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입장에서 본 십자군 전쟁 - 송 경 근(조선대)
I. 서론
근세에 들어와 유럽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후에 서구 문명은 세계 문명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십자군에 대한 우리 관념도 서구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유럽인 중심의 십자군 역사와 개념만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우리로 하여금 십자군에 대하여 보다 공정하며 폭 넓은 시각의 십자군 역사와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 논문은 십자군과 싸운 이슬람 세계의 십자군 전쟁 역사와 개념을 알아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군 역사와 함께 비교하면서 넓은 시각에서 십자군 역사에 대한 정리를 하여 보고, 그럼으로써 좀 더 공정하고 타당한 십자군 전쟁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십자군 역사의 배경이 되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출현과 확산의 역사를 간단하게 언급한 후에 우리에게 알려진 18세기 이전의 유럽인이 생각하는 십자군 역사를 정리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슬람교도가 생각하는 십자군 역사를 비교하며 언급하여 간다. 그 다음에는 이슬람 입장에서 본 십자군 전쟁을 바탕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군 전쟁과 비교하면서, 십자군 전쟁에 대한 좀 더 타당하며 합리적인 십자군의 역사는 무엇인가 생각하여 본다.
II. 기독교와 이슬람의 출현과 두 종교의 관계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영토 팔레스타인에서 출현한 후에 탄압 속에서 성장하여 갔고,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11-337)의 개종과 함께 로마를 사로잡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로마가 기독교에 사로잡혔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로마 국가의 단계적인 기독교화로 이어졌다. 이렇게 로마가 기독교화 되는 동안에 중동에서는 유대교와 페르시아 종교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 이전의 종교는 소멸되거나 또는 최소한 수면 밑으로 잠수하였다(루이스, 1998, 39). 기독교를 인정한 로마는 더 나아가서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만들었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중동 지역은 기독교가 지배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출현하고 첫 6세기 동안에 중동에서 기독교 우위의 시대가 계속되었을 때에 페르시아에서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였었다. 첫 번째는 파르티아였고, 두 번째는 사산 왕조였다. 이 두 페르시아 왕조는 중동지역의 영토를 가지고 로마와 다투었다. 이슬람을 세상에 선포하였던 무함마드가 태어났던 6세기에 페르시아의 사산왕조와 로마제국의 후계국인 비잔틴 제국은 끊임없는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이와 같이 두 강대국 간의 전쟁은 아라비아 반도를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게 만들었다. 아라비아 주민들은 양 강대국가의 관심과 원조를 받게 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는 무역로로 흐르는 물품으로 인하여 부유하여지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아라비아 반도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가 된 메카는 국제 무역으로 인한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다. 이 교역의 직접적인 혜택은 상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들이 메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카는 사막 지대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였으며, 유목민의 윤리가 지배하는 도시였다. 따라서 물질적 부의 축적을 추구하는 상인들의 행위는 도시의 사회적 긴장을 만들어냈고, 이런 현상은 메카 주변의 히자즈 지방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정도 차이가 있을 지언즉 대동소이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즉 히자즈 지방은 새로운 사회 환경으로 인하여 그것에 맞는 새로운 사회 체제가 필요한 형편이었다. 한편 당시 아라비아 반도 주민들의 대부분은 다신교도였으나, 유일신교인 유대교와 기독교도 아라비아 반도에 들어와 있었다. 이 유일 신앙은 사회 개혁을 일으킬 이슬람에 영감을 주었으며, 이슬람이 유일신교이며, 기독교와 유대교와 함께 아브라함이라는 같은 신앙의 뿌리를 가지게 만들었다. 이런 배경 속에 시작된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를 석권한 후에 3개 대륙으로 뻗어 나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이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중동 지역의 기독교는 사라지거나 미약하여지게 되었다.
