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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신화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의 영광과 마우리아 왕조의 명암

작성자일 행|작성시간10.05.04|조회수527 목록 댓글 0

  

마우리아 왕조

 

 

고대 인도 왕조(BC 317?~BC 180?). BC 6세기부터 확대되어 온 마가다왕국의 영토를 이어받아 인도를 처음으로 통일하고 지배한 왕조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서북인도 침입 뒤인 BC 317년 무렵 초대찬드라굽타(재위 BC 317~BC 296)는 마가다국의 난다왕조를 무너뜨리고 오늘날의 파트나에 도읍해 새 왕조를 건설했다. 그는 인도 통일국가 완성을 목표로 북인도 일대를 영토로 하여 알렉산드로스가 서북인도의 변경에 남겨둔 그리스인 세력을 내쫓고 아프가니스탄에 진출하였다. 그래서 셀레우코스왕조의 셀레우코스 1세와 대치했으나 화의에 의해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할양케 했다. 찬드라굽타의 통치는 24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하며, 그 동안에 전에 없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남인도 정복은 그의 시대에 시작되어 그의 아들에 의해 달성되었다.
 
 제3대가 아소카왕(재위 BC 268~BC 232)으로서 광대한 영토를 계승하여 즉위 9년만에 칼링가를 정복했다. 그는 이 정복전쟁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반성하여 불교에 한층 깊이 귀의함과 아울러 보편적 윤리에 의거한 정치를 이상적으로 여겨, 자신도 그 실천에 전념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보편적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이 정치이념은 상실되고 제국은 운이 기울었다. 그 뒤 6명의 왕 이름이 문헌으로 전해졌으나 그들의 사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BC 180년 무렵 장군 푸샤미트라가 왕권을 찬탈해 이 왕조는 멸망하였다.

 

 

◇마우리아 왕조 인도를 통일하다.

신비의 땅 인도, 그곳은 페르시아 제국이 인더스 강을 점령한 이래 점차 고대 통일 왕조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인도대륙 전체를 통일만한 힘을 갖춘 세력이 들어 선 것은 역설적이게도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이 있은 기원전 4세기 이후였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원정을 단행하여, 인더스 강을 돌파하고 펀잡지방에까지 진출하면서 베일로 둘러쌓여 있던 인도대륙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포루스왕은 코끼리군대까지 동원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알렉산더 대왕은 포루스왕의 군대를 격파하는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자신의 군대역시 큰 타격을 입어 동방원정을 중단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인도 북부지방의 왕조들을 중무장시키게 하였고, 이렇게 내재된 힘은 곧 통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인도 북부에서는 난다왕조가 두각을 보였고, 동부 겐지즈강에선 마가다국이 두각을 보였다. 하지만 두 국가는 공통적으로 극심한 내부혼란에 시달리고 있어 인도의 통일은 아득히 멀기만 하였다.

그러나 혼돈의 시대는 영웅을 낳게 마련이다. 마가다왕국의 찬드라 굽타는 마우리아를 姓(성)으로 썼는데 그것은 공작새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구려가 삼족에 대해 신앙이 있듯이, 마가다 왕국에는 공작새에 대한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찬드라 굽타는 반란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인도 북부로 도망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인도 북부를 점령하고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과 만나, 그에게 대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포부와 지혜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찬드라 굽타는 기원전 317년 거병하여 펀자브 지방을 점령, 이어서 히말라야 산맥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난다왕을 격파하여 왕위에 올랐다.  난다왕국의 막대한 영토와 인구를 갖게 된 찬드라 굽타는  기원전 312년 마우리와 왕조를 성립시키고 인더스 강변까지 진출, 인도 북부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05년 시리아 왕국이 인도를 침입하였을 때 보병 60만명, 기병 3만명, 象(상)병 9천명으로 격퇴시킬 만큼 강력해 졌다. 찬드라 굽타를 이어 그의아들 빈두라사는 더욱더 국가를 발전시켜 제국의 틀을 다졌다.


 

아소카왕은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BC 268?∼BC 232?)이며 한역불전(漢譯佛典)에는 아육(阿育), 아유가로 기록되어 있다. 아소카왕은 찬드라굽타와 함께 전설적인 왕으로 평가되었지만 그의 즉위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아소카왕은 왕위를 물려 받은것이 아니라, 찬탈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인 빈두사라왕은 마우리아 왕조를 크게 발전시키긴 하였지만, 101명의 자녀를 둘 정도로 수많은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소카는 그 101명중 한명이었지만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느 누구보다 많은 공훈을 세웠다.

하지만 너무나 특출하였기 때문이어서일까, 빈두사라왕은 아소카를 그리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빈두사라왕은 아소카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묘한 경쟁심까지 느꼈던 것 같다. 따라서 빈두사라왕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소카라 하더라도 도저히 시행하기 불가능한 명령을 내렸다.

