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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바레시]-올드스타

작성자Arsenal|작성시간03.01.10|조회수348 목록 댓글 0

본명 : Franco Baresi
생년월일 : 1960년 5월 8일
출생지 : 이탈리아(Travagliato) 출생
신장 / 체중 : 176cm / 71kg
포지션 : 수비수(DF)
소속팀 : 은퇴
전 소속팀 : AC밀란

주요경력

- 1977~1996년까지 세리아리그 515경기출장
- 58경기 연속 무패달성
- 'AC 밀란 1백년 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
- 20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선수, 이탈리아 역대 최고의 수비수선정
- AC밀란에서 영구 결번 등번호 6번
- 82, 90, 94월드컵 참가
- Serie A 6번 우승(78/79, 87/88, 91/92, 92/93, 93/94, 95/96)
- Champions League 3번 우승(88/89, 89/90, 93/94)
- European Super Cup 3번 우승(1989, 90, 94)
- Intercontinental Cup(도요타컵) 2번 우승(1989, 90)
- 코파 이탈리아 우승 4회

프랑코 바레시가 위대한 것은 1974년(14세)에 AC밀란의 유스팀에 입단한 뒤로 AC밀란이 2번이나 Serie B로 강등되는 동안에도 팀을 떠나지 않고, 1997년 은퇴할때까지 오직 AC밀란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Franco will remain in our hearts"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로 손꼽히는 선수 가운데 하나인 밀란의 전설 프랑코 바레시 선수는 하나의 클럽을 위해 자신의 선수생활 전부를 바친 몇 안되는 선수로도 유명하다.

74년 열네살의 어린 나이에 밀란에 입단해 78년 리그 데뷔전을 치른 바레시는 이듬해부터 풀시즌을 출장하며 무려 스무해 동안 밀란의 수호신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바레시는 체격적인 면에서 중앙 수비수에게 기대되는 그런 이상적인 조건을 구비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익히 알려진 사실처럼 수비라인 배후에 위치한 스위퍼로서 출중한 역할을 담당해냈는데 그의 탁월한 점은 바로 그 위치로부터 팀의 경기 페이스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조절했다는 부분이다.

또한 경기를 읽는 탁월한 감각은 오늘날 그로 하여금 이상과 같은 찬사를 가능케 만든 부분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라운드에서 상대의 의도를 미리 알아채는 놀라운 예지를 갖추었던 바레시는 실제로 경기 중 자기 팀동료들에 앞서 상대편의 움직임을 읽어내 미리 필요한 대응을 준비했고
이러한 탓에 그는 언제나 다른 이들에 앞서 볼을 따낼 수 있었는데 이는 마치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의 발에 자석이라도 붙어 있는 것과 같이 느끼게끔 만들곤 했다.

그의 이런 능력은 그를 최고의 수비수로 돋보이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실로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의 장기라 불릴 만한 또하나의 재주는 바로 오프 사이드 트랩을 기가 막히게 사용해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수비 라인의 배후를 받치는 최종 수비수인 스위퍼였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자신이 미처 상대의 침투가 있은 부분에 미치지 못했을 경우, 그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오프 사이드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레시는 밀란과 상대했던 많은 팀들과 심판들로부터 골칫거리로 인식되었고 또 그로 인해 바레시에 대한 상대들의 악몽은 보다 뚜렷이 각인되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런 그의 지능적인 수비능력 덕분에 바레시와 같은 스위퍼를 보유한다는 일은 압박을 기본으로 하는 지역방어를 구사했던 당시 모든 팀들이 꿈꿨던 바였다.

하지만 역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가운데 20년대 비토리오 포조(Vittorio Pozzo)에 이어 가장 오랜 시간 감독직을 역임했고,
82스페인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사상 세번째로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바 있는 엔조 베아르조트(Enzo Bearzot)의 바레시에 대한 확신이 있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실제로 바레시의 대표팀 데뷔는 스페인 월드컵이 치러졌던 당해에 이루어지긴 했지만
고대했던 바레시의 스페인 월드컵에서의 경기 출장은 카브리니(Antonio Cabrini), 젠틸레(Claudio Gentile), 시레아(Gaetano Scirea) 등 유벤투스 디펜스 트리오에 대한 총애를 감추지 않았던 베아르조트 탓에 결국 무산되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항거의 뜻이었을까?
바레시는 이후 대표팀 합류를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86멕시코월드컵에서 베아르조트의 아주리 군단이 실패를 경험하고 그가 지휘봉을 내려놓기까지 이어졌다.

베아르조트의 퇴진으로 다시금 아주리 군단 합류를 승낙한 바레시는 이내 자신의 진가를 확인시켜주었다.

유로88에서 그는 4경기에서 단 3실점만을 허용하는 철벽수비를 구축하며 이탈리아를 준결승에 견인했고,
자국에서 열린 90이탈리아월드컵에서도 비록 준결승에서 아쉽게 승부차기로 아르헨티나에게 패해 대회 3위에 머무는데 그쳤지만 준결승까지 6경기 동안 단 1실점만을 내주는 빗장수비의 진수를 선보이며 그 선봉에선 자신의 존재를 실감케 만들기도 했다.

이후 또다시 4년이 지났고 바레시는 34살의 축구인생 황혼기에 다시금 생애 마지막 월드컵이자 정상의 자리를 위한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대회 초반 조별 예선 노르웨이전에서의 부상이 자신의 또한차례 불행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음을 그가 어찌 알았을까!

부상여파로 잔여경기를 포기했던 그가 다시금 그라운드에 나선 것은 브라질과의 운명 같은 결승전.
첫 키커로 나선 그의 발에 온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그의 발을 떠난 볼은 골문을 멀리 벗어난 채 달아나고 말았고 숨막히게 전개된 결승전 사상 최초의 승부차기는 결국 또 하나의 축구영웅 로베르토 바지오를 나락에 떨어뜨리며 브라질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그 경기는 바레시로서는 아주리 유니폼을 입고 81번째 나선 경기이자 그의 생애 마지막 대표팀 경기였다.

그러나 아쉬움을 뒤로 한채 선수생활을 마감한 바레시에게는 수많은 영광이 뒤따르기도 했다.
밀란과 함께 스무해 넘도록 함께하는 동안 무려 716회에 달하는 공식경기를 치르면서 그가 이루어낸 타이틀은 실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이런 그의 활약을 기리는 뜻에서 밀란은 그의 배번인 6번을 영구결번시키기로 결정했고,
97년 가을 그의 공식적인 은퇴경기가 벌어진 산 시로 구장에 모인 밀란의 홈팬들은 단 2만 리라(약 10달러)의 급료로 선수생활을 시작해 스무해 동안 자신들의 꿈과 희망으로 존재했던 전설의 은퇴에 아쉬운 눈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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