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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은 흑해 북쪽 돈강에서 프루트강에 이르는 초원지대를 스퀴티아(Skythia)라고 부르고 그 초원에 살았던 이란계 민족을 스퀴트인이라고 하였다. 항아리의 부조(浮彫)나 무덤에서 발견된 인골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란계 유럽인종에 속하고 장신에 강건한 체구를 가졌으며, 광대뼈가 나오고 털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스키타이를 4개의 집단, 즉 왕후(王侯) 스키타이 ·유목 스키타이 ·농민 스키타이 ·농경 스키타이로 구분하였다. 이 중 왕후 스키타이가 지배자로서 군림, 아조프해(海) 북쪽 연안에 궁전을 건립하고 돈강과 드네프르강사이의 초원과 크림반도를 영역으로 하였다. 스키타이 왕국은 왕후 스키타이가 다른 스키타이를 종속국으로 하여 형성한 연맹적(聯盟的) 성격이 강한 국가였다. 스키타이는 BC 11세기경 볼가강중류 지역에서 서서히 침투해 온 민족과 원주민과의 혼혈에 의하여 형성된 민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유라시아초원지대에서는 키메르인(人)과 함께 BC 90년경 가장 일찍 유목민화하였다. 민첩하고 강력한 기마민족이 된 이들은 BC 7세기에 소아시아·시리아 방면을 침범하고 BC 6세기에는 키메르인을 카프카스의 쿠반강유역으로 쫓아내고 근거지를 아조프해 북부로 옮겼으며,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서 도나우강중류지대까지 세력을 확대시켰다.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대왕은 스키타이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BC 4세기 서방 초원에서 사르마트인이 침입하여 왕후 스키타이는 주영토에서 쫓겨나고, BC 3세기에는 켈트인에게 압박당하여 서방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드네프르강 하류와 크림반도에서만 세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BC 2세기 약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사르마트인과 보스포루스왕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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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민족) [Scythian]출처: 브리태니커
BC 8~7세기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 남부지방으로 이주했던 유목민족.
원래 이란인에 속하는 이들은 현재의 크림 지역을 중심으로 BC 4~2세기에 사르마티아인에 흡수될 때까지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여 5세기 이상 유지했다.
스키타이의 역사는 그들의 영토를 방문했던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대부분 근거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주로 러시아 인류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스키타이는 용맹성과 특히 전투중 말타기 솜씨로 인해 다른 부족들의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역사상 최초로 말타기를 터득한 민족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그 솜씨는 다른 민족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는 아시아에서 이동한 뒤 이미 카프카스와 흑해 북부 평원을 점령하고 있던 킴메리족의 영토를 침범하게 되었다. 30년간 계속된 전쟁을 통해서 이들은 킴메리족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서부에서 시리아와 유대 땅을 지나 이집트 경계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메디아인이 이들을 공격 아나톨리아 지방으로부터 몰아냈기 때문에 이들의 영토는 페르시아 경계지역과 쿠반을 거쳐 러시아 남부까지로 축소되었다.
스키타이는 전투력뿐만 아니라 그들이 건설한 문명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이들 중 부유한 귀족계급은 황금과 귀중품들로 가득 찬 무덤들을 남겼다. 지배계급이었던 로열 스키타이는 마침내 러시아 남부와 크림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스키타이 문명의 가장 다양하고 풍부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들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BC 513년에 있었던 다리우스의 침입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었다. 로열 스키타이의 정점에는 왕이 있었으며 왕의 권력은 그 아들에게 계승되었다. 헤로도투스 시대에 이르러 스키타이 왕족이 그리스인들과 통혼하게 되었다.
339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전투를 벌이던 중 스키타이의 왕 아테아스가 90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스키타이는 마침내 2세기에 멸망했는데 마지막 왕이었던 팔라쿠스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다. 스키타이 군대는 일반 평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음식과 의복을 지급받는 이외에 급료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죽은 적의 머리를 베어옴으로써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사들은 그리스 양식의 청동 헬멧을 쓰고 쇠사슬 갑옷을 입었다. 주요무기는 2번 휘게 만든 활과 끌이 3갈래로 난 화살이었다. 칼은 페르시아형이었다. 모든 스키타이인들은 적어도 1필의 개인용 말이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여러 마리의 말들, 특히 몽골 조랑말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장례풍속은 매우 정교했으며 남자가 죽으면 그의 아내와 종, 많은 말들을 함께 매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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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스키타이와 흉노가 상관관계가 있나요?
