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자이나교의 산타라(Santh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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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우 파일 66]
자이나교 교도인 케라 데비 할머니가 종교적 의식의 하나인 물과 음식을 먹지 않는 산타라(Santhara)를 시작했다. 그 할머니는 93세의 나이로 그들의 전통대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24일 전부터 단식했다. 그녀는 충분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고 이제는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종교적 의식 즉 산타라를 할 것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모든 가족은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녀의 결정에 대해 하지 말도록 처음에는 권했으나 막을 수 없었다. 그녀의 아들 시브 찬드는 전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 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고 그녀의 며느리 라드 데비는 말했다.
<Press trust India> 2006년 9월 29일자 기사이다.
산타라는 자이나교의 종교의식으로 죽음을 편안하게 이끄는 단식이다.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해탈에 이르기 위해 죽을 때까지 스스로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는 종교의식이다. 불교에서도 고승들이 죽을 때 이 방법을 택한다.
자이나교(Jainism)는 인도에 현존하는 유서깊은 종교이다. 자나교라고도 한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비정통 브라만교에서 발생한 출가주의 종교이다. 불전에서 니간타(Nigantha:尼乾陀)라고 전하는 종교를, 석가와 같은 시대의 마하비라(Mah?v?ra)가 재정비해 이루어진 것이다. 최고의 완성자를 지나(Jina:勝者)라 부르고 그 가르침이라 해 지나교 또는 자이나교라는 호칭이 생겼다. 불타에서 연유, ‘불교’라는 호칭이 생긴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교조의 출신과 인간형성, 지리적·문화사적 배경, 교단 성립의 경위도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인도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이후 불교·힌두교와 더불어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으므로 인도의 전통적 문화와 그 유형 무형의 유산에 관해서 자이나교를 무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불교와 교단간의 밀접한 교섭은 양종교의 원시 경전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1세기 말경 공의파와 백의파로 분열되고 다시 여러 지파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시 경전에서는 비교적 상세한 교의(敎義)가 정립돼 있으나 그 이후로는 불교만큼 다채로운 발전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후세에 와서 인식론이나 논리학은 불교의 영향이 현저한데 오랫동안 산일(散佚)돼 있던 불교의 작품들이 최근 자이나교의 승원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교도 수는 인도 전역에 걸쳐 180만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상호부조적인 성격이 강하고 상인이나 금융업자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 경제적 영향력 또한 막강하다. 그 실천생활상의 특색으로서 승려를 통해 불살생(不殺生:ahins?)이 엄격하게지켜지고 있다.
“40일이 된 지금에 왜 단식을 중단해야 하는가? 앞으로 얼마든지 더 견뎌낼 수 있는데, 왜 지금 그만둬야 한단 말인가? (……) 좀더 계속하려는 단식의 영광을 왜 박탈하겠다는 건가? (……) 한번은 어떤 인정 많은 사람이 나타나 광대가 우울해 하는 원인은 아마 단식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하려 했다. 그때는 마침 단식이 절정을 향해 가는 때였다. 수도자는 그 설명에 갑자기 화를 내며 야수처럼 우리의 창살을 요란하게 흔들어 구경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벌써 흥행주가 즐겨 쓰는 해결책이 있었다. 흥행주는 관중 앞에 나가서 수도자를 위해 변명을 하는 것이었다. "배불이 먹는 여러분께서는 아마 이해하기 곤란하겠지만 단식을 하던 사람이 성을 내기가 쉽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신다면 광대의 난폭한 행위를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유대계의 독일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년)도 1921년 출간한 『단식 수도자』를 통해 이를 조명했다. 이 책은 세계 속에서의 예술의 문제 또는 수도자의 존재를 형상화(形象化)한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로서는 이 당시 결핵의 발병(發病)과 세 번째의 파혼, 아버지와의 위기, 밀레나와의 체험 등 다양한 삶의 고통을 겪고 나서 죽음을 예감하던 시기였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예술적 삶에 대한 자기확인을 '단식 수도자'로 표현한 것이다. 대체로 그의 말년의 분위기는 절망이라든가 비극성, 문학적 생산이나 외부사회에서의 궁극적인 좌절감 등이 구조를 이룬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작품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단식은 예술의 허구적 변형으로 보인다. 작가 자신이 늘 문학적 생산에 회의를 느꼈고 외부사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는 내면세계의 문학을 고집한 것처럼 주인공의 단식술도 동일한 특성을 보여준다. 우선 그것은 무엇을 완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굶는 비생산적인 것이다. 인간의 삶과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먹지 못하는 무능력, 마음껏 운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창살 속의 좁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부자유, 바로 이것이 단식 수도자가 그 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가치이다. 인간 운명의 부조리, 인간 존재의 불안을 통찰하여,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하여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는다. 대표작은 『변신(變身)』(1916년).
