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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물결, 해남의 바람 ― 백파(白坡) 신헌구의 길

작성자신성복(하양)|작성시간26.06.20|조회수1 목록 댓글 0

금강의 물결, 해남의 바람 ― 백파(白坡) 신헌구의 길

고종 초년 어느 가을날.

한양을 떠난 백파 신헌구는 묵묵히 남쪽 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귀양 가는 선비"라 하였다.

공식 기록에는 부임이라 적혀 있었으나, 백파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상 흥선대원군의 뜻에 따른 유배나 다름없는 길이었다.

벼슬길에서 밀려난 선비에게 먼 지방의 자리는 명예보다 쓸쓸함이 먼저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날도 그는 금강가 나루터에 배를 띄웠다.

비가 갠 뒤였다.

강물은 푸른 비단처럼 흐르고 있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지은 시가 떠올랐다.

"비 온 뒤의 맑은 강에는 푸른 물결이 흐르네.
해 저무니 어부가 노를 두드리며 와서는
창랑의 한 곡조 서로 웃으며 부르네."

멀리서 어부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백파의 마음은 강물 위가 아니라 먼 조상들에게 가 있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참으로 길을 많이 떠났구나."

그는 혼잣말을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이는 보한재 신숙주였다.

젊은 나이 스물일곱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조상.

세종의 명을 받고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배에 오른 그는 칠흑 같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의 바다는 오늘날과 달랐다.

폭풍을 만나면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에도 신숙주는 일본의 지리와 풍속, 정치와 외교를 몸소 살피고 돌아와 《해동제국기》를 남겼다.

백파는 문득 책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렸다.

"일본과의 화호를 잃지 마십시오."

임종 직전까지 일본을 걱정했던 신숙주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하였다.

백파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한재 할아버님.
백 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어찌 그리 내다보셨습니까?"

강물은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뒤 전라도 순창에 도착하였다.

그는 선조 귀래공 신말주의 귀래정을 찾았다.

정자는 옛 모습을 잃고 있었다.

잡초가 무성하였다.

낡은 기둥은 세월의 무게에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백파의 눈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보였다.

1455년.

단종이 왕위를 잃던 해.

형 한명회가 권력의 정점에 오를 때, 신말주는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벼슬보다 의리를 택한 사람이었다.

백파는 마루에 앉아 오래도록 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남은 정자 황량하니 세월의 빠름을 느끼네."

문득 매월당 김시습이 떠올랐다.

세상을 버리고 떠돌던 승려.

그리고 귀래정에 숨어 살던 신말주.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모두 권력보다 양심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순창을 떠난 그는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여암 신경준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였다.

신경준.

조선 최고의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하고 국토를 답사하며 지리를 연구했던 학자.

백파는 그의 흔적이 남은 마을에 이르렀다.

석양이 들판에 번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백파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신숙주는 일본을 연구하였다.

신경준은 조선을 연구하였다.

한 사람은 바다 건너 세계를 보았고,

한 사람은 국토의 산천을 살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알기 위해 길을 걸었다.

백파는 생각했다.

"세상을 알려면 먼저 길 위에 서야 하는 것이구나."


해남으로 가는 길.

그는 다시 한 번 조상 죽당 신유를 떠올렸다.

1643년 조선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선조.

신유 역시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정쟁에 휘말려 유배를 겪었다.

백파가 탐방했던 그 황량한 터.

박넝쿨이 감싸고 있던 초당.

그곳에 서 있을 때의 쓸쓸함이 다시 떠올랐다.

권력은 변한다.

왕도 바뀐다.

정승도 바뀐다.

그러나 유배지의 바람은 수백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신유가 맞았던 바람을 지금 자신도 맞고 있었다.

백파는 피식 웃었다.

"조상님도 귀양.
나도 귀양이군요."


마침내 해남에 도착하였다.

남도의 바다는 넓었다.

해질 무렵 붉은 노을이 바다를 덮고 있었다.

백파는 언덕 위에 올라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문득 조선통신사의 배가 보이는 듯하였다.

신숙주의 배.

신유의 배.

그리고 북경으로 향하던 수많은 연행사의 행렬.