스키타이와 흉노가 친연관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누가 스키타이와 흉노가 언어랑 인종??만 다르지 문화가 아주 흡사하다는 얘길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지역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두 종족의 활동무대가 다르지 않나요?
흉노가 스키타이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혹은..그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 할만큼 두 종족사이에
문화적 친연성이 있나요? 그리고 유목민족들도 근친혼을 했는지요? 몽골민족은 근친혼은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제 단순한 생각으론 유목민은 가축을 기르다보니 근친의 폐해를 알아서 근친혼을 피했을것 같은데..ㅡ.,ㅡ
다른 유목민족한테 근친혼 사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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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변 /연관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스키타이는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세워진 최초의 유목민족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더군다나 기마민족이라는것이죠..기마민족은 몽골,돌궐,동이족이 대표적이죠.
거기에 더해서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였다는거죠...이곳에는 잘 아시다시피
우리의 민족인 알타이족이 있는곳입니다..알타이족은 동으로는 예맥(한민족)
서로는 흉노(돌궐)가 이동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런데 스키타이는 2세기경에
사라졌는데 이때부터 갑자기 흉노가 강성해지는걸로봐서는
흉노와 혼재되었을 가능성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게다가 흉노족은 4세기경에
로마를 무너뜨리잖습니까!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청동기문화입니다... 청동기문화의
대표적 유물은 바로 고인돌입니다..세계에 고인돌이 55000여개가 있는데 그중에
80%인 4만여개가 한반도에 있습니다..17000여개가 북한에 있고요.전라도에만
2만개가 넘는 고인돌이 있습니다..그래서 요즘 학계에서는 스키타이와 고조선과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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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먼저 "종족과 민족"...." 최초"..." 영향을 주었다 받았다.." 등의 흔하게 쓰이는 용어에 대해 보다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됩니다.
종족은 그렇다치고 민족은 문화적인 개념이므로 시기에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르게 변화합니다. 우리 민족은 대체로 한반도에 오랫동안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커다란 문제가 없지만 초원지대를 주무대로 살았던 "종족"들은 특정한 민족이라 칭하기 어려운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최초나 최고 같은 수식어도 역사 이해에 장애가 됩니다.. 그런 수식어는 대부분 '최초'나 '최고'가 되고픈 종족이나 민족 혹은 국가가 기록에 남김으로써 비롯된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로서 '최초'나 '최고'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더구나 수 많은 종족들과 초원 속에서 반복적인 이동생활을 주로 하는 주민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지 않아 주변 종족이나 국가에 의해 그 실상이 왜곡되서 기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 그러합니다.
영향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표현도 좀 더 객관적인 인식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대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문화라는 것은 매우 가변적이며, 향유하는 종족이나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표출되기도 하며 외래적인 영향 뿐만이 아니라 내재적인 발전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화의 '영향' 관계에 대한 표현은 현상 그 자체를 나타내는 말에 한정해서 인식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특히 시베리아의 초원문화는 그동안 이분법적 사고(이를테면 '문명과 야만')에 바탕한 연구와 인식이 많아서 일반 독자들이 그 문화의 실체를 파악하는 걸림돌이 되어왔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서 '스키타이'라는 말 자체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해 처음으로 붙혀진 명칭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될 듯싶습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자부심 넘치는 지식인에 의해 한 번 걸러진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이하의 문헌기록에 나오는 스키타이족과 그 문화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 그와 같은 제3자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문헌기록에 대해서는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보다 집중해야 될 것은 그들의 물질문화입니다.