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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자료실

<56개 공간으로 읽는 조선사(신병주 지음. 2021년) 300쪽을 살펴 봅니다.

작성자신성복(하양)|작성시간26.06.14|조회수4 목록 댓글 0

<56개 공간으로 읽는 조선사(신병주 지음. 2021년)  300쪽을 살펴 봅니다.

<<1910년 일제의 강제에 의해  한일합병조약이 맺어진 후........

 우당 이회영은 대한제국 멸망 직후인 1910년 12월, 형제와 가족, 노비 40여 명을 포함한 일가족 전체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이회영을 비롯하여 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 여섯 형제가 전 재산(600억 원)을 팔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으로 운용했다......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 지도를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고, 1911년 5월 광복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또 1919년 고종황제의 망명을 기획했으며, 1923년 부터는 신채호, 이을규 등과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아나키스트)  운동을 전개하고 1924년 항일 운동 행동조직 의열단을 후원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회영은 1932년 지하 공작망 조직을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렌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상하이 밀정(  . )의 밀고로  체포된 후 고문 끝에 옥사했다.

   이화영 6형제의 독립운동 행적을 모아 전시한 우당기념관(사진 참조)은 서촌 서울맹학교와 서울농학교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창비' 한국사상선 22권(2026년)>  187~188쪽을 살펴 봅니다.

<<연재  계속.......1920년 신채호는 이회영 아내의 소개로 연경대학 의학과에 다니던 박자혜와 재혼한다.   이듬해 두 사람 사이에서 장남 수범(秀凡)이 태어 나지만 1922년 극심한 생활고로 부인과 아들을 귀국시켰다.   귀국한 박자혜눈 그녀대로 밀입국하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하기도 했고, 생계를 위해 산파원을 차리기도 했지만 수입이 안돼 풀빵장사와 참외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홍명희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싣고 그 원고료를 부인과 아들의 생계비에 보태게 한 것이닫. 

수감 중에는 안재홍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기고문을 실을 수 있었다.   1928년 체포되던 해에는 미리 부인과 장남을 북경으로 불러 한 달 동안 함ㅁ께한 뒤 귀국시켰고,  이듬해 차남 두범(斗凡)이 출생했다.  목표 이와에는 데면데면으로 일관한 신채호에게도 차마 완전히 방기할 수 없는 가족들이 있었던 것이다......

1927년 신긴회 창립 당시 신채호는 발기인으로 참여하고....................중앙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당초 안재홍이 신재호에게 신간회 참여를 섭외헸을 때는 거절했다가 홍명희가 다시 접촉하자 참여 요청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

신채호 삶을 통틀어 자기 결정을 번복한 매우 드문 일일 것이다.  여기에는 가족들을 보살필 기회를 준 홍명희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지 않을까.

정 안 되겠으면 두 아들을 고아원으로라도 보내라는 편지를 부인에게 보낸 신채호의 마음은 그렇게 또 다른 신채호의 면모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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