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 이진경, 새길, 1997.
이 책의 저자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당 주제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서술하여 소개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전공이 사회학이지만, 영화와 철학 그리고 수학 등에 관해 깊이 있게 분석하는 책들이 적지 않게 출간되어 있다. 물론 사회학 분야의 책은 본명(박태호)이 적시되어 있지만, 그밖의 분야는 필명(이진경)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30여 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은 영화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독자로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1990년대 전반에 상영되었던 7편의 영화를 당시 새롭게 소개된 ‘근대 이후의 사상(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개념들로 분석하고자 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근대 이전의 대중들이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농민의 신분으로 주로 토지에 얽매어 있었다면, 근대의 대중들은 노동력을 기반으로 공장에 취직하여 그 임금으로 생활해야만 하는 존재들이었다고 하겠다. 그렇기에 ‘근대 이후’를 주장하는 사상은 대중들이 한정된 규율이나 공간으로 벗어나는 ‘탈주’가 중요하며,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떠돌며 사는 ‘유목’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지금은 다양한 방법론 가운데 하나의 관점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 책이 출간될 당시 ‘탈주’와 ‘유목’으로 대변되는 표현들이 ‘근대 이후’를 진단하는 것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사상을 번역하여 소개하는데, 이 책의 저자가 큰 몫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지하듯이 ‘탈주’란 얽매어있던 공간 혹은 역할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을 영화에 접목하기 위해, 저자는 모두 7편의 영화를 선정하여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예컨대 교육 현장의 억압적인 현실을 깨고자 했던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인 <벽(The Wall)>을 영상으로 꾸민 앨런 파커의 ‘영화 영상(Music Video)’이 맨 처음 분석 대상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어서 가상 현실을 다룬 두편의 영화인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와 폴 버호벤의 <토탈 리콜>의 내용과 그 의미를 저자의 관점에서 분석의 자료로 삼고 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각각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와 렌 와이즈먼 감독의 <토탈 리콜>의 속편으로 제작된 바 있다. 속편으로 제작될 만큼 원작의 내용이 매력적이었음을 드러냈다고 이해된다.
여기에 1929년 대공황을 배경으로 당시 사회를 풍자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그리고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인 카프카를 떠올리게 하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카프카>를 통해 ‘근대 이후’의 탈주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를 해석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자살로 가족을 이끌어가는 길버트를 등장시킨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길버트 그레으프>, 잔혹하면서 폭력적인 내용으로 이른바 ‘컬트 영화’로 분류되는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 연인> 등이 이 책에서 다뤄지는 작품들이다. 대상 작품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영화를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기에, 해당 영화들은 관객 입장에서 자유롭게 접근하고 감상할 수 있음을 물론이다.
저자는 ‘탈주’를 정의하면서 ‘현존하는 세계를 질서짓고 그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선을 허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의 내용이 ‘영화의 철학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영화’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영화를 분석하는데 다양한 철학과 사상들에 관한 주석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당시 저자가 열정적으로 번역하여 소개하던 ‘근대 이후 사상(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 개념을 설명할 수 있도록, 그에 적절한 영화들을 선택하여 소개하고 있다고 파악된다. 하지만 그러한 개념들이 다양한 방법론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지금의 시점에서, 대상 작품을 분석하는 저자의 관점 또한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이해된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