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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장

[스크랩] 아비달마 불교 (1) / 권오민

작성자일 행|작성시간11.12.14|조회수586 목록 댓글 0

1장 아비달마란 무엇인가

 

 

1. 아비달마의 본질
2. 아비달마 논서의 성립

 

 

 

(1) 발전의 세 단계
(2) 남방 상좌부의 논서
(3) 설일체유부의 논서
(4) 그 밖의 부파의 논서

 

 

3. ≪아비달마 구사론≫

 

2장 존재의 분석

 

 

1. 법이란 무엇인가?
2. 온蘊·처處·계界의 분별
3. 5위位 75법法의 분별

 

 

 

1) 색법色法 - 물질적 존재

 

 

 

 

(1) 5근根
(2) 5경境
(3) 무표색

 

 

 

2) 심心·심소법心所法 - 마음과 마음의 작용

 

 

 

 

(1) 마음
(2) 마음의 작용

 

 

 

3) 불상응행법 -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

 

 

 

 

(1) 득得과 비득非得
(2) 동분同分
(3) 무상과無想果와 무성 멸진정滅盡定
(4) 명근命根
(5) 유위 4상相
(6) 명名·구句·문文의 3신身

 

 

 

4) 무위법無爲法

 

 

4. 제법의 성호포섭 관계
5. 제법의 삼세三世 실유實有
6. 제법의 인과관계

 

 

 

1) 6인因과 4과果
2) 4연緣
3) 유위 4과와 이계과離繫果

 

3장 미혹한 세계

 

 

1. 세간과 유정

 

 

 

1) 3계界 5취趣
2) 불교의 우주관

 

 

2. 업

 

 

 

1) 업의 종류와 본질
2) 율의律儀·불율의와 선악의 기준

 

 

 

 

(1) 율의와 불율의
(2) 선악의 기준

 

 

 

3) 10업도業道와 그 과보
4) 과보를 낳는 시기

 

 

3. 윤회와 12연기

 

 

 

1) 유전의 네 단계
2) 무아론과 윤회상속
3) 12연기의 유전

 

 

 

 

(1) 생리적 과정으로서의 유전
(2) 12연기의 유전
(3) 삼세 양중兩重의 인과설
(4) 12연기와 유자성有自性

 

 

4. 번뇌, 즉 수면隨眠

 

 

 

1) 근본번뇌
2) 98수면으로의 전개
3) 지말번뇌로서의 수번뇌隨煩惱
4) 번뇌의 또 다른 분류
5) 번뇌의 단멸斷滅

 

4장 깨달음의 세계

 

 

1. 4제諦에 대한 통찰
2. 견도見道의 준비단계

 

 

 

1) 예비적 단계
2) 3현위顯位

 

 

 

 

(1) 5정심관停心觀
(2) 4념주念住

 

 

 

3) 4선근善根

 

 

 

 

(1) 따뜻해지는 단계(煖位)
(2) 꼭대기의 단계(頂位)
(3) 인가의 단계(忍位)
(4) 세간에서 가장 뛰어난 단계(世第一法)

 

 

3. 무루성도聖道와 성자의 단계

 

 

 

1) 견도見道
2) 수도修道

 

 

 

 

(1) 유루의 세간도

 

 

 

3) 성자의 단계

 

 

 

 

(1) 예류향과 예류과
(2) 일래향과 일래과
(3) 불환향과 불환과
(4) 아라한향과 아라한과 - 무학도無學道
(5) 초월증超越證의 성자

 

 

4. 그 밖의 실천도(37보리분법)
5. 지혜와 선정

 

 

 

1) 10가지 지혜(智)
2) 지혜의 공덕

 

 

 

 

(1) 불타만의 공덕 - 18불공법
(2) 성자와도 공통되는 공덕
(3) 범부와도 공통되는 공덕 - 6통通

 

 

 

3) 선정禪定

 

 

 

 

(1) 4정려靜慮
(2) 4무색정無色定
(3) 경설經說상의 삼마지

 

 

 

4) 선정의 공덕

 

 

6. 불타

 

 

 

1) 성문과 독각
2) 보살의 길
3) 불타

1. 아비달마의 본질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숲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말씀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 이제 남겨진 성문聲問의 제자들로서는 스승이 남기신 교법을 결집하고, 그 속에 담기 의미를 해석하여, 스승이 지나가셨던 발자취를 따르는 일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필연적이고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들 성문제자들의 관심은 오로지 '불타의 교법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에 있었으며, 그 결과 생겨난 성전이 이른바 아비달마 논장論藏(abhidharmapitaka)이다.
불타 교법에 대한 정리 해석은 이미 여러 경전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지만(이를 論母, 혹은 本母 matrka라고 한다), 부파분열이 이후 그것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 마침내 경전 속에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 그것으로부터 독립하여 '아비달마 논장'이라고 하는 불교성전의 새로운 장르가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러 부파의 경장經臧은 어쨌든 불타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논장의 경우 그 내용을 완전히 달리하며, 이로 인해 이 시기의 불교를 바로 아비달마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불타는 성도한 후 자신이 깨달은 법을 설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간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너무나 심오하여 무지와 탐욕으로 덮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말고 표현할 수 없는, 사유와 언어 문자를 떠난 것이기에 세간의 지혜로써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아관념이 바탕이 된 세간의 지혜는 항상 번뇌를 수반하고 있기 대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범천梵天의 간곡한 권유로 마침내 이타利他의 문을 열어 법을 설하게 된다. '감로(不死)의 문을 열렸도다. 귀 있는 자 와서 들어라'.
세간을 지배하는 것은 사유와 언어이다. 우리는 사유와 언어로써 신기루의 세계를 창조하여 그것의 실재성을 신앙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망하고도 괴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침묵의 성자께서는 이를 일깨우기 위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의 말씀이 바로 깨달음(勝義正法이라고 한다)은 아니거니와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깨달음의 대상으로서 남겨져 있어야 하고, 깨달음에 이르면 자명해지는 것이다. 요컨대 불타의 말씀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이를 世俗正法이라고 한다)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이 깨달음이 피안이라면, 그의 말씀은 그곳으로 나아가는 뗏목에 불과하다. 그의 깨달음이 달이라면, 그의 말씀은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불교일반에 있어 말이란 각기 저마다의 개별적인 약속에 따라 화자話者의 의도와 관계하여 그것만을 나타내는 것일 뿐, 그것에 의해 의미되는 외적 대상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말이란 드러나야 할 대상에 대해 그것과는 별도의 판단을 낳게 하는 화자의 관념체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며,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일시적인 것(prajnapti, 假設)이며, 한정적인 것(samvrti, 世俗)이다.
따라서 불타의 말씀 역시 궁극적으로 진리와 직접 관계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불타의 의도와 관계하고, 그것만을 지시한다. 즉 불타의 말씀은 진리를 암시하고 시사하여 그것에 이르게 하는 가교 내지 방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당연한 일로서 그러한 방편은, 마치 모든 환자에게 일률적으로 약을 투여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르게 투여하듯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이른바 9분교分敎 혹은 12분교라고 하는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설해지고 있는데, 그렇게 시설된 일체의 말씀을 법문法問, 즉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문은 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타 법문의 근거였던 그의 의도 즉 그의 깨달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불타의 이해력과 동일한 이해력을 획득하지 못한 범부로서는 마땅히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방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불타 입멸 후 더욱더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요청에 따라 일찍이 불타법문에 입각하여 '골똘히 사유(專精思惟)' 함으로써 불타와 같은 참다운 이해를 획득하였던 위대한 성문제자들이 불타가 전하고자 하였던 바를 정리 해석하여 편찬 결집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아비달마이다.

생사대해를 떠돌게 하는 온갖 번뇌를 끊을 만한 것으로서 세계존재(法)에 대한이해 간택簡擇보다 더 뛰어난 방편은 없다. 그래서 불타께서는 세간으로 하여금 존재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게 하고자 아비달마를 설하였던 것이다. 즉 아비달마를 설하지 않았다면 그 어떤 제자도 온갖 존재의 이치에 대해 참답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으로, 이렇게 곳곳에서 설해진 아비달마를 대덕大德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를 비롯한 여러 위대한 성문들이 결집하여 편찬하였던 것이다.

아비달마는 궁극적으로 불타의 참된 예지(眞智)에 대해 이해(簡擇)력인 무루無漏 의 지혜를 본질로 한다. 무루의 지혜는 더 이상 번뇌(漏의 지혜를 본질로 한다. 무루의 지혜는 더 이상 번뇌(漏)를 수반하지 않으며, 세간의 온갖 더러움을 떠난 것이기에 청정한 지혜이다. 아비달마는 궁극적으로 이 같은 무루의 지혜를 본질로 한다. 세계존재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올바른 관찰과 이해는 오로지 이 같은 지혜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그렇게될 때 관찰자는 더 이상 생사 미망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무루의 지혜는 사실상 불타 깨달음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생異生의 범부로서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세간의 지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세간의 지혜로서는 스승이나 친구의 말을 듣고서 획득하는 지혜(이를 聞所成慧라고 한다), 그것을 주체적으로 사유함으로써 획득하는 지혜(이를 思所成慧fkrh 한다), 다시 선정을 통해 반복적으로 익힘으로써 체득하는 지혜(이를 修所成慧라고 한다)가 있으며, 이러한 세 가지 지혜를 낳을 수 있게 하는 타고난 지혜(이를 生得慧라고 한다) 등이 있지만, 이것은 모두 선천적 혹은 후천적 실천에 의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그 근거가 되는 또 다른 방편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세속世俗의 아비달마'로 일컬어지는 협의의 아비달마,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아비달마 논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간의 네 가지 지혜나 그 근가가 되는 아비달마의 여러 논서는 궁극적으로 무루의 지혜를 낳게 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이 역시 아비달마의 본질이라 말할 수 있다고 비바사사毘婆沙師(Vaibhasika, 설일체유부의 논사를 말함)는 생각하였다. 즉 아비달마의 여러 논서에서 설해진 것을 들을 때 타고난 지혜가 작용하고, 그것에 의해 청문聽聞 등에 의한 후천적 지혜가 성취되며, 마침내 무루의 청정한 지혜가 획득되기 때문에 전자는 후자의 점진적 근거가 된다.
말하자면 무루의 청정한 지혜를 본질로 하는 아비달마는 불타의 참된 예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승의勝義의 아비달마(paramarthikabhidharma)라고 한다면, 세간의 네 가지 지혜와 아비달마의 여러 논서는 그것으로 나아가지 위한 방편 즉 세속의 아비달마(sampetikdbhidharma)이다.
나아가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계승한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에서는 '자비의 방편도 역시 자리라고 할 수 있듯이 승의의 방편인 세속 또한 아비달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음식이나 의복 자체는 즐거움이 아니지만(진정한 즐거움은 즐거운 느낌 자체인 樂受임) 즐거움의 조건을 갖춘 것이기에 즐거운 것이라 할 수 있듯이, 아비달마의 조건(불타의 예지를 이해 판단하게 하는 힘)을 갖춘 것이기 때문에 세속의 제론諸論을 아비달마라고 하며, 그것은 바로 불설佛說'임을 천명한다.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불타에 의해 발성된 모든 말씀은 설법이 아닐뿐더러 설사 그것이 불타의 깨달음과 관계하는 법문이라 할지라도 법문은 듣는 이에 따라 중층적으로 설해졌기 때문에 거기에는 당연히 본질적인 경(즉 了義經)과 그렇지 못한 경이 있다. 그리고 본질적인 경 역시 그 자체가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에 불타의 참된 예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어떤 표준적 근거에 의해 정리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같은 무루의 지혜를 본질로 하는 아비달마나 그 방편이 되는 온갖 논서야말로 그러한 여러 경의 표준적 근거가 되기 때문에 불설佛說이다.
예컨대 경이 아직 정법에 들지 못한 초입자에게 선근을 심고 정법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근기에 따라 설해진 잡설雜設이라면, 아비달마는 이미 정법에 들어 계율을 수지한 자로 하여금 세계 존재의 진실상相을 통달하게 하기 위해 설해졌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세친世親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발지론≫ 등의 근본 아비달마는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등이 지었고, 불타께서 그것을 근거로 삼으라고 설한 적이 없으며, 또한 그것들은 작자나 부파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된 것이어서 각기 그 종의가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땅히 경을 지식은 근거(經量)로 삼아야 할 것으로, 세존 또한 아난다에게 그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아비달마는 그 종의가 다르기 때문에 불설이 아니라고 한다면, 경 역시 그러하다. 즉 제 부파의 여러 경은 표현형식과 내용에 있어 각기 차별이 있기 때문에 종의가 한결 같지 않다. 그러므로 아비달마의 종의가 각기 다르다고 해서 불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도리어 아비달마는 그러한 여러 경의 차별을 결정짓고, 경의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를 판별하는 표준적 근거이자 일체의 성스러운 교법 가운데 오로지 올바른 이치의 말씀만을 포섭하기 때문에 무루의 지혜를 본질로 삼는 요의경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아난다에게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거기에 의지하라'고 함은 바로 이러한 아비달마에 의지하라고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그에 따르는 한, 무루지혜에 의한 세계존재에 대한 이해는 세간의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뛰어난 방편이자 궁극의 목적(즉 불타 예지로서 승의의 아비달마)이지만, 그것은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 불타는 세간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관찰 수습하게 하기 위해 아비달마를 설한 것이고, 그것에 의해 세계존재의 실상을 참답게 이해한 사리자舍利子 등의 위대한 성문들이 그것을 다시 결집 편찬한 것이다. 즉 자신의 ≪순정리론≫을 비롯한 후세 모든 아비달마의 근거가 되는 근본根本 아비달마는 궁극적으로 불타가 설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불타 깨달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아비달마라고 하는 말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즉 남방 상좌부에서는 '뛰어난 승의의 법' 즉 승법勝法의 뜻으로, 유부에서는 '교법에 대향하는' 즉 대법對法의 뜻으로 이해하였는데, 양자는 결국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타가 설한 교법에 대한 논의는 결국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뛰어난 이해 판단력인 무루지혜에 근거해야 하며, 이는 바로 불타 교법에 상위하는 뛰어난 법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분별되어 질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을 지닌 존재를 '법'이라고 하는데, 승의勝義의 법은 오로지 열반을 말하지만, 세계존재의 실상으로서의 법은 4성제를 말한다. 곧 이러한 무루의 지혜는 (승의의 법인 열반을)지향하고, (세계존재의 실상으로서의 법인 4성제에 대해)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고 일컬은 것이다.

아무튼 남북 양적이 전하는 아비달마란 불타 교법에 대한 해석체계로, 중현의 말을 빌릴 것 같으면 해석되어 그 의미를 드러내지 않은 교법은 진정한 불설이 아니다. 항상 새롭게 해석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지 않는 한, 그것은 다만 지나간 옛 사람의 말의 찌꺼기일 뿐인 것이다.