이슬람은 그 엄격한 유일신 사상, 개인의 도덕과 동정심에 대한 강조, 계시에 의해 기록된 성서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와 비슷하다. 무함마드는 쿠란을 종교적 권위의 궁극적 원천으로 선언했지만 신․ 구약 성서 역시 신성한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이라고 인정했다. 무함마드는 그리스도로부터 최후 심판의 교리, 육체의 부활 및 그 후의 보상 및 징벌의 교리, 그리고 천사에 대한 믿음(그는 신의 메시지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주어졌다고 믿었다) 등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슬람은 기독교 신학의 유일신 사상인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부정하며, 유일신 알라는 그의 신격에서 일위요, 그의 속성 그리고 그의 사역에서 일위, 즉 일 인격뿐이라는 단일성 유일신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존경스런 대상으로 간주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성과 신성으로 보는 것과 그를 성자로서 유일신 알라(하나님)와 일치시키는 예수의 신성론 주장을 절대적으로 거부하고 아담과 이브를 인간으로 볼 때 예수는 인간의 아들로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예수의 완전 인성론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필연적이며 부활과 재림이 있을 것이란 기독교의 믿음에 반하여 인간의 원선설을 주장하는 이슬람은 선의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을 인간의 죄의 대속과 이를 십자가상의 죽음은 모순된다고 보고 있다(송경근 1999, 29-30).
위와 같이 기독교가 발생한 지역을 이슬람화 시키면서 성장한 이슬람은 기독교와 믿음의 뿌리를 공유한다. 그러면서도 두 종교는 예수에 대하여 근본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역사적, 신학적 배경은 십자군 전쟁의 발생과 진행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두 종교의 추종자가 십자군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에도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두 종교 간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배경은 전쟁을 일으킨 기독교 입장에서만 십자군 전쟁을 보아서는 안 되며 이슬람 측의 입장과 주장, 자료 등도 조사하면서 진정한 십자군 전쟁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하게 만든다.
III. 우리에게 알려진 십자군 전쟁
우리에게 알려진 십자군 전쟁이란 유럽이 생각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기독교 성지를 지키기 위하여 중세 유럽의 기독교도들이 1095년부터 1291년까지 레반트에서 벌인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은 기독교도가 그들의 성지에서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성지 순례를 방해받는다는 호소에 호응하여 그들의 성지를 탈환하고자 하는 열의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에 참여해서 죽는 사람은 그들이 생전에 저지른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생각 속에서 진행되었다. 유럽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십자군 전쟁은 연대기적으로 기술된 전쟁이며, 이 때문에 십자군이 집단적으로 8차에 걸쳐 순차적으로 이슬람 세계에 쳐들어온 인상을 주기는 하나, 실제적으로 십자군의 원정행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의 활동과 성격에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차 십자군: 여러 번의 십자군 원정 중에 부분적이나마 유일하게 성공하였던 원정이며, 가장 종교적 열정이 높았으나, 가장 무질서하였으며, 가장 잔인하였던 원정이었다. 또한 이슬람 세계의 저항은 조직적이지 못하였으며,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2차, 3차 십자군: 십자군 원정은 여전히 열의가 높았으며, 대규모 연합 세력에 의해 대규모로 진행되었으나, 이슬람 세계의 저항도 모술의 아타벡 이마드 알-딘 장기, 누르 알-딘 장기, 그 뒤를 이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흐 알-딘 알-아유비(살라딘) 등에 의해 조직적이 되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의 손에 넘어가는 등 1차 십자군이 이룬 업적의 상당 부분이 무효화되었다. 이런 전세의 역전은 하틴 전투(1187)에서 이루어졌다(Runciman 1985, 488-490).
4차 십자군: 이미 십자군을 일으키는 지도적 인물이었던 교황의 권위는 흔들리고, 구성된 십자군은 오직 상업적 이익에 눈이 어두운 상태였으며, 당초 목적지인 이집트를 멀리하고 기독교 도시 자라를 점령하여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으며, 비잔틴 황제 위 다툼에 개입하기 위하여 비잔티움에 갔다가 비잔티움을 점령하고, 갖은 만행을 자행하고 그들이 점령한 비잔틴 제국의 땅에다가 그들의 라틴 공국을 세웠다(Joinville&Villehardouin 1985,97).
후기 십자군: 십자군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저항의 중심지가 이집트라는 인식 하에 이집트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제6차 십자군의 독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협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기도 했으나,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고, 제7차 십자군 루이 9세는 이슬람교도들에게 포로로 잡혀 막대한 몸값을 치루고 풀려났다('Imarah 1975, 113).
