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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 신성품13장(똥이라도 먹을 싯심)

작성자坤山(水原)|작성시간26.06.14|조회수28 목록 댓글 1

대종사 석두암에 계실 때에, 장 적조(張寂照) 구 남수(具南守) 이 만갑(李萬甲) 등이 여자의 연약한 몸으로 백리의 먼 길을 내왕하며 알뜰한 신성을 바치는지라, 대종사 기특히 여기시어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신심이 이렇게 독실하니 지금 내가 똥이라도 먹으라 하면 바로 먹겠는가.] 하시니, 세 사람이 바로 나가 똥을 가져 오는지라, 대종사 [그대로 앉으라.]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거동을 보니 똥보다 더한 것이라도 먹을 만한 신심이로다. 그러나, 지금은 회상이 단순해서 그대들을 친절히 챙겨 줄 기회가 자주 있지마는 이 앞으로 회상이 커지고 보면 그대들의 오고 가는 것조차 내가 일일이 알 수 없을지 모르니, 그러한 때에라도 오늘 같은 신성이 계속되겠는가 생각하여 보아서 오늘의 이 신성으로 영겁을 일관하라.]

어구해석
석두암 : 전북 부안 내변산 실상동 거북바위 옆에 있었던 2간 초당. 소태산대종사가 1921년(원기6) 가을부터 1923년(원기8) 여름까지 주석했다. 소태산은 실상초당에 머문지 1년 반 만에 다시 새 집 하나를 마련했다. 갈수록 찾아오는 신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숙소의 부족을 느껴, 김남천·송적벽이 발의하여 1921년(원기6) 음력 칠월에 공사를 착수했다. 신축기지는 천왕봉 아래, 거북바위 옆에 터를 정했다. 실상초당 옆 작은 밭 다랑이를 지나 잠시 대밭 비탈을 올라서면 바로 거북바위 오른쪽이다. 개울 건너 앞산의 인장바위가 한눈에 조망된다. 여기서 선인봉 쪽으로 50보쯤 가면 몇 기의 부도가 나온다. 소태산은 거북바위 옆의 이 초당을 ‘석두암’이라 했다. 백학명이 검은 바탕의 목판에다가 흰 글씨로 옥호를 써 방문 위에 걸었다. 소태산 스스로 ‘석두거사(石頭居士)’라 칭했다. 신축 2간 초당 석두암은 소태산의 거실로서 최초의 조실(祖室)이 된다. 방 하나는 석두거사의 처소, 다른 하나는 남자 제자들의 방으로 사용했다.
장 적조(張寂照) : 본명 미상. 법호는 이타원(二陀圓). 법훈은 대봉도. 1878년 10월 15일(음), 경남 통영에서 부친 문중(文中)과 모친 박거창(朴居昌)의 6남 5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고 고결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성격이 남성적이고 활달했다. 16세 되던 해 부모의 뜻을 따라 이웃 마을의 이씨(李氏) 문중에 출가하여 풍족한 환경에서 10여년을 지냈으나 남편과 이상이 맞지 않고 집안 살림의 구속에 묶여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구차하고 답답한 인생이라 생각하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를 원했다. 30세 미만에 집을 떠나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한때 10여년간 예수교와 보천교 등을 신앙했다. 1921년(원기6) 5월 15일 이만갑(李萬甲)의 소개로 전북 부안 변산의 실상초당을 찾아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고 이어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이후 영산에 도실(道室)을 지을 때는 여자의 몸으로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땔나무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고, 원평에 교당설립을 목적하고 교도를 찾아 순교하며 기금 마련을 위해 작농도 하고 행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평에서 변산까지 먼 길을 내왕하며 알뜰한 신성을 바쳤다. 무엇보다도 연원교화에 큰 공적을 남겼다.
구 남수(具南守) : 법호는 체타원(體陀圓). 1870년 11월 21일, 전북 정읍군 산내면에서 부친 성만(聖萬)과 모친 박씨 사이에 출생,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어렵게 성장했다. 17세시 박달석(朴達錫)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나 차례로 사망하고 둘째아들만 남았다. 32세시 군산으로 이사했고 얼마 후 다시 김제 원평으로 이사했다. 47세부터 당시 유행하던 보천교(普天敎)에 다녔으며, 1919년(원기4) 11월 20일(음)에 송적벽의 인도로 소태산대종사의 문하에 입문했다. 훗날 소태산은 쪽물(남빛)치마 입은 여인과 정산의 인연의 뜻을 살려 ‘남수(南守)’라는 법명을 주었다고 한다. 50세 되던 1919년(원기4) 금산사에서 소태산을 뵙고 크게 감화되어 극진히 대접했는데, 이듬해 영산(전남 영광)으로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후 원평과 변산을 왕래하며 청법낙도하며 익산총부 건설, 원평교당 창설에 주력하고, 순교의 직무를 맡아 영광·부안·원평·익산·전주 등지의 순교활동에 전력했다. 1939년(원기24) 7월 8일 열반했다.
이 만갑(李萬甲) : 본명은 원순(元順). 법호는 완타원(完陀圓). 1878년 2월 30일 전주 완산정에서 부친 원석(元碩)과 모친 이삼례(李三禮)의 11남매 중 넷째 딸로 출생했다. 17세에 전북 김제군 금산면 구월리 황새몰 김화성(金化成)과 결혼하여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구남수와 더불어 불교와 태을도에 독실했으며, 40세 되던 1917년(원기2) 4월 원평 송적벽의 집에서 둘째아들 김원형(金元亨)과 함께 정산종사를 만났다. 42세 되던 1919년(원기4) 금산사 송대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음식을 공양한 후 법설을 받들고 제자가 되었으며, 그해 12월 월명암에 임시 거주하던 소태산을 실상사 옆 초가를 매입하여 거주케 하고 식량과 땔감을 부담하는 등 초기 변산의 간고한 시기에 투철한 신성을 바쳤다. 이때 소태산으로부터 만갑(萬甲)이라는 법명과 함께 ‘북방세계칠중옥(北方世界七中玉)’이라는 특별한 호까지 받았다. 1921년(원기6) 훗날 북방교화와 경상도 교화의 기수인 장적조(二陀圓張寂照)를 입문시켰으며, 1925년(원기10) 원평지역 최초의 법회를 둘째아들(김원형)의 집에서 열도록 했고, 다섯째 아들 김정종(金貞鍾)을 전무출신하도록 권장했다. 평생을 독실한 신성으로 일관하다가 1961년(원기46) 4월 2일 83세를 일기로 중앙수양원에서 열반했다.
영겁 : 무시무종의 영원한 세월. 겁(劫)은 이 세상이 한번 이루어 졌다가 없어지는 긴 시간을 말하는 데 그 겁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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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안성준(대구) | 작성시간 26.06.15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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