(1) 발전의 세 단계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앞에서 아비달마의 의미가 일차적으로 '불타 교법에 관한 연구'라고 하였지만 이 같은 이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변화하여 각 부파가 추구하였던 '세계존재(法)에 관한 연구'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같은 변화는, 불타 교법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한 각 부파의 논의가 점차 하나의 완성된 사상체계로 발전한데 따른 필연적인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아비달마 논서는 세 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친다. 단계의 첫 번째는 어쨌든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는 경장經藏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경전의 형식과 내용에 따른 분류법인 12분교 중의 논의論議 즉 우파데사(upadesa)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간략한 경문에 대해 널리 해설한 주석적인 법문을 말한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이를 마트리카(matrka) 혹은 아비달마라고 하여, 경전에 설해지고 있은 세계존재의 본질과 작용은 이러한 논의에 근거해야 비로소 그 뜻이 명료해지기 때문에 요의경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증일아함경≫이나 ≪증지부경전≫, ≪중집경衆集經≫이나 ≪십상경十上經≫과 같은 단경單經에서는 불타 교법을 법수에 따라 1법에서 10법 혹은 11법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잡아함경≫이나 ≪상응부경전≫은 주제나 내용의 유형에 따라 정리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일종의 아비달마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 같은 경전들은 오로지 출가자를 위한 법문의 집성으로, 아함경전 자체가 출가승단의 교과서로서 편찬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장이 다음 단계에 이르게 되면 마침내 독립된 논서로 형성되는데, 이 때 논서는 아비달마적 성향을 강하게 띠는 경장과 질적인 면에서 그렇게나 큰 차이가 없다. 이를테면 유부의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이나 ≪법온족론法蘊足論≫의 경우, 전자는 앞의 ≪중집경≫의 내용을 부연 해석한 것이며, 후자는 아함경전 중에서 21가지 중요한 교설을 선정하여 각각의 장에서 그 교설을 담은 경문을 먼저 제시한 다음 이에 대해 상세히 해석하는 형태의 논서이다.
따라서 이 단계의 논서는 아직 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이 아니며, 말 그대로 단지 불타 교법에 대한 정리 해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부파와 공통된 요소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팔리 상좌부의 ≪법집론法集論(Dhammasangani)≫과 ≪분별론分別論(Vibhanga)≫은 앞의 두 논서와 유사한 성격의 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종합 해설된 교설들은 점차 각 부파에 따라 매우 복잡한 체계로 조직되고, 술어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극단적일 정도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예컨대 ≪발지론發智論≫에서는 유부학설 전반을 이전의 개별적인 논의에 근거하여 8장의 조직으로 논설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해설서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과 같은 방대한 불량의 백과사전 식의 논서가 작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이제 아비달마는 더 이상 불타 교법의 해석이나 조직에 머물지 않고 이전 시대의 여러 아비달마를 기초로 하여 웅장한 구성을 지닌 독자적인 교의체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이 것이 ≪구사론俱舍論≫과 ≪청정도론淸淨道論(Visuddhimagga)≫이다. 전자는 북전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논사 중의 한 사람인 설일체유부 계통의 세친世親(Vasubandhu)이 지은 것이며, 후자는 남방 상좌부의 대주석가 붓다고샤(Buddhagosha)의 저술이다. 이 두 가지 논서가 세상에 출현한 것은 5세기 굽타왕조 중엽 무렵으로, 이 시기에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아비달마 논서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현존하는 아비달마 논서는 대개 상좌부와 설일체유부 두 부파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 밖의 논서는 사실상 얼마 되지 않는다.
 

(2) 남방 상좌부의 논서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상좌부에서 성전(pali)으로 꼽는 논장은 기원전 250년 무렵부터 50년 사이에 걸쳐 성립한 ≪법집론法集論(Dhammasangani)≫ ≪분별론分別論(Vibhanga)≫ ≪論事(Kathavatthu≫ ≪인시설론人施設論(Puggalapannatti)≫ ≪계론界論(Dhatukatha)≫ ≪쌍론雙論(Yamaka)≫ ≪발취론發趣論(Patthana)≫ 등의 7론 뿐이다. 그러나 장외藏外로 불리우는 ≪지도론指道論(Nettippakarana)≫ ≪장석론藏釋論(Petakopadesa)≫ ≪밀린다팡하(Milindapanha)≫등 세 가지 논전도 특히 중요시된다.
그리고 7론에 대한 세 가지 주석서를 거쳐 붓다고샤의 ≪청정도론≫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사상체계를 실현하게 된다. 이 이후 나타난 논서는 ≪입아비달마론(Abhidhammavatara)≫처럼 대개 난해하고 복잡한 ≪청정도론≫에 대한 요강서들이다.
≪청정도론≫은 전 2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계戒·정定·혜慧 3학의 순서에 따라 불타 교법을 실천도로써 자세하게 해설하고 있다. 즉 '먼저 스스로 경계하여 출가자로서의 생활을 올바르게 가다듬고(계의 청정), 나아가 마음이 산란되지 않게 고요히 한곳에 집중하는 삼매의 수행을 거듭함(정의 청정)에 따라 깨달음으로 향하는 정정하고 밝은 지혜를 획득하게 된다(혜의 청정)'고하는 실천도가 이 논의 요지이다. 그러면서 존재론이나 심리론 인식론에 관한 여러 이론들을 포함하는 아비달마 특유의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3) 설일체유부의 논서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유부의 논장도 기본적으로 본론本論 즉 근본은 아비달마로 일컬어지는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법온족론法蘊足論≫ ≪시설족론施設足論≫ ≪식신족론識身足論≫ ≪계신족론界身足論≫ ≪품유족론品類足論≫과 ≪발지론發智論≫ 등 7론으로 이루어져 있다(이상 '아비달마'라는 말을 생략하였음).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립된 논서라기보다는 아함경설에 대한 해설서로서, 그 저자도 사리자舍利子와 목건련目 連으로 알려지는 등 유부의 최 초기 논서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지는 ≪시설족론≫ 내지 ≪품류족론≫에서는, 아함경전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각 개념들의 정의나 상호관계에 대해 극단적일 정도로 분석하고 있는데. 특히 세우世友(Vasumitra)의 저술로 알려지는 ≪계신족론≫과 ≪품류족론≫에서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5위位 내지 98수면설隨眠設 등 유부교학의 기초가 확실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Katyayaniputra)가 지은 ≪발지론≫은 ≪시설족론≫ 등과 함께 유부의 중기 논서이면서 유부 아비달마의 획기적인 분기점이라고 할만한 논서이다. 가다연니자는 대략 기원전 150 ~ 50년 무렵의 인물로, 상좌부에서 설일체유부를 분파시켰다고 전한다. 원래 상좌부는 경장을 절대 무오류로 간주하고, 율장과 논 장을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한데 반해, 그는 논장 즉 아비달마를 위주로 하여 제법유론諸法有論을 주장함으로써 상좌부내의 지말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불타 깨달음의 표준적 근거가 경인가, 논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지경자持經者와 지론자持論者라고 하는 형태로 원시불교시대부터 제기되어 왔으며, 훗날 유부 내부에서 카슈미를 계와 간다라 계의 논쟁, 이를테면 세친과 신 유부의 중현 간의 논쟁도 바로 이에 대한 것이었다. 즉 가다연니자로부터 확립된 유부의 전통은 경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에 직면하게 된 온갖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사색하고 탐구하려는 데 있었다.
아무튼 앞의 6론이 각기 근본적인 특정의 개별문제를 논의하여 유부교학상에서 발(足)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발지론≫은 유부교학을 전체적으로 조직하고 있기 때문에 몸(身)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발지신론≫이라 일컬어져 왔다.
이후 유부의 교학은 ≪발지론≫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현장의 한역으로 200권)에서 집대성된다. 전설에 따르면,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 치하에 파르스바(Parsva, 協尊者로 한역됨)을 비롯한 50명의 아라한이 카슈미르에 모여 전후 20년에 걸쳐 이 논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이논은 '비바사(Vibhasa, 廣解)'라는 제목이 걸맞게, 원칙적으로 ≪발지론≫의 문고 하나하나에 대해 해서하면서도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는 문구에 이르러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거기서 논의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들까지 논의하면서, 다른 학파의 학설뿐만 아니라 자파自派 내부의 이설異說들까지 포함하고 있어 가히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언급한 대로 너무나 방대하였기 때문에 이후 혹은 입문서라고 할만한 ≪비바사론 婆沙論≫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등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은 먼저 게송(운문)으로 학설의 요점을 간결히 설한 다음, 산문으로 그것을 해석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모두 10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 <계품界品>과 제2 <행품行品>에서는 유부교의의 핵심인 법의 이론을 설하고, 제3 <업품業品>과 제4 <사품使品>에서는 미혹한 세계의 원인인 업과 번뇌를 밝혔으며, 제5 <현성품賢聖品>과 제6 <지품智品>, 그리고 제7 <정품定品>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와 그에 이르는 방편(지혜와 선정)에 대해 논설하고 있어(뒤의 3품은 補遺와 부록이다) 체계나 형식에 있어 이후 유부논서의 정형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논서는 유부의 후기 논서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으로 ≪아비담심론경≫ ≪잡아비담심론≫ 등이 찬술되었고, 마침내 이 같은 체계에 기초하여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최고 종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구사론≫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구사론≫은 경량부經量部의 입장에서 유부를 비판한 부분도 없지 않아 카슈미르 계의 정통 유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중현은 ≪순정리론順政理論≫과 ≪현종론顯宗論≫을 다시 지어 이를 비판하고 정통 유부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현도 ≪구사론≫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유부학설과 달랐기에 후대로부터 신新 유부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순정리론≫과 마찬가지로 ≪구사론≫을 비판하면서 카슈미르 유부의 입장을 천명하는 논서로≪아비달마디파(Abhidharmadipa, 아비달마의 등불)≫가 근래 발견되어 교정 출판되기도 하였다.

(4) 그 밖의 부파의 논서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그 밖의 부파의 논서로서는 기원전 2세기 혹은 1세기 무렵 성립한 것으로 법장부法藏部 계통으로 알려지는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 독자부犢子部를 계승한 정량부 논서로 알려지는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 소속 불명의 ≪사제론四諸論≫, 그리고 경량부經量部 계통의 논서로 추정되는 하리발마(Harivarman, 250 ~ 350C)의 ≪성실론成實論≫ 등이 있다.
그러나 현장玄 의 ≪대당서역기≫에서는 그가 인도에서 유부의 삼장 67부, 상좌부의 삼장 14부, 대중부의 삼장 15부, 정량부의 삼장 15부, 화지부의 삼장 22부, 음광부의 삼장 17부, 법장부의 삼장 42부를 가져왔다고 전하고 있다(이 중 번역된 것을 설일체유부의 논서 십 수 부에 불과하다). 또한 義淨의 ≪南海寄歸內法傳≫에서도 대중부는 30만 송의 삼장을 소지하고 있으며, 정량부는 20만 송, 상좌부와 근본 설일체유부도 각각 30만 송의 삼장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로 볼 때 그 당시 인도에는 부파불교가 대단히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아비달마 구사론≫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아비달마 구사론(Abhidharmakosa-sastra)≫(줄여서 ≪구사론≫)의 작자는 서력기원 후 400 ~ 480년(혹은 320 ~ 400년) 무렵에 출세한 세친(Vasubandhu)이다. 이 논의 구역舊譯인 ≪구사석론俱舍釋論≫을 번역한 진제眞諦의 ≪바수반두법사전≫에 따르면, 그는 불멸佛滅 900년 무렵 간다라의 푸루샤푸르(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 카우시카라는 성을 가진 바라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유부에 출가하였다가 대승으로 전향하여 유가행파를 개창한 아상가(無着)였으며, 동생은 역시 유부에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비린치밧차였다.
그는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여 당시 굽타왕조의 수도였던 아요디야에 머무르며 수론數論을 논파하기 위해 ≪칠십진실론七十眞實論≫을 저술하였다. 또한 ≪대비바사론≫에 깊이 통달하여 대중들에게 강의하면서 하루 1게偈씩 모두 600여 수의 게송으로 그것을 정리하여 유부의 본고장인 카슈미르의 비바사사毘婆沙師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워 산문의 해석을 청하였고, 이에 따라 저술된 것이 바로 ≪구사론≫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유부의 교의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그 뜻이 치우침이 있는 곳은 경량부의 교의로써 논파하고 있어 카슈미르의 비바사사들은 그들의 종의가 파괴된 것에 우려하였다.
그러던 차에 브야카라나(Vyakarana) 측 문법학의 교의로써 ≪구사론≫을 비판하다 도리어 논파당한 태자의 매부 바수라타의 청에 따라 중현은 ≪광삼마야론光三摩耶論≫을 지어 ≪대비바사론≫의 교의를 서술하였고, ≪수실론隨實論≫을 지어 ≪구사론≫을 논파하였다. 그리고 세친과 직접 대론하고자 하였으나 세친은 늙음을 탓하여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장의 뛰어난 제자 보광普光은 그의 ≪구사론기俱舍論記≫에서 다음과 같은 보다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세친은 원래 간다라 사람으로, 일찍이 유부에 출가하여 그 삼장三藏을 수지 하였으나 뒷날 경부經部를 배우 이것이 진실됨을 알고 앞서 배웠던 유부학설 중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유부학설을 보다 깊이 연구하여 옳고 그릇됨을 궁구하고자 다시 그 본고장인 카수미르에 익명으로 잠입하여 4년간 수학하였는데, 매번 경부의 이론으로써 유부를 비판하였다. 그 때 중현의 스승인 스칸디라(悟入, Skandhira)라고 하는 아라한이 그의 신이함을 괴이하게 여기고, 선정에 들어 그가 간다라에서 온 세친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세친을 불러 은밀히 고하기를, "급히 본국으로 돌아가라. 장노가 이곳에 와서부터 계속 자신의 뜻으로 유부를 논란 비판하니, 대중 가운데 아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가 그대의 신분을 알아차려 해코지할까 두렵다."고 하였다.
이에 본국으로 돌아온 세친은 바로 ≪구사론≫ 600송을 지어 카슈미르에 보내자, 국왕과 모든 대중들이 유부의 종의를 널리 편 것이라 하여 기뻐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스칸다라가 대중들에게 고하기를, "이는 유부종의를 편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기뻐해 하는가 ? 본송에 전설傳說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유부종의와 서로 유사할 뿐이다. 만약 이를 믿지 않는다면, 그 주석을 청해 보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국왕과 대중들이 사신을 보내어 석론釋論을 청하니, 논주 세친은 본송을 해석하여 8천송의 글을 지어 보냈는데, 과연 스칸디라가 말한 바와 같았다. 논주의 뜻은 경부와 가까웠고, 유부의 학설에 의혹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 세친은 ≪구사론≫에서 왕왕 '전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직접 지 않은 것'임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여기서 '전설(kila)'이라 함은 카슈미르 유부학설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구사론≫은 번쇄 잡다한 유부교학의 대표적인 요강서이기는 하지만, 경량부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저술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장위종理長爲宗, 즉 '이치에 부합하는 좋은 이론이면 유부의 학설이든 어느 누구의 교설이든 종의로 삼는다'는 작자의 개방적이고도 비평적인 정신이 논 전체에 담겨 있다고 알 수 있다. 즉 세친은 어떠한 부파의 견해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비판적 입장에서 ≪구사론≫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을 지배한 정신이 바로 경량부적 사유였던 것이다.
앞서 유부에서는 아비달마야말로 진정한 불설佛說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하였지만. 세친은 그 같은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이 논의 명칭을 다만≪아비달마 구사론(Abhidharmakosa-sastra)≫이라 하게 되었다. 여기서 '구사'란 창고 곳간의 뜻으로, 이는 아비달마의 정요를 간추린 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친은 이 논을 유부에서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아비달마라기보다는 단지 그것의 요지를 간추린 텍스트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친은 여기서 유부의 종의와 함께 다른 수많은 부파와 인물들의 교의를 논설하면서 서로의 난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사론≫은 기본적으로 아비달마 7론이나 ≪대비바사론≫을 근거로 하면서도, 이전의 논서와는 그 체계를 달리하는 ≪아비담심론≫과 이를 개량 증보한 ≪아비담심론경≫ ≪잡아비담심론≫의 조직과 내용을 토대로 하여 작성된 논서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아비담심론≫은 전 20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구사론≫에서는 보유 부록인 뒤의 3품을 정리하여 앞의 7품 중에 포함시키고, 여기에 미혹한 현실세계의 실상을 밝힌 <세간품世間品>을 더한 전 8품으로 본론을 삼았으며, 마지막에 유아론有我論을 비판한 <파집아품破執我品>을 부록으로 논설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논의 조직은 ≪아비담심론≫에 따라 철저하게 4성제를 기초로 한 것으로, 제 제1 <계품界品>과 제2 <행품行品>에서 온갖 존재(諸法)의 본질과 작용을 밝힌다음, 제3 <세간품>과 제4 <업품>·제5 <수면품隨眠品>에서 고苦의 실상과 그 원인과 조건이 되는 업과 번뇌를 밝히고, 다시 제6 <현성품賢聖品>과 제7 <지품智品>·제8 <정품定品>에서 고멸苦滅의 열반과, 그 원인과 조건이 되는 지혜와 선정에 대해 논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유부의 교학은 ≪집이문족론≫과 ≪법온족론≫ 등의 6족론에서 시작하여, ≪발지론≫에서 학설의 큰 줄기를 드러내어 ≪대비바사론≫에서 깊이 심화되었고, ≪아비담심론≫에서 조직적인 논술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마침내 ≪구사론≫에 이르러 종합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보광은 이 논을 평가하여 "6족足의 요지를 빠짐없이 다 갖추고 8온蘊의 묘문妙門(죽 ≪발지론≫)을 드러내어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 - 이 논이 탁월하고 뛰어남은 마치 묘고산(수미산)이 광대한 바다에 우뚝한 것과 같고, 불타오르는 태양이 뭇 별들을 가리는 것과 같으니, 그래서 인도의 학도들은 이를 일컬어 ≪총명론聰明論≫이라 하였다."고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구사론≫의 조직과 내용을 전체적으로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법이란 무엇인가?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아름다운 숲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숲으로 소풍을 나가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길을 잃고 헤매일 수도 있다. 숲이란 무엇인가? 숲은 단일한가? 숲은 무엇으로써 존재하는가? 숲은 온갖 나무들의 집합이다. 숲에서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베어내고 나면 숲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멋진 자동차가 한 대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자동차로 인해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지만, 고통을 겪기도 한다. 자동차란 무엇인가? 그 때 우리의 즐거움과 고통은 영원하다고 단일한 자동차를 대상으로 한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공장에서 부품이 조립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해체되고 나서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해체되는 순간, 자동차는 사라지고 수많은 부품만이 남을 뿐이다. 결국 자동차는 개별적인 부품의 결합체일 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세계란 무엇인가? 세계는 그 자체로서 단일한가? 세계는 무엇에 의해 존재하며,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우리는 만나 적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 그 어떤 사람으로 인해 고통받거나 기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기뻐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아비달마불교에 있어 세계란 경험된 세계이다. 여기서 '경험'이라 함은 다만 지식의 근거라거나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지식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능동적이고도 주체적인 의식적 언어적 신체적 행위(業)라고 하는 생명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나 경험 혹은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는, 숲이나 자동차처럼 현실적으로는 단일하고 항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조건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조건이 결여될 때 바로 소멸한다.
예컨대 지금 나에게 분노가 일어났다고 하자. 그것은 바로 분노의 세계이며, 나 자신은 그러한 분노를 통해 '분노하는 나'로서 밖에 드러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같은 분노가 언어적 신체적 행위로 드러나 욕설을 하거나 살인을 하게 될 경우, '욕쟁이'나 '살인자'와 같은 또 다른 존재위상을 획득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행위는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잠재하면서 행위 할 때의 마음과는 다른 상태에 있거나 다르지 않는 상태에 있거나 혹은 무심의 상태에 있거나 유심의 상태에 있거나 간에 항상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또 다른 조건이 된다.
그럴 때 우리의 현실존재를 규정하는 분노의 세계는 무엇으로 존재하며,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비달마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그 같은 세계의 조건을 분석 해체함으로써 세계의 속박(예컨대 분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이를 제법분별諸法分別이라고 한다.
원래 법(dharma)이라 '유지하다' '지탱하다'는 의미의 어원 √ dhr에서 파생된 말로서, 일반적으로 세계존재를 유지 지탱하는 질서 규범 법칙 등을 의미하며, 나아가 도덕 정의 진실 습관 성질 등의 뜻을 갖지만,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보통 현상의 경험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의 요소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숲과 자동차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이고도 객관적 실체-수많은 나무와 온갖 부품에 의해 유지되는 주관적 관념에 불과하다.
곧 유부교학에 있어 법이란 그 같은 경험을 구성하는 조건으로서, 개별적이고도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독립된 실체(dravya)이다. 그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과 작용을 지닌 것으로, 그것으로 인해 인식이 가능하며 행위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로 궁극적인 존재(勝義有)이다. 그리고 그러한 온갖 존재가 원인과 조건 (즉 因緣)이 되어 화합함으로써 드러난 현상의 세계는 다만 가설적 개념적 존재(世俗有)일 뿐이다.
아비달마에 있어 이른바 제법諸法으로 일컬어지는 그러한 모든 존재는 대승에서 말하듯이 의식작용에 의해 구축된 사유의 산물이 아니다. 사유가 그 같은 모든 존재에 의해 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무자성無自性의 존재, 허깨비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시계는 영원하지 않으며, 괴로우며, 진실로 '나'혹은 '나의 것'이 아니며, 그 자체 실체성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의 진실된 모습이다. 이렇듯 온갖 존재가 인연화합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시계를 유위有爲라고 하며, 이 띠의 온갖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유위(samskrta)란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조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컨대 두 개의 수소와 한 개의 산소가 동시에 함께 작용함으로써 물로 나타나게 되며, 나타난 물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닌 가변적 존재인 것과 같다.
이와 반대로 조작되어 나타나지 않은 세계, 혹은 생성과 소멸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세계를 無爲라 하고, 그러한 존재를 무위법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연이 결여되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세계도 무위이지만, 세계의 진실된 모습을 참답게 관찰하여 세계생성의 원동력이 되는 무지와 욕망, 그리고 업이 소멸된 세계, 깨달음의 세계가 무위(즉 열반)이다.
한편 무지와 욕망 등의 번뇌가 수반되는 세계를 유루有漏라고 하고, 그것의 조건이 되는 온갖 존재를 유루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유위와 유루는 무엇이 다른가? 깨달음에 이르는 도정(道)은 온갖 존재가 인연화합하여 드러난 현실에서의 경험이기에 유위이지만,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無漏이다. 여기서 '누(asrava)란' 누설의 뜻으로, 여섯 감관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번뇌를 뜻한다.
이처럼 일체의 존재는 유위와 무위로 분류되며, 무위는 무루이지만 유위는 다시 유루와 무루로 분류된다. 이를 불타교법의 기본구도인 4성제聖諦에 대입시켜 보면, 미혹한 현실과 그 원인인 고苦와 집集은 유위이고 유루이며, 깨달음의 이상인 멸滅은 무위이고 무루이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인 도道는 유위이고 무루이다.

