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권 선교전략을 위한 불교와 기독교 주제별 비교론
제 2 장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 어떻게 다른가? (비교론)
1. 들어가는 말
불교라는 말은 “불타의 종교” 즉 “불타의 가르침”이라는 말을 줄인 것입니다. 불타는 인도 고어 싼스크리스트어의 붓타(Buddha)를 한문으로 불타(佛陀)로 표기한 말이며. 그 뜻은 “진리를 깨달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불타는 인도의 석가모니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곧 석가 부처가 도달한 불타가 되는 길을 가르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러므로 불타가 되기 위한 실천을 도(道)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런 뜻에서 불교 신자를 불도(佛道)라고도 합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타(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종교는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종교는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커다란 특징과 차이가 되고 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불교(佛敎)란 어떤 종교인가?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교리의 내용이 간단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고 다양 합니다. 처음 원시 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아주 간단한 사상을 가진 실천 불교이던 것이 석가모니의 입멸 후 점차로 시대가 흐름에 따라 상좌부와 대중부가 분열되면서 제4차 경전결집에 오기까지 방대한 경전이 형성되어서 한 평생 읽어도 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특성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적 정서가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신을 전제하지 않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종교로 기독교의 유일신을 믿는 신본주의 와 사뭇 대조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밝혀 가는 수행하는 종교로서 자기 성찰에서 오는 명상적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불교 특성은 인생의 본질을 고통의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생의 고통(괴로움)의 존재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입니다.
1) 불교는 무신론(無神論)의 종교입니다.
기독교(基督敎)는 절대적 신(神)을 의존적인 바탕에 둔 종교입니다. 그러나 불교(佛敎)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 인도에서 단일교와 다신교의 사상이 형성되어 있었고, 브라호만은 이미 창조된 신이며, 주권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때 석가모니는 일반 철학파의 한 사람으로서 브라호만의 절대적인 신을 부정하면서 연기론(緣起論)과 공(空)사상을 제시한 무신론자(無神論者)이였습니다. 석가모니의 사상은 당시의 모든 사상과 구별 짓게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제행무상(諸行無常)에 의하여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일체의 절대자를 명백하게 부정했습니다. 이와 같은 절대자의 부정 때문에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불교의 이런 무신론적 성격을 크리스마험프레이는 무신(無神)이고, 무영의 불교 철학이라고 하였습니다. 불교의 교리는 어떤 절대자 신(神)에 의해서 교리가 형성된 것이 아니고, 석가모니의 명상이란 통찰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현대 한국불교는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온 1600년 그 동안 무속신앙(巫俗信仰)과 융화되면서 발전을 가져와 한국불교를 가지고 정의할 수 없으므로 원시 불교중심으로 설명 하고자 합니다.
2) 불교(佛敎)는 깨달음의 종교(宗敎)입니다.
불교(佛敎)란 종교를 이해함에 있어 “깨달음의 세계” 이해가 필요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란 종교가 서 있는 바탕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깨달음은 불교의 구원 세계인데 “자아(自我)”라는 울타리가 깨지는 순간에 해탈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세계란 중생이 일체고(一體苦)에 빠져 있는 것은 존재의 참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며 ‘나’란 존재의 참모습을 모르는 까닭으로 생사윤회의 고통(苦痛)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아”라고 할 만한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제법무아라고 합니다.
