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출간된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2026년)는 삼국시대 이후 한국사를 대표하는 31개의 라이벌 장면을 선정하여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31개의 핵심 장면 가운데 두 장면에 우리 선조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세종·세조·성종 시대를 이끌었던 대학자 신숙주(보한재)이고,
또 한 사람은 조선 후기 예술 세계를 꽃 피운 천재 화가 신윤복(혜원)입니다.
한 사람은 국가 경영의 중심에서 역사를 만들었고,
한 사람은 붓끝으로 시대를 기록했습니다.>>
전 번 주에 그 내용을 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 31째 마지막 장면(366~375쪽)에서 '보한재'가 다시 등장합니다.
<조선의 두 외교사절단이 전한 세계관의 충돌과 조화-----통신사 vs 연행사>
<<휴가철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에 나서지만, 조선시대에는 개인적으로 해외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공무(公務)로 일본이나 중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이때 일본에 가는 사절단을 통신사(通信使), 명나라에 가는 사절단은 사은사(謝恩使),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연경(현재 베이징)으로 향하는 사절단을 통틀어 연행사(燕行使)라 불렀다..............
대략 400~500명의 조선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데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일본 측에서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했다. 그들은 서울을 출발하여 문경새재, 대구 등을 지나 부산에 도착해 배를 타고 대마도, 이끼섬 등을 거쳐 이동했다. 그렇게 일본 본토에 도착한 후 해로와 육로로 교토까지 도착하는 데 거의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조선정부는 총 700여 회에 걸쳐 연행사를 파견했다....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까지 계속되었다. 정기적으로 파견된 사신단의 규모는 정사.부사.서장관 각 1명, 통역을 담당하는 대통관 3명, 물품을 관리하는 압물관 24명을 합하여 30명 정도였고, 이들을 수행하는 인원을 합하면 200~300명 정도였다.
감사의 뜻으로 황제에게 여러 색깔의 모시와 명주, 화석(花席?), 백면지(白面紙) 등을 예물로 바쳤다. 사실 중국에서 답례로 보내는 선물이 더 많았는데, 사행단의 파견은 실질적인 무역 행위의 성격도 가졌다.....
2.
<조선 전기 대일 외교의 결정판,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1443년(세종 25년) 신숙주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당시 그의 직책은 오늘날 기록관에 해당하는 서장관으로서 사행단 지휘부 가운데 통신정사, 부사에 이어 서열 3위에 해당하였다. 서장관은 외교뿐만 아니라 문장에 특히 뛰어난 사람이 임명되는 직책으로 세종은 집현전 학자로 있던 신숙주에게 큰 믿음을 보였다.
신숙주 일행은 7개월이라는 당시로서는 짧은 기간 동안 외교적 목적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가 읿본에 사행을 다녀온 지 28년이 지난 1471년(성종 2년) 겨울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저자의 일본 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의 외교 관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완성된 것으로, 조선 전기 대일 외교의 축적된 경험들이 모아져서 편찬되었다........
신숙주는 서문에서 "동해에 있는 나라가 하나만은 아니다. 일본을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나라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에 정련하고 배타기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게 되었으니, 그들이 만약 도리대로 잘 어루만져주면 예절을 차려 조빙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득 함부로 노략질하였던 것입니다" 라고 하여 무엇보다도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내며 교린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신숙주는 임종하기 직전에도 성종에게 "일본과의 화호(和好.평화)를 잃지 마십시요"라는 말을 남겼다. 신숙주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년 전에 일본의 호전성(好戰性)을 간파하고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3.
