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32)김은지* Ⅰ. 머리말 于蒼 申錫雨(1894~1953)는 1919년 대한민국의 국호를 처음 제안한
작성자신성복(하양)작성시간26.06.23조회수2 목록 댓글 0DOI : http://dx.doi.org/10.19162/KNM.121.2024.12.04
을 꾀한 사
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첫 駐中大使로 기억
되고 있다. 조선일보 사주였던 그를 가리켜 당대 사람들은 ‘長安똑똑’, ‘귀
공자’ 라고 불렀다. 이러한 당대의 평가는 신석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집안의 재력과 명망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목 차
Ⅰ. 머리말
Ⅱ. 일본 유학과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활동
Ⅲ. 임시정부 수립 전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Ⅳ. 불법 송환 후 민족운동의 전개
Ⅴ. 맺음말
118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DOI : http://dx.doi.org/10.19162/KNM.121.2024.12.04
于蒼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32)김은지*
Ⅰ. 머리말
于蒼 申錫雨(1894~1953)는 1919년 대한민국의 국호를 처음 제안한 사
람, 송병준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민족지로의 혁신을 꾀한 사
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첫 駐中大使로 기억
되고 있다. 조선일보 사주였던 그를 가리켜 당대 사람들은 ‘長安똑똑’, ‘귀
공자’ 라고 불렀다. 이러한 당대의 평가는 신석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집안의 재력과 명망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목 차
Ⅰ. 머리말
Ⅱ. 일본 유학과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활동
Ⅲ. 임시정부 수립 전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Ⅳ. 불법 송환 후 민족운동의 전개
Ⅴ. 맺음말
118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을 기반으로 조선일보사를 매입하여 민족지로서 위상을 드높이는데 기
여 한 바가 크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후대에도 신석우를 대표하는 활
동은 조선일보 발행인이던 1924년 9월부터 1931년 7월까지의 기간에 머
물러 있다.
신석우는 1911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 때부터 줄곧 독립운동에 참여해
왔다. 와세다대를 다니며 학우회 활동을 했으며, 귀국 후에도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중국 망명 이후에는 문중 어른인 예관 신규식과 함께 독립운
동 통일기관 수립을 위한 제반 활동을 함께 하였고 임시의정원 제1회 회
의에 참석하여 민주공화제인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사안들을 주도하였다. 일제의 불법적인 송환으로 강제
귀국하게 된 뒤에는 조선일보사 운영 뿐 아니라 사회, 문화, 경제 부분에
서 다양한 민족운동을 이어 나갔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첫 주
중대사를 역임하는 등 당대 신석우가 가지는 정치적, 역사적 의미가 컸음
에도 그의 활동을 조명한 단독 연구는 없다.
그 결과 신석우의 독립운동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독립유공자 공훈
록,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1) 에는 도쿄 유학시절의 학우회 활동과 상
하이 망명 시기 동제사・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한 사실 등이 생략되거나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일보사를 떠난 이후의 행적은 묘연할 정도로 알려
진 바가 없다. 심지어 잘못된 자료의 인용으로 인물 정보의 가장 기초가
되는 그의 출생일뿐 아니라 활동 선후 관계에 오류가 생기기도 했다. 국
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임에도 조선일보와 관련한
활동 외에는 세밀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2) 신석우는 해명되거나 복원되
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12권, 1996;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 인명사전 제12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3.
2) 조선일보100년사편찬실, 조선일보 100년사 상, 조선일보사, 2020.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한 조선일보 100년사에는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조선
민중의 신문’으로 발전해 나가는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조선일
보와 신간회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사주로서 신석우의 활동을 조명한 것이다.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19
어 재평가가 필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신석우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이
을 기반으로 조선일보사를 매입하여 민족지로서 위상을 드높이는데 기
여 한 바가 크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후대에도 신석우를 대표하는 활
동은 조선일보 발행인이던 1924년 9월부터 1931년 7월까지의 기간에 머
물러 있다.
신석우는 1911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 때부터 줄곧 독립운동에 참여해
왔다. 와세다대를 다니며 학우회 활동을 했으며, 귀국 후에도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중국 망명 이후에는 문중 어른인 예관 신규식과 함께 독립운
동 통일기관 수립을 위한 제반 활동을 함께 하였고 임시의정원 제1회 회
의에 참석하여 민주공화제인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사안들을 주도하였다. 일제의 불법적인 송환으로 강제
귀국하게 된 뒤에는 조선일보사 운영 뿐 아니라 사회, 문화, 경제 부분에
서 다양한 민족운동을 이어 나갔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첫 주
중대사를 역임하는 등 당대 신석우가 가지는 정치적, 역사적 의미가 컸음
에도 그의 활동을 조명한 단독 연구는 없다.
그 결과 신석우의 독립운동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독립유공자 공훈
록,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1) 에는 도쿄 유학시절의 학우회 활동과 상
하이 망명 시기 동제사・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한 사실 등이 생략되거나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일보사를 떠난 이후의 행적은 묘연할 정도로 알려
진 바가 없다. 심지어 잘못된 자료의 인용으로 인물 정보의 가장 기초가
되는 그의 출생일뿐 아니라 활동 선후 관계에 오류가 생기기도 했다. 국
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임에도 조선일보와 관련한
활동 외에는 세밀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2) 신석우는 해명되거나 복원되
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12권, 1996;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 인명사전 제12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3.
