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죽음에 대한 연구
류 성 태(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Ⅰ 서 론
21세기에 접해 종교가에서는 말세론이 더욱 강조되는데, 종말이 올 것을 강조하는 서구 사조가 그 배경이 되고 있다. 이는 메시아적 성격의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더 농도가 진하다고 볼 수 있다. 말세론은 서양 사고에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동양에 말세론과 같은 것은 거의 없다. 서구 사조와 달리 동양 사상에는 절망 내지 말세란 말은 자주 거론되지 않는 편이다. 동양 철인들의 낙관주의적 사유에서 비롯된 생명관 및 성품의 선함을 강조하는 영향 때문이 아닌가 본다.
지금까지 있어온 말세론 등 불안 요인으로는 죽음의 공포가 그 중심을 이루어 왔지만, 동양의 성철들은 낙천적 사유에 의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死生의 문제에 대해 깊이 거론하여 왔다. 특히 道家 철인들은 죽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긍정적 관점을 갖게 하였다. 서복관에 의하면, 장자는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物化의 입장에서 구속을 극복하며, 조물자의 변화에 함께 따르라는 것이라 한다. 이처럼 죽음 초탈을 강조하고 이 불안 극복론이 도가에 의해 거론되었다.
그러한 죽음 초탈의 입장에서 도가 사상은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는 죽음의 철학을 제시하여 왔다. 노자의 ‘谷神不死’(도덕경 6장)라든가 장자의 ‘不死不生’(대종사편)이 그것이며, 이는 중국인의 육체 불멸론과도 연결된다. 중국인 고유의 육체 불멸에 대한 믿음은 대체로 노장이 활동했던 춘추전국시대 무렵에 생겨났다. 그 후 "山海經"에는 이미 신선 不死에 관련된 언급을 한다. 이러한 한대 이후의 도교 신선론은 "장자"와 "열자"의 長生 不死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유교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현실적이다. 이는 도가와 달리 생과 사에 대한 관심의 차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공자는 그의 제자가 죽음에 대하여 물었을 때 죽음에 대한 관심을 삶으로 돌렸다. 이를테면 「아직 삶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리오」("論語" 「先秦」, 未知生, 焉知死)라는 것이다. 곧 자공이 질문한 죽음에 대해 이는 한 생명체가 죽은 뒤에 알 수 있다며, 선진 편에서 말하는 계로와의 문답에서 공자는 死生의 문제를 산(生) 인간의 문제로 집중시키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공자와 달리 죽음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장자는 본질적으로 死生의 명확한 이해보다는 회의론적 입장을 견지한다. 「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죽은 뒤에는 그 끝나는 곳을 알 수 없는 이상 天命이 어찌 없다 하겠는가? 그러나 또 생명이 시작되는 곳을 모르는 이상 천명이 어찌 있다고 하겠는가?」 이처럼 그는 생과 사의 문제에 대해 본질적으로 회의하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여기에서 장자는 죽음을 언급하는데 상징적 예화를 동원한다. 특히 죽음이란 ‘혼돈’의 경우처럼 無爲의 작용을 거스를 때 나타난다는 상징적 언급이 주목된다. 「사람은 누구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이 혼돈에게만 그게 없다. 어디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주자.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처럼 무위 자연을 거스를 때 죽음이 온다는 것이다. 인위를 극복하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자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이란 우주의 혼돈이 형상화되면서 거론된다. 이를테면 형상화된 육체의 죽음과 삶, 내세와 현세 어느 것도 자연의 법칙으로서 우주 음양의 變易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은 동양의 보편 정신이 아닌가 본다. 장자의 죽음에 대한 관점 역시 이 우주 변역의 원리와 인간 개체의 생멸 원리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장자의 죽음에 대한 연구는 동양 사상에 있어 우주와 인간의 공존적 관계, 생사 초탈, 생명 형성, 죽음의 원인 등을 이해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Ⅱ 죽음의 의미
1. 죽음의 개념
죽음의 의미를 파악해 보는 일은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게 하는데 일익이 된다. 장자는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도록 공헌하였으며, 이는 그가 죽음에 대한 음미를 심도 있게 하였다는데 있다. 우선 그가 본 죽음은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귀신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했다. 「밖으로 작용할 뿐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는 죽음으로 간다. 밖으로 작용하여 얻었다고 함은 바로 죽음을 얻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본성을 잃고 형체만 있는 것은 죽어서 귀신이 된 자이다.」 이처럼 죽음의 개념은 귀신으로 이어져 새롭게 다가온다.