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스키타이문화란 B.C. 7세기로부터 B.C. 3세기경까지 흑해 북안의 초원지역에 분포하고 있던 스키타이족에 의해 향유되었던 독특한 초기철기문화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초기철기문화니까 청동기문화의 대세적 흐름 속에 철기가 일정부분 사용되는 분위기로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스키타이문화의 정수는 뭐니뭐니 해도 거대한 고분문화와 그 부장유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땅속에 거대한 목곽을 만들고 그 위를 돌무지와 흙으로 덮은 거대한 무덤이지요. 이것을 쿠르간(Kurgan)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청동유물이 부장되어 있는데 전반적인 양상은 군사적, 유목적, 수렵적 전통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및 내몽고에 이르는 지역에 광범위하게 발견되는데 특히 특징적인 동물형 장식물과 단검을 위시한 무기류, 그리고 무덤의 구조와 말의 순장에서 공통성이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의 경우, 이러한 공통된 문화가 스키타이문화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스키타이족은 이란어계의 종족으로서 B.C. 7세기경 흑해 북안의 초원지역으로 진출하게 되니 이때를 전후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스키타이족의 선주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란고원설과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설 등이 유력합니다. 스키타이로 상징되는 집단은 분포지역과 경제행위 등의 차이에 따라 왕스키타이, 농경스키타이, 경작스키타이, 유목스키타이의 4개 집단으로 구별되는데, 모두 동일한 종족계통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초원이라는 곳이 워낙 방대하고 이동생활이 잦은 곳이라서요... 한가지 잘못 알려진 것은 스키타이족은 유목을 주로 하지만 농경도 겸업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소규모 농경을 행하기도 했지만 초원지대 주변의 농경인들을 부리며 그 생산물을 공납으로 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암튼 4개 집단의 스키타이 중 왕스키타이가 가장 번성하고 세력이 컸는데, 다른 집단들은 정도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왕스키타이에게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왕스키타이의 주요분포지는 흑해의 북쪽에 연해 있는 초원지역이다. 스키타이문화는 좁게는 바로 이 왕스키타이집단에 의해 향유되고 주도되어진 문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키타이의 역사와 문화는 B.C. 6-7세기의 전기와 B.C. 4-5세기의 중기, 그리고 B.C. 2-3세기의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스키타이족이 흑해 북안의 초원지역으로 전입하여 자신의 문화를 성립시키던 시기이다. 유적유물 전반에서 나타나는 양상으로 보아 유목적, 군사적 성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데, 스키타이문화의 주요한 골격이 이 시기에 모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무기류나 공구류 전반에서 철제품이 고루 확인되고 있어 초기부터 철기화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기는 스키타이족 뿐만 아니라 문화의 전성기로서, 동물형 장식물로 상징되는 특징적인 유물들이 가장 정형화되고 번성하는 시기이다. 쿠르간 역시 이 시기에 대형화, 복잡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다수의 순장인과 순장동물, 그리고 황금제 유물들이 부장되지요. 이 시기에는 그리이스문화와의 교섭관계도 많이 확인되는데, 전통적인 목곽 대신에 그리스풍의 아치형 무덤방 구조도 등장하게 됩니다. 또한 이때에는 정착생활도 가속화되어 초원지대에 성곽이 축조되어 도읍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당시 최전성기를 이룬 동물장식은 동물간의 쟁투를 묘사한 것이 대표적인데요. 이러한 변화가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진행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리이스 장식예술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후기는 스키타이족과 문화의 쇠퇴기입니다. 이 시기 스키타이족은 싸르마트족(Sarmatian)의 공격을 받아서 영역이 크르임(Crim)반도 일대로 축소됩니다. 이 시기에는 스키타이문화의 그리이스화가 더욱 진행되어 궁전과 일반인의 건축물에 있어서도 하프를 타는 인물상 등 그리이스적인 양식이 보편적으로 발견될 정도라고 합니다. 농경이 계속적으로 발전되는 반면 유목문화를 상징하는 각종 동물장식은 쇠퇴하게 된답니다.
이와 같은 변화과정을 거친 스키타이족과 문화는 B.C. 3세기경 싸르마트족의 공격으로 쇠락하기 시작하다가 B.C. 2세기경 멸망하게 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스키타이족의 문화는 뒤를 이은 싸르마트족 문화에 상당수 반영되어 지속되는데, 싸르마트족 또한 A.D. 4세기경 흉노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당하게 됩니다.
