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
| 금강삼매경론 상권 |
| 신라국(新羅國) 사문(沙門) 원효(元曉) 지음 |
| 이인혜 번역 |
| [論] 이 경은 간략히 네 부문으로 나뉜다. 처음은 대의(大意)에 관한 서술이고, 다음은 경의 종지[宗]에 대한 설명이며, 셋째는 제목에 대한 해석이며, 넷째는 본문에 대한 풀이이다. |
| ① 대의를 서술함[述大意] |
| 일심(-心)의 근원은 유(有)·무(無)를 떠나 독자적으로 청정하며 3공(空)1)의 바다는 진(眞)·속(俗)을 융합하여 밝고 고요하다. |
| 밝고 고요하다는 것은 둘을 융합했다고 해서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니요, 독자적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양 극[邊]을 여의었다해서 중간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중간도 아니며 양극도 여의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법[不有之法]이라 해서 무(無)에 머무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지 않다[不無之相]해서 유(有)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
|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하였으니, 진(眞) 아닌 사(事)가 애당초 속(俗)이었던 적이 없으며, 속(俗) 아닌 이(理)가 처음부터 진(眞)이었던 적이 없다. 둘을 융합하였으되 하나도 아니니 진·속의 성품은 그것대로 다 성립하고, 염(染)·정(淨)의 모양은 그것대로 다 갖추어진다. 양 극[邊]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니므로 유·무의 법(法)이 제각각 다 이루어지고 시(是)·비(非)의 뜻이 제각각 다 완전하다. |
| 1) 아공(我空)·법공(法空)·아법구공(我法俱空)을 3공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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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깨뜨림[破]이 없되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며, 세움[立]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가히 아무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이며,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러한 것[不然之大然]2)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이 이 경에서 밝히려는 큰 의도[大意]이다. 참으로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런 것이기 때문에 경의 말씀[能說]이 묘하게도 진리에 들어맞고, 없는 이치[無理]이면서도 지극한 이치이므로 경의 취지[所詮]가 시공(時空)의 제약을 넘어선 것이다. |
|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금강삼매(金剛三昧)’라 이름하고, 세우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대승을 망라한 경[攝大乘經]’이라 이름하며, 모든 취지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한량없는 뜻을 지닌 종[無量義宗]’이라고도 이름한다. 이러한 의미들 중에서 우선 하나를 들어 제목을 붙였으므로 『금강삼매경』이라고 말한다. |
| ② 경의 종지를 설명함[辨經宗] |
| 이 경의 종요(宗要)를 나누어서 말할 수도 있고 종합해서 말할 수도 있다. 종합해서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요점이 되며, 나누어서 말하면 열 가지 중층적인 법문[十重法門]이 종취[宗言]가 된다. |
| 관행(觀行)에서 관(觀)이란 횡적인 논리로서 대상[境]과 지혜[智]에 공통되는 것이고, 행(行)은 종적인 논리[竪望]로서 인과(因果)에 걸치는 것이다. 과(果)는 다섯 가지 법[五法]이3) 원만함을 말하고, 인(因)은 이른바 6행(行)4)이 다 갖추어짐을 말한다. 지(智)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하고, 경(境)이란 즉, 진(眞)과 속(俗)이 다 없어짐을 말한다. 진과 속이 모두 없어진다 해서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각과 시각이 있다 해서 생겨남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생겨남이 없는 행이라 관념이 없는 데[無相]에 그 |
| 2)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인 도리(道理), 그렇지 않지만 큰 의미에서 그렇고, 자질구레한 특정한 진리가 아니지만 모든 것에 다 통하는 진리다. |
| 3) 진여법신(眞如法身)과 대원경지(大圓鏡智)·평등성지(平等性智)·묘관찰지(妙觀察智)·성소작지(成所作智). |
| 4) 10신(信)·10주(住)·10행(行)·10회향(回向)·10지(地)·등각(等覺) 등 수도의 계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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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윽하게 합하게 되며, 관념이 없는 법이라 본래적인 이익을 순조롭게 이룬다. ‘이익[利]’에다가 기왕에 ‘본래적[本]’이라는 말을 붙였을 때는 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실제(實際)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제(際)’에다가 기왕에 ‘실답다[實]’는 말을 썼을 때는 그것이 자성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제(眞際) 또한 공(空)하다. 모든 부처님들도 여기에 들어 있으며 모든 보살도 따라서 여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간다’ 하며, 이것이 바로 6품(品)의 대의(大意)이다. |
| 관찰해서 들어가는 문[觀門]에서, 믿고 이해하는 첫 단계로부터 등각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6행(行)을 세운다. 이 6행이 만족하게 성취될 때 9식(識)5)이 전환하여 때 없는 의식[無垢識]을 드러내어 깨끗한 진리의 세계[淨法界]를 이루며, 나머지 8식(識)6)을 전환시켜 4지(智)7)를 이룬다. 또한 5법(法)이 이미 원만해졌으므로 3신(身)8)을 구비한다. |
| 이와 같은 원인과 결과는 대상과 지혜를 떠나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과 지혜는 둘이 아니고 오직 일미(一味)일 뿐이다. 그러므로 일미의 관행(觀行)을 이 경의 종취[宗]로 삼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대승의 법상(法相)이 없고, 한량없는 취지 중에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여기까지가 하나의 관(觀)에 대해 종합해서 논(論)한 것이다. |
| 이를 다시 열 가지 문[十門]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종취로 삼는 것을 일문(一門)에서부터 하나씩 늘여 10문(門)까지 설명한다는 것이다. |
| 그 ‘일문(一門)’이란 무엇인가? 일심(一心) 가운데 일념(一念)이 움직여 하나의 실다운 것[一實]에 순응하여, 하나의 행[一行]을 닦고 일승(一乘)에 들어가 하나의 도[一道]에 머무르며, 하나의 각[一覺]을 사용해서 일미(一味)임을 깨닫는 것이다. |
| ‘2문(門)’이란 무엇인가? 두 언덕[二岸]9)에 머무르지 않고서, 두 무리[二 |
| 5) 제9 백정식(白淨識)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만 갖추어진 식이다. |
| 6) 전5식(前五識)·제6식(識)·제7식(識)·제8식(識). |
| 7) 성소작지(成所作智)·묘관찰지(妙觀察智)·평등성지(平等性智)·대원경지(大圓鏡智). |
| 8)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으로 부처님의 세 가지 몸이다. |
| 9) 열반(涅槃)과 생사(生死)의 언덕으로 전자를 피안(彼岸), 후자를 차안(此岸)이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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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衆]10)를 버리고 두 가지 아집[二我]11)에 집착하지 않고, 양 극단[二邊]을 떠나 2공(空)12)의 이치를 통달하여 2승(乘)13)에 떨어지지 않고 두 가지 진리[二諦]14)를 융화하여 두 가지 깨우쳐 들어가는 길[二入]15)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
| ‘3문(門)’이란 스스로 3불(佛)16)에 귀의하여 3계(戒)17)를 받으며,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18)에 순응하여 3해탈(解脫)19)과 등각의 세 경지[等覺三地]20)와 묘각삼신(妙覺三身)21)을 얻고 3공취(空聚)22)에 들어가 3유심(有心)을 없애는 것이다. |
| ‘4문(門)’이란 4정근(正勤)23)을 닦고 4신족(身足)24)에 들어가 네 가지 큰 연력[四大緣力]25)에 의지하여 4의(儀)26)로 항상 이롭게 하고 4선(禪)27)을 벗어나며 네 가지 오류[四謗]28)를 멀리 여의어서 네 가지 큰 서원 |
| 10) 범부중(凡夫衆)과 소승중(小乘衆). |
| 11) 인아(人我)와 법아(法我). |
| 12)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
| 13)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
| 14)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
| 15) 이입(理入)과 행입(行入). |
| 16) 법신불(法身佛)·보신불(報身佛)·화신불(化身佛). |
| 17) 섭율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섭중생계(攝衆生戒)로서 3취정계(三聚淨戒)라고도 함. |
| 18) 속제(俗諦)·진제(眞諦)·제일의제(第一義諦). |
| 19) 허공해탈(虛空解脫)·금강해탈(金剛解說)·반야해탈(般若解脫). 이 경의 독특한 법수이다. |
| 20) 백겁지(百劫地)·천겁지(天劫地)·만겁지(萬劫地). |
| 21) 법신·보신·화신. |
| 22) 공상(空相)의 공(空)·공공(空空)의 공(空)·소공(所空)의 공(空). |
| 23) 첫째, 이미 생긴 악을 없애려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 둘째,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미리 방지하려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 셋째, 이미 생긴 선을 더욱 더 자라게 하려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 넷째,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부지런히 행하는 것. |
| 24) 선정에 들어가는 수단으로 첫째 욕(欲), 둘째 정진(精進), 셋째 심념(心念), 넷째 사유(思惟)를 말함. |
| 25) 작택멸력취연(作擇滅力取緣)·본리정근력소집기연(本利淨根力所集起緣)·본혜대비력연(本慧大悲力緣)·일각통지력연(一覺通智力緣). |
| 26) 행(行)·주(住)·좌(坐)·와(臥). |
| 27)유심유사정(有尋有伺定)·무심유사정(無尋唯伺定)·무심무사정(無尋無情定)·사념법사정(捨念法事定)을 말함. |
| 28) 인과론에서의 네 가지 주장. 자기 원인에 의해 생함[自生], 다른 원인에 의해 생함[他生], 자와 타가 함께 하는 데서 생함[共生], 원인 없이 생함[無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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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四弘地] 가운데서 네 가지 지혜[四智]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
| ‘5문(門)’이란 5음(陰)이 생함에 따라 50악(惡)이 갖추어지기 때문에 다섯 가지 근[五根]29)을 심고 5력(力)30)을 길러 다섯 가지 공의 바다[五空海]31)를 건너고, 오등위(五等位)32)에 서서 다섯 가지 청정한 법[五淨法]을 얻고 다섯 갈래의 중생들[五道生]33)을 제도하는 것이다. |
| 육·칠·팔·구 등의 문이란 무엇인가. 6바라밀[六度]을 두루 닦아 여섯 경계[六入]에 다시는 빠지지 않게 하며 7각분(覺分)34)을 행하여 일곱 가지 장애되는 마음[七義科]35)을 끊으면 8식(識)36)의 바다가 밝아져서 무구식[無垢識]인 9식(識)의 흐름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
| 수행의 처음 단계인 10신위(信位)로부터 보살의 열 가지 경지[十地]에 이르도록 온갖 행(行)이 갖추어지고 모든 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가지 문(門)이 이 경의 종지(宗旨)가 된다. 경문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해당 문구가 나올 때 설명하겠다. |
| 그러나 이 뒤에서 말하는 아홉 가지 문이 모두 한 가지 문에 포섭되며 한 |
| 29) 다섯 가지 무루근(無漏根). 신근(信根)·정진근(精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 |
| 30)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는 다섯 가지의 힘으로, 정력(定力)·통력(通力)·차식력(借識力)·원력(願力)·법위덕력(法威德力). |
| 31)인공(人空)·법공(法空)·반야바라밀다공(般若波羅蜜多空)·기세계공(器世界空)·아리야식공(阿梨耶識空)·시방상공(十方相空)을 말함. |
| 32) 수행상의 다섯 가지 계위. 첫째 자량위(資糧位), 둘째 가행위(加行位), 셋째 통달위(通達位), 넷째 수습위(修習位), 다섯째 구경위(究竟位). |
| 33) 5취(趣)라고도 하며, 지옥·아귀·축생·인도·천도를 말한다. |
| 34) 불도를 수행하는 지혜로써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살펴서 골라내는 일곱 가지. 첫째 택법각분(擇法覺分), 둘째 정진각분(精進覺分), 셋째 회각분(喜覺分), 넷째 제각분(除覺分), 다섯째 사각분(捨覺分), 여섯째 정각분(定覺分), 일곱째 염각분(念覺分). 만일 마음이 혼침하면 택법각분·정진각분·희각분으로 마음을 일깨우고, 마음이 들떠서 흔들리면 제각분·사각분·정각분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
| 35) 의(義)는 온(蘊)·처(處)·계(界) 등. 과(科)는 본식(本識)을 말함. 「여래장품(如來藏品)」 참고. |
| 36) 전5식에 제6 의식·제7 말나식·제8 아뢰야식을 합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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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문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하나의 관(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펼쳐 보여도 하나인 문을 더 보태는 것이 아니요, 종합해 보아도 열 가지 문에서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 이 경의 종요(宗要)가 된다. |
| ③ 제목을 해석함[釋題目] |
| 이 경의 제목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 하고, 둘은 금강삼매(金剛三昧), 셋은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한다. 처음과 나중의 두 이름은 다음에 해석할 것이고, 우선 중간의 제목을 해석하겠는데, 그 까닭은 이 이름 하나만을 이 경의 첫머리 제목으로 썼기 때문이다. |
| 그 가운데 금강이라는 말과 삼매라는 말의 두 가지가 있으므로, 먼저 금강의 뜻을 해석하고 다음에 삼매의 뜻을 해석하겠다. 금강이라는 말에 다시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먼저 말뜻을 해석하고[先釋] 다음에는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겠다[後簡]. |
| 금강이란 사물에 비유해서 말한 것인데, 견실(堅實)함으로 그 바탕을 삼고, 깨뜨릴 수 있는 힘으로 공용(功用)을 삼는다. 금강삼매(金剛三昧)라는 뜻도 이와 같아서 실제(實際)로 체(體)를 삼고, 뚫고 꿰뚫는 것으로 그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체를 삼는다 함은 이치를 증명하고 근원에 끝까지 다다른다[窮究]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에서 말하기를 ‘법을 증득하는 진실한 정(定)이다’ 라고 하였다. |
| 뚫고 꿰뚫는 것으로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모든 의혹을 깨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선정(禪定)을 꿰뚫는 것이다. 의혹을 깨뜨린다 함은 설명을 통하여 의심을 끊기 때문이니, 아래 본문에서 ‘결정코 의심과 후회를 끊는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정을 꿰뚫는다 함은 이 (금강의) 선정이 다른 삼매(三昧)들을 유용하게 하기 때문이니, 마치 값진 구슬들을 꿰뚫어서 유용하게 쓰게 하는 것과 같다. |
| 또한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금강삼매라 하는가? 이 삼매에 머물면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 했는데, 그 논(論)37)에서 해석하기를 “금강삼매는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 없는 금강석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삼 |
| 37) 『대품반야경』의 주석인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가리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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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도 모든 법 가운 데 통달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모든 삼매들을 다 유용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자거[硨磲]·마노[碼𥓲]·유리(瑠璃)는 오직 금강석만이 뚫고 들어갈[穿入]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대품경』에서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고 했는데 이 말은 꿰뚫는다[穿]는 뜻이다. 그 논에서 뚫고 들어간다 함은 경에서 깨뜨린다 하는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즉, 모든 삼매가 다 자성(自性)이 없음을 통달하여 저들 여러 가지 삼매로 하여금 스스로의 집착에서 떠나게 할 수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걸림 없이 자재(自在)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금강삼매’라는 말뜻을 해석하였다. |
| 다음으로,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簡別]에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정(定)과 혜(慧)로 간별하겠다. |
| [문] 금강반야와 금강삼매를 모두 금강이라고 하는데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
| [답] 전자는 지혜요, 후자는 선정(定)이니 이것으로 차별이 된다. 또한 금강반야는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데 반해, 금강삼매는 그 위상이 과지(果地)에만 해당한다. 또 반야금강(般若金剛)은 세 가지 뜻을 갖추고 있는데 그 체(體)의 견고함, 그 작용의 날카로움, 그리고 특성의 넓고 좁음이다. 그러나 삼매금강(三昧金剛)은 이 중에 견고함과 날카로움만 취한 것이므로 이렇게 차별이 된다. |
| 다음은 그밖에 다른 선정과 구별하겠는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금강삼매(金剛三昧)요, 둘째는 금강륜삼매(金剛輪三昧)이며, 셋째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이다. |
| 『대품경』38)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금강륜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삼매를 부분적으로 간직할 수 있다. 여금강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법을 꿰뚫어 통달했어도 스스로 통달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저 논(論)에서 문답의 형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
| 38) 『대품반야경』을 말함. 정식 경명은 『마하반야바라밀경』이라 함. 2만 5천의 게송으로 되어 있으며, 28·30, 또 40권으로 된 한역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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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세 가지 삼매를 어째서 모두 다 금강이라 말하는가? |
| [답] 처음에는 금강이라고만 말했고, 중간에는 금강륜(金剛輪)이라고 말했으며, 뒤에는 여금강(如金剛)이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금강삼매라 함은 모든 법을 꿰뚫었어도 꿰뚫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고 하셨고, “금강삼매는 모든 삼매를 통달할 수 있다” 하셨으며, “금강륜삼매는 모든 삼매의 바퀴[三昧輪]를 지닐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 모두가 부처님 스스로 하신 말씀이다. |
| 논(대지도론)에서 이를 해석한 자의 의도는 이렇다. |
| “‘여금강삼매’는 모든 번뇌와 얽매임을 끊어 다시는 나머지가 없게 한다. 마치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손에 금강을 잡고 아수라의 군대를 부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학인(學人)이 공부해서 마지막에 얻는 마음과 같으니, 이 마음으로부터 점차 세 가지 깨달음인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菩提)를 얻게 되는 것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는 모든 법을 깨뜨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 것이니, 마치 진짜 금강이 모든 산을 깨뜨려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금강륜(金剛輪)’이란 “모든 불법(佛法)을 깨뜨려 막힐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음을 뜻한다.” |
| 내 생각에는, 여기서 모든 불법을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전륜성왕이 윤보(輸寶)로 모든 왕들을 쳐부수어 다 복종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앞에서 말한 다른 두 가지 금강과는 그 뜻이 다르다. |
| 어떻게 다른가? 다섯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비유가 다르다[喩別]. 이른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는 군대를 쳐부순다는 비유를 사용했고 금강삼매는 산을 깨뜨린다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
| 둘째는 법이 다르다[法別]. 여금강은 번뇌를 깨뜨리고, 금강은 다른 모든 법을 깨뜨린다고 하였다. |
| 셋째는 지위가 다르다[位別]. 전자(여금강)는 아직 배워 익히는 지위[學位]에 해당하고, 후자(금강)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지위[無學位]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 넷째는 이름이 다르다[名別]. 전자의 이름은 여금강삼매이니 다른 곳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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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그저 금강삼매라고만 할 뿐, 여(如)나 유(喩)가 없다. 그 까닭은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있어서 두 가지 정(禪)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인지에는 힘들여 닦아나가는 일[功用]이 있지만 과지에는 공용이 필요치 않으니, 덜고 덜어서[損之又損之] 무위(無爲)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 또한 여금강은 부분적으로 비슷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번뇌만 깨뜨렸을 뿐 나머지 법은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예리하다는 측면에서 금강과 동일함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금강은) 깨뜨리지 못할 사물이 없으니, 삼매의 쓰임도 이와 같아서 깨뜨리지 못할 법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
| 다섯째는 교설이 다르다[敎別]. 이른바 유학위(有學位)의 금강삼매는 『금강삼매본성청정부증불감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에서 설하였고, 무학위(無學位)의 금강삼매는 바로 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에서 설하고 있다. |
| 이제 이 경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정은 모든 법을 깨뜨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금강삼매라 한다. 여섯 가지 해석 가운데 이것은 지업석(持業釋)39)이요, 비유를 취해서 이름한 것은 인근석(隣近釋)40)이다. 이것으로 이 경의 제목을 삼은 것은 의주석(依主釋)41)이니 그것은 정(定)이 중심어가 되기 때문이다. |
| 다음은 두 번째로42) 삼매라는 이름을 해석한 것인데,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석이요, 둘째는 간별이다. |
| 옛 스승이 말씀하기를 “저기에서 쓰는 삼매라는 명칭은 여기 말로는 바른 생각[正思]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 설을 인용하는 이유는 본문의 이치 |
| 39) 인도의 문법에서 복합어를 구성할 때 여섯 가지 해석방법이 있어 이를 육리합석(六離合釋)이라고 말한다. 지업석은 앞의 말이 뒷말의 형용사, 또는 부사 구실을 하는 경우이다. |
| 40) 비슷한 것은 비유를 들어서 뒷말을 지적하는 복합어이다. |
| 41) 두 개 이상의 말이 복합되어 있을 경우, 뒷말이 주(主)가 되어 앞말이 그에 의존하는[伴] 경우이다. 금강삼매의 경우, 주(主)는 삼매이고 반(伴)이 금강이다. |
| 42) 경의 제목을 두 대목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중에, 첫 번째는 금강이라는 이름을 해석하였고 이제부터는 삼매에 관한 해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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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義]와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定)에 들었을 때, 대상이 되는 경계를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바른 생각’이라고 이름한다. 『유가론(瑜伽論]』43)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삼마지(三摩地)란 인식하는 대상[所緣]에 대하여 자세히, 그리고 바르게 관찰하여 마음이 한 경계에 집중된 성품[心一境性]을 가리킨다. |
| [문] 정(定)이란 고요함[靜]이어야 하고, 고요하다 함은 한 경계[一境]에 머무름을 뜻하는 것인데, 어떻게 자세히 바르게 생각하고 관찰한다[審正思察]고 말할 수 있는가?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은 마땅히 심사(尋伺)44)인데, 어떻게 정(定)을 설하면서 생각하고 살핀다고 할 수 있는가? |
| [답] 만약 하나의 경계[一境]를 지키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면 흐리멍덩[惛沈]한 채로 경계에 머무르는 것도 정(定)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심사(尋伺)라고 한다면, 삿된 지혜[邪慧]로 사물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심사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思察) 즉 생각하고 통찰한다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삿되고 바른 것에 관계없이 말과 뜻으로 분별하는 것을 사찰(思察)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심사이므로 다만 분별일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올바르게 그리고 명료하게 대상[緣境]을 아는 것에 한해서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한다면, 이 경우는 바르다는 말이 정(定)의 작용[用]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심사는 아니다. 정(定)은 분별과 무분별에 두루 통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핀다는 것을 기준으로 저 심사를 가려내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경계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의 경계에 머물기는 하지만 마음이 혼미하고 어두워서 자세히 살필 수 없다면 이는 흐리멍덩한 것이다. 반대로 하나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은 채로 바르고 자세히 관찰한다면, 이를 정(定)이라 이름할 수 있다. 때문에 생각해서 통찰한다는 점에서 혼침과 구별된다. 그러 |
| 43)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준말이다. 미륵(彌勒)이 짓고, 무착(無着)이 편집해서 당(唐) 현장(玄奘)이 번역한, 백 권으로 된 부파불교시대의 논서이다. |
| 44) 심(尋)은 대강의 이치를 심구(尋求)하는 것이고, 사(伺)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밀하게 분별하고 관찰하는 정신 작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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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므로 마음이 머물러 있거나 또는 옮겨가거나 하는 특성을 가지고 마음이 정(定)에 들었다거나 산란하다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빠른 변론은 비록 빠르게 바뀌어 가지만 그 가운데 정이 있고, 느린 생각은 비록 오랫동안 경계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은 산만한 것이다. |
| 여기서 금강삼매를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다. 거기에는 바르다던가 바르지 못하다던가 하는 관념이 없고, 생각이라고도 할 수 없고 생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만 다만 그릇된 분별과 삿된 생각을 구분하기 위해, 또 아무 생각도 없는 허공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부득이 정사(正思)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상과 같이 삼매라는 이름을 간략히 해석하였다. |
| 다음으로 간별(簡別)을 통해 삼매의 뜻을 밝히는 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여러 가지 이름의 뜻을 하나씩 구별해 보는 것이요, 다음은 여러 가지 이름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간추려 보는 것이다. |
| 정(定)에는 대략 여덟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
| 첫 번째는 삼마혜다(三摩慧多)로서, 여기 말로는 등인(等引)이라 한다. 흐리멍덩한 것[惛沈]과 들떠 있는 것[掉擧]의 치우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등(等)이라 하고, 신통 등의 여러 가지 공덕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인(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등인은 후회 없는 기쁨과 안락에서 끌어내 지기 때문에 등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욕계(欲界)의 정(定)과는 다르다. |
| 두 번째는 삼마지(三摩地)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持)라 한다. 등의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마음을 제어하고 잘 지켜서[護持] 밖으로 치달려서 흩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이름한다. 또한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한다. 예전에는 삼마제(三摩提)라고 했는데, 이것 또한 등지를 뜻하는 말이다. |
| 세 번째는 삼마발제(三摩鉢提)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至)라 한다. 등지(等持) 가운데서 뛰어난 지위[勝位]에 이르게[至] 되기 때문에 등지(等至)라 이름한다. |
| 네 번째는 타연나(駄演那)로서, 여기 말로는 정려(靜慮)라 한다. 고요하게 깊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흐트러진 생각을 진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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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는 선나(禪那), 혹은 지아나(持阿那)라고 했는데 이는 지방이나 습속에 따라 말이 다를 뿐 모두 정려를 가리킨 것이다. |
| 다섯 번째는 사마타(奢摩他)로서, 여기 말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마음을 경계에 멈추게 하므로 지(止)라고 이름한다. |
| 여섯 번째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니, 마음을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게 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심일경성이라 이름한다. 예전에는 일심(-心)이라 했는데 이는 심일경성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
| 일곱 번째는 정(定)이니, 대상을 살펴서 정착하기 때문에 정이라고 이름한다. |
| 여덟 번째는 정사(正思)이니,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
| 어떤 논사는 “삼매(三昧)라는 이름과 삼마제(三摩提)라는 이름은 단지 등지를 뜻하는 것일 뿐 다른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예컨대 『금고경(金鼓經)』에서 열 가지 선정을 설명한 가운데, 앞의 3지(地)에서는 삼마제라 이름하고 뒤의 칠지(七地)에서는 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이름이 만약 같은 등지(等持)의 뜻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름을 고쳐서 앞과 뒤에 각기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이름이 어째서 같지 않은가? 만약 지방이나 습속의 차이 때문이라면 한곳에서 두 가지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르다고 한다해도, 하나의 경에 삼마제(三摩提)와 삼마지(三摩地)라는 말처럼, (하나의 개념에) 두 가지 이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른 것이지 실상은 같은 말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삼매라는 이름과 삼마제라는 이름은 같은 경[本] 속에 있으니 어떻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
| 둘째로 삼매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밝힌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간략하게 네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
| 첫째, 정(定)과 등지(等持)의 두 가지 이름이 가장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에 두루 통하며, 또한 삼계에 통하며 더 나아가서는 욕계(欲界)의 산란한 마음에도 통한다. 6위(位)의 심소(心所)45) 가운 |
| 45) 심왕(心王)에 동시적으로 수반되는 여러 가지 정신 작용을 여섯 가지로 분류한 것. 변행(遍行)·별경(別境)·선(善)·번뇌(煩惱)·수번뇌(隨煩惱)·부정(不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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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다섯 가지 별경[五別境]46) 중에도 삼마지가 있으며, 이것 역시 정(定)이라고 이름한다. |
| 둘째, 심일경성 (心一境性)과 삼매(三昧)라는 두 이름은 다음으로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욕계에는 통하지만 한결같이 산란한 마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주삼매(船舟三昧)와 욕계에 결박된 아홉 가지 마음가짐[心住]의 심일경성 역시 욕계의 방편심에만 통하기 때문이다. |
| 셋째, 삼마혜다(三摩呬多)와 정려(靜慮)라는 두 이름은 좁은 의미가 있다. 욕계의 마음에는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직 가볍고 편안한 마음[輕安]에 들어가는 경지만을 취해서 지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
| 넷째, 삼마발제(三摩跋提)와 사마타(奢摩他)라는 두 이름은 가장 협소한 의미를 가진다. 즉, 정(定)의 경지 안에도 구별이 있기 때문인데, 사마타는 네 가지 지혜로운 수행 가운데 심일경성에 통하지 않고, 삼마발제는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세 삼마지에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넓고 좁은 이름에 대해 대강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세 번째로 제목해석을 마친다. |
| 1. 경서품 (經序品) |
| ④ 과문해석(科文解釋) |
| 글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서분(序分)이고, 둘째는 제2품부터 이어지는 여섯 품까지의 글들이 정설분(正說分)이고, 셋째는 입총지품(入摠持品)으로서, ‘그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하로 두 장 남짓 되는 글이 유통분이다. 또한 서분에도 두 가지 서문[序]이 있으니 통서(通序:모든 경의 서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사항)와 별서(別序:해당 경의 서문에만 있는 사항)이다. |
| 46) 욕(欲)·승해(勝解)·염(念)·정(定)·혜(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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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47) |
|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서 큰 비구승 만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도를 얻었는데, 그 이름은 사리불·대목건련·수보리이니 이들은 아라한이었다. 또 보살마하살 2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그 이름은 해탈보살·심왕보살·무주보살 등이었다. 또 장자(長者) 8만 명과 함께 있었는데, 그 이름은 범행(梵行)장자·대범행(大梵行)장자·수제(樹提)장자 등이요, 또 하늘·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인비인 등 육십만억과 함께 있었다. |
| [論] 통서에는 여섯 가지 일이 들어 있다. 앞의 셋은 직접 들어서 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요, 뒤의 셋은 부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이와 같이[如是]이고, 둘은 내가 들었다[我聞]이며, 셋은 어느 때[一時]이다. 뒤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교주(敎主)요, 둘은 머문 곳이요, 셋은 대중들이다. 그 대중들 속에도 네 가지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 대중이요, 둘은 보살 대중이요, 셋은 장자 대중이요, 넷은 잡다한 무리이다. 그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통설과 같다. |
| [經] 그 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에는 없으나 한국 불교 전서에 있는 원본주이므로 표시해 둔다. 이하 모두 같다]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모든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리행(一味眞實無相無生決定實際本覺利行)이었다. 만약 이 경을 듣고서 네 구절로 된 게송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서 방편을 써서 중생을 교화할 수 있게 되며, 또한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큰 선지식이 될 수 있다. |
| 【論】이 아래는 두 번째 별서(別序)인데,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위의분(威儀分)이고, 둘째는 설경분(說經分)이고, 셋째는 입정분(入定分)이며, 넷째는 중송분(重頌分)이다. 위의분이란, 경에 ‘그 때 존자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라고 한 부분이고, 설경분이란, 경에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 |
| 47) 이 부분은 동국대 영인본과 대정신수대장경에는 원문이 없으나 조선불교회(1919년) 간본에 그 원문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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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말씀하셨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 경의 문세(文勢)는 “그 때 세존께서 사부대중에게 둘러싸여 대승경을 설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무량의(無量義)였다”라고 한 『법화경(法華經)』의 서론과 비슷하다. 그 경[법화경]을 해석한 논에서는 이 경의 이름을 두고 『법화경』의 다른 제목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의도는 그 제목이 본격적인 설법에 앞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서분을 삼은 것이다. 이제 이 경[金剛三昧經]의 글의 형태를 보면 모두 경전을 서술하는 자의 일반적인 서문과 같다. 이에 준하여 볼 때 다른 경을 앞에서 자세히 설하고, 다음에 정(定)에 들고, 정에서 깨어나 다시 『금강삼매경』을 설했을 것이다. 경의 주된 요지를 설한 연후에 경의 이름을 설하였으니, ‘일미진실(一味眞實)…’이라는 이 경의 앞에 자세히 말씀하신 경의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경전의 대의가 비록 같다고 하지만 글 모양[文相]은 다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법문을 자세히 설하여 당시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고, 뒤에서 설한 것은 법문을 요약하여 말세(末世)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설한 자세한 경이 간략한 경의 바탕이 된다. |
| 이 설경분(說經分)의 글 형태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경의 이름에 대한 서언이고 뒤에는 경의 덕에 대한 찬탄이니, ‘만약 이 경을 듣고[若聞]’ 이하가 뒷 부분에 해당한다. |
|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신 다음 가부좌하여 앉으시고 곧 금강삼매에 드시어 몸과 마음에 흔들림이 없으셨다. |
| [論] 이는 세 번째, 입정분(入定分)이다. 경을 설하시기 전에 먼저 선정[定]에 드신 까닭은, 오직 적정(寂靜)한 자만이 법을 깨달을 수 있고 또 설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또한 성현께서 때에 맞게 침묵과 설법을 사용하여 그 두 가지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
|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아가타(阿伽陀)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이 뜻을 밝히기 위하여 게송을 설하였다. |
| [論] 이것은 넷째 중송분(重頌分)이다. 앞에서 설한 일미의 경[一味之經]과 뒤에서 설할 경의 대의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간략한 게송으로써 앞의 자세한 경을 송(頌)하여 뒤에 간략히 경을 일으킨 것이다. 문장의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앞은 서언(序言)이고 뒤는 게송이니, 이는 경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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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으로써 뒤의 게송을 일으킨 것이다. |
| 아가타(阿伽陀)란 여기 말로는 무거(無去), 혹은 멸거(滅去)라는 뜻이다. 이는 약(藥)의 이름으로서 모든 병을 남김없이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무거’라고 한다. 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의 모든 번뇌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약 이름을 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
|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마지막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앞의 일곱 수 게송에도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세 게송은 전체를 밝힌 것이고, 네 게송은 따로 드러낸 것이다. |
| [經] 큰 자비로 가득하신 세존이시여. |
| 지혜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도다. |
|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려 |
| 한 가지 진실한 이치를 설하셨는데 |
| 모두 일미의 도(道)로써 하고 |
| 끝내 소승으로써 하지 않으셨네. |
| 설하신 뜻[義]과 맛[味]과 곳[處]은 |
| 모두 다 부실(不實)함을 떠나서 |
| 모든 부처님의 지혜로운 경지에 들어가 |
| 결정코 참 실제(實際)에 들어갔네. |
| 듣는 자가 모두 세간을 벗어나 |
| 해탈치 못함이 없으리. |
| [論] 총괄적으로 위의 세 게송을 밝혀보면 네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 두 구절은 말씀하신 이의 덕을 찬탄한 것이고, 둘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도구가 되는 교설[能詮敎]을 찬탄한 것이며, 셋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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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所詮義]을 찬탄한 것이고, 넷째 두 구절은 가르침의 훌륭한 이익을 찬탄한 것이다. |
| 두 번째 송 중에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한 것은 한마음[一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심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문이 오직 하나의 진실[一實]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하였다. |
| ‘일미의 도[一味道]’란 유일한 승[一乘]을 말한다. 나머지 글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
| [經]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들께서 |
| 모두 다 중생을 제도하려고 |
| 못 사람들을 위해 넓고 깊게 물어서 |
| 법의 적멸한 특성을 알게 하여 |
| 결정적인 곳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 |
| [論] 이 아래로 네 게송은 문답을 따로 찬탄한 것이다. 위의 다섯 구절은 물음이 넓고 깊어서 적멸을 알아 실제(實際)에 들어가게 함을 찬탄한 것이다. |
| [經] 여래의 지혜 방편으로 |
| 실제에 들도록 설하시니 |
| 모두 다 일승만을 따르기에 |
| 다른 잡다한 맛이 없다네. |
| 마치 한 차례 비가 적셔주어 |
| 온갖 풀이 다 무성해지듯이 |
| 각기 다른 성질에 따라서 |
| 한 맛[一味]의 법으로 적셔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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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 모든 것에 충만케 하니 |
| 저 한 차례 비가 적셔주듯이 |
| 보리(菩提)의 싹 모두 자라게 하네.” |
| [論] 이 둘째 부분은 부처님의 답에 훌륭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한 것이다. 그 중에 법(法)·유(喩)·합(合)의 셋이 있으니 차례대로 보면 네 구절·두 구절 ·다섯 구절이 그에 해당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 [經] 금강의 맛[味:다른 본에는 昧로 되어 있다]에 들어갔으니 |
| 법과 진실한 선정을 증득한 것이라 |
| 결정코 의심과 뉘우침을 끊으니 |
| 한 법에서 도장 찍혀 나온 듯하네. |
| [論] 이는 둘째로 입정하심을 노래한 것이다.48) 위의 반은 앞에서 입정한 것을 노래하고, 뒤의 반은 뒤의 설법 일으킴을 노래한 것이다. |
| 뒤에 설하신 교리에 두 가지 훌륭한 힘[勝能]이 있다. 하나는 마치 금강이 모든 것을 파괴하듯이, 결단코 의혹과 뉘우침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마치 금강이 파괴되지 않듯이, 일승(一乘)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아래 반의 두 구절은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냈다. 이상 서분의 글이 끝났다. |
|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앞 6품은 관행을 각각 나타낸 것[別顯觀行]이요, 끝의 총지 일품은 의심을 통틀어 없애는 것[總遣疑情]이다. |
| 이 별현은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
| 첫째는 무상법품(無相法品)으로서 무상관(無相觀)을 밝힌 것이요, 둘째는 무생행품(無生行品)으로서 무생행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본각리품(本覺利品)으로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는 입 |
| 48) 여덟 수의 게송을 두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이제까지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이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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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품(入寶際品)으로서 허(虛)에서 실(實)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진성공품(眞性空品)으로서 모든 행이 참된 성품인 공(空)에서 나왔음을 밝힌 것이며, 여섯째는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서 무량한 문[無量門]으로 여래장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문(門)으로 관(觀)과 행(行)이 두루 다 포괄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
| 모든 망상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유전(流轉)하게 된 것은 단지 형상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병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흐름을 거슬러 근원에 돌아가고자 하면 먼저 모든 형상이 실체가 아님을 알게 하여 이를 없애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무상법(無相法)을 관해야 함을 밝힌 것이다. |
| 비록 모든 형상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할지라도 관하는 마음을 남겨 두면 관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서 본각(本覺)에 계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없앨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둘째로 무생행(無生行)을 밝혔다. |
| 이미 무생을 행하면 바야흐로 본각에 계합하게 되니, 이에 의지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로움을 얻게 하기 때문에 셋째로 본각리(本覺利)의 문(門)을 밝혔다. |
| 본각에 의지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은 허망함으로부터 실제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넷째로 실제에 들어감[入實際]을 밝혔다. |
| 안으로의 행은 형상도 없고 일어남도 없으며, 밖으로의 교화는 본각의 이로움을 써서 실제에 들어가게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로움으로 온갖 행이 다 갖추어지게 되는데, 이는 참된 성품에서 나와 모두 진정한 공에 순응하나니 다섯째로 참된 성품인 공[眞性空]을 밝혔다. |
| 이 참된 성품에 의해서 온갖 행이 구비되어 여래장 일미의 근원[如來藏一味之源]에 들어가기 때문에 여섯째로 여래장(如來藏)49)을 밝혔다. |
|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고 나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없다. 지어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할 바도 없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 길을 설하여 대승을 다 거두는 것이다. |
| 한편 이 여섯 품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이른바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 |
| 49) 미계 (迷界)에 있는 진여(眞如) 즉 미계의 중생과 사물이 모두 진여와 여래의 덕성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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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관의 대상이 되는 법[所觀法]을 보인 것인데, 그 법이란 이른바 일심 (一心)인 여래장의 체(體)이다. |
|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은 관하는 자의 행[能觀行]을 밝힌 것인데, 이른바 6행(行)이라고 하는 무분별관(無分別觀)이다. |
| 셋째 본각리품(本覺利品)은 일심(一心) 가운데 생멸문(生滅門)을 나타낸 것이다. |
| 넷째로 입실제품(入實際品)은 일심 가운데 진여문(眞如門)을 나타낸 것이다. |
|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한꺼번에 떠나되 그 두 가지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
|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은 여러 가지 문을 거두어 들여 모두 일미임을 보인 것이다. |
| 이처럼 이중(二重)의 6문(門)으로서 대승의 뜻을 남김없이 두루 포섭하였다. |
| 그런데 이 6품(品)은 세 문으로 간추려질 수 있다. 즉 앞의 두 품[無相法品·無生行品]은 관(觀)과 행(行)의 시작과 끝을 포섭한 것이고, 다음의 두 품[本覺利品·入實際品]은 교화의 근본과 지말(枝末)을 밝힌 것이며, 마지막 두 품[眞性空品·如來藏品]은 원인을 포섭해서 결과를 이룬 것을 보인 것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두 품은 형상을 버리고 근본에 돌아가는 것이고, 중간의 두 품은 근본으로부터 참된 행(行)을 일으키는 것이며, 마지막 두 품은 근본에 돌아가는 것과 근본으로부터 행을 일으키는 두 가지를 함께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둘씩 합쳐놓은 세 가지로써 대승(大乘)의 뜻을 모두 포섭한다. |
| 이 6품은 또 두 가지 문(門)으로 요약된다. 형상과 생함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본각(本覺)의 이로움이요, 실제와 참된 공은 여래장이다.50)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문(세 가지 품)은 허망한 것을 버려서 바른 인(因)을 나타낸 것이고, 뒤의 문은 참된 것을 드러내어 과(果)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
| 50) 무상법품과 무생행품은 본각리품에 들어가고, 입실제품과 진성공품은 여래장품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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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두 문으로 역시 대승을 두루 포섭한다. |