그런데 중국 사상을 이해하려고 한 서양인의 사유에서 개체의 죽음과 혼백의 관련성은 흥미를 끌어낸다. "고대 중국인의 생사관"의 저자 마이클 로이의 견해를 보자. 그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인간의 영혼을 상이한 두 요소 즉 魂과 魄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들이 조화상태에서 육체에 생명력을 넣어주고 육체를 유지시킬 때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고, 魂․魄․육체, 이 3요소가 분리되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인으로서 동양적 시각으로 죽음의 개념에 다가서고 있다.
그리하여 혼백이 분리되면 형체를 떠나 육체가 흩어진 無의 경지와도 같다. 장자는 이에 죽음이란 형체를 떠난 무형의 상태, 즉 본체의 道에 귀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죽음이란 활집이나 옷 주머니를 끄르듯이 하늘에서 받은 형체를 떠나 육체가 산산이 흩어지고, 정신이 이 형체를 떠나려 할 때 몸도 함께 따라 無로 돌아가는 것이며, 道로의 위대한 복귀인 것이다.」 육체가 흩어져 천지 대자연에 합일하여 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 간주된다.
이러한 죽음에 있어 無를 상정하면 생에 있어 有라는 개념이 또 합류한다. 곧 장자는, 죽음은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요, 삶은 무에서 유로 된다는 논리로써 설명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다. 차별을 버리고 평등 공평하기를 권하는 것은 죽음은 有에서 無로 돌아가므로 이유가 되지만 삶은 無에서 有가 되므로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언급한 논지는 죽음이란 유에서 무로 돌아가고, 삶이란 무에서 유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아울러 장자에 있어 죽음은 氣의 흩어짐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생명을 ‘氣’의 응집된 형태라고 보고, 죽음을 ‘氣’의 흩어짐이라고 보았다. "장자"의 지북유 편에 生은 氣聚가 된다고 했고, 死는 氣散이 된다고 했다. 사실 장자는 인간의 신체 형성을 氣로 인한 것이라 하고 氣의 보존이 生이 되는 것이며, 氣가 사라지는 것이 死라 보았다. 따라서 기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고 장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 도가의 양생 및 수양론에 있어 근간이 되고 있다.
이 같은 氣散을 죽음으로 본 장자는 혼․백의 구별이 없이 우주 대자연에 합한 무차별의 고요한 경지를 지향한다. 장자는 이 무차별의 경지를 현실 초탈적 입장에서 말하여 죽음과 연결짓고 있다. 「죽음에는 위에 군주도 없고 아래에 신하도 없다. 또 사철의 변화도 없다. 편안하게 몸을 맡긴 채 천지와 함께 수명을 누린다. 제왕의 즐거움인들 이에 미치지는 못한다.」 죽음에 이르면 現世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나 상하의 차별에서 구애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고요한 천지의 수를 누리며 寂寂의 경지와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한다.
어쨌든 장자에 있어 죽음은 그가 동원한 여러 상징적 용어에 잘 나타난다. 그가 말하는 명백의 언덕과 곤륜의 구릉은 모두 죽음을 상징하며, 지리숙과 골개숙이 그곳에 구경갔다는 사실은 상징적인 죽음의 체험을 보여준다. 지리숙과 골개숙이 보러 갔던 자연의 변화나 골개숙의 몸에 생긴 변화는 곧 죽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왼쪽 팔꿈치에서 버드나무가 돋아났다는 것도 죽음을 의미하며, 골개숙이 사후에 버드나무가 되어 轉生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곧 죽음론에는 도가의 轉變說이 연계되고 있다.
2. 인간의 수명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는 죽음 후의 내세보다 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성향이었다. 이는 인간 수명의 영생론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 유가는 죽음 자체의 의미나 죽어서 시작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또 이의 관심을 버림으로써 도리어 인생을 멋있게 엮어가기가 쉬워졌다. 이는 공자와 제자의 죽음에 대한 문답에서 현재의 수명을 중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와 달리 죽음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도가의 장자는 단촉한 수명을 극복, 천지의 무한 壽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생명 개체의 한 존재인 인간에게 엄연히 죽음과 삶이라는 수명의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곧 그는 말한다. 「하늘과 땅은 무궁하지만 사람은 때가 오면 죽기 마련이다. 이 유한한 몸을 무궁한 천지 사이에 맡기고 있기란 준마가 문틈을 획 지나가 버리는 것과 같다.」 이처럼 단촉한 우리의 수명을 천지의 무궁함에 비유하여 아쉬움을 토로하고, 결국 자연에 합일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라고 한 장자의 죽음관이 돋보인다.