십자군의 종말: 십자군에 대한 저항 운동을 주도하던 아유브조가 사라지고,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백인 노예 병사들인 맘룩이 이집트를 지배하자, 신사적이던 아유브조와는 달리 유목민적인 위계를 써 가며 십자군 요새를 하나 씩 점령하여 나갔고, 1291년 아카가 이슬람교도들의 손에 떨어짐으로써 십자군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Gabrieli 1989, 346).
십자군 원정은 무질서, 약탈, 학살, 소년 소녀 십자군을 노예로 매매 등 추악한 일면을 드러냈으며, 시종일관 동서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가 늘 깔려 있었다. 이런 십자군 운동의 추악한 면과 궁극적 실패는 기독교의 확산을 좀 더 영적이고 정신적이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교회는 칼로써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는 평화의 메시지로서 승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기독교도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위대한 종교적 열정을 함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지와 옛 기독교의 땅을 회복하려는 명예로운 원정이었다. 또한 십자군 운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당시 유럽보다 앞서 있던 동방과의 접촉과 교류는 유럽이 중세의 긴 잠에서 깨어나,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고, 유럽의 문명이 세계를 제패하는 근세의 기초가 되었다(Al-Mu'adid 1981, 262-265,'Ashur 1982, 1274)). 이와 같이 명예롭고, 진취적이며, 개척적인 원정은 후일에 그 개념이 확대되어 이교도가 점령하고 있는 땅을 기독교도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활동이 십자군 운동 또는 전쟁으로 간주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유럽의 십자군 운동에 대한 개념은 유럽 문명이 세계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세계의 십자군 개념으로 확산되었다. 19세기 이후에 십자군 운동이 서구 문명의 수호이며, 이슬람 세계에 세워진 십자군 왕국들이 서구 문명의 전초기지라는 사고에 도전하여 그것은 식민제국주의의 한 형태이며, 그 왕국들은 불안정한 서구 식민기지였다는 식의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으나(Laiou & Mottahedeh, 2001, 3), 유럽에서 흘러내려오던 십자군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크게 바꾸지 못했으며, 기존의 관념은 대다수 유럽인들의 관념으로 유지되었으며, 그런 관념을 받아들인 우리도 그런 사고를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보아야한다.
IV. 이슬람 세계가 생각하는 십자군 전쟁.
1. 무슬림이 보는 십자군 전쟁
피침자인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 전쟁을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성지 탈환 운동으로 보기보다는 유럽인의 이슬람 세계 침입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십자군의 침입을 레반트 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유럽의 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침입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근세 유럽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모든 침입도 십자군 활동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슬람 세계에 대한 외부 세력의 모든 침입은 십자군 운동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이슬람교도들은 중세에 이슬람 세계 동쪽의 레반트 지역으로부터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전쟁을 십자군의 전쟁으로 본다. 특히 그들은 중세 유럽의 성지 탈환을 위한 레반트와 이집트 침입에다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전쟁을 십자군 전쟁으로 보려고 한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성지 탈환 운동과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끼스타(Reconquista)를 제외하고는 16세기까지 이슬람 세계는 유럽에 대하여 공세적 입장에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세상을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는 다르 알-이슬람(Dar al-Islam)과 아직 이슬람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슬람화 시켜야 할 지역인 다르 알-하르브(Dar al-Harb)로 구분하고 있으며, 다르 알-하르브를 다르 알-이슬람으로 바꾸기 위하여 이슬람교도들은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Hillenbrand 1999, 97). 이것은 전투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평화적인 선교, 상거래, 외교 등의 모든 방법이 포함되나, 유럽과의 관계에서는 주로 그들의 성전 개념인 지하드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유럽은 몇 차례 그들의 생존을 위협받기도 하였다. 유럽 사가들이 십자군 운동이 정치, 경제, 종교적 갈등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였다고 보는 반면, 이슬람 사가들은 종교적 갈등 때문에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다고 본다. 이슬람교도들은 십자군 운동을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분쟁에서 이슬람의 확산에 대한 기독교도의 최초의 반격이며 침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침략에 대하여 그들은 지하드 개념으로 물리쳐 나가려고 하였다. 그들의 지하드는 이슬람의 세계적 성격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세계 어디에서 이슬람이 위협받으면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지하드는 이슬람교도이면 누구나 참여해야 하며, 이슬람 지도자의 지휘가 없이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성격이 강하다. 지하드는 이슬람의 방어와 확산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루엘랑 2003, 84). 이에 대하여 십자군은 교황의 호소에 호응한 종교적이며 집단적인 움직임이었으며, 자신의 죄 사함을 믿고 움직였다. 거기에는 성지 순례의 의미가 함유되어 있었다. 지하드가 영구적인데 반하여 십자군은 특별한 사건 때문에 발생하였다.
