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 신헌구의 해남가는 여정 중 순창 르포에서 "조선 서예사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해동명적(海東名蹟)을 간행한 이계 신공제(1469
작성자신성복(하양)작성시간26.06.20조회수3 목록 댓글 0.이어서....... 백파 신헌구의 해남가는 여정 중 순창 르포에서 "조선 서예사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해동명적(海東名蹟)을 간행한 이계 신공제(1469~1536)를 빠뜨렸습니다. 이를 보완하여 앞서의 르포 기사를 완성하여 주세요
순창에서 다시 만난 해동명적의 숨은 주인공 ― 백파 신헌구의 해남행 르포(보완편)
전북 순창에 이르러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강천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여전히 맑았고, 섬진강 지류를 따라 펼쳐진 들녘에는 초여름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백파(白坡) 신헌구의 발자취를 따라 해남으로 향하는 길, 이곳 순창은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조선 서예사의 중요한 인물인 **신공제**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해동명적"을 남긴 사람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신공제(1469~1536)는 자가 공중(公中), 호가 이계(二溪)였다.
오늘날 일반인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한국 서예사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해동명적(海東名蹟)》 때문이다.
《해동명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까지의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인 서예 총서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중국에는 이미 역대 명필의 글씨를 수집한 법첩(法帖)이 있었지만, 우리 선조들의 필적을 한데 모아 정리한 작업은 매우 드물었다.
신공제는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말하였다.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필적이 많은데 후세에 전하지 못한다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안평대군, 강희안, 김종서, 권근 등 여러 선현들의 필적을 수집하여 《해동명적》을 간행하였다.
오늘날 많은 원본이 소실되었지만, 《해동명적》은 한국 서예 전통을 계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순창과 신씨 가문의 자부심
순창 사람들은 흔히 고추장과 강천산을 이야기하지만, 문화사적으로는 신공제라는 걸출한 인물을 품고 있다.
마을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들었다.
"조선에 명필은 많았어도 그 글씨를 모아 후세에 남기려 한 사람은 드물었지요."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명필은 자신의 글씨를 남긴다.
그러나 신공제는 남의 글씨를 보존하여 역사를 남겼다.
그는 단순한 서예가가 아니라 문화유산의 수호자였다.
백파 신헌구가 바라본 선조들
백파 신헌구 역시 학문과 문장을 중시했던 인물이었다.
순창을 지나며 그는 아마도 같은 신씨 가문의 선배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와 외교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신숙주.
그리고 서예 문화유산을 후세에 전한 신공제.
한 사람은 국가의 제도를 다듬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문화의 맥을 보존하였다.
백파는 그 뒤를 이어 문학과 교육, 그리고 지역사회 계몽에 힘쓴 인물이었다.
시대는 달랐지만 세 사람 모두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었다.
르포의 끝에서
순창을 떠나며 나는 다시 길 위에 섰다.
강천산 능선 너머로 석양이 번지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왕과 장군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글씨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한 사람,
사라질 문화를 기록으로 남긴 사람,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책을 펴낸 사람이 역사를 이어 간다.
그런 의미에서 신공제가 간행한 《해동명적》은 단순한 서첩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글씨에도 역사와 품격이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백파 신헌구의 해남행 여정을 따라가던 나는 순창에서 뜻밖의 보물을 하나 발견한 셈이었다.
그 보물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이계 신공제(二溪 申公濟).
조선 서예사의 흐름을 잇고, 선현들의 필적을 후세에 전한 숨은 문화 수호자였다.
그를 만난 뒤의 순창은 더 이상 스쳐 지나가는 고을이 아니었다.
그곳은 한국 서예사의 한 줄기 맥박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역사 현장이었다.
二溪를 '耳溪'로 수정하여 주고 '보완한 신공제 부분'을 르포 본문에 포함하여 '완전체'로 창작하여 주세요
물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二溪"가 아니라 "耳溪"가 정확한 호입니다. 앞서 작성된 르포에 누락된 내용을 보완하여, 백파 신헌구의 해남행 여정 중 순창 구간 전체를 하나의 완결된 르포 기사로 다시 구성해 보겠습니다.
