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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 문학방

단오날이라서 (디카시 & 에세이)

작성자햇살(서울)|작성시간26.06.20|조회수20 목록 댓글 2

 





" 다 맞힌 빙고 번호표를 들고
     나는 아직도 그곳에 서 있다."


비가 아침부터 가늘게 내렸다. 창밖의 나뭇잎들은 하루 종일 물기를 털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고향 친구들 카카오톡방에는 강릉 단오 얘기가 한창이었다. 누군가는 남대천 사진을 올렸고, 누군가는 올해도 사람이 많겠다고 했다.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창포 생각이 났다.
단오 하면 창포였다. 어른들은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릿결이 좋아진다고 했고, 아이들은 그 말보다 창포잎이 길고 날카롭게 생긴 것이 더 신기했다. 단오가 가까워지면 시장이며 길가며 어딘가에 창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들고 공원으로 나갔다. 지금쯤은 꽃이 피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창포가 있던 자리에는 잎만 무성했다. 긴 잎들은 비를 잔뜩 머금고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고, 꽃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벌써 다 지나갔나 싶었다. 단오가 아직 멀지 않았는데 꽃은 먼저 가버린 것 같아 괜히 서운했다.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풀숲 한쪽에서 젖은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꽃잎은 다 풀어져 있었고 끝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그 꽃을 보는 순간, 오래전 강릉 단오터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다. 단오장 한쪽에서 숫자 빙고를 하고 있었다. 종이판에 적힌 숫자 가운데 사회자가 부르는 번호를 하나씩 지워 가는 놀이였다. 가로나 세로, 사선으로 먼저 줄을 맞추면 되는 거였다. 나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숫자를 지웠다. 하나씩 지워질 때마다 가슴이 바빠졌다. 그러다 손을 번쩍 들었다. 다 맞았다.

“저요! 빙고! 저 다 됐어요!”
상품은 커다란 바케스였다. 지금 생각하면 플라스틱 통 하나였겠지만, 그때 내 눈에는 집 안의 큰 살림 하나쯤 되는 물건으로 보였다.
그런데 장사꾼은 내 번호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상품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다고 했다. 시간은 늦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걸 안다. 아이가 다 맞힌 것이 못마땅했거나, 바케스 하나가 아까웠던 모양이다. 엄마가 준 점심값은 빙고 종이 값으로 다 써버렸다. 바케스도 못 받고, 그날 나는 점심도 굶었다.

그날 이후 단오날은 내게 늘 조금 억울한 날이었다. 약장수의 구수한 만담, 밤낮없이 이어지던 굿판, 먼지 날리던 장터, 엿 냄새와 사람들 목소리 사이에 못 받은 바케스 하나가 오래 남아 있었다. 몇 해 전 다시 찾은 단오제는 사람도 많고 가게도 넘쳤지만, 이상하게 내가 알던 단오는 아니었다. 전국의 장날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했는데, 그 시끄러운 틈에서 예전의 흥은 보이지 않았다.

비 맞은 창포 한 송이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꽃은 다 지고, 단오날은 해마다 돌아오는데, 나는 아직도 그 빙고장에 망연히 서 있었다. 손에는 이미 다 맞힌 빙고 번호표를 들고, 눈앞에는 끝내 받지 못한  붉은 바케스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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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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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피안화,충북 | 작성시간 26.06.20 만덕하세요 선생님.🙏
  • 작성자대자연 | 작성시간 26.06.22 new 맞히고도 못 받은 바게쓰 상품에 점심까지 굶었던 옛 추억이
    님의 마음 한 구석에 아스라히 남아 있었던가 보군요 .
    그래도 추억였기에 한번쯤 회상해 보는 것이겠이지요 .
    글 잘 읽었습니다 . 오늘도 즐겁고 건강하게 유쾌한 날이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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