| 이 6품을 또 오로지 일미(一味)로 볼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형상과 일어남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본각이라고 하지만 근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고, 실제라고 하는 것도 그 테두리를 한정할 수 없으며, 참된 성품이라고 하여도 그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여래장의 성품인들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기에 「여래장품」에서 “이 식[是識]은 항상 적멸하고, 적멸하다는 생각마저도 적멸한 것이다”라고 했다. 「총지품(總持品)」에서도 “제7식과 전5식이 발생하지 않고[七五不生],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九相]도 공해서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얻을 수 없는 이 일미(一味)가 이 경의 근본(宗)이며 요지가 된다. 다만 얻어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슨 문이든지 열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무량한 뜻을 지닌 근본이 된다. 사실 일미(一味)이기는 하지만, 여섯 가지 문[六門]을 열어 놓는 까닭에 이 여섯에 의하여 과문(科文)을 나누어 해석하였다. |
| 먼저 품명에 대하여 해석하겠다. ‘무상’이라고 한 것은 무상관(無相觀)으로, 모든 관념[諸相]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다음에 ‘법(法)’이라고 한 것은 관찰할 법[所觀法]으로서, 일심법을 의미한다. ‘무상관’이란 것은 먼저 품(品)전체를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첫 분[第一分]의 뜻이며, ‘소관법’이란 뒤에 6문(門) 가운데 첫 문(第一門)의 법이다. 여기 첫 품에서는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내므로 ‘무상법품’이라고 부른다. |
| 2. 무상법품(無相法品) |
| [經] 그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께서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
| [論] 이 일품[無相法品]의 글을 세 부문으로 나누면, 첫째는 정에서 나오심을 밝히는 부분[出定分]이고, 다음은 설명을 일으키는 부분[起說分]이고, 끝으로 이익을 얻음을 밝히는 부분[得益分]이다. 처음과 끝 두 부분은 경전을 기술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서문이요, 둘째 부분이 본격적인 부처님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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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씀이다. |
| 첫째 부분[初分]에서는 세 가지 성취를 나타낸다. 첫째는 설법의 때가 성취되었음을 밝히는 것인데 경에 ‘그 때[爾時]’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설법의 주인이 성취되었음을 드러내는데 경에 ‘존자(尊者)’라고 한 것이다. 다섯 가지에 원만히 통달하셔서51) 세상의 존경을 받는 분이며 매우 심오한 법을 이치에 맞도록 설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재함을 성취했음[自在成就]을 밝힌 것이니 경에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 것이다. 여래께서 선정에 들어 계실 때는 아무것도 놀라게 하거나 깨울 수 없고, 선정에 머무름과 나오심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
| [經]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法相)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다.” |
| [論] 이 이하는 (「무상법품」을 세 부문으로 나눈 가운데) 둘째로 본격적인 부처님의 말씀이 나오는 부분이니, 이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장행(長行)52)이고, 둘째는 중송(重頌)53)이다. 장행 중에도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간략히 표방하는 부분[略標分]이요, 둘째는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說分]이다. 이 약표분(略標分) 중에서도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무상관(無相觀)을 표시한 것이요, 뒤의 것은 소관법(所觀法)을 표시한 것이다. 이 무상관을 표시한 가운데에도 두 구(句)가 있으니 앞에는 여래 스스로가 무상관에 드심을 표시한 것이고, 뒤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상관에 들게 한 것을 표시한다. 스스로 들어가심이란, 경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이다. |
|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諸佛智地]’란, 앞서 들어간 것과 같은 금강삼매에 상응하는 지혜를 뜻한다. 모든 공덕법(功德法)에 머무르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 ‘진실한 법상에 들어갔다[入實法相]’고 한 이유는, 부처님의 이러한 지혜가 모든 형상을 다 깨뜨려 모든 법의 실상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
| 51) 5신통(神通)을 가리킨다. |
| 52) 운문체(韻文體)의 게송에 대해 산문체(散文體)의 경문(經文)을 말함. |
| 53) 산문으로 된 경문의 뒤에 다시 경문의 뜻을 운문체로 나타낸 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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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한 성품[決定性]’이라고 한 이유는, 실다운 법상(法相)을 부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그 성품이 그렇기[自爾] 때문이다. |
| ‘때문이며[故]’라는 말이 이어진 것은, ‘결정한 성품’이라는 말이 그 윗구절의 이유를 해석해주기 때문이다. 결정한 성품이 아니라면 그것은 실상이 될 수 없을 것이므로. (‘때문이며[故]’는) 또 윗구절을 연결하면서 아랫구절을 성립시킨다. 여래 스스로가 진실한 법상[實法相]에 들어가 계시므로, 남들에게도 무상(無相)의 이익을 얻게 할 수 있는 것이다. |
| [經] “방편과 신통으로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無相利]을 얻게 하신다.” |
| [論] 이는 두 번째 구절로서 다른 사람에게도 무상관(無相觀)에 들어가게 하심을 말한 것이다. |
| ‘방편(方便)’이란 팔상방편(八相方便)이니,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오신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열반에 드신 것까지를 말한다. |
| ‘신통(神通)’이란 6신통(神通)54)을 말하는데, 즉 3륜(輪)55)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
|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을 얻게 하신다[皆無相利]’란 이와 같은 8상과 6신통이 모두 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실상에 드심으로부터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상(無相)의 이익을 얻게끔 하기 때문이다. 이상 무상관(無相觀)을 표하여 마친다. |
| [經]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乘)들은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이를 알 수 있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인 소관법(所觀法)을 표시한 것인데 두 구절로 나뉜다. 하나는 소관법의 심오함을 직접 표시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이 심오한 법을 설하신 것이다. |
| 54) 6통(通), 혹은 6종신통력(種神通力)이라 함. ①천안통(天眼通), ③천이통(天耳通), ③타심통(他心通), ④숙명통(宿命通), ⑤신족통(神足通), ⑥누진통(漏盡通) 등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한 공덕작용을 말함. |
| 55) 신변륜(神變輪) 교계륜(敎誡輪) 기심륜(記心輪). 여래의 수승한 3업을 전륜왕의 윤보(輪寶)에 비유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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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각의 뚜렷한 뜻[一覺了義]’이란, 일심(一心)·본각(本覺)·여래장(如來藏)을 뜻한다. 이보다 더 심오한 법은 없기 때문이다. |
| ‘이해하기 어려움[難解]’이란 그 뜻이 매우 심오하여 2승(乘)들은 알거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 ‘들어가기 어려움[難人]’이란 그 바탕이 매우 심오하여 부처님과 보살이라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
| 뒤의 구절로써 앞 구절을 풀이하건대, 첫부분에서 ‘부처님의 지혜는 진실한 법상에 들어가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일심·본각·여래장법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적멸(寂滅)을 일심(一心)이라고 하고, 일심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글에서 진실한 법상[實法相]이라고 한 것은 적멸을 의미하는 것이요, 일각의 뚜렷한 뜻이라고 한 것은 일심여래장(一心如來藏)을 뜻한다. 『법화론(法華論)』에서는 “모든 불·여래께서는 그 법(法)의 궁극적인 실상[究竟實相]을 알고 있다. 실상이란 여래장 법신(法身)의 체를 말하니,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경에서 ‘일각(一覺)’이라고 한 것은 모든 법이 오직 일심이요, 모든 중생이 곧 하나인 본각이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일각이라고 한 것이다. 아래에서 풀이를 통해 다시 분별하겠다. |
| [經] “제도할 만한 중생이면 모두 일미(一味)를 설한다.” |
| [論]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심오한 법을 말했음을 밝힌 것이다. |
| ‘제도할 만한 중생[可度衆生]’이란, 여래께서 교화해야 할 중생은 모두가 일심(一心)이 유전(流轉)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
| ‘모두 일미를 설함[皆說一味]’이란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교법(敎法)이 그들을 일각(一覺)의 맛[味]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본래 일각이었지만 다만 무명(無明) 때문에 꿈 속에서 유전하다가 모두 여래의 일미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가 없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마음의 근원에 돌아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미(一味)라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일승(一乘)이다. 이상 첫 번째인 약표문(略標文)을 마친다.56) |
| [經] 그 때 해탈보살(解脫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 |
| 56) 세존의 본격적인 설법이 시작되는 부분을 장행(長行)과 중송(重頌)으로 크게 나누고, 장행을 다시 약표분(略標分)과 광설분(廣說分)으로 나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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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님께 말씀드렸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광설분(廣說分)인데 이 가운데도 둘이 있다. 먼저는 설법을 청한 것이고 다음은 설법이다. 먼저 청함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때와 사람의 거동에 대한 것이요, 다음에는 말 꺼낸 것을 밝힌 것이다. |
| 사람의 거동을 서술하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어느 때 누가 말했는가를 밝힌다[依時表人]. ‘해탈보살이란’ 모든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케 하기 때문에 그 묻는 사람에 기탁해서 설해 주신 법[所說法]이 무엇인가를 표시한 것이다. 다음에는 예의에 관해서 말하였으니, 경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라고 한 대목이다. |
| [經] “존자여, 만약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는 정법(正法)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상법(像法)이 세상에 머무는 말법(末法)의 시대가 되어 5탁(濁)57) 중생이 가지가지 많은 악업으로 삼계에 윤회하면서 거기서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
| [論] 아래는 둘째 부분으로, 말을 꺼내서 청(請)한 것이다. 거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어느 때를 위해서인가?’하는 시절(時節)을 말하고, 다음에 그 시대의 그들을 위해서 말씀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
| 첫 번째로 시절을 든 대목 중에 ‘상법이 세상에 머무는 말법의 시대가 되었을 때’란, 이에 앞서 설한 자세한 경[廣說經]은 정법시대에 이익을 주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이 경은 상법시대를 교화하기 위해 설한다는 것이다. 시대의 두텁고 엷음에 따라 베풀어주는 교리[敎]가 다르기 때문이다. |
| [經] “부디 부처님의 자비로 후세의 중생을 위하여 일미(一味)요, 결정된 진실을 널리 말씀하시어 저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하게 하소서.” |
| [論] 이것은 두 번째로, 널리 가르침 펴주기를 본격적으로 청한 것이다. |
| ‘일미를 설해주십사[宣說一味]’한 것은 일각의 뚜렷한 뜻[一覺了義]의 맛 |
| 57) 또는 5재(滓)·5혼(渾)이라고 함. 나쁜 세상에 유행하는 다섯 가지의 더러움, 즉 ①겁탁(却濁) ②견탁(見濁) ③번뇌탁(煩惱獨) ④중생탁(衆生濁) ⑤명탁(命濁)을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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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味]을 설해 주기를 청한 것이요, ‘결정된 진실[決定眞實]’이란 참된 법상[實法相]에 들어가는 관법(觀法)을 설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
|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하게 하소서[今彼衆生等同解脫]’란 저 상법(像法)의 말세 중생들에게도 똑같은 일미(一味)로써 마침내 해탈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
| 이렇게 보건대 교(敎)에는 다음과 같은 네 구절이 있다고 하겠다. |
| 첫째, 바로 정법(正法)시대의 중생을 교화하고 겸해서 후대의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는 교(敎)이니 이 경 앞에서 설한 경[廣說經]을 말한다. |
| 둘째, 바로 상법(像法)시대의 중생을 교화하고 겸해서 그 전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주는 교(敎)이니 이 경 등을 말한다. |
| 셋째, 전후(前後) 시대에 걸쳐 통틀어 교화하는 교(敎)이니 이밖에 다른 경들을 말한다. |
| 넷째, 전후를 이롭게 하지 못하는 교(敎)이니 이상의 언급에서 제외된 가르침을 말한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선남자야, 너는 나에게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因]을 물어 중생을 교화하고, 그 중생들에게 세간을 벗어난 과(果)를 얻게 하려고 하니, 이 불가사의한 하나의 큰 일[一大事]은 네가 대자(大慈)와 대비(大悲)를 쓰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설명하지 않는다면 곧 간탐(慳貪)에 떨어질 터이니 너희들은 일심(一心)으로 자세히 들어라. 너희를 위해 설명해주겠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부분으로 여래께서 중생을 위해 설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질문을 찬양하시고 설하기를 허락하심이요, 다음은 청한 질문에 대하여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
| 물음을 찬탄한 가운데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이란 실상(實相)에 들어가는 관(觀)을 말한다. |
| ‘세간을 벗어난 결과’란 한 맛의 해탈[一味解脫]을 말한다. |
| ‘이 하나의 큰 일’이란 그 이상 없다는[無上] 뜻이며 동일하다[同]는 뜻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란 언설(言說)을 떠났고, 사려(思慮)를 끊었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는 “제불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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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에 출현하신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법화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
| “일대사란 네 가지 뜻에 의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그 이상 없다[無上]는 뜻이다. 오직 여래의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빼고는 다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의 지견(知見)을 열어[開] 중생들이 그것을 알고서 청정함을 얻게 하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불지견(佛知見)’이란 여래께서 증득하신 것이니 여실한 지혜[如實智]로 그 뜻을 알기 때문이다. |
| 둘째는 같다[同]는 뜻이다. 모든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여 주고자[示] 세간에 출현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법신(法身)이 평등하다는 것은 불성·법신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
| 셋째는 알지 못한다[不知]는 뜻이다. 모든 성문과 벽지불 등은 그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궁극의 유일한 불승(佛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悟]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
| 넷째로 불퇴전지(不退轉地)를 증득하게 한다는 뜻이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의 업(業)을 주려고 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知見)에 들게[入] 하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
| 지금 이 글 가운데에도 일대사(一大事)에 네 가지 뜻이 있다. |
| 첫째는 그 이상 없다[無上]는 뜻이니 위의 문장에 언급된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지혜의 경지[智地]는 실다운 법상[實法相]에 든 까닭이다. |
| 둘째는 같다[同]는 뜻이니 경에서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了義]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
| 셋째는 알지 못한다[不知]는 뜻이니 경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모든 2승(乘) 등이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 넷째는 증득케 한다[令證]는 뜻이니 제도할 만한 중생에게는 모두 일미 (一味)를 설하기 때문이다. |
| 이상으로 질문에 대한 찬탄을 끝낸다. 다음에는 설하기를 허락하시는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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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데,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첫 구는 설하지 않으면 잘못이 있게 됨을 역으로 드러낸 것이요, 다음 구는 잘 들으라며 설법 허락하심을 하기를 예사대로 밝힌 것이다. |
| [經] “선남자야,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교화한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 그 교화가 큰 것이다.” |
| [論]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부처님의 설법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무상관(無相觀)을 밝히고 나서 그 이익[無相利]을 자세히 설명하고, 다음에 일각의 마음[一覺心]을 드러내고 나서 그 일각의 뜻[一覺義]을 더 광범하게 설명한다. |
| 무상관을 밝힌 가운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관행(觀行)의 특성[相]을 직접적으로 설한 부분이요, 두 번째는 여러 가지 의심과 논란을 반복해서 풀어준 것이다. 첫 번째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방편관(方便觀)을 다루고, 다음은 정관(正觀)을 밝혔다. 방편관에 네 구가 있으니 맨 첫 구는 교화하는 자[能化]를 다시 들었고, 끝의 한 구는 교화가 큰 것을 찬탄하였으며, 중간의 두 구는 관(觀)의 특성을 밝혔다. |
| ‘교화한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란 처음 관을 닦을 때에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형상을 파하라는 것이다. 즉 허깨비로 나타난 형상[幻化相]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
|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란 교화한다는 생각[化相]은 이미 깨뜨렸으므로 다음에는 공상(空相)을 버리라는 것이다. 즉 교화함이 없다는 공(空)에 대해서도 역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
| 어째서 그런가? 중생은 본래 마음이 형상[相]을 떠나 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두루 온갖 형상을 다 취하여 생각을 움직여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먼저 모든 형상을 깨뜨리므로써 형상 취하는 마음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허깨비로 만들어진 유상(有相)은 이미 깨뜨렸으나, 아직 허깨비가 없다는 공성(空性)에 집착하여 그 공성을 취하기 때문에 공(空)에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므로 이번에는 무화공성(無化空性)까지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라야 공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필연적으로 양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無二中道]를 만나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들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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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다. 이렇게 교화(敎化)하기 때문에 큰 교화가 된다. |
| [문] 이러한 방편관은 어떤 지위[位]에 해당하는가? |
| [답] 우러러 믿고 닦는 경우에는 10신(信)에 해당하고, 그와 비슷한 관[相似觀]을 닦는 경우에는 30심(心)58)에 해당한다. 그 순수한 수행[純修]을 논한다면 4선근(善根)에 해당하니 장차 초지(初地)에 들어가게 될 가까운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
| [문] 다른 곳에서는 3무성관(無性觀)59)이 있다고 설하였는데 왜 여기서는 두 가지 없음[二無:無相과 無生]만을 설하는가? |
| [답] 무상(無相)과 무생(無生)은 합하여 한 변[一邊]이 되니, 버려야 할 상(相)과 생(生)이 똑같이 유(有)이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가지 관[二觀]에는 모두 심사(尋思)가 있지만 무성(無性)을 버릴 때에는 심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셋으로) 벌리거나 (둘로) 합하거나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제까지 방편관을 설하였고, 다음에는 정관을 밝히겠다. |
| [經]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心:法執)과 아(我:我執)를 떠나게 해야 하는 것이니, 모든 심(心)과 아(我)는 본래 공적한 것이다. 만약 공(空)한 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환상[幻]을 지어내거나 변화[化]하지 않을 것이요, 환상과 변화가 없으면 생멸 없음[無生]을 얻을 것이니, 생멸 없는 마음은 환화(幻化)가 없는 그곳에 있다.” |
| [論] 여기서는 정관(正觀)을 밝힌 것으로 바로 둘이 없는 모양을 관하는 것을 설명했다.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둘을 떠나게 하는 까닭이다. 소취를 떠난다는 것은 모든 인(人)·법(法)의 관념을 떠난다는 뜻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보냈기 때문에 떠났다[遣離]는 것이고, 둘은 없기 때문에 떠났다[泯離]는 것이다. ‘견리(遣離)’란 이미 취한 관념을 이제 없애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과 아를 떠나게 해야 한다’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민리(泯離)’란 이미 취한 관념이 본 |
| 58) 3현위(賢位), 즉 10지(地) 전의 10주(住)·10행(行)·10회향(廻向)을 말한다. |
| 59) 상무성(相無性)·생무성(生無性)·승의무성(勝義無性)을 관하는 것으로, 각각 변계소집(遍計所執)·의타기(依他起)·원성실(圓成實)에 의해 세워진 것을 없애는 것이다. 3성은 유(有)의 관점에서, 3무성은 공(空)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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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 공(空)한 까닭에 그렇게 말한다. ‘모든 심과 아는 본래 공적한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
| ‘심아(心我)’라고 한 데서, 사람[人]을 아(我)라 하고, 법(法)을 심(心)이라고 한다. 심은 모든 법이 의지하는 주(主)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법 등이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통달하게 될 때 앞에서 취했던 관념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두 가지 떠남[離:견리와 민리]이 동시에 다 이루어진다. |
| 소취(所取)를 떠나는 데 대해서는 이미 말하였다. |
| 능취(能取)를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능취의 분별을 떠난다는 뜻으로서,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래 떠났다[本離]는 뜻이요, 둘째는 비로소 떠났다[始離]는 뜻이다. |
| ‘본리(本離)’란 심(心)과 아(我)가 본래 공함을 통달했을 때에 바로 본각(本覺)의 공적한 마음을 얻는데, 이 공적한 마음이 본래 능취를 떠났다는 것이다. 능취를 떠났으므로 본래 환화(幻化)하지 않나니, ‘만약 공(空)한 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환상[幻]을 지어내거나 변화[化]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환화하지 않는 이유는 헛것[虛]이거나 거짓[妄]이 아니기 때문이다. |
| ‘시리(始離)’란 본각인 공적심(空寂心)을 얻었을 때 능취의 분별이 다시 생길 수가 없고, 그 마음을 얻는 대로 환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환상과 변화가 없으면 생멸 없음[無生]을 얻을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무생(無生)의 마음을 처음으로 얻어서 본래 공적하고 변화 없는 이치에 합하기 때문에 ‘생멸 없는 마음은 환화(幻化)가 없는 그곳에 있다[在]’고 하였다. 심(心)과 경(境)을 가정하여 말하는 까닭에 ‘있다[在]’는 말을 빌려 쓴 것이다. |
| 능취를 비로소 떠났다[始離能取]는 것은 시각(始覺)을 뜻하고, 본래 능취를 떠난 공한 마음[本離空心]이란 본각(本覺)을 뜻한다. 뜻은 비록 두 가지가 있지만 섞여 하나의 각[一覺]을 이루는 것으로서 능소(能所)를 함께 떠났고 신구(新舊)를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
| 『기신론(起信論)』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시각은 곧 본각과 같은 것이니, 이 각(覺)은 생겨나거나 없어지거나[生滅] 시작하거나 끝나거나[始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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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 모습[相]을 영영 떠나 있으므로, 처음의 초지(初地)로부터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다만 부분적으로 증득했느냐[分], 완전히 증득했느냐[滿]의 차이가 있을 따름임을 알아야 한다.” 『십지론(十地論)』의 본분(本分) 가운데서도 “본각 자체는 본래 공(空)이나 유(有)의 둘이 아니며 다함이 없는 것……(이하 생략)”이라고 설명하였다. |
| 또 이 일각(一覺)에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뜻이 있으니 본각에는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진수(眞修)라는 설이 도리에 맞는 것이며, 시각에는 닦아서 이룬다는 뜻이 있으므로 신수(新修)라는 말에도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협한 고집에 사로잡히면 미진함이 남는다. |
| 또 『기신론』과 『십지론』 인용은 여기서 그만두고 본문으로 돌아가 풀이하기로 한다. 이상은 무상관(無相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었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시여, 중생의 마음은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고, 공적한 마음은 체 (體)에 색상(色相)이 없는데 어떻게 닦아 익혀야 공(空)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를 위하여 부디 말씀하여 주옵소서.” |
| [論] 여기서부터는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의심을 풀어준 대목이다. 네 개의 문답을 통해 차례로 의심을 풀어주었는데 그 첫 질문 가운데 질문한 뜻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의 심성은 본래 공적(空寂)한데 망념(妄念)을 움직여 시작을 알 수 없는 때[無始]로부터 이래로 유전하니, 어떻게 닦아야 본심(本心)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요, 둘째는 공적한 마음은 그 바탕에 색(色)도 상(相)도 없으나 중생이 본래부터 항상 상이 있다고 집착하니 어떻게 무(無)를 익혀서 공적한 마음을 얻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닦아 익혀야 공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
| [문] 여기에서 말한 중생의 마음이란 필시 6식(識) 등 생멸하는 마음일 터인데,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일심(一心)인 본각(本覺)을 알 수가 있는가? |
| [답] 『기신론』에 말하기를 “대승에 믿음을 일으키는 법이 있으니 그것이 중생심(衆生心)이다. 일심법(一心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고 자세히 설명하셨다. 또 경(『능가경』)에 말씀하시기를 “적멸(寂滅)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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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심(一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지금 이 글에서는 ‘공적한 마음은 그 바탕에 색도 상도 없는데’라고 하였으니, 말은 차이가 있으나 뜻은 같다. |
| ‘색이 없다[無色]’고 한 이유는 형태나 색깔 등으로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요, ‘상이 없다[無相]’고 한 이유는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등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 문장이다. 위에서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 것은 우선 심생멸문(心生滅門)을 든 것이다. 즉 생멸심을 가지고 진여문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고’라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門)은 그 체가 둘이 아니니 그러므로 모두 일심법(一心法)일 따름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아, 마음의 온갖 모습[相]은 본래부터 근본[本]이 없으며 근본 자리[本處]가 본래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 마음이 생하는 일이 없으면 그대로가 공적에 든 것이요, 공적한 마음 바탕에서는 마음의 공함을 증득한다. 선남자야, 모습 없는 마음은 무심(無心)이며 무아(無我)이니, 모든 법(法)의 모습도 이와 같으니라.” |
| [論] 이 답은 정답(正答)과 결답(決答) 두 가지로 나뉜다. |
| 보살이란 해탈보살을 부르는 말이다. 아래의 글에서 부르는 말도 모두 똑 같다. |
| ‘마음의 온갖 모습[一切心相]’이란 8식(識)이 념(念)을 일으킨 것으로서, 심(心)과 심소(心所)에 상응하는 차별된 온갖 행(行)과 상(相)을 뜻한다. 행이든 상이든 모두 네 가지 상[四相]이 있기 때문에 일체심상이라고 하였다. |
| ‘본래부터 근본이 없으며 근본자리가 본래 없으므로[本來無本 本無本處]’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모든 심상(心相)은 종자(種子)를 근본[本]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근본 종자를 찾아보아도 영영 찾을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이 현재에 있는 것인가, 과거에 있는 것인가? 만약 현재에 있다고 한다면 결과[果]와 같이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소[牛]의 두 뿔과 같이 본(本)과 말(末)의 차이가 없게 된다. 반면 과거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만들어낸 원인[作因]이 없어졌을 터이니, 그렇다면 토끼 뿔[兎角]처럼 체성(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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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性)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는 본래 그러한 것이므로 ‘본래부터 근본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
| 또 생멸심(生滅心)이 생겨나려면 반드시 근본 자리에 의지해야 하는데 근본 자리가 이미 없다면 생길 여지가 없다. ‘근본 자리[本處]’란 구유근(俱有根;五色根·第六識·第七識·第八識)을 말한다. 다섯 가지 색근[五色根]은 그 자체가 벌써 색법(色法)이므로 방위나 장소[方所] 여하에 불구하고 모두 얻어지지 않으며, 나머지 세 가지 소의(所依)는 모두 무색법(無色法)이므로 시간의 여하에 불구하고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근본 자리가 본래 없다’는 말을 붙인 것이니, 이는 애초부터 근본 자리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근본 종자도 없고 근본 자리도 없다면 심상(心相)이 본래 생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
| 이와 같이 관찰하되 생함을 얻을 수 없을 때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能觀心]도 생기지 않으니, 이 때 본래 공적한 데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들어갈 바의 공적이란 일심(一心)을 말하는데, 일체가 이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지(地)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그대로 공적에 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
| ‘공적한 마음자리[空寂心地]’라고 한 이유는,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유전하면서 항상 모습이 있다[有相]고 집착하지만 그러나 이 문(門)에 의해 관찰하면 본래 공(空)한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마음의 공함을 증득한다’고 한 것이다. 마음이 공하다[心空]는 것과 공한 마음[空心]이라는 것은 말은 서로 다르지만 좌우는 있으나 모두 일심본각(一心本覺)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상은 물은 뜻에 정곡으로 답한 부분[正答]이고, 앞으로는 결론을 맺으면서 답하는 부분[結答]이다. |
| ‘모습이 없는 마음[無相之心]’이란 일심(一心)의 체(體)를 가리킨다. |
| ‘무심무아(無心無我)’란 앞에서 ‘공적(空寂)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을 다시 결론짓는 말이다. 즉 모습 없는 마음은 심(心)·아(我)의 두 가지 모습을 떠났다는 것이다. |
| ‘모든 법의 모습도 이와 같다[一切法相亦如是]’란 공적에 대하여 거듭 매듭짓는 구절이다. 이 심·아의 두 가지 모습만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 밖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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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위(有爲)·무위(無爲), 나아가 유상(有相)·무상(無相) 등의 상(相)도 무상심(無相心)에서는 떠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시여, 일체 중생 가운데 아(我)에 사로잡힌 자와 심(心)에 사로잡힌 자를 무슨 법으로 깨닫게 하여, 그 중생들을 이 속박[縛]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문답이다. 앞에 첫 번째 질문 중에서는 모양이 있다[有相]고 보는 견해를 깨뜨리는 문을 전체적으로 밝혔고, 지금 이 문답에서는 두 가지 결박을 떠나는 문을 개별적으로 밝혔다. 두 가지 병을 따로따로 들어 치료할 약을 물은 것이다. |
| ‘아(我)에 사로잡힌 자’란 인집(人執)의 병이요, ‘심(心)에 사로잡힌 자’란 법집(法執)의 병이다. |
| ‘이 속박[縛]’이란 따로따로 말하자면 인집(人執)은 추중박(麤重縛)이요, 법집(法執)은 상박(相縛)이지만, 통틀어 말하자면 두 가지 집(執)에 모두 다 추중박과 상박이 있다. 또 이 두 가지 집(執)에 모두 두 가지 박이 있으니, 그것을 상응박(相應縛)과 능연박(能緣縛)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2장장(障章)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
|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인집(人執)을 다스리고 나중에 법집(法執)을 다스린다. 인집을 다스리는 가운데에도 처음에는 총괄적으로 하고 나중에는 개별적으로 한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선남자야,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게 하라.” |
| [論] 이것은 총괄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는 데에 크게는 두 가지 문(門)이 있다. 첫째는 만든 자가 없이 연에 의해 생김[無作緣生]을 관하여 만든 자가 있다는 집착[作者執]을 고치는 것이니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항상성이 없이 연에 의해 생김[無常緣生]을 관하여 항상성에 대한 집착[常住執]을 고치는 것이니 ‘이것이 생겼으므로 이것이 생긴다’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
| 내가 존재한다는 고집이 있게 된 이래로 이 두 가지[作者執·常住執]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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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본이 되는데, 근본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모든 지말적인 것들도 따라서 없어진다. |
| [經] “열두 가지 인연은 본래 인과(因果)에서 생기며, 인과는 마음의 작용[心行]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마음이란 있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몸이 있을 것인가?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며, 반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어라.” |
| [論] 이 부분은 인집(人執)을 개별적으로 다스린 것이다. 개별적으로 다스린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비를 통해 논파하는 것[況治]이요, 둘째는 추적을 통해 논파하는 것[逐治]이다. 황치(況治) 가운데서 ‘본래 인과에서 생기며’라는 구절은, 총괄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이 나오는데,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다만 인(因)과 과(果)뿐이다. 인(因)으로부터 두 가지[無明·行]와 세 가지[愛·取·有]가 나오고, 과(果)로부터 다섯 가지(識·名色·6入·觸·受)와 두 가지(生·老死)가 나온다. 또 인(因)으로부터 10지(十支:앞의 열 가지)가 나오고 과(果)로 부터 2지(二支:뒤의 두 가지)가 설명된다. 그러므로 각 지(支)들이 따라나오는 근본은 다만 인과뿐이다. |
| ‘인과는 마음의 작용[心行]에서 일어난다[因果所起興於心行]라고 한 것은, 인과가 일어나는 데 마음의 작용이 근본이 된다는 말이다. 마음이 인(因)을 만들어 마음이 과(果)를 받기 때문이다. |
| ‘마음이란 있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몸이 있을 것인가?[心尙不有何況有身]’라고 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에 의해 도리를 관찰하면 마음이란 것이 존립할 수 없는데 하물며 마음으로 이루어진 색신(色身)이 어떻게 있겠느냐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없는데, 하물며 어찌 나의 존재가 있겠는가? 또 마음이 있지 않으므로 인과 역시 공(空)하다. 인과도 공하거늘 어찌 나라는 존재가 있겠는가? 또 인과가 공하기 때문에 12지(支)도 공하다. 그러니 어찌 만드는 자[作者]와 받는 자[受者] 등이 있겠는가? 경에 ‘보살이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여도 허공과 같아서 다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씀이다. 여기까지가 대비를 통해 논파하는[況破:況治] 부분이다. |
| 그러면 추적을 통한 논파[逐治]란 어떤 것인가.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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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를 없애주며[若有我者令滅有見]’라는 구절이 앞의 황파를 다시 거론하면서 내가 존재한다는 집착을 없애준 것이었다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없다는 견해를 없애주어라[無我者令滅無見]’한 구절은, 무아(無我)의 병까지도 추적해서 없애주는 것으로서, 이 구절이 바로 축파에 해당한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 앞서 아집을 깨뜨려 외도들의 병[外道病]을 여의었는데 이번에는 무아라는 데 집착하여 2승의 병[乘病]에 걸렸으므로 이제 그 무(無)에 집착하는 견해를 추적하여 깨뜨린 것이다. 내가 본래 있지 않은데, 어찌 ‘내가 없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총괄적, 개별적인 두 가지 관(觀)으로 아집(我執) 없애는 부분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
| [經]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어떤 본에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기는 성품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지는 성품을 없애주어라’라고 되어 있다]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實際]에 들어간다.” |
| [論] 이 아래는 마음이 있다는 견해[存心見]를 논파하는 부분인데 이 중에 두 부분이 있다. 즉 정곡으로 논파한 것[正治]과 거듭 해석한 것[重釋]이다. 2승(乘)을 닦는 사람들은 법집(法執)에 마음을 두어[存心], 생멸하는 마음이나 무상(無常)한 마음이 있다고 헤아린다. 그러므로 생멸을 논파하고, 마음이 있다는 견해를 없애는 것이다. |
| 만약 마음이 생긴다는 생각 때문에 병든 이가 있으면 앞에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왜냐하면 없어졌다는 저 관념에 의거하여 지금 생긴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
| 또 뒤에 없어지는 것을 보고 현재의 마음이 있었다고 집착하는 경우에는, 그 마음이 설사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토끼 뿔과 같은 것이므로 이와 같은 견해를 깨뜨려 생긴다는 관념을 없애야 할 것이다. 생긴 일이 없는데 없어지는 일이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
| ‘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에 들어간다[滅是見性 卽入實際]’한 것은, 없어지는 성품 보는 것을 깨뜨리면 결코 생겨난다는 견해에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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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하지 않을 것이며, 생겨나는 성품 보는 것을 깨뜨리면 결코 없어진다는 견해를 취하지도 않을 것이니, 생멸을 취하지 않으면 마음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 [經] “어째서 그런가? 본래 생겨난 것은 없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어떤 본에는 ‘본래 없어지는 것은’ 이라고 되어 있다] 생겨나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으니 생겨남이 없고, 생겨나지 않으니 없어짐이 없다. 모든 법상(法相)도 마찬가지다.” |
| [論] 이 부분은 거듭 해석한 것[重釋]이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생긴다고 보는 자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滅性]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보는 자에게는 생긴다는 성품[心性]을 없애주느냐 하는 물음을 ‘어째서 그런가?[何以故]’라고 표현한 것이다. |
| ‘본래 생겨난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本生不滅]’한 뜻은 무엇인가? 전에 생긴 마음을 찾아도 영영 얻을 수 없다. 얻을 수가 없는데 무엇을 없앤다는 말인가? 이와 같이 앞의 마음이 없어졌다는 생각을 두지 않으면 지금의 마음이 생겼다고 하는 생각에 집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不滅不生]’고 하였다. 이는 ‘없어진다는 관념을 없애준다[令滅滅性]’고 한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
| 다음에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不滅不生]’고 한 것은, 앞에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 뜻을 받아서 지금의 마음이 생겨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지금의 마음이 생하는 성품을 얻을 수가 없다면, 이 마음이 없어진다는 성품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겨나지 않으니 없어짐이 없다[不生不滅]’고 하였다. 이는 ‘생겨난다는 관념을 없애준다[令滅生性]’고 한 이유를 풀이한 것이다. |
| 마음 법[心法]이 없어지거나 생기는 일이 없듯이, 그 밖의 모든 법도 이와 똑같이 관하기 때문에 ‘모든 법상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이다. |
| [문] 마음이 생긴다고 잘못 생각하면 생긴다는 이 견해만 정곡으로 깨뜨릴 것이지, 그 전에 생긴 마음[前心]이 없어졌다는 생각까지 깨뜨릴 필요가 있는가? |
| [답] 지금 생긴 마음은 현재 나타나 있는 것이라 깨뜨리기가 쉽지 않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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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심(前心)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 그 공(空)함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으므로, 먼저 쉬운 것을 깨뜨려서 어려움을 없애주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로 ‘지금 생한다’는 관념을 깨뜨리고, 이것으로 ‘나중에 멸한다’는 집착을 놓아주니, 이야말로 의왕(醫王)의 뛰어난 의술이라고나 할까?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이시여, 법이 생겨남을 보는 중생이 있다면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어떤 본에는 “법이 없어짐을 보는 중생이 있다면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見法滅時 令滅何見)]”라는 여덟 글자가 더 있다.] |
|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없애야 할 그릇된 견해의 병에 관하여 밝혔고, 여기 문답에서는 그릇된 견해의 병을 없애주는 약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
| 또 앞에서는 생겨남[生]과 없어짐[滅]이라는 양 극단의 견해를 깨뜨렸고, 여기에서는 있음[有]과 없음[無]의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깨뜨린다. |
| 지금 이렇게 묻는 의도는 관행(觀行)하는 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닦다가 법이 생겨남을 본다면 어떠한 견해를 없애야 하느냐는 것이다. ‘어떠한 견해를 없애야 하느냐’는 문장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묻는 것인데, 우선 한 쪽[生]만을 들어서 멸(滅)을 관하는 것까지도 같이 설명한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아, 법이 생기는 것을 보는 중생에게는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고, 법이 없어지는 것을 보는 중생에게는 있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어라. 이러한 견해들을 없애기만 하면 법이 진짜 없음[眞無]을 깨달아 결정한 성품[決定性]에 들고, 그렇게 되면 생겨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
| [論] ‘법이 생기는 것을 본다[見法生時]’는 것은, 세속의 법이 인과 연에 의해 생기는 것을 바로 관찰할 때를 말한다. 이 때에는 공(空)에 집착하는 견해를 버려야 하기 때문에 ‘없다는 견해를 없애주라[令滅無見]’고 하였다. |
| ‘법이 없어지는 것을 본다[見法滅時]’는 것은 세속의 법이 본래 멸(滅)해 있음을 바로 관찰할 때를 말한다. 이 때에는 있음에 집착하는 견해를 버려야 하므로 ‘있다는 견해를 없애주어야 한다[令滅有見]’고 하였다. |
| 이 중에 무슨 이유로 ‘없애라[令滅]’라고 했느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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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觀)하는 자로 하여금 멸(滅)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관행자(觀行者)가 법이 생겼다고 볼 때 없다는 견해만을 떠나지만 생(生)을 남겨두는 것이 아니고, 또 적멸(寂滅)을 관할 때에는 있다는 견해만을 떠나지만 적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데 이 말의 의도가 있다. 어째서 그런가? 생겨남이 있다고 하자니 생은 본래 적멸(寂滅)이라 하고, 없어짐을 취하려고 하자니 멸이 곧 생기(生起)’라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
| 인연으로 생긴 것이란 |
| 멸의 뜻이지 생의 뜻이 아니며 |
| 모든 생멸을 멸했다고 함은 |
| 생의 뜻이지 멸의 뜻이 아니다. |
| 그러므로 유무(有無)의 두 치우침[二邊]을 여의었으면서 그렇다고 중간에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무(無)를 떠나 유(有)를 집착[取]하거나 유(有)를 파하고 공(空)을 집착한다면 이는 거짓 공[妄空]이요, 진짜 무[眞無]는 아니다. 여기서는 유를 떠났으나 공도 남겨두지 않았으니, 이래야만 모든 법이 진짜 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법이 진짜 없음[眞無]을 깨달아’라고 하였다. ‘결정한 성품[決定性]’이란 앞에서 설명한대로다. 진공(眞空)을 얻었을 때 마음이 생하지 않음을 관찰하여 있다, 없다하는 마음을 멀리 떠났으므로 ‘생겨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決定無生]’라고 하였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시여, 저 중생들을 무생(無生)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곧 무생이나이까?” |
| [論] 이 아래는 네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두 가지 치우침을 떠난 참된 관행[眞觀]을 밝혔다면, 여기서는 (무생에) 머문다는 생각 내는 것[生住]을 떠나지 못한 거짓 이해[妄解]를 밝혔다. |
| 공부가 덜된 채로 관행을 닦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생각과 말로 분별하기를 ‘법(法)이 생(生)하지 않음을 관하여 산란(散亂)한 마음을 거두어들여 무생(無生)의 경계에 머물게 되었다’고 여기고 ‘이것이 무생이다’라고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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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한다. 그리고는 나중에 선정(禪定)에서 나올 때 증상만(增上慢)60)을 일으켜 ‘이미 무생법인(無生法忍)61)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병을 없애주기 위해 병을 들어서 ‘무생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무생입니까?’라고 물었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무생에 머문다면 그것은 생이다. 왜냐하면 무생에도 머무름이 없어야 비로소 그것이 무생이기 때문이다.” |
| [論] 답에 두 가지가 있으니 간략하게 대답한 것[略答]과 거듭 자세히 설명한 것[重詳]이다. 간략하게 대답한 두 구절 가운데 위의 구는 그것이 생임을 자연스럽게 밝혔으니, 무생의 경지에 머문다는 것이 바로 분별심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 구는 거꾸로 무생을 풀이한 것이다. 만약 마음이 무생의 경지에도 머무름이 없으면 모든 분별을 여의게 되니, 이것이 무생인(無生忍)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있으면 그것은 무생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뒤집어서 해석하였다. 간략한 대답은 이 문장으로 마친다. |
| [經] “보살아, 무생을 생(生)한다면, 생을 가지고 생을 멸하는 것이다.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 본생(本生)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며, 그 공적함이 머무는 곳 없고 마음이 머무는 곳 없어야 이것이 무생(無生)이다.” |
| [論] 이것은 (답 중에서) 거듭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생(生)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고, 나중은 무생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다. 머무는 마음이 있어 무생의 경지에 그것이 생기면, 이것은 생멸로써 그 경계를 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비록 경계가 생기는 것을 멸(滅)하기는 했으나 멸해서 없어진 그것을 취한다면, 저 멸무(滅無)의 경계에 대해 취하는 마음[能取心]이 생긴다. 그렇다면 생과 멸이 다같이 있는데, 어찌 무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상 두 구절은 앞에서 다룬 생을 자세 |
| 60) 4만의 하나, 또는 7만의 하나. 훌륭한 교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여 제가 잘난 체하는 거만. 곧 자기 자신을 가치 이상으로 생각함. |
