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
항우는 팽성대전에서 60만 대군을 3만 오천으로 박살냈습니다. 그 전투에서 60명이나 되는 한의 장수들이 항우 하나에게 모두 패배했습니다.
소설상으로는, 800번의 전투를 해하의 전투 빼고는 전승합니다. (역사책은 70회.)
성을 빼앗기면 힘으로 부숴버렸고, 복병이 나타나도 힘으로 박살내고, 협공을 당해도 힘으로 무너뜨리고, 포위를 당해도 힘으로 뚫어버리는 괴물같은 막강함을 가지죠.
후에 120만 군사의 포위망에 25만 병력 다 잃고 수하에 딱 28기 남았을때, 그들을 고향 강남으로 되돌려 보내준다고 수천을 베면서 포위망 돌파하니 죽은 병사는 딱 2명.. 항우의 힘때문에 26명의 부하가 배타고 다 탈출한 뒤에도 한의 병사들은 그가 자결할때까지 아무도 건들지 못하죠.
초한지의 거의 모든 장수는 한두명만 빼면 아무리 S급이라 할지라도 (삼국지의 장료, 하후연, 장비 정도?) 10합 이상을 버티지를 못하고 전부 패배합니다.
예로, 제갈량이 말하길, 마초의 용맹은 초한지의 경포와 팽월 비할정도로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연의상에서 마초는 장비, 관우에 필적하죠. 그런데 초한지에서도 경포와 팽월 같은 장수는 S급으로 약 열명정도가 있습니다. 해하의 전투에서, 그 여덞명이 항우에게 모두 한꺼번에 덤비는데 얼마 못버티고 도망칩니다.
마초급(장비, 관우급)의 장수 8명을 패배시킨 항우입니다. 초한지 전체를 통틀어 항우가 일기토에서 도망친 적은 한번도 없죠. 왠만한 S급(관우, 장비급)의 장수들도 초한지에서는 항우만 보면 다 도망칩니다.
여포도 조조와의 싸움에서 6:1 일기토에서 패배하고 유비와도 일기토 3:1에서 패배하는 것에 비해 대조적. 그리고 항우는 후퇴한 적도 없고 일단 가로막으면 100% 다 베어버렸기 때문에 여러번 도망도 치고 패배도 많이한 여포에 비해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나 우세라고 생각.
게다가 오추마는 소설에 따르면 용이었다고 하니.. 적토마보다 뛰어날 거라고 (소설상에서) 점쳐집니다.
장량이 중국의 3대 전략가로 불립니다만 항우한테 모든 전투에서 다 패배하고 단 한번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지략과 군략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들 항우가 너무 괴물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소설상의 제갈량이라도 위나라에 항우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전패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전략을 짜도, 계략을 짜내도 그냥 '힘'에 모조리 무너져버렸으니까요.
VS
척준경
. 단기필두로 포로를 되찾다.
국경선까지 남진한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임간을 파견했다가 임간이 대패하여 군진이 무너졌을 때 당시 중추원별가였던 척준경이 홀로 말을 타고 돌격하여 여진 선봉장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힌 고려군 200명을 빼앗아 왔다.
2. 홀로 성을 빼았다.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이 석성에 웅거하여 별무반의 앞길을 가로막자 윤관이 전전긍긍하였다. 이에 부관이었던 척준경이 이르기를 "신에게 보졸의 갑옷과 방패하나만 주시면 성문을 열어 보겠나이다" 라고 호언하였다. 척준경이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성벽으로 올라가 추장과 장군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성문을 열어 고려군이 성을 함락하였다
3. 100기로 5만의 포위를 뚫다.
