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1) 견인의 교리는 성화가 아니라 복음의 일부입니다.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면 복음이 능력일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이기고 순종하지 않아도 천국에 간다면 복음이 굳이 능력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면 하나님은 행한 대로 심판하는 분이라는 사실도 무의미해집니다. 믿기만 하면 죄를 지어도 천국에는 간다고 하니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도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을 통해 굳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견인의 교리는 복음 안에 깊이 스며들어가 있는 진리입니다. 복음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복음진리의 일부입니다.
김세윤 교수님이 잘 설명한 대로 구원은 구원의 서정보다는 칭의론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구원은 과거적 칭의인 "의의 선물"(롬5:17), 현재적 칭의인 "의의 열매"(빌1:11), 미래적 칭의인 "의의 소망"(갈5:5)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얻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홍인규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6장(특별히 6:12-23)에 근거하여, 많은 학자들은 칭의(justification)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고 그 뒤에는 성화(sanctification)가 뒤따른다고 생각한다(예. Bruce, Murray). 그러나 성화를 단순히 칭의의 다음 단계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는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통치 안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된 관심은, 완전에 이르는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단회적 종말론적 구원행위를 항상 새롭게 붙잡는 데 있다. 그렇다면, 성화라는 것은 칭의와 동시에 시작되어 칭의 때 일어난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출을 언제나 새롭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처럼 칭의와 성화 즉 의의 선물과 의의 열매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의의 열매를 맺어야 의의 소망(궁극적인 칭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의의 열매가 자동적으로 맺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릇된 선택을 하여 버림받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복음 안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없다는 오류는 성화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복음진리만 바르게 알아도 견인의 교리에 대한 케케묵은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견인의 교리를 여러분에게 밝히 보여드리길 원합니다.
1) 칭의를 받은 자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궁극적인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6장은 단순히 성화를 기술한 장이 아닙니다. 복음을 설명한 장입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먼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그 후 거기서 파생되는 실천적인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미래의 부활에 참여하는 필수적인 요건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훗날 저절로 부활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요5:28-29, 빌3:10-11). 이 장의 후반부에 이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6:15-16)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6:19-22)
이런 진리는 로마서 8장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2-14)
그리고 로마서 11장에 다시 한 번 나타납니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11:20-22)
권연경 교수님은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바울서신을 포함하여 성경은 분명 종말론적 구원(부활에 참여함)을 두고 행위를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진술들이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칼빈도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묘사하는 성경구절이 많다는 사실을 두고 고민하면서 결국 행위가 구원의 '필수적 과정'이며 '부차적 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홍인규 교수님과 같은 국내 보수학자들도 이것을 당연한 진리로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중 계속 은혜를 의지하여 말씀대로 사는 사람만 천국에 들어갑니다(마7:21).
2) 칭의를 받은 후 자동적으로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새 언약이 약속한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므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혹은 자동적으로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열매 중 '열매'(갈5:22)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성령이 '자연스럽게' 혹은 '필연적으로' 열매를 맺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가 자동적으로 맺히고 자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의도한 것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라는 명령이 보여주듯이 성려의 열매는 성령을 따라 행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결코 자동으로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는 죄에서 자유케 됩니다. 그러나 죄성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즉 '몸의 구속'까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롬8:23).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자유의지가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로도 계속 바른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로마서 6장에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6:11-13)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롬6:17-19)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다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4절)고 하면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절)라는 말로 바른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구원받은 후 우리는 육체와 성령 사이에서 날마다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동적으로 그리고 저절로 말씀대로 살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에 대해 홍인규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율법이 아무 정죄도 선언할 수 없는) 덕행들을 자동적으로 생산하도록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갈5: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 ')에서 육체가 갈라디아인들(즉,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인 생활에 심각한 위협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이미 성령의 영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권연경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행위가 칭의의 '필연적 결과'라는 발상은 신학적 도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목회적으로는 매우 위험하다. 바울의 목회적 투쟁이 보여주듯, 그리고 실제 우리의 목회적 경험이 실증하듯, 참된 믿음이 '필연적으로' 선행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두 가지를 함께 묶어서 생각해봅시다. '칭의를 받은 자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궁극적인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이기고 순종한 사람만 궁극적인 칭의를 받습니다. 또한, '칭의를 받으면 그 후 자동적으로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바른 선택을 해야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칭의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자연스럽게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과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현저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대로 육체의 현저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이래도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입니까?