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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자료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주나물」 항목 수정·보완 요청

작성자신성복(하양)|작성시간26.06.14|조회수3 목록 댓글 0

접수번호      1AB-2606-0006956
                    2026-06-14 09:07:20
 sbshindm@hanmail.net



제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주나물」 항목 수정·보완 요청

수신 : 교육부 장관 귀하

참조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위원회

안녕하십니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국가적 학술 자산으로서 국민과 연구자들이 널리 활용하는 권위 있는 백과사전입니다. 이에 「숙주나물」 항목에 수록된 일부 내용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관계 및 학술적 근거를 재검토하여 수정·보완해 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현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주나물」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조선시대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한다.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가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섯 신하를 고변(告變)하여 죽게 하였다.” 그러나 위 서술은 역사적 사실과 전승(傳承)이 혼재되어 있으며, 일부 내용은 현재 확인되는 사료 및 연구 성과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사육신 사건의 직접 고변자에 대한 재검토 필요

『세조실록』 등 관련 사료에 따르면 단종 복위 계획은 김질(金礩)의 밀고를 통해 세조에게 알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정창손(鄭昌孫)은 김질의 장인으로서 이 과정에 관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KBS 라디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2015.2.8. 자료 1) 역시 사육신 사건의 고변자로 김질과 정창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신숙주가 사육신을 직접 고변하였다는 명확한 사료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최근 언론 및 연구자들의 해설에서는 신숙주가 단종 복위 계획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이를 직접 밀고한 인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중앙일보 칼럼(2026.3.6. 자료 2)에서 “신숙주는 성삼문과 박팽년의 단종복위 모의를 알고 있었으나 이를 발설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였으며,

서울신문 나우뉴스(2026.4.30. 자료 3) 역시 “거사를 밀고한 이는 신숙주가 아닌 김질”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숙주가 사육신을 고변하여 죽게 하였다”는 서술은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보다는 보다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숙주나물 명칭 유래에 대한 학술적 보완 필요

현재 널리 알려진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부르게 된 것은 신숙주를 비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은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민간설화 또는 민간어원설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문헌에서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칭한 명확한 기록은 쉽게 확인되지 않습니다.

충북일보(2019.9.16. 자료 4)에 게재된 자영 스님의 글에 따르면 신숙주와 숙주나물을 직접 연결한 한글 기록은 1924년 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확인된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또한 같은 글에서는 숙주나물 명칭이 신숙주의 구황정책과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언급하고 있어, 명칭의 유래가 단일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여러 설이 공존하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현재 백과사전의 서술은 확정적 사실이라기보다 하나의 전승 또는 설화로 소개하는 것이 학술적으로 더욱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3. 역사적 사실과 민간 전승의 구분 필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학계뿐 아니라 일반 국민과 학생들도 널리 참고하는 공신력 있는 자료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과 민간 전승, 설화, 후대의 해석을 명확히 구분하여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특정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후대의 전승에 의해 형성된 경우에는, 그러한 전승 자체를 소개하되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지 않는 서술 방식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표현을 검토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숙주나물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한다. 그 가운데 하나로 세조 대의 대신 신숙주와 관련된 민간 전승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사료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사육신 사건의 직접 고변자는 일반적으로 김질과 정창손으로 알려져 있어 신숙주가 사육신을 고변하였다는 통설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역사적 검토가 필요하다.”

 

맺음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백과사전으로서 높은 공신력과 학문적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숙주나물」 항목에 대하여 관련 사료와 최근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내용으로 수정·보완해 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바쁘신 가운데 본 제안을 검토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 1> KBS 라디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537편 <무신들, 세조에게 반기를 들다> 방송 : 2015년 2월 8일(일) 00:05~01:00 (한민족방송*인서트-5. 테입<370> 강문식)

 

(03:02 세조라는 국왕 자체가 집권 방법이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기존 연구에서도 세조 왕권의 정통성의 취약성, 취약한 부분들을 지적 하고 있고, 세조 본인도 상당히 콤플렉스가 있었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반응을 할 수 있었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왕권에 대한 도전 이런 부분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그러한 측면에서 이 부분을 좀 더 강력하게 대응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실제 유배형 됐다가 곧바로 석방을 하기 때문에 실제 유배를 갔다라고 보기도 어려운 측면도 있긴 있는데.03:50).....

 

<해설> 더구나 정창손은,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의 장인으로서, 사위를 데리고 세조에게 달려가서 그 거사 계획을 밀고함으로써, 세조의 왕권 유지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 한 마디를 꼬투리 삼아서 유배형까지 내렸으니, 다른 신료들에 대한 경고 효과는 충분히 거둔 셈이지요.>>

『세조실록』 등 관련 사료에 따르면 단종 복위 계획은 김질의 밀고를 통해 세조에게 알려졌으며, 신숙주가 이를 직접 고변하였다는 명확한 기록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일부 연구에서는 신숙주가 관련 정황을 알고 있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는 해석까지 제시되고 있습니다.

