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499~494년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
페르시아 지배자들에 대항하여 일어난 소아시아의 일부인 이오니아 도시들이 일으킨 봉기이다. 이 도시들은 아테네의 원조를 받아 자신들의 폭군을 폐위시키고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BC 490년 아테네의 개입을 구실로 그리스를 침공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 전쟁이 촉발되었으며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아테네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바야흐로 반란의 시대가 다시 돌아온 듯합니다. 튀니지, 이집트에 이어 이란, 리비아까지. 한때 반미의 상징으로 군림했던 카다피는 민중과 피의 혈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재자와 제국이 민중의 뜻을 한때 억누를 수 있어도 결코 영원히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반란의 세계사가 웅변하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 반란사'를 연구하는 중입니다. 중동의 민중혁명과 맞물려 시의적절한 주제가 된 듯합니다. 뜨겁고도 처절한 민중 반란의 역사를 틈틈이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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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니아 반란
- 고대 그리스 자유민들, 최강 제국 페르시아에 맞서다(BC 499~BC 494)
아테네의 프닉스 언덕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여기서 열리는 오늘의 민회는 매우 중요한 안건을 다룰 예정이었다. 아테네인의 동포들이 세운 도시인 이오니아의 밀레토스에서 얼마 전 반(反)페르시아 반란이 일어났는데, 아테네가 이를 도울 것인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이오니아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서부 해안 지역을 가리키며, 밀레토스는 이오니아 일대의 해상무역을 주도하는 번성하는 항구도시였다. 그러나 이오니아는 지금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왕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민회로 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아리스토고라스라는 사내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얼마 전까지 페르시아가 밀레토스에 임명한 참주로 페르시아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참주 자리를 버리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1만여 시민들 앞으로 나섰다.
“존경하는 아테네 시민들이여! 여러분의 동포인 이오니아 시민들은 전제 군주에게 짓밟혀 신음하고 있습니다. 다리우스 왕은 온갖 전쟁을 일으켜 제국의 땅을 넓히면서 그 전쟁 비용을 이오니아인에게 부담시켰습니다. 이미 트라키아(발칸 반도 동부 지역)를 장악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다리우스는 조만간 이곳 아테네로도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이오니아인들은 압제와 싸우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투쟁에는 이오니아의 자유는 물론이고 아테네의 자유도 달려있습니다!”
아리스토고라스의 열변이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댕기자 민회는 순식간에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민회는 밀레토스를 지원하기로 결의했고, 얼마 안 있어 아테네와 인근 에레트리아의 전함 25척이 밀레토스로 출정했다. 이오니아 반란이 6년 후 본격적으로 발발하는 그리스 대 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스 본토인들은 BC 7세기를 전후하여 이오니아 일대에 밀레토스, 키프로스, 카리아, 키오스 등의 식민 도시들을 세웠다. 도시들의 정치체제는 조금씩 달랐지만 사람들은 해상무역에 주로 종사하며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이오니아 지역의 맹주 리디아가 그리스계 도시들을 복속시켰는데, 리디아는 세계 최초로 동전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를 자신했을 만큼 번영한 나라였다. 이어 팽창하던 페르시아가 리디아를 정복하자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도 페르시아의 통치 안으로 들어갔다. 페르시아는 도시들에 참주를 세워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유민의 정서를 간직한 이오니아인들은 먼 곳의 전제 군주가 임명한 참주의 지배를 받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해상무역에서 자신들의 비중이 줄었기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복욕에 불타 유럽의 트라키아, 아프리카의 리비아, 아시아의 인도에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다리우스 왕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느라 피지배민들에게 조공으로 많은 은을 요구했다. 이런 까닭에 페르시아와 참주에 대한 이오니아인들의 분노는 바짝 마른 장작더미처럼 한 점의 불씨에도 활활 타오를 상황이었다.
당시 최강의 제국인 페르시아로 눈을 잠깐 돌려보자. 페르시아인은 BC 10세기경 이란 일대에 정착한 유목민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BC 7세기에 엘람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자치적인 도시국가를 세웠고, BC 6세기 중반 키루스 왕이 인접 부족들을 통일하고 주변의 강국인 메디아, 바빌론, 리디아를 정복하면서 제국으로 성장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했으나 원정에서 급사했고, 이에 궁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먼 왕족인 다리우스가 쿠데타로 제위에 올랐다. 그가 다리우스 1세이다.
다리우스 왕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을 지배하긴 했으나 실제로 그리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스파르타의 사절단이 페르시아에 찾아와 이오니아의 동포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하자, 다리우스는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도대체 스파르타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이처럼 거대한 제국에 눌린 이오니아인들의 불만은 컸으나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계기는 다소 엉뚱했다. BC 499년 에게 해 남쪽 낙소스 섬에서 내란이 일어나 그곳 귀족들이 밀레토스로 망명을 왔다. 그들은 밀레토스 참주 아리스토고라스에게 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군사력을 빌려주길 청했다. 아리스토고라스는 낙소스 반란을 진압하고 전리품을 챙길 요량으로 페르시아 총독 아르타페르네스에게서 전함 200척을 빌렸다. 하지만 낙소스로 가는 도중에 그와 페르시아 장군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낙소스 주민들의 저항까지 거세 원정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리스토고라스는 원정 비용을 대느라 큰 빚을 진데다 페르시아의 불신마저 사게 되자 차라리 시민의 편에 서 반기를 들기로 한다. 그는 참주 자리를 박차고 밀레토스에 ‘이소노미아(평등권. isonomia)’를 선포했다. 안 그래도 외세와 독재가 지긋지긋했던 밀레토스 시민들은 즉각 민주정을 수립하고 페르시아에 대한 독립을 선포했다. 밀레토스의 반란은 인근에 퍼져나가 다른 도시 민중들도 봉기해서 참주를 내쫓았다.