| 61) 불생불멸하는 진여 법성을 인지(忍知)하고, 거기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 보살 초지(初地)나 7·8·9지에서 얻는 깨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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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 말한 것이다. |
| 참된 무생인(無生忍)은 그렇지 않으니, 밖으로는 소취(所取)를 멸함에 마음을 두지 않고, 안으로는 능취(能取)의 생함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生滅俱滅]’라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멸이 동시에 멸한다[俱滅]는 것은 ‘무로 돌아갔다’는 말이 아니다. 그 본래의 생을 추구해 보건대 그 생(生)이 없다는 것이다. 생이 없다면 어찌 멸(滅)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 때 본래 공적(空寂)함을 깨닫기 때문에 ‘본생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하며[本生不生心常空寂]’라고 말한 것이다. |
| 이와 같은 공적은 능(能)·소(所)가 평등하여 공(空)의 경지에 머문다 하는 마음[能住心]이 없다. 그러므로 ‘공적함이 머무는 곳이 없고[空寂無住]’라 하였으니 이렇게 되어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생이다’라고 하였다. 이상 무생관(無生觀)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시여, 마음에 머무름이 없는데 무슨 닦고 배울 것[修學]이 있습니까? 유학(有學)이라야 합니까, 무학(無學)이라야 합니까?” |
| [論] 여기서부터는 일각(一覺)의 뜻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62) 이 가운데 여덟 개의 문답이 있는데 크게 둘로 분류하면 처음 두 문답은 일각여래장(一覺如來藏)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한 것이고, 나중의 여섯 문답은 논을 의지해서 논을 일으켜[因論生論] 모든 의심과 논란을 제거한 부분이다. |
| 지금 이 첫 물음에서는 마음이 머무름이 없다는 것을 들어 묻는다. 배울 것이 있다고 한다면 머무름이 없지 않을 터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관행(觀行)이 아닐 터이다. 또 배움이 있다고 한다면 마음이 생겨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오직 공리(空理)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62) 정위선설(正爲宣說:善男子 若化衆生 無生於化 不生無化 其化大焉…)을 무상관(無相觀)을 밝히는 부분과 일각의(一覺義)를 밝히는 부분으로 크게 나눈 가운데 여기서부터 후자가 시작되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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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아, 생(生)함이 없는 마음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마음이 아니다. 본각(本覺)인 여래장(如來藏)이므로 그 성품이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性寂不動].” |
| [論] 여기서는 먼저 도리를 밝히고, 나중에 질문에 대답한다. 도리를 밝힌다는 것은, 머무름이 없게 되었을 때 생함이 없는 마음[無生之心]은 항상 적멸(寂滅)하여 관에서 나오는 일[出觀]이 없고, 본래 일어나지 않음을 통달하여 (관에) 비로소 들어가는 일[始入]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心無出入]’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을 관찰하여 이미 출입(出人)이 없으면 곧 본각(本覺)이요, 여래장(如來藏)인 마음이다. 이는 시각(始覺)이 본각과 같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생함 없는 이 마음[無生心]은 이미 본각인 여래장이라, 본래 그 성품이 고요하여 다시는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으니 어찌 들락날락하며 일어나고 멈추는 일이 있겠는가? 이는 출입이 없다는 뜻을 거듭 확증하는 말이다. |
| [經] “유학(有學)도 아니고 무학(無學)도 아니다. 배움도 배우지 않음도 없는 것이 무학이며, 배움이 없지 않다는 그것이 바로 배울 바가 된다.” |
| [論] 이 부분은 묻는 뜻에 대한 정답이 되겠는데, 이 중에 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부정[遮]하고 나중에 긍정[許]한 것이다. |
| 시작이 있어서 들어가는 것[始入]이 아니므로 학(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끝이 있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학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한편 머무는 마음[能住心]이 없으므로 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머물지 않는 마음[無住心]이 없지도 않으므로 학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둘 다 ‘아니다’ 라고 부정[遮]하는 논법으로서, (잘못된 견해를) 차단하고 그치게 한 것이다. |
| ‘배움도 배우지 않음도 없는 것이 무학(無學)’이라는 것은 배울 것[所學]이 따로 없으므로 배운다는 일[能學]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학이라는 것을 용인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학(學)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 의거하여 무학을 인정한 것이다. |
| ‘배움이 없지 않다는 그것이 바로 배울 바가 된다’고 한 것은 비록 머무름이 있는 관(觀)은 아니라 할지라도 머무름이 없는 행(行)이 없지 않기 때문에 유학(有學)을 허용한 것이다.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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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의 경지에서 배울 것이다. 이는 배울 것이 없지 않다는 뜻[非無學義]에 의거하여 유학(有學)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둘 다 허용하는 논리로서, 자재(自在)한 답변이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이시여, 여래장(如來藏)의 성품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시각(始覺)이 본각·여래장의 성품과 다르지 않음을 밝혔고, 여기에서는 여래장의 성품이 숨겨져 있고 움직이지 않음을 밝히는데 이 중에 여래장(如來藏)의 요점이 설명되어 있다. |
| 여래장에 대해서는 두 가지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셋으로 설명하는 근거는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
| “중생계 가운데서 세 가지 법을 보여주는데, 모두 진실하고 여여[如]하여 다름이 없고 차이가 없다. 그 셋이란 무엇인가? |
| 첫째는 여래장의 본제(本際)63)에 상응하는 체(體)와 청정한 법이다. 이 법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거나[離] 벗어나지[脫]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으로서, 시작 없는 본제(本際)로부터 이와 같이 청정한 것에 상응하는 법체(法體)이다. |
| 둘째는 여래장의 본제에 상응하지 않는 체와 번뇌에 얽매여 청정하지 못한 법이다. 이는 본제와 이탈하여 상응하지 않으며 번뇌에 얽매여 청정하지 못한 법이니 오직 여래의 지혜[菩提智]로만 끊을[斷]수 있다. |
| 셋째로 여래장의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있게 될 법[及有]이다. 이는 모든 법의 근본이 되며, 모든 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며[備], 모든 법을 일일이 갖추고 있어서[具] 세간을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
| 내 생각에 이 경문은 여래장을 세 가지 측면[門]으로 나누어 밝힌 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
| 63) 제(際)란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서 과거·현재·미래가 있는데, 시작하는 시점이나 끝나는 시점으로 잡힐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본제(本際)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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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거두어들이는 여래장[能攝如來藏]이다. 자성(自性)에 머물러 있을 때 여래 과지(果地)의 공덕을 다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여래를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 둘째는 거두어들여진 여래장[所攝如來藏]이다. 번뇌에 얽매어 청정하지 못한 법이 모두 여래의 지혜 안에 있다. 여래가 그것을 거두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여래에 속하는 법이라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 셋째는 숨겨지고 덮여진 여래장[隱覆如來藏]이니, 법신인 여래가 번뇌에 덮여 있음을 말한다. 여래가 스스로 숨었다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른 것이다. |
| 진제 삼장(眞諦三藏)64)은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있게 될 법’이란 경문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다. |
| “일심의 체(體)는 3제(際)에 두루 하나 앞의 두 측면을 설명할 때 본제(本際)에 관해서는 이미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후제(後際)까지도 밝힌 것이다. 이 문장의 또 다른 의도는 ‘여래’라는 뜻을 나타내려는 데 있다. 즉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라는 구절은 여(如:같다는 뜻)를, ‘있게 될 법[及有]’은 래(來:온다는 뜻)를 나타낸다.” |
| 『불성론(佛性論)』65)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 “이 참다운 여[眞如]는 여(如)가 아닌 가운데 여함이 있는 것이며, 여(如) 아님이 없는 가운데도 여함이 있는 것이다. |
| 그런데 2승(乘)의 여(如)는 여(如)가 아닌 가운데서는 여함이 있지만, 여(如) 아님이 없는 가운데에서는 여함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2승(乘)을 닦는 사람들은 허망관(虛妄觀)에 의지하여 무상(無常) 등의 모양만을 보고 그것을 진여(眞如)라고 생각하는데, 이 허망관은 인지(因地)에만 있고 과지(果地)에는 없다. 그렇다면 이 여(如)가 성립되었다가 파괴되었다가 하는 것이 된다. |
| 64) 진제(499~569)는 인도의 스님으로 중국 섭론종(攝論宗)의 개조로써 『섭대승론(攝大乘論)』 3권, 『대승기신론(大乘起身論)』 1권 등 모두 64부 278권을 번역했다. 삼장이란 경(經)·율(律)·논(論)의 3장(藏)을 번역하는 이를 삼장이라 부름. |
| 65) 인도 천친(天親)의 논서로서 진제가 한역함. 내용은 연기분·파집분·현체분·변상분의 4분으로 되어 있어 불성(佛性)을 자세히 설명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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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의 여(如)는 어떤가? 보살은 허망을 떠나 진성(眞性)에 입각하여 이 여를 보므로 인과(因果) 두 곳에서 다름이 없고, 성립되거나 파괴되는 때가 없다……” |
| 그러므로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後際平等恒]’라는 구절이 대승에서 말하는 여(如)의 뜻을 밝힌 것임을 알 수 있다. |
| ‘있게 될 법[及有]이라는 것은 래(來:온다는 뜻)를 나타낸다’라고 한 말은, 범부의 법이 감[去]을 상대로 해서 일심(一心)이 옴을 나타낸 것이다. 범부의 법이 갔을 때는 오취온법(五取蘊法)이 과지(果地)에 이르지 못하니, 즉 가서는 오지 못하는 법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일심의 여는 과지에서도 그냥 그대로 있어 영원히 지나가 버림이 없으므로 ‘있게 될 법[及有]’이라고 하였으니, 즉 래(來)의 뜻을 밝힌 것이다. 논에서 ‘자성(自性)에 머무르면서부터 지득(至得:佛果)에 이른다’고 한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
| 이렇게 일심은 더럽거나 깨끗한 모든 법에게 공통적인 의지처[依止]가 되므로 (앞의 『不增不減經』에서) ‘모든 법의 근본’이라 하였고, 또 본래 고요한 면으로 보아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무수한 공덕(功德) 중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하였고, 연(緣)을 따라 움직이는 면으로 보아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염법(染法) 중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일일이 갖추었다’고 한 것이다. |
| 그런데 염법(染法) 쪽에서 심체(心體)를 바라보면 두루 통할 수 없으므로 이탈하지만, 심체 쪽에서 염법을 바라보면 염법(染法)에 두루 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세간을 떠나거나[離]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떠나거나 벗어나지[脫] 않는다는 것은 숨어 갈무리되어 있다[隱藏]는 뜻이다. 여래장(如來藏)의 세 번째 측면을 설명하는 이곳에서는 일심이 움직임과 고요함에 통하며 염법과 정법에게 의지처가 됨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
| 여래장의 두 번째 측면을 설명한 곳에서는, 여래장의 움직이는 측면이 염법(染法)의 소의(所依)가 됨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여래장의 첫 번째 측면을 설명한 곳에서는, 여래장의 본래 고요한 측면이 정법(淨法)의 소의가 됨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
| 두 번째에서 ‘본제에 상응하지 않는 체’라고 한 것은, 모든 번뇌 법이 심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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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心體)를 위반한다는 뜻에서 ‘상응하지 않는다[不相應]’고 한 것이다. 일심의 체가 연을 따라 움직이는 면[隨緣動門]에서는 번뇌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상응하지 않는 법의 체가 된다. |
| ‘…와 번뇌에 읽혀 청정하지 못한 법’이라고 한 것은, 의지하는[能依:染法] 법이 심체에 의지해 전전하면서 스스로 심체를 얽어매고 따라서 물들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능의(能依)와 소의(所依)의 법을 함께 취하여 여래장의 두 번째 체라고 본 것이다. |
| ‘오직 여래의 지혜[菩提智]로만 끊을[斷]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해탈도(解脫道)에서만 올바로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러한 뜻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
| 첫 번째에서 ‘본제에 상응하는 체’라고 한 것은 (일심의 체가) 본래 고요하다는 면[本來靜門]에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덕(德)이 갖추어져 있어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니, 이는 공덕에 상응하는 체(體)이다. |
| ‘…와 청정법(及淸淨法)’이란 능의(能依) 공덕이 본래 염법을 떠나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능의와 소의의 법을 함께 취하여 여래장의 첫 번째 체라고 본 것이다. |
| ‘이 법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거나[離] 벗어나지[脫]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이라고 한 것은 상응(相應)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며, 법신(法身)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니, (일심의 체가)모든 공덕법(功德法)과 상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윗글에서 말한 것과 같이, 불법(佛法)의 떠나지 않는 면, 벗어나지 않는 면, 끊어지지 않는 면, 다르지 않는 면, 불가사의한 면과 상응하므로 법신(法身)이라고 부른다. 무슨 뜻인가? 이 일심(一心)의 체(體)에는 크게 보아 다섯 가지 특성[相]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 특성인가? |
| 첫째는 취하는 대상[所取]의 차별된 모습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취하는 자[能取]의 분별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셋째는 3세제(世際)에 두루 미쳐 평등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넷째는 허공계(虛空界)와 같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는 있다[有], 없다[無], 전체다[一], 개별이다[異]하는 따위의 극단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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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마음이 가는 곳을 벗어나 있고, 언어의 길을 초월하여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본래 공덕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도 심체와 상응하는 다섯 가지 뜻이 있다. |
| 첫째는 낱낱의 공덕이 소취(所取)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법신과 떠나 있지 않는 것이니, 앞서 본 첫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경에서 ‘떠나지 않는다[不離]’고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
| 둘째는 낱낱의 공덕이 능취(能取)의 집착을 벗어났기 때문에 법신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앞에서의 두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不脫]’고 한 것이 그 뜻이다. |
| 셋째는 이 낱낱의 공덕이 3세제(世際)에 두루 미쳐 시간적[縱]으로 보아 전후의 단절이 없는 것이니, 앞서 말한 세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는다[不斷]’고 하였다. |
| 넷째는 이 낱낱의 공덕이 허공계와 같아서 공간적[橫]으로 여기다 저기다 하는 차이가 없으니, 네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不異]’고 하였다. |
| 다섯째는 낱낱의 공덕이 모두 극단[邊]을 떠나 있어 사량(思量)의 경계가 아니며 언어의 길을 넘어서 있으니, 이는 다섯 번째 특징과 상응한다. 경에 ‘부사의(不思義)’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한다. |
| 모든 공덕법에는 이 다섯 가지 뜻이 있어 (일심의) 체(體)와 별개가 아니라 한 맛[一味]에 융통되므로, 이런 이유에서 ‘상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 심왕(心王)과 심수(心數)가 개별적인 체로서 상응하는 것과는 다르다. |
| 지금 여기에서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不離不脫智不思議法]’이라고 한 것은 모든 공덕 중에 각(覺)의 의미를 추려서 다섯 가지 상응 중에 세 가지 뜻만을 요약한 것이다. 이상이 첫 번째인 능섭여래장[能攝藏]이다. 여기까지 여래장의 뜻을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히 설명하였다.66) |
| 66) 앞에서 여래장의 은장부동(隱藏不動)한 성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여래장의 뜻을 두 가지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고, 우선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과 『불성론(佛性論)』을 근거로 삼아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였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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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장의 뜻을 두 측면으로 설명하는 것[二門]에 대해 『부인경(夫人經:勝鬘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여래장(空如來藏)이란 (법신을) 떠나 있거나[離] 벗어나 있거나[脫] 다르거나[異]한 모든 번뇌장(煩惱藏)을 말한다.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란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다르지 않은 불가사의한 불법을 말한다.” |
| 위 경문을 나는 이렇게 해석하겠다. |
| 모든 번뇌법(煩惱法)은 다 허망하니, 경계[境]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허(虛)라 하고 체(體)가 산란하기 때문에 망(妄)이라 한다. 거짓[妄]이기 때문에 참[眞]이 없고, 헛것[虛]이기 때문에 실다움[實]이 없다. 진실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고, 여래를 숨겨 덮고 있으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공’이란 진(眞)을 숨겨 덮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번뇌의 경계는 실답지 않은 형상[相]인데 그것이 법신(法身)을 떠나 있기 때문에 ‘떠나 있거나[若離]’라 하였다. 모든 번뇌의 체는 망령된 집착에 결박되어 법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벗어나 있거나[若脫]’라고 하였다. ‘다르거나[若異]’라고 함은 앞서 말한 허망의 차별과 분별이 법신의 평등한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면에서 (법신과) 상응하지 않으므로 이를 진실이 없다 하고, (여래장의) 공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다. |
| ‘불공(不空)’이란 모든 공덕이 체(體)와 상응함을 말한다. 체가 망령되지 않기 때문에 참이며, 경계가 헛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다운 것이다. 진실하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不空]’고 하며, 여래가 숨겨져 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한다.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라는 등의 문구는 여래장의 공하지 않은 측면을 풀이한 것이다. 그 뜻은 세 가지로 여래장을 설명한 대목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
| 여기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의 체는 앞에 세 가지로 설명한 중에서 첫 번째 법[能攝如來藏]에 해당하고, 여기 공여래장의 뜻은 저곳의 두 번째[所攝如來藏]에 해당한다. 그리고 세 가지 여래장 중 ‘숨겨 덮고 있다[隱覆]’는 의미는 세 번째에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앞(셋으로 설명한 것)에서는 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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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째·두 번째를 가지고 능섭(能攝)과 소섭(所攝)의 두 가지 뜻을 구별한 반면, 여래장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 여기서는 공[空;妄法]이 진실을 덮고있다는 측면을 드러내려고 덮는 쪽[能覆]과 덮이는 쪽[所覆] 두 가지로 구별한 것이다. 또 이 두 경[不增不減經과 勝鬘經]이 서로 다른 의미를 드러내려 했기 때문에 두 가지로 설명하거나 세 가지로 설명하는 양쪽의 해석이 다른 것이다. 부연설명은 여기서 그치고 다시 본문해석으로 돌아가겠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여래장(如來藏)이란 무엇인가? 생멸하는 사려[慮知]의 모습을 말한다. 이치를 숨겨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므로 여래장이라 하며, 그 본성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
| [論] ‘생멸하는 사려의 특성’이란 공여래장(空如來藏)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숨기는 쪽[能隱義]만 드러냈을 뿐, 이것을 여래장이라는 이름으로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치를 숨겨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므로 여래장이라’ 함은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을 말하는데, 숨겨진 쪽[所隱義]을 잡아서 여래장이라 이름하였다. |
| ‘본성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란 여래장의 성품이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 여래장의 성품에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으니 『무상론(無相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
| 첫째는 종류(種類)의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병(甁)이니 옷이니 하는 따위의 모든 색법(色法)이 4대(大:지·수·화·풍)를 떠나지 않고 모두 네 가지 요소를 성품으로 삼듯이, 중생은 하나의 계[一界]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1계로 종류를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67)에서는 체류(體類)의 뜻이라 하였고,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자성(自性)의 뜻이라고 하였는데, 말은 다른 것 같으나 뜻에는 다름이 없다. |
| 67)인도의 무착(無著)지음. 3권으로 양나라 진제(眞諦)의 번역과 당나라 현장(玄奘)의 번역 등이 있다. 만유는 마침내 유심(唯心)으로 돌아간다는 이론과 이에 의한 종교적 실천을 말하여 대승의 교리가 소승의 교리보다 뛰어남을 주장. 또 아뢰야식과 3성을 말하여 아뢰야를 유식에서는 망식(妄識)이라 하는데 반하여 이 논에서는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 하고, 한편으로는 차별적 미망의 세계를 나타내어 그 망(妄)을 일소하는 곳에 진정한 깨달음이 나타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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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는 인(因)의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나무에는 타는 성질이 있어 불에게 원인이 되는 까닭에 이것을 그 본성이라고 말하듯, 성인의 모든 무루법(無漏法)은 이 본성을 인(因)으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위 두 논(論)에서 한결같이 인이라고 부른다. |
| 셋째는 생긴다[生]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진금(眞金)을 단련하여 장식품을 만들 때 만들어진 장식품은 금을 본성으로 한다. 이 계(界)도 그와 같아서 과지(果地)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낳게 하니, 법신이 생기는 것은 이 계를 본성으로 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생(生)의 뜻이라 하였고,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지득(至得)의 뜻이라 하였다. 과(果) 전에 있다는 뜻에서 쓰는 인(因)의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미 생겼다’는 뜻에 의해 지득(至得)이라고 부른 것이다. |
| 넷째는 바뀌지 않는다[不改]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마치 금강보(金剛寶)의 성질이 일겁(一劫) 동안 한결같이 머물면서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듯이, 이 계(界)가 3세(世)에 평등하게 머물면서 세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출세간에서도 다 없어지지 않는다. 저 두 논(論)에서는 진실(眞實)의 뜻이라고 하였으니, 진실하다는 것은 파괴되지 않는다[不壞]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
| 다섯째는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密藏]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황석(黃石) 중에는 진짜 금의 성질이 있으나 그 광석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이익을 얻을 수가 없다. 녹이고 단련함에 따라서 보배로 쓸 수 있게 되므로 그 본성은 숨겨진 뜻이 있다고 한다. 여래장의 본성도 이와 같아 감싸고 있는 것[纏]을 벗겨내지 않으면 밖에서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 때문에 물이 들지만 그 감싸고 있는 것을 깨뜨려 본성에 맞닥뜨리면 안에 이루어진 청정함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성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는 뜻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성론』에서는 비밀(秘密)이라 하였고, 『섭대승론』에서는 감추어져 있다[藏]고 하였으니 뜻은 같으나 말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본성[性]이란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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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寂不動]’는 것은 간략하게 위의 마지막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고요함’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일각(一覺:여래장)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하였다.68)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이시여, 무엇이 생멸하는 사려의 모습[生滅慮知相]입니까?” |
| [論] 이 아래부터는 여섯 가지 질문과 여섯 가지 대답이 나오는데, 인론생론(因論生論)으로 모든 의심과 논란을 풀어준다. 이는 첫 번째 문답으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숨게 하는 것[能隱]이 사려[慮知]임을 밝혔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아, 이치에는 긍정[可]과 부정[不]이 없다. 긍정과 부정이 있다면 모든 망념이 생겨나니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곧 생멸하는 모습이다.” |
| [論] 이 답은 두 겹으로 되어 있으니, 먼저는 간략하게 답하고[略答] 나중에는 자세하게 설명한다[廣演]. 간략한 대답에 두 구가 있는데, 먼저 무엇을 미혹하고 있는지[所迷]를 말한다. 미혹의 대상이 되는 이치는 마음가는 곳이 사라진 것이므로 ‘이치에는 긍정과 부정이 없다’고 하였다. 가(可)란 옳다[是]는 것이요, 부(不)란 그르다[非]는 뜻이다. 이치는 4구(句)를 끊고 모든 시비를 떠나 있어 분별심으로 닿을 곳이 아니다. |
| 다음에는 무엇이 미혹하는가[能迷]를 밝혔다. ‘옳고 그름이 있으면 모든 망념이 생긴다’는 것은 무명(無明)이 있어서 평등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더러운 마음[六染心]을 함께 일으킨다는 뜻이다. |
|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곧 생멸하는 모습’이라고 함은 여섯 가지 더러운 마음에 거친 것[麤]과 미세한 것[細]이 있다고 할지라도 평등함을 거스르기는 마찬가지라, 이것이 생멸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 68) 일각(一覺)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에 여덟 개의 문답이 있는데, 크게 둘로 분류하면 처음 두 문답은 일각여래장(一覺如來藏)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한 것이고, 나중의 여섯 문답은 인론생론(因論生論)으로 모든 의심과 논란을 제거한 부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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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멸의 모습을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마음과 상응하는 거친[麤] 생멸상이며, 둘째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미세한[細] 생멸상이다. 여기서 거친 것 중의 거친 것[麤中之麤]은 범부의 경계이고, 거친 것 중의 미세한 것[麤中之細]과 미세한 것 중의 거친 것[細中之麤]은 보살의 경계이고, 미세한 것 중의 미세한 것[細中之細]은 부처의 경계이다. |
|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無明)의 훈습(薰習)에 의하여 생기게 되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한다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不覺)의 뜻이고, 연에 의한다는 것은 망령되게 경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이 없어지면 연도 없어진다. 인이 없어지므로 상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이 사라지고, 연이 없어지므로 상응하는 마음[相應心]이 사라진다.” |
|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 여기서 ‘마음과 상응하는 거친 생멸상’이란 세 가지 상응염(相應染)을 말하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미세한 생멸상’이란 세 가지 불상응염(不相應染)이다. ‘거친 것 중의 거친 것’이란, 집상응염(執相應染)과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으로서 모두 6식(識)에 있으므로 범부의 경계이다. ‘거친 것 중의 미세한 것’이란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으로서 제7식(第七識)에 있으며, ‘미세한 것 중의 거친 것’이란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며, ‘미세한 것 중의 미세한 것’이란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이 셋은 모두 제8식(第八識)의 자리에 있다. 이 중에 세 가지 미세한 생멸은 무명(無明)이라는 바람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인(因)이 없어지므로 불상응심(不相應心)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또 세 가지 거친 생멸은 경계(境界)의 바람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연(緣)이 없어지므로 상응심(相應心)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 말한 것과 같다. |
| 지금 이 경에서 ‘천 가지 생각’이라고 한 것은 모든 불상응염의 미세한 분별을 다 포함했기 때문이며, ‘만 가지 생각’이라고 한 것은 모든 상응염심의 거친 분별을 다 포함했기 때문인데, 둘 다 동요하는 생각의 모습[動念之相]이므로 ‘생멸하는 모습[生滅相]’이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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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보살아, 본각의 성품과 모습[性相]을 살펴보았더니 이치[理]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 그러니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은 도의 이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헛되이 움직이고 산란케 하여 본래의 심왕(心王)을 잃는다.” |
| [論] 이 아래로는 자세한 설명인데, 여기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생멸의 모습에 대비해서 이치가 만족되어 있음을 밝혔고, 둘째는 이치가 만족한데 대비해서 물든 마음에는 결여가 있음을 밝혔으며, 셋째는 이치를 따라 물든 마음을 없애서 동요를 버리고 고요한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이익[利]을 설명하였다. |
| 처음에 ‘보살’이라고 한 것은 해탈보살을 부른 말이다. ‘본각의 성상을 관찰했다[觀本性相]’고 한 것은, 부처님께서 본각(本覺) 여래장성(如來藏性)을 관하셨다는 말이다. ‘이치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理自滿足]’고 한 것은, 관찰한 바 본각 여래장의 이치에 무량한 성품의 공덕이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또한 진여(眞如) 자체의 모습은 본래부터 자성에 저절로 일체의 공덕을 만족하고 있다. 이른바 그 자체에 큰 지혜의 빛이라는 뜻이 있고,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 있으며, 진실로 안다는 뜻이 있고, 자성이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이라는 뜻이 있으며,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뜻이 있고, 청량하고 불변하고 자재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불법, 즉 떠나지 않고, 끊어지지 않으며, 다르지 않은 불가사의한 불법을 구족하고 있으며 …… 조금도 모자람 없이 만족해 있는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표현하며, 여래의 법신이라고도 부른다.” 지금 이 『금강삼매경』에서는 ‘이치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理自滿足]’고 하여 총괄적으로 그와 같은 공덕이 만족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첫 단락[생멸의 모습에 대비해서 이치가 만족되어 있음을 밝힘(對生滅相 顯理滿足)]을 마친다. |
| 다음으로 생멸하는 동념(動念)의 잘못을 밝힌다. 여기에서는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음을 전체적으로 밝혔다. 『기신론』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풀이하였다. |
| [문] ‘진여는 그 체(體)가 평등하여 모든 모양을 떠나 있다’고 위에서 말했는데, 이번에는 어째서 체에는 그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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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 사실 이러한 모든 공덕의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차별의 모양은 없다. 똑같은 한 맛[一味]이라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무슨 뜻인가? 분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분별상(分別相)을 떠났으니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業識)에 의지해서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어떻게 나타내는가? 모든 법은 본래 마음뿐[唯心]이어서 사실은 모습[相]과 생각[念]이 없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생각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본다. 이런 뜻에서 무명(無明)이라 한다. |
| 그러므로 마음의 본성[心性]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큰 지혜의 광명[大智慧光明]이다. 만약 마음에 소견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게 되지만 심성(心性)이 소견[見]을 여의면 법계를 두루 비춘다. 그러므로 마음에 동요가 있으면 진실되게 아는 것이 못 되고, 자성(自性)이 없어서 상(常)·낙(樂)·아(我)·정(淨)하지도 못하며 ……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허망한 생각의 오염[妄染]을 다 갖추게 된다. |
| 이러한 뜻에 대비해서 심성(心性)에 동요가 없으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온갖 청정한 공덕상이 나타난다. 만약 마음에 생멸이 일어나서 다시 앞의 법에 대해 생각할 만하다는 견해를 가지면, 모자라는 것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정법(淨法)의 무량한 공덕은 다름 아닌 일심(一心)이며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으므로 만족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법신여래(法身知來)의 장(藏)이라고 부른다.” |
| 지금 이 경에서 ‘헛되이 움직이고 산란케 함’이란,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진실한 앎이 아니며, 자성이 없으면 상(常)·낙(樂)·아(我)·정(淨)이 아니기 때문에 ‘동(動)’이라고 하였다. 마음이 소견을 일으키면 불견(不見)의 모습[相]이 있으므로 ‘난(亂)’이라고 하였다. |
| ‘본래의 심왕을 잃음’이란, 무량한 공덕이 일심(一心)인데, 일심이 주(主)가 되므로 ‘심왕(心王)’이라고 하며, 생멸심이 동요하고 산란하면 이 심왕에 위반되어 다시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잃는다[失]’고 하였다. |
| [經] “그러나 사려(思慮)가 없으면 생멸이 없고, 실제와 같아져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식(識)이 안정되고 고요하여 끊임없는 흐름[流注]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섯 가지 깨끗한 법을 얻는데, 이를 대승(大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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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고 한다.” |
| [論] 이 아래는 셋째 부분으로 이치에 순종하여 오염을 없앰으로써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감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도 둘이 있으니 정곡으로 설명한 부분[正顯]과 거듭 설명해서 결론짓는 부분[重成]인데, 위의 경문은 전자에 해당하며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감을 밝힌다. |
| ‘사려가 없으면[若無思慮]’이란, 초지(初地)에서 불지(佛地)까지 점차로 일심의 평등한 법계에 순응하여 모든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
| ‘생멸이 없다[卽無生滅]’고 한 것은, 앞에서의 사려로 말미암아 생멸의 모습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려가 없으므로 영원히 분별이 없고, 두 가지 생멸(生滅)을 다 온전히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여기서부터는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어서 미래가 다하도록 다시는 동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실제와 같아져서 일어나지 않는다[如實不起]’고 하였다. |
| 두 가지 생멸이 끝까지 다 종식되었을 때 여덟 가지의 식의 움직임이 모두 다 고요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끊임없이 흐르던 여섯 염심[六染]이 영원히 끊어져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식(識)이 안정되고 고요하여 끊임없는 흐름[流注]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
| 끊임없는 흐름이 생기지 않으니 법계가 원만하게 나타나고, 모든 식(識)이 안정되니 4지(智)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깨끗한 법을 얻는다[得五法淨]’고 말한 것이다. 싣고 나르는[運載] 공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총괄하는 의미에서 ‘대승(大乘)’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간다’ 라고 한 부분을 정곡으로 설명한 것이다. |
| [經] “보살아, 5법[法]의 청정함에 들어가면 마음에 망념이 없으며, 망념이 없으면 곧 여래께서 자각하신 거룩한 지혜[聖智]의 경지에 들어간다.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모든 것이 본래부터 생기지 않음을 잘 알 것이요,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상이 없어진다.” |
| [論] 이것은 거듭 설명해서 결론짓는 부분[重顯:重成]인데 세 구가 있다. 첫째 ‘5법의 청정함에 들어가면 마음에 망념이 없다’는 것은 일심의 근원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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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갔을 때는 망념의 불각(不覺)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망념이 없으면 곧 여래께서 자각하신 거룩한 지혜의 경지에 든다’고 한 것은 불각이 다했을 때 시각(始覺)의 원만한 지혜 경지에 들기 때문에 한 말이요, 불각을 상대로 시각의 원만함을 드러낸 것이다. |
| 셋째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일체가 본래부터 생기지 않음을 잘 알고’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상이 없어진다’ 하였는데, 이는 시각이 원만할 때 불각의 네 가지 상이 망념을 일으키나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곧 본래부터 망상이란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시각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
| 『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중생을 각(覺)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 생각이 계속 잇달아 생겨나서 한번도 생각을 떠난 일이 없기 때문에 시작 없는 때로부터의 무명[無始無明]이라고 한다. 생각이 없어지면 심상(心相)의 생(生)·주(住)·이(異)·멸(滅)을 알게 되니 무념(無念)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사실상 시각(始覺)의 다름이 없이 네 가지 모습이 독자적으로 존립하지 못하고 동시에 있어 본래 평등하여 일각(一覺)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
| 나는 위 글을 이렇게 생각한다. |
| 이 중에서 ‘생각이 없어지면 심상의 생주이멸을 알 것’이라 함은, 이 경에서 ‘모든 것이 …임을 잘 안다[善知一切]’라고 한 말을 나타낸다. ‘사실상 시각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은 이 경에서 ‘본래 생기지 않음을 잘 알면’이라고 한 말을 나타낸다. 또한 ‘네 가지 모습이 독자적으로 존립하지 못하고 동시에 있어 본래 평등하여 일각(一覺)과 같아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이 경에서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념이 없어진다’고 한 말을 나타낸 것이다. 꿈속에 강을 건너는 비유69)도 이런 맥락에서 설해져야 한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69)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자기 몸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손발을 허우적거려 저쪽 언덕에 닿았는데, 꿈에서 깨어나서는 피안과 차안이 없었으나 그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생멸하는 념이 다 멸하면 각이 청정해지나 깨달음의 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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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자이시여, 망상(妄想)이 없으면 멈추고[止] 그치게[息]하는 일도 없겠습니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문답 중에) 둘째 문답인데, 멈춤과 그침이 없음을 밝혔다. 본래 망상이 없다면 멈추게 할 대상[所止]이 없고, 멈추게 할 대상이 없으면 멈추는 일[能止]도 없다. 멈추는 일이 없으므로 시각(始覺)도 당연히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는 것이 이 질문의 의도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아, 허망[妄]이란 본래 생겨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치게 할 만한[息] 허망이 없으며, 마음이 본래 무심임을 알면 멈추게 할 만한 마음도 없다. 나뉨[分]이 없고 구별[別]이 없어 현식(現識)이 생기지 않는다. 멈추게[止]할만한 생이 없으니 그것이 멈춤 없는 것이다. 그렇다해서 멈춤이 없는 것[無止]도 아니다. 왜냐하면 멈춤 없음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
| [論] 이렇게 답한 의도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멈출 것이 없음을 허락하고 나중에 멈출 것이 없음을 부정한다. 허락한다는 것은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부정한다는 것은 시각이 그대로 본각은 아니기 때문이다. |
| 허락하는 말씀에서 그침과 멈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허망은 일어나 동요하니까 그치게 해야 하고, 마음은 흩어져 달아나므로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러나 본래 일어남[起]도 없고, 달아남[馳]도 없으므로 그치게 해야 할 것도 멈추게 해야 할 것도 없다. |
| ‘나눔이 없다[無分]’고 한 것은 견분(見分)과 나뉘어진 상분(相分)이 없다는 뜻이다. ‘구별이 없다[無別]’고 한 것은 상분과 구별되는 견분이 없다는 뜻이다. 상분과 견분이 나뉘거나 구별되는 일이 없다면 현재의 식[現識]이 본래 생기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식이 생기지 않음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다같이 알기 때문에 현재를 들어서 본래 생하지 않음[本不生]을 밝힌 것이다. |
| 이미 멈추어야 할[所止] 불각(不覺)이 생기는 일이 없으므로 멈추게 하는[能止] 시각(始覺)도 따로 있지 않으니, 따로 있지 않다는 입장에서 질문의 뜻을 긍정한 것이다. ‘그렇다해서 멈춤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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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지 않은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멈춤 없음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생기는 일 없는 망심(妄心)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생기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저 무생(無生)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무생(無生)만은 아니기 때문에 멈출 바가 없지 않다. 그런 까닭에 멈추게 하는 각(覺)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답하였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이시여, 만약 멈출 것이 없는 것을 멈추게 한다면 멈춘다[止]는 것이 곧 생기는 것[生]이 될 터인데 어찌 무생(無生)이라고 하겠습니까?” |
| [論] 여기서부터는 셋째 문답으로서 무생관(無生觀)을 밝혔다. 만약에 멈추게 하는 각(覺)이 있다고 한다면 멈춤의 관(觀)이 생길 것이니, 불각(不覺)의 일어남을 막았다 할지라도 이번에는 다시 시각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생관(無生觀)을 증득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따져 묻는 이의 의도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아, 멈추는 그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기는 하나 멈추고 난 후에는 멈춤이 없다. 멈춤이 없는[無止] 거기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름이 없는 거기에도 머물지 않으니 어찌 생(生)한다 하겠는가?” |
| [論] 이 답에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먼저는 인정하고[與], 나중에는 부정한다[奪]. 인정한다는 것은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許]한 것이다. 방편관(方便觀)에서는 멈추게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세제일법(世第一 法)을 닦을 때는 식(識)이 생기는 것을 멈추어 식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멈추게 하는 마음[能止心]이 무(無)를 취하여 생기니, 멈추는 바로 그 순간에는 생겨남을 긍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멈추는 그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
| 이 한 생각을 넘어서면 무(無)를 취하지 않으니, 무를 취하지 않으므로 취하는 마음[取心]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멈추고 난 후에는 멈춤이 없다’고 하였다. 이 때는 일체의 분별을 멀리 떠나기 때문에 무지(無止)의 무(無)에도 머물지 않고, 스스로 머무름이 없다는 마음도 취하지 않아 능소(能所)가 영원히 끊어지니 평등하고도 평등하다. 이런 때 생겨난다고 할 그 무엇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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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겠는가? 이렇게 답하였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이시여, 생겨남이 없는 마음은 무엇을 취하고 버리며, 어떤 법상(法相)에 머뭅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생겨남이 없는 마음은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마음 아닌 데[不心] 머물고 법 아닌 데[不法]에 머문다.” |
| [論] 이것은 네 번째 문답인데 더하는 견해와 덜어내는 견해를 버리게 한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학자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관(觀)에 드는 마음은 모습 없는 이치[無相理]를 취하고, 모습 있는 모든 일[事]을 버린다’고. 이와 같은 증익견(增益見)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不取不捨]’고 하였다. |
| 혹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수도 있다. ‘관(觀)에 들어 있을 때는 도무지 머무를 법이 없고, 머무는 마음도 없다. 그렇다면 필경무(畢竟無)70)와 다름이 없다’고. 더하거나 덜어내는 이런 식의 소견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음 아닌 데 머물고 법 아닌 데 머문다’고 하였다. 머무름이 있지 않다 할지라도 머무름이 없는 것이 아니니, 머무름이 없지 않으므로 머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이시여, 마음 아닌 데 머물며, 법 아닌 데 머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바로 마음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며, 법을 내지 않는 것이 법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다섯 번째 문답인데 의심나는 생각을 거듭 떨쳐주는 것이다. ‘이미 머문다고 했다면 그것은 마음이요, 법일 것이다. 그런데 마음도 법도 아니라고 한다면 머물지 않는다[不住]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이 말씀 |
| 70) 거북 털이나 토끼 뿔과 같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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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너무 심오하니 어떻게 믿고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의문의 골자이다. |