2. 온蘊·처處·계界의 분별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그렇다면 제법 즉 일체의 존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근거는 무엇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석되는 것인가? 다시 말해 시계가 인연화합의 소산이라면 그때 인因과 연緣은 무엇인가?

어느 날 생문生聞이라고 하는 바라문이 부처님께 와서 물었다. "무엇을 일체一切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란 12입처入處이니,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 이것이 바로 일체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일체가 아니니, 사문 고타마가 설한 일체를 버리고 또 다른 일체를 설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일 뿐으로서 물어도 알지 못하며 의혹만 증가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앎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체란 주관의 자아와 객관의 세계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생문 바라문은 일상에서 그것의 근거나 본질로 간주되는 이슈바라(Isvara)와 같은 자재신이나 자아(혹은 영혼)와 같은 단일하고도 영속적인 존재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불타는 일체를 다만 인식의 조건이 되는 여섯 가지 감관과 여섯 가지 대상이라는 12가지 범주 즉 12처處로 분류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처(ayatana)'란 바로 인식을 낳게 하는 문門의 뜻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초기불교 이래 불교에 있어 세계란 알려진 세계, 경험된 세계이다. 그럴 때 인식의 조건은 무엇인가? 의식인가? 그러나 불교에 있어 의식이나 의식작용은 그 자체 단독으로는 일어나지 않으며, 반드시 감관과 대상을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
예컨대 시의식은 눈과 그대상인 색을 근거로 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앞의 다섯 가지 범주가 감성적 인식의 조건이라면 마지막 범주는 오성적 인식의 조건이다. 즉 앞의 다섯 가지 감관(5根)은 오로지 그것과 동시에 존재하는 현재의 물질적 대상만을 취하지만, 여섯 번째 감관인 의근意根은 언어적 개념이나 과거 미래의 대상, 그리고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떠난 무위법까지도 취하며, 그래서 일체를 12가지 범주로 분석하였던 것이다.
설일체유부에 의하는 한 어떤 한 사물을 인식의 개별적 대상 내지 개별적 능력으로 볼 수 없다면, 그것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곧 존재(法)란 개별적이고도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독립된 실체로서,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과 작용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자아(혹은 영혼)와 같은 것은 다만 이 같은 개별적 조건들이 관계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과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슈바라와 같은 자재신은 개별적 존재가 아닌 단일하고도 보편적 존재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사유에 의해 규정된 개념적 존재일 뿐이다. 이를테면 '토끼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논의는 의혹만을 이야기 할 뿐, 실제적 이익이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 불타의 생각이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세계의 모든 존재를 안계眼界·색계色界·안식계眼識界·이계耳界·성계聲界·이식계耳識界·비계鼻界·향계香界·비식계鼻識界·설계舌界·미계味界·설식계舌識界·신계身界·촉계觸界·신식계身識界·의계意界·법계法界·의식계意識界의 18계界로 분별하기도 한다. 여기서 '계(gotra)'란 종족 요소 성분 등의 뜻으로, 마치 한 광산에 각기 다른 광물이 존재하듯이 어떤 한 사람의 생의 흐름에도 이러한 18가지 종류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앞의 12입처에 6식을 더한 것으로, 원래 의식은 단일하지만 그것이 나타나게 되는 근거에 따라 안식 등의 여섯 종류로 나누었다.
아울러 의식의 이 같은 다양한 분류는 욕계·색계·무색계라는 불교의 세계관에 따른 필수적인 것이었다. 즉 욕계에서는 이 모두가 존재하지만, 색계에는 분할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인 단식段食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향·미와 비식·설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무색계에서 오로지 제6 의식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차별짓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일체 현상의 모든 존재는 다사 다섯 가지의 그룹(蘊)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두 가지 법이 존재하니, 안眼과 색色 등이 바로 그것이다. - 안과 색을 근거로 하여 안식眼識이 생겨나는데, 세 가지의 화합이 촉觸이다. 촉은 수受·상想·사思를 함께 낳으니, 이 네 가지는 무색의 온이며, 안과 색은 색온이다. 곧 이러한 법들을 일컬어 인간이라 이름할 뿐 자아나 영혼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실체, 이를테면 중생(sattva)·나라(nara)·마누자(manuja)·마나바(manava)·푸루샤(purusa)·푸드가라(pudgala)·잔투(jantu)·지바(jiva)는 존재하지 않는다.

곧 12처와 18계에서 안 등의 근과 색 등의 5경은 색온色蘊으로, 의근과 6식은 식온識 으로, 근·경·식의 화합의 결과로 낳아지는 수·상·사는 가지 수온受蘊과 상온想蘊과 행온行蘊으로 정리된다. 여기서 '온(skandha)'이란 적집 집합의 뜻으로, 극미로 이루어진 물질의 적집이 색온이며, 찰나찰나 유전 상속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거칠고 세밀한 등의 지각·표상·의사 등과 의식의 적집이 수온·상온·행온이고 식온이다.
인간의 일체 경험세계는 5온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며, 자아는 그 같은 경험을 통하여 확인될 뿐이다. 이른바 '5온무아無我'이다. 5온은 바로 불교에 있어 세계존재를 해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유부에 의하면, 이러한 5온이 인연 화합하여 끊임없이 상속 현현함으로써, 다시 말해 그것들이 생성(生) 내지 관계(得)라고 하는 행온에 포섭되는 또 다른 존재(이를 不相應行法이라고 한다)에 의해 우리들 의식의 상속상에 찰나적으로, 그리고 간단없이 동시 현현함으로써 부단히 변화하는 경험세계가 이루어진다. 즉 그 같은 온갖 경험은 '나'라는 관념을 근거로 생성 통합되어 (이를 5取蘊이라고 한다) '나의 세계'로 현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란, 예컨대 불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땔감과 관계하여 탐(작용함)으로써 그 존재성을 드러내듯이, 오로지 외계와 관계하여 인식하고 행위 함으로써 드러나는 가설적인 존재이다. 다시 말해 다만 세간의 언어적 약속에 따라 경험이나 행위 내지 그 인과상속을 향수享受하는 토대로서 일시 설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나는 뚱뚱하다' '나는 꽃을 본다'고 하는 경우에서처럼 술부에 의해 지지되는 문장 주어에 불과하다. 즉 이 때 '나'란 궁극적으로 '뚱뚱하다'는 경험, 혹은 '본다'고 하는 작용으로써 드러나는 것으로, 그 같은 경험이나 작용을 배제하고서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5온과는 독립된 개별적 존재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세간의 언어적 관습에 따라 그렇게 칭명된것에 불과하다.
자아란 다만 자아관념(我執)의 대상일 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고 하는 관념은 세계(곧 5온)에 대한 이지적 욕구의 결과로서, 세계에 대한 지각과 동일한 공간에서 일어난다. 그럼에도 '나'라고 하는 개체의 현 실태는 이기적 욕구에 의해 자기개체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러한 폐쇄된 개체성이 자아를 세계로부터 분리 독립시켜 지각에 선행하는 영속적인 실체로 간주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지의 정체이다. 무지란 곳 단일한 자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참고로 수많은 의식작용(心所) 가운데 어째서 지각과 표상만을 온으로 설정한 것인가? 아비달마에 의하며, 그것은 정의적이거나 이지적인 일체의 번뇌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며, 생사 윤회의 가장 두드러진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5온의 순서상 '수'와 '상'의 설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물질적 대상을 원인으로 하여 먼저 괴로움과 즐거움의 느낌(受)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전도된 생각(想)이 일어나며, 전도된 생각에 의해 온갖 번뇌(行)가 일어나 의식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혹은 '색'은 그릇에, '수'는 음식에, '상'은 조미료에, '행'은 요리사에, '식'은 먹는 자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그릇은 음식의 근거이기 때문이며, 음식은 신체에 이로움을 주기도 하고 손상(즉 苦樂)을 끼치기도 하기 때문이며, 조미료는 음식의 맛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며, 요리사는 능력(思·貪등의 업과 번뇌)에 따라 좋고 나쁜 음식(즉 熟)을 낳기 때문이며, 먹는 자는 이 모든 것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5온·12처·18계는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일반적인 존재의 분석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세 가지 방식으로 분석하게 된 것인가? 아비달마에 의하면, 세간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에 세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즉 온갖 의식작용을 자아로 집착하는 어리석은 이에게는 그것을 수·상·사로 분별한 5온을 설하고, 색에 대해 어리석은 이에게는 그것을 5근과 5경으로 분별한 12처를, 색과 심에 어리석은 이에게는 그것들은 각기 10가지와 7가지로 분별한 18계를 설하였다.
따라서 결국 간략한 글을 좋아하고, 그것을 잘 이해하는 상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5온을 설하였고, 간략하지도 번잡하지도 않은 중간의 글을 좋아하는 중근기의 사람들을 의해 12처를 설하였으며, 자세하게 이야기하여야 비로소 이해하는 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18계를 설하였다는 것이다.

