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2) 장구한 견인의 교리 논쟁을 끝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
3) 바울의 고백의 의미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칼빈주의자들이 이 구절을 곡해한 것은 그 전에 나오는 '달음질'의 의미는 바르게 파악했으나 '상'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상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비유이므로 실제로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해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에 나오는 '버림'은 상을 받지 못하거나 쓰임에서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버림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용한 표현을 조금만 주목해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상 받지 못할까 봐' 혹은 '더 이상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는 "상 받지 못하는 것은 몰라도 쓰임받지 못하는 것은 버림받는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할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총신대 이한수 교수님이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은 남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스스로 버림이 될까 우려워하기 때문이다(27절). '버림이 되다'(아도키모스)는 말은 본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보통 자격상실을 지칭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단순히 주님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사람이 얻을 상급을 상실하는 정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고전 3:15 참조) 또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하나님 주신 직분에 부적격한 자로 판명되어 자격을 상실하는 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바울서신에서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완전히 내버리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가 많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에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을 '버리우는 일'로 번역하였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다시 말해서 사람이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를 - 즉, 고린도 교회의 경우 죄를 회개함으로 - 확증하지 못하면 그는 버리운 자인 것이다. 로마서 1:28에서 '상실한 마음'(아도키몬 눈)이라는 말은 하나님 믿기를 거절하고 불의를 좇는 불신자들의 타락한 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버리실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총신대 교수님이 이렇게 쓰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추가로 약간 더 설명을 드리면 바울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복음전파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과 자신이 버림받는 것을 대조하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에 나오는 '버림'은 쓰임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영호니 버림받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4) 앞의 문맥에 의한 확증
27절에 나온 바울의 고백이 상이나 쓰임이 아니라 영혼이 버림받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24-27절뿐 아니라 그 전과 후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그 전에 나오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19-23)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이 단지 '뭇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23절) 즉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 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라는 권면과도 일치합니다. 그래서 홍인규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이 되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여, 그들과 함께 복음이 주는 최종적인 복에 참여하려는(나누려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9:23, 참조 6:9-11)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런 종말론적인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절제하라고 권면한다."
이처럼 문맥에 의하면, 9장 24-27절은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 즉 버림받지 않고 궁극적인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27절에 나오는 '버림'은 상을 받지 못하거나 쓰임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버림받는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5) 뒤의 문맥을 통한 재확증
앞의 문맥뿐 아니라 뒤의 문맥도 바울의 고백에 나오는 '버림'(고전 9:27)이 영혼이 버림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고백을 한 후 10장에서 바울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중의 다수가 멸망받았으며, 그것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거울과 경계로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사건들이 신약의 성도들을 교훈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대한 바울의 관점입니다(딤후 3:15-17).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구약과 신약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즉 옛 언약하에서는 사울 왕처럼 버림받는 것이 가능했지만 새 언약하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견해는 바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3-4장에 의하면 우리는 같은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브리서 4:2)
여기서 '그들'은 3장에서 언급한 광야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을 전해 들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같은 출발점에 놓고 있습니다.' 양용의 교수님이 잘 지적한 대로 '출애굽 세대가 실패한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 자체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순종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들처럼 버림받고 멸망받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1-4)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출애굽과 광야시대에 일어난 일을 기독교의 성례전적 용어를 빌려서 설명합니다. 바울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약시대의 성도들처럼 세례를 받고 성찬을 경험한 사람들로 이해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세례와 성찬에 관한 한 그들과 신약의 성도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악을 즐겨 행함으로 넘어져 멸망했다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당연히 그런 위험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라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 다수가 멸망받은 사실을 기록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10:6)
연이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악을 구체적으로 4가지로 적시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0:7-10)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1-12)
그러니 버림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있다는 말이지요! 심지어 백석대 홍인규 교수님조차 12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유혹과 위험이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미래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정기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며 많은 성령의 은사들을 경험하였다 할지라도, 죄를 고집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의 신전에서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성례 참여와 신령한 체험들이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을 가져다준다는 잘못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 곧 '우리 조상들'이 많은 신령한 체험에도 불구하고 멸망한 것처럼, 그들도 넘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9장 27절에 나오는 '버림'은 영혼이 버림받는 것을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복음전도자 찰스 피니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찰스 피니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굳게 믿었다가 훗날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습니다. 그것이 은성을 비롯한 타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한 피니의 책들에는 나오지 않지만, 3년 전 큰믿음출판사에서 출판한 『주여! 내 마음을 살피사』라는 책에는 수차례에 걸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책에서 찰스 피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초기에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더 많은 성경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뒷받침할 많은 성경구절들이 있습니다(겔 18:21-29, 33:12-16, 렘 6:30)."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대하시는 것처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 말에 반대하여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만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이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라는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지금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그렇게 되면 하나님 복음의 약속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붙들 수 있는 사람만 내가 붙들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더 깊은 묵상과 기도와 더 깊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패러다임의 전환이 왔습니다. 제 영으로 무엇이 정확한 진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라는 말이 하나님의 통치원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위대한 전도자 피니에게 일어난 이런 변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세윤, 권연경, 홍인규, 김동수, 김경규, 양용의 교수님도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특히 이한수 교수님의 변화가 감격스럽습니다. 이한수 교수님은 총신대하교 신학대학원(합동)의 신약학 교수입니다. 또한 목회신학전문대학원의 원장입니다. 그런 분이 『교회의 세속화 문제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놀랍게도 고린도전서 10장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구약의 교훈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보다 분명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이 신약 성도들이 지니는 축복이요 특권이다.
그러나 이 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성도들은 실패하고 범죄할 가능성이 훨씬 많았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보다 분명한 축복과 넘치는 은혜 속에서 살기 때문에 그들처럼 실패하고 범죄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요점은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교훈들을 보다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고 구약의 사건들을 거울삼아 더욱 더 경성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악을 즐겨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고 한다면, 신약의 성도들은 그러한 심판을 면제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신분에 걸맞은 믿음과 순종이 요구된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도 그들의 신분에 걸맞은 믿음과 순종의 삶이 요구된다. 그러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등한히 할 때 신약의 성도들도 구약의 성도들이 당했던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 ...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신실하고 미쁘시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범죄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곤 한다. 사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미쁘시기 때문에 우리가 좀 범죄한다고 해서 금방 심판을 내리거나 우리를 버리시는 그런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이 비록 호세아를 버리고 방탕한 길로 갔을지라도 호세아는 끊임없이 자기 아내를 되찾아오려는 인내와 사랑을 보였다. 호세아가 보인 인내와 사랑의 태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호 3:1-3)...
그러나 인간들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시험하고 도용하려고 할 때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용서하시고 끝까지 그들에게 성실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선택 교리를 이런 식으로 도용하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의 성실성을 자신의 범죄의 기회로 이용하거나 돌이키지 않고 계속 범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심판을 경고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마서 11:22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분명히 전에 제가 이한수 교수님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로마서 주해)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그 책에서 이 교수님은 구원받은 사람은 버림받을 수 없다는 장로교 교리를 설파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서 찾아보았더니 그 책은 2008년도에 출판한 책입니다. 그리고 방금 인용한 글은 2012년에 출판한 책에 나옵니다. 아마도 그 사이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시다가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총신대 대학원의 교수님이 책에 공개적으로 이렇게 쓰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비로소 칠흑같이 어두운 한국 교회에 손바닥만 한 희망이 보입니다. 앞으로 진리가 계속 번져나갈 것이고 그 진리로 한국 교회가 개혁이 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