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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후윤회-유무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은 왜 했을까?

작성자일 행|작성시간10.05.07|조회수326 목록 댓글 3


아멘넷 업데이트 칼럼 기고 글/ 서울대현교회/ 서재생목사/ 승려생활에서 개종

 

 

네가 뿌린 인과응보(因果應報) 때문이라 하는 권사님? <불교적 용어>

 

목사님! 인과응보(因果應報)는 불교에서 나온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권사님께서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그 후유증으로 하반신 마비가 왔습니다. 권사님께서는 아들과 함께 살면서 이것이 다 “인과응보야” 네가 뿌린 “인과응보(因果應報)”때문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인과응보가 뭐예요?

 

1.인과응보(因果應報)의 어원

인과응보는 불교의 우주 전체 모두를 이루는 원리요. 법칙입니다. 이러한 인과응보의 원칙은 전생과 현생의 선업이나 악업이 현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으로 갚음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무슨 형태로든 존속한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이를 윤회전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業報)는 나중에 영향을 끼치는 잠재적인 힘(業力)을 발생시키는데, 이 때문에 사람은 죽은 뒤에 생전에 지은 업력(業力)에 따라서 인과응보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지, 남들은 다 잘사는데 나는 왜 이런지, 다 전생의 인과응보에 있다고 말합니다.

 

2.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의미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현상을 연기(緣起)론으로 설명합니다. 즉 어떤 것이 일어남으로써, 다른 것이 생긴다는 식으로 봅니다. 따라서 어떤 원인을 일으키면 그 결과를 반드시 받게 된다고 믿는 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의미입니다.

 

즉 모든 현상들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전생이나 전 전생의 자신이 쌓아놓은 행동(인과응보) 때문에 나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응보의 원칙은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일시적인 것은 진정한 진리나 행복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즉 현상 세계는 인과응보에 의해서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세계로 보기 때문에 현상세계를 실상(實相)으로 보지 않고,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보는 것입니다.

 

3.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대한 경전

불설삼세인과경에 의하면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한 사람은 무슨 연고인가에서 전생에 가난한 사람에게 차와 밥을 베풀어준 공덕이라고 하고, 아름답고 예쁜 아내를 얻는 사람은 무슨 연고인가에서는 전생에 불문귀의 하도록 많이 연결지어준 공덕이라고 하고, 소나 말로 태어나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전생에 남의 빚을 갚지 않은 과보이며, 금생에 과부가 되어 외롭고 쓸쓸하게 사는 사람은 무슨 연고인가? 전생에 남편을 학대 구박한 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배나무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저 그 밑을 지나던 뱀이 그 배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까마귀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배를 떨어떠린 것으로 알은 뱀은 까마귀를 원망하며 죽었기에 후생에 뱀은 사냥꾼으로 태어나고 까마귀는 맷돼지로 태어나 맷돼지를 죽이게 되었고 맷돼지는 사냥꾼을 원망하며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후생에는 모습이 바뀌어 죽은자는 죽이게 되고 죽인자는 죽게 되는 인과가 계속 되풀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인과에 관한 불경은 팔만사천불경 곳곳에 내재되어 있으나 대표적으로 불설삼세인과경과 부처님 전생이 담긴 본생경 등이 있습니다.

 

4.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창조로 이루어 졌다고 믿는 종교라면 불교는 연기론을 믿는 종교입니다. 연기론의 원리가 인과응보 법칙입니다.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나온 불교의 사상입니다. 이 인과응보의 법칙은 불교의 세계관으로서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인생을 바라보는 하나의 큰 사고의 틀이기도 합니다. 윤회의 세계에서 해탈을 하여 성불하는 것은 단순이 수도를 닦아 훌륭한 도인이 되는 게 아니라.

이 인과응보를 비롯한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이 인과응보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불교의 이상세계입니다. 즉 인과응보의 굴레를 벗어나면 생사윤회가 멈추는 불교의 구원의 세계인 무생무사의 생사환멸의 세계인 해탈(解脫)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불교의 사상인 인과응보를 교회 안에서 종종 사용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특징 중의 가장 큰 특징이 은혜입니다.

 

구원은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엡2장 8-9절) 선물은 행함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행함 없이 죄사함 받음에 대한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윗왕의 신앙의 가치를 로마서에서 강조합니다.(롬4장 6절)

 

아멘넷 업데이트 칼럼 기고글/ 서재생목사 /서울대현교회/ 승려에서 개종한 목사

 

 

승려에서 개종한 서재생목사의 특별한 사명

서재생 ㆍ 2009/08/29 

   

