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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스크랩] 아, 스파르타쿠스 [ Spartacus ] / 영화 수록

작성자로자|작성시간10.09.04|조회수124 목록 댓글 0

"자유정신만은 승리...
미완의 혁명으로"


내가 어려서부터 투사였던 건 아니다.

그리스 산간의 평범한 목동이었던 나는 어느날 할아버지께 용맹스런
스파르타군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뛰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밤 잔인무도한 로마군이 쳐들어와 눈앞에서
부모님을 죽이고 날 노예로 끌고 갔다.

나는 오늘 결투에서 동포 검투사를 죽였다.
나는 그를 장례라도 치러주려 했으나 입회관은" 장례? 그건 사람에게나
치러주는 거야 !" 하고 조롱했다.

오, 로마여 !
나를 길러준 은인 로마여 !
순진한 목동에게 무쇠 골격과 돌심장을 준 자는 바로 로마이다.
검투장에서 악마같이 싸우며 사나운 누미디아 사자에게 겁없이
덤벼들도록 가르친 자가 바로 로마이다.

로마여 ! 이 스파르타쿠스는 누런 테베레 강물이 핏줄이 되어
그대의 핏덩이가 그 속 깊이 엉킬 때까지 그대에게 보복하지 않고는 참지 못한다.

동지들 !
스파르타는 죽었는가?
여러분의 핏줄을 흐르던 그리스인의 피는 마르고 말았는가?

동포여 ! 이제 결투를 하려거든 자신을 위해 싸우라.
죽여야 하겠거든 압제자를 살육하라.
만일 죽으려거든 영예로운 싸움에 죽음을 바쳐라 !


고대 로마의 노예반란 지도자.
국적 : 고대 로마
출생지 : 트라키아



트라키아에서 출생하였다. 중부 이탈리아 카푸아의 노예 검투사(劍鬪士) 양성소에 소속된 검투사였는데, BC 73년 70여 명의 동료 노예와 함께 양성소를 탈출, 목자(牧者) ·농노(農奴) ·빈농(貧農)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에서 보낸 진압군 2개 군단을 차례로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 전성기에는 군세가 12만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남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가려다가 실패하고, BC 71년 원로원에서 파견된 크라수스의 군단에게 루카니아에서 패사(敗死)하였다.

이 반란은 로마의 지배계급을 전율시켰으며, 후에 그에 관한 갖가지 전설이 생겨났다.


스파르타쿠스반란

BC 73∼BC 71년 로마 공화정 말기에 검투사(劍鬪士) 스파르타쿠스 주도하에 이탈리아의 카푸아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

검노(劍奴)반란, 또는 검투사(글라디오토르)에서 유래하여 글라디오토르반란이라고도 한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생으로, 중부 이탈리아의 카푸아 검노양성소에 소속된 검투사였다.

BC 73년 검투사 약 70명과 함께 검노양성소를 탈출, 노예를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의 2개 군단을 격파하여 남이탈리아를 석권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노예제의 최전성기였으므로 반란이 일어나자 트라키아인 ·갈리아인 ·켈트인 ·게르만인 노예와 노예제 대농업경영의 보급으로 몰락한 다수의 무산자(無産者)가 이에 합세하여 반란자의 수는 12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로마 정부군을 격파한 후 북이탈리아 포강(江) 지역으로 진군한 반란군은 여기에서 갈리아 출신 노예들을 귀향시키려 하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으므로 남진하여 로마 정부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로 건너가려 하였다.

그러나 해적과의 협상에 실패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BC 71년 남이탈리아의 루카니아에서 크라수스가 이끈 로마 정부군에 패하였다. 북쪽으로 도망간 잔당(殘黨)도 폼페이우스에게 격파당하여, 포로가 된 노예 6,000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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