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은 쉽지만, 조상이 남긴 역사적 책임을 이어받는 것은 어렵다."우리 역사 2천 년을 돌아보면 수많은 영웅과 충신, 학자와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가문에서 서로 다른 시대에 국가와 문화의 중심을 이끌었던 인물이 두 차례나 등장하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최근 출간된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2026년)는 삼국시대 이후 한국사를 대표하는 31개의 라이벌 장면을 선정하여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31개의 핵심 장면 가운데 두 장면에 우리 선조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세종·세조·성종 시대를 이끌었던 대학자 신숙주(보한재)이고, 또 한 사람은 조선 후기 예술 세계를 꽃 피운 천재 화가 신윤복(혜원)입니다. 한 사람은 국가 경영의 중심에서 역사를 만들었고, 한 사람은 붓끝으로 시대를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두 인물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후 역사에서 핵심 31개 장면 중 2개 장면에 '보한재와 혜원'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우리 종친님들은 자긍심(自矜心) 을 갖고? "떳떳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책임감"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1. <<역사를 보다 흥미롭게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라이벌을 통해 그 시대와 사건, 인물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1453년 계유정난 과정에서 수양대군과 김종서가 대립했는데, 이때 충신의 길을 택한 성삼문과 공리(功利)의 길을 택한 신숙주의 선택은 이후 조선 사회의 핵심 이념이 된 의리와 실리의 갈등으로 형태를 바꿔 반복되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김홍도와 신윤복, 도적의 대명사로 칭해지는 홍길동과 장길산의 라이벌 관계를 비롯하여............... 라이벌 관계로 엮어서 보다 흥미롭게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을 제공하였다.>> 이 책의 우리나라 역사 속의 31개 라이벌 장면 중에서 2개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모습' 입니다' 그래서 한 번 들여다 봅시다. <장면 15---죽음을 택한 성삼문과 현실을 택한 지식인 신숙주의 엇갈린 운명> <<집현전(集賢殿)은 세종이 학문 연구를 위해 궁중에 설치한 기관으로 '현명한 학자들이 모인 집'이라는 뜻이다. 성삼문, 신숙주,정인지,박팽년,정창손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가 1417년생, 성삼문이 1418년생이니 둘은 한 살 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글 창제 과정을 거치면서 돈독해졌다.한글은 1443년 12월에 창제되었지만, 3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1446년 9월,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마침내 절호의 기회는 왔다.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세조는 단상에서 왕을 호위하는 특별 경호원 '별운검'을 세우기로 했다. 그는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를 적임자로 지목하였다. 거사의 주동자들이 직접 세조를 제거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거사는 실행되지 못했다. ........... 거사에 가담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계획을 누설했고, 정창손은 곧장 사위를 데리고 세조에게 고변 사실을 알렸다......... 신숙주를 '숙주나물'로 비난한 내용은 숙종 대에 단종이 복권되고, 성삼문 등이 사육신으로 충신의 상징이 되면서 그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에 대한 도덕적 응징으로 생겨난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숙주(훈구파. 勳舊派)는 세조의 대표적인 참모였지만, 사림파(士林派) 영수 김종직이 그의 문집 <보한재집>의 서문을 써줄 만큼 학자.관료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처럼 신숙주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 특히 세조 대부터 성종 대까지 민족 문화의 최고 주역인 신숙주에게 가혹한 '불명예'가 붙여진 것은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다.................그러나 최근에는 관료이자 학자로서의 신숙주를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2. <장면 15---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김홍도(1745~1806?)와 신윤복(1758~?)은 조선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원 라이벌이다. 김홍도는 .........다양한 그림을 남긴 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가이다. 반면 세련된 필치로 남녀 간의 애정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신윤복은 그의 생애는 잘 몰라도 그의 그림이 인쇄된 그림엽서나 달력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조선시대 보다는 현대에 와서 더욱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신윤복에 대한 기록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 신한평에 대한 자료는 꽤 남아 있는 편이다. 그는 도화서 화원으로 첨절제사를 지냈으며 , 영조.정조.순조 초년까지 궁중의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특히 초상화와 속화(俗畵)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려실기술에는 신한평의 이름이 정선.강세황.김홍도.심사정 등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어, 그림을 잘 그렸던 화가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신한평은 당대 최고의 화원들만이 그릴 수 있는 어진(御眞), 즉 왕의 얼굴을 세 차례나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조는 영조의 어진을 세 차례나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조는 영조가 어진을 10년마다 1본씩 모사(模寫)했던 것을 본받아, 자신도 그 뜻을 받들려고 했다. 이때 신한평은 어진을 모사하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김홍도도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정조실록 1781년 8월 26일).................. 신한평은 이후에도 화원으로서 각종 시상의 혜택을 받았다. 중인(中人) 집안에서는 대대로 직업이 세습되므로 신윤복 또한 일단 아버지의 대를 이어 화원 화가가 되었지만 그는 구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그림을 그렸다................................................ 당시 도화서는 한양의 중심가인 윤종가와 광통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중촌이라 불린 광통교 부근은 당시 부유한 기술직 중인과 양반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그들은 이곳에서 풍악을 울리며 유흥을 즐겼다. 