한국교회 안에서 모르고 사용하는 불교, 도교, 무속용어을 기독교 언어로 대체가 필요 주장하는 승려에서 개종한 서재생목사의 특별한 사명, 그는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박힌 불교 토속신앙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인은 자신도 모르게 불교나 샤머니즘, 토속신앙에 젖어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하늘에 빌던 그 열심 등 전통에 기반 한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은 여전히 토착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형태를 갖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사용하는 불교, 도교, 무속신앙 용어들이 많이 있고 기복적인 신앙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서재생목사(서울대현교회)는 “점심, 야단법석, 인과응보, 아수라장. 궁합, 일진, 손 없는 날  등 교회 안에서 사용되어 지는 이방 종교적인 용어에 대한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서 “이를 정화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목사는 특히“불교, 도교 등의 종교에 대한 접근에서 배타성이 심하다”며 “구원관에 대해서는 철저해야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포용하고 감싸 안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승려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서재생목사는 10대에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입산, 불교에 심취하여 대한불교조계종 정통교단 스님생활을 하다가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맞아 결국 기독교로 개종하여 총신대학교 신학대원 종업과 남서울 중앙교회(피종진목사)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15년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됐다. 서울대현교회 개척 이후 개종선교회를 조직하여 불교권 선교에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기독교와 불교가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사고를 극복하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 후 적응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와 주님의 성령에 의한 역사가 무엇인지 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화두’'아비규환’, '다반사’ ‘무아지경’'아수라장;.신선놀음 과 같은 불교 도교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에 기독교 언어 순화 운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목회자들도 잘 모르고 있는 불교용어, 샤머니즘, 토속신앙 등에 대한 책 「스님 예수 믿으면 좋겠어요」,「불교와 기독교의 비교론」,「목사님 나무아미타불이 뭐예요」,「목사님도 모르는 교회 안에 무속신앙」,「목사님도 모르는 교회 안에 세시풍속과 통관의례」,「목사님도 모르는 교회속 불교, 도교 용어들 이것만은 바로잡자!」,등 10여권을 집필하고 한국교회 복음화와 세계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서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이교적이고 우상숭배 풍속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도 관습적으로 따르고 있는 무속신앙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무속신앙이 기독교 입장에서 무엇이 어떻게 다르며 가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서목사는 한국 전통 통관의례인 “돌잡이, 백일잔치, 환갑, 장례의례 등 목회자들의 경우에도 잘 알지 못하고 따르며, 일반 기독교 성도들도 그저 무속신앙을 모르고 전통문화 아무의식 없이 지키고 있다”면서 “한국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혼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정서를 고찰하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특히 “한국무속신앙적인 것을 연구하는 학자와 목회자들이 부족하여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으나 이는 심각한 문제”라면서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민족의 특성상 보수적이면서도 불교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이 다분히 혼재되어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서목사는 “불교사상인 무신론과 기독교의 신본사상에서 갈등하는 많은 불교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화시키는 것이 사명”이라며 “교회신앙과 사회신앙의 이원화를 막고 일치된 신앙관으로 주님을 통한 삶을 실천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한편 서목사는 유럽, 동남아, 미국 등 30회 해외집회 인도와 전국 2500여 교회 부흥회 및 전도 집회를 통해 갈등이 없는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고, 신학과 현실사이에서 고민하는 많은 성도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있다.

서목사 섬김과 나눔으로 노인 복지 전력 있다. 서목사 시무하는 교회 주일 오후 1시. 신월동 네거리 서울대현교회로 어르신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연신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교회 안은 벌써 온 노인들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매 주마다 이렇게 서울대현교회를 찾는 사람이 250여명. 1시간여의 성경공부가 끝나고 2시부터 노인들만을 위한 예배가 시작된다.

 

이렇게 노인들만을 위한 예배를 드린지 벌써 8년째.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는 그들에게 서 목사는 지폐 몇 장을 쥐어준다. 얼마 안되는 작은 돈이지만 250여명의 노인들에게 매주마다 용돈 지급한다는게 쉽지만은 않은 일. 특히 서 목사는 이러한 여비를 교회 재정이 아닌 자신이 집회를 통해 받은 사례금과 책 출간을 통해서 지급하고 있다.


서 목사가 노인들을 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노인 복지와 선교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함이다.

다른 교회처럼 교회 건축에 목을 맨다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서 목사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나누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서 목사는 특히 무의탁 노인 등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해 50여평 규모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조만간 운영할 계획이다.

 

“처음에는 오시는 분들 중 30%만 믿어도 좋겠다고 생각해 시작한 일인데 요즘 가만히 보면 80%정도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거 같습니다. 노인들을 잘 섬기는 건 기독교를 떠나 인간의 기본 도리입니다. 특히 오갈 곳 없는 분들을 섬기는 일에 더욱 매진할 생각입니다.또 타종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을 위한 쉼터를 건립해 노인·복지선교를 펼칠 비전을 갖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서목사는 “불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의 경우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기독교에 대해 또다시 회의를 갖기 쉽다”면서 “교회가 이들을 품고 섬기며 지속적인 사랑을 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멘넷 업데이트 칼럼 기고 글/ 서울대현교회/ 서재생목사

 
제 4 장
불교의 해탈(解脫)의 세계와 기독교의 영생(永生)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구원론)


1. 들어가는 말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여러 사상(思想)들은 공통적(共通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 세상의 삶을 마치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이 행한 삶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審判)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도 사람이 죽으면 생전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업보(業報)심판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 동안 선하게만 살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성경에서는 선(善)을 행하고 죄(罪)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이 세상에 아주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罪)를 전혀 짓지 않고 완전한 선(善)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성철 종정 스님도 열반(涅槃)법어에서 “수많은 죄(罪)를 짓고 간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인간 한계의 현실로, 여기에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罪)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스러운 형벌의 길을 가야만 하는가? 역사 이래로 많은 종교들이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불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해탈(성불)의 길,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영생(구원)의 세계가 무엇이 다른 가를 비교하고자 합니다.