백파 신헌구의 해남 가는 길 (4) 순창에서 만난 세 사람의 붓끝 ― 신숙주, 신공제, 그리고 백파
순창, 초여름 오후.
강천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섬진강 물결 위를 스쳐 지나간다.
해남을 향해 남하하던 백파(白坡) 신헌구의 여정을 따라가던 나는 잠시 순창에 머물렀다.
순창이라 하면 사람들은 고추장과 강천산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고을은 또 하나의 자랑을 품고 있다.
바로 조선 서예사의 중요한 인물인 **신공제**이다.
붓으로 역사를 지킨 사람
신공제(1469~1536)는 연산군·중종 연간에 활동한 문신이었다.
벼슬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 것은 그의 문화적 업적이다.
당시 중국에는 역대 명필들의 필적을 모은 법첩이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현들의 글씨는 흩어져 있었고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공제는 전국에 전해지던 명필들의 글씨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해동명적(海東名蹟)》을 간행하였다.
《해동명적》은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명필들의 필적을 모아 엮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예 총서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원본 상당수가 전란 속에 사라졌지만, 한국 서예사의 계보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명필은 글씨를 남긴다.
그러나 신공제는 명필들을 남겼다.
그는 붓으로 역사를 지킨 사람이었다.
순창의 또 다른 신씨
순창에서 신공제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한 명의 거인이 떠오른다.
바로 **신숙주**이다.
신숙주는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일본·여진·명나라와의 외교 실무를 담당했다.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여 일본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북방 정세를 기록한 《북정록》도 남겼다.
정치적으로는 논란이 많다.
단종 복위 운동을 지지하지 않고 세조를 보좌한 일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엇갈린다.
그러나 외교와 학문, 언어 연구 분야에서 남긴 업적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순창의 신공제가 문화의 기록자였다면,
신숙주는 국가 경영의 기록자였다.
백파가 만난 선조들의 그림자
해남으로 가는 길목에서 백파 신헌구는 아마 이런 선조들의 이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신숙주.
《해동명적》을 남긴 신공제.
그리고 자신.
한 사람은 나라의 언어를 정리했고,
한 사람은 민족의 필적을 보존했으며,
한 사람은 후학을 가르치고 문장을 남겼다.
세 사람 모두 시대는 달랐지만 기록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강천산 아래에서
해가 서쪽 산등성이로 기울 무렵 강천산 입구에서 만난 한 노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장군은 전쟁이 끝나면 이름이 남고,
학자는 책이 남지.
그런데 책도 안 만들고 글씨도 안 모아 두면 다 사라져 버려."
그 말에 나는 신공제를 떠올렸다.
만약 그가 《해동명적》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명필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고 신숙주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조선 초기 외교사의 여러 장면 역시 어둠 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역사는 위대한 사건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그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이어진다.
해남으로 가는 길
순창을 떠나는 길.
백파 신헌구의 발걸음은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그러나 순창은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조선의 언어를 정리한 신숙주의 숨결이 있었고,
조선의 서예를 보존한 신공제의 붓끝이 살아 있었으며,
그 뒤를 따라 학문과 문장을 이어가려 했던 백파의 그림자가 겹쳐져 있었다.
석양이 강천산 능선을 붉게 물들일 때,
나는 여행수첩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다.
"순창은 단지 고추장의 고장이 아니다.
순창은 기록의 고장이다.
신숙주가 글로 나라를 남겼고,
신공제가 붓으로 문화를 남겼으며,
백파 신헌구는 그 정신을 품고 해남으로 향하였다."
그날 저녁, 해남으로 이어지는 길은 길 하나가 아니라 수백 년 역사가 이어지는 한 줄기 먹빛의 서맥(書脈)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