그러면 장자는 당시 인간의 수명을 어떻게 보았을까? 물론 도가를 비롯한 도교는 장생 불사를 추구하는 성향이었으나, 장자에 있어 실제 인간의 수명은 짧다고 했다. 「사람의 수명이란 기껏해야 백 살, 중간 정도로 팔십 살, 밑으로 가면 육십 살이다. 병들어 여위거나 남의 죽음을 문상하고 또는 걱정거리로 괴로워하는 따위를 제하고 나면 (일생) 입을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것은 한달 중 불과 네댓 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처럼 그는 인간의 수명을 70-80 안팎으로 본 것이다. 오늘날 선진국 시민들이 누리는 수명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장자에 있어 인간의 짧은 수명의 극복을 위해 보다 근본적인 입장으로 접근한다. 이는 생사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접근한다는 뜻이다. 이에 장수와 요절은 순간의 삶으로 인해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는 ‘장수와 요절은 있으나 그 차이가 얼마나 되겠소’(雖有壽夭, 相去幾何)라고 지북유 편에서 말한다. 또 그는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장수한 자는 없고 장수한 팽조는 일찍 죽은 자이다. 상대를 초월하면 천지의 유구함이 나와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장수와 요절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접근하여 수명의 장단을 초극하고 있다.
이에 장자는 유한한 수명, 즉 죽음과 삶에 대한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을 개입하지 말라고 한다. 인간 형체의 轉變을 인지하여, 무한 자연에 순응하도록 한 것이 이와 관련된다. 그는 사람의 형체는 갖가지로 변화하여 끝이 없다고 본다. 이에 聖人의 경지가 되어 달관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일찍 죽어도 좋고 오래 살아도 좋으며, 태어나도 좋고 죽는 것도 좋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생사에 대한 인간의 희노 감정을 벗어나 성인으로서의 자연과 합일하는 생사 초탈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인간의 수명은 짧기만 하다고 본 장자는 추수 편에서 道의 무시무종(道, 無終始)을 거론함으로써 짧은 수명(物有死生)의 한계를 道의 변화 개념으로 극복하였다. 이는 죽음의 극복을 통한 대자연에의 합일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사람이 이 천지 사이에 살고 있는 시간이란 마치 준마가 벽의 틈새를 언뜻 지나가듯 순식간이다. 사물은 모두 자연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서 다시 변화에 따라 죽는다.」 이처럼 인류의 유한한 생사를 道의 무시무종의 경지에서 초극하자는 죽음 초탈의 철학을 장자는 강구하고 있다.
결국 장자는 단촉한 수명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뜻에서, 得道를 통한 죽음 초탈의 진인과 같은 이상적 인물을 상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옛 진인은 자연의 도(天)를 얻으면 살고 잃으면 죽는다’(古之眞人, 得之也生, 失之也死)고 서무귀 편에서 말한다. 사실 장자에 있어 眞人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를 담보로 하는 미신적 사고는 발을 붙일 수 없다. 이에 장자는 진인이나 천인 등이 시공 초탈의 경지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3. 죽음의 원인
죽음이란 크게 두 가지 원인으로 발생한다. 육체의 수명 기간이 다 되어 氣가 흩어지는 자연사가 있고, 또 인위의 작용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고사가 있다. 먼저 전자의 경우를 보자. 장자는 이러한 자연의 命에 따르는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 「삶과 죽음 …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런 것은 세상 일의 변화(事之變)이며 운명의 흐름(命之行)이다.」 이처럼 그는 생과 사를 운명의 흐름으로 파악하고 있어, 자연의 변화로 이해한다.
