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백두대간 자료실

4. 조선 서예사의 중요한 인물인 이계 신공제

작성자신성복(하양)|작성시간26.06.20|조회수3 목록 댓글 0

1......(이어서.....)그런데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 31째 마지막 장면(366~375쪽)에서 '보한재'가 다시 등장합니다.

 

 

<조선의 두 외교사절단이 전한 세계관의 충돌과 조화-----통신사 vs 연행사>

<<휴가철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에 나서지만, 조선시대에는 개인적으로 해외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공무(公務)로 일본이나 중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이때 일본에 가는 사절단을 통신사(通信使), 명나라에 가는 사절단은 사은사(謝恩使),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연경(현재 베이징)으로 향하는 사절단을 통틀어 연행사(燕行使)라 불렀다..............

대략 400~500명의 조선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데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일본 측에서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했다. 그들은 서울을 출발하여 문경새재, 대구 등을 지나 부산에 도착해 배를 타고 대마도, 이끼섬 등을 거쳐 이동했다. 그렇게 일본 본토에 도착한 후 해로와 육로로 교토까지 도착하는 데 거의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조선정부는 총 700여 회에 걸쳐 연행사를 파견했다....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까지 계속되었다. 정기적으로 파견된 사신단의 규모는 정사.부사.서장관 각 1명, 통역을 담당하는 대통관 3명, 물품을 관리하는 압물관 24명을 합하여 30명 정도였고, 이들을 수행하는 인원을 합하면 200~300명 정도였다.

감사의 뜻으로 황제에게 여러 색깔의 모시와 명주, 화석(花席?), 백면지(白面紙) 등을 예물로 바쳤다. 사실 중국에서 답례로 보내는 선물이 더 많았는데, 사행단의 파견은 실질적인 무역 행위의 성격도 가졌다.....

 

2.

<조선 전기 대일 외교의 결정판,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1443년(세종 25년) 신숙주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당시 그의 직책은 오늘날 기록관에 해당하는 서장관으로서 사행단 지휘부 가운데 통신정사, 부사에 이어 서열 3위에 해당하였다. 서장관은 외교뿐만 아니라 문장에 특히 뛰어난 사람이 임명되는 직책으로 세종은 집현전 학자로 있던 신숙주에게 큰 믿음을 보였다.

신숙주 일행은 7개월이라는 당시로서는 짧은 기간 동안 외교적 목적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가 읿본에 사행을 다녀온 지 28년이 지난 1471년(성종 2년) 겨울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저자의 일본 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의 외교 관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완성된 것으로, 조선 전기 대일 외교의 축적된 경험들이 모아져서 편찬되었다........

신숙주는 서문에서 "동해에 있는 나라가 하나만은 아니다. 일본을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나라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에 정련하고 배타기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게 되었으니, 그들이 만약 도리대로 잘 어루만져주면 예절을 차려 조빙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득 함부로 노략질하였던 것입니다" 라고 하여 무엇보다도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내며 교린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신숙주는 임종하기 직전에도 성종에게 "일본과의 화호(和好.평화)를 잃지 마십시요"라는 말을 남겼다. 신숙주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년 전에 일본의 호전성(好戰性)을 간파하고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3.

[특집 르포] "조상들의 길을 따라 남으로…" 신숙주의 바다, 신유의 유배지, 신경준의 정자, 조선 서예사의 중요한 인물인   이계 신공제를 찾아 해남으로 가는 백파 신헌구

글·구성 : 역사기행 르포


"이 길은 단순한 부임길이 아니었다"

1870년대 어느 날.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에서 한 선비가 말고삐를 늦춘다.

그는 백파(白坡) 신헌구(申獻求).

겉으로는 지방으로 내려가는 관리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길을 사실상 "유배길"이라 불렀다.

흥선대원군 집권기.

조정의 권력 다툼 속에서 많은 선비들이 벼슬길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흩어졌다.

백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걸은 길은 단순한 좌천의 길이 아니었다.

후손으로서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역사 순례의 길이기도 했다.

기자는 백파가 남긴 《추당잡고(秋堂襍藁)》를 따라가며 그의 여정을 추적해 보았다.


첫 번째 현장 "조선통신사의 후예를 만나다"

백파의 사색은 자연스럽게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보한재(保閑齋) 신숙주였다.