2) 조선일보100년사편찬실, 조선일보 100년사 상, 조선일보사, 2020.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한 조선일보 100년사에는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조선
민중의 신문’으로 발전해 나가는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조선일
보와 신간회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사주로서 신석우의 활동을 조명한 것이다.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19
어 재평가가 필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신석우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은 일차적으로
그가 회고록을 작성하거나 일대기를 인터뷰 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조선일보사를 떠난 이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국내를 떠나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활동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우창의 생애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인
물들의 기록과 그를 회상하는 글을 통해서 신석우의 활동 전반에 관한 검
토가 가능하였다. 신석우가 중국에서 사용한 申獻民이라는 이름을 통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지나쳐버린 사실들을 추가적으로 확인할 수 있
었다. 흩어져있는 신석우 관련 자료들을 한데 모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그의 활동을 새롭게 밝혀내고 종합적인 고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신석우의 민족의식이 처음 발현된 도쿄 유학 시절의 학우회
활동과 학지광에 기고한 글을 통해 독립운동가로서의 민족의식 시작점
을 확인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신석우의 밝혀지지 않은 활동 중 상하이 망
명 후 同濟社 등 신규식과 밀접한 관계 속에 펼친 다양한 활동들을 새롭게
밝혀내고자 하였다.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 석상에서의 발언을 검토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역할한 부분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불법 송환 이후 국내
에서 전개한 민족운동과 1930년 이후의 행보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Ⅱ. 일본 유학과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활동
申錫雨는 1894년 9월 2일3) 경성부 水標橋町 67번지에서 부친 申泰休
3) 신석우의 출생일은 독립유공자공훈록과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 1895년으로 기재
하였으나 자료에는 1894년과 1893년으로 적시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족보와 여러 자료에
서 동일하게 적혀있는 1894년을 출생 연도로 따르고자 한다. ・1894년생 자료 : 高靈申氏大同譜-고종 31년 甲午年 生, 동광 제14호(1927.6.1.)-開國
12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와 모친 光山 金氏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高靈(또는 산동), 字는 獻
民, 號는 于蒼이다.4) 상하이에서 활동할 때는 신석우, 신헌민 이름을 모두
사용하였다.5) 昭安公의 24世孫으로 집안에 재산이 많아 20세까지는 ‘부잣
집 도련님’이라고 불리었다.6) 그의 선조는 조선시대 申叔舟(1417~1475),
曾祖考 申彦謨는 가선대부 의정부 참찬, 祖考 申聖求는 자헌대부(資憲大
夫) 내부 대신에 추증된 바 있다.7) 신석우의 부친 孤齋 申泰休(1859~
1935)8)은 고종 43년에 종2품에서 정2품으로 승품된 인물이다.9)
부친 신태휴는 육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으로 1898년 독립협회를 금
지하는 계책을 건의해 경무사에 임명되었다.10) 한성부 警務使 직을 수행
하는 동안 의정부 贊政을 겸임하기도 했다.11) 신태휴는 경무사 재직 시
빈민에 대해 빚을 탕감해주고 기부를 하는 등 愛民 활동으로 명성이 높았
다. 그가 경무사 직을 수행하면서 경무청이 일신되었다고 평가받기도 했
다.12) 부친은 이후 수차례에 걸친 사직 상소에도 불구하고 육군법원장,
경상북도관찰사, 경상북도재판소 판사, 평안북도관찰사, 평안북도재판
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고종의 신임을 받았기에 수 차례 사직 상소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고위직에 중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03년生,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기밀 제2128호: 독립운동에 관한 건」-1919년 當26세, 신천지제9권7호(1954.6.15.)-단기4227년생으로 적혀있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明治26년 즉 1893년으로 기재되어 있음.
4) 고령신씨대종회, 高靈申氏大同譜 6권, 261쪽.
5) 「윤원삼 신문조서(제3회)」, 경무총감부, 1919.6.14.
6) 별건곤 제33호, 1930년 10월 1일, 「骨相學上으로 본 朝鮮役軍의 얼골(第二回)」.
7) 승정원일기, 「고종 41년 갑진(1904) 12월 26일(경오, 양력 1월 31일) 맑음」.
8) 매일신보 1917년 5월 22일, 「申泰休씨의 美擧, 수천원의 처장을 소각」; 삼천리 제6권 제
5호, 1934년 5월 1일, 「韓末人物의 回想, 생각나는대로 녯사람들을」; 매일신보 1932년 10
월 10일, 「申泰休氏逝去」.
9) 승정원일기, 「고종 43년 병오(1906) 1월 17일(을유, 양력 2월 10일) 맑음」.
10) 통감부문서 제8권, 「韓國 官人의 경력 일반」.
11) 「고종 41년 갑진(1904) 12월 25일(기사, 양력 1월 30일)」, 의정부 찬정 신태휴에게 경무사를
겸임하게 하라는 조령.
12) 삼천리 제6권 제8호, 1934년 8월 1일, 「人世의 閻羅王 歷代警務使 이약이(洪木春)洪木春」.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21
신태휴는 1907년(융희1년) 황족 이외에 보직이 없는 무관의 관직을 해
임하라는 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해면되었다.13) 그는 ‘러시아파’에 속하
며, 통감부의 정책을 반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4) 이러한 부친의
행보와 통감부에 대한 시선은 ‘동지 같은 父子’ 관계에 있던 신석우의 독
립운동 참여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5) 신석우는 1908년 鐵驥
李範錫의 누나인 李範述과 결혼했다.16) 1911년 휘문의숙중학을 졸업한
뒤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청산학원17)에서 어학을 공부한 뒤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18)
신석우가 일본 유학생 사회에 등장하면서 우상으로 부각되었고, 학생계
가 활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동년배로 같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졸
업생인 黃錫禹는 당시 유학생 사회에서 장덕수는 ‘무명 청년’이었던 반면
신석우는 ‘쟁쟁한 명사’였다고 회고하였다.19) 신석우의 민족의식이 드러
나기 시작한 것은 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 활동에서부터였
다. 학우회는 1912년 10월 28일 도쿄 유학생들의 친목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로 메이지대학 재학 중인 崔漢基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20) 학
우회는 1년에 4차례 기관지인 학지광을 발간하였는데, 여기에 회원들
의 연구 발표를 게재하여 민족의식과 역량 강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학우회는 표면상으로 조선인 유학생 상호 간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13) 승정원일기, 순종 1년 정미(1907) 7월 26일(을묘, 양력 9월 3일 화요일) 흐림(한국고전번
역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1_07A_26A_00050_2015_001_XML)
14) 統監府文書 8권, 「韓官人ノ經歷一般」, 1907~1909.(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jh_098_0030_0010)
15) 신석우는 부친을 “嚴父라기보다 慈父요, 동지라면 가장 가까운 동지”라고 언급한 바 있다.