석가모니에게 이교도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대체 어떤 분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석가모니는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는 다시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신(神)입니까?” 석가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그는 다시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천사입니까?” 석가는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그럼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체념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석가는 조용히 “나는 깨달은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일본의 불교 학자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처음부터 부처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라고 공부하고 노력하여 부처가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의 사상은 매우 현실적이며, 종교라면 의례히 있는 내세관(來世觀)의 교리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기독교와 같은 영원한 영생(永生)의 세계와 같은 그런 것을 일체 배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장의 현실에 있는 괴로움(생, 노, 병, 사)을 문제로 삼았을 뿐 다른 데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어떤 계시가 아니며, 괴로운 현실을 분석한 끝에 얻은 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진상은 괴로움(苦)과 존재가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괴로운 존재의 세계에서 해탈(解脫)하는 실천방법론을 8만4천의 불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실천적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이나 사성제(四聖諸)의 팔정도(八正道)를 살펴보아도, 기독교와 같은 능력이나 기적이나 신비적인 요소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현실적(現實的)으로, 합리적(合理的)으로 처리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거기에는 기도도 없고 예배도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 그가 설법한 초륜법문인 사성제는 이 세상은 일체개고란 이론과 그 이유와 그것을 벗어나는 길(道)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오직 자기의 실천을 통한 깨달음을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고통>과 <존재>는 하나라는 사상적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존재(存在)가 없어지면 고통(苦痛)도 없어진다는 이론으로서 윤회하는 고통의 존재세계에서 해탈(解脫)하는 이상을 깨달음으로 불타가 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은 모두 다 부처라고 하는데, “깨달은 부처냐”, “깨닫지 못한 부처냐” 하는 차이점만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實有佛性)이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불교는 철두철미한 자력(自力)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죄(罪)를 사함 받고 구원받는 종교라면, 불교는 고통(苦痛)의 존재에서 해탈(解脫) 해서 불타가 되는 종교입니다. 해탈의 세계는 무생무사(無生無死)의 세계, 즉 죽음도 탄생도 없는 무(無)의 세계, 공(空)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영생을 믿는 종교로서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영생>이란 무엇인가? 문자대로 말하면 영생(永生)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에도 주님을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고통의 존재인 윤회(輪廻)의 속박에서 해탈되어서 없어지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영생(永生)을 믿는다는 것이 불교와 다릅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해탈의 세계인 무(無)존재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에서 석가모니는 임종하면서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 처로 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되느니라”라고. 유언하고 운명했습니다.
기독교 영생(永生)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주님을 믿는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생을 소유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지(依支)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잠언 3장6절의 성경말씀과 너 자신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기독교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思想)을 가진 종교(宗敎)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두 종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원의 세계와 구원받는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철두철미하게 자력(自力)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철두철미한 타력(他力)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문제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罪人)이라고 보면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고 하고, 불교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일체고(一體苦)인 고통의 존재로 봅니다. 기독교에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데서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반면, 불교는 자신이 고통(苦痛)의 존재(存在)라고 깨달은 것에서부터 구원이 출발합니다. 불교의 구원은 자기 밖에 어떤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잘 조어된 자아(自我)를 찾아 <깨달음>을 얻어 불타가 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즉 불교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부처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자신이 바로 <부처다>라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구원이 출발합니다. 기독교의 구원(救援)은 절대적인 신[神‘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의존적(依存的)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창시자 석가모니 부처를 중심으로 한 종교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석가모니를 기독교와 같이 그를 중심으로 한 신앙 고백을 형성(形成)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절대자를 부정하므로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신앙유형의 구조를 종교학적으로 얘기할 때 자력(自力)신앙 혹은 자력종교라고 합니다. 내 힘에 의해서, 내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어떠한 속죄자도 아니고. 심판자도 아니며. 중제자도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항상 닦는 것을 강조합니다. 누가 닦을 것인가? 스스로 닦을 뿐입니다. 불교의 구원은 각자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는 열반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말 중에 “너희들은 너희 자신에게 의지해라, 또는 진리에 의존해라, 그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너 자신에 의지하라 했고 그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故 이성철 종정스님도 초팔일 범어에서 자기 밖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바다 밖에서 물을 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4) 불교는 인간학(人間學)의 종교입니다.
불교(佛敎)란 종교의 특성은 “처음도 끝도 모두가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어떻게 존재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석가모니의 깨달음에서 얻은 해답은 <존재>와 <고통>은 하나라는 결론 이였습니다. 불교의 중심 사상은 인생 삶의 생사(生死)문제 해결에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구도의 첫걸음도 인생의 <생, 노, 병, 사> 이였습니다. 고통의 세계에서 해탈은 다른 방안은 없고, 나의 존재[윤회]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없어지기 위에서는, 욕망[번뇌]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망이 없어지면, 존재가 없어지고”, “존재가 없어지면 고통이 없어진다.” “고통이 없어지면. 부처가 된다”는 것이 불교 교리입니다.