기독교도들의 십자군 운동은 성지탈환이라는 원상회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전도 다소 방어적이며 일시적 의미를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십자군 운동이 침입의 상징이랄 수 있는 약탈, 파괴 등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지는 데에는 그들이 이교도의 존재를 원칙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그 지배 영역 내에 있도록 인정한 이교도들에게도 끊임없는 핍박을 가했고, 끝까지 그 지역의 국외자로 남아 주변 지역에 끊임 없는 싸움을 일으켰으며,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는 대상들에게는 거의 약탈 수준의 과세를 하거나 그들의 상품을 약탈하거나 하였고, 이것은 그들의 지배 지역에 안정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빈곤화를 유발한데에 있다. 원래 중동의 이슬람 세계는 그 지역에 들어온 침입자가 외국인이라고 하여도,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제도를 인정하면 그들의 권한 행사와 지위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느끼지 않게 되는 사회이다. 그것은 십자군과 싸운 터키족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되었다. 그들은 중동에서 이방인이었으나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중동의 제도를 인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중동의 아랍 주민들에게 그들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에 아랍 지배자들과 어떤 차이를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그들의 종교와 그들에 의해 자행된 침입을 상징하는 약탈, 방화, 파괴 등으로 인하여 이슬람교도들에게 십자군은 침입자라는 인상을 강하게 박히게 만들었으며, 십자군은 침입자를 상징하는 의미가 되게 만들었다.
이슬람 사가들은 이슬람 세계의 확산에 대한 기독교도의 최초의 반격은 스페인의 톨레도시가 1089년 기독교도의 손에 떨어질 때부터 시작된 것이지 제 1차 십자군 운동(1096-1099)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기독교 세계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반격은 서쪽에서는 스페인의 레콩끼스타의 노력과 동쪽에서는 예루살렘의 점령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십자군 운동이 의식적으로 스페인으로 향하여 1147년에는 리스본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양 전선에서 거둔 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김정위 1993, 150). 스페인에서는 기독교 측이 성공하여 이슬람을 밀어냈으나, 동쪽에서의 성공은 잠정적이었고, 궁극적으로는 1291년 아카에 있던 십자군 기지가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되면서 무효화되었다(Shalabi 1986, 78, Ramadan 1983, 528).
스페인의 기독교도는 이슬람 세계의 침입에 대한 정치적 응전을 한 면이 있었고, 레반트의 기독교도들은 종교적 열정 속에 이슬람 세계를 쳐들어간 면이 있었다.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의 잔인함과 무질서, 무지에 대하여 분노하기는 하였으나, 이 십자군 운동을 레반트 지방과 이집트 등 십자군이 침입한 지역을 빼고는 이슬람 세계의 변방에서 일어난 이교도의 침입 정도로 알고 있었으며, 실질적으로도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에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의 결과 지중해를 통한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교역이 증대되었으며, 이슬람교도 치하의 비 이슬람교도 소수 집단의 처지는 영구적으로 약화되었다(Al-Mu'adid 1981, 270).
