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일반 게시판

[스크랩] 만남과 이별의 순서

작성자Jun Youn-kyu|작성시간23.02.19|조회수26 목록 댓글 0

       
만남과 이별의 순서


2019년 여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자신의 신작 소설 ‘죽음’을 들고 한국을 찾아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묵직한 주제와 달리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편안하게 끊임없이 죽음을 살피고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왜 태어났을까? 어떻게 죽을까?” 스스로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합니다. 생물학적인 답이 아니라 철학적 답변으로. 그 질문에 익숙하지 않으면 노새처럼 일하다가 늙고 퇴직해서 어느 날 죽는 무의미한 삶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의 대머리를 만지면서 묻습니다.

“대머리의 장점이 무언지 아십니까? 내가 알려드릴까요? 흰머리가 나지 않는다는 거죠.”

죽음이란 분위기에 눌려 있던 좌중을 한 마디 개그로 웃음바다로 만드는 재능도 보였습니다.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나무 옆에 누워서 눈을 감고 죽음을 온전히 느끼며 죽기를 소망하기도 했지요.

인생은 공부를 많이 한다고 문제 해결 능력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타이타닉은 공부를 한 엔지니어들이 건조했지만 노아는 독학으로 방주란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타이타닉은 침몰했고 방주는 대홍수를 거뜬히 견뎌냈지요.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답은 '무엇을 생각하고 만들었느냐'에 숨어 있습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명제처럼 삶과 죽음을 통찰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만남이 먼저냐, 이별이 먼저냐?’에서도 계속됩니다. 흔히 인생은 만남으로 시작된다고 말하지만, 이를 반대 논리로 접근한 이는 이어령 교수입니다.

엄마와 태중 아기는 한 몸으로 존재해 오다가 일정 시간이 되면 출산이란 과정을 거치는데, 출산은 탯줄을 끊어 엄마와 분리될 때 완성되죠.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 이별입니다. 고로 삶의 시작은 ‘이별’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끝없는 이별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사람에게 어느 날 의사가 암을 통보할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해온 사람은 ‘비로소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조용히 눈을 감지요.
 
죽음 없이 어찌 생이 존재할까. 과일이 씨를 품고 있듯이 생명체는 늘 죽음을 품고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갈라 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영원을 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삶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고, 이별을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오늘을 농밀하게 삽니다.

어느 해 12월 신촌의 한 강연장에 갔다가 참으로 낯선 광경과 마주했습니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과 출판기념회’였으니까요.

故人도 통곡도 없는 초상집에 잔치가 열렸으니 내용을 모르는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요. 주인공은 서길수 교수(전 고구려발해학회장)입니다. 그날 그분의 말에서 잊고 지내온 것들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지요.

“나는 늘 마음에 죽음을 새기며 살아갑니다. 자식들에게 남길 유언을 준비하다가 죽은 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더군요. 그래서 살아 있을 때 조문올 사람을 미리 만나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준비했다”라고 전합니다.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복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서서 환히 웃으며 조문객(?)을 맞습니다. 그러자 문상을 왔다는 한 분이 서 교수를 향해 정색으로 “언제 환생하셨습니까?”라고 농담을 거는 바람에 장내가 한바탕 웃음소리로 들썩였습니다.

그는 수년간 산사에서 죽음 공부를 하다 내 그릇으로는 득도가 어렵다는 걸 깨닫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육종암 판정을 받습니다. 놀라움이야 있었겠지만 일단 현실을 인정하고 나니까 마음에 고요가 찾아오더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심이 갔다고 해요. 일종의 수행 검증이 시작된 셈이지요. 수술한 의사가 허벅지를 절개해 꺼낸 암덩어리의 크기를 알려 줄 때는, 내 몸에서 큰 업(業) 하나가 떨어졌다는 생각에 속이 후련하기조차 했답니다.

지금은 의술의 발달로 나아졌다곤 해도, 여전히 암은 재판정의 선고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암 그 자체보다 암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다 죽는 사람도 많다고 해요.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닥치는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키우게 됩니다.

우화가 생각납니다. 한 청년이 바그다드로 여행을 가다가 동행을 만나죠. 다리가 많이 아프다기에 업어주니까 동행자가 자기 정체를 밝힙니다. 자신은 바그다드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 페스트균이라며 "당초 계획은 절반인데, 당신을 생각해 3분의 1만 죽이겠다”라고 말합니다. 약속을 어기면 자기를 부르라고 주문까지 알려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사람이 절반 이상인 것을 안 청년이 페스트균을 불러 따졌습니다. 그러자 페스트균이 전하는 말인 즉 “나는 정확히 3분의 1을 죽였는데, 나머지는 다 놀라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허술해요. 생각이나 대책없이 엄중한 상황과 만나면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견자들은 삶 속에서 늘 만남과 이별, 生과 死에 대해 수시로 묻고 답을 구하며 살라고 권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소설가 이관순>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경북중고40 동기회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