3. 5위位 75법法의 분별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그런데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러한 온·처·계의 분류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색법色法(11가지)·심법心法(1가지)·심소법心所法(46가지)·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14가지)·무위법無爲法(3가지)의 다섯 갈래, 75가지 법으로 나누기도 한다.
색온과 식온은 그대로 색법과 심법에 해당한다. 행온은 마음과 평등한 관계로서 상응(관계)하는 행과 상응하지 않는 행을 나누어, 전자는 수·상의 2온을 포함하는 심소법에 포섭시켰으며, 후자는 따로이 독립시켜 불상응행법을 분류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생성과 소멸이라고 하는 경험적 세계의 특성을 수반하지 않는 법을 무위법으로 설정하여 이른바 '5위位 75법法'의 체계를 성립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5위 75법이라고 하는 술어는 유부 아비달마 논서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75라고 하는 수 또한 결정적인 수가 아니다. 이것이 전문술어로서, 또한 정수定數로서 고착되어 나타난 최초의 문헌은 보광普光의 ≪법종원法宗原≫인데. 이후 아비달마불교의 결정적인 체계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 하나하나에 대해 논의해 보기로 한다.
 

1) 색법色法 - 물질적 존재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다섯 갈래로 분류되는 일체의 존재 가운데 색법을 가장 먼저 열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앞서 '법'을 설명하면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인식의 주체인 의식은 반드시 감관과 대상에 수반되어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승에서처럼 대상이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대상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으로, 이 같은 객관 우선주의는 아비달마불교의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심소법은 흔히 심왕心王으로 일컬어지는 마음과 평등한 관계로서 상응하여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불상응행법은 색법도 아니고 심법도 아니기 때문에, 무위법은 앞의 네 갈래의 유위법의 존재를 통해 추론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순서로 열거한 것이다.
색이란 물질일반을 말한다. 원어 루파(RUPA)는 원래 변이 괴멸(變壞)의 뜻으로, 허물어짐의 괴로움을 낳는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이는 다른 유위제법과도 공통된 특성이기 때문에 보통은 다른 색의 생기를 장애하는 존재, 즉 공간적 점우성( 性)을 지닌 존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물질이란 곧 시간적인 변이성과 공간적인 점유성을 지닌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물질의 최소 단위를 극미極微라고 한다. 이것은 이를테면 문틈으로 비치는 광선 중에 흩날리는 먼지입자(隙遊塵)의 - 7승의 크기로 산정되기도 하는데, 하나의 극미는 통상 4방 상하의 6개의 극미에 둘러싸여 최초의 결합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극미는 부피를 갖는 것인가, 갖지 않는 것인가? 만약 극미가 부피를 갖는다면 그것은 다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극미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만약 부피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색이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리 많은 극미가 취합하여도 역시 부피를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극미를 사事극미와 취聚극미, 가설적 극미와 실제적 극미라는 이중구조로 해석하고 있다.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에 따르면 극미는 더 이상 부피를 갖지 않으며, 따라서 길고 짧음 등의 자상自相도, 공간적 점유성도 갖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일한 극미는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분할되어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가설적 극미로서, 이를테면 찰나를 더욱 분할하여 1/2찰나라고 할 수 없듯이 또 다른 관념으로 분석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무한소급에 떨어져 끝내 극미를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각의 대상이 되는 실체적 극미는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것이어야 하며, 그것은 적어도 가설적 극미의 집적(이를 微聚라고 한다)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마도 지각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사유의 대상도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유부로서는 극미의 문제를 이런 식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대승 유식唯識에서는 극미를 다만 관념에 의해 파악되는 가설적 극미로만 이해하였는데, 이는 유식의 도리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논거가 된다.
아무튼 산하대지 등의 유형적인 일체의 물질세계는 극미의 집적이다. 그런데 일체의 물질이 모두 극미의 집적이라면 어째서 각각의 물질은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인가? 그것은 극미가 견고성·습윤성·온난성·운동성을 본질로 하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의 4대종大種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종(mahabhuta)란 보편적 존재라는 의미로, 견고성 '지'는 물체를 능히 보지保持 저항하게 하는 작용을 갖고 있으며, 습윤성의 '수'는 물체를 포섭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는 작용을, 온난성의 '화'는 물체를 성숙하게 하는 작용을, 운동성의 '풍'은 물체를 동요하게 하는 작용을 갖고 있다.
곧 극미가 물질의 양적 구극이라며, 대종은 물질의 질적인 구극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보는 땅은 아니다. 땅 역시 극미의 집합인 이상 4대종을 모두 갖추고 있다. 땅은 다만 견고성이 두드러진 물질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수'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보는 물은 아니다. 물 역시 4대종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습윤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물질이다. 그러나 다시 어떤 조건에 의해 견고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경우 그것은 얼음이 되고, 온난성과 습윤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경우 끓는 물이 되며, 운동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경우 증발하여 기체로 날아가게 될 것이다. 이 같은 4대종 중 어느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에 따라 그물질의 성격이 결정되는데, 이를 사대은현四大隱現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4대종은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가? 앞서 극미에는 가설적 극미(事극미)와 실제적 극미(聚극미)가 있다고 하였는데, 실제적 극미는 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것일지라도 지각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수·화·풍의 4대종과 그것의 복합물이 색色·향香·미味·촉觸의 네 가지 소조색所造色이 결합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팔사구생八事俱生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사(dravya)'는 실체의 뜻이다. 이는 말하자면 외계의 현상이 물질적 존재로 파악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견고성·습윤성·온난성·운동성이라는 물질의 네 가지 근본성질과 색채나 형태, 냄새, 맛, 그리고 매끄럽거나 거친 등의 감촉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어떤 외계가 우리에게 물질로 인식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감각을 갖지 않는 객관적인 물질의 경우이고, 유정물로서 신근身根을 지닌 경우 9사가 결합한 것이고, 여기에 안·이·비·설의 4근 중 하나를 가졌을 때에는 10사가 결합한 것이다. 그리고 객관의 물질이든 유정물이든 소리를 지닐 경우 각기 증가하여 9사, 10사, 11사가 결합한 것이 된다.
예컨대 안근의 경우, 이것은 반드시 신근에 소속된 것이며, 이것은 다시 8사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안근 등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실제적 극미(微聚)는 10사가 결합한 것이며, 여기에 소리가 더해질 경우 11사가 되는 것이다.
이같이 극미대종으로 이루어진 색법의 종류에는 구체적으로 안眼 등의 5근과 색色 등의 5경, 그리고 무표색無表色이 있다. 조금은 현학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 하나하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 5근根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5근이란 안眼·이耳·설舌·신身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한다. 여기서 '근(indriya)'이란 '인드라 신에 상응하는 힘' '인드라 신에 속한 영역'의 뜻으로, 유정의 신체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며 두드러지게 뛰어나 힘을 말한다. 따라서 안근이라고 함은 그냥 거친 물질덩어리의 눈(이를 未塵根이라 한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따라 외계대상(色境)을 취하여 안식眼識 즉 시의식을 낳게 하는 미묘한 작용의 눈(이를 勝義根이라 한다)을 말한다. 이것은 극미의 특수한 집합체로서, 분할할 수도 볼 수도 업으며, 광명이 차단됨이 없는 맑고 투명한 색의 본질로 한다.
그리고 이근은 소리를 취하여 이식耳識(청의식)을 낳게 하는 맑고 투명한 색이며, 이근은 향을 취하여 비식鼻識(후의식)을 낳게 하는 맑고 투명한 색이며, 설근은 맛을 취하여 설식舌識(미의식)을 낳게 하는 맑고 투명한 색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색을 보는 것은 안근인가, 안식인가? 이는 '본다'고 하는 사실을 관조(見)로 규정할 것인가, 인식(了別)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감성적 지각과 오성적 지각에 관한 문제로서, 여기에는 고래로 안근이 본다는 근견설根見設, 안식이 본다는 식견설識見設, 양자 화합하여 본다는 화합견설和合見設 등의 세 가지 학설이 주장되고 있다.
아비달마 일반에서 '본다'고 하는 사실은 '먼저 숙고한 다음 확인 판단하는 것'으로 정의되지만, 유부에 의하면 모든 법은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과 작용을 지녀야 한다는 전제 아래 안근은 확인 판단의 작용은 갖지 않지만 명료하게 관조하는 작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혹은 안식이 본다면 그것은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지 않아 물질에 장애받지 않기 때문에 벽 뒤에 은폐된 사물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이유에서 근견설을 지지한다.
이에 반해 식견설에서는, '본다'고 하는 것은 이미 판단이 전제된 것인데, 안근에는 그러한 분별의 작용이 없다. 또한 만약 보는 주체가 안식이 아니라 안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식耳識 등의 다른 의식이 작용할 때도 보아야 하며, 이는 결국 두 가지 의식은 동시에 생겨날 수 없다고 하는 자신의 학설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경량부에 의하면, 대상이 생겨나는 순간과 안근이 작용하는 순간, 안식이 일어나는 순간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고 있어 동시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계기繼起하는 세 존재 사이의 직접적인 작용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실재하지도 않은 작용을 놓고서 인식성립의 본질적 요소가 이것이다 저것이다고 하는 것은, 마치 잡을 수도 없는 허공을 움켜쥐려고 맞붙어 싸우는 것과 같다고 조롱하고 있다.
즉 경량부에서는 인식을 유부에서처럼 동시 존재하는 감관과 대상 그리고 의식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부과된 대상의 형상이 원인이 되고, 다음 순간 상속의 결과로서 인식이 생겨난다고 하는 인과의 관계로서 설명한다.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결과로서 드러난 인식이라는 사실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경·식이라는 주관적 계기나 객관적 계기로 분석하는 것은 다만 세간의 관용慣用에 따른 언어적 설정일 뿐이며, 인식 자체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밖에도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색근의 수와 형태, 배열, 대상과의 양적 관계, 접촉·불접촉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지만, 여기서 생략한다.

(2) 5경境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5경이란 5근의 대상이 되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을 말하는데, 여기서 '경(visaya)'은 바로 경계 대상의 뜻이다.
색경은 안근의 대상으로, 물질일반을 의미하는 색온의 색이 광의의 색이라면, 이는 협의의 색이다. 여기에는 색채(顯色)와 형태(形色) 두 가지가 있다.
색채에는 다시 청·황·적·백과 이것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연기·구름·먼지·안개·그림자·빛·밝음·어두움이 있다. 여기서 안개란 땅으로부터 물의 기운이 비등한 것이고, 그림자란 광명을 장애하여 생겨났으면서 그 사이로 여타의 다른 색을 볼 수 있는 것이며, 어두움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빛이란 태양의 불꽃을, 밝음이란 달이나 별 화약 구슬 번개 등의 온갖 번쩍임을 말한다.
그리고 형태에는 길고 짧고 네모지고 둥글고 높고 낮고 평평하고 그렇지 않은 8가지가 있다.
그럴 때 하나의 극미에 어떻게 형태와 색채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인식에는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유부는, 존재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식론적 의미에서 색채와 형태는 동시에 알려지기 때문에 안근의 대상이 되는 색은 이 두 가지를 본질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경량부에서는 다만 색채만이 실재할 뿐이며, 형태는 그것의 배열상의 차별로 인해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은 이근의 대상으로, 여기에는 생물체가 내는 소리와 무생물체가 내는 소리가 있다. 전자에는 다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노래소리),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꾸짖는 소리),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장단에 맞춘 손뼉소리),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주위를 환기시키는 손뼉소리)가 있으며, 후자에는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귀신의 부드러운 소리),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귀신의 꾸짖는 소리),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악기소리),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천둥소리) 등이 있다.
향경은 비근의 대상으로 여기에는 좋은 냄새, 나쁜 냄새가 있으며, 두 냄새에는 각기 몸에 이로운 냄새와 몸에 해로운 냄새가 있다.
미경은 설근의 대상으로, 여기에는 달고, 시고, 짜고, 맵고, 쓰고, 담백함의 차별이 있다.
촉경은 신근의 대상으로, 여기에는 지·수·화·풍 의 4대종大腫과 이것들의 결합에 의해 이차적으로 나타난 촉(所造觸)인 매끄러움·거침·무거움·가벼움·차가움·허기짐·목마름이 있다. 여기서 매끄러움 매지 가벼움이란 각기 수·화, 지·풍, 지·수, 화·풍의 2대가 강성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차가움은 따뜻하기를 바라는 원인, 허기짐은 먹기를 바라는 원인, 목마름은 마시기를 바라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 이는 원인에 따라 결과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 그리고 대종 중에 특히 수대水大와 풍대風大가 증대되면 차가움이, 풍대가 증대되면 허기짐이, 火大가 증대되면 목마름이 있게 된다.

(3) 무표색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5근과 5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색인데 반해 무표색(avijnapti)은 그렇지 않은 색이다. 외부로 표출되지 않는 색이란 무엇인가?
유부에 있어 색법은 사실상 행위 측 업설業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외부로 표출되는 행위(表業)는 5근과 5경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신체적인 행위는 형태를, 언어적 행위는 말소리를 본질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행위된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또 다른 색법을 낳아 우리가 행위할 때에 마음과는 다른 상태에 있거나 다르지 않은 상태에 있거나, 혹은 무심의 상태에 있거나 유심의 상태에 있거나 간에 항상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유부에서는 이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하는데, 표업의 본질이 물질(즉 신체적 형태와 말소리)이기 때문에 무표업 역시 물질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무표색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비록 극미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공간적 점유성도 지니지 않을뿐더러 그 특상인 형태와 색채를 갖지 않을 지라도, 나무가 움직일 때 그 그림자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4대종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색법에 포함시켜 제6의식의 대상(즉 法處에 포섭되는 색)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량부나 세친은 모두 이 같은 존재나 신체적 형태(즉 신업)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무표업(3장 2-1) '업의 종류와 본질'을 논의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마음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18계에서 마음은 안식 내지 의식의 6식계識界와 의계意界로 분류되고 있지만, 마음은 단일하다. 다시 말해 마음은 단일하지만 그것이 발동하게 되는 근거에 따라 안식(시의식)·이식
(청의식)·비식(후의식)·설식(미의식)·신식(촉의식)·의식(사유의식)으로 분류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유부 아비달마에 따르면, 이 경우 앞의 다섯 식은 그것과 동시에 존재하는 안근 내지 신근을 근거로 하지만, 여섯 번째 의식의 경우 이미 소멸한 전찰나의 6식을 근거로 하는데, 이를 안근 등 앞의 5식의 근거에 준하여 '의근'이라 하였다. 이는 마치 어느 때 아들로 불리던 자가 그 때가 지나면 아버지로 불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의근은 앞의 5식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제6 의식의 근거도 되어 여섯 종류의 대상을 전체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단일하지만 작용하는 상태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기도 한다. 즉 의식작용(心所)이나 신身·어語·의意 3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칫타(citta, 心 즉 集起)라 하고, 생가하고 헤아리기 때문에 마나스(manas, 意 즉 思量)라고도 하며, 사물을 식별 인식하기 때문에 비즈냐나(vijnana, 識 즉 了別)라고도 한다.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을 대승의 유식唯識에서처럼 유위의 세계를 성립시키는, 혹은 진여심이나 일심과 같은 유위와 무위의 일체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이고도 본질적 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오늘 날씨가 좋다(了別)', '이 좋은 날 무엇을 하면 좋을까(思量)', '소풍을 가야겠다(集起)', 그리하여 마침내 소풍을 나서게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곧 마음이란, 일차적으로 안근을 근거로 하여 감각적 대상인 색경을 식별하고, 내지는 의근을 근거로 하여 비감각적 대상인 법경을 식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성적 인식이라 할 수 있는 앞의 5식이 어떻게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인가?
유부에 따르면 인식에는 심尋(추구)과 사伺(사찰)를 본질로 하는 감성적 인식(自性分別), 혜慧(판단)를 본질로 하는 오성적 인식(計度分別), 그리고 염念(기억)을 본질로 하는 기억이나 재인식(隨念分別)이 있는데, 앞의 5식은 다만 감성적 인식일 뿐이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말을 일컬어 다리가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처럼 완전한 인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즉 그것은 '심'·'사'와 상응하기 때문에 인식은 인식이지만 불확정적인 인식이며, 뒤의 두 가지 인식에 의해 비로소 확정적 인식 즉 유분별有分別이 된다.