이어서 인위적 작용, 즉 인간의 巧智에 의한 재색명리로 인해 죽음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본능을 절제하지 못하여 나타나는 고통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것이 이것이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재물을 탐내다 병에 걸리고 권세를 탐하다 정력을 소모하며 편히 살 수 있으니까 음락에 빠지고 육체에 정기가 남아돌아 주체 못하게 되면 병이라고 할만 하다.」 이처럼 外物에 대한 탐욕과 무절제의 삶에서 육체의 정기가 탕진될 때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인위적 행위는 과실나무가 그 수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 비견되기도 한다. 과일이라는 열매로 인해 가지가 찢겨진다면 나무는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장자는 아가위․배․귤․유자 따위 열매 종류를 거론하면서, 열매를 따기 위해 가지가 잡아뜯기고 부러진다는 것이다. 「이는 열매 맺는 능력 때문에 제 삶이 괴롭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게 된다.」 자신의 有用, 즉 달콤한 열매 때문에 천수를 다하지 못하여 결국 죽음의 원인이 된다.
여기에서 장자는 인위보다는 무위 자연의 변화에 따른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 죽음의 원인이 자연사가 인위적 죽음보다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어떠한 물리적 작용으로 목숨이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곧 그는 말한다. 「일단 사람으로서의 형태를 받은 이상, 목숨을 해치는 일없이 그대로 죽기를 기다리자. 주위의 사물에 거역해서 서로 해치고 다툰다면 일생은 말달리듯 지나가 버려 막을 도리가 없다. 슬픈 일이 아닌가.」 그가 언급하고 있듯이 ‘목숨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도 극복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인위적 원인으로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양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고사가 아닐 경우, 죽음의 원인이란 우주 元氣의 聚散 작용에 기인한다. 우주 대자연의 변화에 따른 시간적 흐름으로 천수가 다하게 된다. 곧 우주의 변역의 과정이 그렇듯이 사람이 생겨남은 우주 元氣가 이와 같이 응취하여 펴나오는 것(神․伸)이고, 죽음은 돌아가는 것(鬼․歸)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죽음의 원인이 되는 것은 精氣가 수명을 다해 흩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흩어지는 정기를 중지시킨 채 장수하려고 한다면 이는 자연의 변화에 거역하는 행위이다. 이 죽음을 거부하려 하는 것은 고통일 뿐이라는 것이다. 추수 편에 밝혀져 있듯이 다가오는 시간의 변화는 막을 수 없기(時不可止) 때문이다. 곧 장자는 말한다. 「사람은 태어나면 걱정과 더불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장수하는 자는 늙어서 정신이 흐려져 오랜 세월 걱정하며 죽지 않고 살아간다. 얼마나 괴로운 짓인가.」 의도적 장수가 아닌, 이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죽음을 거부하지 말고 수용하자는 입장이 그에 의해 밝혀진다.
궁극적으로 장자는 得道의 깨달음과 죽음 초탈을 연결짓고 있다. 道를 얻으면 살고 이를 잃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바 있는 인위적 생명 단촉보다는 道에 합일하는 것과 연결된다. 「도란 만물의 근원이며 모든 것은 이것을 잃으면 죽고 이것을 얻으면 살며, 일을 할 때 이것을 거역하면 실패하고 이것에 순응하면 성공한다.」 일생의 삶에서 득도를 하여 자연의 변화에 생을 맡긴 채 살아간다면 요절은 없을 것이며, 또 어떠한 죽음의 공포도 사라질 것이다.
Ⅲ. 생명과 죽음의 상관성
1. 死生本無
사생이 없다는 것은 태어나는 과정이나 바탕이 없다는 것이며,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초현실적이고 초탈적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생명체에 있어 생산 근거가 없고 죽음의 전개가 없다는 것은 본체론적 동양철학에 바탕한 형이상학적 사유와도 같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만물은 생겨나는 근본이 없고 돌아갈 구멍도 없다.」 그의 견해처럼 생겨나는 근본이 없으며, 죽게 되는 과정도 없다는 사유는 심미안적 본체 세계에서 생각해 봄직한 일이다.
이처럼 생과 사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우리의 상식적 논리를 뛰어넘어 초탈의 세계에서 마음껏 소요 자재한 장자는 生死 무분별의 경지를 寓言的으로 말한다. 언젠가 열자가 여행하다가 길가에서 식사를 했다. 그때 백년 묵은 두개골을 발견하고 쑥 풀을 뽑아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자네만이 죽음도 없고 삶도 없다는 걸 알고 있네. 자네는 과연 기뻐하고 있는 걸까?」 장자는 死生이 없는 해학적 우언의 표현으로 ‘두개골’을 등장시켜 죽음과 삶의 미분을 체험하고 있다.