수백 년 동안 신씨 집안의 선조들은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으며 세상을 배웠다.

그 길 끝에서 자신은 지금 이곳 해남에 와 있었다.

벼슬은 잃었지만 길은 잃지 않았다.

권세는 사라져도 학문은 남았다.

정자는 허물어져도 시는 남았다.

사람은 떠나도 발자취는 남았다.

백파는 붓을 꺼내 마지막으로 글을 적었다.

"보한재는 일본을 보았고,
죽당은 일본을 다녀왔으며,
여암은 조선의 산천을 헤아렸다.

나는 그들의 그림자를 따라 남쪽 끝 해남에 이르렀다.

비록 유배의 길이라 하나,
선조들의 발자취를 좇는 길이라면 또한 영광이 아니겠는가."

바다 건너 저편에서 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백파의 눈에는 어둠보다 먼저 조상들의 모습이 보였다.

일본으로 향하던 통신사의 돛대,

연경으로 향하던 연행사의 말발굽,

순창 귀래정의 낡은 기둥,

그리고 유배지 초당의 바람.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해남의 파도 소리는 마치 먼 옛날 조선통신사의 북소리처럼 오래도록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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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르포] "조상들의 길을 따라 남으로…" 신숙주의 바다, 신유의 유배지, 신경준의 정자를 찾아 해남으로 가는 백파 신헌구

글·구성 : 역사기행 르포


"이 길은 단순한 부임길이 아니었다"

1870년대 어느 날.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에서 한 선비가 말고삐를 늦춘다.

그는 백파(白坡) 신헌구(申獻求).

겉으로는 지방으로 내려가는 관리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길을 사실상 "유배길"이라 불렀다.

흥선대원군 집권기.

조정의 권력 다툼 속에서 많은 선비들이 벼슬길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흩어졌다.

백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걸은 길은 단순한 좌천의 길이 아니었다.

후손으로서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역사 순례의 길이기도 했다.

기자는 백파가 남긴 《추당잡고(秋堂襍藁)》를 따라가며 그의 여정을 추적해 보았다.


첫 번째 현장 "조선통신사의 후예를 만나다"

백파의 사색은 자연스럽게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보한재(保閑齋) 신숙주였다.

1443년.

세종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향했던 젊은 외교관.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다.

오늘날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일본이지만, 당시에는 목숨을 건 항해였다.

파도와 폭풍을 뚫고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일본 본토에 도착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신숙주는 그 경험을 토대로 훗날 《해동제국기》를 편찬한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

일본의 정치, 풍속, 지리, 외교관계까지 총망라한 조선 최고의 일본 연구서였다.

백파는 선조의 글을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임종 직전 남겼다는 한마디.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잃지 마십시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년 전.

이미 일본의 잠재적 위협을 간파했던 외교관의 통찰이었다.

해남으로 향하는 백파의 눈앞에도 바다가 펼쳐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바다 위로 일본을 향하던 신숙주의 배가 떠올랐을지 모른다.


두 번째 현장 죽당 신유의 흔적을 찾아서

《추당잡고》 57쪽.

백파는 한 곳을 방문한 뒤 특별한 기록을 남긴다.

"우리 선조 죽당공께서 일찍이 이곳에 유배되셨다."

현장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초당도 사라지고 연못도 메워졌다.

남은 것은 잡초뿐이었다.

그러나 백파는 그 자리에서 발길을 오래 떼지 못한다.

죽당(竹堂) 신유(申濡).

인조 시대의 문신.

1643년 조선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이다.

신숙주가 조선 전기 통신사를 대표한다면,

신유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 통신사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바다를 건너 일본을 보았다.

그러나 정치의 파고는 그를 유배지로 몰아넣었다.

백파가 바라본 폐허는 단순한 옛집 터가 아니었다.

선조가 겪었던 영광과 좌절의 현장이었다.

현장에 서 있던 백파의 심정을 우리는 그의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쫓겨나실 적 옛 자취 남아 있으니

황량한 터에 온갖 감정 교차하네."