(2) 마음의 작용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앞에서 전前 5식의 감성적 인식은 심尋과 사伺를 본질로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심'이란 뭔가를 추구하려고 하는 의식작용을, '사'는 뭔가를 살펴보려고 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또한 제6 의식의 오성적 인식은 '혜'를 본질로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혜'는 마음의 판단작용을 말한다. 이를테면 앞의 1장에서 아비달마의 본질을 무루혜라고 하였는데, 그 때의 '혜'는 불타의 예지를 이해 판단하게 하는 작용으로, 그것은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유부에서는 이 같은 마음의 작용(혹은 의식작용)을 마음과는 별도의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다. 판단을 비롯한 지각·표상·의사, 나아가 탐욕·미움·분노 등의 마음의 온갖 작용은 각기 개별적인 실체로서 마음과 동시에 생겨나는 것인가, 아니면 다만 마음의 시간적 변이일 따름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각·표상·판단 등을 의미하는 수·상·혜 등의 작용과 마음의 인식 (즉 了別) 작용은 다 같이 의식작용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여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인식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유부에서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완전히 개별적인 존재로 간주하여 동시생기(이를 俱生 혹은 俱起라고 함)한다고 주장한다.
유부 제법분별론에 따르는 한, 유위 제법은 각기 개별적 실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제법의 동시생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하면 제법은 각기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과 작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동시에 생겨나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동시 생기하지 않고 계기繼起한다면, 각각의 작용은 찰나에 생멸生滅하기 때문에 산괴散壞하여 하나의 완전한 인식을 이룰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심소心所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마음에 소유된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마음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신하는 왕에게 소유되어 있지만(왕 또한 신하들에게 의지하여서만 존재할 수 있다), 각각이 맡은 소임을 다함으로써 왕으로 하여금 국정을 이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 때 왕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신하들의 각각의 소임을 전체적으로 통괄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단순히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으로만 규정될 뿐 지극히 무내용적인 것이며, 지각 등 46가지로 산정되는 온갖 마음의 작용이 그에 수반하여 각기 자신의 개별적인 작용을 행함으로써 선악의 도덕적 내용까지 포함된 하나의 완전한 인식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작용은 단순히 마음에 피동적으로 소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점에서 평등하게 관계한다(이를 5義平等). 이 같은 마음과의 평등한 관계를 '상응相應'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마음의 작용을 심상응행법心相應行法, 줄여서 상응법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심소를 마음의 작용이라고 풀이할 경우, 그것은 마음 자체의 작용이 아니라 마음과 관계하여서만 비로소 작용하는 정신적 실체 내지 힘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음과 어떻게 관계하는가? 마음의 작용은 마음과 동일한 근거, 동일한 대상, 동일한 형상을 지니고서 동일한 시간에 생겨나며, 또한 마음이 한 찰나에 하나의 존재만 생겨나듯이 마음의 작용 역시 각기 하나의 존재만 생겨난다.
예컨대 어떤 순가에 안근과 항아리를 근거로 하여 항아리의 형상을 띤 하나의 마음이 생겨났다면, 동일한 순간, 동일한 감관과 대상을 근거로 하여 동일한 형상은 띤 하나의 지각, 하나의 표상, 하나의 판단 등이 반드시 함께 생겨난다. 따라서 온갖 마음의 작용은 결코 단독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마음 역시 자신의 고유한 작용(인식 즉 了別)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의 작용을 수반해야만 한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기 위해 수반 상응해야 하는 최소한의 마음의 작용은, 지각·표상 등과 같이 선·악 등 어떠한 성질의 마음과도 반드시 함께 하는 이른바 대지법大地法이라 일컬어지는 10가지이며,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10가지 대선지법大善地法과, 지각에 선행하여 뭔가를 추구하려는 의식 작용인 심尋과 사伺 등 도합 22가지의 마음의 작용과 상응해야 한다. 혹은 불선의 마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10가지 대지법과 6가지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두 가지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 그리고 심·사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그러한 제법 각각을 생겨나게 하는 힘인 생상生相과 마음의 상속 상에 획득하게 하는 힘인 득得 등의 불상응행법을 고려한다면 그 수는 훨씬 증가하게 될 것이며, 제법의 찰나생멸을 고려하게 될 겨우 문제는 더욱 어렵게 된다. 유부 비바사사는 이같이 지극히 난해한 온갖 존재양태들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온갖 마음과 마음작용의 각기 다른 상은 너무나 미세하여 그 하나하나의 상속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거늘 하물며 일 찰나에 동시생기함에 있어서랴!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약을 감관(혀)으로 파악하여 맛의 차별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어떤 구체적 형태도 갖지 않은 추상적인 존재를 오로지 관념만으로 파악함에 있어서랴!

이제 여섯 부류의 46가지로 산정되는 마음의 작용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우리말로는 그 차별을 분명하게 드러내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에 전통적인 한역漢譯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① 대지법大地法 : 여기서 '대(maha)'는 '보편적인, 두루 함께 하는'의 뜻이고, '지(bhumi)'는 의식작용의 근거가 되는 마음을 말한다. 곧 대지법이란 선·불선·무기 등 일체의 마음과 두루 함께 일어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여기에는 수受·상想·사思·촉觸·욕欲·혜慧·염念·작의作意·승해勝解·삼마지三摩地의 10가지가 있다.
먼저 '수'란 대상에 대해 나쁘다(苦), 좋다(樂),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不苦不樂)고 지각하는 감수작용을, '상'은 사물의 형상이나 언어적 개념의 차별상을 파악하는 표상작용을, '사'는 마음으로 하여금 선·불선·무기를 조작하게 하는 의지작용을 말하는데, 이 세 가지는 5온 가운데 수·상·행온에 해당한다. '행(samskara)'이란 넓은 뜻으로 보면 유위의 현상세계를 조작하는 일체의 유위법을 의미하지만, 좁은 뜻으로 본다면 유정의 삶을 이끌어 가는(혹은 조작하는) 의지를 말하기 때문이다.
'촉'이란 감관과 대상과 의식이 화합을 말하는 것으로, 순수감각 정도의 의미이다. 참고로 이는 신근의 대상인 촉(aprastavya)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욕'이란 뭔가를 하고자 하는 심리작용이며, '혜'는 판단작용, '염'이란 기억작용, 다시 말해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을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작의'는 주의·경각의 작용으로, 이것이 마음을 자극함으로써 대상으로의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승해'는 어떤 대상에 대해 그것을 인가하고 결정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그리고 '삼마지(samadhi, 혹은 삼매)'란 마음을 어떤 한 대상에 전념 집중하게 하는 의식작용으로, 마치 뱀이 죽통竹筒에 들어가면 바로 펴지듯이 마음도 이 같은 삼마지에 의해 산란되지 않고 한결같게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마음(인식)도 그것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10가지 마음의 작용과 상응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한 사물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관과 대상과 의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일단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려고 욕구(욕)해야 하고, 주의(작의)를 기울여야 하고, 집중(삼마지)해야 하고, 감관과 대상과 의식의 삼자가 관계(촉)해야 하고, 지각(수)·표상(상)·기억(념)·확인(승해)·판단(혜)해야 한다. 이 중 어느 한가지라도 결여될 경우, 혹은 시간을 달리할 경우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어떠한 마음과도 두루 함께 일어나는 법이라는 뜻의 '대지법'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이와 동시에 마음은 선·불선·무기(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닌 것) 중 어느 것으로 이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의지)'의 작용이다.
  ② 대선지법大善地法 : 대선지법이란 선한 마음과 두루 함께 일어나는 의식작용으로, 여기에는 신信·불방일不放逸·경안輕安·사捨·참 ·괴傀·무탐無貪·무진無瞋·불해不害·근勤의 10가지가 있다.
'신'이란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의식작용으로, 마치 물을 맑게 하는 구슬(淸水珠)로 말미암아 더러운 물이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이러한 작용으로 말미암아 4제諦와 3보寶 그리고 인과의 이치를 바로 믿게 된다. '불방일'은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선법을 닦게 하는 의식작용이며, '경안'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사'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평등성(평정), 이를테면 혼침(무기력)과 도거(약동)의 중정을 말한다. '참'은 계·정·혜의 공덕이 있는 자를 공경하는 것, 혹은 스스로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는 의식 작용이며, '괴'는 공덕이 있는 자의 꾸짖음이나 죄과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는 것, 혹은 남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는 의식작용이다.
'무탐'과 '무진'은 선근善根의 하나로, 대상에 대해 애착하지 않고, 유정에 대해 미워하지 않는 의식작용이다. 참고로 여기서 선근의 나머지 하나인 무치無癡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것은 '혜'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대지법 즉 일체의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의식작용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해'란 다른 이를 해코지하지 않게 하는 어질고 착한 성질의 의식작용을, '근'이란 모질게 노력하게 하는 성질의 의식작용을 말한다.
  ③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 대번뇌지법이란 염오染汚한 마음과 두루 함께 일어나는 의식작용으로, 여기에는 치癡·방일放逸·해태懈怠·불신不信·도거掉擧의 6가지가 있다.
'치'란 어리석음으로, 무명無明 혹은 무지無智라고도 한다. '방일'은 불방일의 반대로, 마음으로 하여금 선법을 닦지 않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해태'는 '근'의 반대로, 선법에 대해 모질게 노력하지 않게 하려는 의식작용이다. '불신'은 '신의 반대로, 마음을 정하지 않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혼침'은 '경안'의 반대로, 마음을 무기력하게 하는 의식작용, 또는 마음으로 하여금 혼미하고 침울하게 하여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없게 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그리고 '도거'란 '사'의 반대로, 마음을 이리저리 날뛰게 하여 안정되지 못하게 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여섯 가지 의식작용은 선도 아니지만 악도 아니다. 예컨대 무지하다고 하여, 선법을 닦지 않는다고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을 '무기'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다시 순수한 무기와 올바른 지혜가 생겨나는 것을 방해하는 무기가 있는데, 전자를 무부무기無覆無記라 하고, 후자를 유부무기有覆無記라고 한다.
참고로 염오한 마음은 무기이기는 하지만, 자아(에고)에 대한 믿음을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유부무기이다. 항상 불선(즉 악)인 것은 다음의 대불선지법의 두 가지이다.
  ④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 : 대불선지법이란 불선의 마음과 두루 함께 일어나는 의식작용으로, 여기에는 무참無 과 무괴無愧 두 가지가 있다. '무참'은 '참'의 반대로, 계·정·혜의 공덕이 있는 자를 공경하지 않는 것, 혹은 스스로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무괴'는 '괴'의 반대로, 공덕이 있는 자의 꾸짖음이나 죄과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 혹은 남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무참과 무괴만이 불선인가? 그것은 바로 수번뇌隨煩惱의 하나인 무참과 무괴에 의해 인과부정의 사견邪見과 인과도리에 미혹하는 무명無明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계·정·혜의 공덕이 있는 자를 공격하지 않거나 자신의 죄과에 대해 부끄럽게(혹은 두렵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악행이 괴로움의 과보를 낳게 하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그에 따라 온갖 불선의 악행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혹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⑤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 소번뇌지법이란 염오한 일부의 마음과 함께 생겨나는 의식작용으로, 여기에는 분忿·부覆·간?·질嫉·뇌害·해恨·첨諂·광?·교 의 10가지가 있다.
'분'은 마음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는 의식작용, '부'는 자신의 허물을 은폐하게 하는 의식작용, '간'은 재물이나 진리(法)에 대해 인색하게 하는 의식작용, '질'은 다른 이의 좋은 일에 대해 기뻐하지 않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뇌'란 나쁜 일에 집착하여 다른 이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의식작용을 말하여, '해'란 불해의 반대로, 다른 이를 핍박하게 하는 의식작용을, '한'이란 분노의 대상에 대해 원한을 갖게 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첨'이란 비뚤어진 마음의 작용으로, 이에 따라 자신의 뜻을 드러내지 않고서 남의 허물을 말하여 그를 미워하는 이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며, 혹은 아첨하기 위해 거짓을 설하여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광'이란 타인을 속여 미혹되게 하는 의식작용이며, '교'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소유물에 집착하여 오만 방자해짐으로써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게 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즉 이러한 의식작용들은 일체의 염오한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명과 상응할 뿐이며, 오로지 제6식과 상응하여 각기 개별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소'번뇌지법이라고 한 것이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대번뇌지법, 측 염오한 마음과 두루 함께 나타나는 의식작용은 그 밖의 탐 등의 번뇌에 따라 항상 동시에 함께 일어나지만, 이러한 소번뇌지법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는 번뇌로서, 무명과 상응할 뿐 다른 번뇌와 함께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이는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수번뇌隨煩惱의 하나이기 때문에 3장 4-3) '지말번뇌로서의 수번뇌'에서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⑥ 부정지법不定地法 : 부정지법이란 선·불선·무기의 어떠한 마음과도 함께 생겨날 수 있는 의식작용으로, 여기에는 사伺·수면睡眠·악작惡作·탐貪·진瞋·만慢·의疑 8가지가 있다.
'심'과 '사'는 마음으로 하여금 뭔가를 추구(尋求)하게 하고 살펴(伺察)보게 하려는 의식작용으로, 전자가 전5식과 상응하는 보다 거친 것이라며, 후자는 제6의식과 상응하는 미세한 것이다. 혹은 언어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거칠고 미세한 의식작용이다.
'수면'은 마음을 흐리멍덩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며, '악작'은 그릇되게 행해진 일에 대해 후회하는 심리작용으로, 악행을 후회하는 것은 선의 악작이며, 그 반대는 불선의 악작이다. '탐'은 마음에 드는 대상에 대해 애착하는 의식작용이며, '진'은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에 대해 미워하는 의식작용이다.
'만'은 오만한 마음의 작용으로, 소번뇌지법의 '고'가 자신의 재산이나 미모 혹은 성품에 집착하여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 것이라면 '만'은 그것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나거나 열등하지 한다고 생각하여 잘난 체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에는 자기보다 열등한 이에 대해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거나 동등한 이에 대해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만慢, 자기와 동등한 이에 대해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거나 뛰어난 이에 대해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과만過慢, 자기보다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만과만慢過慢, 5취온에 대해 그것을 '자기'라거나 '자기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아만我慢, 아직 뛰어난 덕성을 얻지 못하였으면서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는 증상만增上慢, 기예나 계율 등의 덕성이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조금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비만卑慢, 아무런 덕도 없으면서 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만邪慢의 7가지가 있다.
그리고 '의'는 4제의 진리성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 나아가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욕계·색계·무색계의 3계에 걸친 그것들의 상호관계에 대해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다만 한가로운 철학적 사색의 결과일 뿐인가?
어떤 이에게 분노(소번뇌지법의 하나)가 생겨났다고 하자. 그럴 때 분노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그의 분노는 마음자체에 의해 조작된 것도 아니며, 자아에 의해 생겨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찰나 생멸하는 마음의 상속 상에 분노가 획득된 상태로서, 분노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수受·상想 등 인식의 보편적 작용인 대지법과 무참·무괴의 대불선지법, 그리고 대번뇌지법의 무명과 반드시 함께 생겨난다. 곧 분노가 일어나는 조건을 분석 관찰함으로써 비로소 그 같은 분노의 세계는 유위제법에 의해 조작된 세계로서, 항구적이지 않고 실체적인 것도 아니라는, 따라서 진실로 '나' 혹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판단(慧)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단일하며, 영속적인 것이라고 믿는 성벽이 있다. 분노가 일어나 극에 달하면 '나'의 세계는 오로지 분노의 세계일 뿐이며, 그것은 항구적이라고 믿는다. 누구도 그것을 다만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 감정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는 분노가 소멸한 다음의 생각일 뿐이다. 그리하여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절망하여, 그로 인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그것이 윤회이다.
유부의 제법분별은 바로 세계란 단일하지도 항구적이지도 않으며, '나' 혹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낳기 위한 수습修習이며, 그 실천도道 또한 이 같은 사실의 통찰과 되새김에 지나지 않는다.
 