(개벽 1934년 12월호)
16) 동광 제14호, 1927년 6월 1일, 「조선일보 전무이사 신석우」; 이범석, 철기 이범석 자전,
외길사, 1991, 77쪽.
17) 당시 도쿄에 미션스쿨인 청산학원이 있었다.
18) 동광 제14호, 1927년 6월 1일, 「조선일보 전무이사 신석우」.
19) 삼천리 제4권 제8호, 1932년 8월 1일, 「申錫雨論」.
20) 김인덕, 「학우회의 조직과 활동」, 118~119쪽.
122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하였다. 그러나 유학생이라면 의무적으로 학우회에 가입하도록 했으며,
가입하지 않을 시 유학생들 사이에서 질타를 받았다. 이는 학우회의 실제
목적이 일본 유학생 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으로 조직된
까닭이다.21) 신석우는 학우회 평의원과22) 총무23)를 지냈다. 신석우가 회
원이던 시기 학우회의 주요 간부는 신익희・윤현진・장덕수 등이 있었는
데, 이들은 이후 상하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과정에 함께하
였다. 이들 외에도 신석우와 함께 초기 학우회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안재
홍・신익희・백남훈・정노식・현상윤・송진우・김성수・주종건・최두
선 등이 있다.24)
신석우가 학우회 활동을 하며 민족의식을 표출한 것은 귀국을 앞두고
학지광에 기고한 「歸路에 臨하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기
고문을 통해 조선 사회의 경제를 회고하는 한편 도쿄 유학생들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조선산업의 본위가 되는 것은 농업인데 현재 전국의
경제를 윤활하게 하고 개인의 생계를 풍부히 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
였다. 일반 상업계에는 신용과 도덕이 없는 상황을 질책하였다. 공업은
발전이 더디고 시설이 거의 없는데도 이를 논의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것에 ‘肝膽이 타는 일’이라며 비판하였다. 이러한 신석우의 평가는
일제 강점 하의 조선 현실을 바탕으로 실천적 방안을 제시하여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신석우는 일제 강점 하에 있는 한국의 경제를 개선하고 장차 ‘이상적
신조선’을 건설할 주체로 청년 중에서도 도쿄 유학생을 꼽았다. 그가 생
21) 김인덕, 「학우회의 조직과 활동」, 국사관논총66, 국사편찬위원회, 1995, 119쪽.
고학생이던 장덕수가 유학비와 생활비 문제로 학우회에 가입하지 않고 일본 유학생들과
교류하지도 않아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22)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 1934.
23) 삼천리 제4권 제8호, 1932년 8월 1일, 「登場한 二人物」.
총무를 맡았던 때가 21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음
24) 김인덕, 「학우회의 조직과 활동」, 119쪽.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23
각한 도쿄 유학생은 비교적 신지식을 얻은 자들로, 한국 내에서 재산과
신분이 대개 일류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반도 사회의 부패가 심하고 동포 형제의 타락이 극심한 이때 희망으로
삼을 만한 이들”이었기에 “적어도 장래를 촉망할 점이 적지 않다.”고 보
았다. 즉 ‘文運復興’의 중추인물도 여기에서 생길 수 있기에 文的運動의
중심지도 도쿄가 되리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학우회 회원들은 각각
자신의 지위와 책임을 회고하고 자각할 필요가 있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
해 희생을 주저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25)
신석우의 이러한 지적은 1910년대 당시 재일유학생 내부에서 민족의
식이 그리 강한 상황이 아니었음에 기인한다. 이에 유학생들의 경제 인식
을 환기하고 조선 사회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도
쿄 유학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신석우와 비슷한 시기 도쿄 유학생이
던 이광수가 일본 유학생을 세계 대세와 현대문명을 일부분은 이해하고
또 전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려는 사람, 세계와 현대문명을 모르고 관리
로 출세할 것만 생각하는 사람, 남이 유학하니 나도 유학한다고 하는 사
람 세 부류로 분류한 것을 보았을 때,26) 신석우의 “자각하라”는 글을 작
성하게 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신석우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말아야 하는 대상이자,
장차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대상인 도쿄 유학생들 즉 학우회의 발전을 위
해 필요한 8가지 제언을 하였다.27) 학우회 운영에 관한 것부터 회원들의
생활 태도에 대한 것까지 현재 상황에서 시정되어야 할 것들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당시 각 출신 지역별로 모임이 분회되어 지방분회의 연합체
적 성격을 띄고 있는 학우회의 조직 구성을 지적하며, 기존의 지방분회제
도를 중앙통일제도로 고칠 것을 제안하였다. 신석우의 의견이 반영된 결
25) 학지광 제6호, 1915년 7월 23일, 「귀로에 임하야」.
26) 매일신보 1916년 9월, 「東京雜信」.
27) 학지광 제6호, 1915년 7월 23일, 「귀로에 임하야」.
124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과인지 1916년 1월 총회에서는 분회를 해산하고 중앙통일제로 개편함으
로써 새로운 체계를 갖추어 갔다.28) 이러한 신석우의 학우회에 대한 지적
은 현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일본 유학
생들의 민족의식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귀국 이후 그는 민족 자본의 육성을 위한 경제자립운동을 전개하기 위
한 목적에서 결성 된 朝鮮産織裝勵稧에 계원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산직
장려계는 1915년 3월 경성고보 교원양성소 출신 李雨用 등이 발의하여
설립한 단체였다. 전국의 교원과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을 포섭하여 약
130명이 가입되어 있었다. 신석우가 도쿄 유학시절 한국의 경제를 비평
한 것에 이어 조선산직장려계원이 된 것은 그가 강조하는 민족운동이 경
제 분야와 지식층의 역할에 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산
직장려계가 1916년 5월 보안법 위반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활동
을 지속할 수 없었다.29)
Ⅲ. 임시정부 수립 전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1) 상하이 망명과 독립운동에 투신
신석우는 1916년 7월에 상하이로 건너왔다.30) 신석우가 중국으로 간
이유는 자료상 확인할 수 없지만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모든 영역에 예관
신규식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점, 같은 시기 도쿄 유학했던 이들이 포진
28) 김인덕, 「학우회의 조직과 활동」, 119~120쪽.
29)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26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4, 291쪽.