윤관과 오연총이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협곡을 지나다가 5만에 달하는 여진족의 기습에 고려군이 다 무너져 겨우 1000여 명만 남았고, 오연총도 화살에 맞아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 척준경이 즉시 100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이에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이 이르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으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라! 나는 이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사내의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라고 소리치며 우뢰와같은 기합과 함께 100여기의 기병과 여진족의 후미를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척준경은 단숨에 여진족 부관 10여명을 참살하고 적장을 활로 쏘아 거꾸러 뜨렸다. 척준경과 10명의 용사들이 분투하여 최홍정과 이관진이 구원하고 윤관은 목숨을 건졌다. (이 일로 윤관은 척준경과 부자의 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4. 100기로 2만군을 물러가게 하다.
여진족 보병과 기병 2만이 영주성 남쪽에 나타나 고려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윤관과 임언이 방어만 하려고 하자, 척준경은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만일 출전하지 않고 있다가 적병은 날로 증가하고 성안의 양식은 다하여 원군도 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찌합니까. 공들은 지난 날의 승첩을 보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또 죽음을 힘을 다하여 싸울터이니 청컨데 공들은 성 위에서 보고 계십시오." 척준경이 결사대 100기를 이끌고 성을 나가 분전하여 적의 선봉장을 참살하고 적들을 패주시켰다.
5. 원군을 위해 홀로 적진을 뚫다.
척준경이 방어하고 있던 성이 포위되고 군량이 다해가자 지휘를 부관에게 맞기고 척준경은 원군을 부르기 위하여 사졸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적진을 돌파하여 원군을 부르고 당도하여 원군과 함께 성을 포위하던 여진족들을 격파하였다.
6. 인종을 구해라
1126년 5월, 이자겸이 인종을 시해하려 수백의 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편으로는 인종이 달아날것을 우려하여 자객 다섯명을 어전(왕의 거처)으로 미리 보내었다. 어전 내부는 유혈이 낭자하여 내시와 궁녀들이 살해당하였다. 자객들이 인종에게 다가가려 하자 왕을 모시는 상선(내시 우두머리)이 두 팔을 벌려 자객들을 가로막고 버티었다. 이에 자객 우두머리 주충이 일시에 상선의 목을 잘라버리니 이제 어전에는 인종과 사관밖에 남지않았다. 자객들이 인종을 시해하려 에워싸려 하자 인종은 대경실색하여 문밖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그 순간 어전문이 통째로 박살나며 한 거구가 손에 피묻은 거대한 태도를 든 채로 숨을 가쁘게 쉬며 들어섰다. 거구는 문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인종을 향해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폐하! 신 척준경이 왔사옵니다! " 척준경의 갑옷은 이미 한차례 전투를 벌였는지 넝마가 되어있었고, 투구는 고사하고상투가 잘려 봉두난발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마치 그 모습이 조조의 장수 악래 전위가 현신한 듯 하여 자객들과 주충은 감히 먼저 공격하지 못했다.척준경은 즉시 인종을 등 뒤로 숨기고 자객들에게 달려들어 두명을 베어넘기고 삽시간에 나머지 세명 모두 죽이고 인종을 구하였다. 이 공으로 인종은 척준경을 <추충 정국 협모 동덕 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권세를 함부로 부려 인종의 미움을 받다가 1127년에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功)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萬世)의 죄다.”라는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고, 이듬해 곡주로 이배되었다. 1130년에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하여 처자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었다.
1144년에 지난날의 공으로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에 기용되었다가 곧 죽었다.
실제 고려사에 나온 척준경에 대한 글이 이정도 남아있고 본다면 미쳐 기록되지 못한 그의 업적이 얼마나 거대할지 한번 생각해본다. 또한, 고려나 조선사를 보면 역적의 삶이나 공따위는 감히 역사에 남기지 않는 전통아닌 전통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한때 ' 역적 ' 이였던 척준경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본다면 고려또한 그를 진정 ' 영웅 ' 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참, 말을 못한게 있다면 비록 척준경은 유배생활로써 허무한 죽음 맞게되지만 후일 고려왕이 다시 그의 공을 인정하여 고려 본토에 불러드려 묘를 마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