2. 십자군 전쟁은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기독교도들은 비록 다소의 물리적 이익추구, 정치적 욕심, 무질서, 무지 등의 비윤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나, 십자군 전쟁을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진행된 그들의 성지 탈환 운동으로 본다. 반면 이슬람교도들은 십자군 전쟁을 이교도가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종교를 강요하기 위하여 들어온 침입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기독교 성지가 있는 레반트와 카톨릭이 지배하는 유럽만을 그들의 영역으로 보고, 그 이외의 지역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반면에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이 장악한 지역을 다르 알-이슬람으로 보고, 이슬람화가 되지 않은 지역을 다르 알-하르브로 보면서, 이슬람교도는 다르 알-하르브 지역을 다르 알-이슬람 지역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길을 가야하는 이슬람교도의 의무로 알았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이 절대 옳은 정의로 생각하면서 일단 다르 알-하르브 지역이 다르 알-이슬람 지역으로 바뀌면, 그 땅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그 이후에 다른 종교가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은 침입으로 간주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에서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수행된 레콩끼스타는 그들에게는 침입이지 재탈환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상 이슬람은 기독교 지역을 이슬람화하면서 성장하였으나, 과거의 역사는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고, 현재 자신들의 땅이 된 곳은 이슬람의 땅이었던 것이다.
11세기 말 이슬람 제국의 확장이 멈추면서 ‘지하드’ 이상은 영향력을 잃었고, 투르크멘족의 소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의 동쪽 변방 지대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었다(타트 1998, 148). 그러나 십자군의 침입이 레반트를 향하면서, 12세기 중엽부터 이슬람교도들이 이들의 침입을 물리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그들의 반격을 조직화하면서 지하드 사상은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이슬람 지배자들의 정책의 한부분이 되었다. 그들의 지하드 사상은 기독교의 성전이 억압받은 기독교들과 성지를 해방하는 방어적인 수준인데 반하여, 이슬람 세계를 방어할 뿐 만 아니라, 이교도들이 이슬람의 계율을 인정할 때까지 싸우면서 이슬람 세계를 확장하려는 공격적 개념이었기에, 기독교와 싸우는 이슬람 지배자에게는 필요하고도 유용한 정신적 무기였다. 하지만 공격적인 지하드 개념과 방어적인 성전의 개념에 반하여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은 정반대였다. 중세의 이슬람 사회는 서유럽 사회보다 훨씬 덜 폐쇄적이었으며, 타종교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이슬람은 기독교, 유대교가 발생한 땅에서 선행의 두 종교를 바탕으로 발생하였기에 기독교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가 이슬람의 우위를 인정하면, 그들의 종교 행위를 탄압 할 수 없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도는 자신들의 우위 지역에는 타 종교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기독교와 유사한 다른 종교나 종파에 대하여 이단시하며 철저히 배척하여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이슬람이 기독교의 발생지역과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역을 이슬람화 시켰다는 것과 기독교와 이슬람의 유사성은 더욱 십자군 전쟁 시에 기독교가 이슬람에 대하여 더욱 강경하게 만들었다. 이런 두 종교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십자군 전쟁에서 상대방에 대한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났으며, 상대방을 인정하는 이슬람이 훨씬 자비롭고, 융통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기독교는 무지하고, 편협하며, 잔인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또한 이런 이유로 독실한 이슬람교도 군주였던 살라흐 알-딘 알-아유비는 그 신앙에 따라 행동하면서 자비로운 군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
십자군은 비록 교황의 호소에 의하여 결성되었으나, 일인 지휘 체제가 아닌 다양한 집단의 여러 연합 세력이 뭉쳐 움직였으며, 그것은 여러 정치적, 경제적 욕망을 가지고 움직이는 집단이었기에 본래 십자군의 이상과는 다른 면을 많이 보였으며, 결국에는 지중해 동부 연안의 무역 개발 계획이 주가 되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반면에 이슬람측은 지하드의 원리에 따라 개인적으로 지하드에 가담하기는 하나, 토착 이슬람 지배 세력에 의하여 지휘를 받으면서 지하드의 원리에 따라 약탈이 통제되고 이슬람의 전파를 위한 범위 안에서만, 그리고 이슬람 지배에 저항하는 다른 종교의 예배 물품들만 파괴할 수 있다는 제한 속에서 이슬람군은 움직여 나갔으며(루엘랑, 2003, 87), 유목민의 전통을 가진 맘룩조(1250-1517) 군주들은 지하드의 원칙에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고, 잘 지키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나, 독실한 이슬람 순니 신앙을 고수하던 아유브조(1169-1260) 군주들은 이 원칙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 포로들에게 물과 음식을 제공하고, 그들이 제시하는 조건이 충족되는 포로는 석방하였으며, 이슬람 지배 체제를 인정하는 한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었다(김능우, 2004, 209,211).