 

2. 불교의 해탈(解脫)의 의미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자신의 선악간 행위(업보)에 따라 윤회하는 존재라고 불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되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길을 불교에서는 해탈(解脫) 혹은 성불이라고 하는데,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해탈이라고 하고,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된다는 의미에서 성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 불경이나 종파에 따라서 불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내용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께서는 팔정도(八正道)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주선 1세기경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주후 3-4세기까지 지속된 대승불교에서는 각 종파에 따라 상이한 여러 가지 수행법을 해탈과 성불의 길로 제시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육바라밀입니다. 이 육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보살의 수행법으로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실천 덕목을 말 합니다.

 

보시(布施; 베푸는 것), 지계(持戒; 계율을 잘 지키는 것), 인욕(忍辱; 어려움을 참는 것), 정진(精進;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선정(禪定;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 지혜(智慧;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 보살이 이를 잘 수행하면 성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대승 불교인 북방불교로서 율종에서는 계율을 강조하고, 선종에서는 참선을 강조하고, 정토종에서는 염불을 강조하고, 밀교종파에서는 진언을 강조를 합니다. 이처럼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해탈과 성불의 길이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서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해탈, 성불의 길은 누구나 원한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출가 승려가 되어 수행한다고 해서 해탈, 성불의 길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불교의 해탈의 세계
불교의 해탈(解脫)이란 산스크리트어 비모크샤(vimoksa)로 뜻은 욕망과 번뇌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불교의 궁극적 이상은 중생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는데 있습니다. 모든 중생이 어떻게 해야 해탈이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설명한 것이 팔만사천대장경 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탈인가 하면, 바로 윤회세계로부터의 해탈입니다. 윤회설에 따르면 세상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을 보면 석가모니는 인간계에 처음 나타난 부처님이 아니라 일곱 번째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처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즉 인간과 부처가 된 일곱 번째 사이는 180겁이나 되는 긴 세월의 간격이 있다고 합니다.


1겁[천지가 한 번 개벽한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은 43억 2천만 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으로 크기가 160평방킬로미터인 바위 위를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3년에 한 번씩 스쳐 지나감으로써 그 바위가 다 달아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만약 1겁을 43억 2천만년으로 계산하면 180겁은 7,776억 년이 됩니다. 석가모니 즉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윤회를 거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윤회설에 따르면 생명은 삼계 육도로 다음 여섯 세상 사이를 영원 전 옛날부터 영원한 미래에 걸쳐 계속해서 윤회전생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윤회세계인 육도(六道)의 세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는 천상(天上)계라 하여 신의 세계인 극락세계이고, 둘째로는 인간(人間)계란 인간세계로 사바세계라고 하여 소위 인도환생 세계입니다. 셋째로는 축생(畜生)계로써 동물의 세계로 환생세계, 넷째로 아귀(餓鬼)계로써 보통 귀신이 많이 사는 곳으로 이들에게 잡혀서 고통을 받게 되는 곳, 다섯째로 아수라(阿修羅)로써 악령의 세계로 이곳에서는 살아서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되는 곳, 여섯째로 지옥도(地獄道) 형벌의 세계입니다.

 

삼계육도 윤회의 세계, 이들 가운데 인간(人間)계와 축생(畜生)계는 우리 육안으로 보고 있는 세계인 반면. 나머지 네 세계는 상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중생은 이 여섯 세계를 영원히 윤회전생하고 있는 셈인데, 불교는 이 모든 세계를 <고통(苦痛)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누구든 한 번 지옥에 가면 아무리 짧아도 1조 6,200억 년 동안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일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아귀와 아수라와 축생의 세계도 고통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 만만치가 않고, 인간 세계도 마찬가지로 고통의 세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세계를 다음과 같이 생, 노, 병, 사의 고통을 비롯한 이별애고(離別愛苦:-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증오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 구불득고(求不得苦高:-구하는 데 얻지 못하는 고통], 오음성고(五陰盛苦:번뇌의 고통] 등 사고(事故)와 팔고(八苦)라 불리는 갖가지 고통이 인간사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천상(天上)세계는 여러 가지 괘락으로 가득 차 있어 가장 고통이 적은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사는 자들에게도 죽음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장 수명이 짧은 자라도 900만 년의 수명이 약속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윤회 속에 어딘가에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天上)계는 기독교의 천국(天國)과는 매우 다릅니다.

 

4. 불교의 해탈(解脫)의 내용

1) 불교는 윤회(輪廻)에서의 생존으로부터 해탈(解脫)을 지향합니다.
윤회 세계로부터의 해탈[탈출], 생존 그 자체로부터의 해탈하는 것이 불교의 이상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사물에 집착하는 근본 원인은 자기의 생존에 있습니다. 생존의 원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늙고, 죽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통(苦痛)의 원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인 생존(生存)으로부터 해탈 될 수 있을까하는 방법론이 불경(佛經)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고통과 생존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모든 욕망(慾望)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실과 현상은 계속 변하는 것으로 실체(實體)를 지니지 않는 공(空)이므로 이것을 깨닫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라. 그러므로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욕망을 끊을 때 윤회(輪廻)세계로 태어나게 하는 업(業)은 소멸된다. 그렇게 되면 윤회에서 해탈되어 생존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자기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기의 존재(存在)를 부정하면 윤회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고.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 죽음, 슬픔, 고통, 번뇌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삶 그 자체를 부정합니다.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만 않는다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거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어 집착하는 마음을 버린 자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해탈이란 두 번 다시 생명(生命)을 부여받지 않고, 두 번 다시 생존하지 않으며, 윤회(輪廻)의 유전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집착(執着)과 욕망(慾望)과 번뇌(煩惱)의 끈을 자르면,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해 열반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열반(涅槃)이란 해탈한 상태를 말합니다.