| <56개 공간으로 읽는 조선사(신병주 지음. 2021년) 300쪽을 살펴 봅니다. <<1910년 일제의 강제에 의해 한일합병조약이 맺어진 후........ 우당 이회영은 대한제국 멸망 직후인 1910년 12월, 형제와 가족, 노비 40여 명을 포함한 일가족 전체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이회영을 비롯하여 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 여섯 형제가 전 재산(600억 원)을 팔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으로 운용했다......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 지도를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고, 1911년 5월 광복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또 1919년 고종황제의 망명을 기획했으며, 1923년 부터는 신채호, 이을규 등과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아나키스트) 운동을 전개하고 1924년 항일 운동 행동조직 의열단을 후원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회영은 1932년 지하 공작망 조직을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렌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상하이 밀정( . )의 밀고로 체포된 후 고문 끝에 옥사했다. 이화영 6형제의 독립운동 행적을 모아 전시한 우당기념관(사진 참조)은 서촌 서울맹학교와 서울농학교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창비' 한국사상선 22권(2026년)> 187~188쪽을 살펴 봅니다. <<연재 계속.......1920년 신채호는 이회영 아내의 소개로 연경대학 의학과에 다니던 박자혜와 재혼한다. 이듬해 두 사람 사이에서 장남 수범(秀凡)이 태어 나지만 1922년 극심한 생활고로 부인과 아들을 귀국시켰다. 귀국한 박자혜눈 그녀대로 밀입국하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하기도 했고, 생계를 위해 산파원을 차리기도 했지만 수입이 안돼 풀빵장사와 참외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홍명희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싣고 그 원고료를 부인과 아들의 생계비에 보태게 한 것이닫. 수감 중에는 안재홍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기고문을 실을 수 있었다. 1928년 체포되던 해에는 미리 부인과 장남을 북경으로 불러 한 달 동안 함ㅁ께한 뒤 귀국시켰고, 이듬해 차남 두범(斗凡)이 출생했다. 목표 이와에는 데면데면으로 일관한 신채호에게도 차마 완전히 방기할 수 없는 가족들이 있었던 것이다...... 1927년 신긴회 창립 당시 신채호는 발기인으로 참여하고....................중앙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당초 안재홍이 신재호에게 신간회 참여를 섭외헸을 때는 거절했다가 홍명희가 다시 접촉하자 참여 요청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 신채호 삶을 통틀어 자기 결정을 번복한 매우 드문 일일 것이다. 여기에는 가족들을 보살필 기회를 준 홍명희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지 않을까. 정 안 되겠으면 두 아들을 고아원으로라도 보내라는 편지를 부인에게 보낸 신채호의 마음은 그렇게 또 다른 신채호의 면모를 만들어내고 있다. |
4.
. .....(이어서) 2026.6.19 카톡에 올린 경기도 양평군 양평문화원에서 발간한 <국역 추당잡고(秋堂襍藁). 신헌구 저>
. *發天安
천안에서 출발하다
柳橋分驛路 버드나무 다리에서 나뉜 역로
20) 대궐 : 원문은 천문(天門)인데, 임금이 있는 대궐을 가리키는 말이다.
21) 중음(重陰)을 회복 : 중음은 음(陰)이 중첩되어 음기가 최대로 왕성해지는 것이다. 이
때부터 일양(一陽)이 비로소 생겨나는 지뢰복괘(地雷復卦)가 이루어진다.
22) 궁궐 문 : 원문은 창합(闔)인데, 하늘로 통하는 문으로 전하여 궁문(宮門)을 가리키
기도 한다.
57쪽
十里入平郊 십 리의 너른 들로 들어가네.
樹古官樓靜 오래된 나무 있는 관루 고요하고
溪虛野艇抛 빈 시내엔 나룻배 버려져 있네.
匏籬圍蔓草 박넝쿨 울타리를 덩굴풀이 감싸고
瓜徑接檜巢 오이밭 길은 회나무 새 둥지에 닿네.
佩遺先蹟 쫓겨나실 적23) 옛 자취 남아있으니
荒墟百感交 황량한 터에 온갖 감정 교차하네.
【선조이신 죽당공(竹堂公)24)이 일찍이 이곳에 유배를 왔는데, 초당과 작은 연못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지나 징험할 수 없다.
[先祖竹堂公, 嘗被譴于此, 有草堂小池, 而年
久無徵.]】
*錦江舟中
금강의 배 안에서
鷄山巖鬱揷層 시내와 산 빽빽한 바위에 층층 구름 꽂혀 있고
雨後淸江綠漲潮 비 온 뒤의 맑은 강에는 푸른 물결이 흐르네.
日暮漁人來叩 해 저무니 어부가 노를 두드리며 와서는
滄浪一曲笑相招 창랑의 한 곡조25) 서로 웃으며 부르네.
23) 쫓겨나실 적 : 원문은 ‘결패(玦佩)’인데 내쫓김을 당했다는 의미이다. 결(玦)은 둥근 구
슬[環]에 한쪽이 트인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대략(大略)>에, 조정에서 쫓겨난 신
하를 용서해서 부를 때에는 환(環)을 보내고, 완전히 관계를 끊어 버릴 때는 결(玦)을
보낸다고 한다.