하여튼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세계는 무엇일까? 장자는 ‘혼돈’(응제왕편)이라는 용어를 들고 있다. 이 혼돈의 경지는 死生 미분의 경지와도 같다. 즉 혼돈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나타나기 이전의 세계로서 상징적 죽음의 세계와 관련되며, "장자" 두개골의 우화와 연결된다. 장자는 이러한 두개골과의 만남을 통해서 본래 생과 사가 없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죽음의 상징적 표현과도 같은 두개골의 용어가 등장한 것은 다소 해학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死生이 본래 없다는 논리는 장자에 있어 ‘無’의 경지에서 이해된다. 우주에는 처음 無가 있었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천지의 태초에는 無가 있었다. 존재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이와 같이 장자는 본래 존재의 無라는 것을 가정한다. 無의 혼돈 경지에서 출발한 후, 一이 생기고 命이 작용하며 萬物이 이루어지고 각자의 性이 구비된다는 것이다. 이 본래 無의 경지에서는 생과 사의 구분이 없게 된다.
그러면 왜 그는 생과 사가 본래 없다고 했을까? 보다 실제적 배경에는 생사에서 오는 두려움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생명 개체의 생사 한계를 벗어나려는 뜻에서 우주의 渾沌에 잠재운다. 인류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생사 존망의 문제라는 면에서, 장자는 생사의 문제를 개체아의 한계에서 벗겨다가 연원 속에 더 沖淡시킨다는 것이다. 한 개체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연원 즉 大體에 합일하여 생사를 초탈하는 모습이다.
사실 생사는 원래 없다지만 정말 없는 것일까? 장자에 있어 물론 현실의 세계가 엄연히 전개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生이란 잠시 우주의 기운을 빌리고 있을 따름이라고 장자는 말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천지의 氣를) 잠시 빌리고 있는 거다. 팔꿈치의 혹도 그 氣를 빌어 생긴 것이다. 삶이란 먼지나 티끌이다. 죽음과 삶은 낮과 밤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사가 존재하지만, 이는 우주의 기운을 잠시 빌린 것으로 장자에게 이해된다.
혼돈에서는 死生 本無이나, 인간의 현실 세계로 돌아오면 우주 기운을 빌려 생과 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마저 부인하지는 않는다. 道의 작용으로 無에서 有로의 전이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有는 道의 작용으로 인해 나타난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道가 얼굴 모습을 베풀어주고, 자연(天)이 몸의 형태를 베풀어주었다.」 경상초 편에서 「有乎生, 有乎死」(삶과 죽음이 있다)라고 하여, 이러한 死生의 현상적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2. 化生化死
生이 있으면 이어서 곧바로 死가 이루어진다. 영원히 生만을 보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장자의 용어로 말하면 ‘化生化死’라 한다. 그는 생과 사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相卽의 관계로서 서로 이어진 연속체로 보고 있다. 「사물은 모두 자연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서 다시 변화에 따라 죽는다(化生化死). 변화하여 생겨나는가 하면 다시 변화하여 죽는 것이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 의한 化生化死의 원리를 모르고 있는 인간들은 그저 죽음을 슬퍼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장자"를 주석한 유숙아는 이 ‘化生化死’에 대해서 ‘변화’의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는 이에 말하기를 「생사거래는 모두가 변화이니 조물자에게 맡겨야 한다. 어찌 그것에 얽히겠는가?」라고 한다. 化生化死라는 생사의 원리는 자연의 변화 현상에 불과하며, 장자는 이를 조물자에 맡기도록 했다고 유숙아는 전언한다. 이에 인간은 생사 변화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의 ‘化生化死’는 장자의 친구 혜시가 밝힌 ‘方生方死’와 같은 흐름이다. 혜시의 본 학설을 그가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에 혜시의 말을 인용한다. 「사물이 생겨난다는 것도 오히려 죽는 것(方生方死)이다. 큰 입장에서 보면 같은 것도 이것을 구분해서 작은 단위로 비교하면 각기 달라진다. 이것을 작은 분별이라 한다.」 이와 같이 化生化死는 方生方死와 같은 내용으로 전개된 것이다. 生과 死 어디에 구애됨을 벗어나라는 뜻으로 이러한 언급을 하였다.