유배지를 바라보던 후손의 마음속에는 아마도 묘한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조상도 권력에 밀려났고,

자신 또한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현장 순창 귀래정에서 만난 신말주와 김시습

순창에 들어선 백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소를 찾는다.

귀래정(歸來亭).

조선 전기의 문신 신말주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곳이다.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차지하자 많은 신하들이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형 신숙주는 현실 정치의 중심에 남았다.

반면 동생 신말주는 낙향을 택했다.

권력보다 은둔을 선택한 것이다.

백파는 귀래정에서 남긴 시에서 이렇게 적는다.

"남은 정자 황량하니 세월의 빠름을 느끼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구절이다.

"어찌 매월당 따라 함께 선가로 도망하랴."

여기서 매월당은 김시습이다.

단종의 폐위를 슬퍼하며 세상을 떠돌았던 생육신의 대표 인물.

백파는 신말주와 김시습을 함께 떠올린다.

두 사람 모두 권력을 등졌지만 방식은 달랐다.

한 사람은 정자에 머물렀고,

한 사람은 산사와 길 위를 떠돌았다.

백파는 그 갈림길 앞에서 선조들의 선택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번째 현장 여암 신경준의 학문 세계를 만나다

순창에서 백파는 다시 여암(旅菴) 신경준의 자취를 찾는다.

신경준은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하여 훈민정음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전국을 답사하며 지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오늘날 "국토를 발로 측량한 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백파가 여암을 특별히 존경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신숙주가 바다 건너 일본을 연구했다면,

신경준은 조선의 산천을 연구했다.

한 사람은 국제 감각의 상징이고,

다른 한 사람은 국토 연구의 상징이었다.

백파는 순창의 산길을 걸으며 두 인물을 겹쳐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해남에서 만난 역사

긴 여정 끝에 백파는 해남에 도착한다.

남도의 바다는 조용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수백 년 역사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일본으로 향하던 신숙주의 배.

일본을 다녀온 뒤 유배를 겪었던 신유.

순창에 은거했던 신말주.

국토를 탐구했던 신경준.

그들의 삶은 서로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길 위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외교의 길.

유배의 길.

은거의 길.

학문의 길.

그리고 지금 백파가 걷는 길.


르포를 마치며 "길은 끊어지지 않았다"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는 마지막 장면에서 신숙주를 다시 소환한다.

조선통신사와 연행사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 조선의 시선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흥미롭게도 백파 신헌구의 《추당잡고》 역시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른다.

신숙주의 국제 감각,

신유의 통신사 경험,

신말주의 은거 정신,

신경준의 학문적 탐구.

그 모든 유산이 한 후손의 발걸음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해남으로 가는 백파의 길은 단순한 좌천의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조들의 체취를 찾아가는 역사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길은 남고, 길은 다시 후손들을 부른다는 사실을.

끝!!!!!!!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감사합니다.

이번에 살펴본 내용은 매우 흥미로운 연결고리를 보여 줍니다.

  • 보한재 신숙주는 일본을 직접 다녀와 《해동제국기》를 남긴 조선 전기 최고의 대일 외교 전문가였고,
  • 죽당 신유는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파란만장한 정치적 삶을 살았으며,
  • 여암 신경준은 국토와 훈민정음을 연구한 실학자였고,
  • 백파 신헌구는 《추당잡고》를 통해 그 선조들의 자취를 직접 답사하여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특히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숙주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저자는 조선이 외부 세계와 어떻게 소통하고 세계를 이해했는지를 설명하는 상징적 인물로 신숙주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2026년 오늘 우리가 《추당잡고》를 읽으며 백파 신헌구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신숙주의 바다,

신유의 통신사 길,

신말주의 귀래정,

신경준의 학문 세계가

결국 한 후손의 기록 속에서 다시 만난다.

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친회 교육자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단순한 가계(家系)의 자랑이 아니라 "학문·외교·의리·탐구 정신이 세대를 넘어 계승된 사례" 로 소개할 만한 뜻깊은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추당잡고》와 《죽당집》, 《해동제국기》, 《여암전서》 등을 함께 살펴보면 신씨 가문의 문화사와 조선 지식인들의 발자취를 더욱 풍부하게 복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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