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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니체와 퇴계의 죽음

작성자Jun Youn-kyu|작성시간21.10.11|조회수66 목록 댓글 0

니체와 퇴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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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哲人들의 죽음의 의미는 우리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비교하여 보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삶의 참 의미는 ? 한번 되 돌아 보시면 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니체와 퇴계의 죽음




비참한 죽음, 인간답지 않은 죽음을 날마다 접합니다. 끔찍하지만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죽음은 삶만큼 중요하다란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웬만한 사람들이 모이면 빠지지 않는 화두가 죽음이고 결론은 항상 비슷합니다.

"나는 인간답게 죽겠다". 그러면서 또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 인간답게 죽는 것인가,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

서양 정신세계에 니체만큼 큰 영향을 준 인물도 드뭅니다.

니체는 당시까지의 모든 철학과 종교관, 인간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일생 동안 추구한 최대의 화두는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것은 종교의 부정이 아닙니다. 피안의 존재에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상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의 완성에 전념하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한 인간다운 인간의 완성상은 끊임없이 안정을 거부하고 새로운 혼돈을 지향해 전진하는 역동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을 니체는 초인(위버멘쉬)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니체의 삶은 전적으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초인이 될 수 있는가의 탐구였다 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니체는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철학도이기 이전에 예술가였습니다. 독일에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고도의 상징기법과 뛰어난 언어유희가 담긴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바이런이 쓴 극시 만프레드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슈만과 차이코프스키가 이 시를 주제로 명곡을 만들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소질이 있었던 니체도 20대 초 피아노 듀엣곡 <만프레드 명상곡>을 작곡했습니다. 비록 음악가들에게 혹평을 받았지만 음악은 니체가 평생을 같이 한 친구였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인간을 탐구했으니 인간의 삶 뿐 아니라 인간의 죽음 또한 그의 탐구 대상이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고 할 것입니다.

니체는 자연사를 경멸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두려움 때문에 외면하다가 느닷없이 맞아 당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경멸했습니다. 삶의 완성이 이루어진 순간 자발적으로 택하는 죽음이야말로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사는 이를 도와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죽음은 그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죽음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1889년 1월 3일 이태리 토리노의 알베르토 카룰로 광장에서 채찍질 당하는 늙은 말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니체는 차마 글로 옮기기도 비참할 정도의 치매 증상을 보이다 1900년 8월 25일, 56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니체의 죽음은 인간은 의지만으로 자신의 죽음의 모습을 선택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은 니체보다 300년도 더 이전, 조선에서 태어난 철학자입니다. 퇴계는 애초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려 벼슬길에 나선 전문 관료였습니다. 그러나 니체와 마찬가지로 바람직한 인간의 삶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자 관직을 통한 정치보다는 도학 연구에 심취하게 됩니다.

퇴계와 니체는 둘 다 완전한 인간상을 꿈 꿨지만 출발부터 달랐습니다. 니체는 신에게의 의지조차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라고 배척했지만 퇴계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착한 마음을 닦는 것을 인간의 도리로 보았습니다.

때문에 퇴계는 인간을 공경하고 하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경(敬)사상을 자신의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말라고, 인간 자신만을 갈고 닦아 신이 두렵지 않은 지경까지 도달하라고 닦달한 니체와는 너무도 다른 인간관이었습니다. 퇴계는 평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반듯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많은 제자들을 기르다 1570년 12월 8일(음력), 69세의 나이로 운명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니체와 너무도 달랐습니다.

퇴계는 죽기 한 달 전 쯤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그러자 선생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마무리 강론을 편 후 제자들을 돌려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당시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맏아들 준에게 명합니다. 관직을 내려놓고 집으로 오라고 말입니다. 당시 사대부 집안의 전통이 그러했으니 자신이 죽으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도 3년상을 치룰 것이고 갑자기 그리하면 현직 관리로서 나랏일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 한 것이지요.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그리고 운명하기 5일전인 12월 3일, 자제들을 시켜 그동안 빌렸던 책들을 돌려주게 합니다. 12월 4일에는 조카에게 명해 유서를 작성합니다. 조정에서 내리는 예장을 사양할 것, 거창한 비석 대신 조그만 돌에 자신의 이름과 조상의 내력, 행적만 간단히 적을 것을 당부합니다.

5일에는 시신염습 준비를 시키고 7일에는 아끼던 제자에게 남은 서적의 관리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8일 오전,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 깨끗이 세수한 다음 머리맡에 있던 매화 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합니다. 이른 나이에 아내를 잃고 관직에 있으면서 맺었던 관기 두향과의 짧은 인연을 그리며 선생이 평생 간직했던 화분입니다.

그 매화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 다음 자리에 누운 선생은 그날 오후 자식들과 제자들에게 둘러 쌓여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두 철학자를 떠올리면 니체가 일찍이 퇴계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니체가 퇴계를 알았다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가장 인간적인, 인간으로서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죽음이 어떤 것인 지, 어떻게 해야 그런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지 알았을 테니 말입니다

토리노의 광장에는 아직도 채찍질 당하는 말의 비명이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산서원에는 사랑이 가득합니다.

9개월간의 만남 이후 21년간 얼굴을 맞대지 않았던 두향은 선생의 죽음을 확인하고 남한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 두향의 매화가 지금도 대를 이어 도산서원 입구에서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퇴계의 삶과 죽음을 보면 답이 보입니다.

다만 그를 닮기에 너무도 부족한 내 모습도 함께 보이는 것이 한스럽지만 퇴계를 모르고 죽은 니체를 생각하면 이만함도 복에 겹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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