 

2) 불교의 해탈(解脫)이란 불교 발생 이전 인도 고유사상 이었습니다.
해탈(解脫)이란 말은 원래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교가 발생하기 1000년 전부터 이미 시작된 순수한 인도 사상이었습니다. 브라만교에서는 자아(自我)의 일상생활을 벗어나 아트만의 본성에 들어가 순정(純淨)하게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그것은 진여(眞如:우주의 대 생명)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며 삼애(三毐)에 에워싸인 자기 본래의 마음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불교의 연대와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자이나교에서도 이 해탈을 무엇보다 이상으로 하여 출발한 것은 이 해탈사상이 그만큼 인도 전역에 보편화된 까닭이었습니다. 이렇게 상식이 된 해탈 사상을 두고도 소승과 대승은 해석상에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즉 해탈에 대한 견해는 소승적(小乘的)입장과 대승적(大乘的) 입장의 차이점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승적 견해는 해탈을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인식하려고 합니다. 번뇌와 욕망의 속박은 어디까지나 중생 개인의 문제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승(小乘)에서 제시하는 수행방법은 개인적 수행(修行)의지에 비중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적(大乘的)견해는 비록 개인이 번뇌와 욕망을 없애고 해탈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에 있어서 해탈의 이념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실천의지입니다. 이것이 보살사상입니다. 지장보살은 해탈 할 수 있지만 지옥의 중생들을 다 해탈시킨 후, 열반하게 된다는 것이고, 관세음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소원을 성취시킨 후, 해탈하겠다는 것이며,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들을 질병을 고친 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해탈이 성취된다고 믿는 것이 대승불교의 해탈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 두 파의 해석을 합쳐보면 이 인생의 바른 길을 방해하는 번뇌와 업보와 같은 결박에서 벗어나 도달하는 것이 해탈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얻어진 해탈을 통해 비로소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혜(지혜)해탈은 오온이나 십이연기에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을 봄으로써 지적으로 해탈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서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을 직관하는 것[정견]만으로 마음의 번뇌가 완전히 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정(正定)을 통해 마음에서 그것을 멸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心:-마음)해탈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이 갖추어 질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입니다.

 

 

4. 열반(涅槃)에 대한 불교계의 해석

불교에서 인생의 고뇌로부터 해방인 해탈의 경지를 표현할 때 열반(涅槃)이라는 말을 씁니다. 열반은 불교에서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열반은 해탈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럼 해탈은 또 무엇일까요? 해탈이란 두 번 다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두 번 다시 생존하지 않으며, 윤회(輪廻)의 윤(輪)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집착과 욕망과 번뇌의 끈을 자르면 생사윤회로부터 해탈(解脫)해 열반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구원받은 세계인 영생(永生)의 세계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열반은 일반적으로 불교 고유의 중심개념으로 알고 있으나, 인도에서는 자이나교나, 브라만교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던 관념을 채용한 것입니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 “비루비나(zirvana)”를 음사한 말로 “동요를 가라앉힌다.” “조용하게 가라앉는다.”는 의미로도 사용한 예가 있지만, 보통은 “불꽃을 불어 끄는 것” 또는 “불어 끈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역(漢譯)에서는 적멸(寂滅), 멸도(滅度)등으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열반(涅槃)의 어의(語義)가 나타내고 있는 “불이 껴진 상태”는 불교의 이상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인간이 무명업력(無明業力)에 의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그릇된 가치에 얽매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했을 때 성취됩니다. <잡아함경>에 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일체번뇌가 영원히 없어져야 열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법화경에는 “집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자기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면 윤회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 죽음, 슬픔, 고통, 번뇌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사실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멸망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이는 열반의 세계가 무(無)존재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1) 불교의 구원인 해탈(解脫)의 세계는 정적인 무(無)의 세계입니다.
해탈의 세계는 첫째로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인 정적(靜寂),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근본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실제로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니르바나>로 “꺼져 버린 상태”라는 뜻을 가지며 마치 거센 바람에 꺼져 버린 불꽃처럼 열반은 거센 바람에 의해 생명의 불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날 석가모니가 “열반(涅槃)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에게는 저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 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결국 석가모니는 열반은 윤회(輪廻)라는 생존(生存)의 틀 밖으로 나간 것이기에 통상적으로 말하는 유무(有無)의 차원에서 “열반(涅槃)에 들어간 자가 존재 하는가 존재(存在)하지 않는가?”라고 물을 수는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열반은 생명에 관한 모든 것들이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무생(無生)무사(無死)의 현상을 의미하면서 생사환멸 연기라고도 합니다.

 

2) 해탈(解脫)의 상태가 너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 일부 후세 사람들은 해탈의 세계인 열반에 들면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기 시 작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변화해 해탈이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과도 같은 이미지를 주게 된 것입니다. 해탈의 세계인 열반(涅槃)은 <정토>나 <불국토>라는 말과 결부되어 그곳에는 환희와 행복과 영생이 있다고까지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열반의 해석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불교의 본래 사상이라기보다는 후세에 와서 부가(附加) 또는 변질된 것입니다.