30) 미주국민회자료집 편집위원회, 미주 국민회 자료집 제18권, 경인문화사, 2005,555쪽
(1916.9.2., 신헌민→대한인국민회 편지).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25
해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영향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석우
의 상하이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고령 신씨 문중의 예관 신규식
인 것으로 생각된다. 상하이 활동의 모든 영역에 신규식과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미 1908년 서울에서 문중 학교인 靈川
學契를 설립과 운영을 함께 한 바 있다.31)
신석우가 상하이에서 처음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은 신규식이 조직한
同濟社와 培達學會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두 단체에서 활동한 것
은 확실하나 자료의 한계상 전후 시기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동제사는
1912년 7월 4일경 신규식이 설립하고 운영비를 부담한 단체로 국권 회복
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표면상으로는 한인 유학생들의 집단 숙식 및 생
활을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각지의 독립운동 세
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조직화하는 일을 수행하였다.32) 동제사에서
신석우가 한 일은 신규식을 대신하여 도항하는 학생들을 미국 대한인국
민회에 알리는 것이었다.33)
당시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학생은 망명 유학생 신분으로 여행권 없이
도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을 받아 상륙할 수 있었다. 동제사에서는 1913년
을 전후해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편과 보증서, 휴대금을 챙겨주는
일을 수행하였다.34) 그리고 대한인국민회에 서신을 보내 도미 유학생에
31) 신규식과 신석우는 1908년 5월 문중의 자녀들은 물론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서울에 靈川學契를 설립, 운영하였다. 영천학계 총감에는 신석우의 부친 신태휴
가, 총무 신규식이 임명되었고 부원으로 신채호, 신석우가 속해 있었다.(예관 신규식전집
편찬위원회, 예관 신규식전집 제2권, 2020, 97쪽.)
32) 김준엽, 石麟閔弼鎬傳, 나남, 1995, 301~302쪽.
33) 김준엽, 石麟閔弼鎬傳, 나남, 1995, 301쪽;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 1, 「9448 暗 제209호: 在上海 亡國記念會 開催의 件「 1「, 1917.9.14.; 미주국민회자료집 편집위
원회, 미주 국민회 자료집 제18권, 경인문화사, 2005, 555쪽(1916.9.2., 신헌민→대한인국
민회 편지)・557~558쪽(1916.9.20., 신헌민→강영소 편지).
34) 김규식을 비롯한 동제사 간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은 郭林大(泰鍾)·吉天友
(鎭亨)·王世振·尹必建·李逸(龍赫)·林超·林成基·全益榮과 金觀興·朴永魯·吳林河·尹志漢·李全·趙鍾
文·崔允鎬·皇甫正杰 등이 있다.(金奎植→安昌浩 서한(上海: 1913.8.12) , 島山 安昌浩 全集 2,
126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대한 사전 안내를 하였다. 한인유학생의 안전한 미국 상륙을 위해 상하이
와 미국에서 동제사와 대한인국민회가 교류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에
연락을 취하는 일은 1913년에는 김규식이 진행했고, 1916년 9월부터는
신석우가 맡았다. 신석우는 도미 유학생에 대한 정보를 담아 대한인국민
회 북미지방총회장 강영소에게 편지35)를 보냈다.36)
신석우는 동제사에 이어 新亞同濟社에서도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
다. 당시 신석우가 ‘가문과 학식이 뛰어난 중국인들’과 훗날 국민당 중역
이 된 인물과 교류한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37) 신아동제사는 동제사
에서 중국 혁명 지도자와의 협조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결성한 단체이다.38) 동제사에서 활동하던 그가 만주 왕족 출신의 德林뿐
아니라 중국 인사들과 주로 교류했다는 것은 신아동제사에서도 활동했
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때 신석우가 국민당 중진들과 쌓은 인
연이 있었기에 훗날 그가 국민당 정권에서 군사 고문으로 활약하고, 해방
후 초대 주중대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제사는 신아동제사를 통해 宋敎仁・陳基美・湖漢民・陳果夫・吳鐵
32~34쪽; 李明花, 島山 安昌浩의 獨立運動과 統一路線, 景仁文化社, 2002, 46~47쪽.).
35) 한편 신석우가 강영소에게 보낸 편지지에는 ‘培達學會(Backtall Educational Association)’가 인
쇄되어 있다. 이는 동제사와 배달학회가 같은 계통이기에 물품을 공유해 사용한 까닭으로
보여진다. 신석우가 배달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는지의 여부는 자료상 확인되지 않는다. 배
달학회는 1916년 8월 ‘槿花學友의 情誼를 敦睦하고 학문을 硏鑽하여 가능한 공익사업을 協
圖 실행함으로 宗旨함’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신석우가 상하이에 도착한 직후에 조직되
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발굴한 「培達學會 規則」를 통해 배달학회의 구성은 회장, 총무, 서
무, 회계를 비롯하여 學務課, 體育課, 査察課가 있었고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기타 지방에 지
부를 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정은 입회금 및 회비, 기부금, 의연금으로 이루어졌
다. (「培達學會 規則」, 1916. 8.(도산안창호기념관 제공)).
36) 미주국민회자료집 편집위원회, 미주 국민회 자료집 제18권, 경인문화사, 2005, 555쪽
(1916.9.2., 신헌민→대한인국민회 편지)ㆍ557~558쪽(1916.9.20., 신헌민→강영소 편지).
신석우는 강영소에게 보내는 편지에 간략한 자신의 이력과 ‘薄德하지만 예관 선생을 대신
하여 여러 가지 일을 맡게 되었다’고 알리고 있다.
37) 이광수, 나의告白, 春秋社, 1948, 108쪽.
38) 김희곤, 「同濟社의 結成과 活動」, 180~181쪽.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27
城 등 국민당 중진들과 교류하는 한편 1917년 7월 「大同團結宣言」을 발
표하였다.39) 「대동단결선언」은 1919년 4월 수립된 임시정부의 초석을
닦은 문건이라 할 수 있다. 신석우는 그의 字인 申獻民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신석우는 나이가 확인되지 않는 2명을 제외하고도 발의자 중 최연
소자였다.40) 선언문은 신석우 외에도 신규식・박용만・한진교・홍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욱・박기준・신빈・김성・이일이 찬동하여
총 14명의 발의로 발표되었다.41) 「대동단결선언」은 독립 획득에는 대동
단결이 필요하다는 취지 하에 국내외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정부를 조직
하자는 선언문이다.