3) 불상응행법 -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이처럼 제법분별을 교학의 전제로 삼는 유부에 있어 유위의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조건들은 이것만이 아니다. 자재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나 인식과 경험의 토대가 되는 자아와 같은 실체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초기불교의 전통에 따라, 예컨대 '마음에 분노가 생겨났다'고 할 경우, 분노를 생겨나게 하는 힘, 분노를 마음의 상속상에 획득되게 하는 힘,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범부로 불려지게 하는 힘과 같은 추상적인 힘을 존재 범주의 하나로 설정하기도 하였다.
사실상 앞에서 분별한 물질이나 마음 등의 존재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과 작용을 갖고서 유위의 현상세계를 조작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힘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같은 힘은 물질도 아니고, 마음과 평등한 관계로서 상응하지도 않기 때문에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득得·비득非得·동분同分·무상과無想果· 멸진정滅盡定·명命·생生·주住·이異·멸滅·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身의 14가지가 있다. 이는 말하자면 부분적으로 존재양태에 관한 관념을 추상화시켜 얻은 개념으로, 유부에서는 이를 하나의 개별적인 실체 즉 법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1) 득得과 비득非得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득'이란 유정들로 하여금 자신이 상속한 유위제법이나 택멸·비택멸의 무위법을 획득·성취하게 하는 힘을 말한다. 즉 유부에서는 유정들로 하여금 업의 과보를 얻게 하여 3계界·5취趣 내지 범부와 성자 등의 차별을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서 '득'이라고 하는 개념을 설정하여, 이를 개별적 실체(別法)로 간주하였다. 만약 이러한 힘의 실재성을 부정할 경우, 범부와 성자의 차별은 물론 번뇌의 이단已斷·미단未斷을 구별할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번뇌단멸(즉 離繫)의 획득은 그것을 획득하게 하는 힘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득'은 '득'의 반대개념으로, 획득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다. 이를테면 범부는 무루법의 비득을 본질로 하는 유정을, 성자는 유루법의 비득을 본질로 하는 유정을 말한다.
이 같은 논의는 일견 말장난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제법의 실유와 동시생기를 주장하는 유부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예컨대 분노라고 하는 의식작용은 여타의 의식작용과는 다른 그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갖는 개별적이고도 객관적 실체로서, 분노가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미래의 그것이 마음의 상속상에 획득되었다는 말이며, 소멸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 비득에 의해 마음이 그것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번뇌를 끊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량부에서는 '득'이란 다만 유정의 다양한 차별의 상태를 가설한 것이라고 하면서 종자상속의 전변과 차별설로써 번뇌의 이단과 미단을 해명하고 있다.

(2) 동분同分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동부'(혹은 衆同分)'이란 유정을 유정이게끔 하는 동류 상사성 즉 보편성을 말한다. 온갖 유정들이 각기 유정으로 알려지는 것은 그것을 유정이게끔 하는 어떤 보편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인데, 유부에서는 그것을 '동분'이라고 하는 개별적 실체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분'이란 원인의 뜻이다. 예컨대 소를 축생이라고 하고, 갑돌이를 인간이라고 할 때, 그들은 각에 축생과 인간으로서의 공통된 원인(즉 보편성)을 갖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지는 것이다.
동분에서는 무차별동분과 유차별동분이 있는데, 전자가 일체의 유정을 유정으로서 동등하게 하는 존재라면, 후자는 일체의 유정을 각기 3계界·5취趣·범성(凡聖)·남녀 등의 유정으로 차별되게 하는 존재이다.
즉 유부에서는, 이러한 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개별적인 유정을 보편적 존재로밖에 인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한정적인 언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불상응행의 개별적 실체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경량부에서는, 동분이라 함은 유위제법의 동류 상사성을 일시 가설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3) 무상과無想果와 무성 멸진정滅盡定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무상과'란 마치 제방이 강물의 흐름을 일시 막는 것처럼 마음의 상속을 일시(500대겁) 끊어지게 하는 힘으로, 이는 무상정無想定을 닦아 색계 제4정려의 세 번째 하늘인 광과천廣果天 중에 태어날 때 획득하게 된다. 무상정과 멸진정(또는 滅受想定) 역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소멸하게 하는 힘으로, 전자가 무상無想 그 자체를 참된 해탈로 여기는 범부와 외도들이 제4정려에서 닦는 선정이라면, 후자는 마음의 산란을 떠나 고요히 머물기를 원하는 성자들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 닦는 선정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힘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무엇으로써 마음의 소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게 하는 것은 '삼마지'이지만, 그것 역시 마음의 작용(10대지법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무심의 상태는 끝내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심정에서 출정出定할 때, 어떻게 다시 유심의 상태로 상속할 수 있게 되는가? 유부에 의하면, 입정전의 마음이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어 출정 후 바로 마음을 일으킨다.
이에 대해 경량부에서는 두 가지 무심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일시 상속하지 않는 상태를 그렇게 가설한 것에 불과하며, 출정 후의 마음은 과거 입정전의 마음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상에 훈습된 마음의 종자로부터 상속한다는 색심호훈설色心互熏設을 주장하였다. 한편 세우世友는 멸진정 중에서도 미세한 마음이 존재한다는 세심설細心設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대승 유식唯識의 선구로 이해되기도 한다.