24) 죽당공(竹堂公)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유(申濡, 1610~1665)로, 자는 군택(君澤), 호
는 죽당(竹堂)ㆍ이옹(泥翁)이다. 인조 21년(1643)에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으로 일
본에 다녀왔으며, 글씨를 잘 썼다. 저서에 『죽당집』이 있다.
25) 창랑(滄浪)의 한 곡조 : 굴원(屈原)이 초(楚)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소인배
들의 참소를 입고 쫓겨나 지은 <어부사(漁父詞)>를 가리킨다. 그 마지막 구절은, “창랑
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으면 될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면
될 것이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고 하였다.
58 쪽
*宿魯城邑店
노성26)의 읍점에서 묵다
縣門蒼翠掩山椒 마을 입구는 산초가 푸르게 덮었는데
橫徑逶入斷橋 지름길 구불구불 끊어진 다리로 들어가네.
敗鼓雙如絮 헌 북의 북채는 솜을 두드리는 듯하고
一笳吹得報殘宵 한 곡조 피리 소리 남은 밤에 들려오네.
*礪山途上寄家書
여산으로 가는 길에 집에 편지를 보내며
千山萬水我行難 천 개의 산과 만 개의 강 지난 힘든 내 길
夢裏家人夜夜看 꿈속에서 집안사람들의 모습 밤마다 본다네.
寄與途中書數字 길을 가는 도중에 몇 글자를 써서
悤悤是報平安 바쁘게 그저 평안함을 알려 주었네.
나 .
*行到淳昌南山臺 宿族侄泰休家
순창의 남산대에 이르러 족질 태휴의 집에서 묵다
南來淳俗喜相逢 남쪽으로 오니 풍속 순박하고 만남도 기쁘니
伊昔先公杖從 옛날 선공이 지팡이 짚고 온 곳이네.
【남쪽 언덕은 선조인 귀래공31)께서 벼슬에서 물러나 지내던 곳인데, 옛 정자가 아직
도 남아 있다.[南厓卽先祖歸來公退老之地, 古亭尙在.]】
百世遺風君子竹 백세 이어진 유풍은 군자의 대나무요
四時孤節大夫松 사계절 외로운 절개는 대부의 소나무라네.
滿室芸香承爾祖 방 가득한 향풀의 향기는 조부님을 받들고
同隣花樹樂吾宗 우리 종친들 이웃하며 화수의 즐거움32) 누리세.
【순창 남쪽의 족종(族從)은 모두 이계공33)의 계파이며 여암(旅菴; 신경준34)의 증현(曾
玄)35)이다.[淳南族從, 皆伊溪公系派, 旅菴曾玄.]】
何年奉謝金華路 어느 해 금화로에서 감사할 수 있을지
白首雲林作老農 노년 초야에 있으면서 늙은 농부 되었네.
31) 귀래공(歸來公) : 조선 초기의 문신 신말주(申末舟, 1435~1509)로, 1454년 문과에 급
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중종반정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한
인물이다.
32) 화수(花樹)의 즐거움 : 당(唐)나라 위장(韋莊)이 화수(花樹)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
을 마신 일에서 유래하여, 친족들이 모여 정답게 연회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33) 이계공(伊溪公) : 조선 전기의 문신 신공제(申公濟, 1469~1536)로, 1486년 진사가 되
고, 1495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
였다. 신공제는 순창의 수석을 사랑하여 한 정자를 짓고 스스로 이계주인(伊溪主人)이
라 하였다.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고 촉체(蜀體)를 잘 썼다. 또한, 『해동명적(海東名蹟)』
이라는 동국 명인의 필적을 간행하였다.
34)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훈민정음 창제
이후 문자론을 가장 깊이 있게 전개했다는 평을 받는 『운해훈민정음』을 저술했다. 문
자학, 성운학, 지리학 등 여러 학문에 능통했으며, 정언, 장령, 제주목사 등 다양한 관
직을 역임하고 『문헌비고』 편찬에도 참여했다.