 

초기불교 경전을 보면 해탈세계는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단절된 절대적인 무(無)를 의미합니다. 불교는 원래 생사윤회로부터의 해탈을 목표로 해서 생긴 종교(宗敎)입니다. 즉 생존의 틀 밖으로 벗어나고픈 희망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해탈인 열반의 세계란 거기에는 즐거움도 슬픔도 없는 단지 불이 꺼진 상태의 정적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생사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불교에 있어서 열반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삼법인(三法印)에도 이 뜻을 포함하는 교리로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열반(涅槃)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성제인 팔정도(八正道)의 수행을 통해 실현된 그 곳도 모든 번뇌(煩惱:-탐, 진, 치)와 무지(無知)가 사라져 생사(生死)의 괴로움을 멀리 초월된 해열반의 세계 해탈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5. 기독교의 영생(永生)의 세계

성경은 영생(永生)을 기독교의 구원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2;23) 앞에서 살펴본 불교의 해탈은 고통의 존재에서 구원 받아 성불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안타깝게도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렘 2: 22)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누구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구원의 문재를 해결 할 수가 있는가.

 

1)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영생을 받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세계인 영생을 얻는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영생의 구원 문재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성경말씀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써는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롬 10;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내 마음에 믿고 고백할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롬10;10) 기독교(基督敎)는 영생(永生)의 종교(宗敎)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리라.”(요3:36) 이처럼 성경은 한결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죄(罪)의 문제를 해결 방법.
로마서에서는 영생(永生)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로 파생된 새 생명(生命)으로 죄(罪)로 인해 들어온 사망(死亡)을 전복한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죄(罪)의 삯은 사망(死亡)이었으나 예수 안에서는 거룩함에 이르는 영생의 열매가 있다(롬5:21, 6:22~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는 이 영생(永生)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죄 해결 문제는 제5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3), 기독교의 영생(永生)의 세계
기독교의 구원의 세계인 영생이 만약에 이 땅에서의 행복, 기쁨, 성공 같은 것을 의미한다면 다른 종교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의 영생세계는 이 땅의 차원을 넘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생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해탈의 구원의 세계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성경은 “육체(肉體)를 위해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두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갈6:8)고 말씀합니다. 영생(永生)은 본래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으로(딤1:2) 의와 거룩함의 표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후사가 되어 영원토록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딤3:7). 영생(永生)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며, 이 생명은 영을 살리는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復活)하심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적 상태를 뛰어넘는 영화(靈化)된 몸으로의 영원한 삶을 뜻하며, 그것은 육체적 삶이 있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자유롭고 안정된 영원한 부활의 몸(영적인 몸)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부활(復活)의 몸은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에 죽은 신앙인에게,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 시에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신앙인에게 일어날 것을 의미합니다.

 

6, 불교의 해탈(解脫)의 세계와 기독교 영생(永生)의 세계의 다른 점?

불교(佛敎)는 기독교(基督敎)와 같은 영생(永生)의 교리(敎理)가 없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같은 교리 때문에 철저하게 삶을 부정하려 하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삶을 부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생명. 충실한 생명. 영원한 생명(生命)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설에 입각한 불교와 창조론에 입각한 기독교의 차이점입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나 인간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영원부터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인간은 모두 시작이 있습니다. 또한 현재의 삶은 처음 삶이지, 전생(前生)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죽은 후 다시 동물이나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윤회설(輪回說)을 믿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삶을 어떻게든 소중히 영위해야 합니다, 불교(佛敎)에서처럼 더 이상 다른 어떤 존재(存在)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생존(生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생명(生命)에 사랑과 성결의 약동과 기쁨의 영원성이 부여되길 원합니다. 기독교는 불교와 같이 무(無)로 공(空)으로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영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향합니다. 생명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약동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종교입니다.

 

불교(佛敎)의 열반(涅槃)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탈출(脫出)하는 것"으로 비유된다면 기독교(基督敎)의 영생(永生)은 “생명의 큰 바다에 들어가 헤엄치는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간 자는 사랑과 능력과 환희와 거룩함과 끝없는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또한 열반(涅槃)을 “생존의 거센 바람에 꺼져 버린 불꽃”에 비유한다면, 기독교의 영생(永生)은 오히려 “꺼지지 않고 계속 피어나는 영원한 생존의 세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선지자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한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엔 불이 붙었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또는 모세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을 상징한 것입니다.

 

영생은 빛과 열(熱)과 사랑으로 크게 약동합니다. 불교(佛敎)의 열반(涅槃)에서 우리는 부정적(否定的)인 것 밖에는 느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基督敎)의 영생(永生)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크신 영생 속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 사랑과 거룩함과 기쁨과 끝없는 행복에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언제까지나 사는 생명”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 기쁨과 행복의 원천을 갖고 있는 생명은 지루하거나 허무해지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으면 무척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립니다. 또 평소 무척 갖고 싶었던 자동차를 갖게 되면 그 당시는 매우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성능도 떨어지고 스타일도 구식이 되어 싫증이 날 것입니다. ‘왜 이러한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까?’ 그것은 그러한 기쁨이나 행복감이 <외부>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이나 자동차도 모두 자신 외부의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재산이나 연인이나 더 나아가 명성도 모두 자신 외부의 것입니다. 자신의 내부에 기쁨과 행복의 원천을 갖고 있는 생명은 살아가는 것에 염증을 느끼거나 지겨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영생은 그러한 생명입니다. 영생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 안에 참된 사랑과 거룩함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결코 삶을 지루해 하시거나 허무해 하시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영원한 생명을 성도가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태양이 자기 안에 광원을 갖고 있듯 영생(永生)은 자기 안에 행복의 원천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원천인 주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주셨는데, 그것이 영생(永生)입니다.(요일5:11~1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기독교(基督敎)의 영생(永生)이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生命)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심(창2:7)로 시작됩니다. 영생(永生)이란 육체적 생명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새 생명(生命)을 말합니다. 공간복음에서 영생은 죄(罪)를 버리는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7. 나오는 말

불교의 열반(涅槃)의 세계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일체고(苦)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고, 일체고(一體苦)인 나의 삶을 냉철한 관념으로 응시하여 해탈(解脫)을 목표로 깨달음의 세계를 실현시키는 것이 불교(佛敎)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불교의 열반(涅槃)의 세계는 기독교(基督敎)처럼 자기의 몸이 변하여 하늘나라로 또는 다른 세계로 가서 그 모양대로 산다는 그런 동일체의 가르침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운 부모형제를 만난다는 소망도 없습니다.