(4) 명근命根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명근이란 유정들로 하여금 일생 동안 그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서, 바로 목숨을 말한다. 곧 목숨이 있어 체온과 의식이 능히 유지되는 것이며, 또한 목숨은 체온과 의식에 의해 유지된다.
이처럼 세 가지는 서로의 조건이 되지만, 의식은 업의 이숙과도 아니며, 또한 무색계에서는 체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의식은 업이나 체온에 의해 유지된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유부에서는 의식의 상속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힘으로서 목숨이라는 개별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경량부에서는, 명근이란 예컨대 시위를 떠난 화살이 그 힘이 다해 떨어질 때까지 갖는 세력과 같은 것으로, 일찍이 3계에서 지었던 업에 의해 산출된 동분이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을 개념적으로 가설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5) 유위 4상相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생生·주住·이異·멸滅의 4상이란 유위의 제법을 생멸 변천하게 하는 힘으로서, 능히 생겨나게 하는 힘을 '생'이라고 하며, 능히 지속하게 하는 힘을 '주', 쇠퇴하게 하는 힘을 '이', 괴멸하게 하는 힘을 '멸'이라고 한다. 곧 생성 소멸하는 현상의 세계는 바로 이 같은 특성을 갖는 유위의 제법이 인연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유위이며, 반대로 이러한 네 가지 특성을 갖지 않은 것은 무위이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보통 주상을 제외한 3상을 설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를 설할 경우, 이에 집착하여 유위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 할 것이며, 또한 시간적 제약을 떠난 상주常住의 무위법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어째든 어떤 한 존재가 유위인 이상 거기에는 이 같은 네 가지 특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체의 유위법은 찰나에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생성과 소멸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4상의 작용은 서로 상반될 수 있으나 작용의 결과는 어떤 하나의 실제적인 사실로 귀결되기 때문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명한다.
예컨대 원한을 품은 세 사람이 밀림 속에 숨어 있는 원수를 해치기 위해 한 사람(즉 生相)은 그를 밀림(즉 미래) 밖으로 나오게 하고, 한 사람(異相)은 그의 힘을 소진시켜 쇠퇴하게 하고, 또 한사람(滅相)은 그를 죽였을 경우, 이 때 피해자(즉 법)은 소멸하기 위해 출현하는 것이고, 따라서 존재의 순간은 바로 그렇게 작용된 순간을 말한다. 다시 말해 찰나란 어떤 한 존재가 나타나 소멸하는 순간을 말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유위 4상도 결국 유위법이기 때문에 그것을 생겨나게 하고 괴멸하게 하는 또 다른 4상이 요구되며, 마침내 무한 소급에 빠지게 된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그러한 유위 4상(이를 本相이라고 함)이 생성내지 소멸을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서 생생生生·주주住住·이이異異·멸멸滅滅의 4가지 수상隨相을 설하여 그 같은 난점을 피하고 있다.
즉 본상인 생상은 생겨날 법과 자신을 제외한 세 가지 본상 그리고 네 가지 수상에 대해 작용하며, 수상인 생생상은 오로지 본상인 생상에 대해서만 작용한다. 다시 말해 생생상은 그것을 낳게 하는 또 다른 수상인 생생의 생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로지 본상인 생상에 의해 낳아진다. 따라서 어떤 존재가 생겨날 때 거기에는 4상이 함께 생겨나며, 동시에 그러한 생·주·이·멸을 가능하게 하는 네 가지 수상도 함께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논의는 제법분별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량부의 견해는 보다 유연하다. 그들에 의하면 유위 4상이란 제법의 변화 상속의 상태를 일시 가설한 개념에 불과한 것으로, 심신을 구성하는 제법이 일찍이 없었다가 지금 생겨난 것을 '생'이라 하고,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멸'이라 하며, 상속의 중간으로 전찰나에 따라 후찰나가 일어나 상속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주'라고 하며, 이 같은 상속의 전후차별을 '이'라고 하였다. 곧 제법을 생성하고 소멸하는 힘은 바로 인연의 힘으로, 생상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연만 화합하면 제법은 생겨나며, 인연이 결여되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6) 명名·구句·문文의 3신身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유부에서는 이 밖에도 말(소리)의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힘으로서 명·구·문의 3신을 설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kaya)'이란 집합의 뜻이다.
여기서 '명'이란 물질·소리·향기 등과 같은 명사적 단어로서, 이는 그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꽃'이라고 하는 말을 설함으로써 그 이미지를 표상하게 되는 것이다. '구'란 '제행은 무상하다'와 같은 문장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의 의미체계를 완전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것에 의해 동작·성질·시제 등의 관계가 이해된다. '문'이란 ㄱ ㄴ ㄷ 혹은 ㅏ ㅑ ㅓ와 같은 음소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집합을 각기 명신 등이라고 한 것이다.
즉 유부에서는 이러한 존재가 개별적으로 실재함으로 해서 어떤 말(소)의 의미체계가 이해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른바 명현론明顯論으로 알려지는 유부의 논의에 따르면, 말(소리)에 의해 '명'이 생겨나며, 명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난다.
예컨대 말소리(語音, vac)에 의해 '불'이라는 말(名, 즉 단어 nama) 등이 생겨나며, 불이라는 말 등에 의해 그 의미(義, artha)가 드러나는 것으로, 말소리가 바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난다'고 함은 드러내야 할 의미 대상에 대해 그것과는 다른 별도의 관념이나 지식(智, buddhi)을 낳는 것을 말하며, 청자는 바로 그 같은 지식을 통해 대상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곧 '명' 등은 말소리를 통해 생겨나는 것으로, 마치 지식이 그 의미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듯이 말(소리)의 의미(대상 자체의 의미가 아님)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 바로 명·구·문이다. 따라서 만약 이 같은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능히 말(소리)의 의미를 드러낼 수가 없어 인식도 경험도 불가능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량부에서는 이 또한 개념적 존재로서만 인정한다. 단어나 문장 등은 말(소리)을 본질로 삼는 것으로, 이근耳根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색법에 포섭된다. 곧 단어란 어떤 의미체계가 미리 약속되어진 음성으로 음소의 집합일 뿐이며, 그러한 음성의 특수한 배열이 문장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개별적인 실패가 아니다. 예컨대 벌을 떠나 벌의 행렬이 있을 수 없듯이, 단어를 떠나 문장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단어는 궁극적으로 음소의 집합이며, 나아가 음소는 글자로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4) 무위법無爲法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아비달마불교에서 세계란 궁극적으로 자재신에 의한 것도 아니며, 우연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의도(욕망)에 따라 경험된 세계로서 앞서 논의한 제법이 원인과 조건(즉 인연)에 따라 화합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온갖 조건의 일시적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에 영원하지 않기에 불안하다.
세계란 찰나 생멸하는 제법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즐거움의 세계 또한 항구적이지 않기에, 그래서 불안하며 고통스러운 것이다. 오늘의 젊음은 내일을 보장할 수 없으며, 오늘의 행복 뒤에는 내일의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현실세계는 괴로움이다. 따라서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이상은 그 같은 괴로움이 소멸된 세계 즉 열반이며, 그것이 바로 무위이다.
무위(asamskrta)의 문자적 의미는 더 이상 어떤 조건(인연)에 의해 조작(생성)되지 않은 것, 따라서 더 이상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면, 무위의 개념이 보다 확대되어 경험의 세계를 생성시키는 온갖 존재들의 사슬이 끊어진 불사不死 감로甘露의 세계인 열반을 포함하여 생성과 소멸로부터 벗어난 존재, 인과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존재,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 경험되지 않은 존재, 말할 수 없는 존재, 나아가 이법理法의 진리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현실세계의 탐구를 위주로 하는 상좌부계에서는 불변의 세계인 무위를 자신들의 세계관에 주된 요소로 보지 않은데 반해, 이상세계의 탐구 위주로 한 대중부계에서는 무위에 이법의 진리도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상좌부에서는 경험세계의 근본 동인이라고 할 수 있는 탐·진·치의 소멸 자체인 열반 한 가지를, 유부에서는 여기에 그들 교학의 이론적 귀결로서 설정된 비택멸非擇滅과 허공虛空을 더한 세 가지 무위를 설한 반면, 대중부계에서는 이를 더욱 확장하여 택멸·비택멸·허공·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연기지성緣起支性·성도지정聖道支性의 9가지 무위를 설하고 있다.
혹은 대승의 유식에서는 유부의 세 가지 무위에 不動·상수멸想受滅·진여眞如의 세 가지를 더한 6가지 무위를 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유위제법, 이를테면 번뇌와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는 물질,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상想과 수受 등의 심소를 단멸할 때 나타나는 차별일 뿐 그 본질은 진여이다.
유부의 세 가지 무위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허공虛空이란 절대공간을 말한다. 유부에 의하면, 시간은 사물(유위세간)의 변화상에 근거하여 설정된 개념에 불과하지만, 공간은 그 자신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지 않아 점유성의 물질로 하여금 운동하게 하는 근거로서, 그 자체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무위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은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6계界 중의 공계와 허공은 다르다는 점이다. 즉 무위법으로서의 허공은 절대공간이지만, 공계는 구멍이나 틈과 같은 명암을 본질로 하는 한정된 공간으로 유위법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택멸擇滅이란 초기불교 이래의 열반을 말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에게 경험된 세계를 항구적이고, 자재신이나 자아와 같은 어떤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실체에 근거한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는 무지에서 비롯된 아집과 집착으로, 일체의 괴로움은 여기서 생겨난다.
곧 열반이란, 세계는 다수의 원인과 조건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무상하고 괴로우며, 실체성이 없는 것이라는 존재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무지와 집착 등의 일체의 번뇌와 그것에 비롯되는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이를 離繫라고 한다)를 말한다. 그리고 이 같은 번뇌소멸의 열반은 4제諦의 진리성을 이해 간택簡擇하는 무루의 지혜에 의해 증득되기 문에 '택멸'이라고 하였다. 이는 더 이상 유위제법에 의해 조작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무위이다.
세 번째 비택멸非擇滅이란 말 그대로 무루의 지혜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획득하는 열반을 말한다. 유부의 이론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걸쳐 실재하며, 미래법은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 현현(현재)하지만, 그 같은 조건을 결여한 그것은 잠세태潛勢態로서 미래세에 머물게 된다. 이를 연결불생법緣缺不生法, 혹은 필경불생법畢竟不生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불생불멸인 이것도 일종의 무위법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부에서는 다른 유위제법과 마찬가지로 무위법 역시 존재론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객관적이고도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같은 유부의 입장에 대해 경량부에서는, 접촉되어지는 물질의 비존재, 지혜에 의한 번뇌의 불생不生과 그로 인한 다음 생(後有)의 비존재, 자연적이고도 본래적인 생기의 비존재를 각기 허공, 택멸, 비택멸이라고 가설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체의 무위는 각기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과 작용을 갖는 색色이나 수受 등과 같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니,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제법의 성호포섭 관계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이상 초기불교 이래의 일반적인 존재분석 방법이었던 12처·18계·5온과, 이를 계승하여 보다 발전시킨 유부 아비달마에서의 5위 75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제 이러한 각각의 분별이 어떻게 서로 관계하는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온·처. 계의 세 갈래는 근기에 따른 분별이라고 언급한 바 있지만, 사실상 어떠한 갈래도 광협廣狹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자체로서 완전한 분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5온의 경우, 그것은 물질 내지 마음이 적집된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혹은 유루의 5취온取蘊은 미혹한 세계의 근거가 되고 무루의 5온은 깨달음의 세계가 근거가 되기 때문에, 적집될 수도 없고 어떠한 세계의 근거도 되지 않는 무위법과는 관계없다. 유부에 따르는 한, 무위법은 물질 내지 마음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처·계의 세 가지 분별이 일체법의 분류라고 할 때, 5온은 다만 일체 유위법에 대한 분류법일 뿐이며, 12처와 18계는 무위를 포함한 그야말로 일체법에 대한 분류법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발전된 분류법인 5위에 따라 일체법을 분별해 보자.
먼저 색법은 5온 중의 색온과, 12처 중의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를 제외한 10처와, 18계 중의 의계意界와 법계法界 그리고 6식계를 제외한 10계에 해당한다.
심법은 5온 중의 식온과 12처 중의 의처, 18계 중의 의계와 6식계에 해당한다.
심소법 중 대지법인 '수'와 '상'은 5온 중의 수·상온에 해당하지만, 그 밖의 심소법은 행온에 포섭된다. 모든 심소법은 마음과 평등한 관계로서 상응하는 존재 즉 상응행법相應行法이기 때문에 사실상 행온에 포섭되지만, '수'와 '상'은 인식과 이에 따른 번뇌 및 생사 윤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별도로 설정한 것이라고 아비달마 논사들은 이해하였다. 그리고 '수'와 '상'을 비롯한 일체의 심소법은 12처 18계중에서 각기 법처와 법계에 포섭된다. 즉 심소법은 마음에 수반되어 인식(了別)을 가능하게 하고 마음의 성격을 규정하는 힘으로, 비감각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불상응행법은 행온과 법처와 법계에 포섭된다.
무위법은 앞서 언급한 대로 5온에는 포섭되지 않으며, 다만 법처와 법계에 포섭될 뿐이다.
참고로 색법과 색온에 포섭되는 무표색의 경우, 감관을 통해 파악되는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법처와 법계에 포섭된다.
이상의 설명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5. 제법의 삼세三世 실유實有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우리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과 만나게 될 때 무엇보다 먼저 당혹스러운 점은, 이미 그들이 부파 명칭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그들이 앞서 분별한 일체 제법의 삼세실유를 주장하였다는 사실이다. 흔히 이 부파의 기본명제로 일컬어지는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는 원래 서로 이어진 대구가 아니며, 일본의 응연凝然이 편찬한 ≪팔종강요八宗綱要≫에 나타나는 말이지만 고래로 유부교학을 규정하는 명제로 회자되어 왔다. 불타는 분명 무상과 찰나멸을 설하였는데, 어째서 삼세가 실유이고 법체가 항유라는 것인가?
여기서 잠시 유부교학에서의 시간관에 대해 살펴보면, 시간(kala)이란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이른바 '법'이 아니라 다만 생멸변천하는 유위제법에 근거하여 설정된 개념일 뿐이다. 이것은 아비달마불교 뿐만 아니라 불교일반의 일관된 시간관이다. 기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통해 기간의 존재를 확인하는가? 시계인가? 그렇다면 시계가 생겨나기 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다만 해가 뜨고 짐에 따라, 달이 차고 기움에 따라, 나뭇잎이 움트고 낙엽이 짐에 따라 시간이 흘러감을 안다.
≪구사론≫ <세간품>에서는 시간의 단위로서 찰나刹那(ksana)·?刹那(tatksana; 120찰나) ·납박臘縛(lava; 60달찰나)·모호율다牟呼栗多(muhurta; 30납박)·하루(30모호율다)·한달(30일)·일년(12달), 나아가 우주가 생겨나 소멸하여 허공이 되는 시간인 대겁大劫을 설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만 세간의 변화를 규정한 개념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모두 5온을 본질로 한다.
이처럼 세간에서 시간은 유위제법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세로世路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유위의 이명異名이다. 따라서 삼세실유는 바로 과거·현재·미래로 변이하는 유위제법의 실유를 의미하여, 그것은 결국 법체항유와 다른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부에서는 어떠한 근거에서 앞서 분별한 일체 제법이 실유라고 주장하게 된 것인가? 그들은 네 가지 근거를 들고 있는데, 두 자기는 경전상에서의 근거이고, 두 가지는 이론적 근거이다.
첫째, 부처님께서 "과거의 색에 대해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색에 대해 즐겨 추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즉 과거와 미래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만약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집착하고 즐겨 추구하는 일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또한 역시"인식은 반드시 두 가지 조건(감관과 대상)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안식은 안근과 색경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며, 의식은 전찰나의 마음인 의근과 비감각적 대상인 법경을 근거로 하여 생겨난다. 따라서 만약 과거나 미래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인색의 필수조건인 대상이 결여되어 그것에 대한 인식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셋째, 인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두 번째의 경증을 이론화한 것으로, 유부교학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 의하면 대상 없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란 알려진(경험된) 것이고, 앎의 근거가 이른바 '법'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야 한다. 예컨대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어떤 대상 없이는 일어날 수 없으며, 미워하는 마음 또한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법은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미래의 법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마음은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선행된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의 법만이 실재하고 과거와 미래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업의 인과설에 모순이 생겨나게 된다. 즉 과거의 법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과거로 지나가 버린 선악업은 이미 소멸해 버렸으므로 현재 아무런 결과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며, 현재 감수하고 있는 괴로움 등의 결과도 그 원인이 되는 선행된 행위가 없이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미래의 법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행위 역시 바로 소멸할 것이므로 미래에 어떠한 결과도 산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표상되는 현재의 세계를 결과로 본다면 그 원인이 되는 선행된 행위는 반드시 과거에 존재해야 하며, 현재의 행위를 원인으로 보면 그 결과는 반드시 미래에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유부에서는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일체법의 '삼세실유'를 주장하였고, 그로 인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즉 '일체법의 실유를 주장하는 부파'라고 하는 자신의 부파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아비달마의 모든 논서상에서 유부교학의 제1명제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만약 일체의 제법이 삼세에 실유한다면, 그것의 시간적 차별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일체의 제법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관계없이 실재한다고 하면, 우리들 경험상에 나타나는 삼세의 차별은 무엇인가? 그것이 만약 생성 소멸하지 않는 무위법이라면 모르지만, 유위법의 경우라면 실유의 법인 그것이 어떻게 생멸 변천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바사婆沙≫의 4대 평자評者로 일컬어지는 법구法救(Dharmatrata) 묘음妙音(Gosa) 세우世友(Vasumitra) 각천覺天(Buddhadeva)의 네 학설이 주장되고 있다.
첫 번째로 법구는 마치 금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지면 그 형태는 변할지라도 금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현상의 존재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의 차별이 있다는 유부동설類不同說(bhava parinama)을 주장하였다. 즉 제법이 미래순간을 지나 현재에 나타나면 그것은 미래존재를 상실(소멸)하고 현재의 존재를 획득(생성)하며, 현재에서 과거가 되면 그것의 현재존재는 소멸 하지만 본질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묘음은 마치 어떤 한 남자가 어떤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현재상) 다른 여인에 대한 사랑의 능력(과거·미래상)을 상실하지 않는 것처럼, 드러난 양상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의 차별이 있다는 상부동설相不同說(laksana parinama)을 주장하였다. 즉 제법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 나타나는 것은 각기 그 양상을 달리하기 때문이지만, 과거의 법은 그것의 미래나 현재의 양상을 여의지 않는 채 과거의 양상을 유지하며, 현재의 법은 그것의 과거나 미래의 양상을 여의지 않은 채 현재의 양상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세우는 작용하는 상태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의 차별이 있다는 위부동설 位不同說(avastha parinama)을 주장하였다. 이를테면 동일한 주판알이라고 할지라도 일의 자리에 있으면 일이라고 일컬어지고, 백이나 천의 자리에 있으면 백이나 천으로 일컬어지듯이, 어떤 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는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미래라 하고, 지금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재라고 하며, 이미 작용을 마친 상태를 과거라고 하지만 법 자체로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천은 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삼세의 차별이 있다는 대부동설待不同說(apeksa parinama)을 주장하였다. 이를테면 어떤 한 여인을 그녀의 딸은 어머니라고 부르며,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라 부르는 것처럼, 어떤 법은 그것에 선행한 법(과거와 현재법)에 대해서 미래법으로 일컬어지고, 선행한 법이나 다음에 나타날 법(미래법)애 대해서는 현재법으로 일컬어지며, 다음에 나타나는 법(현재와 미래법)에 대해서는 과거법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관계에 따른 변화일 뿐 법 자체로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부에서는 이상의 네 가지 학설 가운데 세 번째 세우의 학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법구의 설을 획득과 상실에 의한 현상적 존재의 변화를 설함으로써 외도인 수론數論(samkhya)학파의 전변설轉變說을 옹호하는 것이 되며, 묘음의 설은 결국 제법이 동일한 시간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양상으로 공존함을 뜻하므로 시간의 혼란은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천의 설은 삼세법 각각에 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삼세의 차별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과거법 역시 전후 찰나를 구분하여 과거와 미래라 하고, 그 중간을 현재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같은 과거 역시 다시 전후 찰나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묘음의 설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유부에서는, 제법이 작용하는 상태에 따라 삼세를 구분한다는 세우의 설을 정설로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어떤 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를 미래의 법이라고 하고, 지금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재의 법이라고 하며, 이미 작용을 끝낸 상태를 과거의 법이라고 하지만, 법 자체로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으며 항상 실재한다. 이른바 '법체항유'인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제법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바로 '제행諸行은 무상하다'는 불교의 기본명제와 모순되며, 이는 바로 이 부파가 다른 부파로부터 비판받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유위법은 무상하며, 찰나생멸한다는 것은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기본입장이었다. 찰나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의 보다 구체적 표현으로, 한 찰나에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한다는 뜻이며, 시간적 지속정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부에서는 생·주·이·멸의 유위 4상이 한 찰나에 동시 존재한다고 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제법의 삼세실유론과 찰나멸론은 얼핏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이 두 문제는 모순 없이 함께 성립하며, 나아가 일체 존재의 무상성은 바로 제법의 실유성을 통하여 비로소 확실하게 해명될 수 있다고 유부 비바사사는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유부의 법유론法有論은 무상(혹은 찰나멸)의 이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불교철학의 중심이론은 궁극적으로 상속의 이론이다. 즉 철저하게 생성의 철학인 불교에서 소멸과 생성 사이의 비단절적 연속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다시 말해 찰나생멸하는 세계가 어떻게 인과상속의 지속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인가? 유부의 법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는 찰나생멸하는 유위제법의 끊임없는 연속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지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컵은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일한 컵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각각의 제법이 찰나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다음 찰나에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선행한 제법을 상속하여 그것과 동류의 법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서 계속 생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찰나생멸적인 제법의 연속적 비단절적인 생기 위에서 '컵의 존재'라고 하는 시간적 지속현상이 우리들 경험세계의 사실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법이 생기한다고 하여도 무無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며, 소멸한다고 해도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생기라고 하는 것은 법이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현재로 현현하는 것이며,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무에서 생겨나 무로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며, 그것은 바로 단멸斷滅의 사견邪見이 아니가?