이같이 化生化死와 方生方死는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면(生) 곧 죽는다(死)는 자연 변화의 원칙을 따라야 하며 거역하지 말라는 뜻이다. 陳鼓應도 이를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方生方死는 시간을 따라 길게 흐르는 관념에서 본 것으로, 만물은 변하지 않음이 없으며 시간은 흐르지 않음이 없다.」 이와 같이 생과 사는 자연의 변화 현상으로서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生에서 死, 死에서 生으로 이어짐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만물이 시간의 변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化生化死와 方生方死는 생과 사가 단편적이면서도 하나됨을 말한다. 생사가 같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蔣錫昌은 이를 주석하여 말한다. 「만물의 생과 사는 모두가 한 개의 停留하는 단위가 되며 분할되어 단편이 된다. 하지만 惠施는 진정한 시간은 영원히 이동하는 것이며, 진정한 물체는 영원히 변동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동천에서 떠오르면 곧 서편으로 지는 것이며, 만물 역시 태어나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영속의 뜻이다.
장자는 이에 生이 있으면 바로 죽음이 뒤따른다고 하였다. 양자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始終이 하나이듯 死生이 한 무리(徒)라는 것이다. 「삶이란 죽음을 뒤따르게 하는 것이며 죽음은 삶의 시작이다. 누가 死生을 관장하는지를 어찌 알겠는가.」 그에 있어 사물의 始는 곧 終이어서 언제나 빙빙 돌며 변화하는 것으로 비추어진다. 이에 始의 生과 終의 死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변화의 과정을 따라 일체가 된다.
따라서 만물 齊同의 입장에서 장자는 이 死生을 바라보고 있다. 이 만물 제동의 원리에서 化生化死 내지 方生方死가 투영되기 때문이다. 이에 장자는 제물론 편에서 말한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다.」 이는 是非․成敗가 궁극적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는 만물 제동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死生이 궁극적으로 미분의 경지에서 조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를 만끽하는 자는 바로 聖人이나 眞人의 경지가 될 것이다.
3. 死生命也
주지하듯이 죽음과 삶이 命이라는 입장은 동양인의 사생 달관적 경향을 대변해 왔다. 특히 장자는 이러한 死生之命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오고 가는 死生이 우리 생명체의 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임을 그는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삶은 운명이다. 저 밤과 아침의 일정한 과정이 있음은 자연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바가 생사 순응이요 만물에의 달관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김없이 오고 마는 죽음의 현실은 막을 수가 없다. 이를 막으려 한다면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요, 슬픈 일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목숨이 찾아오는 것을 물리칠 수가 없고 또 목숨이 가버리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슬픈 일이구나. 세상 사람은 몸만 보양하면 그것으로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장자에 있어 아무리 몸을 보양해도 결국 목숨을 보존할 수가 없음을 알고, 죽음에 대해 운명적으로 달관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처럼 장자가 사생은 命이라는 견해를 갖게 된 것은 道, 즉 자연이 우리에게 모습을 부여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자연이 부여한 생명체, 자연의 변화에 의해 사라져 가는 모습들이 道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그는 이에 말한다. 「자연(大塊)은 우리에게 모습을 주었다. 또 우리에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우리에게 늙음을 주어 편하게 하며, 우리에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이러한 자연의 작용으로 변화가 생겨 생과 사가 운명처럼 연속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장자는 死生이 命임을 인지하고, 생과 사에 대해 好惡의 감정을 절제하도록 하였다. 어차피 받게 되는 운명인데 이에 인간의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부여한다면 부질없는 행위가 되고 만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살아 있음을 기뻐하지 않고 죽는 것을 역겨워하지도 않는다. 처음과 끝이 되풀이되어 (어디에) 집착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장자는 사생을 命으로 알고 好惡의 희노 감정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장자의 사생관과 유사하게 漢代의 회남자도 사생을 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곧 억지로 삶을 구하거나 억지로 죽음을 막지 말고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면서 회남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가 태어났다고 해서 만물의 수가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해서 흙이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죽음과 삶, (어느 것이) 기쁘거나 싫다든가, 이롭거나 해로운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精神訓). 이처럼 도가류와 같은 흐름에서 회남자는 자신의 好惡 감정을 극복, 장자의 ‘死生은 命’이라는 입장처럼 생과 사를 달관하고자 하였다.