선언문에는 “융희황제가 3寶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吾人同志가 3보
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는 즉 我國民同
志에 대한 묵시적 禪位니”라며 독립운동가들이 주권을 계승할 것을 요구
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주권을 계승하여 유일무이의 통일기관을 조
직하되 새로운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헌법을 제정
하며 국제외교를 모색할 것 등을 이론으로 정립하고 있다.42) 이는 1919
년 대한민국의 건립과 임시정부의 수립에 초석이 되어 새로운 국가 및 정
부 수립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수 있었다.
한편 「대동단결선언」에는 러시아혁명과 만국사회당을 긍정적으로 평
가하면서 이를 독립운동의 호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선언문
에서 거론한 만국사회당은 1917년 개최 예정인 국제사회주의자대회를
일컫는 용어로, 이 대회를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장으로 활용하고자 했
다.43) 이에 신석우와 신규식・조소앙은 조선사회당을 조직하여 한국 독
39) 김준엽, 石麟閔弼鎬傳, 302~303쪽.
40) 신규식(1880년생)・박용만(1881)・한진교(1887)・홍위(홍명희,1888)・박은식(1859)・신
채호(1880)・윤세복(1881)・조욱(조성환,1875)・박기준・신빈・김성(김규식,1881)・이일
(이용혁,1887)・신헌민(1894)
41) 「大同團結宣言」, 1917.7.(독립기념관 소장)
42) 「大同團結宣言」, 1917.7.(독립기념관 소장)
128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립운동을 지원해줄 것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하였다. 신석우는 이들
과 함께 “입은 옷을 벗어 천애만리에 동지자대회를 찾아” 조선사회당 대
표 명의로 장문의 전보와 공함을 함께 전보하였다.44)
1918년 여름부터 유럽의 전세가 독일에 불리해지고 제1차 세계대전이
곧 끝날 것이라고 독립운동가들은 전망하였다. 이에 신석우는 여운형・조
동호・장덕수・선우혁・김철과 함께 종전 이후에 전개할 활동에 대한 것
을 매주 토요일마다 논의했다.45) 그 결과 여운형의 주도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외교적인 활동으로써 독립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
첫 번째 방법으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
에 제출하고자 계획하였다. 독립청원서는 신석우・장덕수・조동호 등과
협의를 거쳐 상하이에 있는 신한청년당 총무 여운형 명의로 서명했다.
독립청원서를 들고 파리강화회의로 향할 사람은 김규식으로 결정되었
다. 여운형은 러시아로, 김철・선우혁・서병호는 국내로 각각 나누어 파
견되었다. 장덕수는 한국 및 일본에 파견되어 이상재, 손병희를 비롯한
모든 명사에게 한국 문제에 관한 의견을 구하도록 했다.46) 텐진에서 상하
이로, 다시 파리로 향한 김규식에게 필요한 자금은 주로 상하이에 있는
교민들로부터 각출 되었다. 이때 신석우는 비용으로 1만원을 제공하였
다.47) 신석우가 제공한 1만원 중 5천원은 파리에 있는 김규식의 활동 자
금으로 송금되었다.48)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석우는 신한청년당의 결성과 활동에 참여했
43) 김인식, 조소앙 평전, ㈜민음사, 2022, 145쪽.
44) 적자보 제2호, 1919.12. 「사회주의자로서 보고(속)」.
45) 독립신문에는 “(1919년-필자주-) 2월 1일에 新韓靑年黨 呂運亨·金奎植·金澈·鮮于爀·韓鎭敎·
張德秀·申錫雨·徐丙浩 諸君이 上海에 會集하엿다”며 총 8인으로 보도했다.(독립신문 1919
년 8월 26일자 기사)
46) 김병조 편, 한국독립운동사략 上篇, 1921, 14쪽.(독립기념관 소장본)
47) 이만규, 呂運亨鬪爭史, 叢文閣, 1946, 23쪽.
48)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공7책 기7, 「기밀 제2829호 조선독립운동세 관한 상하이정보(5)」,
1919.5.26.);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49쪽.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29
으나 정작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한국독립운동사략과 독
립신문 1919년 8월 26일자 기사에는 신석우도 신한청년당원이라고 서
술하고 있으나 여운홍과 이광수의 회고에 의하면 “신석우는 신한청년당
과는 한 패가 아닌 모양이어서 그는 중국 사람들과 교제하는 모양이었
다”49) 라며 그가 당원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신석우가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는 신석우가 신한청년당 수석이 되고 김규식과 여운형
을 통역으로 해 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까닭으로 보인다.50)
1918년 가을, 신석우는 신한청년당에서 활동하는 한편으로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상하이고려교민친목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고려교민
친목회는 상하이에 거류하는 한인들의 民團 혹은 民會의 성격을 갖는 것
으로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친목회원이 되었다. 친목회의 목적은
교육, 위생 등의 사업을 주로 하고 친목 융화를 위한 것이다.51) 고려교민
친목회 회원은 약 100여 명이었으며, 선전잡지로 우리들 소식을 발행하
였다.52) 후에 고려교민친목회는 임시정부 소속 하에 조직된 상하이 교민
단이 되었다. 상하이에 건너온 지 겨우 2년 밖에 되지 않은 25세의 젊은 청
년이 교민을 아우르는 친목회 회장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곧 상하이 한인
사회에서 민족 지도자로서 신석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방증한다.
(2) 대한민국 국호 제정과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이 일어나자 해외 각지에서 이 소식을 접한
49) 이광수, 나의고백, 108쪽.
50) 이만규, 呂運亨鬪爭史, 23쪽.
신석우의 요구에 장덕수는 분노했고,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독립운동 문제를 상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장덕수와 신석우는 와세다대 유학시절 부터 오랜 기간 활동이
겹치고 있음에도 각자의 기록에 서로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51) 「윤원삼 신문조서(3회)」, 경무총감부, 1919.6.14.