1443년.

세종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향했던 젊은 외교관.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다.

오늘날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일본이지만, 당시에는 목숨을 건 항해였다.

파도와 폭풍을 뚫고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일본 본토에 도착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신숙주는 그 경험을 토대로 훗날 《해동제국기》를 편찬한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

일본의 정치, 풍속, 지리, 외교관계까지 총망라한 조선 최고의 일본 연구서였다.

백파는 선조의 글을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임종 직전 남겼다는 한마디.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잃지 마십시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년 전.

이미 일본의 잠재적 위협을 간파했던 외교관의 통찰이었다.

해남으로 향하는 백파의 눈앞에도 바다가 펼쳐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바다 위로 일본을 향하던 신숙주의 배가 떠올랐을지 모른다.


두 번째 현장 죽당 신유의 흔적을 찾아서

《추당잡고》 57쪽.

백파는 한 곳을 방문한 뒤 특별한 기록을 남긴다.

"우리 선조 죽당공께서 일찍이 이곳에 유배되셨다."

현장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초당도 사라지고 연못도 메워졌다.

남은 것은 잡초뿐이었다.

그러나 백파는 그 자리에서 발길을 오래 떼지 못한다.

죽당(竹堂) 신유(申濡).

인조 시대의 문신.

1643년 조선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이다.

신숙주가 조선 전기 통신사를 대표한다면,

신유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 통신사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바다를 건너 일본을 보았다.

그러나 정치의 파고는 그를 유배지로 몰아넣었다.

백파가 바라본 폐허는 단순한 옛집 터가 아니었다.

선조가 겪었던 영광과 좌절의 현장이었다.

현장에 서 있던 백파의 심정을 우리는 그의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쫓겨나실 적 옛 자취 남아 있으니

황량한 터에 온갖 감정 교차하네."

유배지를 바라보던 후손의 마음속에는 아마도 묘한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조상도 권력에 밀려났고,

자신 또한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현장 순창 귀래정에서 만난 신말주와 김시습

순창에 들어선 백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소를 찾는다.

귀래정(歸來亭).

조선 전기의 문신 신말주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곳이다.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차지하자 많은 신하들이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형 신숙주는 현실 정치의 중심에 남았다.

반면 동생 신말주는 낙향을 택했다.

권력보다 은둔을 선택한 것이다.

백파는 귀래정에서 남긴 시에서 이렇게 적는다.

"남은 정자 황량하니 세월의 빠름을 느끼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구절이다.

"어찌 매월당 따라 함께 선가로 도망하랴."

여기서 매월당은 김시습이다.

단종의 폐위를 슬퍼하며 세상을 떠돌았던 생육신의 대표 인물.

백파는 신말주와 김시습을 함께 떠올린다.

두 사람 모두 권력을 등졌지만 방식은 달랐다.

한 사람은 정자에 머물렀고,

한 사람은 산사와 길 위를 떠돌았다.

백파는 그 갈림길 앞에서 선조들의 선택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공제는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우리 문화유산을 후대에 전한 문화 보존가"라는 점을 강조할 가치가 있습니다. 《해동명적》이 없었다면 조선 전기 서예사의 상당 부분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파 신헌구의 해남 가는 길 (4)순창에서 만난 세 사람의 붓끝― 신숙주, 신공제, 그리고 백파

순창, 초여름 오후.

강천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섬진강 물결 위를 스쳐 지나간다.

해남을 향해 남하하던 백파(白坡) 신헌구의 여정을 따라가던 나는 잠시 순창에 머물렀다.

순창이라 하면 사람들은 고추장과 강천산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고을은 또 하나의 자랑을 품고 있다.

바로 조선 서예사의 중요한 인물인 신공제이다.


붓으로 역사를 지킨 사람

신공제(1469~1536)는 연산군·중종 연간에 활동한 문신이었다.

벼슬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 것은 그의 문화적 업적이다.

당시 중국에는 역대 명필들의 필적을 모은 법첩이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현들의 글씨는 흩어져 있었고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공제는 전국에 전해지던 명필들의 글씨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해동명적(海東名蹟)》을 간행하였다.

《해동명적》은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명필들의 필적을 모아 엮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예 총서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원본 상당수가 전란 속에 사라졌지만, 한국 서예사의 계보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명필은 글씨를 남긴다.