이슬람은 기독교의 땅을 이슬람화 시키면서 확산되었으며, 기독교와 유대교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기에 기독교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역사적 종교적 바탕을 가진 지역에 쳐들어온 기독교의 십자군을 무조건 침입자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이의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을 무조건 원정만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행한 행위와 그 주변의 역사적 기록과 반응이 또한 여러 가지 이견을 제시하게 만든다. 이것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땅에 어떻게 해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느냐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정형화된 해답이 없고 상황에 맞추어 인내를 가지고 해답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그 결론은 그 상황에 따라 결정 될 수밖에 없다.
V. 결론
이슬람과 기독교는 같은 유일신 신앙을 믿음의 뿌리로 하고 있으며,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슬람은 기독교 지역을 이슬람화하면서 성장하였다. 이런 환경은 십자군 운동의 발생과 진행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으며, 두 종교가 가지는 십자군에 대한 관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십자군운동은 근세에 서구문명이 세계를 제패하면서, 유럽의 십자군 개념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로 인하여 유럽의 십자군 개념이 우리의 십자군 개념이 되었다. 기독교도가 생각하는 십자군 운동은 분명히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부분인 성지 탈환 운동이며, 이를 위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들은 이슬람교도가 성지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들이 성지 순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며, 그 이면에는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이익을 위해 이를 불 지른 면이 있었다. 사실상 이슬람교도들은 같은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 추종자가 이슬람 지배 체제를 인정하면 그들의 성지 순례를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이슬람교도가 볼 때 기독교도의 성지 탈환 운동은 합당한 이유가 없는 침입 행위였다. 거기다가 기독교도의 무지, 탐욕, 무질서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십자군에 대하여 많은 혐오감과 증오감을 유발하였다.
중동의 이슬람 세계는 어떤 외부 세력도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제도를 인정하면 외부 세력이 그 지배권을 행사하는데 토착 지배 세력과 어떤 차이를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 로 외부 세력 수용에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은 그들이 소지한 종교와 그들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국외자로 남으려는 태도, 자신과 다른 주변에 대하여 끊임없는 도전, 약탈, 파괴, 살인 등 침입자의 의미가 부여되는 행위의 계속 등으로 인하여 이슬람교도들에게 침입의 상징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는 원래 기독교 세계인 것을 고려하면 이슬람교도가 주장하는 데로 십자군 운동이 무조건 기독교의 침입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의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슬람교도들이 십자군 운동으로 간주하는 레콩끼스타는 분명히 기독교 땅의 탈환 운동인 것이다. 단 당시 이슬람의 땅을 가리키는 다루 알-이슬람이 된 스페인은 이미 이슬람의 땅이 되었기에 그들에게는 기독교도의 레콩끼스타는 기독교도의 침입이었다.
십자군을 정의의 상징으로 보는 생각은 극히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또한 십자군 운동을 무조건 침입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 종교적 상황 등이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전체적 상황 속에 답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유럽중심적인 십자군 사관은 십자군 운동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근세에 들어와 유럽이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유럽 중심의 십자군 개념이 전 세계적 표준처럼 한동안 받아들여지게 된 것으로 본다. 중세적이거나 유럽중심적인 십자군 개념은 유럽인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그것은 전쟁이나 테러, 강압적인 정치․경제 제재를 통한 외적인 강요로 변화되기 보다는 서로간의 교류를 통하여 자신들 이외의 세계적 입장에서 보게 될 때에 특히 피침자의 입장인 이슬람의 입장에서 본 십자군 개념이 우리의 사고에 들어갈 때에 유럽 중심적 사고가 변화되어 좀 더 객관적 사고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과거의 십자군 개념을 비난하고, 그 잘못된 점을 지적한 것은 유럽이 좀 더 넓은 세계, 특히 십자군 전쟁에서 그들의 적이었으며, 십자군 전쟁의 피해자인 이슬람 세계를 보고, 다른 세계의 입장에서 십자군 전쟁을 생각하여 보고자 했던 움직임의 일부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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