 

불교(佛敎)의 내세관(來世觀)이 이토록 실감이 없는 것은 그곳에 대한 상세한 석가모니의 교훈이 없는 것도 원인이 되지만, 본래 그러한 설명 자체를 할 수가 없는 불교(佛敎)의 ‘공(空)사상’, ‘무(無)사상’이 바로 그 주된 원인입니다. 불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교의 구원의 세계인 해탈은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신자에게는 이생에서 부처가 될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만 현생에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하게 살고, 그 과보로 내생에는 출가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고자 하는 희망사항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행2;21)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지 못한 불교신자는 생의 마지막 길에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극락에 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저 업보윤회의 굴레 속에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막막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로부터 오는 참된 기쁨과 소망과 참된 평화와 안식이 함께 합니다.(마11;28. 요 3;16)


아멘넷 업데이트 카럼 기고 글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개종선교회 회장.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승려에서 개종한 서재생목사의 특별한 사명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 박힌 불교 토속신앙 탈피해야                  [CDNTV] 2009년 07월 06일
 
새롭게하소 출연 모습
 
 

한국인은 자신도 모르게 불교나 샤머니즘, 토속신앙에 젖어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하늘에 빌던 그 열심 등 전통에 기반한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은 여전히 토착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형태를 갖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사용하는 불교 도교 용어들이 많이 있고 기복적인 신앙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서재생목사(서울대현교회)는 “점심, 야단법석, 인과응보 등 교회 안에서 사용되어 지는 무속용어에 대한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서 “이를 정화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목사는 특히 “불교, 도교 등의 종교에 대한 접근에서 배타성이 심하다”며 “구원관에 대해서는 철저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포용하고 감싸 안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승려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서재생목사는 10대에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입산, 불교에 심취하여 대한불교조계종 정통교단 스님생활을 하다가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맞아 결국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됐다.

 

서울대현교회 개척 이후 개종선교회를 조직하여 불교권 선교에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기독교와 불교가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사고를 극복하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 후 적응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와 주님의 성령에 의한 역사가 무엇인지 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화두’ ‘아비규환’ ‘다반사’ ‘무아지경’과 같은 불교 도교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에 기독교 언어 순화 운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목회자들도 잘 모르고 있는 불교용어, 샤머니즘, 토속신앙 등에 대한 책 「스님 예수 믿으면 좋겠어요」「불교와 기독교의 비교론」「목사님 나무아미타불이 뭐예요」「목사님도 모르는 교회 안에 무속신앙」「목사님도 모르는 가택신앙과 마을신앙과 동물신앙」등 10여권을 집필하고 한국교회 복음화와 세계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서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이교적이고 우상숭배 풍속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도 관습적으로 따르고 있는 무속신앙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무속신앙이 기독교 입장에서 무엇이 어떻게 다르며 가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서목사는 “돌잡이, 백일잔치, 환갑 등 목회자들의 경우에도 잘 알지 못하고 따르며, 일반 기독교 성도들도 그저 무속신앙을 모르고 지키고 있다”면서 “한국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혼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정서를 고찰하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특히 “무속적인 것을 연구하는 학자와 목회자들이 부족하여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으나 이는 심각한 문제”라면서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민족의 특성상 보수적이면서도 불교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이 다분히 혼재되어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서목사는 “불교사상인 무신론과 기독교의 신본사상에서 갈등하는 많은 불교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화시키는 것이 사명”이라며 “교회신앙과 사회신앙의 이원화를 막고 일치된 신앙관으로 주님을 통한 삶을 실천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한편 서목사는 유럽, 동남아, 미국 등 30회 해외집회 인도와 전국 3000여 교회 부흥회 및 전도 집회를 통해 갈등이 없는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고, 신학과 현실사이에서 고민하는 많은 성도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있다.

또 타종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을 위한 쉼터를 건립해 노인·복지선교를 펼칠 비전을 갖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서목사는 “불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의 경우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기독교에 대해 또다시 회의를 갖기 쉽다”면서 “교회가 이들을 품고 섬기며 지속적인 사랑을 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02-2604-7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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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 전도는 이렇게...

 

불교인들에게 전도하다보면 "당신은 당신이 믿는 천국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극락왕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은 서로 다르게 믿어도 결국 갈 곳은 똑같다"며 전도를 정중하게 거부한다. 이는 불교인들이 천국과 극락을 동일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구원관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극락과 천국이 같은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기독교의 천국과 불교의 극락은 유사한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불교의 극락세계는 천국과 같이 영원한 곳이 아니다. 윤회(輪廻) 세계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은 최종의 단계가 아니다. 극락은 최종 단계로 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사실 극락세계는 불교의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불교 이전의 브라만 종교의 내세관으로, 사후세계에 희락이 충만한 천계의 세계다.