 

<자료 2> 중앙일보(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6.3.6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지조 대신 현실 택했으나 밀고자는 아니었다>

세조의 충신 신숙주와 그 가족들 <<1462년(세조 8) 영의정에 오르기까지 신숙주에 대한 세조의 총애는 극진했다. “신숙주는 나의 위징(魏徵)이요” “내가 신숙주의 어짊을 알아보고 뽑아 써서 이렇게 되었으니, 사람 알아보는 밝음이 있다 하겠다.” 당(唐)나라 태종을 인의(仁義)의 정치로 이끈 명재상 위징을 신숙주에 비유한 것이다. 신숙주는 정치가이자 행정가, 군사 전문가이자 학자로, 최고 권력자의 참모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조선시대 현실 정치에서 신숙주만큼 영향력을 끼친 신하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나라에 공헌한 위대한 업적을 덮어버리고도 남을 역사적 조롱거리가 되었는가.

신숙주는 친구 성삼문과 박팽년의 단종복위 모의를 미리 알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와는 달리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았다. 친구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보인다.

성삼문이 “신숙주는 내 친한 친구지만 죽어야만 한다”고 한 말을 보면 그는 원래 사육신과 노선을 달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변절자로 부르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다만 집현전의 옛 친구들은 사람됨의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육신과 멸족의 형벌에 처해졌다. 반면에 신숙주는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가족을 온전하게 했고, 후손 가운데 더러는 시대의 인재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누구나 한번은 죽는 인생에 같은 역사가 반복된다면,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자료 3> [서울신문 나우뉴스] 2026. 4. 30.

<숙주나물에 억울하게 이름을 빼앗긴 남자, 조선의 천재 신숙주>

<<성삼문 등 사육신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하며 그에게 동참을 권했으나 신숙주는 거절했다. 명분상으로는 옳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냉철한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거사를 밀고한 이는 신숙주가 아닌 김질(金礩)이었다.

그럼에도 왜 유독 신숙주만이 이토록 혹독한 비난을 받는 것일까. 정인지나 최항 등 함께 세조의 편에 선 집현전 학자들이 많았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그에 대한 세종의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이 “국가 대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자”라며 문종에게 직접 천거했던 ‘시대의 기대주’였기에, 배신의 낙인은 더 깊고 뼈아프게 새겨졌다. 훗날의 역사기록들이 변절자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1453년 10월10일자 '조선왕조실록'에 설명된 1만자 가까운 장문의 계유정난 기록 중 가담자 명단에 신숙주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 한명회 권남 등 계유정난에 적극 참여한 인물과 신숙주에게 내려진 정난공신의 호가 다르다는 사실, 신숙주가 정난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공신 호를 삭제해달라고 말했다는 사실 등이 뒷받침한다.">>

 


<자료 4> 충북일보 2019.9.16 자영스님 자연음식요리가, 화림전통음식연구원장

<신숙주의 나물음식 '숙주나물'>

<<숙주나물 명칭을 신숙주와 직접 연결시키는 설명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후대에 형성된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 또는 전승으로 소개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숙주나물과 신숙주와 연관 지은 최초의 한글 기록은 "강인희 교수가 주장한 조선시대가 아니고" 1924년에 출판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부터 입니다.

이 책에는 "숙주나물을 만두소로 넣을 때, 숙주나물을 짓이기는 게 변절자인 신숙주를 짓이긴다"라고 했다. 숙주나물은 1453년 계유정난 이후 당대의 백성들이 신숙주를 비하하는 의미에서 쓴 데서 유래한 명칭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의미에서 유래했다면 19세기 말부터 풍속 이야기로 만들어진 셈이다. 큰 곤욕을 치른 고령신씨 문중은 멘탈 붕괴는 물론, 제사상에 숙주나물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재상 신숙주의 업적에서 생겨난 말이기도 하다. 1808년에 편찬한 '만기요람'에는 "세조가 좌의정 신숙주에게 녹두(菉豆) 씨앗의 수입을 권장하고, 기근으로 배고파하는 백성들의 식량으로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힘쓴 신숙주의 업적이 부각될 수도 있다"고 숙주나물의 기원을 기록해 놓았다.

 콩에 물을 주어 키운 것이 콩나물인데, 녹두에서 싹을 틔운 나물은 숙주나물이라 부른다. 이 명칭은 신숙주에 의해서 비롯된 구황작물의 영향일 뿐만 아니라, 숙주란 단어가 생성된 시기도 신숙주의 구제한 공적은 물론, 그가 사망한 1475년 이후에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녹두를 발아시킨 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부르는 곳은 경기도와 충청도, 황해도이지만,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에서는 녹두나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성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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