불교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고(苦)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간학에서 고(苦)의 원인을 알고 고(苦)가 없는 곳으로 가는 길을 석가모니는 곧, 연기의 터널 속에서 “고(苦)는 연생(緣生)이다”라고 깨달음을 외친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고(苦)다”라는 것이 불교의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일체고(一切苦)인 나의 삶을 냉철한 관념으로 응시하여 해탈(解脫)을 목표로 깨달음의 세계를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인간학(人間學)에 있어서 왜 모든 인간 삶에 고통(苦痛)이 생겼는가, 인간에게 생긴 고통(苦痛)을 어떻게 극복하는 가의 분석 판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분석의 핵심은 인간이 사물에 고착되어 그것을 가지려고 하는 욕망(慾望)을 갖거나 아집(我執)을 갖기 때문에 고통(苦痛)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착과 집착에서 물러날 때, 그리고 거기에 얽매이는 아집(我執)에서 해방될 때 고(苦; 존재)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은 해탈입니다.
5) 불교는 무존재(無存在)론 입니다.
불교는 존재론에 있어서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전연기(流轉緣起; 생사가 계속되는 윤회세계)와 환멸연기(還滅緣起; 생사가 단절된 윤회가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불교의 존재론적 목적은 유전연기를 단절하고 해탈의 세계 즉 무생(無生)무사(無死)의 세계로 귀향하려는 환멸연기인 무(無)존재의 세계에 있습니다.
불교는 윤회의 세계로부터 해탈에 있습니다. 해탈이란 윤회의 세계와 연결 지어진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탈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입니다.
부처 불(佛)의 글자에는 재미있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불교(佛敎)의 불(佛)이란 불타(佛陀)의 약자이고 불타는 인도 산스크리트어의 붓타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중국의 번역자들이 <붓타>를 번역할 때 그 뜻을 상당히 생각하면서 한문을 사용하였습니다.
부처 불(佛)은 사람 인(人)자와 말 불(弗; 허상)자를 합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불(佛)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불타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일체개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와 <고통>이 <하나>이므로 존재가 없어지면 고통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문의 불교의 불(佛)자의 뜻입니다. 불교의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은 유전연기인 윤회세계에서 탈출하는 해탈입니다. 해탈은 존재가 없는 무(無)존재의 세계입니다. 즉 탄생도 죽음도 없는 무생무사의 세계(환멸연기)입니다.
3. 기독교(基督敎)란 어떤 종교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러므로 기독교(基督敎)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시된 종교입니다. 불교가 브라만[힌두교]을 개혁한 종교라면, 기독교는 유대교를 모체로 하고 유대교의 정신을 그대로 기독교의 정신으로 받아 들여 귀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1) 기독교(基督敎)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 2004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초자연적인 탄생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으로는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7:14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BC, 700년에 예언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나 미래가 없는 영원한 ‘현 존재자’이시기 때문에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어제나 오늘이나 미래에도 하나님이 성령으로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마누엘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이 사실이 불교와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이 30세 되던 해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갈릴리 요단강으로 오셨는데 요한은 주님께 세례 줌을 사양했습니다(마 3: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제 허락하라”(마3;15)하매 요한이 허락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 왔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내려왔고(마3;16)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성령에 인도되어 광야로 나가 빈들에서 40일간을 금식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심사숙고하는 중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갈릴리로 복음전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이었습니다. 앓는 병자에게 기적의 치료와, 배고픈 자에게 양식을 기적으로 주시므로 많은 무리가 그 뒤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이런 일들에 있지 않았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의를 구하라(마6;23)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3;16) 성경말씀과 같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아 영생을 얻는 종교입니다.