52) 몽양여운형전집발간위원회, 몽양여운형전집1, 한울, 1969, 509~510쪽; 매일신보
1920년 10월 19일, 「上海假政府의 內幕(3)」.
13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이동녕・신규식 등을 위시하여 각
지로부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신채호・신익희・
조완구 등도 오고 다음으로 윤현진・이춘숙 등이 왔다. 3월 중순 이래로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로는 이동녕・이시영・현순・조완구・조성
환・김동삼 등 30여 명에 달하였다. 각지로 파견되었던 신한청년당 특파
원도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들은 3월 하순 경 프랑스조계 보창로(하비로)
329호의 허름한 집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53) 독립임시사무소
는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기구였다.
독립임시시무소에는 타자기와 등사판을 두어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관
한 기별이 오는 대로 재외 동포에게 소식을 알렸다. 선전물도 만들어 파
리강화회의와 중국・영미 각 신문을 대상으로 선전활동에 사용하였다.
서울의 독립선언서도 미리 번역하여 복사해 놓았다.54) 신석우는 앞선 행
보와 연결되게 독립임시사무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
을 전개하였다. 사람들이 모이자 임시정부를 설립하자는 의논이 나오게
되었고, 신석우는 의논을 위하여 사람들을 모았다.55)
신석우는 이동녕・이시영・조소앙・이광・조성환・이광수・현순과
함께 ‘8인 위원회’가 되어 4월 초부터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임시의정원이란 명칭과 설립을 결정한 뒤 임시정부는 統領制로 하고 총
리제를 채용한다고 하였다.56) ‘8인 위원회’에서는 국호와 관제, 헌법 등의
문제도 논의되었다. 이윽고 대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자 대표들을 선정하
여 첫 번째 임시의정원 회의이자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탄생을 결정한
모임을 추진하였다.57)
5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4권, 1972, 61, 156~157쪽.
54) 이광수, 나의고백, 110쪽.
55) 이광수, 나의고백, 114쪽.
56) 현순, 玄順自史, 299쪽.
57) 한시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국회의 관계「, 한국독립운동사연구71, 독립기념관 한
국독립운동사연구소, 230~231쪽.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31
1919년 4월 10일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가 개회되자 신석
우는 국호를 정하고, 내각을 구성하는 등의 중요한 사안에서 의사 결정을
주도하였다. 이날 회의에는 신석우를 비롯하여 현순・손정도・신익희・
조성환・이광・이광수・최근묵・백남칠・조소앙・김대지・남형우・이
회영・이시영・이동녕・조완구・신채호・김철・선우혁・한진교・진희
창・신철・이영근・신석우・조동진・조동호・여운형・여운홍・현창
운・김동삼 총 29인이 참석하였다. 제1회 회의에서 가장 먼저 논의하고
결정한 것은 임시정부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임시의정원 설립이었다. 회
의가 시작되자 조소앙이 모임의 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칭하
자고 하였고, 신석우가 재청하여 그대로 가결되었다.58)
회의 명칭이 정해진 뒤 3・1독립선언 결과 건설될 새로운 국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논의 된 국호에 대한 의견으로
신석우는 ‘대한민국’을 제안하였다. ‘대한’은 일본에게 빼앗긴 국호이니
일본으로부터 다시 찾아 독립했다는 의의를 살려야 하고, 중국이 혁명 후
에 새롭고 혁신적인 뜻으로 ‘민국’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를 따라 ‘대한민
국’이라 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여운형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일
본에게 망한 나라의 국명인 ‘대한’이라는 두서를 사용하는 것은 감정상으
로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국호 문제로 격론이 벌어지자 추가
로 ‘朝鮮共和國’, ‘高麗共和國’이라는 명칭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찬성에 따라 신석우가 제안한 ‘대한민국’이 국호로 채택되었다.59)
이윽고 정부 조직과 정부 내각 구성원을 선발할 때 신석우는 한성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정되었기에 이를 따를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신채호는 이승만은 위임통치안 및 자치 문제를 제창
하던 사람이니 국무총리로 신임하기 어렵고, 국무총리 역시 선거하자는
58)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기사록」 제1회집,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19쪽(원문).
59) 여운홍, 夢陽 呂運亨, 靑廈閣, 1967, 40~41쪽.
132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의견을 냈다. 이에 이승만 외 후보자 3인을 추천하여 선거할 것을 결정하
였다. 박영효・이상재・박용만・신채호・이회영 등이 거론되었고 최종
적으로 신석우가 추천한 이동녕과 여운형이 추천한 안창호가 후보자로
결정되었다. 무기명 투표 결과 3인 중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당선되었다.
그 외에도 신석우는 국무원 비서장 직을 설치하고 비서장을 선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 역시 가결되었다.60)
신석우가 제안한 법무부와 군무부의 증설 의견도 가결되었다. 신석우
는 국무위원 선출에도 적극적인 발언을 하였다. 그는 내무총장으로 안창
호를 추천하며, 국무총리와 마찬가지로 한성정부의 명단을 따를 것을 제
안하였다. 조완구의 재청으로 신석우의 의견이 가결되었다. 이어서 재무
총장 후보자로 남형우를 추천했으나, 손정도가 추천한 최재형이 당선되
었다. 신석우는 군무총장, 법무총장의 선거 방식 역시 공천할 것을 제안
했고 군무총장에 이동휘를, 법무총장에 이시영을 추천하였다. 투표 결과
신석우가 추천한 이동휘, 이시영이 각각 군무총장과 법무총장에 당선되
었다.61)
교통총장 역시 신석우의 제청으로 한성정부의 교통총장이었던 문창범
이 결정되었다. 다만 각 부 총장 및 각 부 차장 인선에 신석우는 피선되지
못하였다.62) 임시정부 각료를 추천하는데 있어서 재무총장을 제외한 국
무총리, 내무총장, 교통총장, 군무총장, 법무총장, 비서장 모두 신석우의
제안이 가결로 이어진 것은 그가 지도자급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와
60)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기사록」 제1회집,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21~22쪽(원문).
61)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기사록」 제1회집,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23쪽(원문).