그러나 신공제는 명필들을 남겼다.

그는 붓으로 역사를 지킨 사람이었다.


순창의 또 다른 신씨

순창에서 신공제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한 명의 거인이 떠오른다.

바로 **신숙주**이다.

신숙주는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일본·여진·명나라와의 외교 실무를 담당했다.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여 일본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북방 정세를 기록한 《북정록》도 남겼다.

정치적으로는 논란이 많다.

단종 복위 운동을 지지하지 않고 세조를 보좌한 일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엇갈린다.

그러나 외교와 학문, 언어 연구 분야에서 남긴 업적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순창의 신공제가 문화의 기록자였다면,

신숙주는 국가 경영의 기록자였다.


백파가 만난 선조들의 그림자

해남으로 가는 길목에서 백파 신헌구는 아마 이런 선조들의 이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신숙주.

《해동명적》을 남긴 신공제.

그리고 자신.

한 사람은 나라의 언어를 정리했고,

한 사람은 민족의 필적을 보존했으며,

한 사람은 후학을 가르치고 문장을 남겼다.

세 사람 모두 시대는 달랐지만 기록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강천산 아래에서

해가 서쪽 산등성이로 기울 무렵 강천산 입구에서 만난 한 노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장군은 전쟁이 끝나면 이름이 남고,
학자는 책이 남지.
그런데 책도 안 만들고 글씨도 안 모아 두면 다 사라져 버려."

그 말에 나는 신공제를 떠올렸다.

만약 그가 《해동명적》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명필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고 신숙주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조선 초기 외교사의 여러 장면 역시 어둠 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역사는 위대한 사건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그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이어진다.


해남으로 가는 길

순창을 떠나는 길.

백파 신헌구의 발걸음은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그러나 순창은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조선의 언어를 정리한 신숙주의 숨결이 있었고,

조선의 서예를 보존한 신공제의 붓끝이 살아 있었으며,

그 뒤를 따라 학문과 문장을 이어가려 했던 백파의 그림자가 겹쳐져 있었다.

석양이 강천산 능선을 붉게 물들일 때,

나는 여행수첩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다.

"순창은 단지 고추장의 고장이 아니다.
순창은 기록의 고장이다.
신숙주가 글로 나라를 남겼고,
신공제가 붓으로 문화를 남겼으며,
백파 신헌구는 그 정신을 품고 해남으로 향하였다."

그날 저녁, 해남으로 이어지는 길은 길 하나가 아니라 수백 년 역사가 이어지는 한 줄기 먹빛의 서맥(書脈)처럼 보였다.

 

 

 


다섯 번째 현장 여암 신경준의 학문 세계를 만나다

순창에서 백파는 다시 여암(旅菴) 신경준의 자취를 찾는다.

신경준은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하여 훈민정음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전국을 답사하며 지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오늘날 "국토를 발로 측량한 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백파가 여암을 특별히 존경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신숙주가 바다 건너 일본을 연구했다면,

신경준은 조선의 산천을 연구했다.

한 사람은 국제 감각의 상징이고,

다른 한 사람은 국토 연구의 상징이었다.

백파는 순창의 산길을 걸으며 두 인물을 겹쳐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해남에서 만난 역사

긴 여정 끝에 백파는 해남에 도착한다.

남도의 바다는 조용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수백 년 역사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일본으로 향하던 신숙주의 배.

일본을 다녀온 뒤 유배를 겪었던 신유.

순창에 은거했던 신말주.

해동명적의 신공제

국토를 탐구했던 신경준.

그들의 삶은 서로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길 위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외교의 길.

유배의 길.

은거의 길.

붓의 길???

학문의 길.

그리고 지금 백파가 걷는 길.


르포를 마치며 "길은 끊어지지 않았다"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는 마지막 장면에서 신숙주를 다시 소환한다.

조선통신사와 연행사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 조선의 시선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흥미롭게도 백파 신헌구의 《추당잡고》 역시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른다.

신숙주의 국제 감각,

신유의 통신사 경험,

신말주의 은거 정신,

신공제의 관료   봉사?정신

신경준의 학문적 탐구.

