머니의 시선은 흐려 있지만 할머니를 닮은 나팔꽃은 여름이 다가온 걸 알려주듯 활짝 피어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