스키타이족을 사실상 멸망시키고 흑해 북안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싸르마트족의 원류는 B.C. 7-4세기까지 볼가강과 우랄지역의 초원지대에 분포되어 있던 싸브라마트족(Sabramatian)입니다. 싸브라마트족은 스키타이의 동부 외곽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면서 스키타이문화에 동화되면서 세력을 키우다가 B.C. 4-3세기경 강력한 부족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 시기 이후를 싸르마트족이라고 특칭합니다. 이들은 새로이 결성된 연맹체를 중심으로 서쪽에 접해 있는 스키타이의 영역 내로 진출하여 흑해 북안의 강자로 새로이 등극하게 됩니다. 이후 싸르마트족은 A.D. 4세기 흉노에게 멸망당하기까지 흑해 북안의 주인공으로서 활동합니다.
흉노는 진한제국시절 중국 고대문헌에 기록된 중국 북방에 살던 이민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얼마 전부터 오늘날의 북중국과 내몽고 일대에서 활동하던 유목민 집단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의 커다란 연맹체를 이루어 중국사의 무대에 대두하는 시기는 전국시대 후기, 즉 기원전 4세기말부터입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선우[單于]라 불리었는데 전국시대 후기부터 세력을 북중국으로 확대하니 북중국 일대의 연나라, 조나라, 위나라 등은 장성을 쌓고 서로 대결하게 됩니다. 이것이 만리장성의 기원이지요... 그리고 기원전 3세기 후반 두만선우 때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하고 그 다음의 묵특선우 때는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지대를 포함하여 내몽골과 북중국의 최강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흉노족 혹은 흉노문화는 바로 이때부터이며, 흉노가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되는 기원후 1세기의 후한 광무제시기를 정점으로 중국문화에 동화되거나(남흉노), 중국과 선비 등 새로이 등장한 북방이민족의 외압과 자체분열로 인해 몽골고원의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고(북흉노) 2세기 후반이후 결국 중앙아시아로 본거지를 옮기면서부터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들이 기원후 3세기대에 중앙아시아와 남시베리아의 초원지대에서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면서 계속해서 서쪽을 압박하게 되니 시베리아와 그 서부지역에 머물렀던 훈족(흉노족의 일파이면서 동시에 그 지역의 선주민, 북흉노계 일파가 아니라..)으로 대표되는 흉노계 종족의 일파가 다시 그 서부를 압박하여, 결과적으로 다수의 게르만족 집단의 이동을 야기하게 됩니다.
따라서 흉노란 기원전 3세기대부터 기원후 3세기대까지 내몽고지역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의 동부부터 북중국 일대에 세력을 떨쳤던 북방 유목민족으로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이전 시기의 스키타이문화의 지역색(스키토-시베리안문화의 내몽골 유형 = 북중국식의 변형 스키타이문화 )과 전국시대 북중국문화를 모태로 하여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스키타이문화와는 시기적인 선후관계에 있고, 지역적으로도 매우 다르지만, 문화적으로는 일정한 친연관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의 전성기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문화요소를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적 친연성은 있을 지라도 직접적이면서 포괄적인 문화 계승관계를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친연성 있는 문화요소가 바로 동물장식과 황금제 부장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사실 그 이외의 일상문화는 상이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그들의 문화적 유사성을 이야기 할때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초원지대라는 광활한 무대를 배경삼아 활동했기 때문에 장식적인 요소나 예술적인 요소는 빠르게 파급되지만 일상용품이나 관습, 언어 등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어떠한 하나의 문화적인 요소가 비슷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화적 친연성을 바로 말해주는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당시에는 원거리 교역이 매우 활발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 같구요... 또한 그나마 그러한 문화적 친연성을 향유했던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는 점도 참조가 될 듯 하군요....
p.s. : 두서없이 쓰다보니 내용이 너무 길어졌군요... - - ;
유목민족의 근친혼 문제 역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유목민과 농경민의 친족범위와 그에 따른 관념
자체가 다르니까요... 부계사회와 모계사회의 전통이 다르고, 같은 혈연이라 하더라도 이쪽지역과 저쪽지역의 혈연의식이 다르면, 그리고 그것이 한두세대 지나면 서로 다른 씨족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니까요, 칭기스칸과 그 후예들의 사례를 보면 이해될거라 믿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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