| 부처님께서 답하신 뜻은, 증득하는 주체인 관심[觀心]이 있어도 안 되고, 증득의 대상이 되는 이법(理法)이 있어도 안 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내지[生] 않는다, 법을 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낸다[生]는 것은 지닌다[存]는 뜻과 같다. |
| 언제나 마음과 법을 내지 않는다고 하면 혹 실념(失念)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므로 ‘마음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며, 법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머문다[住]는 말은 항상하다[恒]는 말과 같다. 항상하여 물러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머문다고 한다. 머문다[住]는 뜻이 이렇게 마음 아닌 데에 순응하니 그 사이에 무슨 어긋남이 있으랴. 이렇게 해서 물음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아래부터는 이 이치를 거듭 설명한다. |
| [經] “선남자야, 마음과 법을 내지 않으면 의지(依止)가 없고, 아무 행(行)에도 머물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습이 없다. 비유하면 저 허공이 움직이거나 머무는 일이 없고, 또 무엇을 일으키거나 만드는 일이 없어 여기다 저기다 할 것이 없다는 것과 같다. 공(空)한 마음의 눈을 얻고 법이 공한 몸[法空身]을 얻으면 5음(陰)과 6입(入)이 모두 다 공적해질 것이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서 거듭 설명하는 것[重顯]인데,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모든 상을 멀리 떠나 3세에 두루 미침을 밝히고, 다음에는 법계에 수순해서 6바라밀을 남김 없이 닦음을 밝혔다. |
| 첫 부분에도 세 구가 있으니, 즉 법(法)과 유(喩)와 합(合)이다. ‘마음과 법을 내지 않음’이란 앞서 질문에 답한 구절을 반복해 서두를 꺼낸 것이다. |
| ‘의지가 없다’란 횡적으로 보았을 때 의지하는 주체[能依]와 의지할 대상[所依]의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아무 행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종적으로 보았을 때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행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와 미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공적하다’ 하였고, 능(能)과 소(所)가 없기 때문에 ‘다른 모습이 없다’고 하였다. ‘비유하면…저’ 이하는, 비유를 끌어오는 두 번째 부분이다. ‘움직이거나 머무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세간의 허공이 무위(無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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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常住)하여 앞서 멸했다가 뒤에 생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모든 행(行)에 머물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또 의지할 주체에도 의지할 대상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은 ‘의지(依止)가 없다’고 한 말씀에 비유한 것이다. |
| ‘일으키거나 만드는 일이 없음’이란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다’는 말과 같다. ‘여기다 저기다 할 것이 없음’이란 ‘다른 모습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이 허공을 들어서 불생관(不生觀)을 비유한 것이다. |
| 합(合:주장과 비유를 맞추는 것)에서 ‘공한 마음의 눈을 얻었다’는 것은 능관심(能觀心:내가 관찰을 하노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관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법이 공한 몸을 얻음’이란 소관법(所觀法:관찰할 법이 있다는 생각)이 생기지 않으므로 평등한 법신을 얻는다는 뜻이다. |
| ‘5음이 모두 공하다’란 공한 마음의 눈을 얻어서 3세의 5음이 공하다는 사실을 통달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니, 앞에서 ‘허공이 무엇을 일으키거나 만들어내는 일이 없다’한 비유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
| ‘6입이 모두 공함’이란 법이 공한 몸을 얻어서 안팎에 두루하여 6입이 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허공에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다’고 한 비유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
| [經] “선남자야, 공한 법을 닦는 자는 삼계에 의지하지 않으며, 계상(戒相)에 머물지 않으며, 청정하여 생각이 없으며, 다잡지도 않고 풀어주지도 않으며, 그 성품이 금강과 같으며, 3보(寶)를 무너뜨리지 않으니, 공심(空心)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波羅蜜)을 갖춘다.” |
| [論] 이것은 두 번째로71) 6도(度)를 빠짐없이 닦음을 밝히는 부분이다. |
| ‘공한 법을 닦는 자’란 앞에서 말한 공적한 마음을 되새긴 것이다. 그 이하는 6도를 갖춘 것을 따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삼계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보시바라밀[施度]을 갖추며, 계상(戒相)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지계바라밀[戒度]을 갖추며, 청정하여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인욕바라밀[忍度]을 갖 |
| 71) 다섯 번째 문답을 질문에 대한 답변[正答]과 거듭 설명하는 부분[重顯]으로 나누었다. 중현에도 두 가지가 있어서 먼저 모든 상을 멀리 떠나 3세에 두루 미침을 밝히고, 이어서 법계에 수순해서 6바라밀을 남김 없이 닦음을 밝히는데, 여기서부터가 후자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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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며, 다잡지도 않고 풀어버리지도 않기 때문에 정진바라밀[精進]을 갖추며, 성품이 금강과 같기 때문에 선정바라밀[禪定]을 갖추며, 3보를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般若]을 갖춘다. |
| 어째서 그런가? 오직 관하는 마음 하나가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을 두루 비추어서 온갖 쟁론을 끊었기 때문에 3보를 구비하며, 3보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의 공한 마음은 별달리 움직이거나 일으키는 일 없이 6도를 갖추기 때문에 ‘공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을 갖춘다’고 하였다. |
|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이시여, 6바라밀은 모두 모양이 있는데, 모양이 있는 법으로 세간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선남자야, 내가 말한 6바라밀은 모양이 없고[無相] 애써 노력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無爲].” |
| [論] 이 아래는 여섯 번째 문답으로서 세간을 벗어나는 6바라밀의 의미를 거듭 설명한 것이다. 묻는 자는 의심을 빌미로 결단을 보기 위해 세간에서 닦는 6바라밀의 현상[事相]을 가지고 출세간의 마음에 6바라밀을 어떻게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내놓은 것이다. 답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간략하게 표방하고, 둘째는 자세히 해석했는데 이 문장은 간략하게 표방한 것이다. |
| 무상(無相)이란 주고[施] 받는[受] 것 등 3륜의 모양[三輪相]을 여읜 것을 말한다. |
| ‘무위(無爲)’란 생(生)·주(住) 등 세 가지 유위(有爲)가 없음을 말한다. 내가 앞에서 ‘일심(一心)에 6바라밀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상(無相)이며 무위(無爲)이기 때문이다. 이 6도(度)는 곧 출세간이므로 세간의 유상(有相)·유위(有爲)와는 다르다. |
| [經] “어째서 그런가? 욕심을 떠난 경지에 잘 들어가서 마음이 항상 청정하고, 진실한 말의 방편과 본각의 이익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니 이것이 단바라밀(檀波羅蜜:보시바라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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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 이 아래는 자세하게 해석한 것인데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는 따로 따로 해석하고[別釋], 나중에는 총괄적으로 밝힌다[摠明]. |
| ‘어째서 그런가?’란 물음을 제기하여 말을 꺼낸 것으로, 이미 여섯 개의 법수[六數]가 있는데 어째서 무상이라고 하느냐는 뜻이다. 진여에 전의(轉依)하는 것을 두고 ‘욕심을 떠났다’고 하는데, 3유(有)의 욕(欲)을 떠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체(體)를 관찰하여 이해했기 때문에 ‘잘 들어갔다’고 하였다. 다시는 들어가고 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이라고 하였다. 3륜(輸)72)의 때[垢]를 벗어났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위에서는 ‘삼계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
| 이치에 맞게 설하므로 ‘진실한 말[實語]’이라 하였다. 솜씨 있게 편리하게 인도하므로 ‘방편(方便)’이라 하였는데, 공용(功用)이 없을지라도 근기에 맞게 말을 꺼내는 것이 마치 하늘의 북과 같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모든 중생이 오직 하나인 본각(本覺)이며,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일각(一覺)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본각의 이로움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출세간의 단바라밀(檀波羅蜜)73)이라고 한다. |
| [經] “지극한 생각[至念]이 견고하여 마음이 항상 머무르지 않으며, 청정하고 물들지 않아 삼계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이 시바라밀(尸波羅蜜)74)이다.” |
| [論]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기를 외아들을 보듯이 하는 까닭에 ‘지극한 생각이 견고하다’고 하는 것이다. |
|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열반에 머물지 않으므로 ‘마음이 항상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2승(乘)의 과실을 예방하는 것이다. |
| 밝고 철저하게 마음을 관찰하여 모든 번뇌[諸漏]에 뒤섞이지 않으므로 ‘청정하고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육도(六道)에 두루 걸쳐 다니지만 모두 공적한 경지를 통달하였으므로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범부의 악을 멈추게 한 것이다. 이는 범부와 성현의 계상(戒相)에 머무르 |
| 72) 보시할 때 시자(施者)·수자(受者)·시물(施物)을 말함. |
| 73) 보시바라밀. |
| 74) 지계바라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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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위에서도 ‘계상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출세간의 시바라밀(尸波羅蜜)이라고 한다. |
| [經] “공(空)을 닦아 번뇌의 얽힘[結]을 끊으며, 세속의 모든 것[諸有]에 의지하지 않고, 3업을 적정(寂靜)하게 하며, 몸에도 마음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이다.” |
| [論] 위의 두 구는 공한 이치에 평안히 있어 모든 번뇌를 여읜 것이요, 아래 두 구는 3업을 고요하게 하고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이니 모두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뜻이다. 위에서는 이를 ‘청정하여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
| [經] “명수(名數:法數)를 떠나고 공견(空見)과 유견(有見)을 끊어서 5음(陰)이 공(空)한 데 깊이 들어가니 이것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75)이다.” |
| [論] 위 두 구는 거친 것[麤]을 여의고 정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한 데 들어간다’는 것은 나아간다[進]는 뜻이다. 위에서는 이를 ‘다잡지도 않고 놓아버리지도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출세간의 정진바라밀[精進度]이다. |
| [經] “공적함을 모두 떠나 어떤 공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마음이 무(無)에 처하여 대공(大空)에 있으니[心處無 在大空:어떤 본에는 ‘心處無住 不住大空’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선바라밀[禪波羅蜜]이다.” |
| [論] ‘공적함을 모두 떠난다’는 것은 응화(應化)해서 생(生)을 받을 때 3유(有)에 두루 미치기 때문이다. ‘어떤 공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5공(空)에 막히지 않고[不滯] 항상 시방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선(禪)을 밝힌 것이다. |
| ‘마음이 무에 처함[心處無]’이란 몸은 비록 3유에 걸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이무(理無)에 처함이니, ‘이무(理無)’란 이(理)가 3유의 모습을 끊었다는 뜻이다. ‘대공(大空)에 있다’는 것은 항상 시방에서 교화를 할지라도 마음이 대공에 있다는 것이니, 대공이란 시방의 큰 모습으로서 공하다는 |
| 75) 정진바리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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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이다. 이는 불법(佛法)을 성취하는 선(禪)을 밝힌 것이다. |
| 몸은 비록 무언가를 일으키고 만든다 할지라도 마음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이를 위에서 ‘성품이 금강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대공에는 대략 다섯 가지 뜻이 있다. |
| 첫째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의 두 공을 대공이라고 한다. 『잡아함(雜阿含)』의 「대공경(大空經)」과 『유가론(瑜伽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
| 둘째 반야바라밀공을 대공이라고 부른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능가경(楞伽經)』에서도 역시 같은 설명을 하였다. |
| 셋째 기세계의 공함[器世界空]을 대공이라고 한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중변론(中邊論)』에서도 같은 설명을 하였다. |
| 넷째 아뢰야식의 공함[阿梨耶識空]을 대공이라고 부른다. 『십지론(十地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
| 다섯째 시방(十方)의 모습이 공함을 대공이라 부른다. 『지도론(智度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지금 이 경문은 다섯 번째에 해당하나, 우선 편의에 따라 이렇게 설명했을 뿐이다. |
| [經]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心相]이 없으나 허공을 취하지 않으며, 모든 행(行)이 생하지 않으나 적멸(寂滅)을 증득[證]하지도 않으며,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性]이 항상 평등하며,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므로,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반야바라밀(船若波羅蜜)이다.” |
| [論]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이 없다’는 것은, 자기 내면을 관할 때 마음의 상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허공을 취하지 않음’이란 마음이 비어 있다는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증도혜(證道慧)라 한다. |
| ‘모든 행이 생하지 않음’이란 모든 행이 본래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적멸을 증득하지도 않음’이란 무생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밖을 교화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교도혜(敎道慧)라고 한다. |
|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는 것은 앞의 2도(道)가 항상 서로 분리되지 않음을 말한다. 움직이면서도 언제나 고요하고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움직이므로 출입이 없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 병행하되 한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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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치우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다. |
|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란 증득하는 도의 항상 고요한 상(相)을 설명한 것이니, 그 상은 진제(眞諦)와 같고 법성(法性)과 동등하다. |
|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가르치는 교리가 항상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니, 10중법계(重法界)에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적조혜(寂照慧)에 머물러 지체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 가운데에는 깨달아 비춘다는 뜻과 법으로 삼을 만하다는 뜻과 쟁론을 끊었다는 뜻이 구비되어 있다. 이를 위에서는 ‘3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출세간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상 6바라밀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을 마친다. |
| [經] “선남자야, 이 6바라밀은 모두 본각(本覺)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총괄적인 설명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6도(度)가 해탈과 동일함을 밝히고, 다음에 해탈이 곧 열반임을 드러낸다.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6바라밀을 처음 닦아 모두 본각과 같아지고, 본각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 본각의 이익이 행해지기 때문에 여래장에 들어가는데, 그 본성이 본래 고요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바뀌거나 전변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6바라밀은 본각의 이로움을 얻기 때문에 망념과 유전(流轉)하는 모양을 멀리 떠난다. 그러므로 ‘초연히 세간을 벗어난다’고 하였다. 또한 법성(法性)에 들어가기 때문에 법계(法界)에 두루 미쳐 모양이 없고 작위가 없으며, 결박됨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하였다. |
| [經] “선남자야, 이와 같은 해탈법의 모습은 모두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으며, 또한 벗어났다거나[解], 벗어나지 못했다는[不解] 구별이 없다. 이를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해탈의 모습은 형상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동요도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고요한 열반이지만 그렇다고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 [論] 둘째는 해탈이 곧 열반임을 밝힌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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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을 말하고 다음에 열반을 말한다.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한 것은, 6도의 행은 모두 본각과 동일한 것인데 본각의 모습이 상(相)과 성(性)을 떠나 있기 때문에 상(相)이 없다고 하였다. 6도의 행은 닦음도 떠났고, 행함도 떠난 것이므로 행(行)이 없다고 하였다. 행과 상이 모두 끊어졌으므로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였다. 해탈법의 모습이 이미 이와 같으니 어찌 결박을 떠난 벗어남[解]이 있으며, 또 어찌 벗어나지 못한 결박이 있으랴. 그러므로 ‘벗어났다거나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
| ‘왜냐 하면’은, 어째서 6도의 행을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느냐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여, 그와 같은 6도는 단지 해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반이기도 하기 때문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해탈의 모습이 무상하고 무행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해탈을 지적한 것이요, ‘동요도 없고[無動] 산란함도 없어서[無亂] 고요한[寂靜] 열반[涅槃]’이란 열반에 관한 설명이다. 앞에서 설한 6도의 행이란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본래 적정한 열반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6도가 열반이라면 어찌 모습과 행이 있겠는가? 동요하고 산란한 모습을 떠났으므로 적정이라고 하고, 또 그 적정한 본성마저도 떠났으므로 열반의 상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6도·해탈·열반은 초지(初地)에서 시작하여 불지(佛地)까지 이른다. 여기서 열반이라고 한 것은 네 가지 뜻 중에서 본래 청정한 열반, 즉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해탈(解脫)을 가리킨다. 자재하다는 뜻과 장애가 없다는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무애해탈(無碍解脫)이라고 말한다. |
| [經] 해탈의 뜻이 대단히 많아서 쌍도(雙道)76) 중의 해탈이 있고 3점(點)77) 중의 해탈이 있으며 오분법신(五分法身)78) 중의 해탈이 있고 십종해탈문(十種解脫門) 중의 해탈이 있는데, 그 같은 여러 문 가운데 어느 문에 해당하는가? |
| 76) 해탈도(解脫道)와 무간도(無間道). |
| 77) 범어의 ∴자의 모양이 3점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함. 여기에서는 열반덕(涅槃德)·지덕(知德)·해탈덕(解脫德)을 3점 중의 해탈이라 함. |
| 78)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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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 이는 3사(事)79) 중의 해탈이다. 해탈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6도의 행에 3사의 덕(德)이 있음을 드러내려고 한 것인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초지(初地)에서 이미 얻고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 마지막의 완성을 보는 것이다. 경에서도 “보살이 대열반에 머물면 큰 뜻을 세울 수 있다…”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
| [經] 해탈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껏 없던 일이라고 크게 기뻐하면서 뜻을 다시 펴기 위하여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큰 깨달음을 구족하신 세존께서 |
| 대중을 위하여 법을 설명하시되 |
| 모두 다 일승(一乘)에 대한 설법이요 |
| 이승(二乘)의 도는 설하지 않으셨네. |
| 일미(一味)의 모양 없는 이로움은 |
| 마치 저 큰 허공[大虛空]과 같아서 |
|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
| 제각기 다른 성품[性]을 따라 |
| 모두 다 근본 자리를 얻게 하시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거듭 송한 것[重頌]이다.80) 먼저 경을 서술하는 자의 서문이 있고 게송이 시작된다. 게송은 모두 7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앞의 여섯 게송은 개별적인 게송이고, 뒤의 한 게송은 총괄하는 게송이다. 이 게송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 2송 1구는(장행 중에서 논지를 간략하게 표시했던) 약표(畧標)의 부분이고, 둘째 3송 3구는 뒤의 자세한 해석 부분[廣釋]을 노래 한 것이다. 약표 중에서 ‘모든 부 |
| 79) 자재(自在)·무장(無障)·무애(無碍)를 말함. |
| 80) 무상법품(無相法品) 서두에 세존이 삼매에서 일어나 “諸佛智地 入實相法 決定性故”라고 설법을 시작하는 부분부터가 본격적인 설법[正發言說]에 들어가는데, 이를 크게 장행(長行)과 중송(重頌) 둘로 나눈 가운데 여기서부터가 중송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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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法相)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며, 방편과 신통으로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無相利]을 얻게 하신다’라고 하신 것은 지금 이 게송 중에서는 첫 1송으로 노래한다. 또한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들은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이를 알 수 있으니) 제도할 만한 중생이면 모두 일미(一味)를 설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 이 게송에서는 세 가지 뜻[三義:法·喩·合]으로 노래한다. 즉 앞의 1구는 법(法), 다음 2구는 유(喩), 끝의 2구는 합(合)에 해당한다. |
| [經] 저와 같이 마음[心]과 나[我]를 떠나면 |
| 하나의 법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
|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 |
| 모두 다 본각(本覺)의 이로움[利]을 얻게 하여 |
|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 버리네. |
| [論] 이 아래는 자세히 해석한 부분을 송한 것인데 이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다섯 구는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한 것이고, 다음 두 구 반은 일각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
| 무상관을 설명하는 게송에도 정광(正廣)과 중현(重顯)이 있다. 지금 처음 두 구절은 정광의 글이다. 정광 중에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방편관(方便觀)을, 다음에 정관(正觀)을 밝힌다. |
| 지금 이 게송 가운데 정관을 노래한 것은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心:法執)과 아(我:我執)를 떠나게 해야 한다…’고 하고 능소(能所)를 떠나는 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이 두 구가 바로 그 문장들을 노래한 것이다. |
| 또한 이 게송에서 ‘하나의 법[一法]’이란 유(有)와 무(無)의 극단을 멀리 떠난 하나의 중도관(中道觀)을 뜻하니, 마음(心)·나[我] 두 가지 집착에서 멀리 떠나도록 한 것이다. |
| 다음에는 거듭 설명하는 글 중에 네 개의 문답이 있는데, 지금 두 구는 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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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째 문답을 노래한 것이다. |
|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라는 것은 저 첫 번째 답 가운데 ‘마음의 온갖 모습[相]은 본래부터 근본[本]이 없으며… (근본 자리[本處]가 본래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글에 해당하며 동행총상관(同行總相觀)이다. 둘째 문답 중에서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게 하라’ 한 것과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며, 반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어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한 글 등은 이행별상관(異行別相觀)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동행(同行)과 이행(異行)은 들어가는 곳[實際]에 차이가 없으므로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 ‘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實際]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
| 또 이 게송에서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버린다’고 한 것은 나중의 두 번째 문답의 게송이다. 셋째 답 중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것을 그대로 게송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2견(二見:有見·無見)을 없앤다고 말한다. 또한 넷째 답 중에서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 본생(本生)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며, 그 공적함이 머무는 곳 없고… ’라 했는데, 지금 그것을 송하여 두 가지 상[二相]을 끊었다고 한 것이다. |
| [經] 적정한 열반에 있어도 |
| 증득했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고 |
| 결정한 자리에 들어가 |
|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네. |
| [論] 이 아래의 2송 반은 일각(一覺)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일각을 자세히 설명한 중에도 정광(正廣)과 중현(重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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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데 지금 이 게송은 중현만을 노래하고 있다. 중현문 가운데에도 여섯 개의 문답이 있다. 이 중에 두 부분이 있으니 앞의 1송으로 여섯 번째 답을 노래하고, 다음 1송 반으로 다섯 번째 답을 노래하고, 그 전의 네 문답은 노래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여섯 번째 답 중에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 해탈의 모습은 형상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동요도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고요한 열반이지만 그렇다고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게송에서는 순서를 거꾸로 노래한 것이다. |
| [經] 공한 마음의 고요한 경지에서는 |
| 적멸하여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
| 저 금강의 본성과 같아 |
| 3보를 무너뜨리는 일 없이 |
| 6바라밀을 모두 다 갖추어 |
| 모든 중생을 제도하네. |
| [論] 이 게송은 다섯 번째 답에 대한 노래이다. 저 경문에 말하기를 ‘마음과 법을 내지 않으면 의지(依止)가 없고, 아무 행(行)에도 머물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습이 없다. 그 성품이 금강과 같으며, 3보(寶)를 무너뜨리지 않으니, 공심(空心)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波羅蜜)을 갖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게송에서 이 내용을 순서대로 노래한 것이다. |
| [經]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되 |
| 다 소승으로써 하지 않고 |
| 한 가지 맛의 법인(法印)뿐이니 |
| 일승으로 성취한 것이로다. |
| [論] 이 1송은 총괄하는 게송이다. 앞의 1품[無相法品] 전체의 요지를 총괄적으로 노래한 것이니, 그 요지에 대한 해석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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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다. |
| [經] 그 때 대중이 이러한 뜻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마음[心]과 나[我]에 대한 집착을 떠나 공(空)과 무상(無相)에 들어갔다. 마음이 넓고 활달해져서 모두 결정성을 얻어 결박을 끊고 번뇌를 다 없앴다. |
| [論] 이 일품[無相法品] 속에는 세 부분이 있는데 그 중 두 부분은 앞에서 다 해석하였고, 이것은 세 번째로 그 때의 대중들이 이익 얻음을 나타낸 부분이다. |
| ‘마음과 나에 대한 집착을 떠났다’는 것은, 2공(空)의 진여(眞如)를 증득함을 말한다. ‘결박[結]을 끊고 번뇌[漏]를 다 없앴다’고 한 것은, 견혹(見惑)과 수혹(修惑) 두 가지 의혹을 끊어버린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초지(初地), 즉 견도(見道)에 들어갈 때 견혹을 정곡으로 끊고 겸해서 수혹까지도 끊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 내용은 『미륵소문론(彌勒所問論)』에서 말한 것과 같고, 더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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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삼매경론 중권 |
| 신라국 사문 원효 지음 |
| 번역 |
| 3. 무생행품(無生行品) |
| [論] 보살은 관행(觀行)이 성취되었을 때 스스로 마음 관찰할 줄을 알고 이치[理]에 따라 수행하므로 마음을 일으키는 일[生心]이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행(行)이 있는 것도 아니며 행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만 증익으로 치우친 견해[增益邊]1)를 떠나기 위해서 임시로 ‘무생(無生)’이라고 하였으니, 유생(有生)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무생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손감으로 치우친 견해[損減邊]2)를 떠나기 위해서 임시로 ‘행(行)’이라고 한 것이니, 유행(有行)의 행이 있는 것은 아니나 무행(無行)의 행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무생행품(無生行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
| [經] 그 때 심왕보살(心王菩薩)이 삼계(三界)를 벗어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아 합장하고 게송으로 여쭈었다. |
| [論] 관행(觀行)에 대하여 따로 설명[別顯]하는 여섯 개의 품 중에 제1품은 모든 경계의 모습[境相]을 버리고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한 것인데, 앞서 끝마쳤다. 여기서부터는 제2품으로 그 일어나는 마음을 없애, 무생행(無生 |
| 1) 무엇을 보탤 줄만 아는 치우친 생각. |
| 2) 무엇을 없애고 줄일 줄만 아는 치우친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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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이 어떤 것인가를 밝힌 부분이다. 이에 해당하는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내용 설명[正說]이고, 둘째는 설명에 대한 찬탄[讚說]이며, 셋째는 설명을 듣고 얻는 이익[聞說得益]이다. |
| 첫째 정설(正說)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반복해서 문답한 것(往復問答)이고, 둘째는 반대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徵問答]이며, 셋째는 보살이 이해한 것[菩薩領解]이며, 넷째는 여래가 결론을 맺는 것[如來述成]이다. |
| 첫째 반복해서 문답한 가운데 여섯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질문[問], 두 번째는 대답[答], 세 번째는 따져 물음[難],3) 네 번째는 부정[拒],4) 다섯 번째는 다시 요청함[請], 여섯 번째는 해석[釋]이다. |
| 처음의 질문도 둘로 나뉘는데, 먼저 앞 부분에는 경전을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이 있다. ‘심왕보살(心王菩薩)’이란 체(體)에 따라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심왕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8식(識)의 마음이 모든 심수(心數)를 총괄적으로 제어하므로 심왕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일심(一心)의 법이 모든 덕[衆德]을 총괄적으로 포섭하므로 심왕이라고 한다. |
| 여기서는 이 보살이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 하나의 심왕[一心王]을 증득했기 때문에 (증득한 심왕의) 체를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 이 품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무생행(無生行)이므로 심왕보살이 물은 것이다. |
| ‘삼계(三界)를 벗어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설법’이란, 들은 법(法)을 꺼내서 문제를 제기하는 발단으로 삼은 것인데, 들은 것이란 앞 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뒤의 것을 들면서 앞의 것을 반복하였으니, 즉 마지막(전품) 송(頌)에서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되……일승으로 성취한 것이로다’라고 한 문장이다. |
| [經] 여래께서 설하신 뜻은 |
| 세간을 벗어나 모습[相]이 없어 |
| 3) 논란함. |
| 4) 부처님께서 단호히 아니라고 거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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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히 모든 중생들에게 |
| 다 유루(有漏)를 끊게 하시네. |
| 번뇌를 끊어 심(心)과 아(我)가 공하니 |
| 이는 생함이 없음일진대 |
| 생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
| 무생인(無生忍)이 있겠나이까? |
| [論] 이 두 게송은 질문[問辭]이다. 그 가운데 첫 송은 앞에서 설한 내용을 이해한 것을 노래한 것으로서, 위의 반(半)은 전에 말한 ‘일미법인[一味之法印]’을 이해한 것이요, 아래의 반은 ‘일승소성[一乘之所成]’을 이해한 것이다. 다음 1송은 의문을 일으킨 것인데, 그 중 위의 반은 무생의 뜻[無生義]을 물은 것이고, 아래의 반은 무생의 이치를 확실히 아는 것[無生忍]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이미 생이 없다면 그것을 아는 마음[忍心]도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 [經] 그 때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
| “선남자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으며 모든 행(行)도 생겨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생(無生)의 행(行)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무생인(無生忍)을 얻는다고 한다면 허망(虛妄)하다고 할 것이다.” |
| [論] 이것은 두 번째5) 답(答)하신 것이다. 답하신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무생인(無生忍)의 모습[相]을 제시하고, 다음에 얻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과실을 밝힌다. |
|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사실을 통달하는 것이다. 이는 선정[定]·지혜[慧]와 모든 행(行)도 역시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생겨남이 없는 곳에서는 안다[忍]고 할 만한 행(行)이 있지 |
| 5) 정설(正說)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반복해서 묻고 답하는 부분[往復問答]이 그 첫 번째인데, 그것을 다시 문(問), 답(答), 난(難), 거(拒), 청(請), 석(釋)의 여섯으로 나누었다. 위 경문은 이 중 두 번째로 ‘답’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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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으므로 ‘무생의 행이라고 할 것도 없다[非無生行]’고 하였다. |
| 그러므로 이런 가운데에서 안다고 하는 행이 얻어진다면 이는 머묾도 없고[無住]·행함도 없는[無行] 참된 앎[眞忍]에 위배되므로 ‘허망하다’고 하였다. |
|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
| “존자시여, 무생인(無生忍)을 얻는 것이 허망(虛妄)하다고 하시니 얻음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면 허망이 아니겠나이다.” |
| [論] 세 번째는 따져 묻는 것[難]이다. 묻는 의도는 이렇다. ‘만약 얻음과 앎이 있는 것을 허망하다고 한다면, 얻음이 없고 앎이 없는 것은 허망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허망과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무소득(無所得)을 공부하는 대승의 수행자들이 이와 같이 헤아리면서 자신들은 허망하지 않다고 여기므로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런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얻음이 있는 것이다. 얻음이 있으면 머묾이 있는 것이니[有得有住:다른 본에는 ‘有得有忍’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김이 있는 것이다. 얻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얻을 법(法)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허망이 된다.” |
| [論] 네 번째는 부정하는 것[拒]이다. 그 중에 둘이 있다. ‘아니다[不]’라고 한 것은 직접적인 거부이고, ‘어째서 그런가?[何以故]’ 이하는 부정하는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부정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無得無忍]’고 하는 저들의 생각이 비록 ‘얻음도 있고 앎도 있다[有得有忍]’할 때의 유(有)는 아니라 할지라도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는 무(無)를 얻는 것이다. 이미 무를 얻었다면 마음이 무에 머물고, 마음이 이미 머무름이 있으면 이는 생겨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얻은 것이 있음[有所得]에 대해 마음이 생하므로 결국 무생무득(無生無得)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모두 허망이 된다’고 하였다. |
|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
| “존자시여, 앎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無忍無生] 마음이라도 허망하지 않은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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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 다섯 번째는 간청[請]이다. 논란을 제기하였으나 더 물을 길은 없고 생각은 더 나아갈 수 없으므로 우러러 여쭈어 더 이끌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앎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마음이란, 형체[形段]가 없는 마음이다. 마치 불의 성질이 나무 속에 있으나 정해진 처소가 없듯이. 그것이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름과 글자가 있을 뿐 그 성질은 얻을 수가 없다.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하여 이름을 빌어서 말할 뿐, 그 이름도 성립할 수 없다. 마음의 특성[相]도 그러하여 그것이 있는 처소를 볼 수 없으니, 이렇게 마음을 파악한다면 그것이 생겨남이 없는 마음이다.” |
| [論] 이 아래는 여섯 번째로 해석[釋]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얻음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開無得道理], 둘째는 생멸이 없는 도리를 보여주고[示無生道理], 셋째는 틀린 생각을 예시하고[擧非], 넷째는 바른 견해를 밝혔다[明示]. |
| 얻음이 없다는 도리를 밝힌 것에도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주장[法]과 비유[喩]와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여 종합한 것[合]이다. |
| 먼저 ‘앎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마음[無忍無生心]’이란 바로 법인(法忍)에 있는 마음을 다시 한번 거론한 것이다. |
| ‘형체가 없는 마음[心無形段]’이란 마음에 얻는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형(形)은 바탕[體]을 말하고 단(段)은 분위[分]를 말한다. 모든 연(緣)에서 마음의 바탕이나 분위를 찾아보아도 붙어 있거나 떠나 있거나 도무지 얻어지는 것이 없다. 이러한 도리에서 형단(形段)이 없다고 한 것이지, 색(色)을 말할 때 형단(形段)의 상이 없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비유에서 ‘불의 성질이 나무 속에 있으나’라는 말은 ‘아는 마음[忍心]이 이치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와 같은 뜻이다. |
| ‘정해진 처소가 없듯이’라고 한 것은 이 나무 속을 보면 모든 극미[極微]가 있으나 그 중에 전혀 불의 성질이 있는 처소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치 중에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많은 법문이 있으나 그 속에서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영원히 그 소재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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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질이 정해진 처소를 갖지 않는다는 도리는 부처가 세상에 있건 없건 어느 때나 법성이 항상 그러한 까닭에 ‘결정된 성품’이라고 하였다. 불의 성질이란 이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건져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 성질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나무 속에는 불의 성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도리를 밝히려고 ‘불의 성질’이란 이름을 말한 것이나, 이 이름을 아무리 두드리고 쪼개 보아도 다만 글자가 있을 뿐이다. 모든 글자를 다 찾아 돌아다녀보아도 불의 성질은 얻어지지 않는다, ‘아는 마음[忍心]’이란 이름과 특성[相]도 똑같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마음의 특성도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
| 확실한 앎[忍]을 얻은 보살이 마음이 이와 같은 줄을 알면, 어떻게 그 속에서 취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그것이 생겨남이 없는 마음[則無生心]’이라고 하였다. |
| [經] “선남자야, 이 마음의 본성[性]과 특성[相]은 아마륵(阿摩勒) 열매와 같아서 본래부터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자기와 다른 것이 합쳐지는 데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는 원인을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일도 없는 것이다.[不因生無生:다른 본에는 ‘不因生不無生’으로 되어 있다.] |
| 어째서 그런가? 연(緣)이 바뀌고 또 바뀌기 때문이다. 연이 일어났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니 숨고 나타나는 것이 다 모양이 없다. 근본 이치는 적멸(寂滅)하여 소재하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볼 수 없으니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생겨남이 없는 도리를 밝힌 부분[示無生道理]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먼저는 비유[喩]이고 다음은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이다. 유(喩) 가운데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네 가지 부정[四不]을 설명하고 나중에는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드러낸다. |
| ‘네 가지 부정’이란 무엇인가? 연(緣)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제 씨앗이기 때문에 남에게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므로 자타가 합해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작용이 있으므로 생겨남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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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말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자기가 없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생긴다할 수 없으며, 이미 생겼을 때는 이미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겨날 필요가 없다. 자기에게서 생겨난다는 것이 이미 성립되지 않는데, 누구를 가리켜 남[他]이 있다고 하겠는가? 자기도 남도 이미 없는데 어찌 ‘합쳐지는 데’가 있을 수 있겠는가? |
| 원인이 있어서 생긴다 하는 것도 이미 되지 않는 말이니, 하물며 원인 없이 생길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생겨남을 찾아보아도 전혀 찾아질 수 없다. ‘생겨나는 원인을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일도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원인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즉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생겼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다음으로 숨은 의심을 풀어 주는 것이다. 의문을 품은 사람은 세 번째 부정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란 무엇을 말하는가? 열매[果]가 생기는 데는 씨앗이 직접적인 원인[親因]이 되고, 흙과 물 같은 것이 간접적인 계기[疎緣]가 되어 이 둘이 합쳐진 까닭에 열매가 생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합쳐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不共生]’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어째서 그런가 하고 물었다. |
| ‘연이 바뀌고 또 바뀌기 때문[緣代謝故]’이란 저 두 가지 연[親因·疎緣]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바뀐다는 뜻이다. 머무는 시간이 이미 없다면 공용(功用)이 없다. 공용이 없으므로 합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게송에서도 ‘제행(諸行)이 모두 찰나라서 머무름이 없거늘 하물며 작용이 있으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
| 게다가 ‘바뀌고 또 바뀌는 것’을 따져보면 생겨나는 일도 없고 소멸하는 일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이미 잠시도 머무름이 없다면 생겨남이 없는 것이고, 생겨남이 없으므로 소멸도 없는 것이니, ‘연이 일어났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따져들어가 보면 숨고 나타나는 일이 다 없는 것이다. 숨었을 때는 씨앗으로 흙 속에 있고, 나타날 때는 싹과 줄기로서 땅 위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근본 이치는 적멸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의 뿌리와 줄기의 이치를 따져서 열매가 생기는 원인을 구하여도 결국 일어남이 없으므로 ‘적멸(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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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滅)하여 소재하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결정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다. 결정성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
| [經] “이 결정성은 또한 같은 것도 아니고[不一], 다른 것도 아니며[不異], 아주 끊어진 것도 아니고[不斷], 언제나 계속되는 것도 아니며[不常],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不入], 나오는 것도 아니며[不出], 생기는 것도 아니고[不生], 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不滅]. 모두 네 가지 비방[四謗]을 떠나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으니, 생함이 없는 심성(心性)도 그렇다. 어찌 생겨난다, 생겨나지 않는다, 확실한 앎이 있다, 확실한 앎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 [論] 다음은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밝힌 것이다. 법이 원래 그러함을 앞의 네 가지로만 밝힌 것이 아니라 같으냐, 다르냐[一異] 하는 등 여덟 가지 견해를 모두 끊어준 것이다. |
| 어째서 그런가? 열매[菓]와 씨[種]가 하나가 아닌 것은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되어 있지도 않다[不斷]. 열매가 씨를 이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항상한 것도 아니니[不常],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가 맺었을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다. 열매는 씨 밖으로 나온 것도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으므로 생겨남이 없다. 언제나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되어 버리는 것도 아니므로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으므로 없다[無]고 말할 수 없고, 생기지 않으므로 있다[有]고 말할 수 없다.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고도 말할 수 없고, 또 중간에 해당되지도 않으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네 가지 비방[四謗]을 떠나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다’고 하였다. |