62)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기사록」 제1회집,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22~23쪽(원문).
여운형의 추천으로 외무차장 후보에 신석우가 오르긴 했으나 투표 결과 현순이 당선되었
다.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33
적절한 추천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한편 제1회 임시의정원 회
의 내용을 일제가 정보 파악하여 조선민족운동연감에 기록하였는데,
이때 교통총장을 ‘추천한’ 신석우를 ‘선출된’ 사람으로 잘못 파악하면서
이를 인용한 후대의 서술에 ‘신석우=임시정부 교통총장’ 이라는 오류를
양산하였다.63) 신석우는 한성정부에서도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에
서도 정부 수반 명단에 오른 적이 없다.64)
「임시헌장」 제정 시에도 신석우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초안이 마련된
「임시헌장」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의 의무’에 ‘병역’을 추가하자는 신석
우의 의견을 현순이 재청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3대 의무로 교육, 납세,
병역이 정해졌다.65) 이처럼 신석우는 임시헌장의 개정과 예결산 심의 사
항뿐 아니라 각 부의 중요한 사안들을 다루는데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고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정부를 구성하는 생소한 회의였음에도 순조롭게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진행되고 신석우가 여러 사안마다 재청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유학 시절 정경학부에서 수학하며 ‘모의국회’에 참여66)
63) 조선민족운동연감의 잘못된 정보가 신석우의 활동 서술시 그대로 인용되면서 신석우
의 이력에 ‘임시정부 교통총장’이라는 오류가 답습되고 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
보훈부),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독립기념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
구원), 두산백과, 표준국어대사전 등에는 신석우가 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냈다고
잘못 서술되어 있다. 신석우가 사주로 있던 조선일보 기사에도 그의 이력을 소개할 때
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냈다고 잘못 보도하고 있다. 신석우 이력에 대한 오류가 바로잡혀
야 할 것이다.
64) <한성정부 각원> 집정관총재 李乘晩, 국무총리 李東輝, 내무부총장 李東寧, 재무부 총장
李始榮, 법무부 총장 申圭植, 교통부 총장 文昌範, 참모부 총장 柳東說, 외무부 총장 朴容萬, 군
무부 총장 盧伯麟, 군무부 차장 韓南洙, 학무부 총장 金奎植, 노동국 총판 安昌浩, 노동국 파장
李世永
<대한국민의회 각원>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 탁지총장 윤현진,
군무총장 이동휘, 내무총장 안창호, 산업총장 남형우, 참모총장 유동열, 대사 김규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4권, 171‧192쪽.).
65)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기사록」 제1회집,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25쪽(원문).
66)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71쪽.
134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한 경험이 밑바탕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자리로 각지에서 지도자급 인사들이 모여들어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
는 자리였다. 여기에서 신석우는 국호를 제안하고 각료를 추천하며 헌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안건을 제시하였고, 대부분 가결되었다. 이는 당시 신
석우가 고려교민친목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상하이 한인사회에서 가지
고 있던 입지와 발언권 등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신석우는 동제
사에서 활동하던 1917년부터 임시정부에 참여한 때까지 미주 한인사회
와 소통하기도 하였다.67) 이러한 점은 신석우가 임시정부 수립 전부터 국
내에서뿐 아니라 일본, 미주 방면에서도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신석우는 1919년 4월 30일 임시의정원 각 지방별 의원을 선거한 결과
경기도 의원에 임명되었다.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출석하여 의원자격
심사위원을 선정에 동의한 것에 이어 심사위원에 당선되었다. 5월 9일에
는 의원심사위원 자격으로 ‘일제 정탐꾼’과 교류하고 그의 주선으로 조선
총독부의 여행권을 소지하게 된 충청도 의원 李命敎에 대한 사면을 청원
하여 수리되었다.68) 이후 신석우는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만 할 뿐 소극
적인 행보를 보인다. 이는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에 실망하
여 활동지를 구미 지역으로 옮길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69) 정부가 설 때
67) 1917년 4월 10일 이대위가 국민회장에 당선된 것에 축하 서신을 보내는가 하면, 1919년 4월
14일~16일 미국 필라델피아 내 리틀극장에서 개최된 제1차 한국인대표자회의에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미주국민회자료집 편집위원회, 미주국민회자료집18, 경인문화사,
2005, 563쪽(신헌민->이대위, 1917.4.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
3.1운동사자료집 4, 고려서림, 1972, 14쪽.).
68)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기사록」 제4회집,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44쪽(원문).
69) 신석우는 1934년에 회고를 통해 “소위 國士니 志士니 정치가 무슨 家하는 분들이 도모지 大
義大體는 생각지 않고 항상 사소한 일을 가지고 서로 黨派를 지어 싸우고”라며 임시정부 활
동에 회의를 토로하였다(개벽 신간제2호, 1934년 12월 1일, 「新聞社長의 懺悔錄」.).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35
까지 임시로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자처하고 정부만 서면 손을 털고 물러
서자는 소장파들의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70)
이러한 신석우의 계획과 무관하게 그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 참석을
끝으로 더 이상 활동을 이어 나가지 못한다. 윤원삼과 함께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1919년 5월 12일 상하
이 일본총영사관에서는 프랑스총영사관을 방문하여 프랑스 조계지에 거
주하는 한국인의 체포를 요구했다. 처음 체포하고자 한 인원은 22명71)이
었는데, 주소지가 파악된 11명을 우선 체포할 수 있게 협조해 달라는 요
청이 있었다. 이때 신석우는 22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주소지가 파악되
지 않아 프랑스총영사관의 조건부 체포 동의에 결정된 11명에는 들어가
지 않았다.72)
프랑스조계 당국에서는 이들 11명이 정치적 망명자인 것을 알고 국제
관계에 부합하는 보호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 이 역시 거부하였다. 그러
자 일본총영사관 측은 이들 11명은 도둑질과 살해를 저질렀다는 명분을
들어 11명이 어려우면 이 중 손정도・여운형・이시영 3명을 체포할 수
있도록 협조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73) 일본 측이 주장은 손정도는
사기 취채, 여운형은 사기협박, 이시영은 강도 협갈 교사로 ‘1급 범죄자’
라는 것이었다. 프랑스당국은 손정도・여운형・이시영에 대해 체포를 동
70) 이광수, 나의고백, 116쪽.