 

불교의 창시자는 설법을 통해서 윤회세계는 고통의 세계다. 천인계의 극락도 영원한 극락이 아니라 또 죽음이 있는 곳으로 여전히 고통의 세계로 보았다.

 

그는 '존재(윤회세계)와 고통은 하나다'면서 고통의 세계에서 해방을 받으려면 존재의 세계인 윤회세계, 그 자체로부터 탈출하는 '해탈(解脫)사상'을 창시했다.

 

그래서 두 번 윤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이상이다.

 

이성철 종정스님은 한국의 불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스님이다. 그는 1982년 4월 8일 초파일 범어에서 '극락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잠잘 때 꿈속에서 잠꼬대 하는 소리와 같습니다"고 말했다.

 

불교는 극락에 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불교는 노인들이 죽어서 극락이나 가려고 염불을 하는 종교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러한 생각은 매우 잘못된 오해다.

 

성철 스님은 "저는 일생동안 부처 앞에 절을 하거나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한 적이 없습니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다.

 

또한 그는 죽으면서 열반(涅槃)송에서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阿比) 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는 산에 걸렸구나"고 노래했다.

 

성철 스님의 열반송은 과연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는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권 선교전략에 있어서 불교는 극락세계로 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전도가 필요하다.

 

즉 극락은 죽음이 있는 윤회가 계속되는 고통의 세계이다.

 

그러나 기독교 천국은 영원히 안식하는 곳이다.


서재생 목사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서울대현교회. 개종선교회 회장)


 

[교회안에 불교용어]

내가“ 전생(轉生)에 무슨 죄(罪)가” 많아서 하는 권사님?| ▒신문게재,연재▒


내가“ 전생(轉生)에 무슨 죄(罪)가” 많아서 하는 권사님? <불교적인 용어>


필자가 시골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 하는 중에 한 권사님께서는 절에서 보살계 까지 받았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로 권사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내가 전생(轉生)에 무슨 죄(罪)가 많아서 두 아들을 먼저 보내야 했습니다” 하는 것 이었습니다.

 

 

1. 전생(轉生)의 의미

전생의 의미란 오늘의 삶은 전생의 선과 악의 과보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귀정하는 것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불교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영향으로 “내가 전생(轉生)에 무슨 죄(罪)를 지어 이런 고난이 있지?, 또한 전생에 무슨 원한이 있기에 저런 원수 같은 남편을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하는가?”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현생에 지은 과보에 따라 내생에 극락에 탄생하기도 하고 지옥에 탄생하기도 하는데, 그 지은 업보(業報)만큼의 과보를 받고 난 뒤에는 다시 다른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1) 윤회(輪廻)의 세계

윤회란 인도의 산스크리트의 삼사라(sasra)를 번역한 말로 전생(轉生), 또는 유전(流轉)이라고도 합니다. 이 윤회사상을 불교는 연기론으로 설명합니다. 연기론에는 생사유전연기와 생사환멸연기가 있습니다.

 

 

(1) 생사유전연기(生死流轉緣起)의 세계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해탈 하지 못해서 생사가 계속으로 반복되고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그 생명의 가치와 살아온 결과에 따라서 고통과 불안을 벗어나지 못한 일체 고통세계로 봅니다. 이러한 생사유전연기사상에 입각하였을 때 한번 사람에서 업보를 지어 그것을 풀지 못하면 후세에도 끝없이 그 업보에 따라와 윤회전생이 계속되니 깨달음을 얻어 생사가 없는 생사환멸세계로 가는 것이 불교의 이상세계입니다.

 

 

(2) 생사환멸연기(生死還滅緣起)의 세계
생사유전이 완전히 소멸되어 생사가 없이 불교의 이상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불교의 구원의 세계로서 열반세계라고 합니다. 열반이란 원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를 소리 나는 데로 옮긴 말입니다. 뜻은 번뇌의 불이 모두 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열반은 해탈과도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이라는 두 가지 해탈이 있습니다.

혜(慧)해탈은 모든 존재에 실체가 본래 없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심(心)해탈은 삼매의 수행을 통해 번뇌를 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혜(慧)해탈과 심(心)해탈이 모두 갖추어졌을 때 열반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열반의 세계가 바로 생사환멸연기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이 되면 극락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깊게 연구하면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불교의 이상점에 가면 무(無)의 세계가 있고, 공(空)의 세계뿐입니다.

 

 

2. 전생(轉生)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전생이란 곧 현생의 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크게는 현세 이전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불교와 같이 윤회전생을 믿는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는 현세와 내세만 있지 전생은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불교적인 사상에서 온전히 거듭 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부부집사님들이 당신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 할 수 있어요.라고 질문하면 고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안 산다고 하면 미운소리 들을 것 같고 해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데 전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농담으로라도 전생과 연관된 용어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현생에 지은 과보에 따라 다음 생에 삼계육도로 태어났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권사님께서 두 아들이 죽었다고 해서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와는 일치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불교적인 언어는 교회 안에서 추방되어야 하고, 무속신앙에 깊숙이 빠져들어 가는 한국 교회를 구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서재생 목사 /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서울대현교회,/ 개종선교회 회장/

 

 

목사님 저희 어머님이 “돌아가신 49일 예배를 드려주세요”하는 집사님!
<불교적인 영향>


어느 시골교회 집사께서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담임 목사의 집례로 은혜롭게 마쳤습니다. 그 후 49일이 되는 날 사택으로 전화를 걸어 목사님! 오늘이 저희 어머님 돌아가신지 49일이 되는 날인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49일 예배를 드려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불교의 49재란 뭐예요?