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3) 바울의 경고는 무늬만 신자가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칼빈주의에 세뇌가 된 사람들은 아무리 진리를 선명하게 설명해 주어도 순순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깨끗이 인정하는 대신 버림받는 사람들이 애초부터 칭의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둘러댑니다. 무늬만 신자였지 진정한 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지요?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적으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경고는 모두 구원받은 신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명목상의 신자가 아니라 칭의를 받은 신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것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세 번이나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6:11-14)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6:15-16)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6:17-22)
이처럼 로마서 6장에 나오는 경고들은 명목상의 신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명목상의 신자가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나요? 없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한 권면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경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바울이 경고한 대상도 구원받은 신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에 세 번 나오는데 역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 의미가 명백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3:1-5)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갈4:8-9)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갈5:7)
따라서 이와 같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문맥에 반하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한다면, 그리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성경으로 인정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칼빈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행히 요즘은 성경을 문맥을 따라 정직하게 보고 칼빈의 오류를 인정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실력 있는 성서신학자들 가운데 그런 흐름이 두드러집니다. 제가 이 설교에서 자주 인용한 김세윤 교수님과 권연경 교수님은 물론 양용의 교수님도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배경은 대부분 장로교입니다. 물론 백석 교단의 홍인규 교수님은 로마서를 강해할 때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율법과 복음』이라는 책에서는 거듭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8에서 만약 믿는 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면, 그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6:8b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말한다. ...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나 육체의 영향력에 굴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의 혜택을 포기하고, 육체 아래의 옛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율법이 완성되지 못하고 육체의 일을 생산함으로, 정죄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19-21b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6:8a도 동일한 선언을 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cf. 롬8:1-4, 13:8-14:12)."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와 마귀적인 세력 아래와 율법의 저주 아래로부터의 구원의 보존을 위해서는 사랑을 통한 율법의 완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자유는 안전이 보장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상실될 수도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육체에 굴복하여 사로잡히게 되면, 즉각적인 결과는 자유의 상실이다. 이것은 곧 이 악한 세상에서의 옛 노예 상태로의 복귀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21b은 육체의 일을 산출하는 자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경고한다(cf. 고전6:9-10, 엡5:5).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고전15:24) 영광 가운데 나타날 종말론적인 나라를 가리킨다. 이 나라를 상속하는 것은 공관복음서의 표현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예를 들면, 막10:15, 마7:21, 18:8 이하, 19:17).
이상의 우리 주장을 정리하면, 미래 종말론적인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육체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믿는 자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율법은 완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보존하는 길이요, 장차 완성될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여러분, 이것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후자지요! 그래서 저는 홍인규 교수님이 백석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비난할 마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교단의 이대위에서 두 해 동안 조사를 받았고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한 것 외에는 차이가 없는데도 제명 출교까지 당하고 그 뒤 통합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까지 매도된 저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한국 교회와 뭇 성도들의 영혼의 안전을 위해 김세윤 교수님과 권연경 교수님처럼 용감하게 칼빈의 오류에 맞서는 분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세윤 교수님의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적어도 우리 개신교들에게는 어떤 교회사의 인물도 성경보다 더 위대하고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이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좀 일방적인) 예정론을 추종하기 위해 성경에 분명히 구원의 은혜로부터 탈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가르침을 피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대원칙들 중 하나가 '성경대로만'(sola scriptura)입니다. 교회의 전통보다 성경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의 일부가 자신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중세 카톨릭교회의 신학방법에 빠졌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나 교회의 전통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했던 것처럼, 지금 (한국) 장로교의 일부는 오로지 칼빈 또는 이른바 '칼빈주의' 신학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칼빈이 ... 모든 진리를 다 터득한 것은 아닙니다. 칼빈 이후 지난 500년 동안에 많은 신학자들도 성경의 상당한 진리들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만'의 원칙에 굳건히 서서, 우리 이전의, 또 우리와 동시대의 신학자들이 산고 끝에 찾아낸 신학적 진리들을 겸허하게 경청하고 수용하면서 동시에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고 새로운 진리들을 부단히 터득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잘 기억해두셨다가 개인적으로 널리 전하십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을 펼치고 세 가지만 기억하셨다가 설명하시면 됩니다.
1) 칭의를 받은 자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궁극적인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니다(근거-롬6:15-16).
2) 칭의를 받은 후 자동적으로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다(근거-롬6:11-13).
3) 바울의 경고는 무늬만 신자가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근거-롬6:17-19).
그러므로 절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며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 이렇게 전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