| 아마륵(阿摩勒) 열매가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듯이, 법을 확실히 아는 마음[法忍之心]도 이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생함이 없는 심성(心性)도 그렇다’고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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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만일 마음에 얻음이 있느니 머무름이 있느니, 또는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반야[어떤 본에는 ‘반야’라는 두 글자가 없다]를 얻지 못한 자로서 긴 밤을 지내는 사람과 같다.” |
| [論] 이것은 세 번째로 틀린 생각을 예시[擧非]한 대목이다. 어떤 사람이 ‘무생을 확실히 아는 마음[無生忍心]은 심체(心體)를 가지고 있으며 무생(無生)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든가, 또는 ‘생겨남이 없는 이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심성(心性)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는 망집(妄執)으로서 보리와 반야를 가로막는다. 이 대목은 청정한 성품으로서의 깨달음[性淨菩提]과 그것을 증득하는 지혜[能證般若]를 얻지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
| 여기서 말하는 보리는 ‘처음 일어난 보리[始起菩提]를 뜻하며, 반야는 보리의 원인을 뜻하는데, 깨달음의 원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긴 밤’에 비유하였다. 무시이래의 망상은 큰 꿈이기 때문이다. |
| [經] “심성을 명확히 분별하는 자는 심성이 한결같다[如]는 사실과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아니,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無生行]이다.” |
| [論] 이것은 네 번째로 바른 생각을 드러내는[顯是:明是] 것이다. ‘심성을 명확히 분별하는 자’란 자기 마음으로 자신의 심성(心性)을 잘 아는 자이다. 경에서도 ‘만약 대상을 취하는 작의[能取作意]를 가지고 반대로 대상을 취하는 그 작의를 통달한다면 이야말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평등하고 평등해져서 무루(無漏)의 지혜가 생기고 성제(聖諦)를 통달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
| ‘심성이 한결같다는 사실을 안다’고 한 것은 스스로 관찰하는 마음을 안다는 뜻인데, 그 체의 성품[體性]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안다’고 한 것은, 아는 작용[能知用]도 그렇다는 것이니, 작용의 성품[用性]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체와 용이 평등하여 생겨남도 멸함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을 관찰한다. 이런 이유로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是無生行]’이라고 하였다. |
| 위에서 네 가지 부정[四不]으로 무생(無生)을 밝힌 것은 무생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이치란 범부와 성인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한편 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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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한결같음[如]을 아는 것으로 무생(無生)을 밝힌 것은 무생의 행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행이란 성인에게만 해당한다. 성인에게만 있는 행은 이치와 일미(一味)이며, 공통하는 이치는 지혜와 평등하니 평등한 일미이기 때문에 성인도 달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으므로 성인도 같게 할 수가 없다. |
| ‘같게 할 수 없다[不能同’]는 것은 같지만 다른 것이요, ‘달리 할 수 없다[不能異]’는 것은 다르지만 같다는 뜻이다. ‘같음[同]’이란 다른 데서 같은 것을 알아내는 일이요, ‘다름[異]’이란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히는 것이다.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힌다’는 것은 같은 것을 나누어서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데서 같은 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녹여서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실로 같음이란 다른 것들을 녹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음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다름이란 같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름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요, 같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도, 둘도 아니요 별개도 아니다. |
|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
| “존자시여, 만일 마음이 본래부터 한결같아[如] 행(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모든 행이 생겨나지 않으며, 생겨나는 행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생겨나지 않고 행도 없으니 이것이 무생행(無生行)이 아니겠습니까?”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로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6)인데 여기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을 들어 이치를 논란한 것[擧行難理]이고, 둘째는 증득한 것이 있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말씀[反詰有證]이고, 셋째는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證], 넷째는 얻은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 것[反詰有得], 다섯째는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得], 여섯째는 증득한 것이 없다고 진술한 것[述無證得], |
| 6) 「무생행품(無生行品)」을 셋으로 나눈 가운데 첫 번째가 내용설명[正說]인데,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반복해서 문답한 것(往復問答)이고, 둘째는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徵問答]이며, 셋째는 보살이 이해한 것[菩薩領解]이며, 넷째는 여래가 결론을 맺는 것[如來述成]이다.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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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째는 의심나는 곳을 다시 진술한 것[更陳所疑], 여덟째는 그 의심을 결단해 준 것[決其所疑]이다. |
| 위 경문은 첫 번째로서 행을 들어 이치를 논란한 대목이다. ‘만일 마음이 본래부터 한결같아서 행(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행무생(行無生)의 뜻을 거론한 것이다. 즉 앞에서 ‘심성이 한결같다[如]는 사실과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아니,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無生行]이다’라고 한 대목으로서, 생멸하는 행에 마음이 생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생행(無生行)의 상(相)을 직접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
| ‘모든 행이 생겨나지 않는다’ 함은 이치가 생함이 없음[理無生]을 들어 말한 것으로서, 즉 모든 중생의 5음(陰)의 모든 행(行)은 본래 생겨나는 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
| ‘생겨나는 행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이치의 무생이 행의 무생과 다름을 밝힌 것이다. 말하자면 생겨난 행이란 그대로가 공(空)이라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지,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없애서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 ‘생겨나지도 않고 행도 없으니’라고 한 것은 이치의 무생과 행의 무생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묻는 자의 뜻은 이렇다. 생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심행(心行)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무생인(無生忍)의 경우, 분별이 없기 때문에 무생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생인(無生忍)을 증득하지 못하는 범부가 아무도 없어야 할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선남자야, 너는 무생(無生)으로써 무생행(無生行)을 증득하였느냐?” |
| [論] 이것은 두 번째로, 증득한 것이 있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말씀[反詰有證]이다. 묻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네가 무생인을 관하려고 들어갔을 때 모든 행이 무생이라는 이치에 의하여 무생이라는 행을 얻었느냐’는 것이다. |
| 이렇게 반문하여 따지는 이유는, 저 보살이 이무생(理無生)은 행무생(行無生)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이무생이 행무생과 마찬가지냐’고 따져 묻기 때문에 ‘네가 관(觀)에 들었을 때 이(理)와 행(行)이 달라서 능(能)과 소(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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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있더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
|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
| “아닙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생멸이 없는 행이란 본성[性]과 모양[相]이 공적하여 봄도 없고 들음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으며,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으며, 앎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데 어떻게 증득할 수 있겠나이까? 증득했다고 한다면 쟁론(諍論)이 되리니, 다툼도 없고 논함도 없어야 무생의 행이 될 것입니다.” |
| [論] 이것은 세 번째로, 증득이 없음을 부처님께 답한 것[奉答無證]인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증득이 없음을 밝히고[明無證], 둘째는 잘못된 생각을 들고[擧非], 셋째는 바른 생각을 드러냈다[顯是]. 첫째 가운데도 둘이 있는데 처음에는 간단히 요지를 표하고 다음에는 풀이를 하였다. |
| ‘생멸이 없는 행이란 본성과 모양이 공적하다’고 한 것은 총괄적으로 요지를 내세운 말이다. ‘본성이 공적하다’는 것은 마음의 체성을 관찰해보면 나고 죽는 모양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즉 앞에서 ‘심성(心性)이 한결같음을 알면’이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모양이 공적하다’는 것은 마음의 아는 작용을 관찰해보니 작용하는 모양[用相]도 역시 한결같다는 뜻이다. 즉 앞에서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
| 이어서 열 가지 무[十無]로서 요지가 되는 첫 구를 풀이한다. |
| ‘봄도 없고 들음도 없다’ 함은 심성의 희이[希夷]7)를 말한 것이다. 이(夷)하기 때문에 색(色)을 끊었으므로 상(像)을 통해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희(希)하기 때문에 소리를 끊었으므로 교(敎)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
|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 함은 공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밝히고, 또 생기는 것을 쫓아 버리지만 잃을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없음[四無]은 성품이 공적함[性空寂]을 풀이한 것이다. |
|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다’ 함은 심과 행이 이미 고요하여 언설을 일으키지 |
| 7) 『노자(老子)』 14장에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라 한다[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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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며, ‘앎도 없고 모양도 없다’ 함은 심과 행이 적멸하여 2분(分)8)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함은 이미 분별이 없으므로 성품이라고 취할 만한 것도 없고, 모양이라고 버릴 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상 여섯 가지 없음[六無]은 모양이 공적함[相空寂]을 풀이한 것이다. |
| 무생행 중에 있다면 이렇게 공적한데 어떻게 거기서 취하고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답할 때 앞에서 제기했던 논란이 논란으로서 성립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잘못을 들어 옳은 것을 나타내었으니 따져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
| [論] 이것은 네 번째로, 얻은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 것[反詰有得]이다. 보살이 아직 아뇩보리를 얻지 못했는데 여래께서 무슨 까닭으로 ‘너는 그것을 얻었느냐’고 물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보살이 아직 구경보리(究竟菩提)는 얻지 못하였으나 초지(初地)의 보리는 이미 증득했다. 『법화론(法華論)』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8생(生)에서 1생(生)까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자는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삼계의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떠나서 분수에 따라 진여불성을 볼 수 있는데, 이를 가리켜 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지 여래의 방편을 완전히 만족한 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 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진여불성에 의하여 보리라고 한 것이며, 그것을 증득해서 보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고 표현했다. 경에서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것, 이것이 보리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
| “존자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나이다. 왜냐하면 보리의 성품 중에는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으며,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으며, 분별도 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별이 없는 가운데 청정한 성품 |
| 8) 능지(能知)·소지(所知)의 2분(分)을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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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있고, 그 성품에는 섞여 들어감이 없으며, 언설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닙니다. 따를만한 모든 법행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행(法行)은 처소를 보지 않으니 결정성이기 때문입니다. 얻음이나 얻지 못함이 본래 없는데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나이까?” |
| [論] 이것은 다섯 번째로,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得]인데 언표[標]와 해석[釋]과 결론[結]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해석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얻을 대상인 보리에는 얻을 성품[所得性]이 없음을 밝히고, 나중에는 얻은 모든 행에는 얻는다는 생각[能得相]이 없음을 나타냈다. |
| 처음에 ‘보리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眞如)의 성품(性)이 텅 비어 걸림이 없고 그 성품이 어둠의 가림을 떠나 있기 때문에 ‘보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그 중에는 간직할 참된 성품이 본래 없고, 없앨 망상도 본래 없으므로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고 하였다. |
| 이와 같은 본각은 사려로 구성한 깨달음[思構之覺]을 멀리 떠났고, 홀연[率爾]9)히 앎도 없기 때문에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다’고 하였다. |
| 이미 분별하는 견(見)이 없고, 행의 대상이 되는 상(相)도 떠나 있으므로 ‘분별과 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혹(惑)의 상에 의해 탁(濁)해지지 않으며, 본성(本性)이 더러움을 떠났으므로 ‘청정한 성품’이라고 하였다. 종(縱)으로는 생멸(生滅)이 섞여 들어오지 않으며, 횡(橫)으로는 능소(能所)가 뒤섞이지 않으므로 ‘성품에는 섞여 들어감이 없다’고 하였다. |
| ‘언설도 없다’란, 말이라는 도구[能言]와 말이 지시하는 바[所言]가 다 끊어졌기 때문이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한 것은 비록 여여함이 있지는 않지만 여여함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본각(本覺)이 아니며 불각(不覺)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의 성품은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
| ‘따를 만한 모든 법행’ 이하는 얻음을 가능케 하는 행[能得行]이 없음을 |
| 9) 홀연의 뜻, 홀연이 생기는 망상의 앎[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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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타내는데, 전품(前品)에서 ‘6도(度)의 행(行)이 실다운 궤범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 대목에서와 같은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따를 만한 법[可法]이라고 한 것이다.‘(법행도)그렇습니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무득(無得)이라 한 의미와 같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
| ‘모든 법행[一切法行]’이란 6도(度) 등의 행을 말한다. ‘처소를 보지 않음[不見處所]’이란 득(得)과 실(失), 각(覺)과 지(知), 나아가 유(有)와 무(無), 지(知)와 부지(不知) 등 행할 만한 처소를 보지 않기 때문에 보리와 평등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본래 유능득(有能得)과 불능득(不能得)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하는 얻을 수 없는 이치를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구절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대로 모든 심행은 무상(無相)에 불과하니, 체(體)가 고요하고 생겨남이 없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번째로, 여래의 설명[如來述成]인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설명[正述]이고, 둘째는 틀린 견해를 지적한 것[擧非]이며, 셋째는 옳은 견해를 밝힌 것[顯是]이다. |
| 정술 중에도 셋이 있는데 처음에는 통틀어 서술했고[摠述], 다음에는 따로따로 서술하였으며[別述], 뒤에는 다시 결론을 맺었다[結成]. |
| ‘그렇다, 그렇다[如是如是]’한 데서 앞의 ‘그렇다’는 (무생을) 증득하지 못했다[無證]고 한 대목을, 뒤의 ‘그렇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다[無得]고 한 대목을 두고 한 말씀이다. |
| ‘모든’ 이하는 두 번째인 별술(別述)이다. 먼저 무생(無生)을 말하고 뒤에는 적멸(寂滅)을 말한다. 무생이란 무생의 행[無生行]이니, 능증(能證)과 능득(能得)이 없음을 말한다. 적멸이란 적멸의 이치[寂滅理]이니 소증(所證)과 소득(所得)이 없음을 말한다. |
| 처음에 말한 ‘모든 심행’이란 출세간의 무분별지(無分別智)와 상응하는 모든 심행을 말하는데, 어떤 모양도 취하지 않고 모양 없는 곳을 깨달아 합치[證會]하기 때문에 ‘무상(無相)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모든 심행은) 공적(空寂)을 체(體)로 하여 전혀 생함이 없기 때문에 ‘체가 고요하고 생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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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다’고 하였다. |
| [經] “식(識)마다[可有識識:어떤 본에는 ‘所有諸識’이라고 되어 있다] 모두 그러하다. 어째서 그런가? 눈[眼]과 안촉(眼觸)이 모두 공적하고 식도 공적하여 움직이는 모양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모양도 없으며, 안으로 3수(受)가 없어 3수도 적멸하기 때문이다. 귀[耳]·코[鼻]·혀[舌]·몸[身]과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 그리고 말나식(末那識) 아리야식(阿梨耶識)도 그와 같아 모두 생기지 않으니 적멸심이며 무생심이다.” |
| [論] 이것은 두 번째인 (別述을 無生과 寂滅 둘로 나눈 가운데) 적멸의 의미를 설명한 것으로서, 모든 세간의 여덟 가지 식이 공적함을 말한 것이다. 이 중에도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앞의 내용에 예를 든 것이고, 둘은 자세한 해석이다. |
| 맨 앞에 ‘식마다[識識] 모두 그러하다’고 한 것은, 존재하는 세간의 8식(識)을 모두 포함한다는 뜻으로서, ‘곳곳에서’라는 표현이 모든 곳을 다 포함하는 예와 같다. ‘그러하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공적한 마음이 ‘세간을 벗어난 마음이란 생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
|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둘째인 자세한 해석이다. ‘눈[眼]’은 안근(眼根)을 말하고, ‘안촉(眼觸)’은 즉 변행(遍行)10) 중의 촉(觸)을 말하는데, 세 가지가 화합[三和]11)하는 데서 생긴다. 셋을 화합하게 하면서도 그것들은 흩어져 공(空)이 되므로 그것을 밝히기 위해 한 예를 든 것이다. |
| ‘식도 공적하다’ 함은 안촉이 이미 공하므로 안식(眼識)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속 이어지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으며, 또한 한 찰나도 옮기고 움직이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모양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모양도 없다’고 하였다. |
| ‘안으로 3수(受)12)가 없다’고 한 것은 3수가 생겨나지만 그것들이 본래 |
| 10) 특정한 대상에 한하지 않고 두루 활동하는 마음 작용. 8식 중에 어느 식이 일어나도 반드시 그와 함께 일어나는 마음 작용. 작의(作意)·촉(觸)·수(受)·상(想)·사(思)의 다섯 가지[五遍行]가 있음. |
| 11) 근(根)·경(境)·식(識)을 말함. |
| 12) 고수(苦受)·낙수(樂受)·사수(捨受)의 세 가지 감각작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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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멸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음에 관한 모든 법수(法數) 중에서 촉(觸)과 수(受)가 가깝고 다른 것에 비해 두드러진 공능을 가지므로 이 둘을 들어서 나머지 법들을 다 포함해버린 것이다. |
| ‘귀·코·혀·몸’이란 귀[耳]·이촉(耳觸)·이식(耳識) 등을 말한다. |
| ‘심(心)·의(意)·의식(意識)’이란 제6식을 말한다. 미래로 보아서 심이라 부르고, 과거로 보아서 의라고 부르고, 현재로 보아서 의식이라고 부른다. 수전문(隨轉門)13)에 의해서 이 세 가지 이름을 들어 3세가 모두 공적함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말나식과 아리야식은 제7·제8식을 말하는데, 모두 안식과 같아서 역시 생기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자세히 해석하는 문장이다. |
| 다음에 ‘적멸심(寂滅心)’이란, 바로 위에 나오는 ‘8식이 공적하다’는 내용을 결론짓는 말이고, ‘무생심(無生心)’이란 저 앞의 ‘체(體)가 고요하고 생겨남이 없다’는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
| [經] “만약 적멸심을 일으키거나 무생심을 일으키면 이는 유생행(有生行)이지 무생행(無生行)이 아니므로 안으로 3수(受)14)와 3행(行)15)과 3계(戒)가 생긴다.” |
| [論] 이는 (如來述成을 正述, 擧非, 顯是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로 틀린 견해를 지적한 것[擧非]이다. 얻을 바가 있다고 여기면서 대승을 공부하는 이가 여덟 가지 식이 공적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적멸에 위배되므로 ‘적멸심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세간을 벗어난 마음이 무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심(心)이 생겨 형상이 없는 이치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므로 ‘무생심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다만 이것은 세간에서 유전(流轉)하는 행이라서 출세간의 무생인행[無生忍行]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유생행…’이라고 하였다. |
| ‘3행(行)’이란 신(身)·구(口)·의(意)로 짓는 일이며, 선(善)과 불선(不善)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3계(3戒)’란 신·구·의가 그치는 것[止] |
| 13) 실상의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문(眞實門)에 비해서, 경우에 맞게 방편으로 시설한 법문을 수전문(隨轉門)이라 함. |
| 14) 신(身)·구(口)·의(意)의 삼업행. |
| 15) 신·구·의의 악업을 끊는 삼계(三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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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며 오직 선에만 해당한다. 이 세 가지 행(行)과 세 가지 계를 일으키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3유(有)에 태어나 3수(受)를 모두 다 받는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돌고 돌면서 벗어나지 못한다. |
| [經] “만약 생겨나는 마음을 적멸케 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힘씀[功]도 없고 작용[用]도 없으며, 적멸의 상을 증득하지 않으며, 증득이 없다는 데[無證]도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모든 곳에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형상이 없음을 총지(總持)하면 3수(受)가 없다. 3수 등의 세 가지가 다 적멸한지라, 청정하여 머묾도 없고, 삼매(三昧)에도 들지 않고, 좌선(坐禪)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무생(無生)이며 무행(無行)이다.” |
| [論] 이것은 세 번째로, 옳은 견해를 밝힌 것[顯是]이다. ‘만약 생겨나는 마음을 적멸케 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이란 앞의 ‘만약 적멸심을 일으키고’란 구절과 반대로, 생하는 모든 마음을 버려서 생함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힘씀도 없고 작용도 없음’이란 앞서 ‘만약 무생심을 일으키면’이란 구절과 반대로, 생기고 소멸하고 일어나고 움직이는 모든 모습을 떠나 있으며, 작의(作意)·분별(分別)·공용(功用)도 없다는 말이다. ‘적멸의 상을 증득하지 않음’이란 일어나는 마음은 떨어버렸다 할지라도 적멸의 상을 머물러두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 ‘증득이 없다는 데도 머무르지 않음’이란 적멸의 모습을 취함이 없다고 할지라도 증득이 없는 잘못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
|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모든 곳에 머무르지 않음’이란 머무름과 집착의 잘못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니, 머물 만한 곳이 어디든 다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곳’이란, 일어남을 버리면 적멸에 머물 소지가 있고, 유증(有證)을 버리면 무증(無證)에 머물 소지가 있는데, 이와 같이 머물 만한 곳에 모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 ‘형상이 없음을 총지함’이란 공덕을 다 구족했음을 총괄해서 나타낸 것이니, 무생심이 모든 행덕(行德)을 간직하여 차별 없는 일미(一味)의 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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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수 등의 세 가지가 없다’고 한 것은 앞에서 ‘안으로 3수 등이 생기고’란 구절의 반대로, 유전하는 인과의 모습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다 적멸한지라’한 것은 3수(受) 등이 본래 공(空)함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청정하여 머묾도 없다’ 함은 통달한 마음도 공에 머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삼매에도 들지 않는다’ 함은 선정에 들려는 세간의 마음을 없앴기 때문이다. ‘좌선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선(禪)의 고요함에 머무르려는 세간의 마음도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생겨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분별하는 행(行)도 없으므로 ‘무생이며 무행이다’라고 하였다. |
|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
| “선(禪)은 움직임을 거두어 모든 환상과 혼란을 가라앉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선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
| [論] 이것은 일곱 번째로,16) 의심나는 곳을 다시 진술한 것[陳疑,更陳所疑]이다. 의심하는 뜻은 이렇다. ‘모든 선정(禪定)은 들떠 동요하는 생각을 거두고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출세간 무생행의 마음에서는 선정에도 들어가 머물지 않는다는 것인가?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필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이 있으므로 말이 난 김에 그렇게 물은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아, 선(禪)이라고 하면 그것은 움직임[動]이니, 움직이지도 않고 선정을 닦지도 않아야 이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으니 선을 생한다는 상을 떠난 것이다.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는 것이니 선에 머문다는 움직임을 떠난 것이다. 선의 본성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무생(無生)과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는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의지하여 머무는 일이 없으며, 마음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이기 때문에 무생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얻는다.” |
| [論] 이것은 여덟 번째로 의심을 결단해준 것[決疑,決其所疑]이다. |
| 16)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에 擧行難理, 反詰有證, 仰報無證, 反詰有得, 仰報無得, 述無證得, 更陳所疑, 決其所疑 여덟 가지가 있는 중에 위 경문은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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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이라고 하면 그것은 움직임이다’라고 말한 것은, 세간의 선은 비록 산란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계의 모양을 취하는데, 모양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면 움직임이 생기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와 같이 움직임을 일으키는 선(禪)을 떠나야 비로소 이정(理定)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라고 하였다. |
| 이와 같은 이정(理定)은 그 본성이 생겨나거나 움직임이 없는 것이므로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다’고 하셨다. 생겨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고요함에 머무는 일도 없으므로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다’고 하셨다. |
| 생겨남이 있으면 그것은 모습이요, 머무르고 집착함이 있으면 그것은 움직임인데, 여기서는 이것과 반대되므로 ‘선을 생한다는 상을 떠난 것’, ‘선에 머문다는 움직임을 떠난 것’이라고 하였다. |
| 위의 모든 구(句)들은 이정의 특성[理定相]을 밝히고 있다. |
| ‘선의 본성에 …을 알면[知禪性]’ 이하는 이(理)와 지(智)의 특성을 설명한다. 하나의 체(體)를 가지고 두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
| ‘선의 본성에는 움직임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이란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음을 안다는 뜻이다. ‘선의 본성에는 고요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이란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음을 안다는 뜻이다. |
| ‘무생(無生)을 얻는다’ 함은 이치[理]의 무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는다’ 함은 행(行)의 무생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것 역시 의지하여 머무는 일이 없다’ 함은 무생을 아는 지혜는 이치에 의하여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니 능(能)과 소(所)를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도 동요하지 않는다’ 함은 이치에 의지해 머무르지는 않지만 마음을 일으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
| 이상 여덟 대목이 합해서 두 번째인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이 된다. |
|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
| “존자시여, 무생반야(無生般若)는 어느 곳에든 머묾이 없으며, 모든 곳에서 떠남도 없으며, 마음에는 머무는 곳도 없으며, 머물려는 마음도 없어서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나이다. 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무나니, 이와 같이 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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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는 마음이라면 무생의 머묾이라 하겠습니다. |
| 존자시여, 심무생행(心無生行)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한 것 속에서는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 |
| [論] 이는 세 번째인 보살이 이해하는 대목[菩薩領解]이다. |
| ‘어느 곳에든[一切處]’이란 진(眞)이다, 속(俗)이다, 동(動)이다, 적(寂)이다 하는 모든 곳을 가리킨다. ‘머묾이 없다’ 함은 일체에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떠남도 없다’ 함은 일체에서 얻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 일체란 다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머무는 곳도 없다’ 함은 머무는 대상[所]으로서의 처소가 없다는 뜻이요, ‘머무르려는 마음도 없다’ 함은 머무는 주체[能]로서의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다’ 함은 앞의 두 구절을 합쳐서 머무는 곳과 머무는 마음이 없으므로 하는 말이다. |
| ‘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문다’ 함은 무생(無生)·무주(無住)의 마음이 없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란 앞에서 ‘어느 곳에든 머묾이 없으며 모든 곳에서 떠남도 없다’한 대목을 결론지은 말이니, ‘떠남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머문다는 의미를 가설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생의 머묾이라 하겠습니다’ 함은 ‘마음에 머무는 곳도 없으며……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무나니’라고 한 대목을 결론지은 말이니, 머묾이 머묾 없음이고, 머묾 없음이 머묾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
| ‘심무생행은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은 언설(言說)을 여의고 사려(思慮)를 벗어나 끊었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것 속에서는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라고 한 것은 말을 떠났고, 말 떠남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이언(離言)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요, 이언을 여의었기 때문에 또 말할 수가 있다고 한 것이다. |
| ‘말할 수 있다[可說]’ 함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다[不可說]’ 함은 그렇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괄적으로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하다[可不可說]고 하였다. |
| 언설(言說)에는 가(可)·불가(不可)가 있다고 함과 같이 사유에도 가·불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만을 들어서 숨겨진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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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른 쪽까지도 드러낸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그렇다.” |
| [論] 이것은 (正說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네 번째로, 여래가 결론을 맺는 대목[述成,如來述成]이다. |
| 보살이 앞에서 이해한 것이 도리에 계합할 뿐만 아니라, 위로는 부처님 말씀에 들어맞았으므로 부처님께서 ‘그렇다, 그렇다’하고 반복하셨다. |
| 장행(長行)으로 된 정설(正說)은 이상으로 끝났다. |
| [經] 심왕보살이 이런 말씀을 듣고 이제껏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17) 게송으로 찬탄한 부분[以偈讚說]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서문(序文)이요, 다음이 게송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란 이 품(品)에 전체에 나온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뜻이다. |
| [經] 큰 지혜를 구족하신 세존께서 |
| 생함이 없는 법을 널리 설하셨으니 |
| 이제껏 듣지 못한 것을 들었사옵고 |
| 아직 설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설하셨네. |
| [論] 이 아래 세 개의 송(頌)은 따로 송(頌)한 글이 아니고 다만 총괄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여기에 법(法)·비유[喩]·비유를 법에 대입시킴[合]·결론[結]의 네 부분이 있다. |
| 첫 번째 송은 법(法)을 말씀해 주신 것을 찬탄한 것이다. |
| ‘아직 설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설하셨다’ 함은 비록 앞에서 광범하게 설명하였지만 지금 이 경에서는 말은 간략하나 의미는 풍부하고, 글은 간추려 있지만 이치는 자세하므로 이와 같은 묘한 법을 일찍이 설한 적이 없었기에 하 |
| 17) 「무생행품」의 본문을 ‘정설(正說)’, ‘찬설(讚說)’, ‘문설득익(聞說得益)’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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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말이다. |
| [經] 마치 맑은 감로가 |
| 간혹 한번 나타나듯이 |
| 만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우며 |
| 듣기 또한 어려워라. |
| 위 없는 좋은 복밭이며 |
| 최상의 훌륭한 약이어라. |
|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
| 지금 우리를 위해 말씀하셨네. |
| [論] 앞에서부터 두 구는 두 번째인 비유이다. ‘감로’란 불사(不死)의 약이니, 이 경이 사람들을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줌을 비유한 것이다. 다음의 네 구는 세 번째인 비유를 법에 대입시킨 부분[合]이다. ‘위 없는 좋은 복밭’이란 법을 듣는[能聞] 사람들을 찬탄한 것이다. 그리고 최상의 훌륭한 약이란 들은[所聞] 법을 말한 것이다. 아래의 두 구는 네 번째인 결론[結]에 해당한다. |
| [經] 그 때 대중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모두 무생(無生)과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었다. |
| [論] 이것은 세 번째, 당시 대중이 이익 얻음[時衆得益]을 밝힌 것이다. 초지에 들기 전[地前]의 범부가 이 품을 듣고 초지(初地)의 무생인(無生忍)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 4. 본각리품(本覺利品) |
| [論] 모든 유정(有情)이 아득한 때로부터 무명(無明)의 긴 밤에 들어서 망상의 깊은 꿈만 꾸고 있다. 보살이 관(觀)을 닦아 무생(無生)을 얻었을 때, 중생(衆生)이 본래 적정하여 단지 본각(本覺)뿐임을 통달한다. 그리하여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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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같은[一如] 침상에 누워 이 본각의 이익을 가지고 중생을 도와준다. 이 품은 이러한 도리(道理)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본각리품(本覺利品)」이라고 이름하였다. |
| [經] 그 때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미진실(一味眞實)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법문을 듣고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아 집중하여 잘 듣고, 맑은 경지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
| [論] 관행(觀行) 6품을 각각 밝힌 가운데18),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인 본각(本覺)의 이익을 밝힌 부분이다. 무생행(無生行)에 의지하여 본각을 알아야 일체 중생을 두루 교화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런 뜻에서 「무생행품」 다음에 이 품을 연설하셨다. |
|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본각의 이익을 자세히 밝힌 부분[廣明本覺利益]이요, 둘째는 게송으로써 찬송한 부분[以偈讚頌]이며, 셋째는 그 때의 대중이 이익 얻었음[時衆得益]을 말한 것이다. |
| 첫째에도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움직임을 통하여 고요함을 밝힌 것으로서, 본각의 이익이 무엇을 요점[宗]으로 삼는가를 간략히 지적한 부분[略標本利之宗]이다. 다른 하나는 미세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저한 데까지 본각의 이익이 지니는 뜻을 광범하게 설명한 부분[廣說本利之義]이다. |
| 처음 약표(略標)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몸을 이동하는 일을 통해서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요, 둘째는 말씀을 주고받음으로써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요, 셋째는 빛을 내어 본각의 이익을 칭송한 부분이다. |
| 먼저 ‘무주보살(無住菩薩)’이라 함은, 이 사람은 본각이 본래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통달했으나 그렇다고 적정(寂靜)에 머무르지도 않고 항상 두루 교화를 하기 때문에 그 성품[德]에 의해서 ‘무주(無住)’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머묾이 없는 덕이 본각의 이익에 합치하므로 이 사람을 통 |
| 18) 정설분(正說分)은 관행을 6품으로 각각 밝히는 부분[別顯觀行]과 총지(摠持) 한 품으로 의심을 풀어주는 부분[摠遣疑情]으로 나뉜다. 별현은 「무상법품(無相法品)」 「무생행품(無生行品)」, 「본각리품(本覺利品)」, 「입실제품(入實際品)」, 「진성공품(眞性空品)」,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 나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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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그 요지[宗]를 나타낸 것이다. |
| ‘일미진실하고 불가사의하다’ 함은 앞 품에서 설명한, ‘마음에 생함이 없는 행은 불가사의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
|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았다’ 함은, 먼저 앉았던 자리는 부처님 자리에서 멀리 있었으나 앞 품의 말씀을 듣고 나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는, 전에는 아직 심오한 법을 듣지 못하여 평범하고 어리석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부처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본각의 이익을 얻어 불과(佛果) 가까이에 있게 되었음을 스스로 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
| ‘집중하여 잘 듣고, 맑은 경지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함은, 이미 부처님 자리에 왔을 때 법을 듣는 데 생각을 집중하여 본래 맑고 깨끗한 자리에 들어가 본각(本覺)의 고요함을 따라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문장으로 본각에 들 때는 본래 움직임이 없음을 통달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얻었음을 표시한 것이다. |
| [經] 그 때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
|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
|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존자시여, 저는 근본 없는 데서 왔으며, 지금 근본이 없는 곳에 이르렀나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略標 중에) 두 번째로,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다. 여기는 문(問)·답(答)·결론적인 설명[述成]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 두 번째 답하신 뜻은, 범부의 자리로부터 성인의 자리에 이르렀음을 밝힌 것이다. 성인의 자리에 도달하여 옛날과 지금을 돌이켜 보건대, 범부의 자리에 있던 옛날, 처음 믿음을 일으켜 닦아 나아갈 때는 자신의 마음이 본래 일어나거나 움직인 적이 없음을 스스로 믿었다[信]. 일어나고 움직이는 근거를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성인의 자리에 와서 무생(無生)을 얻었을 때는 자기 마음이 본래 생겨난 적이 없음을 체득해 알게 되었다[證]. 마음이 생기는 근거를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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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처음에 어디에서 온 본래의 기점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지금 이른 곳도 본래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미 근본[本]이 없음을 보였으니 끝[末]이 없음도 알아야 한다. 끝도 없고 근본도 없다는 것은 어디서 온 일도 없고 어디에 도달한 일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부처님께서 물으신 말씀을 받들어 ‘온다’느니, ‘도달했다’느니 하는 말을 빌어 썼을 따름이다. 또 온다, 도달한다 함이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오고 도달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온다, 도달한다 하는 표현을 빌어서 오고 도달함이 없음을 나타냈으니, 도달한 곳과 출발한 곳이 한결같이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네가 본래 어디에서 온 것이 아니며, 지금 어디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 네가 얻은 본각(本覺)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니 이는 대보살마하살(大菩薩摩訶薩)이다.” |
| [論] 이 부분은 결론적인 설명[述成]인데, 설명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온 곳과 도달한 곳이 이미 근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근본 자리가 없다는 점이 같다면 옴도 없고 도달함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온 곳이 도달한 곳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어디에서 온 일이 없다’고 하였다. 또 도달한 곳도 이미 온 곳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어디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
| 한편 온 곳이 이미 근본이 없으므로 오고 오지 않고 하는 일도 없다. 또 지금 도달한 곳도 근본이 없으므로 도달하고 도달하지 않고 하는 일도 없다. 온 일도 도달한 일도 이미 없다면 본래 고요함이다. 그러므로 ‘네가 얻은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본각의 이익을 얻었다면, 자신을 이롭게 하는 동시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보살마하살’이라고 하셨다. |
| [經] 큰 빛을 뿜어 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
| 장하다 보살이여, |
| 지혜가 원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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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본각의 이익으로 |
|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구나. |
| 네 가지 몸가짐 어디서든지 |
|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 |
|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여 |
| 오지 않고 가게만 하는구나.[다른 본에는 ‘去去’가 ‘不去’라고 되어 있다] |
| [論] 여기는 세 번째인 여래가 빛을 뿜어 보살을 칭찬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경을 엮는 이가 서술한 부분이다. (뒤에는 게송이다.) |
| ‘큰 빛을 뿜어 대천세계를 두루 비춘’ 이유는, 큰 지혜의 광명을 얻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세간의 어둠을 비춰 광명을 얻게 했기 때문이며, 여래께서 앞에서 하신 칭찬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
| ‘장하다, 보살이여’는 무주보살(無住菩薩)을 특별히 칭찬하신 것이다. ‘지혜가 원만하다’ 함은 알았다는 관념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
| ‘네 가지 몸가짐 어디서든지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문다’ 함은,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아’라고 한 앞 서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말로 본각의 이익을 얻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
| ‘오지 않고 가게만 한다’ 함은 고요하면서도 항상 교화하기 때문이다. ‘오지 않음’이란, 인도하고 교화하는데 따라 세간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가게만 함’이란, 물러서지 않게 됨에 따라 미망의 세계에서 점점 벗어나 잘 가기[善逝]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 [經] 그 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시여, 무슨 이익을 운용해야 중생의 모든 정식(情識)을 전변하여 암마라(唵摩羅)에 들게 하겠습니까?” |
| [論] 여기서부터는 (본각의 이익을 크게 略標와 廣說 둘로 나눠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 본각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演]이다. 그 중에 |
| [100 / 263] 쪽 |
|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직접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直廣]이고, 둘은 거듭 부연한 것[重演]이다. 처음의 직광에서도 먼저는 물음이고 다음은 대답이다. |
| ‘무슨 이익을 운용해야’는, 교화하는 자가 이익을 운용하는 측면을 물은 것으로서 앞에서 ‘모든 중생을 인도하여’라고 한 구절에 대한 질문이다. |
| ‘중생의 …를 전변하여…’라 함은 교화 받을 대상의 모든 식(識)을 전변하는 측면을 물은 것으로서 앞에서 ‘가게만 한다’라고 한 구절에 대한 질문이다. |
| ‘모든 정식[一切情識]’이란 여덟 가지 식[八識]을 말한다. |
| ‘암마라(唵摩羅)’란 제9식(第九識)을 말한다. 진제(眞諦) 삼장이 말한 9식의 의미는 이 글에서 나왔고, 해당 장(章: 아래 有得·無得의 집착을 떨어주는 부분)에서 설한 것과 같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일각(一覺)으로 모든 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한다. 어째서 그런가? 일체 중생의 본각도 항상 일각으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하기 때문이며, 그 정식(情識)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결정된 본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