언급한 바대로 장자와 회남자는 운명론적 입장에서 사생에 대해 초연한 입장을 견지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삶에서 죽음으로 바뀌는 것을 자연의 변화인 命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인간은 삶을 좋아하지도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게 된다면서 장자는 죽음이 자연스럽게 인간을 모든 질곡에서 해방시킨다고 본다.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는 자유,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해방감이 도가의 장자에 의해 만끽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결국 장자는 ‘조물자’를 등장시켜 우리가 죽음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조물자의 권능을 인간의 능력으로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언적으로 자래를 등장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물자가 내 죽음을 바라는데 내가 듣지 않으면 나는 곧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니) 그 조물자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자연은 내게 형체를 주었다.」 이와 같이 조물자가 死生을 주재하니, 이 조물자는 사생에 있어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命임을 우리에게 강조하는 상징적 주재자로 등장한다.
4. 氣之聚散
도가에 있어 氣의 聚散은 우리 모든 생명체의 생과 사를 가름한다. 장자는 이러한 氣의 취산 작용을 강조하여 生死에 어떠한 괴로움도 갖지 말라고 한다. 특히 죽음이란 氣가 흩어지는 자연 현상이니 괴로움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곧 그는 말한다. 「사람이 사는 것은 氣가 모이기 때문이며,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 이처럼 죽음과 삶은 뒤쫓는 것이니 내가 또 어찌 괴로워하겠는가.」 이에 氣散의 죽음으로부터 다가오는 괴로움을 극복하려는 장자의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같이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이유는 氣의 聚散 작용이 장자에 있어서 자연의 존재 질서라는 사실에 있다. 인위적 사고가 아니라 자연의 변화 현상에 대한 생명체의 순응이 이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존재 질서는 인간의 생명에도 그대로 적용되면서 인간의 생명은 기운이 모이면 삶이 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 존재의 질서에 있어 이러한 氣의 聚散 작용을 벗어나는 생명 개체는 거의 없다. 특히 생명체의 생존 법칙이 氣 취산 작용의 지배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에 있어 氣의 聚散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주 대자연이요, 天地이다. 따라서 천지는 氣로 충만되어 있다. 장자는 곧 말한다. 「천지란 만물의 어버이이다. 천지의 두 氣가 합쳐지면 사물의 형체가 이루어지고 두 氣가 흩어지면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천지에서 두 氣가 妙合하여 사물의 형체가 이루어진다. 또 그 수명이 다하면 형체는 다시 본래의 無로 돌아간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위의 두 가지 氣는 聚散 요소의 핵심 즉 陰陽이다. 음과 양이 묘합하여 생명체가 탄생한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陰과 陽의 작용이 서로 비추고 서로 해치며 서로 다스리고 사시가 서로 교대되며 서로 생기고 죽이며 … 장수와 요절이 서로 겨루고 삶과 죽음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氣란 음과 양으로 나뉜다. 따라서 고요할 때는 陰氣에 그 덕을 맞추고 움직일 때는 陽氣에 그 동작을 맞춘다. 陽變陰合의 현상처럼 두 氣의 특성이 동정이라는 속성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陰陽의 작용은 본체의 측면에서 보면 道에 귀속되며, 현상의 측면에서 보면 有形이 나타난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죽음이란 … 형체를 떠나 육체가 산산히 흩어지고 정신이 이 형체를 떠나려 할 때 몸도 함께 따라 無로 돌아가는 것이며 道로의 위대한 복귀이다.」 그리고 無形에서 유형이 생기고 有形에서 무형으로 돌아가는 원리가 밝혀진다. 이처럼 죽음과 삶은 氣의 散과 聚 즉 무형과 유형으로 이해되며, 궁극적으로 道(無)로 귀속됨을 알게 된다.
生死가 氣의 聚散 작용임을 인지한 장자는 그의 아내가 죽자, 육신의 정기가 흩어진 것을 알고 슬픈 감정을 개입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죽자 혜자가 문상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는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장자는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소’라며 답한다. 「본래 형체가 없었을 뿐이 아니라 본시 氣도 없었소.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氣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 형체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된 거요. 이제 다시 변해서 죽는 거요.」 이처럼 氣의 聚散 작용을 인지한 그는 아내의 喪禮에서 이를 달관, 순응하고 있다.
아무튼 장자는 그의 아내가 죽자 태연하였으니, 氣의 聚散으로 인해 일어난 생사 감정을 달관적 지혜로 초탈한다. 氣가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형체가 변화하는 것을 알면 질곡에서 해방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聚散 작용, 즉 자연의 변화 속에서 모든 사물은 轉生을 통하여 순환하는데, 老莊에 있어 이 轉生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 轉生論에서 보면 장자가 생과 사를 氣의 聚散으로 간주, 聚散 순환적 사생관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법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