2) 기독교(基督敎)는 창조(創造)의 종교입니다,
성경의 첫머리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공간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사람들에게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이 다스려야할 생물까지도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로 간주하고 불교는 첫째 계명에서 살생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살인하지 말라 인간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물들을 인간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불교는 창조론을 거부하고 연기론을 주장합니다. 창조자는 없고 현존하는 존재는 조건에 의하여 형성되지만 조건이 소멸하면 현존상태가 보존되지 못하므로 현상세계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닌 제행무상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3) 기독교(基督敎)는 계시(啓示)의 종교입니다.
계시란 정체를 드러내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나 보여주시는 행위입니다. 성경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으며,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꿈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 하여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애굽으로 아기를 데리고 피신하라(마 2:13)”고 계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꿈이나 환상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로 명백히 드러내셨습니다(단 2:19),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대필로 기록한 것이 신구약 66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사상으로 자아 밖에서는 누구의 계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4) 기독교(基督敎)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상에서 3년간 복음전도의 위업을 남기시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가장 감격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의 죄(罪)를 대속(代贖)할 수 있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고전 2: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롬 6:23절에서 죄 값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죽음으로 지불하셨으니 그 결과 이제까지 죄로 막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담을 헐어 버리신 것입니다(엡 2:15~1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해 주신 대속주가 되셨으며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다리 놓는 중보자가 되셨습니다(딤전 2:5~6).
5) 기독교(基督敎)는 부활(復活)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총독 빌라도에게 그 시신을 달라고 했을 때(막 15;43-44), 로마의 한 군인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내어 주었습니다(요 19;31-34). 그러나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가리켜 십자가의 종교, 부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주가 부활한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 교주의 무덤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어 놓고 그 무덤의 위엄을 나타내고 자랑들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자랑합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소망이 있고 인류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대속주로서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로써 승리하셨으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 주시고 하늘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6) 기독교(基督敎)는 영생(永生)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영생을 믿는 종교입니다. 영생(永生)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과 같이 생명을 누리며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5:24에서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6)라고 하셨습니다.
영생(永生)은 현세에서 주님을 믿는 때부터 시작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사망[지옥]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육신의 죽음이란 주님을 만나러 가기 위하여 불완전한 육신을 벗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디는 죽음에 이르러 “이 세상이 물러가고 내 앞에 새 세계가 열린다.”고 말하며 기뻐했습니다. 기독교의 영생(永生)은 불교와 같이 자력(自力)의 행위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주어집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생을 소유했습니다.
4. 나오는 말
대부분의 종교와 같이 불교(佛敎)에도 지향하는 구원의 도리가 있습니다. 불교의 구원관은 윤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이 윤리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함은 불교의 구원의 성격이 전적으로 구도자 자신의 윤리적 수행에 의해서 얻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객관적이고도 타력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불교는 개개인의 해탈, 구원을 위해 수행을 실천하는 인본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어떤 구체적이고도 단계적인 수행(修行)방법을 제시한 바가 없습니다. 자신을 화목의 제물로 정하고 하나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서 형성되었고, “죽음을 딛고 일어선 부활(復活)” 그리고 “이성을 초월한 신적 권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교는 법과 율에 의존합니다. 석가모니는 신(神)을 부정했으며 그는 불타가 되기 위해서는 제자들에게 어떠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자력을 통해서 해탈을 성취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개개인의 해탈(解脫)을 위해서 수행(修行)을 실천하는 인본적인 자력(自力)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불교와 같이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구원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귀의하는 것을 진리로 삼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15:4-7)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석가모니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믿지 말고, 너희 마음을 스승 삼아 모두 깨달아 해탈하라”는 말을 남겼고 또한 죽어서는 무덤을 남겼습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은 연약하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고,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씀했으며,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렘 17;8)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재생목사 입니다. 본 주제 강의는 본인의 저서인 “불교권 선교전략을 위한 불교와 기독교 주제별 비교론”으로서 캐나다 토론토 동부 개혁신학교에서 한 주간 비교종학 특강한 9 강좌를 차례로 기고하고자 합니다.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개종선교회 회장.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011-334-2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