| [論] 이 답은 본각이익의 뜻을 본격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正廣:直廣]이다. 그 중에도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제시[標]하고 다음에는 해석[釋]했다. |
|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일각으로’라 함은 교화하는 자[能化]의 근본을 지적한 것이다. ‘모든 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한다’ 함은 교화의 대상[所化]이 어떻게 전변하는가를 지적한 것이다. |
| 해석 가운데도 기본적인 풀이[正釋]와 더 나아간 풀이[轉釋] 둘이 있다. 정석 중에 ‘모든 중생의 본각’ 이란 앞에서 말한, ‘교화하는 자의 근본’인 일각(一覺)을 풀이한 것이니, 모든 중생이 동일한 본각(本覺)이므로 ‘일각’이라고 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이를 체득하고 비로소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항상 …으로[常以]’라고 하였다. 이 본각으로 다른 사람을 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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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닫게 하기 때문에 ‘항상 일각으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한다’고 한 것이다. |
|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한다’ 함은, 교화의 대상[所化]이 어떻게 전변하는가 하는 구절을 풀이한 말이다. 본각은 바로 암마라식이다. ‘본각을 얻게 한다’는 것은 들어간다[入]는 뜻을 풀이한 것이니, 본각에 들어갈 때 여덟 가지 식이 모두 본래 적멸임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 깨달음이 끝까지 갔기[究竟] 때문에 모든 식이 생기지 않으므로 ‘모든 식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
| 이 구절은 ‘모든 식을 전변시킨다’는 뜻을 정곡으로 풀이하였다. 이 문장은 두 가지 각인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한꺼번에 나타낸다. ‘모든 중생의 본각…’이라고 한 것은 본각 쪽이고, ‘정식(情識)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닫게…’라고 한 것은 시각 쪽이니, 시각이 본각과 동일함을 나타낸 것이다. |
|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둘째의 전석(轉釋)인데, ‘깨달을 바가 적멸(寂滅)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始覺]’는 앞의 내용을 풀이한 것이다. 8식은 연(緣)을 따라 움직이고 바뀌는데, 결정한 성품을 찾아보면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결정된 본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다’고 하였으며, 본래 움직임이 없으므로 본래 적멸이라는 것이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여덟 가지 식 중에 하나라도 다 대상[境]을 연(緣)하여 일어나니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 [論] 여기서부터는 둘째, 거듭 부연한 부분[重演]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시각(始覺)에 관하여 연설하고 다음에는 본각(本覺)에 관하여 연설했다. |
| 시각에 관한 설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식이 공적함[諸識空寂]을 연설하고, 둘째는 모든 식이 생겨남이 없음[諸識無生]을 연설한다. 전자는 시각으로 깨닫는 대상[所覺]을, 후자는 깨닫게 해주는 것[能覺]으로서의 시각을 말한다. |
| 첫 번째에 여섯 차례의 문답이 있으며, 그것을 세 문답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앞의 두 문답인데, 공적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둘은 세 번째 문답인데, 같지 않다는 특성을 밝힌 것이다. 셋은 뒤의 세 문답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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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지 않다는 특성을 밝힌 것이다. |
| 처음 문답에서는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밝혔는데, 그 가운데 ‘그 중에 하나라도[可一]’라는 것은 일체(一切)를 의미하니, 즉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여덟 가지 식을 말한다. ‘다 대상[境]을 연(緣)하여 일어난다’ 함은 네 가지 연[四緣]19) 중에 우선 연연(緣緣:所緣緣)을 가지고 부동(不動)의 문제를 논한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모든 대상이 본래 공하고, 모든 식이 본래 공하다. 공하기 때문에 연(緣)의 본성이 없는데, 어찌 연으로 하여 생기겠는가?” |
| [論] 이는 대상의 연을 부정하여 식이 일어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모든 대상이 공하다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何見:어떤 본에는 ‘如何有見’으로 되어 있고, 또 다른 본에는 ‘如何言見’으로 되어 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본다는 것이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겨남이 없고 모양도 없어 본래 자체의 이름을 붙일 수 없이 모두가 공적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특성도 마찬가지고 모든 중생의 몸도 마찬가지니, 몸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
| [論] 이는 두 번째 문답으로서 본다는 것이 허망이고 허망이기 때문에 진공(眞空)임을 밝힌 것이다. 즉 경계가 공하기 때문에 경계가 있다고 보면 그것은 허망이요, 보는 것 역시 공하므로 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허망이라는 뜻이다. |
| 해석 중에 전체적으로 밝힌 것[摠明]과 개별적으로 밝힌 것[別顯] 두 가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5음(陰)이니 18계(界)니 하는 현상[有]은 본래 ‘내가 색(色)이다’라는 식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데, 다만 허망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색 등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모 |
| 19) 첫째 인연(因緣), 둘째 등무간연(等無間緣), 셋째 소연연(所緣緣), 넷째 증상연(增上緣)을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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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가 공적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
| 개별적으로 밝힌[別顯] 중에 ‘모든 법의 특성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은 외계(外界)의 산이나 강 등 6진(塵)으로 된 법의 특성을 말한다. ‘모든 중생의 몸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은, 내계(內界)의 색(色)이나 수(受) 등 5음(陰)으로 된 몸을 말한다. 그 몸 자체도 없는데 어찌 본다는 작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모든 대상이 공하며, 모든 몸이 공하며, 모든 식(識)이 공하다면 각(覺)도 공해야 하겠습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모든 각은 (도리를) 무너뜨리거나 깨뜨리지 않는다.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 공이 아니고 불공(不空)도 아니어서, 공·불공 따위가 없는 것이다.” |
|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문답으로, 각(覺)과 불각(不覺)이 같지 않은 특성을 밝힌 것이다. 물음의 뜻은 다음과 같다. |
| ‘각도 공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은 연으로 생긴 식이 공하다면 연으로 생긴 각도 공해야 하리라는 뜻이다. 즉 식이 공하기 때문에 본다는 것도 허망하다면, 각도 공하다는 이유에서 허망이 되리라는 것이다. |
| 부처님께서 답하신 뜻은 다음과 같다. 모든 각은 도리(道理)를 깨뜨리지 않으므로 공이 되게 할 수 없으며, 한편 자성이 있지 않으므로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에는 공(空)·불공(不空)이 없다. 그러나 모든 식은 그렇지 않아서 망령되이 모든 법을 취하기 때문에 진리에 위반되니, 공이 되게 할 만하고 버릴 만한 것이다. 이렇게 같지 않으니 어찌 서로 비슷하겠느냐는 것이다. |
| ‘결정한 성품’이란, 진여의 본성은 파괴할 수 없으니 본성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모양 있음을 취하므로써 공(空)을 훼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성(無性)이라고 헛되이 생각하여 진(眞)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결정한 성품에서는 훼손이나 손상이 없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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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모든 대상도 마찬가지로 공의 모습[空相]도 아니며, 공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겠습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대상이라고 할 저것들은 성품이 본래 결정되어 있는데, 그 결정성의 뿌리는 어느 곳에도 없다.” |
|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각(覺)도 그처럼 어느 곳에도 없겠습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각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깨끗하여 각이 없다. 물질[物]도 처소가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깨끗하여 색[色]도 없다.” |
| [論] 이 아래의 세 문답은 (각과 불각이) 다르지 않은 특성을 밝힌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문답은 각(覺)과 경(境)이 같은 형태임을 설명하고, 뒤의 한 문답은 각과 식(識)이 같은 형태임을 나타낸다. |
| 처음 가운데 앞의 것[제4 문답]은 대상과 각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무슨 말인가? 허망한 모든 경계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있지 않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공의 모습인들 어찌 있겠으며, 이미 공이 있지 않으니 어떻게 공이 없음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공의 모습[空相]도 아니며, 공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각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답 중에 ‘성품이 본래 결정되어 있다’고 한 것은 본래 있지 않으므로 공의 모습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한 것은 공이 있지 않으므로 공이 없는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
| 다음 문답[제5 문답]은 각(覺)과 대상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
| ‘각도 그처럼’이라고 한 것은, 각도 연으로 생기는 것이라서 본성이 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답 중에 ‘깨끗하여 각이 없다’ 함은 공한 도리를 깨달았음을 말하는데, 모든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깨끗하다’고 하였다. 각의 본성이 공하다면 공 가운데에는 각(覺)이 없다, 색(色)이 공한 가운데 색의 모습이 없듯이. |
| 앞에서 대상이 각과 같음을 밝힌 것은 ‘대상이 공(空)도 아니고 불공(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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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空)도 아니’라는 이치를 바로 앞에서 말한 ‘각은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는 이치와 동치시킨 것이다. |
| 그런데 지금 각이 경계와 같다는 것은 ‘각의 본성이 공하여 모양이 없다’는 이치를 ‘대상이 공하여 모양 없다’는 이치에 동치시킨 것이다. 두 글이 같지 않으니 그렇게 알아야 한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마음[心]과 안식(眼識)도 그렇게 불가사의합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마음과 안식도 그렇게 불가사의하다. 무슨 까닭인가? 색(色)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이름이 없는 것이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眼]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봄[見]이 없는 것이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마음[心]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는 것이라 일어나는 처소[起處]가 없고,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연(緣)도 요별(了別)도 없어서 성품[性]이 모두 공적하다.” |
| [論] 이 세 번째[제4 문답]는 식(識)이 각(覺)과 같음을 설명한 글이다. ‘마음과 안식’이란 안식 종자(種子)가 쌓이고 모여 있는 마음과 이 종자가 일으키는 안식을 말한다. 이 둘을 들어서 그 성질이 공(空)함을 표시하였고, 그 아래로는 네 가지 연[四緣]과 관련시켜 안식이 공함을 밝혔다. |
| ‘색에는 처소가 없다’고 한 것은 색의 성품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고, ‘청정하여 이름이 없다’고 한 것은 공(空) 중에는 색이 없기 때문이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함은 안근(眼根)에게 대상이 되어주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소연연(所緣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
| ‘눈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봄이 없다’ 함은, 눈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는 안근(眼根)이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함은 색(色)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증상연(增上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
| ‘마음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다’는 것은 종자가 공한 가운데는 종자가 없기 때문이며, 네 가지 연[四緣] 가운데서 으뜸이 되므로 그렇게 말했다. ‘일어나는 처소도 없다’ 함은, 식을 직접적으로 일으키는 처소가 없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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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이니, 이는 인연(因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
|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함은, 이미 세 가지 연이 없어서 안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
| ‘연(緣)도 요별[別]도 없다’ 함은, 색(色)을 연(緣)하여 요별(了別)하는 식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안식(眼識)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연이란 앞 찰나에 사라진 연이고 요별이란 뒤 찰나에 생기는 분별인데 이 둘이 다 공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연과 식이 모두 공하기 때문에 총괄적으로 결론지어 ‘성질이 모두 공적하다’고 하셨다. |
| 안식과 네 가지 연이 모두 공함을 설하신 것과 같이 (耳識·鼻識·舌識·身識 그리고)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설하셨다. 즉 ‘법(法:의식의 대상)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이름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의(意)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보는 일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아감이 없다. 마음[心]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는 것이라 일어나는 처소[起處]가 없고,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연(緣)도 요별(了別)도 없어서 성질[性]이 모두 공적하다.’ |
| 여기서 ‘의(意)’란 제7식을, ‘마음’이란 제8식을 말한다. 이는 8식이 모두 공적하며 따라서 모든 각(覺)의 공함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
| [經] “본성에는 각(覺)이 없으니 그것을 깨달으면 각이 된다. 선남자야,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식[諸識]이 (마음의 근원에) 들어간다. 어째서 그런가? 금강지(金剛智)의 경지에서 해탈도(解脫道)로 끊고, 끊고 난 후에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서 출입이 없게 되며, 마음의 처소가 없는 결정성의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
| 그 경지는 밝은 유리(琉璃)같이 깨끗하고, 그 본성은 대지(大地)같이 항상 평등하고, 깨달아 묘하게 관찰하는 것이 지혜의 햇빛과 같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성취되어 본각을 얻게 함이 법의 비를 크게 뿌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지혜에 든 자는 부처의 지혜 경지에 든 것이며,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어떤 식(識)도 일어나지 않는다.” |
| [論] 이 대목은 (始覺을 ‘諸識空寂’과 ‘諸識不生’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로, 모든 식이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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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무명(無明)에 따라 여러 가지 식이 생겨났지만 지금 시각(始覺)에 따라서 일심(一心)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니 마음의 근원에 되돌아왔을 때는 모든 식이 일어나지 않고 그 식들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시각이 원만함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
| 이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간략히 대의를 말하고[略標] 다음에 자세히 풀이한다[廣釋]. 처음 대의를 말하는 것도 둘로 나뉘는데, 처음에 ‘본성에는 각(覺)이 없으니 그것을 깨달으면 각이 된다’ 함은 시각이 원만함을 표시한 것이며,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식[諸識]이 (마음의 근원에) 들어간다’ 함은 모든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표시한 것이다. |
| ‘본성에는 각이 없다’ 함은 공한 성품[空性]에는 식(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각도 없다는 뜻이다. 각(覺)도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 시각의 지혜이므로 ‘깨달으면 각이 된다’고 하였다.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이라 함은, 앞에서 말한 시각을 가리킨 것으로서 시각이 원만할 때 8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이 없음을 깨닫자마자 모든 식이 없어지기 때문이며, 궁극적인 곳을 깨닫자마자 마음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이 들어간다’고 하였다. |
|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자세히 풀이한 부분인데 그 중에 둘이 있다. 먼저 원인이 만족하였음[因滿]을 밝히고 뒤에 결과가 원만함[果圓]을 나타냈다. |
| ‘금강지의 경지[金剛智地]’란 등각위(等覺位)로서 시각의 인(因)이 만족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을 가리키니,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여기서는 각(覺)의 원인과 관련시켜 금강지(智)라고 부른 것이다. |
| ‘해탈도로 끊는다’ 함은 생기지 않는 원인이 만족한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끊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
| 태어나면서 얻은 무명주지[生得無明住地]를 대치하는 쪽으로 말한다면, 금강심(金剛心)이 무간도(無間道)가 되고, 묘각의 첫마음이 해탈도(解脫道)가 되니 무간도 때에는 무명(無明)과 더불어 같이 있다가 해탈도가 일어날 때 비로소 끊어버린다. |
| 한편 모든 식의 분별하는 종자[諸識戱論種子]를 대치하는 쪽으로 말한다면, 그 앞의 마음이 무간도가 되어 그 종자와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사라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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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다가 마지막 일념인 금강유정이 바로 해탈도가 되어 이 때 종자를 끊어버린다. 지금은 그 종자를 끊는다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므로 ‘금강지의 자리에서 해탈도로 끊는다[金鋼解脫道斷]’고 하였다. |
| 이 때 이숙식(異熟識)이 나타나는 것은 그 앞생각의 종자로부터 나온 것인데, 생겨나는 인과가 때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에 이숙이 된다. 그 뒤에 이숙식이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은 이 때 모든 종자를 이미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해탈도로 끊는다’는 말이 바로 모든 식이 생기지 않는 원인임을 알 수 있다. |
| 다음으로 과의 원만함[果圓]을 나타낸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각(覺)이 원만함을 밝히고, 나중에는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나타낸다. |
| ‘끊고 난 후에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간다’ 함은 금강지의 해탈도에서 종자를 끊고 난 즉시 머묾 없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2제(諦) 바깥에서 홀로 무이(無二)에 있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였다. 머무름이 없는 마음으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두 가지를 동시에 없앴기 때문에 속(俗)으로부터 나오든 진(眞)으로 들어가든 차이가 없다. 이미 출입이 없으므로 공(空)과 유(有)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마음의 처소가 없다’고 하였다. |
| 처소가 없는[無在] 곳은 오직 일심(一心)이며, 일심의 체는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결정성의 자리[決定性地]’라고 하였다. 일심이 나타날 때 8식이 모두 전의(轉依)하므로 그 때 네 가지 지혜가 원만해진다. 어째서 그런가? 이 일심은 어둠을 떠나서 광명(光明)을 이루므로 밝고 깨끗하여 비추지 않는 영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경지는 밝은 유리 같이 깨끗하다’ 하였으니, 이는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
| 이 일심은 멀리 두 가지 극단[二邊]을 떠나 자타(自他)에 통달하고 평등무이(平等無二)하다. 그러므로 ‘그 본성은 대지(大地)같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
| 또 이와 같은 일심(一心)은 관(觀)하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문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아 묘하게 관찰하는 것이 지혜의 햇빛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묘관찰지(妙觀察智)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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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일심은 작위가 없으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에서 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성취되어 본각을 얻게 함이 법의 비를 크게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비가 만물을 적셔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이 지혜도 그와 같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성취하고 본각을 얻게 하니, 이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지혜가 이미 원만하니 이는 시각(始覺)이 만족된 것이다. |
| ‘이러한 지혜에 든 자…’ 이하는 이어서 모든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밝힌 부분이다. 이 네 가지 지혜를 얻으면 바로 묘각(妙覺)의 지위다. 그러므로 ‘부처의 지혜 경지에 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때는 이미 일심(一心)의 원천으로 되돌아갔으므로 8식의 모든 물결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에게는 어떤 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상 두 부분으로 시각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여래께서 말씀하신 일각(一覺)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모든 중생이 본래 다 갖추고 있는 각(覺)에서 나온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이 몸 가운데 본래 그것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본각의 뜻을 연설한 부분이다. 그 중에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내용설명[正明]이고, 둘째는 집착을 놓아주는 것[遣著]이다. 내용설명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는 본각이 둘 아닌 이치[本覺無二之理]를 밝히고, 다음에는 장애를 제거하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除障入證之門]을 보여 준다. 본각이 둘이 아닌 도리에도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답이 있다. |
| ‘일각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라 함은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지혜의 뜻을 받아 가지고 한 말이다. 시각이 원만해지면 본각과 같아서 본각과 시각이 둘이 아니므로 ‘일각(一覺)’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며, 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므로 ‘성스러운 힘[聖力]’이라고 하였으며, 일각 안에 네 가지 큰 지혜가 다 갖추어져 있어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지혜의 경지[智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지혜는 일심(一心)의 양(量)과 같아서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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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미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넓은 지혜[弘智]’라고 하였다. |
| 이와 같은 일각은 다름 아닌 법신(法身)이며, 법신은 곧 중생의 본각이므로 ‘모든 중생이 본래 다 갖추고 있는 각(覺)에서 나온 이익’이라고 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성덕(性德)을 본래 다 갖추고 중생의 마음을 훈습(熏習)하여 두 가지 일[二種業]을 하기 때문에 ‘본각의 이익[本利]’이라고 이름하였다. 본각이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법신 밖으로 나가는 중생이 단 하나도 없으므로 ‘이 몸 가운데 본래 그것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다’고 하였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중생은 본래 번뇌[漏]가 없고 모든 선한 이익의 근본을 지녔지만, 지금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한 욕망의 가시[欲刺]가 있기 때문이다.” |
| [論] 아래는 대답인데 질문을 인정하고 설명하셨다. 본각 중에는 무량한 성덕(性德)이 있어서 3루(漏)에 의해 물들거나 동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본래 번뇌가 없다[本來無漏]’고 하였다. |
| 이를 근본으로 하여 모든 선한 이익이 생기므로 ‘모든 선한 이익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비록 본각은 있지만 객진(客塵)인 욕망의 가시에 덮여 있으므로 아직 스스로 본각(本覺)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아직 본각의 이익을 얻지 못하고 (번뇌를) 채집(採集)하는 중생이 있다면 어떻게 항복시키기 어려운 그것을 항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모여서 작용하든 독단적으로 작용하든 아직 분별과 오염이 있으면 정신을 돌려서 공한 도리의 굴(窟)에 머물러 항복시키기 어려운 일을 항복시켜야 한다. 마장[魔]의 결박에서 벗어나면 툭 트인 곳[露地]에 초연히 앉아 모든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 것이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장애를 제거하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는 묻고 나중에는 답했다. |
| 물음 가운데 ‘채집[採集]’이란 3유(有)의 욕심으로 생사라는 결과를 취하기 때문에 ‘줍는다[採]’ 하였고, 이 모든 번뇌가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에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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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다[集]’고 하였다. 이것들이 시작 없는 때부터 끊이지 않고 현행(現行)하므로 ‘항복시키기 어렵다[難伏]’고 말한다. 고쳐나가는 길이 겨우 생기기는 하였으나 그 힘이 미약하고 열등하기에 어떻게 항복시킬까, 이렇게 의심한 것이다. |
| 답 중에 셋이 있으니 먼저 무엇을 조복해야 하는가를, 다음에 조복하는[能伏] 힘을, 끝으로 조복시켜 얻은 훌륭한 이익을 말한다. |
| ‘모여서 작용하든 독단적으로 작용하든’이란, 중생의 심행에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니 어떤 때는 번뇌와 붙어 다니기 때문에 ‘모인다[集]’ 하고, 어떤 때는 미혹된 마음[惑心]을 떠나 행하므로 ‘독단적으로[獨]’라고 하였다. 번뇌를 떠났을 때도 아직은 법집(法執)이라는 분별이 있고, 번뇌와 함께 할 때는 번뇌에 물들므로 ‘분별과 오염’이라고 하였다. |
| 다음으로는 조복하는 힘을 밝혔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경전에 의지하여 자기의 심신(心神)을 돌려서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몰아내고 두 가지 공(空)의 도리에 머물게 되므로 ‘정신을 돌려서 공한 도리의 굴에 머문다’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이 바야흐로 일어나 도리에 순응하므로 훌륭한 능력을 갖게 되지만, 저 미혹은 무시 이래로 도리를 거스르는 탓에 대적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항복시키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킨다’고 하였다. 이는 지(地:十地)에 들어가기에 앞서 두 가지 장애[二障]를 없애는 것을 밝혔다. 이 조복의 길을 통해 끊는 길의 지위[斷道位]에 들어가서, 점차 종자를 뽑아내어 마침내 영영 아무것도 없게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네 가지 마장[四魔]을 멀리 떠나므로 ‘마장의 결박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
| 다음에는 조복시킴으로써 얻는 훌륭한 이익을 밝힌다. 이 이익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보리의 과[菩提果]이고, 또 하나는 과과(果果)이다. ‘보리과’란 번뇌가 있는[有漏] 5음의 취락(聚落)을 훨씬 넘어서서 도량에 앉아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툭 트인 곳[露地]에 초연히 앉는다’고 하였다. ‘과과’란 위없는 깨달음으로 대열반을 증득하고 각(覺) 없음을 깨달아 모든 식이 다 (마음 근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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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마음이 열반을 얻으면 짝이 없는 하나 뿐이라 언제나 열반에 머물 테니, 그것을 해탈이라 해야겠습니다.” |
| [論] 아래는 두 번째, 집착을 놓아주는[遣著] 부분인데 이 가운데 둘이 있다. 먼저 머묾이 없음을 밝혀 머묾이 있다는 집착을 버리게 하고, 뒤에는 얻을 것이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얻을 것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한다. 먼저 가운데도 둘이 있는데 먼저 묻고 다음에 답한다. |
| 물음 가운데 ‘하나뿐[獨一]’이란, 8식(識)이 전변할 때 일각(一覺)이 되기 때문이고, ‘짝이 없다’는 것은 사람·법이라는 두 집착을 여기서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짝이 없는 각(覺)은 항상 열반에 머무르고, 항상 머무는 지혜는 모든 결박에서 벗어나게 되리라고, 이런 식으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항상 열반에 머문다면 그것은 열반에 결박되는 일이다. 어째서 그런가? 열반은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이며,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은 본래 열반이다. 열반이라는 각의 분량은 본각의 분량이며, 각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고 열반도 달라지지 않는다. 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고 열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각에는 본래 소멸함이 없고 열반에도 소멸함이 없다. 열반과 각이 본래 다름이 없으므로 열반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열반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으랴? |
| 선남자야, 깨달은 자는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 중생의 때[垢]를 떠났기 때문이며, 본래 고요함이 없음을 깨달아 열반이라는 움직임[動]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머물면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없고, 따라서 출입하는 것도 없어서 암마라식(唵摩羅識)에 들어간다.” |
| [論] 이 대답에서는 머묾이 있다는 집착을 놓아주는데,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집착을 깨뜨림을 간략히 말하고 나중에 자세하게 도리를 나타낸다. |
| 먼저 (간략히 말하는) 가운데 ‘항상 열반에 머문다면 그것은 열반에 결박되는 일’이라고 한 것은, 열반에 머무는 항상한 깨달음이 있다고 설정하면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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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 바로 집착이라는 뜻이다. 열반에 묶여 있는데, 어떻게 항상 머묾을 해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자세하게 도리를 나타낸 말씀이다. 이치는 머묾이 없다. 그러므로 머묾이 있으면 이치에 어긋난다. 이치에 어긋나는 마음이 결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풀이하는 의도는 이와 같다. 그 중에 두 부분이 있는데 먼저 본각(本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밝히고 뒤에 시각(始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드러낸다. |
| 먼저(본각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나타내는 가운데)에서는 다름이 없다[無異]는 뜻을 가지고 ‘얻을 것이 없고 머물 것이 없다’는 이치를 밝히는데, 이 ‘다름없음’의 의미에는 네 가지가 있다. |
| 첫째 본래의 이치가 다름이 없다[本理無異]는 것으로서, ‘열반은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이며,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은 본래 열반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열반이 곧 본각의 이익이며 이 본각의 이익이 본래 열반이라, 그것을 비로소 깨달을 때[始覺] 본각과 동일함을 밝힌 것이며, 다르지 않다[無異]는 이유로, 따라서 얻을 바도 없다는 것이다. |
| 둘째는 각의 분량이 다름이 없다[覺分無異]20)는 것으로서, ‘열반이라는 각의 분량은 본각의 분량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열반의 모든 덕이 다름 아닌 본각의 덕임을 밝힌 것이니, 다름이 없고 얻음이 없다는 이치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
| 셋째는 동일한 맛으로서 다름이 없다[一味無異]는 것으로서 ‘각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고 열반도 달라지지 않는다’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한 맛의 차별 없는 특성을 가진 각의 성품이 열반의 무차별성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
| 넷째는 둘이 아닌 것으로서 다름이 없다[無二無異]는 것으로서, ‘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고 열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각에는 본래 소멸함이 없고 열반에도 소멸함이 없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 본각이 열반의 생멸 없음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
| 20) 각(覺)의 속성 또는 각의 공덕, 각의 덕과 같은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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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네 가지 무이(無異)로 보건대, (열반과 각이) 도리상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열반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열반의 각을 얻을 자[能得]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어서 ‘열반을 얻을 수 없는데’라고 함은, 열반이 얻어질[所得]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미 능득·소득이 없으니 어찌 머무는 자[能住]와 머물 곳[所住]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어떻게 머묾이 있으랴’라고 하였으며, ‘항상 머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
| 다음에는 시각(始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제시해 놓고 다음에 해석한다. |
| 여기서 ‘깨달은 자’란 시각을 말한다. 해석 부분에서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라고 함은, 생사가 본래 생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까닭에 생사의 오염[垢]으로부터 떠났음을 말한다. ‘본래 고요함이 없음을 깨달아’라고 함은, 열반에 본래 적정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까닭에 열반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에서도 떠났음을 말한다. |
|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없다’ 함은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출입하는 것이 없다’ 함은, 속제(俗諦)를 유(有)로 보지도 않고, 진제(眞諦)를 공(空)으로 보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암마라식에 들어간다’ 함은, 일심의 체(體)는 양 극단[二邊]을 떠나 이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므로 ‘들어간다’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머묾이 없어야 해탈할 수 있으므로, 열반에 머물면 결박[縛]을 벗어나지 못한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암마라식(唵摩羅識)은 (깨달아) 들어가는 처소이니, 처소가 얻어진다면 이는 법을 얻는 것이겠습니다.” |
| [論] 이 아래는 (첫 번째 유주의 집착을 떨쳐준 것에 이어) 두 번째 유득(有得)의 집착을 떨쳐주는 것인데 여기도 네 부분이 있다. |
|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
| 첫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물음이요 다음에는 대답이다. ‘들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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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앞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뜻을 취하여, ‘무구식(無垢識)은 들어갈 곳이고, 들어갈 때는 증득하는 것이므로 얻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의심이 생기므로 이런 물음을 던진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비유를 들겠다. 여기 길 잃은 아들이 손에 돈을 쥐고도 돈이 있는 줄 모르고 시방세계를 돌아다니며 50년이나 보냈다. 가난하고 궁색하고 곤란하고 괴로워 전력을 다해 살길을 찾아 헤맸으나 몸 하나 지탱하기도 부족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이런 정황을 보고 말하였다. ‘너는 손에 돈을 쥐고도 어째서 쓰지 못하느냐? 필요하면 마음대로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인데’ 하자 아들은 깨닫고서 돈을 찾아 매우 기뻐하며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길 잃은 아들아, 너는 좋아하지 말라. 얻은 돈은 본래 네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좋아할 게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다.” |
| [論] 이 답에서도 무득의 의미를 셋으로 밝히고 있다. 주장[法]·비유[喩]·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이다. |
| ‘아니다’라고 한 것은 유득(有得)이 아님을 총괄적으로 말한 것이고,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무득(無得)을 드러내기 위하여 네 토막으로 비유를 든 것이다. |
| 첫째는 길 잃은 아들이 돈을 가지고 있는 줄 모르고 떠돌아다니며 가난하게 고생한다는 비유이며, 둘째는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이 있음을 알려주고 충족하게 얻도록 한 비유이며, 셋째는 돈을 얻었다고 좋아하는 비유이며, 넷째는 그것은 새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 비유이다. |
| 첫째 토막에서 ‘길 잃은 아들’이란, 모든 중생이 제 마음의 근원을 잃고 있는데, 여래께서 대비심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듯 하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아들에 비유한 것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가난한 아들의 비유는 성문의 무리를 비유하는데 그쳤으나 여기에서 말한 길 잃은 아들은 모든 중생에게 다 통하는 비유이다. |
| ‘손에 돈을 쥐고도’라는 비유는 온갖 망식(妄識)이 5박(縛)의 번뇌 때문에 집착과 분별을 일으켜 자기의 깨끗한 마음을 뒤덮어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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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을 말한다. ‘시방세계를 돌아다님’이란 5상(相)과 5사(事)를 두루 분별함을 말한다. ‘50년이나 보냈다’는 것은 5음(陰)을 받아 50악(惡)을 일으킨 까닭이다. ‘가난[貧]’이란 세간의 선(善)을 조금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궁색[窮]’이란 도무지 출세간의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곤란[困]’이란 세 가지 나쁜 길[三途] 중 어디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괴로움[苦]’이란 인간이나 천상의 생을 받아 가벼운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
| ‘전력을 다해 살길을 찾아 헤맸다’ 함은, 세간의 낙을 구하여 복 받는 일에만 열중한다는 뜻이다. ‘몸을 지탱한다’ 함은 인간이나 천상의 낙을 받아 누린다는 뜻이다. ‘부족했다’ 함은, 세간의 낙을 받아 써보면 갈애(渴愛)만 더욱 늘어나고, 성한 날이 있으면 반드시 쇠할 날이 있어 옳은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 둘째 토막에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여기는 대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위해 어진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런 정황’이란 첫 번째 토막에서 말한 일이요, ‘아들에게 말했다’는 것은 중생을 위해 대승의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너는 손에 돈을 쥐고도 어째서 쓰지 못하느냐?’고 하신 뜻은, 그에게 깨끗한 마음이 있으므로 믿고 이해해야 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필요하면 마음대로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인데’라고 함은, 깨끗한 마음을 쓴다면 본각의 훌륭한 이익과 법신의 혜명이 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 셋째 토막에서 ‘그러자 아들은 깨닫고서’라고 한 것은 대승의 가르침을 듣고서 믿음과 이해가 생겼다는 뜻이니, 지전(地前)의 지위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돈을 찾았다’ 함은 초지(初地), 즉 통달위(通達位)에 들어갔다는 뜻으로서, 불성(佛性)과 본각의 이익을 증득해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매우 기뻐했다’고 함은 후득지(後得智) 중에 이제 막 얻을 것이라는 생각에 지극한 기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는 것은 관(觀)에서 나와서는 또 바른 생각을 놓쳐서 새어나옴[漏]이 있는 마음속에 있으므로 법집(法執)을 일으켜 얻은 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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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다. |
| 넷째 토막에서 ‘얻은 돈은 본래 네 것이다’라고 함은, 증득한 본각의 이익이 본래 너에게 속한 것이지 이제야 비로소 있게 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좋아할 게 어디 있느냐?’ 함은, 이미 본래 너에게 속해 있었고 지금 새로 얻은 것이 아니니, 얻었다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가르친 것이다. ‘너는 좋아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얻은 바가 있다고 분별하여 마음속으로 집착하고 기뻐함을 막아준 것이다. |
| [經] “선남자야, 암마라(唵摩羅)도 이와 같아서, 본래 나가는 모양이 없고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옛적에 미혹했었다 하여 없던 것도 아니고, 지금 깨달았다고 하여 들어가는 것[入]도 아니다.” |
| [論] 세 번째는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인데 이 중에 전체적인 대입[總合]과 개별적인 대입[別合]이 있다. 총합 중에 ‘암마라(唵摩羅)’란 여기 말로는 ‘때가 없다[無垢]’는 뜻이다. 본각은 본래 깨끗한 것이라 그 성품이 바뀌거나 변함이 없다, 저 황금 돈[金錢]의 성품이 바뀜이 없듯이. 또 황금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본각에 있는 상·낙·아·정(常樂我淨)21)을 비유한 것으로, 네 토막에 나오는 ‘돈’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
| 별합(別合)에도 네 구절이 있다. |
| ‘본래 나가는 모양이 없다’ 함은 첫 토막 중 ‘손에 돈을 쥐고 있다’고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함은 셋째 토막에서 ‘돈을 얻었다’고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옛적에 미혹했었다 하여 없던 것도 아니고’란, 둘째 토막에서 ‘네가 돈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쓰지 않는가?’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이는 지난날에는 잘 몰랐기 때문에 쓰지 못했으나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깨달았다고 하여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함은 넷째 토막에서 ‘이것은 본래 네 것이지 네가 얻은 것이 아니다’한 말에 대입한 것이다. 본래부터 있던 물건이라 자기 마음 바깥으로 나가 있지 않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본래 밖으로 나가 있던 것이 아닌 |
| 21)열반의 4덕(德) ①상(常): 생멸변천이 없는 열반의 덕 ②낙(樂) :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안락한 덕 ③아(我): 망집의 아를 버린 자재(自在)한 진아(眞我) ④정(淨): 번뇌의 더러움을 떠난 청정한 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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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어찌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들어감이 있지 않으므로 얻음도 있지 않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그 아버지가 아들이 길을 잃고 있음을 알았는데 어찌하여 50년 동안 시방세계를 헤매면서 가난하고 궁색하고 곤란하고 괴롭게 두었다가 이제야 알려주는 것입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50년을 지냈다는 것은 한 생각이 움직였다는 뜻이고, 시방세계를 헤맸다는 것은 끝없이 망상으로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의문 나는 점을 거듭 없애준 부분이다.22) 세 번의 문답으로 차례차례 의문을 풀어간다. 첫 번째 문답에서는 비유로 던진 의문에 대하여 법(法)으로 대답하였다. |
| ‘50년 동안’이란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 것이요, ‘시방세계를 헤맴’이란 끝없이 망상으로 돌아다녔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일념을 일으키는 동안 갖가지 법에 대해 망령되게 생각하는 것이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버지가 일깨워 준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각성을 할 수가 있었고, 망념이 다했을 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게 되었으니, 돈을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사실을 알려준 것인데,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에 50악(惡)이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50년을 지냈다는 비유로 말하였다. |
| 답한 뜻은 이와 같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명의 힘 때문에 4상(相)을 일으키고 4상과 무명이 합쳐지는 힘 때문에 일심을 움직여 생겨나고[生]·머물고[住]·달라지고[異]·소멸한다[滅]. 일심이 일단 움직이면 이 4상을 동반하게 되므로 ‘한 생각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 때문에 움직인다…”라고 한 『기신론』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 |
| 22) 머물 곳이 있다는 집착을 놓아주고 나서 얻을 것이 있다는 집착[有得執]을 놓아주는데, 후자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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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자세한 내용은 『기신론』「별기(別記)」에 설명되어 있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어찌하여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나이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면 5음(陰)이 동시에 생기고, 5음이 생기는 데서 50악이 갖추어진다.” |
| [論] 여기는 두 번째 문답으로 두 번째 의문을 없애준 것으로서, 고쳐야 할 악(惡)을 나타냈다. 일념(一念)의 4상(相)이 모든 생사를 포섭하므로 5음을 갖추고 50악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이 문답을 시설했다. 어떻게 5음이 50악을 갖추는가? 식음(識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는 8식(識)을 말한다. 수(受)·상(想)의 2음(陰)에 각각 여덟이 있어 16이 된다. 행음(行陰)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여덟은 상응(相應)23)이고, 하나는 불상응(不相應)24)이다. 이에 색음(色陰) 열일곱 을 합하면 50이 된다. ‘색음 열일곱’이란 능동적으로 만드는 주체가 되는 4대(大)와 만들어진 객체가 되는 13을 합친 것이다. ‘13’이란 5근(根)과 5진(塵)과 법에 속하는 세 가지 색[三種色]을 말한다. 즉 『현양론[顯揚聖敎說』에서 말한 율의색(律義色)과 불율의색(不律義色)과 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의 셋을 말한다. 우선 한 면에서 50가지를 세웠는데, 이와 같은 50가지는 순전한 악(惡)으로서, 모두 다 유전하는 것이라 열반에 위배되므로 저 열반의 순전한 선(善)과는 반대가 되기 때문에 50가지를 말한다.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끝없는 망상[遍計]으로 시방을 헤매는 것이 일념의 마음에서 생겨 50악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그 중생들로 하여금 일념을 일으키지 않게 하오리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저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켜 금강지(金剛地)에 머물러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남이 없게 하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할 것이니 이것이 |