산타라는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성스러운 행위인가, 아니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인가? 자살이 자유의지에 의해 행해졌다면 형사상 처벌의 근거는 없다고 한다. 물론 죽은 사람을 처벌 할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타인이 자살을 부추키거나 방임을 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렇듯 산타라에 대한 논란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산타라를 행하는 이들을 자이나교의 종교적 차원에서 해석해 본다면 지극히 성스러운 행위로 살아온 여생을 정리하며 죽음에 대해 수동적 자세보다는 능동적 자세를 취하해 종교적 신념대로 해방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타라 반대론자들의 이야기는 자살을 방조 또는 방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살인행위라는 것이다.
산타라를 선언하면 많은 자이나 교도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구름 같이 몰려든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사람과 가문을 칭송하며 죽음에 이르는 자를 성자의 반열에 올리게 된다. 지금 산타라를 행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가지로 보인다. 80∼90의 고령에 들어서 종교의 가르침대로 실천을 하는 사람과 노년에 들어 병마에 시달린 나머지 안락사에 가까운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타문화권에 있는 우리로써는 일견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얼마전 세간을 떠들석하게 했던 모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을 빌리더라도 말이다. 이것은 분명 그 종교에 대한 신념이 부족한 우리로써는 우리가 생각하는 객관적 잣대로 삶을 평가하고 접근하기에 그러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이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이 되는데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자에게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과 이 또한 합법적 살인이라는 측면에서 이 양자의 대결은 인도를 떠나서 전세계적인 윤리적인 문제이다. 이 윤리적 문제를 해결을 위해서는 복지가 필수적으로 수반돼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삶이 죽음 보다 더 힘들 수 있고 남은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비단 인도에서 일어나는 산타라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우리나라의 복지 현실 역시 열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들의 자살이 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복지사회란 없다.
<한재 신충우>
불교 사상의 지나친 해석으로 인한 망상의 걸작..자이나교
작성자 -파괴의 미학
불교는 자이나교와 분명히 독립된 종교이긴 하지만 그 사상의 원류를 보자면 사실상
많은 부분이 불교와 상통하는 면이 많습니다.
자이나교에 관해서는 검색하여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생략하고 자이나교의 신자들이
하는 행동은 참으로 사상의 지나친 비약이라고 전 단언합니다.
물을 그냥 떠마시지도 않습니다. 왜냐? 물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죽을 것이 염려스러워서
물을 몇번이나 걸러서 먹습니다. 당연히 물도 많이 마시지도 않습니다. 물을 많이 마시면
그만큼 물 속의 생명체가 많이 죽기 때문입니다.
3달에 한번씩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신이 뽑습니다. 왜냐? 그 머리카락과 수염에 미세한 생명체가
자라서 그 머리카락을 자르면 생명을 해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달린 채소도 먹지 않습니다. 왜냐? 뿌리 뽑다가 그 속에 묻어있는 생명체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항상 바닥을 쓸며 다닙니다. 왜냐? 바닥의 벌레들이 혹시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이 정도의 예만으로 여러분은 자이나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대충 간파했을 겁니다.
불교의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부처의 가르침이 비약해석하여 아예 고기를 먹지 말라는
이상한 가르침으로 전해내려오는 오늘날의 불교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세요..
분명 자이나교는 이러한 불교의 사상을 좀더 확대해석하여 아주 클라이막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자이나교 뿐인가요? 티벳교의 달라이라마는 어떻습니까?
여름에 모기가 물어도 죽이지 않고 그 고통을 참는다는 달라이라마의 말에 할 말이 없더군요.
이것이 인도 종교에서 만들어낸 망상의 걸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진리와도 상관 없는 신자들을 볼때면
차라리 종교를 버리세요.. 종교를 버리고 자신만의 사상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