즉 먼 지방도시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에 대한 진압명령을 내렸는데, 빈두사라왕은 아소카에게 무기와 차량사용을 금지해 버렸다. 그러나 아소카왕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승리에 대한 기록에는 상당히 종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정확하게 평가 내리기는 어렵다.  아무튼 이러한 전설은 부왕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아소카가 중앙권력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빈두사라왕이 급사하여 버렸다. 이제 왕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충실하게 군사력을 키운 아소카를 대적할만한 인물은 없었다.  부왕의 사망소식을 듣자마자 수도 파탈리푸트를 점령한 아소카는 무려 99명의 형제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또 아소카왕에게 적대적이었던 신하들에게 왕을 가볍게 여겼다는 죄목을 적용하여 500여명을 참수시켰고, 궁녀 500명도 화형시켜 버렸다. 궁녀를 화형시킨 제목은 무우수가지를 꺽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부왕시절 타락했던 왕실의 질서를 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전내에서 끔찍한 살육행위가 자행되고 있을무렵, 한 승려의 신비한 능력과 설법에 감동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이후 아소카왕은 불법을 수호하고 포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수많은 불탑과 사원을 세워 불교왕이 되었다고 한다.
 

(인도는 역사를 설화식으로 엮어 기록했으며 벽화, 회화로 남기기도 했다. 관무량수경의 왕사성의 비극을 참조)

 

◇아소카왕의 영광과 마우리아 왕조의 명암

 마우리아 왕조의 3대왕인 아소카왕은 제1 대왕이었던 찬드라 굽타와 제 2대 빈두사라왕의 정책을 이어받았지만, 인도영역 밖으로 적극적으로 제국을 확대하기 보다는 제국 자체의 힘을 키우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어떠한 외부 민족도 감히 인도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제국은 풍요롭고 군사력은 정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아소카왕의 이러한 처세에도 불과하고 아직 인도가 완전히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동남인도에는 보병 6만명과 기병 1천명, 상병 7백명을 보유한 군사강국 칼링가국이 있었다. 특히 칼링가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을 저지하여 인도문화를 수호하였을 정도로 켤고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소카왕이 칼링가국 원정에 나선 것은 집권 9년(기원전 253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칼링각국의 저항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욱 완강하였다. 전쟁을 통해 칼링가국은 10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지만, 아소카왕이 이끈 군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굶주림과 전염병등은 전쟁으로 인한 죽음보다 몇배나 더 큰 죽음을 몰고왔다.

 아소카왕은 무려 15만명의 포로를 잡고 개선하였지만, 승전에 대한 기쁨보다는 전쟁과 기근 그리고 질병등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연민이 더 컸다. 결국 아소카왕은 칼링가 지방을 특별 주로 지정하고 왕자들 중 한명을 항상 상주시켜, 지역 주민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마우리아 왕조의 팽창정책도 여기서 끝을 맺었다. 칼링가국 원정이 아소카 왕에게는 최후의 전쟁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는 무력에 의한 점령과 통치를 부정하고 다르마(법)에 의한 통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불교의 깊은 신봉자이자 수호자가 되었으며,  다르마의 실현을 지향하여 정력적으로 노력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정무(政務)를 들어서 처리하고, 스스로 영역 안을 순찰하였으며 또 관리를 시켜 5년마다 관할구역을 순회하여 백성이 법을 준수하는지의 여부를 시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불교에 귀의한 왕은 석가모니의 탄생지 등을 방문해서 스투파(탑의 기원인 건축물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보관한 일종의 무덤이다)를 증축하고 불교 교단 내의 화합을 도모했으며 분쟁을 엄하게 경계하였다.

그 밖에 종교교단에 대해서도 보호를 하고 관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여러 종교교단을 관장하는 특별관리를 임명하였고 백성을 위해서 도로를 건설했으며, 수목을 심고 우물을 파거나 인간과 동물을 위한 병원을 세우는 등의 사회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아소카 왕은 영토 곳곳에 돌기둥을 만들어 조칙(詔勅)을 세겨 다르마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아소카왕의 석주(돌기둥)




 그 밖에 종교교단에 대해서도 보호를 하고 관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여러 종교교단을 관장하는 특별관리를 임명하였고 백성을 위해서 도로를 건설했으며, 수목을 심고 우물을 파거나 인간과 동물을 위한 병원을 세우는 등의 사회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아소카 왕은 영토 곳곳에 돌기둥을 만들어 조칙(詔勅)을 세겨 다르마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종교와 온정주의적 법의 교화에 기울어지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은 약해졌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약해졌다. 그리하여 아소카왕의 죽음과 동시에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하였고, 마우리아 왕조의 마지막 왕인 브리하드라타가 그의 부하였던 푸샤미트라 장군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기원전 180년 마우리아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소카왕은 인도 통일 대업을 완수하고 마우리아 왕조의 황금기를 열었지만, 통일을 유지할만한 체제를 만들지는 못하였다.

 

 

http://cafe.daum.net/bhs4463/JbUq/21?docid=1IOBm|JbUq|21|20091219223034&q=%B8%B6%BF%EC%B8%AE%20%BF%D5%C1%B6&srchid=CCB1IOBm|JbUq|21|2009121922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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