35) 증현(曾玄) : 증손(曾孫)과 그의 아들인 현손(玄孫)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61쪽
*敬次歸來亭十老稧帖詩韻
귀래정에서 열 명의 노인이 수계(修稧)하고 지은 시운에 공경히 차운하다
【우리 선조께서는 광해군을 개옥(改玉)36)한 뒤에는 순창에 은거하셨다.37) 정자의
이름을 ‘귀래(歸來)’라고 짓고, 마을에 사는 아홉 노인과 함께 모임을 가졌을 때 지은
계첩(帖)의 시 10수가 있다.[我先祖當光廟改玉後, 嘉遯于淳昌. 作亭號歸來, 與里中九
老作會, 有帖詩十首.]】
峨嵋秀色古村邊 아미산의 빼어난 빛 옛 마을 가에 있는데
遺荒凉感逝川 남은 정자 황량하니 세월의 빠름을 느끼네.
【아미는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嵋卽南厓山名.]】
杖南鄕曾謝老 머무셨던 남쪽 마을은 늙어서 물러나셨던 곳이니
寧隨梅月共逃禪 어찌 매월당 따라 함께 선가로 도망하랴.38)
【매월은 김시습39) 공을 가리킨다.[梅月指金公時習也.]】
越絶靑山路已違 푸른 월절산으로 난 길 이미 어긋났고
掖垣梧竹夢全稀 액원40)의 오동과 대나무는 꿈에도 나오지 않네.
36) 개옥(改玉) : 패옥(佩玉)을 바꾼다는 뜻으로 반정(反正)하여 새로 임금으로 즉위함을 이
르는데, 여기에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
37) 은거하셨다 : 원문은 가돈(嘉遯)으로 『주역』 <돈괘(遯卦) 구오(九五)>에, “아름다운 은
둔이니, 바르므로 길하다.[嘉遯, 貞吉.]”라고 하였다. 중정(中正)한 도를 터득하여 알맞
게 은둔하는 것을 가리킨다.
38) 선가로 도망하랴 : 원문은 도선(逃禪)인데, 좌선을 도피한다는 뜻이다. 당 현종(唐玄
宗) 때의 문신 소진(蘇晉)이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
八仙歌)에, “소진은 수불 앞에서 장기간 재계를 했는데, 취중에는 가끔 좌선을 도피하
기 좋아했다네.[蘇晉長齋繡佛前, 醉中往往愛逃禪.]”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김
시습이 18세에 송광사에서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고,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승려가
되어 전국의 산사를 유랑하였던 것에서 속세를 떠나 선가로 간다는 의미로 보았다.
39) 김시습(金時習, 1435~1493) :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매월당집』, 『금오신
화』, 『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하였다.
40) 액원(掖垣) : 대궐 곁의 담장을 말한다.
62쪽
【월절은 영월의 산 이름이다.[越絶寧越山名.]】
歸來雨泣王孫草 귀래정에 비 내리자 왕손초41) 우니
不是淵明悟昨非 도연명이 어제의 잘못을 깨달은 게 아니랴.42)
不將危節露時人 높은 절개 당시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은 채
似從容遲俗 다만 조용히 물러나 세속의 시끄러움 벗어났네.
【처지는 다른 부분이 있지만 조용히 물러나 쉰 것이다.[處地有殊, 從容退休.]】
易地應然生死事 처지를 바꾸면 응당 죽고 사는 일이니
遺祠何獨鷺梁津 남은 사당은 어찌 노량진43) 뿐이랴.
【육신(六臣)44)을 가리킨다.[指六臣.]】
鍾鼎常耀世人 종정과 기상45)은 세상 사람들에게 빛나고
池塘草色別般春 연못의 풀 색은 특별한 봄빛이라네.
【방조이신 충문공은 당시 원보(元輔; 영의정)였다.[傍祖文忠公, 時爲元輔.]】
飄然高雲霞外 표연히 높은 자취 운하 밖에 나타나니
九老鳩筇自卜隣 아홉 노인의 지팡이46) 절로 이웃해 산다네.
野冠黃髮孰知夫 야인의 갓 쓴 노인 중에 누가 알고 있나
41) 왕손초(王孫草) : 향기가 나는 풀로, 멀리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나 원망 등을 표
현할 때 보통 이 풀을 언급한다.
42) 도연명이……아니랴 :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지금이 옳고 예전에는 틀렸
다.[覺今是而昨非.]’라며 이전의 잘못을 깨닫는 내용이 나온다.