실제로 독립임시사무소 및 8인의 위원회에 참여했던 소장파들은 임시정부 주요 요직에 임
명되거나 추천되지 않았다.
71)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총영사에서 체포하고자 한 22명의 독립운동가는 손정도, 현순, 여
운형, 여운홍, 이광수, 이시영, 이동녕, 조성환, 신채호, 신규식, 윤원삼, 김병조, 선우혁, 남
형우, 신익희, 남형우, 서병호, 배형식, 서세원, 조정, 이광, 신석우였다.(불령단관계잡건-
조선인의 부-재상하이지방1, 「기밀공 제53호 불령선인 신석우 및 윤원삼 체포에 관한 건」,
1919.5.16.).
72)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부-재상하이지방1, 「기밀공 제53호 불령선인 신석우 및 윤원
삼 체포에 관한 건」, 1919.5.16.
73)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대유럽외교Ⅰ 23, ,「파리위원부의 상하
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된 한국인 2명의 석방 요청」(1919.7.16.).
136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의하되,74) 한국으로 송환하기 전 반드시 예비심문을 거쳐야 한다는 조건
을 걸었다.75)
일본총영사관은 이 조건에 따르기로 하고 주소지가 확실한 3명에 대한
체포를 진행하였다. 프랑스당국이 사전에 정보를 제공한 덕분에 손정
도・여운형・이시영은 숙소에서 피해 있었으나 정보를 받지 못한 신석우
는 百爾路 明德里 455호76)에 있던 중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
제는 프랑스조계 당국과 협의한 대상들이 없자 처음 제시했던 22명 명단
에 있던 신석우를 체포한 것이다. 이에 신석우는 영장이 없으니 경찰들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그러나 2시간 뒤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윤원삼도 함께 체포되었는데, 일제
경찰이 조작하여 발부한 체포장에는 ‘협박 사건’이라는 죄명이 적시되어
있었다.77)
신석우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프랑스 사전 협의 사항이었던 예
비심문 과정 없이 당일 저녁, 한국으로 압송되었다.78) 신석우는 6월 15일
오사카상선회사 기선인 호북환으로 텐진-따련을 경유한 뒤 국내로 호송
되었다.79) 신석우와 윤원삼의 급작스러운 체포 소식에 임시정부는 법률
고문인 프랑스 변호사를 통해 항의했다. 프랑스 총영사관 역시 신석우와
윤원삼을 ‘보통 범인’이 아닌 정치적 행위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기에
74)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부-재상하이지방1, 「기밀공 제53호 불령선인 신석우 및 윤원
삼 체포에 관한 건」, 1919.5.16.
75)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대유럽외교Ⅰ 23, , 「파리위원부의 상하
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된 한국인 2명의 석방 요청」(1919.7.16.).
76) 이곳이 주소지로 있던 임시정부 요인으로는 이시영, 이동녕, 조성환, 신채호가 있다.
77)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부-재상하이지방1, 「기밀공 제53호 불령선인 신석우 및 윤원
삼 체포에 관한 건」, 1919.5.16.
78)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대유럽외교Ⅰ 23, 「파리위원부의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된 한국인 2명의 석방 요청」(1919.7.16.)
79)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부-재상하이지방1, 「기밀공 제53호 불령선인 신석우 및 윤원
삼 체포에 관한 건」, 1919.5.16.
于蒼 申錫雨의 생애와 민족운동 137
일본측이 예비심문 없이 신석우와 윤원삼을 체포, 압송한 것에 대해 수속
절차를 무시하고 관례를 어긴 행위로 간주하였다.80)
중국 언론에서도 이번 사건을 크게 다뤘다. 차이나프레스와 상하
이 가제트에서는 ‘일본의 詐謀에 의한 鮮人의 체포’라는 기사를 보도하
였다.81) 時事新報에서도 일본경찰의 불법적인 한인 체포는 관계를 어
긴 기만과 사기라며 사건을 보도하였다. 신석우의 체포에 대해 상하이 교
민들 역시 신석우는 평소 생활이 여유로운 편이었기에 체포 영장에 적시
된 ‘공갈과 사기 및 강도’는 천하의 웃음거리를 받을 만한 주장이라고 평
하였다.82) 파리의 한국통신국에서 발행한 통신전에서도 신석우는 도
쿄 와세다대학을 나온 신진 정치지도자 중 한 명임을 밝히며 일본의 주장
은 잘못되었음을 반박했다.83)
파리에 있던 김규식은 1919년 7월 16일, 파리위원부 한국 대표단 명의
로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한국인 석방 요청서를 보냈다. 김규식은 서한
을 통해 이 사건은 정치적 망명자 보호에 관한 국제 관계를 심각하게 훼
손하는 일이며 왜곡된 보고로 인해 벌어진 실수가 재발하지 않도록 검토
해달라고 요청하였다.84) 그러나 프랑스 조계 당국은 별다른 조치는 취하
지 않고 비판적인 여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했을 뿐이다.85)
80) 時事新報, 1919년 5월 17일, 「일본경찰이 프랑스 조계에서 한인을 체포한 사건의 후속보
도」.
81)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부-재상하이지방1, 「기밀공 제53호 불령선인 신석우 및 윤원
삼 체포에 관한 건」, 1919.5.16.
82) 時事新報, 1919년 5월 17일, 「일본경찰이 프랑스 조계에서 한인을 체포한 사건의 후속보
도」.
83)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대유럽외교Ⅱ 24, 「통신전 제13호 : 전보
를 통해 전해진 미국 상원의 결의문 소식과 일본의 한국인들에 대한 고문 소식」(1919.7.9.).
84)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대유럽외교Ⅰ 23, 「파리위원부의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된 한국인 2명의 석방 요청」(1919.7.16.).
85) 프랑스 조계 당국의 태도 및 입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혜린, 상해 프랑스 조계 당국의
한인정책 연구(1919-1937),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24을 참조.
138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21
Ⅳ. 불법 송환 후 민족운동의 전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