| 23) 마음이 일어날 때 동반하여 일어나는 법. |
| 24) 마음에 동반해서 일어나지 않는 법. 색법이나 심법에 속하지 않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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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
| [論] 여기는 세 번째 문답으로 셋째 의심을 떨쳐주는 부분으로서 고쳐 나가는 길을 밝힌 것이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이란 10신(信) 이전의 모든 중생을 말한다. ‘마음을 안정시켜’라 함은 10주(住)를 넘어서면 마음이 편안히 3공(空)에 머물러 결코 물러서지 않게 되는데, 이를 ‘안정시킨다[安坐]’고 하였다. ‘금강지에 머물러’라 함은, 초지(初地) 이상의 경지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금강과 같이 무너지는 모든 것들을 떠나므로 그렇게 말하였다.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남이 없게 함’이란 등각위(等覺位) 중에서 동요하는 망념이 본래 적정한 것임을 깨달아 다시는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함’이란 묘각위(妙覺泣)에 도달하여, 일심의 원천은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고, 또 본래 동요하는 망념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음을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으므로 ‘항상’이라 하였고, 동요하는 망념이 없으므로 ‘편안하다’ 하였고,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태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수행하여 구경각(究竟覺)을 얻으면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는 망념의 네 가지 모양[四相]이 없다. 그러므로 일념이 없다고 하였다. |
| 이런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
|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들은 생각이 달라지는 특성[異相]을 깨달아서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거칠게 분별하고 집착하는 특성[麤分別執着相]을 버리므로 이를 상사각(相似覺:가까이 간 깨달음)이라 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들은 생각이 머무는 특성[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住相)이 없으니 분별하는 거친 생각의 특성을 떠났으므로 수분각(隨分覺:능력에 맞게 부분적으로 깨달음)이라 한다. 보살지(菩薩地)를 다 넘어섰을 경우 방편이 완성되고 일념이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아서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初相]이 없다. 미세한 생각마저 멀리 떠나므로 심성을 볼 수 있어 마음이 상주(常住)하게 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부른다.” |
| 나는 위 문장을 이렇게 본다. 여기서 ‘심성을 볼 수 있으며 마음이 상주한다’고 한 말이 『금강삼매경』의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할 것이다[心常安泰]’라는 문구를 풀이한 것이다. 나머지 다른 문구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해온 것에 준하여 해석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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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의 큰 단원은 본각에 대하여 부연한 것이다.25) |
|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
| “불가사의합니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면 그것이 본각의 이익입니다. 그 본각의 이익은 움직임이 없고 항상하여 없지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며, 없지도 않지만 각이 있지도 않습니다.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이며 본래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것은 청정하여 오염되지 않으며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으니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나이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인 (보살이)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領解]과 네 번째인 (부처님이) 결론짓는 부분[述成]이다.26) |
| ‘불가사의’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깊은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찬탄한 말이다. 그 아래는 이해한 내용을 개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여기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 말을 이해하고 나중에 뜻을 이해한 것이다. |
|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다’ 함은, 앞에서 ‘생각이 고요해져서 일어남이 없으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하다’고 한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서 시각(始覺)이 궁극에 다다른 경지를 말한다. 아래 뜻을 이해한 데서 ‘그것이 본각의 이익’이라 함은,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은 뜻을 잘 이해한 것이다. |
| 논[起信論]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념(無念)을 얻으면 심상(心相)의 생(生)·주(住)·이(異)·멸(滅)을 알게 되니, 이는 무념(無念)과 동등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각이라고 다를 것이 없으니, 생·주·이·멸의 네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므로 본래 |
| 25) 본각의 이익을 직접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直廣]과 부연설명하는 부분[重演]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중, 중연을 다시 둘로 나누어 시각(始覺)을 먼저 설명했고 이제까지 본각(本覺)을 설명했다. |
| 26) 유주(有住)의 집착을 떨쳐준 것에 이어 유득(有得)의 집착을 떨쳐주는 데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
| [122 / 263] 쪽 |
| 평등하여 동일한 각(覺)이기 때문이다.” |
|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실제로 시각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은, 이 경의 ‘그것이 본각의 이익’이라고 한 문구를 해석한 것이다. ‘네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므로 본래 평등하다’고 한 말은, 이 경의 ‘그 본각의 이익에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 문구를 해석한 것이다. |
| 이와 같이 시각(始覺)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여 없지 않게’ 된다. ‘항상하다’는 것은 곧 ‘없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항상’이라고 말했으나 딱히 있다[有]는 것은 아니므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시각(始覺)이 있다[有]는 말이 타당하지 않다면, 그렇기 때문에 각(覺)이 없지는 않다 할지라도 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이) 없지도 않으며 각이 있지도 않다’고 하였다. |
| 이와 같이 무각(無覺)의 도리를 깨달아 알면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므로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이며 본래의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
| 이와 같이 끝까지 깨달아[究竟覺] 안다는 것은 무명(無明)의 뒤덮임을 멀리 벗어난 상태이므로 ‘청정하여 오염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청정하다는 것은 본래 밝기 때문이며,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오염 상태를 이제는 떠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다’하였으니,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생(生)과 주(住)가 없기 때문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異)와 멸(滅)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제(眞諦)와 같고 법성(法性)과 같으므로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라고 한 것이다. 이미 한결같이 평등하여 언설(言說)을 떠나고 사려[慮]를 초월했으므로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앞에서 이미 부사의(不思議)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중복한 이유는 불가사의한 그것에 대해서도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
| 부처님께서 ‘그렇다’고 하신 것은 네 번째인 결론[述成]에 해당한다. 앞에서 (보살이) 듣고 이해[領解]한 내용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
| [123 / 263] 쪽 |
| [經] 무주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껏 없던 일을 얻어 게송으로 아뢰었다. |
| 높으신 대각(大覺) 세존께서 |
|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설하시니 |
| 무념과 무생의 마음이 되어서 |
| 마음이 항상 생하여 소멸하지 않네. |
| 일각(一覺)인 본각(本覺)의 이익으로 |
| 본각 지닌 모든 자들을 이롭게 하니 |
| 저 돈을 얻은 사람과 같아서 |
| 얻은 것이 얻은 것이 아니어라. |
| [論] 이는 두 번째인 게송으로 찬양하는 부분이다.27) 게송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두 구절은 설하신 분을 전체적으로 찬양한 것이고, 다음 네 구절은 앞에서 설해주신 법을 찬양한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은 비유를 노래한 것이다. |
|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설하시니’란 모든 중생이 무념법을 이루고 구경각을 이룸을 설하신 것을 말한다. |
| ‘무념과 무생의 마음이 되어서’라고 한 것은 나고 죽는 생각이 없어서 무생의 마음을 성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음이 항상하여 소멸하지 않네’라 함은 앞에 설하신 글을 노래로 간추린 것으로서 경문 중에 ‘마음이 항상 편안하여……항상하여 없지 않다’ 한 부분에 해당한다. ‘생(生)’이란 있다[在]는 뜻이요, ‘멸(滅)’이란 없다[無]는 뜻이다. ‘일각인 본각의 이익으로 본각을 지닌 모든 자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본각을 지니고 있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으므로 ‘본각을 지닌 모든 자’라 하였다. |
| 맨 아래 두 구절은 앞에서 든 네 토막의 비유를 총괄적으로 노래한 것임을 |
| 27) 「본각리품(本覺利品)」을 크게 본각의 이익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明本覺利益], 게송으로 찬탄하는 부분[以偈讚頌], 당시 대중이 이익 얻음을 밝히는 부분[時衆得益]의 셋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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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수 있다. |
| [經] 그 때 대중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본각의 이익인 반야바라밀을 얻었다. |
| [論] 이는 세 번째로 법을 듣고 이익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말씀하신 뜻에 따라 제각기 이익을 얻었다는 뜻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본각의 이익을 얻은 것과 시각의 반야는 평등하고 다름이 없다. |
| 5. 입실제품(入實際品) |
| [論] ‘실제(實際)’란 허망[虛]을 떠났다는 말이며 궁극[究竟]이라는 뜻이다. 환(幻)을 떠난 궁극이기 때문에 ‘실제’라 하며, 가르침[敎]에 의지하여 이치[理]를 닦아 이치에 들어가고 행(行)에 들어가기 때문에 ‘들어간다[入]’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정해진 범위가 없는 것[無際]으로 범위를 삼고, 이입(二入)은 들어감이 없는 들어감이므로 「입실제품」이라고 하였다. |
| [經] 그 때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 “모든 보살들은 본각의 이익에 깊이 들어가므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
| [論] 관행(觀行)을 여섯 부분28)으로 나누어 개별적으로 설명[別顯]하는 중 세 번째인 ‘본각에 의하여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依本利物]’ 부분을 마쳤다. |
|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인 허망에서 실제에 들어가는 부분[從虛入實]이다. 한편 앞품까지 심생멸문(心生滅門)을 밝혔다면, 지금 이 품에서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다. |
| 28) 이 경의 정설분(正說分)은 「별현관행(別顯觀行)」과 「총지일품(摠持一品)」으로 크게 나뉘는데, 별현에는 6품이 있다.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에서 무상관(無相觀)을 밝히고,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에서 무생행을, 셋째 ‘본각리품(本覺利品)’에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依本利物]을, 넷째 ‘입실제품(入寶際品)’에서 허망에서 실제로 들어가게 함[從虛入實]을,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에서 모든 행이 참된 성품인 공에서 나왔음[一切行出眞性空]을,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에서 무량한 방편으로 여래장에 들어감[無量門入如來藏]을 밝혔다. 이 여섯 가지 품으로 관(觀)과 행(行)을 다 설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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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네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간략히 대의를 표한 것[略標大意], 둘째는 도리를 자세히 밝힌 것[廣顯道理], 셋째는 사리불이 이해한 것[身子領解], 넷째는 그 때 모인 무리들이 이익을 얻은 것[時衆得益]이다. |
| 첫째에 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들어가게 하는 방편(方便)을 열어 보인 것이요, 뒤에는 들어 갈 실제(實際)를 보여준 것이다. 방편을 열어 보인 데에도 총체적인 표방과 개별적인 설명이 있는데, 이 글은 총체적으로 표방하여 대의(大意)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
| [經] “때아닌 후세에 진여를 그대로 설법하면 때와 이익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다. 혹은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 같지도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게 설해야 한다. 갖가지 욕정[情]과 지견[智] 가진 자들을 이끌어 살반야(薩般若:一切智)의 바다에 흘러들게 해야 하며, 제도 받을 중생들이 저 헛된 바람을 잡지 않고 모두 한 맛의 신비한 구멍[一味神孔:다른 여러 본에는 一味神乳로 되어 있다]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 |
| [論] 여기서부터는 개별적으로 방편을 열어 보인 부분이다. 이 가운데도 네 가지 방편이 있다. 하나는 때를 아는 방편이고, 둘은 근기를 아는 방편이며, 셋은 끌어들이는 방편이고, 넷은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다. |
| ‘때를 아는 방편[知時方便]’은 ‘때아닌 후세에 진여를 그대로 설법하면 때와 이익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후세[後]’에 세 가지 뜻이 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정법이 사라진 후, 다섯 시기로 되어 있는 500세 중 마지막 500세를 말한다. ‘때가 아니[非時]’라 한 것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때, 쉽게 깨닫지 못하는 때, 이견(異見)이 성하게 일어나 서로 비난하는 때이다. 이렇게 때아닌 때에 진여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법하면 시절에 맞지 않아서 이로울 것이 없다. 때와 이익이 함께하지 못하므로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때를 아는 방편이다. |
| ‘근기를 아는 방편[識機方便]’이란 ‘혹은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 같지도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게 설해야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
|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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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며’란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는 쪽으로만 설한다면 그들의 삿된 집착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쪽으로만 설한다면 그들에게 바른 믿음을 일으켜주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심을 얻게 하고 본래 가졌던 삿된 집착을 제거해 주려면,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기도 하면서 설해야 한다. |
| 또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치에 따라서만 설하면 상대방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치에 따라 설하지 않는다면 도리에 위배될 터이니 어찌 바른 이해를 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과 이해를 주려면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해야 한다. |
| 만일 이견(異見)이 엇갈려 쟁론이 한창일 때 유견(有見)에 일치하게 설하면 공견(空見)과는 달라질 것이며, 반대로 공집(空執)에 일치하게 설하면 유집(有執)과 다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쪽으로 설하든 다른 쪽으로 설하든 더욱 쟁론만 조장하게 된다. 또 양쪽을 동일하다고 본다면 자체 안에서 모순을 일으켜 싸우게 되고, 반대로 양쪽을 다르다고 본다면 양쪽 모두와 말다툼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게 설해야 한다. |
| ‘같지도 않게’라 함은 말 그대로 하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고, ‘다르지도 않게’라 함은 속뜻으로 말하자면 허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르지 않으므로 상대방의 마음[情]에 거슬리지 않고, 같지 않으므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서도, 도리에 대해서도 어긋나지 않으므로 ‘상응하게 설한다[相應如說]’고 하였다. 여기서 ‘여(如)’는 ‘이(而)’의 뜻이다. |
| ‘끌어들이는 방편[引入方便]’이란 ‘갖가지 욕정[情]과 지견[智] 가진 자들을 이끌어 일체지의 바다에 흘러들게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갖가지 정’이란 크고 작은 욕정의 차별을 말하고 ‘갖가지 지’란 공(空)이다, 유(有)다 하는 지견의 차별을 말한다. 이러한 무리들을 이끌어 모두 도(道)의 흐름에 따라 일각(一覺)인 일체지(一切智)의 바다, 즉 무상보리의 깊고 넓은 이치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마치 온갖 냇물이 함께 바다에 흘러 들어가면 깊고 넓은 큰 바다에서 한 맛이 되는 것과 같으므로 ‘끌어들이는 방편’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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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
| ‘벗어나게 하는 방편[出離方便]’이란 ‘제도 받을 중생들이 저 헛된 바람을 잡지[挹] 않고 모두 한맛의 신비한 구멍을 바라보게[庶] 해야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읍(挹)’은 ‘짐[斟]’과 같으며 취하여 받아들인다[取納]는 뜻이다. ‘헛된 바람’이란 허공에 떠도는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듯이 모든 경계가 모든 식(識)의 파랑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제도되는 중생이 이 경계의 바람을 붙들고 있었으므로 이제까지는 일어난 모든 식의 파도에 전전하다가 이제는 그것을 취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식의 파도가 그쳐 고요해진 것이다. ‘서(庶)’란 ‘서기(庶幾)’라는 말로 희망한다는 뜻이다. ‘신비한 구멍[神孔]’이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선의 굴은 아무 할 일 없이 한적하고 고요하여 장생할 수 있는 곳으로 생사가 없는 대열반(大涅槃)의 집을 비유한 것이다. 원만하고 공적하고 평등하므로 ‘한맛[一味]’이라 하였다. 중생들로 하여금 큰 열반을 희구하고 모든 식의 파도를 멈추어 유전(流轉)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출리방편’이라고 한다. |
| [經] “세간은 세간이 아니며, 머묾도 처소가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니, 5공(空)에 나오고 들어가면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법은 공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법의 성품은 없지 않기 때문이다[法性非無:어떤 본에는 ‘性非有無’로 되어 있다]. 없지 않음이 없지 않고, 없지 않은 그것이 있지도 않으니 결정된 성질이 없어서 유·무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있다, 없다를 따지는 범부나 2승(乘)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보살들의 경우 이 이익을 알면 보리를 얻는다.” |
| [論] 이것은 (첫 번째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들어갈 도리[所入道理:실제]를 밝힌 부분인데 여기에도 네 가지가 있다. |
| 첫째는 간략한 설명한 것[略明]이고, 둘째는 거듭 해석한 것[重釋], 셋째는 편견과 집착이 옳지 않음을 나타낸 것[偏執不當], 넷째는 통달한 자에게는 훌륭한 이익이 있다는 것[達者勝利]을 말한다. |
| 첫째 간략한 설명 중에 ‘세간은 세간이 아니며’라 함은 세간의 5법(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묾도 처소가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함은 열반에 상주한다는 것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행(觀行)을 닦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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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5공(空)을 통달할 때 유(有)에서 나와 공(空)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오고 들어가면서’라고 하였다. 공을 들어갔을 때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고, 공을 취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을 버리지도 않으므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고 하였다. |
| 이미 5공에 들어갔다면 어째서 취하지 않는다고 하며, 취함이 없다면 어째서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둘째로 거듭 해석하였는데, ‘모든 법은 공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법의 성품은 없지 않다’는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공에 들어감을 설하는데, 없지 않음이 없지 않고, 없지 않은 그것이 있지도 않으므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
| ‘없지 않다’는 것은 법성의 이치[理]가 토끼 뿔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없지 않은 그것’이란 관행자가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버리지 않은 것은 이치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있지도 않다’고 한 것은 관행자가 간직[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간직하지 않는 것은 이치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
| 법성은 이와 같이 결정적으로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통달한 사람은 양쪽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정된 성질이 없어서, 유·무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리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
| (편견과 집착이 옳지 않음을 나타낸) 셋째 중에서 ‘있다, 없다를 따지는 범부나 2승의 지혜로는’이란 범부는 유(有)를 긍정하고 공(空)을 등지며, 2승은 유(有)를 등지고 공적한 것만 따라감을 말한다. 이와 같이 유·무를 떠나지 못한 지혜를 가지고 안온한 법성을 헤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니거니와[非]’라고 하였다. |
| (통달한 자에게는 훌륭한 이익이 있다고 한) 넷째 가운데 ‘모든 보살’이란 지전보살(地前菩薩)을 일컫는다. 법성(法性)이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님을 아는 자는 처음 발심한 때 정각(正覺)을 이루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고 잘라 말했다. 즉 발심을 해서 법성을 알았을 바로 그 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뜻은 『화엄경』 「발심공덕품(發心功德品)」에 나와 있다. 위의 모든 문장에서는 언제나 ‘결정한 성품’을 말해 왔는데 여기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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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결정된 성품이 없음’을 말하는가?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무결정성’이라는 사실이 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
|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대력(大力)이라는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시여, 5공(空)에 출입하면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고 사실대로[如如:어떤 본에는 ‘如佛’이라 되어 있다]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5공에서 취하거나 버리지 않는 것입니까?” |
| [論] 이 아래는 (대의를 간략히 나타낸 데 이어) 두 번째로 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인데 네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
| 첫째는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이요, 둘째는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이요, 셋째는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이요, 넷째는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이다. |
| 첫째 부분도 넷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5공(空)을 밝히고, 둘은 3공(空)을 설명하고, 셋은 공이 곧 진(眞)임을 밝히고, 넷은 진이 여(如)임을 밝혔다. |
| 첫 번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
| 묻는 사람은 대력(大力)보살이다. 이 사람은 실제(實際)의 법문에 들어가 법계에 두루하여 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대자재(大自在)를 얻었으므로 ‘큰 힘을 가진 자[大力]’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실제를 드러내는) 이 부분에서 등장한 것이다. ‘사실대로[如如]’라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 여여한 이치[如理]에 들어맞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앞의 여(如)는 맞는다[當]는 뜻이요, 뒤의 여(如)는 도리를 가리킨다. 먼저는 이해한 내용을 말하고, 뒤에는 물음을 제기한다. 물음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오공법문(五空法門)을 묻고, 둘째는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는 뜻[無取捨義]을 물었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아, 5공(空)이란 3유(有)29)가 공이며, 6도(道)의 그림자가 공이며, 법상(法相)이 공이며, 명상(名相)이 공이며, 심식(心識)의 뜻이 공임을 말 |
| 29) 욕(欲)·색(色)·무색(無色)의 삼계(三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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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
| 보살아, 이와 같은 공(空)들은 공이면서도 공에 머무르지 않으며, 공에 공상(空相)이 없다. 상(相)이 없는 법이니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취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면 3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다.” |
| [論] 차례대로 앞의 두 물음에 답한 말씀이다. 5공으로 세 가지 진여를 나타낸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요, 둘째는 실상진여(實相眞如)요, 셋째는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다. 이 뜻은 『현양론(顯揚論:顯揚聖敎論)』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중에 앞의 두 가지 공은 앞의 두 가지 진여이며, 뒤의 세 가지 공은 세 번째 진여이다. 무슨 뜻인가? |
| 처음에 ‘3유가 공’이라 함은 3유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삼계에 유전하는데, 삼계의 유전에는 전후의 성질이 없고 찰나에도 머묾이 없어서 공이며 무소득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유전진여문(流轉眞如門)이다. |
| 두 번째 ‘6도의 그림자가 공’이라 함은 선업과 악업이 각각 2품(品)이므로 6도(道)의 과보가 본체와 비슷하게 그림자를 나타내지만, 그림자는 본체를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공이며 무소득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실상진여문(實相眞如門)이다. |
| 뒤의 세 가지는 유식진여문(唯識眞如門)이다. 앞의 둘은 취하는 대상인 뜻과 이름을 버리는 것으로서, 뜻과 이름은 서로 객체만 되고 실제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공무소득)이며, 마지막 하나는 취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으로서, 능(能)과 소(所)는 상대하여 독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무소득)이라는 것이다. 유식의 도리는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 그러므로 세 가지 공으로 나누어 설명하여 능·소를 버리게 했으니, 능소가 공하기 때문에 무분별이 된다. |
| ‘보살아’ 이하의 답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와 같은 공들’이란, 5공(空) 전체를 들어 공의 이치[理]와 지혜[智]를 설명한 것이다. ‘공이면서도 공에 머무르지 않음’이란 공의 지혜는 머묾이 없어 이치와 평등하기 때문이다. ‘공에 공상이 없다’고 한 것은 공의 이치는 모양이 없어 지혜와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치와 지혜는 평등하여 주관[能]과 객관[所]의 모양이 없으니 어떻게 거기에 취하거나 버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경지에 들어가면 3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취함이 없는 경지’란 10지 |
| [131 / 263] 쪽 |
| (地)를 말한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무엇이 3공(空)입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3공이란 공상도 공이며[空相亦空], 공공도 공이며[空空亦空], 소공도 공임[所空亦空]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들은 3상(相)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진실이 없지 않으니,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져 불가사의하다.” |
| [論] 이 하나의 문답은 3공(空)30)을 밝힌 것이다. ‘공상도 공’이라 한 데서, ‘공상(空相)’이란 속(俗)을 버리고 진(眞)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평등한 모양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공하다’는 것이니,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한 것이다. 이러한 공공(空空)의 뜻은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하고,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하는 속제(俗諦)의 차별상을 설명한 것으로서 공공의 뜻이다. 평등한 공에 대해서도 공이라 하여 세속의 차별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차별을 ‘공공’이라 한다. |
| ‘공공도 공’이라고 한 데서 ‘공공’이란 속제(俗諦) 차별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공하다’는 것이니, 즉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한 것이다. 이는 장엄구를 다시 금덩어리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
| ‘소공도 공’이라고 함은, 첫 번째 공(空)에서는 공에 의해 속제가 드러났고, 두 번째 공에서는 공에 의해 진제가 드러났는데 이 두 가지가 둘이 아니므로 ‘(그것)도 공’이라고 하였다. 이는 일제(一諦)에 융합하여 하나인 법계[一法界]를 드러낸 것이다. 일법계란 일심(一心)을 말한다. 그러나 (3공 중) 첫째 공문(空門:空相亦空)에서 버린 속(俗)은 소집상(所執相)이고, 둘째 공문(空門:空空亦空)에서 융합한 속(俗)은 의타상(依他相)이다. 속제에 두 가지 상이 있기 때문에 버리는 것과 융합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
| 30) 원문에는 ‘2공(空)’으로 되어 있으나 앞 뒤 내용으로 보아 ‘3공(空)’으로 번역한다.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에도 ‘다른 본에는 3공으로 되어 있다’고 교감 주가 달려 있다. |
| [132 / 263] 쪽 |
| 또한 첫째 공문에서 속(俗)을 버림으로써 드러난 진(眞)과 둘째 공문에서 속을 융합함으로써 드러난 진, 이 두 가지 문의 진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다. 오직 진실 한 종류인 원성실성(圓成實成)이다. 그러므로 버리든 융합하든 드러난 것은 하나다. 셋째의 공은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
| 또 이 3공(空) 중에 첫째 공은 속제중도(俗諦中道)를 드러내고, 둘째 공은 진제중도(眞諦中道)를, 셋째 공은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닌 무변(無邊) 무중(無中)한 중도(中道)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
| ‘이와 같은 공들’이란 3공(空)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인데, 속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진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그것이 둘이 아니라는 상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3상(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물지 않음으로써 철저하게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진실(眞實)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진실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졌다’고 하였으며, 길이 끊어졌다[道斷]는 말도 붙일 수 없으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였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진실이 없지 않다면 (진실이 없지 않다는) 그 상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로31), 공(空)에 진(眞)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이 있지도 않음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묻고 뒤에 답했다. |
| 묻는 의도는 이렇다. ‘보통 유·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상대적인 것이다. 있지 않으면 반드시 없는 것이고, 없지 않으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이치가 없지 않다고 했다면 진실한 이치가 있어야 한다.’ |
| 공부하는 이들이 대부분 늘 이렇게 생각하므로 저들의 고집을 떨쳐주기 위 |
| 31) 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을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 넷으로 나누었다. 그 중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도 5공(空)을 밝히고, 3공(空)을 설명하고, 공이 곧 진(眞)임을 밝히고, 진이 여(如)임을 밝히는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위 경문부터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
| [133 / 263] 쪽 |
| 해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없음[無]이 없음에 머물지 않고, 없지 않다[不無] 해서 있음[有]도 아니다.[不無不有:어떤 본에는 ‘有不住有’로 되어 있다] 있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 없지 않는 모습이라 해서 있음에 머물지도 않으니, 유·무로는 이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보살아, 이름과 뜻이 없는 모습은 불가사의하다. 왜냐하면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이름이 없지 않고,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뜻은 뜻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
| [論] 답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음에 대한 답[正答]이고, 둘은 그 심오함을 찬탄한 것[歎深]이다. |
| 먼저 ‘없음이 없음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진실이 없지 않다[不無眞實]’고 한 구절 중에서 무(無)라는 이름이 무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없지 않다[不無]’는 이름 때문에 있음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없지 않다 해서 있음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명칭을 붙일 수 없는 데다 명칭을 붙인 것이라서 ‘있다’는 의미[義]에 들어맞는 것은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
| ‘있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라 함은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했다 할지라도 진무(眞無)라는 법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없지 않는 모습이라 해서 있음에 머물지도 않는다’ 함은,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했다 할지라도 속유(俗有)의 모습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속(眞俗)이 유무(有無)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진실무이(眞實無二)의 이치가 없지 않고, 진속(眞俗)에 2제(諦)가 없지 않기 때문에 진실무이의 이치가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유무로는 이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뜻없는 뜻[無義之義]을 밝힌 것이지, 이름 있는 이름[有名之名]을 가리키지 않는다. |
| ‘보살아’ 이하는 둘째, 심오함을 찬탄한 것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하나는 직접 찬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찬탄을 해석한 것이다. |
|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이름이 없지 않다’한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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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은 ‘뜻 있는 뜻’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을 가지고 ‘뜻 없는 뜻’에 맞춘 까닭에 ‘이름이 없지 않다’고 한 것이다.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뜻은 뜻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한 것은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이치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을 일컫는 것이 아니므로 ‘뜻 없는 뜻’을 가지고 ‘이름 없는 이름’을 일컫는 까닭에 ‘뜻이 없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
| 이와 같이 이름과 뜻이 있지는 않지만 이름과 뜻이 없지도 않으므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진실의 여여[如]한 모습이며, 여래의 여여한 모습입니다. 여여하지만 여여에 머물지 않으니, 여여에는 여여라는 모습이 없으니, 모습에 여여함이 없으므로 여래 아닌 것도 아닙니다. 중생의 심상(心相)이라 할 때 그 상 역시 여래라면,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 진(眞)에 여(如)함이 있지 않지만 여하지 않음도 없다는 뜻을 밝힌 부분인데, 이 가운데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물음에도 둘이 있으니 처음에는 도리를 내세우고 나중에는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
| ‘이와 같은 이름과 뜻[如是名義]’이란 앞에서 말한 불가사의한 이름과 뜻의 특성을 말하는데, 이 이름과 뜻이 뒤바뀌는 일도 없고 변천되는 일도 없이 일치하므로 ‘진실’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주관과 객관[能所]을 멀리 떠나 한 맛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여여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평등하고 여여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여래가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여래의 여여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
| ‘여여하되 여여함에 머물지 않는다[如不住如]’고 한 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라는 이름이 여여함이 없는 여여함이란 뜻에 해당함을 밝힌 것이다. ‘여여에는 여여라는 모습이 없으니, 모습에 여여함이 없으므로[如無如相相無如故]’라 함은, 여여의 모습이 없는 여여의 모습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의 이름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일치하여 능소(能所)가 평등하므로 이름이건 뜻이건 ‘여래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모습에 여여함이 없다’고 한 것은 여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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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모습에는 여여함이 없다는 것으로, 여여의 모습은 바로 무상(無相)을 상(相)으로 한다. 그러므로 ‘여여에 여여라는 모습이 없다[如無如相]’ 함은 여여의 무상(無相)이 있지 않음을, ‘모습에 여여함이 없다[相無如]’ 함은 무상의 여여함이 있지 않음을 밝힌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여의 체상(體相)이 있는 것은 아니나 없지도 않으니, 여여의 체상은 이와 같이 여여의 상이 없는 여여의 상이라야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의 이름이 된다. |
| ‘중생의 심상(心相)이라 할 때 그 상 역시 여래’라 함은 모든 중생의 분별심상(分別心相)은 그 상이 상이 아니어서 평등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그 상 역시 여래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물음 중에) 평등한 도리를 내세운 부분이다. |
| 다음으로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한 구절은 의심나는 바를 질문한 부분이다. 중생의 심상(心相)이 이미 여래라면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경계가 없다’ 함은 무분별(無分別)을 말한다. 무분별이기 때문에 당연히 염오가 없을 테고, 염오가 없다면 삼계(三界)가 없어야 한다. 이런 의심이 났기 때문에 이 물음을 던진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에 물들기 때문에 삼계(三界)라 하고 삼계의 마음을 가리켜 ‘다른 경계’라 하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마음에서 변화되어 생기는 것이므로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다른 경계도 없다.” |
| [論] 이것은 의심에 대한 답인데 앞은 인정하는 말이고[與] 뒤는 부정하는 말이다[奪]. 자성(自性)이 청정하여 본래 물듦이 없는 쪽을 들어 말했기 때문에 인정하는 말이라 했고, 외부에 의해 물들어 다른 경계가 있게 되었다는 쪽을 들어 말했기 때문에 부정하는 말이라 하였다. |
| ‘자성이 청정하다’고 한 것은 『보성론(寶性論)』에서 경을 인용하여 “선심(善心)도 생각마다 없어져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고, 불선심(不善心)도 생각마다 없어져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번뇌가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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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에 닿지[觸] 못하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못하는데, 어떻게 법에 닿지 않고서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으니, 이는 물들었지만 물들지 않는 측면을 나타낸 것[染而不染門]이다. |
| ‘외부에 의해 물들었다[隨他染]’ 함은 『부인경(夫人經:勝鬘經)』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알기 어려우며, 저 마음이 번뇌 때문에 물드는 것도 알기 어렵다” 한 말씀과 같으니, 이는 물들지 않았지만 물든 측면을 나타낸 것[不染而染門]이다. |
|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자성이 청정한 마음과 본각의 이치에는 모든 경계와 더러움이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
| ‘경계에 물들기 때문’ 아래는 물음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먼저 불각(不覺)이 경계에 물들었음을 밝히고 나중에 불각(不覺)에 상대해서 시각(始覺)을 간략히 보여준다. |
| 불각(不覺)을 밝힌 중에 ‘경계에 물들기 때문에 삼계(三界)라 한다’ 함은 주지번뇌(住地煩惱)에 크게 욕애주지(欲愛住地)·색애주지(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 세 가지가 있어서 이를 근거지[住地]로 하여 삼계에 대한 애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삼계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삼계심이 생기며, 이 망심(妄心)을 바탕으로 허상의 경계[虛境]를 변화시켜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변화되어 생긴다’고 하였다. |
| 다음은 시각(始覺)을 밝힌 것이다.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이라고 한 것은 이치에 의해서 관행(觀行)을 닦으면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경계도 없다’ 함은 망령되게 지어내던 경계도 마음 따라 없어지기 때문이다. |
| 여기까지 말한 네 가지 문[門:五空, 三空, 空是眞, 眞是如]이 모두 (廣顯道理의 넷 중) 첫 번째, 실제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顯實際義]이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마음이 깨끗한 데 있어서 모든 경계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깨끗할 때는 삼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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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보살아, 마음이 경계를 일으키지 않으면 경계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이는 모든 경계는 오직 보여진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허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趣入義]인데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
| 첫째는 향해 들어간다는 뜻을 전체적으로 밝혔으며[摠明趣入], 둘째는 취입의 뜻을 개별적으로 드러냈으며[別顯趣入], 셋째는 취입이 잘못을 떠났음[入之離過]을, 넷째는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 것이다. |
| 첫째의 총명취입에도 둘이 있다. 먼저 묻고 다음에 답했다. 물음에 ‘이 마음이 깨끗할 때는 삼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함은 초지(初地) 이상이 본래 청정함을 증득해서 보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당연히 삼계가 멸해 없어진다는 것이다. 삼계의 사상(事相)은 초지나 제8지(第八地)에서 없어지게 되고, 삼계의 자성(自性)은 등각위(等覺位)에서 없어지게 되고, 삼계의 습기 (習氣)는 묘각위(妙覺位)에서야 없어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
| 답에서 전체적으로 인정하는 뜻으로 ‘그렇다’고 하였다. 삼계가 없어질 때는 심(心)과 경(境)이 서로를 생성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오직 마음의 허망한 견(見)이 경계를 변화시켜 조작하는 것이니, 마음에 망령됨이 없을 때는 경계를 변화시켜 조작하지 않고, 경계가 없으므로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
| [經] “보살아, 안에 중생이 없고 3성(性)이 공적하면 자기라는 무리도 없고 남이라는 무리도 없으며 …… 두 가지 들어감[二入]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로움을 얻으면 삼계가 없다.” |
| [論] 이 아래는 둘째, 취입의 의미를 개별적으로 밝힌 부분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하나는 수(數)를 들어 전체적으로 보여준 것이요, 둘은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인데 위 문장은 전자에 해당한다. |
| 첫 대목에 ‘안에 중생이 없다’ 함은 10주위(住位)에서 안으로 인공(人空)을 얻었기 때문이며, ‘3성(性)이 공적하다’ 함은 10행위(行位)에서 안으로 법공(法空)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중생도 없고 남이라는 중생도 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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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함은 10회향위(廻向位)에서 평등한 공(空)함을 얻어 자타(自他)와 인법(人法)의 무리에 대한 집착을 두루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리[衆]’란, 중생을 중이라 부르기도 하고, 5음(陰)의 법 역시 5중(衆)이라 한다. 이는 공(空)에 가깝지만[相似] 아직 진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두 가지로 들어감’이란 지전(地前)·지상(地上)이 들어가는 수(數)를 통틀어 열거한 것이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2입(入)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마음이 본래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들어감이 있겠습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2입(入)이란 첫째는 이입(理入)이고,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이입(理入)이란 무엇인가?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覺觀)에 집중하여 머물고,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 금강심(金剛心)의 경지에 굳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적정무위(寂靜無爲)하여 분별이 없으면 이를 이입(理入)이라고 한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문답을 통해 두 가지 들어감[二入:理入·行入]을 개별적으로 밝힌 부분이다. 물음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묻고 나중에 논란한다. 답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답하고 나중에 정리[通]한다. 답에도 세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수를 표시하고, 둘째는 이름을 열거하고, 셋째는 그 특성을 차례로 설명한다. |
| 여기서 ‘이입(理入)’이란 이치[理]에 순응하여 믿고 이해하나 아직 증행(證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입’이라 하며, 지전(地前)의 지위에 해당한다. ‘행입(行入)’이란 이치를 증득하고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하며 지상(地上)의 지위에 해당한다. |