 

 

1. 49 (四十九)재의 의미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들에서 행하는 갖가지 의례들은 인생의 현실 속에서 필연적로 겪게 되는 여러 과정(통관의례)과 연관되어서 생겨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49재는 죽음과 관련한 불교의례입니다. 불교는 특히 죽은 사람을 위한 의례가 두드러지게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재(齋)입니다. 재(齋)란 죽은 사람을 위해 음식을 바치고 정성을 들여 죽은 사람의 명복(冥福)을 비는 천도재(遷度齋)의례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람이 죽으면 49일이 되는 날에 지내는 49재(四十九齋)입니다.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모든 악업이나, 원한관계 등을 해소하고,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돕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예배를 하지 않으며, 죽은 사람을 위하여 어떤 내용으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특히 예배는 어느 곳이든지 갖다 붙여서 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예배합니다. 성경에는 죽은 사람에 대하여 추모하라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이미 낙원에 갔으며 현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자손이나 친척과 친지들이 주 안에서 죽는다면 낙원으로 갑니다. 굳이 세속풍속의 영향으로 장사 후 3일 째 되는 날에 무덤에 가서 죽은 사람을 위한 삼우 예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우 예배는 무속과 타협하는 우상 숭배로 죽은 조상에게 효도를 나타내는 착각 행위입니다. 도가 장례 후에 하는 삼우 예배는 불교 49재의 영향입니다. 어머니가 돌아 간 후 49일 째 되는 날 어머니를 위해 예배를 부탁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불교에서는 부모가 죽으면 49재를 지내는 것이 자식 된 도리로서 최소한의 효로 생각을 합니다.

 

 

2. 49 (四十九)재의 풍습

불교는 인도에서 창시된 종교입니다. 인도의 생사관을 보면 사후에는 생전에 지은 자업자득(自業自得)에 의해서 삼계육도의 윤회전생 한다고 합니다. 윤회(輪廻)의 과정을 생유(태어난 순간)와 본유(출생에서 죽는 순간까지)와 사유(죽는 순간)와 그 이후 중유(죽어서 다음 생의 결정되기까지 기간을 49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49재를 지내는 것은 죽은 매 7일 째마다 일곱 번 명부시왕들이 재판을 열어 다음 생으로 결정하는 심판이 있으므로 절에서 스님들은 사망 후 매 7일 째마다 재를 올리고 마지막 날인 49일에 고인을 위하여 온 가족과 친척들이 절 법당에 모여 극락세계로 천도하는 49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3. 49 (四十九)재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

기독교는 단회적 생을 믿는 종교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으로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생을 믿는 종교입니다. 출생과 죽음이 연속해서 반복된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인이 삼우 예배, 49일 예배 또는 3일 탈상이니 49일 탈상과 100일 탈상을 한다는 것은 이 풍습에서 온 것입니다. 유교식 상장의례에서는 전통적으로 초상 후 만 1년이 되는 날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소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 2년째가 되면 다시 제사를 지내는데 “대상”이라고 합니다. 즉 대상은 만 2년 때까지는 굴건제복을 그대로 입다가 대상을 마치면 탈상을 하고 상주가 짚었던 지팡이와 상복을 모두 불로 태웁니다. 한마디로 모든 상례를 끝내고 평상의 생활로 돌아가는 제사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탈상은 빠르면 3일 만에 하는 경우도 있고, 49재로 하거나 100일 탈상을 합니다. 100일 탈상인 경우는 49재가 소상이 되고 100일 제가 대상이 됩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죽은 후에는 천국에 가고 불신자는 지옥에 간다는 믿음으로 거듭나서 모든 무속 신앙과 유교적인 상례풍속을 타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불교의 윤회 사상에서 오는 중유기간인 영혼천도의례로 극락왕생을 바라는 49재는 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 중에 불신자가 있다면 그들을 구원하는 전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서재생 목사 /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서울대현교회,/ 개종선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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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일 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5.07 이 목사는 미신적 신앙을 아주 싫어하는 타입이네요.대승불교 사상의 육도 윤회설에 학을 띤것 같기도 하구요..기독교 신앙도 진화를 해서인지..죄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안합니다.불신자..즉 예수를 믿으면 천국은 따논 당상이다..안믿는 불신자는 지옥에 간다..암튼 선,악의 대가를 믿고 안믿고의 차이로 바꾼 것임
  • 작성자일 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6.06 불교인 전도에서...웃음이 나온다..극락도 윤회하는 곳이다..그러나 천국에서는 영원히 안식한다..그말이 맞긴하다..영원한 안식...잠자는 것이제 .
  • 작성자일 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6.06 새벽 4시면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하늘에 빌던 그 열심 등 전통에 기반 한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은 여전히 토착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형태를 갖고 있다.?? 기독교의 기도는 뭔데? 유대나라 신한테 비는거 하고 ,우리나라 조상신한테 비는거하고 같나? 틀리나? 우리신앙이 훨씬 정성이 많이 들어갔다고 보는데? 돈으로 해결하려는 요즘 어마니들 반성하고 이런 기도방법은 권장해야 한다.암튼 미신불교에서 잘 벗어 나긴 했소이다..(나도 개종해서 불교 윤회나 실컨 까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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