아르타페르네스가 이를 진압하려 하자 아리스토고라스는 그리스 본토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파르타나 아르고스 등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때만 해도 본토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가 머나먼 야만인들의 나라라고 생각했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직 에게 해 일대의 정세에 밝아 페르시아의 서진(西進)을 경계하고 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만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스의 주력함인 삼단노선. 고대 지중해에서 이보다 빠르고 강한 전함은 없었다.
“이오니아에 자유를! 페르시아에 죽음을!”
이오니아와 본토의 연합군은 에페소스에서 합류하여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총독령인 사르디스로 진격했다. 전광석화 같은 연합군의 공격에 사르디스는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그런데 이때 한 그리스 병사의 실수로 화재가 일어나 갈대로 지붕을 인 집들을 일거에 태워버렸고, 그 불길에 페르시아인들의 대모신(大母神)인 키벨레 신전까지 전소되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다리우스 왕은 분노에 치를 떨며 시종에게 하루 세 번씩 “왕이시여, 아테네를 잊지 마십시오!”라고 외치게 했다고 한다.
연합군이 사르디스 점령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페르시아의 기병들이 들이닥쳤다. 연합군은 서둘러 철수했고 사기가 꺾인 아테네의 함대는 본토로 돌아갔다. 이오니아인들은 혼자서 항쟁을 이어가야 했다. 다행히 반란은 확대되어 카리아와 키프로스 섬에서도 봉기가 잇따랐다. 이오니아가 속속 페르시아에게서 등을 돌리자 다리우스 왕은 사위인 다우리세스에게 대병력을 주어 반격에 나서게 했다. 반란군은 키프로스 섬에서 페르시아군과 맞붙었는데 육상에서는 연합군이 우세했으나 해전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반란은 수세에 몰렸고, 반란을 일으키는 데 역할을 했던 아리스토고라스도 반대파에 의해 밀레토스에서 쫓겨나 살해되고 말았다.
페르시아와 반란군의 최후의 결전은 밀레토스 연안의 라데 섬 근처에서 벌어졌다. 사모스, 레스보스, 키오스, 밀레토스 등 이오니아 연합군 함대는 353척이었고 페르시아 함대는 6백여 척으로, 비록 열세이긴 했으나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군 내부에서 동요가 일고 있었다. 항복하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겠지만 저항하면 자신은 목숨을 잃고 가족은 노예로 팔려갈 거라는 페르시아의 밀서가 조용히 각 함대 지도자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가장 많은 전함을 보유한 사모스인들이 슬그머니 도망쳤다. 함대의 주축이 깨어지자 이번엔 레스보스인들이 이를 뒤따랐고 전력의 균형은 확 기울고 말았다. 배수진을 친 밀레토스를 포함해 소수의 연합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승리한 페르시아는 복수의 칼을 휘둘렀다. 페르시아군은 밀레토스의 모든 성인 남자를 처형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았으며 소년들 일부는 거세시켜 환관을 만들었다.
대제국에 맞선 자유민들의 투쟁은 이처럼 패배로 끝났고,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등 그리스 철학의 시조들을 낳았던 밀레토스는 처참한 폐허로 변했다. 당시 아테네인들은 밀레토스의 함락을 크게 애통해하여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비극 <밀레토스의 함락>이 큰 성공을 거두었을 정도다. 그러나 연극의 작가 프리니코스는 동포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켰다는 이유로 큰 벌금을 물었다. 하지만 반란의 실패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린 것은 아니었다. 다리우스 왕은 반란의 원인이 되었던 조공을 낮춰주었으며 도시들이 민주정을 세우는 일도 허용했다. 원활한 통치를 위한 조치이기도 했지만, 영웅을 존경했던 다리우스 왕이 자유민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테네에 대한 다리우스의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윽고 BC 492년 페르시아는 원정군을 보내게 되고, 이것이 BC 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대전이다. 그러나 아테네가 마라톤 평원에서 다리우스군을 크게 무찔르고,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다시 침공했을 때는 그리스 연합군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페르시아의 유럽 침공은 좌절되고 만다. 승리의 주역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번성을 누리고, 전쟁에서 활약한 중산층과 무산계급의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발전했다.
* 연표 (BC)
550년 페르시아 키루스 왕의 메디아 정복
546년 페르시아 키루스 왕의 리디아 정복
512년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의 트라키아 정복
499년 밀레토스를 시작으로 이오니아 반란
497년 아테네와 이오니아 연합군의 사르디스 함락
494년 이오니아 반란 실패
492년 페르시아군의 그리스 원정 시작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 승리
480년 페르시아의 재침공, 살라미스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 승리
페르시아 전쟁 승리 후 전몰자를 추모하는 페리클레스
[출처] 이오니아 반란 - 페르시아에 맞선 고대 그리스 자유민들 |작성자 JU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