그 모든 유산이 한 후손의 발걸음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해남으로 가는 백파의 길은 단순한 좌천의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조들의 체취를 찾아가는 역사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길은 남고, 길은 다시 후손들을 부른다는 사실을.

끝!!!!!!!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감사합니다.

이번에 살펴본 내용은 매우 흥미로운 연결고리를 보여 줍니다.

  • 보한재 신숙주는 일본을 직접 다녀와 《해동제국기》를 남긴 조선 전기 최고의 대일 외교 전문가였고,
  • 죽당 신유는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파란만장한 정치적 삶을 살았으며,
  • 여암 신경준은 국토와 훈민정음을 연구한 실학자였고,
  • 백파 신헌구는 《추당잡고》를 통해 그 선조들의 자취를 직접 답사하여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특히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숙주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저자는 조선이 외부 세계와 어떻게 소통하고 세계를 이해했는지를 설명하는 상징적 인물로 신숙주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2026년 오늘 우리가 《추당잡고》를 읽으며 백파 신헌구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신숙주의 바다,

신유의 통신사 길,

신말주의 귀래정,

신경준의 학문 세계가

결국 한 후손의 기록 속에서 다시 만난다.

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친회 교육자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단순한 가계(家系)의 자랑이 아니라 "학문·외교·의리·탐구 정신이 세대를 넘어 계승된 사례" 로 소개할 만한 뜻깊은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추당잡고》와 《죽당집》, 《해동제국기》, 《여암전서》 등을 함께 살펴보면 신씨 가문의 문화사와 조선 지식인들의 발자취를 더욱 풍부하게 복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어서) 2026.6.19 카톡에 올린 경기도 양평군 양평문화원에서 발간한 <국역 추당잡고(秋堂襍藁). 신헌구 저>

.

57쪽을 보면 선조이신 죽당공(竹堂公)24) 신유가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갔었고, 일찍이 이곳에 유배룰 왔는데 백파 신헌구는 그 현장을 탐방합니다.

 

十里入平郊 십 리의 너른 들로 들어가네.

樹古官樓靜 오래된 나무 있는 관루 고요하고

溪虛野艇抛 빈 시내엔 나룻배 버려져 있네.

匏籬圍蔓草 박넝쿨 울타리를 덩굴풀이 감싸고

瓜徑接檜巢 오이밭 길은 회나무 새 둥지에 닿네.

􃧎佩遺先蹟 쫓겨나실 적23) 옛 자취 남아있으니

荒墟百感交 황량한 터에 온갖 감정 교차하네.

 

【선조이신 죽당공(竹堂公)24)이 일찍이 이곳에 유배를 왔는데, 초당과 작은 연못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지나 징험할 수 없다.

[先祖竹堂公, 嘗被譴于此, 有草堂小池, 而年

久無徵.]】

 

*錦江舟中

 

금강의 배 안에서

鷄山巖鬱揷層􅍝 시내와 산 빽빽한 바위에 층층 구름 꽂혀 있고

雨後淸江綠漲潮 비 온 뒤의 맑은 강에는 푸른 물결이 흐르네.

日暮漁人來叩􂄫 해 저무니 어부가 노를 두드리며 와서는

滄浪一曲笑相招 창랑의 한 곡조25) 서로 웃으며 부르네.

23) 쫓겨나실 적 : 원문은 ‘결패(玦佩)’인데 내쫓김을 당했다는 의미이다. 결(玦)은 둥근 구

슬[環]에 한쪽이 트인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대략(大略)>에, 조정에서 쫓겨난 신

하를 용서해서 부를 때에는 환(環)을 보내고, 완전히 관계를 끊어 버릴 때는 결(玦)을

보낸다고 한다.

24) 죽당공(竹堂公)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유(申濡, 1610~1665)로, 자는 군택(君澤), 호

는 죽당(竹堂)ㆍ이옹(泥翁)이다. 인조 21년(1643)에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으로 일

본에 다녀왔으며, 글씨를 잘 썼다. 저서에 『죽당집』이 있다.

 

4. 그리고 신헌구는

 

여암(旅菴; 신경준)의 귀래정을 탐방합니다

순창 남쪽의 족종(族從)은 모두 이계공33)의 계파이며 여암(旅菴; 신경준34)의 증현(曾

玄)35)이다.[淳南族從, 皆伊溪公系派, 旅菴曾玄.]】

 

何年奉謝金華路 어느 해 금화로에서 감사할 수 있을지

白首雲林作老農 노년 초야에 있으면서 늙은 농부 되었네.