43) 노량진(鷺梁津) :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사육신의 묘가 있다.
44) 육신(六臣) : 사육신, 곧 ‘죽은 여섯 신하’라는 뜻으로,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사
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와 자살한 유성원(柳誠源)을 일컫는다.
45) 종정(鐘鼎)과 기상(常) : 종정은 큰 공적을 가리키는 말로, 옛날에 큰 종이나 솥을 만
들어 국가에 큰 공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기()와 상(常)은 왕실에서
사용하는 깃발로, 용의 형상을 서로 어긋나게 그린 것을 기라 하고, 일월의 무늬를 그
린 것을 상이라고 한다. 신하 가운데 공덕이 있으면 여기에 기록하였다.
46) 지팡이[鳩] : 손잡이 부분을 비둘기 모양으로 조각한 지팡이다. 임금이 나이 많은 신
하에게 비둘기처럼 소화를 잘 시키며 건강하기를 바라는 의미로 준 것이다.
63쪽
簪佩先朝諫大夫 선조께선 대사간 벼슬을 지내셨네.
【공은 일찍이 대사간을 역임하셨다.[公曾爲大司諫.]】
平地神仙元不遠 평지의 신선은 원래부터 멀지 않고
華山深處有樵夫 화산의 깊은 곳에 나무꾼이 있다네.
蕭灑南山一小亭 소쇄한 남산에 작은 정자 하나
良辰淑氣駐餘齡 좋은 날 맑은 기운 여생을 보내셨네.
至今草木遺根大 지금까지 초목은 큰 뿌리 남겨서
自在春風葆晩馨 절로 봄바람 속에 늦은 향기 품었네.
先公年卲醉溫恭 선공이 나이 높아 온화함과 공손함에 취하시고
綠竹深園想德容 푸른 대나무 깊은 정원의 덕스러운 모습 상상하네.
耆老仍成眞率會 기로들이 이어서 진솔회47)를 이루니
華筵不敢酒千鍾 화려한 연회 천 종의 술은 감히 할 수 없다네.
名門繼世有泥翁 이름난 가문 대대로 이어져 니옹 계신데
傍溯伊溪浩不窮 이계는 넓고 넓어 끝이 없구나.
【죽당공의 다른 호는 니옹(泥翁)이다. 방조이신 정민공도 산 남쪽의 이계(伊溪) 가를
정하여 집을 짓고 이로써 자호하였다.[竹堂公又號泥翁. 傍祖貞敏公, 亦卜築于山南伊溪
上以自號.]】
一派淳南流更遠 순창 남쪽 일파에 유택이 멀리 흘러
旅菴家裏見遺風 여암의 집안에서 그 유풍을 볼 수 있다네.
【족조이신 여암공48)은 문장과 학술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族祖旅菴公, 以文章學術名世]】
47) 진솔회(眞率會) :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고향의 촌로들과
만든 모임의 이름이다. 귀천을 불문하고 참석한 순서에 따라 자리에 앉았으며, 술을
마시되 다섯 잔을 넘지 않고, 안주는 다섯 가지를 넘지 않는다는 등의 규칙이 있었다.
48) 여암공 :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을 가리킨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로 실용학문
분야에 중요한 업적이 많다. 또한 국토 지리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다양한
64 쪽
含恩初謝鷺離中 은혜 입어 처음 신료들 속에서 사례하고
花樹鄕園喜正逢 화수회 여는 고향 정원에서 기쁘게 만났네.
滿砌繁陰喬木下 섬돌 가득한 교목나무 아래 짙은 그늘49)
雲孫頭角已成翁 운손50)의 머리는 이미 늙어버렸다네.
【이것은 나 자신의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此所自況.]】
東望花山意愴然 동쪽으로 화산을 바라보니 뜻이 창연해지고
人從眞帖仰先賢 사람들은 진첩을 통해 선현을 우러르는구나.
【화산서원은 동쪽 20리 즈음에 있다. 곧 공을 제향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훼철되었
다. 계첩(帖) 안에 공의 진용(眞容)이 있다.[花山書院在東二十里. 卽公俎豆之所而今
撤. 帖中有眞容.]】
虎溪陳跡休相比 호계의 옛 자취와 비교하지 말라
三笑圖中一老禪 삼소도51) 속의 한 노선이라네. .................(연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