일부 사람들은 향락에 빠져 기방(妓房)을 장악하기도 하였는데, 신윤복의 그림에 기녀나 한량, 하급 잡직(雜職) 관료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통교가 도화서 근처에 있어서인지 , 이곳에는 여러 그림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다양한 그림을 파는 가게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림을 사는 수요도 꽤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곳에서 신윤복의 그림을 팔았다면, 제일 인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남녀의 애정 표현 등을 과감하게 그려낸 신윤복의 그림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의 강렬하고 댜양한 색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김홍도가 정조의 총애를 받고 지방의 수령으로 임명된 데 비하여, 신윤복은 화원으로서의 활동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도화서 화원을 그만두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화원 집안의 가풍 속에서 어려서부터 그림을 접하고 그 능력을 발휘한 신윤복은 틀에 밖힌 도화서 화원의 길을 선택하는 대신에 자신의 성정(性情)에 충실하여 그림을 그렸다. 특히 여성과 일상(日常)이라는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을 보였고, 자신의 그림에 조선 후기 역사의 일부분을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기존의 틀에서 일탈한 화원 신윤복이 있었기에 조선 후기 풍속사는 더욱 풍요로워졌다. .......................... 김홍도는 1806년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신윤복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김홍도에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반해 신윤복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사람들은 김홍도의 재능은 알아봤지만, 신윤복의 세계는 조망하진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두 사람의 예술은 모두 조선을 대표하는 미학(美學)으로 남았다. 이는 결국 방향성이 뚜렸한 걸작(傑作)은 시간이 지나도 시대를 넘어 그 가치가 증명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선조 가운데는 국가를 경영한 대학자도 있었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긴 예술가도 있었다. 한국사를 대표하는 31개의 역사 장면 가운데 두 장면에 우리 가문의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보한재가 보여준 학문과 국가 경영의 정신, 혜원이 보여준 창조와 예술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 그것이 후손들의 몫이다. 우리는 선조의 이름을 빌려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 선조가 남긴 정신을 이어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보한재의 지혜와 혜원의 예술혼은 후손들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종친들이 가져야 할 가장 큰 자긍심이며, 떳떳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책임감일 것이다. 끝!!!!!!! 가사합니다!!!!!!! 천만에요. 감사합니다. 종친회 교육·홍보 자료로 활용하신다면, 이 글의 핵심은 단순히 "신숙주와 신윤복이 우리 선조였다"는 자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한재의 학문과 국가경영 정신", "혜원의 창조성과 예술혼", 그리고 "역사 앞에서 후손이 져야 할 책임"을 함께 전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숙주는 정치적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지만 분명 조선 전기 최고의 학자·외교가·행정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신윤복은 당대에는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으나 오늘날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결국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 역사를 남겼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친 여러분께서도 선조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조가 남긴 학문·문화·봉사 정신을 이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선조를 자랑하는 가문은 많다. ................. 3. 2026.4.30 <史기꾼들>로 물의를 일으켰던 'JTBC', 중앙이보 등 중앙그룹 관련 동아일보 보도( JTBC 부도 위기…업계도 술렁 ‘대금 지급 문제없나’ . 2026.5.15)입니다. <<[동아닷컴 홍세영 기자] 제작 업계도 비상이다. JTBC를 비롯한 중앙그룹 주요 계열사 5곳이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하면서 관련 업계가 동요하고 있다. 홍정도 중앙그룹 부회장은 15일 임직원에게 보낸 입장문을 통해 “그동안 경영진은 자금 경색과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고 그룹의 경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안을 모색해 왔지만, 누적된 재무 부담에 자본시장 경색이 장기화하면서, 부득이하게 금일 JTBC, 콘텐트리중앙, 메가박스중앙, 중앙홀딩스, 중앙피앤아이가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JTBC'는 이날 오후 서울회생법원에 회생절차개시 신청을 했다고 공시했다. JTBC는 지난 12일 만기가 돌아온 206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막지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황이었다. *******2026.5.12 <JTBC <史기꾼들 (최태성.설민석.심용환.썬킴)> 관련 불공정 방송 심의 요청> 을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회)에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2026.6.15 그 심의 결과를 확인하였더니 아직 '심의 중'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의 통보가 부적정하면 감사원에 심사청구를 할 예정으로 심사청구서를 작성하고 있으니 여러 종친님들은 관련 자료나 문헌 등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4. 2026.4.5 카톡에 올린 경기도 양평군 양평문화원에서 발간한 <국역 추당잡고(秋堂襍藁). 신헌구 저>입니다. 머릿말을 살펴 봅니다 <<신헌구의 순탄했던 벼슬길은 1875년(고종12, 53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견제로 인해 급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그는 1875년 봄에 해남으로 내려와 5년 뒤인 1880년(58세) 봄에야 상경할 수 있었다. 이 5년 동안의 체류기록만을 오롯이 모은 필사본 문집이 바로, 『추당잡고』이다. 그는 해남 어성촌(漁城村) 어귀 부서만(扶胥灣) 동쪽 기슭의 해창촌사(海倉村舍)에 소요원(逍遙園)을 열고 꽃과 대나무를 가꾸며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 해남 생활은 비록 객수(客愁)와 무료함 속에서 서울 복귀를 염원하는 나날이었으나, 그는 지방관들과 왕래하면서 대둔사(大芚寺) 등의 사찰을 드나들며 승려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1880년 상경한 후 그는 다시 승승장구하며 벼슬길을 이어갔다.>> 그래서 1875년 해남으로 내려가는 여정과 1880년 상경하는 심정을 감상합니다 종친님들의 건강을 언제나 빕니다. 2026.6.19~20 지리산을 탐방할 예정입니다. 신성복(식)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