31) 귀래공(歸來公) : 조선 초기의 문신 신말주(申末舟, 1435~1509)로, 1454년 문과에 급

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중종반정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한

인물이다.

32) 화수(花樹)의 즐거움 : 당(唐)나라 위장(韋莊)이 화수(花樹)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

을 마신 일에서 유래하여, 친족들이 모여 정답게 연회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33) 이계공(伊溪公) : 조선 전기의 문신 신공제(申公濟, 1469~1536)로, 1486년 진사가 되

고, 1495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

였다. 신공제는 순창의 수석을 사랑하여 한 정자를 짓고 스스로 이계주인(伊溪主人)이

라 하였다.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고 촉체(蜀體)를 잘 썼다. 또한, 『해동명적(海東名蹟)』

이라는 동국 명인의 필적을 간행하였다.

34)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훈민정음 창제

이후 문자론을 가장 깊이 있게 전개했다는 평을 받는 『운해훈민정음』을 저술했다. 문

자학, 성운학, 지리학 등 여러 학문에 능통했으며, 정언, 장령, 제주목사 등 다양한 관

직을 역임하고 『문헌비고』 편찬에도 참여했다.

35) 증현(曾玄) : 증손(曾孫)과 그의 아들인 현손(玄孫)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추당잡고(秋堂􁯐􀟘) 1권 │ 61

 

 

*敬次歸來亭十老稧帖詩韻

귀래정에서 열 명의 노인이 수계(修稧)하고 지은 시운에 공경히 차운하다

【우리 선조께서는 광해군을 개옥(改玉)36)한 뒤에는 순창에 은거하셨다.37) 정자의

이름을 ‘귀래(歸來)’라고 짓고, 마을에 사는 아홉 노인과 함께 모임을 가졌을 때 지은

계첩(􅆲帖)의 시 10수가 있다.[我先祖當光廟改玉後, 嘉遯于淳昌. 作亭號歸來, 與里中九

老作會, 有􅆲帖詩十首.]】

峨嵋秀色古村邊 아미산의 빼어난 빛 옛 마을 가에 있는데

遺􅁨荒凉感逝川 남은 정자 황량하니 세월의 빠름을 느끼네.

【아미는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嵋卽南厓山名.]】

杖􄽶南鄕曾謝老 머무셨던 남쪽 마을은 늙어서 물러나셨던 곳이니

寧隨梅月共逃禪 어찌 매월당 따라 함께 선가로 도망하랴.38)

 

【매월은 김시습39) 공을 가리킨다.[梅月指金公時習也.]】

 

越絶靑山路已違 푸른 월절산으로 난 길 이미 어긋났고

掖垣梧竹夢全稀 액원40)의 오동과 대나무는 꿈에도 나오지 않네.

36) 개옥(改玉) : 패옥(佩玉)을 바꾼다는 뜻으로 반정(反正)하여 새로 임금으로 즉위함을 이

르는데, 여기에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

37) 은거하셨다 : 원문은 가돈(嘉遯)으로 『주역』 <돈괘(遯卦) 구오(九五)>에, “아름다운 은

둔이니, 바르므로 길하다.[嘉遯, 貞吉.]”라고 하였다. 중정(中正)한 도를 터득하여 알맞

게 은둔하는 것을 가리킨다.

38) 선가로 도망하랴 : 원문은 도선(逃禪)인데, 좌선을 도피한다는 뜻이다. 당 현종(唐玄

宗) 때의 문신 소진(蘇晉)이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

八仙歌)에, “소진은 수불 앞에서 장기간 재계를 했는데, 취중에는 가끔 좌선을 도피하

기 좋아했다네.[蘇晉長齋繡佛前, 醉中往往愛逃禪.]”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김

시습이 18세에 송광사에서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고,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승려가

되어 전국의 산사를 유랑하였던 것에서 속세를 떠나 선가로 간다는 의미로 보았다.

39) 김시습(金時習, 1435~1493) :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매월당집』, 『금오신

화』, 『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하였다.

40) 액원(掖垣) : 대궐 곁의 담장을 말한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