따라서 현재에 나타나기 이전의 법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하며(엄밀히 말하면 미래의 법으로서 존재하며),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진 이후의 법은 과거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법이 미래로부터 나타나 과거로 사라지는 한 찰나면 존재하며, 그래서 이 부파에 있어 법(dharma)과 찰나(ksana)는 동일한 개념이었다.
이 같은 유부의 상속의 이론은 영화의 메커니즘을 통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지속된 현상으로서 영화를 보고 있지만, 사실상 스크린에 나타난 영상은 일초에 24장의 개별적인 필름이 생성하고 소멸한 현상이다. 즉 위의 릴에 감겨있던 필름은 한 장 한 장 광원 앞에 나타나 스크린에 비쳐지며, 비쳐지는 순간 바로 아래의 릴로 사라진다. 다시 말해 스크린에 비친 영상은 각기 개별적인 필름의 연속으로, 우리는 항상 인과적 관계로서 상속하는 현재의 순간만을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상 필름 자체는 위의 릴에 감겨 있을 때(미래)나 광원에 비쳐 작용할 때(현재)나 아래의 릴로 감겨 들어가 있을 때(과거)에도 각기 개별적인 존재로서 어떠한 변화도 갖지 않지만, 그것이 찰나찰나 간단없이 스크린에 비쳐짐으로써 생멸 변화하는 시간적 지속현상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부의 법유론을 '삼세에 걸친 제법의 실유'로 이해하고 있지만, 보다 엄격히 말하면 제법이 이미 작용하였고, 지금 작용하며, 아직 작용하지 않은 변이의 상태가 바로 삼세이기 때문에 삼세라는 시간의 흐름은 제법의 생멸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지금 작용하고 있는 현재는 오로지 제법의 생성과 소멸의 순간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유위제법이 비록 실재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현상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의 한 찰나에 불과하며, 그러한 현재의 한순간 한 순간이 쌓여 경험세계에서의 시간의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경량부가 지적하고 있듯이 유부의 삼세실유설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법유론이야 말로 유부교학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생성의 철학이라는 것, 일체의 우위제법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한다는 '무상의 찰나멸론'은 초기불교 이래 너무나도 자명한 전제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면 소멸과 생성 사이의 비단절적인 연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같은 상속의 변화에 관한 이론은 불교의 여러 학파에 있어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였고, 이에 대해 유부는 법유론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6. 제법의 인과관계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경량부가 지적하고 있듯이, 만약 제법이 실재한다면 그 작용 역시 항상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데, 무엇이 그것을 방해하여 어느 때는 일어나고, 어느 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전후가 결정되지 않은(결정되어 있다면 결정론에 빠지게 됨) 무수한 미래의 법은 어떻게 현상(혹은 작용)하는 것인가?
앞서 우리는 제법을 생성하게 하는 힘 내지 소멸하게 하는 힘으로서 생·주·이·멸이라는 유위 4상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유위 4상 역시 실유의 법이기 때문에 유위제법은 모두 생상의 힘에 의해 항상 작용하여 동시에 단박에 생겨나야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불생의 유위법이란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 유부에 있어 법은 그 자체 단독으로서는 결코 현상하지 않으며, 다른 법과의 관계를 통해, 다른 법을 원인과 조건으로 삼아서 비로소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원인과 조건을 갖는 법만이 생상과 관계하여 생기하며, 그렇지 않는 법은 생상과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제법이 모두 동시에 단박에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란 무엇인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슈바라와 같은 자재신의 조작인가, 아니면 원인 없이 우연히 생겨난 것인가? 우리는 흔히 불타의 교법을 인과법 혹은 인연법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겨나며, 그것은 또 다른 존재에 인연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인(hetu)'이란 직접적 혹은 일차적인 원인을 말한다며, '연(pratyaya)'이란 간접적 혹은 이차적인 원인을 말한다. 말하자면 '인'이 원인이라면, '연'은 원인으로 하여금 결과를 낳게 하는 조건이다. 예컨대 싹은 씨앗으로부터 생겨나지만, 씨앗이 바로 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분이나 광선 온도 등의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비로소 싹을 낳게 된다.
우리들 경험의 세계가 이처럼 인연에 의해 생겨난다고 하는 것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란 인연생기의 준말이다.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연기의 공식이다. 이것은 바로 불타 깨달음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는 세계의 존재근거를 그 어떤 초월적 실재에서 구하거나 혹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관계성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씨앗과 광선 온도 등이 있으므로 싹이 있다'고 하는 경우처럼 '이것'과 '저것'에 무엇을 대입시키면 좋을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저것'은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결과로서의 현실세계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현실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제법이었고, 그래서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제법분별을 그들 교학의 일차적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제법의 인과관계는 어떠한가? 인과적 제약에서 벗어난 무위법을 제외한 유위의 제법은 동시적으로 관계하기도 하고 시간을 달리하여 관계하기도 하는데, 유부의 아비달마에서는 제법분별론에 따른 필연적 귀결로서 6인因 4연緣 5과果라고 하는 그들 특유의 인과론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즉 다수의 법이 동시에 관계할 때 비로소 작용하고 현상한다고 주장하는 한, 자재신이나 자성自性과 같은 단일 보편의 원인은 결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같이 인과관계의 설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제 유부가 제시하는 다양한 인과관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6인因과 4과果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유부 비바사사들은 그들이 분석한 제법의 양태에 따라 원인에 능작인能作因·구유인俱有因·동류인同類因·상응인相應因·변행인遍行因·이숙인異熟因의 여섯 가지 유형을 설정하였다. 이는 그것이 적용되는 범위가 넓은 것에서부터 좁은 것에 따른 순서이지만, 여기서 편의상 이해하기 쉬운 순서에 따라 설명하기로 한다.
앞서 '마음의 작용'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음은 반드시 마음의 작용과 함께 일어나며, 마음의 작용 역시 그러하다. 예컨대 '분노하는 마음'이라고 하였을 경우, 이 때 마음은 인격적인 것이든 비인격적인 것이든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10가지 대지법 등과 동시에 일어나며, 분노 등의 작용도 역시 마음에 수반되어 동시에 일어난다. 이는 즉,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상응하기 때문으로, 이같이 상응의 관계로서 결과와 동시에 생기하는 원인을 상응인相應因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시 생기하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분노하는 마음'의 조건이 되는 그 같은 온갖 존재(心·心所)는 유위 4상의 하나인 생상과 동시 병존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나게 된다. 즉 상과 다리는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여 동시에 존재하듯이 유위 4상과 그것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하는 유위법도 역시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며, 4대종 또한 각각의 대종자체로서 현현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한가지 대종과 다른 세 가지 대종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그러나 유위 4상이나 대종은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응인과는 다를 인과유형으로 설정되어야 하는데, 이를 구유인俱有因이라고 한다. 여기서 '구유'라고 하는 말은 결과와 동시 병존한다는 뜻이다. 곧 구유인이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응인은 구유인의 협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에 대해 ≪구사론≫에서는 구유인을 상인들이 서로에 의지하여 험난한 길을 가는 것에, 상응인을 각기 평등한 입장에서 함께 식사하고 사업을 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한편 구유인과 상응인의 결과를 사용과士用果라고 한다. 즉 상인들의 카라반이나 사업은 다같이 그들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에 의해 수행되는 작용이듯이, 이는 바로 인간(士夫)에 의해 인득되는 작용이기 때문에 사용과라고 한 것이다. 곧 인간의 작용이라 할 수 있는 한 찰나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고 할 경우, 그 때 마음은 최소한으로 10가지 대지법과 그것의 40가지 유위상과, 마음의 본상 네 가지와 수상 네 가지 도합 58가지 법에 대해 구유인이 되며, 생생 등의 수상隨相은 생 등의 본상本相에 대해서만 구유인이 될 뿐이기 때문에 네 가지 수상을 제외한 54가지 법은 마음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 그러나 분노하는 마음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여기에 다시 대번뇌지법 등과 그것의 4상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득'은 그것에 의해 획득되는 법과 반드시 함께 하지 않으며, 먼저 생겨나기도 하고 혹은 뒤에 생겨나기도 하기 때문에 구유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분노'라고 하는 마음의 작용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그것은 자신의 세계가 손상되었을 때 일어나는 심리작용이다. 말하자면 자아 혹은 에고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자아란 경험을 근거로 하여 알려지는 것일 뿐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즉 분노 등 일체의 번뇌는 그것에 대해 두루 작용하는 5가지 그릇된 견해와 4제의 진리성에 대한 의심(疑), 그리고 이와 상응하는 무명 등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이 같은 번뇌를 변행혹遍行惑이라고 하는데, 일체의 염오법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변행인遍行因이라고 한다. 따라서 변행인은 결과와 유사한 법이면서 그것에 선행하거나 무간無間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결과와 유사한 성질을 지녔으면서 그것과는 시간적으로 선행하거나 무간으로 존재하는 원인을 동류인同類因이라고 한다. 예컨대 '유위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고 하는 말은 시간적으로 지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시간적으로 지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시간의 최소 단위인 찰나에 걸쳐 변화한다는 말이며, 찰나에 걸쳐 변화한다는 말은 전 찰나의 존재와 후 찰나의 존재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함에도 책상이라든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전 찰나는커녕 어제와 변함없이 동일하게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그것은, 전 찰나의 법과 서로 유사한 동류의 법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계속 생기하기 때문인데, 이 때 전 찰나의 법을 동류인이라고 하며, 후 찰나의 법을 등류과等流果라고 한다. 동등한 성질로서 상속한 결과라는 뜻이다. 즉 이러한 인과의 연쇄가 계속되는 한 경험세계에서의 책상은 거기에 그대로 계속 존재하며, 그 연쇄가 또 다른 조건에 의해 단절될 때 책상의 존재는 변화하든가 소멸한다.
마찬가지로 선한 5온은 선한 5온에 대해, 염오의 5온은 염오의 5온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이 같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유형이야말로 다음에 설할 선인낙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人苦果의 이숙인·이숙과와 함께 세간상식에 통하는 인과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변행인과 동류인은 결과에 선행하며, 결과와 동류의 성질을 지닌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전자가 일체의 번뇌와 염오심에 두루 작용하는 변행혹에 한정되는 것이라며, 후자는 일체 유위법에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변행인은 말 그대로 3계의 모든 부류의 염오법에 대해 두루 작용하는 것인 반면, 동류인은 단지 그것이 속한 세계와 부류에 대해서만 작용한다. 이를테면 욕계의 법은 욕계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될 수 있으며, 욕계의 법이라 하더라도 선행한 법만이 후 찰나의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미래법은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동류인과 마찬가지로 결과와는 시간을 달리하지만 그 성질이 유사하지 않은 원인을 이숙인異熟因이라고 하며, 그 결과를 이숙과異熟果라고 한다. 여기서 '이숙'이란 결과와는 그 성질을 달리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선업을 행하여 즐거움의 과보를 받고, 악업을 행하여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고 할 때, 즐거움과 괴로움을 감수하는 지각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이기 때문에 이숙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동류인·등류과와는 달리 이숙과가 다시 이숙인이 되어 결과를 낳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 이숙인·이숙과의 관계는 일회에 한정될 뿐 계속하여 인과의 연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숙과가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다른 유위제법과 관계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괴로움은 다음 순간에도 괴로움과 유사한 성격의 결과를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로움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로서, 어떤 또 다른 조건에 의해 절망을 낳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약의 원인이 되기 한다. 즉 이숙인은 오로지 선·불선의 유루법에만 적용되는 것이라며, 이숙과는 무기로서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또 다른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제법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법과 관계하여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소극적으로 관계하는 경우도 있다. 유부에서는 상식적으로 보면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것, 예컨대 달과 책상 사이에도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하였다. 달은 책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생기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원인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를 능작인能作因이라고 하고, 그 결과를 증상과增上果라고 하였다.
능작(karana)은 '조작한다' '낳는다', 증상(adhipati)은 '군주' '뛰어난 힘'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이 같은 뜻으로 본다면 앞의 다섯 가지 원인도 역시 능작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별도의 명칭이 있기 때문에 능작인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능작인은 별도의 명칭이 없으며, 총명이 바로 별명이다.)
곧 일체의 유위법은 그 자신을 제외한 유위와 무위의 다른 모든 존재를 능작인으로 삼는다. 따라서 능작인은 적용범위가 가장 넓다. 이처럼 하나의 존재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제외한 일체의 존재와 관계해야 한다고 하는 사상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4연緣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이상과 같은 6인설은 유부 특유의 이론으로, 원래 ≪증일아함경≫ <증육경增六經>에서 설해진 것이지만 산일散逸되어 전승되지 않던 것을 가다연니자가 ≪발지론≫을 편찬하면서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인연因緣·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의 4연설은 대승불교에서도 채용하고 있는 학설로서, 그 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인과설이다.
앞에서 '인'은 직접적인 원인을, '연'은 간접적인 원인을 의미한다고 하였지만, 인이든 연이든 결과에 대해 원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6인과 4연은 사실상 원인을 다른 측면에서 분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6인설은 4연 중의 인연을 구유인·상응인·동류인·변행인·이숙인으로 나눈 것이고, 4연설은 5인 중의 능작인을 증상연·등무간연·소연연으로 나눈 것이다.
인연因緣이란 '원인으로서의 조건'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일체의 유위법을 낳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앞의 6인 중 결과 생기를 방해하지 않는 소극적인 원인인 능작인만이 제외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사용과·등류과·이숙과로 분류된다. 이런 까닭에 6인설은 다만 이 같은 유위 4과를 보다 분명하게 규정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고 ≪대배바사론≫에서는 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능작인으로 분류되는 등무간연과 소연연, 그리고 증상연은 무엇인가? 앞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반드시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서로는 서로를 상응인으로 삼아 일어난다고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 찰나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를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현재찰나 작용하고 있는 6식은 전 찰나의 마음인 의근意根을 등무간연으로 삼아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등무간'이란 전 찰나의 마음과 후 찰나의 마음 사이에 또 다른 마음이 개입되지 않는 시간적 상태를 말한다. 강물은 항상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흘러 내려간 강물에 따라 새로운 강물이 흘러 내려오고 다시 흘러 내려가듯이, 마음 역시 전 찰나의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 나타남과 동시에 다시 후 찰나 마음의 원인이 되어 그것을 낳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찰나찰나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러한 인과관계의 연쇄를 심상속心相續, 줄여서 '상속'이라고 하는데, 일생에 있어서는 이 같은 마음의 상속을 인간존재의 주체 또는 자아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 같은 인과관계는 일견 앞서 언급한 동류인·등류과의 관계와 유사하지만, 마음의 인과는 반드시 동류로서 상속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순간 증오하는 마음으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체의 마음 중 더 이상 후 찰나의 마음을 낳지 않는 아라한의 최후찰나 마음(즉 반열반에 들기 직전의 마음)은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
또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소연所緣을 통해 나타난다. 여기서 소연이란 마음이 생겨나는데 조건이 되는 대상이라는 뜻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어떤 대상 없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법은 마음의 소연연이 된다. 설혹 어떤 법이 현재 마음의 소연이 되지 않을지라도 소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체법은 소연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어떤 마음과 동일찰나에 함께 존재하는 마음의 작용과 4상相, 득得 등은 소연이 되지 않는데, 만약 그것들이 소연이 될 경우 동일찰나에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법을 포함한 일체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일체의 유위법에 대해 증상연增上緣이 된다. 증상연은 바로 능작인이기 때문에 그 범위가 소연연보다 넓으며, 그래서 증상연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세 가지 연의 결과를 모두 증상과라고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젓처럼 증상연을 제외한 등무간연과 소연연은 능작인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래서 후대 주석가들은 본래의 능작인을 부장不障(혹은 無力) 능작인으로, 등무간연 등을 여력與力(혹은 有力) 능작인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3) 유위 4과와 이계과離繫果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이미 설명한 것처럼 6인·4연에 의해 낳아진 결과의 유형에는 사용士用·등류等流·이숙異熟·증상增上의 네 가지가 있는데, 이는 유위의 경험세계에 속한 인과관계이다. 다시 한 번 요약하면, 상용과는 상응인과 구유인의 결과로서 원인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며, 등류과는 변행인과 동류인의 결과로서 원인과 무간 혹은 계시이면서 유사한 성격을 지니 것이다. 그리고 이숙과는 유루의 선악업의 결과(이숙인)이고, 증상과는 그 적용범위가 가장 넓은 능작인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무위법인 택멸(열반)은 무엇의 결과이고 무엇의 원인이 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인과관계는 생성 소멸하는 유위세계에 한정되며, 상주常住 불생법인 무제약의 열반 즉 택멸무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열반은 유위제법이 인연화합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택멸무위는 분멸 실천 수행도에 의해 행겨난 결과로서 당연히 그 원인을 가질 것이고, 또한 다른 법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광의의 원인 즉 부장不障 능작인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니다? 혹은 마음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소연연 즉 여력與力 능작인이 된다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택멸무위는 유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경지로서, 이계과離繫果이기도 하고, 또한 능작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결과가 아니고, 결과를 낳지 안는 원인이라고 하였다. 즉 택멸무위는 물론 무루성도聖道에 의해 획득된 결과이지만, 이 때 도의 작용은 다만 택멸의 '득'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계과는 무루도에 의해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증득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 무루도는 택멸이계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지라도, 택멸은 도의 결과라고 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택멸무위는 삼세의 제약에서 벗어난 존재로서 결과를 넣는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결과(증상과)를 낳지 않는 능작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논의는 한편으로 볼 때 궁색한 변명 같지만, 택멸의 객관적 실재성을 인정하는 유부로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만약 그 것이 온갖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결과라면 무상한 것이 되어야할 것이며, 또한 다만 인식의 대상(소연연)으로서 알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무루의 지혜를 일으킨 성자들만이 각기 개별적으로 내증內證한 것으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인과관계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유위의 세계는 수많은 존재들의 다양한 인과관계 상에서 나타난다. 다시 '분노하는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분노하는 마음은 온갖 작용인 상응인과 생상 등의 구유인에의한 사용과이기도 하고, 염오한 5온의 동류인과 무명 등의 변행인에 의한 등류과이기도 하며, 그 밖의 일체 제법인 능작인에 의한 증상과이기도 하다. 또한 전 찰나 마음인 등무간연과 그 대상인 소연연, 그리고 그 밖의 일체법인 증상연에 의한 증상과이기도 하며, 온갖 인연에 의한 상용과이자 등류과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 같은 분노의 마음은 또 다른 존재에 대해 상응인이 되기도 하고 구유인이 되기도 하며, 등무간연과 소연연과 증상연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인과관계의 사슬이 무수한 법 사이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 유위의 세계를 성립시킨다. 그같이 찰나생멸한는 제법의 인연에 의해 드러난 유위의 세계는 무상하며, 괴로우며, 실체성이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범부의 눈에 비친 자신의 세계는 인과의 사슬로 얽힌 유전 변천하는 무상의 세계가 아니라 단일하고도 굳건한 불변의 세계로 투영된다. 그러기에 거기에 집착하고, 또한 절망한다. 그것은 미혹의 세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같은 유위세계의 실상을 참답게 관찰함으로써 인과의 사슬을 끊고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는 깨달음의 세계도 있다.
이제 우리들의 미혹한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며 무엇으로써 존재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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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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