| 이입(理入)에 관한 글은 네 구절로 나뉜다.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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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까지는 10신(信)의 들어감을 말한다. 이 중에 ‘같지 않다[不一]’ 함은 중생의 모습이 참된 성품과 다르지 않으나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고,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不共]’ 함은 (중생과 진성이) 하나인 동시에 다르기도 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 둘째 구절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에 집중하여 머물고[不去不來凝住覺觀]’는 10주(住)의 들어감을 말한다. (10주의 수행자는) 중생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거나 가지 않는다. 인공(人空)을 관찰하는 문에서 그 마음이 고요히 머물러 불성(佛性)이 가거나 오지 않음을 관찰하여 깨닫기 때문이다. |
| 셋째 구절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는 10행(行)의 들어감을 말한다. 그들은 이미 법공(法空)을 얻고, 법공문(法空門)에 의하여 불성(佛性)에는 법상(法相)이 있지도 않고 공성(空性)이 없지도 않음을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
| 넷째 구절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는 10회향위(廻向位)의 이입(理入)을 말한다. 이미 자타(自他)에 평등한 공(空)을 얻었으므로 마음이 금강과 같아져서 물러서지 않고 굳게 머문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10금강(金剛)이라 하고, 『인왕경 (仁王經)』에서는 10견심(堅心)이라 하는데 이것이 10회향의 다른 이름이다. |
| [經] “행입(行入)이란 마음이 어디로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고,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으며, 있는 곳에서 고요히 염(念)하되 구함이 없으며, 바람이 북치듯 하더라도 대지같이 움직이지 않고,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 중생을 제도하되 생함도 모양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리지 않음을 말한다.” |
| [論] ‘행입(行入)’이란 지상(地上)의 수행자가 깨달아 들어가는[證入] 행을 말한다. |
| ‘마음이 어디에도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는다[心不傾倚]’ 함은 여리지(如理智)에서 나오는 마음은 반연하는 일이 없는데, 반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다’ 함은 여리(如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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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경계는 3제(際)를 떠나 있으므로 유전변화하는 경계의 상(像)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세간의 모든 복락(福樂)에서부터 심지어 보리대열반(菩提大涅槃)의 과(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도 원하고 바라는 것이 없고, 평등함을 통달하여 이것저것을 가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의 바람이 북처럼 두들겨 와도 움직임이 없으니 이것이 자리행(自利行)에 들어가는 것이다. |
|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 이하는 다른 사람을 들어가게 하는 행을 말한다. 2공(空)을 증득함으로써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떠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구할 능력을 갖는다. 마음에 생하는 바가 없고 경계의 모습도 없지만 그렇다고 적멸(寂滅)의 성품을 취하지도 않아서 항상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
| 이와 같은 두 가지 행[自利·利他]을 행입(行入)이라 한다. |
| [經] “보살아, 마음에 출입하는 일이 없고, 출입하는 그 마음도 없어서 들어감이 없는 데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 |
| [論] 이것은 (첫 번째로 답을 제시하고 나서) 두 번째, 질문자의 논란을 정리하는 부분이다. 이치를 증득한 마음은 생멸을 멀리 떠나 있으므로 시작도 끝도 없는 까닭에 ‘마음에 출입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출입이 이미 없어졌다면 당연히 과거에 출입하던 마음도 없을 것이므로 ‘출입하는 그 마음도 없다’고 하였다. 전에 출입하던 마음을 떠나서 출입하지 않는 이 마음에 들어왔으므로 ‘들어감이 없는 데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제기된 논란이 잘 정리가 되었다. |
| [經] “보살아, 이와 같이 들어가는 법은 그 법상(法相)이 공(空)하지 않다. 공하지 않은 법은 법이 헛되게 버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없지 않은 이 법은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으며,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닌, 원래가 청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행입이 잘못을 떠나 있음을 나타낸 부분[能入離過]인데,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한 설명이고, 다음은 자세한 해석인데, 위 문장은 간략한 설명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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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들어가는 법’이란 출입이 없는 법, 즉 실제(實際)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는 없지 않은 법은 능소(能所)가 평등하여 모든 잘못과 허물[過患]을 떠나 있고 모든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라’ 함은 마음과 경계가 평등하여 능소(能所)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원래가 청정하다’ 함은 시작도 끝도 없고 모든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마음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닌, 원래 청정한 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공(空)하고 여(如)한 법은 심식(心識)의 법이 아니며, 마음이 부려서 생긴 법[心使所有:심소유법]도 아니며, 공상(空相)을 가진 법도 아니며, 색상(色相)을 가진 법도 아니며,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心不相應法]도 아니며, 마음의 무위와 상응하는 법도 아니다.[非心無爲相應法:어떤 본에는 ‘非心有爲不相應法 非心無爲是相應法’이라고 되어 있다] 나타난 영상도 아니고 드러내 보여진[顯示] 것도 아니며, 자성(自性)도 아니고 차별(差別)도 아니며, 이름[名]도 아니고 상의(相義)도 아니다. 그 까닭은 여여[如]하기 때문이다. |
| 여여하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여여함 없는 것도 아니며, 어떤 유(有)든지 여여함이 없지 않아서 여여한 있음이 아닌 것 없다. 왜냐하면 뿌리라는 법과 나뭇결이라는 법은 나뭇결도 아니고 뿌리도 아니어서, 모든 쟁론(諍論)을 떠나 있어 그 모습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
| 보살아, 보살아, 이와 같은 청정한 법은 생(生)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며, 멸(滅)이 멸하게 할 수 있는 멸이 아니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32), 잘못을 떠났음을 자세히 해석한 부분이다. 먼저 묻고 다음에 답하고, 세 번째로 이해하고 네 번째로 결론을 맺는다. 답을 둘로 나누어 말하는데, 먼저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라’고 한 구절을 해석하고, 나중에 ‘원래 청정하다’고 한 구절을 해석하였다. |
| 32) 원문에는 ‘제일(第一)’이라 되어 있으나 내용으로 보아 ‘제이(第二)’로 번역한다. 앞서 나온 문단이 약명(略明)에 해당하며 여기서부터가 광석(廣釋)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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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구절의 해석도 둘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들어가는 법[入法]이 모든 마음의 영상을 떠났음을 밝히고, 나중에는 마음의 영상이 여리(如理)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혔다. |
| ‘공하고 여한 법[空如之法]’이란 실제(實際)에 들어갔을 때 모든 모양을 멀리 떠남을 공(空)이라고 하고, 능(能)·소(所)가 평등함을 여(如)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들어가는 법이 모든 마음의 영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
| 마음의 영상에 대략 여섯 쌍[六雙]의 차별이 있다. 첫째 심(心)과 심소(心所)가 한 쌍이요, 둘째 허공(虛空)과 색(色)이 한 쌍이요, 셋째 불상응행(不相應行)과 모든 무위(無爲)가 한 쌍이요, 넷째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이 한 쌍이요, 다섯째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이 한 쌍이요, 여섯째 명언(名言)과 상의(相義)가 한 쌍이다. |
| 이 여섯 쌍 중에서 첫 번째 한 쌍은 능연(能緣)인 마음의 종류에 속하고, 나중의 다섯 쌍은 소연(所緣)인 영상의 종류에 속한다. 이 여섯 쌍에서 떠나므로 마음도 영상도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 순서대로 여섯 쌍의 구절이 있다. |
| ‘심식의 법이 아니라’ 함은 [입(入)이] 8식(識)의 마음[心]을 떠났기 때문이고, ‘마음이 부려서 생긴 법도 아니라’ 함은 6위(位)의 심소유법(心所有法)을 떠났기 때문이다. |
| ‘공상을 가진 법도 아니라’ 함은 색상(無色)이 없는 허공법(虛空法)을 떠났기 때문이고 ‘색상을 가진 법도 아니라’ 함은 현색(顯色)33)·형색(形色)34)·표색(表色)35)의 세 가지 색(色)을 떠났기 때문이다. |
|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도 아니라’ 함은 스물네 가지 불상응행[二十四不相應行]36)을 떠났기 때문이고, ‘심무위와 상응하는 법도 아니라’ 함은 일곱 |
| 33) 색채. 즉 청·황·적·백 등 12종이 있다. |
| 34) 모양. 즉 장·단·방·원·고·하 등 8종이 있다. |
| 35) 작색(作色)이라고도 함. 볼 수 있고 남에게 나타내어 보일 수 있는 우리들의 모든 동작·행동이다. |
| 36) 비색비심불상응행법(非色非心不相應行法), 불상응행법·불상응법이라고도 한다.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며, 심왕(心王)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도 아닌 일종의 보편개념을 말한다. 구사종에서는 14종, 유식종에서는 다음 24종으로 나눈다. 득(得), 무상정(無想定),멸진정(滅盡定),무상이숙(無想異熟),명근(命根),중동분(衆同分),생(生),노(老),주(住),무상(無常),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身),이생성(異生性),유전(流轉),정이(定異),상응(相應),세속(勢速),차제(次第),시(時),방(方),수(數),화합(和合),불화합(不和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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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무위법(無爲法)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이므로 ‘심무위(心無爲)’라 하고, 세 가지 무위(無爲)의 모습과 상응하는 법이기 때문에 ‘상응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법이 세 가지 진여법(眞如法)을 떠났다는 것은 증문(證門)에 들어서면 세 가지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
| ‘나타난 영상도 아니라’ 함은 방편관(方便觀)으로 현현(顯現)하는 본법(本法)과 동분(同分)인 영상(影像)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드러내 보여진 것도 아니라’ 함은 영상(影像)이 현시하는 본질의 법인 내용[骨鎖] 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
| ‘자성도 아니라’ 함은 색의 자성이나 심의 자성 따위를 떠났기 때문이며, ‘차별도 아니라’ 함은 무상(無常) 등의 차별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
| ‘이름도 아니라’ 함은 지시하는 기능[能詮]을 갖는 명(名)·구(句)·문(文)의 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상의(相義)도 아니라’ 함은 이름이 지시하는 개념[所詮]과 그 이름에 해당하는 의미[義]를 떠났기 때문이다. |
| 어째서 그런가? 이 여섯 쌍의 모습을 떠난 자는 능(能)·소(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여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 ‘여여하지 않은 법’ 이하는 두 번째, 마음과 영상의 법이 여리(如理)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
| ‘여여하지 않은 법’이란 앞에서 아니라고 한 여섯 쌍의 법상(法相)을 말한다. ‘여여함이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여여한 이치는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 ‘어떤 유든지 여여함이 없지 않다’ 함은 어떤 유상(有相)의 법도 여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여한 있음이 아닌 것이 없다’ 함은 설사 여여함이 없는 법이 있다면 그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여여 아닌 법이 아니므로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
| ‘왜냐하면’ 이하는 있음이 아닌 뜻을 해석한 것이다. ‘뿌리[根]’란 나무 뿌리를 말하며, 종자(種子)를 비유한다. ‘나뭇결[理]’이란 목리(木理)를 말하며, 나타난 법을 비유한다. 앞에서 암라과(唵羅果)의 비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모든 쟁론을 떠나 그 상을 보지 않는다’ 함은 각혜(覺慧)로 구해도 얻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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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 수 없기 때문이다. |
| 여기까지가 마음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님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법’ 이하는 이어서 원래 청정하다는 뜻을 자세히 해석한 부분이다. |
| ‘생(生)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라’ 함은, 생상(生相)을 떠났으므로 자체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로 멸상(滅相)을 떠났으므로 자체가 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법은 유위상(有爲相)을 떠나 있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원래 청정하다고 하였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불가사의하옵니다. 이와 같은 법의 모습은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어디에 매인 것도 아니고 무엇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며,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는 모습도 아니고 가는 모습도 아니므로 불가사의하옵니다.” |
| [論] 다음은 세 번째, 이해했음[領解]을 나타낸 부분이다. |
|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의 작용[心所]도 아니라는 뜻이니,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개별적인 체(體)로서 상응하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자성(自性)도 아니고 차별(差別)도 아니라는 뜻이니, 이 두 가지는 따로 두 개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
| ‘어디에 매인 것도 아니라’ 함은 이름도 아니고 뜻도 아니라는 뜻이니, 이름과 뜻이 서로에게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라’ 함은 영상이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니, 영상과 본질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짝이 되기 때문이다. |
|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공(空)도 아니고 색(色)도 아니라는 뜻이니, 모이고 쌓이는 것은 색이 되고 흩어져 파괴되는 것은 공(空)이 되기 때문이다. |
|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불상응(不相應)도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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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무위(無爲)도 아니라는 뜻이니, 불상응행(不相應行)은 생기는 것이고 모든 무위법(無爲法)은 멸(滅)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 이것은 앞에서 말한 여섯 쌍을 떠났다는 뜻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
| ‘오는 모습도 아니라’ 함은 생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기 때문이며, ‘가는 모습도 아니라’ 함은 멸이 멸하게 할 수 있는 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뒤에 말한 ‘원래 청정하다’는 뜻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
| 처음에 ‘불가사의하옵니다’는 여여 아닌 여여[非如之如]가 마음과 언설을 떠났기 때문에 한 말이고, 뒤에 ‘불가사의하옵니다’는 마음을 떠난 마음[離心之心] 역시 그 둘을 떠났기 때문에 한 말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한 마음이라 할 때 그 마음 역시 그러하니, 어째서 그런가? 여여함[如]이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
| [論] 이것은 넷째, 결론을 맺는[述成] 부분이다. 두 번 불가사의하다고 한 말을 차례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이라고 한 것은 증득[證]에 들어간 마음을 말하는데, 무심(無心)의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는 그곳에 들어가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
| ‘여여함이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함은 앞의 부사의를 풀이한 것이고,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라’ 함은 뒤의 부사의를 해석한 것이다. |
| [經] “중생과 불성(佛性)은 하나도 아니며 별개도 아니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이다. 성품과 모습[性相]이 본래 여여하니,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로37)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 부분이다. 이것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불성이 하나다, 다르다 하는 양 극단[一異邊]을 떠나 있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여여(如如)가 있 |
| 37)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廣趣入義] 네 부분 중에 첫째는 향해 들어간다는 뜻을 전체적으로 밝힘[摠明趣入], 둘째는 취입의 뜻을 개별적으로 드러냄[別顯趣入], 셋째는 취입이 잘못을 떠났음[入之離過], 넷째는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다. 여기서부터가 네 번째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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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없다 하는 양 극단[有無邊]을 떠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 부분에서도 처음에는 간략하게 설명하고[略明] 뒤에 자세히 풀이하였다[廣顯]. |
| 간략한 설명에 둘이 있다. 먼저 하나다, 별개다 함을 떠나 있음을 말하고, 뒤에는 별개임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다. 하나다·별개다를 떠나 있다는 것은 중생과 불성이 하나가 아니지만 다르지도 않음을 말한다. |
| ‘불성’이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불성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이름한다” 하였는데, 만약 그것을 하나[一]다, 별개[異]다 한다면 모두 잘못이 되기 때문이다. |
|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한 데서부터는 별개임을 떠났다는 뜻을 풀이한 구절인데, 하나가 아니라는 뜻은 보기가 쉬우므로 이 구절은 사람들에게 불성이 별개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
|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이라 함은 생사(生死)가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성품과 모습[性相]이 본래 여여하니,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라 함은 중생의 인성(人性)과 생멸의 법상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
| [經] “모든 법상(法相)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라 일어남이 없다. 일어나는 상의 본성은 여여한데, 여여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 인연의 성질과 형상[性相]은 그 특성이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고, 연과 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연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 연을 따르는 모든 법은 미혹한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며, 그 나타난 현상은 본래가 생긴 것이 아니니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마음도 법의 이치와 같아서 자체가 공하여 없는 것이다. 저 공왕(空王:허공)이 본래 머무는 곳이 없으나 범부의 마음이 망령되게 분별하여 (있다고)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불성이 극단을 떠나 있음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이다. 여기서는 다름[異邊]을 떠났다는 쪽에 치우쳐 많은 설명을 붙이고 있다. |
| 모든 법상(法相)은 연(緣)을 따라 생기고, 모든 과법(果法)도 연을 따라 있게 된다. 이는 생하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상의 본성이 여여한데, 여여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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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래의 문장에서는 일으키는 작용을 갖는 모든 연[能起諸綠]도 공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인연의 성질과 형상은 그 특성이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은 종자(種子)가 되는 인연(因緣)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연과 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연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라고 한 것은 소연연(所緣緣)의 법이 하나가 아니고 많지만 모두 공하다는 뜻에서 공공(空空)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는 연(綠)이 없다. |
| ‘연을 따르는 모든 법은 미혹한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라 함은 증상연(增上椽)과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오직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시 공하다고 한 것이다. ‘그 나타난 현상은 본래가 생긴 것이 아니니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함은 2공(空)을 결론지은 것이다. 연(綠)이 나타내는 과(果)는 본래 생겨난 것이 아니며, 일으키는 작용을 갖는 모든 연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
| ‘마음도 법의 이치와 같아서 자체가 공하여 없는 것’이라 함은 앞에서 설한 인과(因果)는 취해진 법[所取法]인데, 취해질 법이 없으므로 취하는 마음[能取心]도 공(空)하다는 것이다. 취해진 법의 공한 도리를 설한 것과 같이 취하는 마음의 본체[心體]도 이와 같다. 지금까지는 내용을 설명하였고[法], 다음에는 비유[喩]를 들고 있다. |
| ‘공왕(空王)’이라 한 데서 공(空)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암(明暗)의 색(色)인 공계(空界)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허공법(虛空法), 즉 공왕(空王)을 말하는데, 모든 색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모든 백성의 의지처가 되는 것과 같으므로 허공을 공왕(空王)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공왕은 본래 머무는 곳이 없으나 범부의 마음으로 망령되게 분별을 하여 여기가 허공이요, 저기가 허공이라고 하니 이것은 망견(妄見)일 따름이지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인과의 모든 법도 마찬가지로 망심으로 취한 것이므로,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비유는 변계소집(遍計所執)에 의해 있게 된 인과(因果)를 가지고 망견처(妄見處)를 설명한 것이다. |
| [經] “여여함의 상은 본래 있고 없고 한 것이 아니다. 있다, 없다 하는 개념[相]은 오직 심식(心識)을 보는 것이다. 보살아, (이 상은) 마음의 성품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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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如之心性:어떤 본에는 ‘如是心法’이라고 되어 있다] 자체가 없지도 않고 자체가 있지도 않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보살아,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眞如)의 법은 아무 상도 없는 텅 빈 것이라서 2승(乘)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
| [論] 여기에서는 (불성이 一異의 극단을 떠났음을 밝힌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로, 여여(如如)한 법이 있다, 없다[有無]는 극단을 떠났음을 밝혔는데, 다음 네 부분으로 나뉜다. |
| 첫 구절은 여여함이 양 극단을 떠났음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고, 다음 구절은 유변(有邊)이 망념임을 뒤집어서 지적한 것이고, 셋째는 마음이 양 극단을 떠나 있음을 예로 들고, 넷째는 여여함이 언설을 떠났다는 사실을 환기시킨 것이다. |
| 셋째 부분에 있는 ‘마음의 성품과 같이’란 일심의 체성과 같다는 것이다. ‘자체가 없지도 않다’ 함은 토끼 뿔과 같이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극단을 떠났음을 말한다. ‘자체가 있지도 않다’ 함은 쇠뿔과 같이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극단을 떠났음을 말한다. 이는 다른 상이 없기 때문에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있지 않다는 말을 할 뿐이다. |
|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있지 않음[不有]이 곧 없지 않음[不無]이요, 없지 않음이 곧 있지 않음이니, 이런 뜻에서 다시 합쳐서 설명한 것이다. 일심(一心)의 법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과 같이 여여(如如)한 이치도 이와 같으므로 구절의 첫머리에 ‘마음과 같이[如心]’라고 하였다. |
|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한 이하는 넷째 구절로서, 여여(如如)함이 언설(言說)을 떠난 도리임을 환기시킨 부분이다.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이란 첫 구절 중 ‘본래 있고 없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을 설명하는데, 여러 가지 말들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2승(乘)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함은 심(尋)과 사(伺) 두 가지가 작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사의 두 법은 언어의 길인데, 이 두 가지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언설의 경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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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아니라고 하였다. |
| [經] “허공경계(虛空境界)를 안팎의 수행자들은 헤아릴 수 없고, 6행(行)을 닦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대단원38) 중에 세 번째,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趣入階位]이다.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째는 향해 들어가는 곳이 매우 깊음을 밝혔고[明所入甚深], 둘째는 향해 들어가는 자의 지위와 행을 들었으며[擧能入位行], 셋째는 계위를 개별적으로 나타냈고[別顯階位], 넷째는 들어가는 마음을 밝혔다[覈明入心]. |
| ‘허공경계’란 텅 비어 넓고 형상이 없는 여여(如如)한 법을 ‘허공’이라고 하였다. ‘안팎의 수행자들은 헤아릴 수 없다[內外不測]’ 함은 내도(內道:불교)의 28성인[二十八聖]과 외도(外道)의 아흔다섯 종류, 이러한 부류의 범인과 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
| (향해 들어가는 자의 지위와 행을 든) 두 번째 중에 ‘6행을 닦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함은 2입(入)에 들어가는 보살의 계위를 든 것이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무엇이 6행(行)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첫째는 10신행(信行)이고, 둘째는 10주행(住行), 셋째는 10행행 (行行), 넷째는 10회향행(廻向行), 다섯째는 10지행(地行), 여섯째는 등각행(等覺行)인데, 이렇게 행하는 사람만이 이를 알 수 있다.” |
| [論] 여기서는 (세 번째로) 계위를 개별적으로 밝히는데, 과위(果位)는 논하지 않고 행위(行位)만을 드러냈기 때문에 묘각지(妙覺地)는 취하지 않았다. 이 6행(行) 중 앞의 네 계위는 이입(理入)의 순서를, 다음 두 계위는 행입(行入)의 차별을 말한다. 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본업경(本業經)』에 있고, 자세한 설명은 화엄교(華嚴敎)에 나온다. |
| 38) 입실제(入實際)의 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을 크게 넷으로 나누었다.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인데,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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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실제(實際)인 본각의 이익[覺利]은 출입(出入)이 없는데 어떤 법, 어떤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실제의 법이란 한계를 갖지 않는 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한계 없는 그 마음이 실제에 들어간다.” |
| [論] 이는 (네 번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밝힌 부분이다. |
| 질문에서 ‘실제인 본각의 이익은 출입이 없다’ 함은 뒤의 두 계위에서 두 가지 이익행을 얻고 이치와 딱 들어맞아 출입이 없다는 뜻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법, 어떤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한 것은 들어가는 자[能入]의 심법(心法)을 정곡으로 묻는 말이다. |
| 답에서 ‘실제의 법이란 한계를 갖지 않는 법을 말한다’ 함은 들어갈 법이 원래 한계가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시간적으로[縱]으로 말하자면 실제의 법은 3세(世)의 시간을 떠나 있기 때문에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러므로 전후가 없다[前後無際]. 공간적[橫]으로 말하자면 실제의 법은 여섯 가지 방위와 장소[동·서·남·북·상·하]를 떠나 있기 때문에 중간이나 가장자리가 없으며, 그러므로 여기와 저기가 없다[彼此無際]. 떠나지 않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끝없이 깊다[甚深無際].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끝없이 넓다[廣大無際]. 이 네 가지를 갖추었다는 뜻에서 ‘무제(無際)’라고 한다. |
| 들어가는 마음[能入心]도 이 네 가지 뜻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실제(實際:所)에 들어가지 않는 바가 없다. 실제가 능·소의 양 극단을 떠나 있으므로 마음도 능·소의 끝[際]을 떠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들어감이 없어야 들어갈 수가 있으니 이런 의미에서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끝없는[無際] 마음에서 나온 지혜는 그 지혜가 한계가 없고[無涯], 한계없는 마음은 마음이 자재(自在)하니, 자재한 지혜라야만 실제(實際)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 범부처럼 빈약한 마음을 가진 중생은 그 마음이 매우 숨가쁘니, 무슨 법으로 다스려야 굳은 마음을 가져 실제에 들어갈 수 있게 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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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 여기서부터는 (실제에 들어가는 階位를 밝힌 세 번째에 이어) 들어가는 방편을 밝힌 네 번째 부분이다. 들어가는 방편이란, 10지(地)에 들기 전 네 계위[四位:10신·10주·10행·10회향)에서 닦는 이입문(理入門) 안의 방편관(方便觀)을 말한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는 방편[能入方便]을 설명하고, 뒤에 방편의 훌륭한 이익[方便勝利]을 나타낸다. 앞의 능입방편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먼저 간략하게 말하고, 나중에 자세히 다룬다. |
| 앞의 간략한 설명에도 두 부분이 있어서 먼저 질문이 나오는데, 질문 중에도 둘이 있어 첫째는 앞의 내용을 이해했음을 나타냈고, 둘째는 뒤의 내용을 물은 것이다. |
| 앞의 이해한 내용 중에 ‘끝없음[無際]’이란 마음의 체[心體]가 끝이 없기 때문이고, ‘한계가 없음[無涯]’이란 지혜의 작용이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아, 저들의 마음이 숨가쁜 이유는 안팎의 번뇌[使]39)와 거기 딸린 번뇌[隨使:隨煩惱]가 끊임없이 흘러서[流注]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하고, 하늘 바람이 바다에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켜 큰 용을 놀라게 하듯 하기 때문이니, 크게 놀라는 그 마음 때문에 숨가쁜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
| 보살아, 저 중생들에게 셋을 간직하고 하나를 지키게[存三守一]하여 여래선(如來禪)에 들어가게 하면 선정 때문에 마음에 숨가쁨이 없을 것이다.” |
| [論] 답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고쳐야 할 장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나중에 치료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
| ‘숨가쁜[喘] 마음’이란 마음이 놀라고 불안하면 들고나는 호흡이 급하고 빨라지는 것을 말하는데, 6식(識)이 멈추지 않고 들떠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다. |
| ‘안팎의 번뇌[使]’란 말나식(未那識)의 네 번뇌[四使]40)는 안으로 자아(自我)를 반연하고, 의식(意識)의 여섯 번뇌[六使]41)는 밖으로 모든 대상[諸境]을 반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 39) 중생의 마음을 마구 부려[使] 산란하게 한다는 뜻으로 번뇌를 ‘사’라고 한다. |
| 40) 아치(我痴)·아애(我愛)·아만(我慢)·아견(我見)을 가리킨다. |
| 41) 전6식(前六識)을 가리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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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 딸린 번뇌가 끊임없이 흘러내림’이란 분노[忿]·한스러움[恨] 등 소수번뇌(小隨煩惱)와 가라앉음[昏沈]·들뜸[掉擧] 등 대수번뇌(大隨煩惱)와 부끄러운 줄 모르는[無漸愧] 중수번뇌(中隨煩惱)가 저 번뇌[使]와 함께 따라 흘러서[等流] 현식(現識)에 모여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
|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 함은 근본번뇌[本使]와 수번뇌[隨惑]의 모든 현행(現行)이 본식(本識)을 훈습하여 깊고 넓게 쌓이고 모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
| ‘하늘 바람이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킨다’ 함은 업력(業力)을 받아서[感] 6진경계(塵境界)가 자동적으로 현행하기 때문에 ‘하늘바람’이라 하였고, 이 하늘바람이 수면(隨眠)42)의 바다를 두들겨 7식(識)의 물결을 일게 하기 때문에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
| ‘큰 용이 놀라듯하다’ 함은 무명주지(無明住地)의 힘이 가장 커서 본식(本識)에 잠재된 수면(隨眠)의 바다 밑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를 ‘큰 용’이라 하였고, 이와 같은 무명이 적정(寂靜)을 위반하여 거칠게 동요하는 마음을 항상 자라나게 하기 때문에 ‘놀라게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든 인연 때문에 마음을 매우 숨가쁘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쳐야 할 장애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부분이었고, 이 이하는 고쳐 나가는 방편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
| ‘셋을 간직하게 한다’ 함은 하늘바람[六塵境界]을 막는 방편을 가리킨다. ‘하나를 지키게 한다’ 함은 큰 용[無明住地]을 항복시키는 방편을 말한다. ‘여래선에 들게 한다’ 함은 바로 숨가쁜 병을 고치는 방편을 말한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무엇을 가리켜 셋을 간직하고[存三] 하나를 지켜[守一] 여래선에 들어간다고 하나이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셋을 간직한다는 것은 세 가지 해탈[三解脫]을 간직한다는 뜻이고,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함[一心如]을 지킨다는 말이다. 여래선에 든다는 것은 이치로써 마음의 여여함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경지에 들어 |
| 42) 마음에 잠재된 번뇌. 중생을 따라다닌다는 뜻에서 수(隨)라 하고, 중생을 각성 상태가 아닌 잠든 상태로 만든다는 뜻에서 면(眠)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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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것이 실제(實際)에 들어가는 것이다.” |
| [論] 이 아래는 (能入方便을 略明과 廣顯으로 나눈 가운데) 방편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인데, 세 개의 문답이 있다. 첫 번째 문답에서는 수(數)를 들어 전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
| ‘일심의 여여함을 지킨다’ 한 데서 일심법(一心法) 중에 두 가지 문(門)이 있는데, 지금은 우선 큰 용과 같은 무명(無明)의 세력을 항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 중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을 지키는 것을 이야기한다. 무명이 바로 일심의 여여함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지킨다’ 함은 들어갈 때는 일여(一如)의 경지를 고요히 지키고, 나올 때는 일미(一味)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를 지킴[守一]이라고 한 것이다. |
| 이는 『본업경(本業經)』 「십행(十行)」중에 말씀하신 다음의 내용과 같다. “열 가지는 자재하게 큰 법륜(法輸)을 굴리는 것으로서, 보살의 3보를 말한다. 그 때 보살이 제일중도(第一中道)의 지혜를 각보(覺寶)로 삼고, 모든 법이 생겨나거나 움직임이 없음을 법칙으로 하는 것을 법보(法寶)로 삼고, 언제나 6도(道)를 다니면서 6도중생과 화합하는 것을 승보(憎寶)라 한다. 모든 중생을 부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
|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현재·미래[三時] 어느 때든 중도일미(中道一味)를 잃지 않는 것이 이 관(觀)에서 일심진여를 지키는 작용인데, 이 관행은 10행위(行位)에 있는 자들이 닦는다. 다른 부분[門]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3해탈법(解脫法)이란 어떤 일이며, 이관삼매(理觀三昧)는 무슨 법으로부터 들어가나이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3해탈이란 허공해탈(虛空解脫)과 금강해탈(金剛解脫)과 반야해탈(般若解脫)이며, 이관심(理觀心)이란 마음이 청정한 이치와 동일하게 되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
|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어떻게 하는 것이 존용(存用)이며, 그것을 어떻게 관해야 하나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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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님을 두고 존삼의 작용[存用]이라 한다. 내행(內行)이나 외행(外行)에 출입하는 일이 둘이 아니되, 하나의 상에도 머물지 않아서 마음에 얻거나 잃음이 없으니,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곳에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관(觀)한다고 한다.” |
| [論] (첫 번째 문답으로 數를 들어 전체적인 설명을 한 데 이어서) 이 두 문답은 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別顯觀行]이다. |
| ‘3해탈’이란 세 가지 지혜[三慧]로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을 포괄하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다. 『본업경(本業經)』 「십주품(十住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섯은 모든 부처님이 지켜주는 것이니 이른바 8해탈관(解脫觀)이다. 안의 가상[內仮]과 밖의 가상[外仮] 두 가지 상이 성립할 수 없음을 문혜(聞慧)를 통해서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안으로는 5음법(陰法)과 밖으로는 일체법(一切法)이 성립할 수 없음을 사혜(思慧)를 통해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6관(觀)을 다 갖추어 색계의 5음이 공함을 수혜(修慧)를 통해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4공(空)의 5음과 멸정관(滅定觀)이 모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섯 해탈[五解脫]이라 하니 여여한 상이기 때문이다.” |
|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
| 8해탈관은 두 가지 면[二門]으로 요약된다. 이 중에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측면[事相]에서 본다면 (여덟 가지가) 모두 수혜관(修慧觀)에 속하는데, 이는 다른 데서 설하는 바와 같이 2승(乘)에게도 공통되는 관이다. 한편 3혜(慧)의 측면에서 본다면 인(人)과 법(法)이 공(空)함을 관하는 것이니, 이는 대승(大乘)의 관법으로서 지금 이 경에서 설하는 내용이다. |
| 첫 번째 해탈은 안에 색상(色相)을 두고 밖으로 색(色) 등을 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으로 색 등 5음법의 형상을 둔 채로 내아(內我)가 공함을 관하는 한편, 밖으로 색 등을 둔 채 중생이 공함을 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에는 들어가기가 쉬우며 문혜(聞慧)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안의 형상·바깥의 형상 두 가지가 성립할 수 없음을 문혜를 통해 터득한다’고 하였다. 색(色) 등을 버리지 않은 채 공(空)을 관하는 것이, 허공이 색상을 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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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므로 이를 허공해탈(虛空解脫)이라 한다. |
| 두 번째 해탈은 안으로 색상을 두지 않고 밖으로 색 등을 관하는 것이다. 안으로는 색 등 5음법의 형상을 버리고, 밖으로는 모든 산하(山河) 등이 공하여 욕계(欲界)의 법은 무엇이든 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관한다. 이 공(空)은 이해하기 힘들며 사혜(思慧)로 관한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안으로는 5음법(陰法)과 밖으로는 일체법(一切法)이 성립할 수 없음을 사혜(思慧)를 통해 터득한다’고 하였다. 안팎의 모든 법을 추적하고 분석하여 깨뜨리는 것이 금강(金剛)이 모든 색법(色法)을 깨뜨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이를 금강해탈(金剛解脫)이라 한다. |
| 나머지 여섯 해탈[後六解脫]은 모두 수혜(修慧)로 얻는다. 위 두 세계[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법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에 『본업경』에서 ‘수혜의 6관(觀)’이라 하였으며, 모두 수혜를 통해 선정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총괄적으로 반야해탈(般若解脫)이라 한다. |
| 이 가운데 여섯 가지 차별상(差別相)이 있는데 세 번째를 정해탈(淨解脫)이라고 부른다. 색계(色界)의 5음(陰)이 빛나고 깨끗하고 고요함을 몸으로 증득[身作證]하여 모두 다 공한 것임을 관하기 때문에 정해탈이라 하는데, 자기 스스로 안에서 증득한다는 뜻에서 ‘몸으로 증득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색계의 5음이 공함을 구족한 것이니, 세 번째 해탈이다’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공처해탈(空處解說)이라 하는데 공처의 5음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상해탈(非想解脫)도 마찬가지이며, 멸정법(滅定法)도 얻어지지 않음을 관하므로 멸진해탈(滅盡解脫)이라 한다. 이상은 모두 버려야할 대상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본업경』에서 ‘4공(空)의 5음(陰)과 멸정관(滅正觀)이 모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섯 해탈[五解脫]이라 하니 여여한 상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
|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로 인(人)·법(法)이 공함을 관하여 두 집착[二執:人執·法執]과 현행하는 두 속박[二縛:相應縛·能緣縛]을 항복시켜 떠나게 하므로 해탈이라고 부른다. 안팎의 모든 가법(仮法)을 이미 버렸으므로 천풍(天風)의 요동, 즉 모든 경계를 막을 수 있다.43) |
| 다음에는 이관(理觀) 중에 나오는 구절을 보기로 한다. |
| 43) 고쳐야 할 장애의 양상[所治障相]을 설명한 저 앞의 내용에 의하면, 업력(業力)을 받아서[感] 6진경계(塵境界)가 자동적으로 현행함을 ‘하늘바람[天風]’이라 하였고, 이 하늘바람이 수면(隨眠)의 바다를 두들겨 7식(識)의 물결을 일게 하기 때문에 요동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존삼(存三)이라는 방편을 통해 하늘바람[六塵境界]을 막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韓佛全 645中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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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청정한 이치와 동일하게 되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란 형상 없는[無相]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마음에 분별이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
| ‘마음과 현상으로 드러난 일이 둘이 아님을 존용이라 한다’ 함은 존삼(存三)의 작용이 가지는 탁월한 능력을 가리킨다. 존삼의 작용을 아직 얻지 못한 자라면 마음을 고요히 하여 공(空)을 관한다 할지라도 현상[事]에 닥치면 정념을 잃는다. 아(我)와 아소(我所)를 취하고, 마음에 맞고 경계와 거슬리는 경계에 집착하여 천풍에 움직이게 되고, 마음과 현상이 각각 다르게 된다. 반면 3해탈(解脫)을 능숙하게 잘 닦는 자라면 관(觀)에서 나와 현상에 맞닥뜨리더라도 관을 닦은 힘이 아직 남아있어서[存] 나다, 남이다 하는 형상을 취하지 않으며 좋다, 나쁘다 하는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풍의 두들김에 흔들리지 않고, 들어가고 나오는 차별을 동시에 잊어버리며,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존삼의 작용’이라고 한다. |
| 이 관법은 10신위(信位)에서 닦는데, 존용(存用)이 이루어지는 것은 10주위(住位)에서다. 『본업경』 10주위 중 이 관법을 설명한 내용과 같다. |
| ‘내행(內行)……’ 이하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관(觀)의 상(相)을 밝히는 내용이다. ‘내행’이란 관에 들어가 적조(寂照)함을 보는 행이고, ‘외행’이란 관에서 나와 중생을 교화하는 행이다. ‘둘이 아니다’ 함은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중도(中道)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
| 『본업경』 10향(向)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 번째, 자재(白在)한 지혜를 가지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니, 이를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라고 한다. 반야(般若)로써 중도에 처하여 모든 법이 둘 아님을 관찰하고 통달하며, 그 지혜가 점점 성숙하여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므로 ‘제일의제에 근접한 관[相似第一義諦觀]이라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중도제일의제관은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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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다……”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 ‘하나의 상에도 머물지 않는다[不住一相]’ 함은 2제관(二諦觀)을 닦기 때문이고, ‘마음에 얻거나 잃음이 없다[心無得失]’ 함은 평등관(平等觀)을 닦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방편관에 의지하므로 초지(初地)의 법류(法流)에 진입한다. 그러므로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곳에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간다’고 하였다. |
| 『본업경』에서는 3관(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仮)로부터 공(空)에 들어가는 것을 2제관이라 하고, 공으로부터 가에 들어가는 것을 평등관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 관은 방편도(方便道)이다. 이 두 가지 공관(空觀)으로 중도제일의제관에 들어가니, 2제(諦)를 동시에 비추어 마음마다 적멸하여 초지 법류(法流)에 진입(進入)한다……”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 이 중에서 ‘2제관’이란 속(俗)을 버리고 진(眞)을 관하는 것이므로 정체지(正體智)의 방편이고, ‘평등관’이란 진을 융(融)하여 속(俗)을 관하는 것이므로 후득지(後得智)의 방편이다. 속이 허깨비 같음을 관하여 얻거나 잃음을 취하지 않으며, 옳거나 그름이 없으므로 평등이라 한다. |
|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이란 초지의 다른 이름이다. 어째서 그런가? 초지가 바로 10지라서 일시에 10중법계(重法界)에 바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10지가 바로 초지라서 완성된 그대로 초문(初門)에게 들어갈 곳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진실로 10지가 초지라는 뜻에서 ‘하나’라 했고, 초지가 10지라는 뜻에서 ‘하나가 아니라’고 했으니, 그러므로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이라 하였다. 두 가지 방편에 의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간다[淨心流入]’고 하였다. 여기서는 첫 관과 마지막 관만을 자세히 이야기했으나 중간의 한 관은 이에 준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 [經] “보살아, 이런 사람은 두 개의 형상에 머물지 않으니, 출가(出家)하지 않았더라도 재가(在家)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법복(法服)이 없고,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44)를 다 갖추지 않고, 포살(布薩)45)에 들지 않는다 |
| 44) Prátimo의 음역(音譯)으로 스님들이 포살 때마다 실천여부를 검토하는 계율이다. |
| 45) Posadha의 음역으로 반월(半月)마다 스님들이 모여 계경(戒經)을 설하고, 죄가 있으면 참회하여 선을 기르고 악을 없게 하는 의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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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지라도 자기 마음에서 무위(無爲)의 자자(自恣)를 하여 성인의 과위[聖果]를 얻는다. (이런 사람은) 2승(乘)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는데, 뒤에 가서 지(地)를 다 채우면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방편의 뛰어난 이익[方便勝利]을 설명한 부분이다.46) 그 중에 다음과 같이 넷이 있다. 과를 얻는 뛰어난 이익[得果勝利]·공양을 얻는 뛰어난 이익[得供勝利]·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無患勝利]·머묾이 없는 뛰어난 이익[無住勝利]이다. |
| 첫째 득과승리에도 네 가지 뛰어난 이익이 있다. |
| 하나는 ‘극단을 떠난 데서 오는 뛰어난 이익[離邊勝利]’인데 도(道)·속(俗) 어느 편의 모습에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경(經)에서 ‘이런 사람은 두 개의 형상에 머물지 않으니, 출가(出家)하지 않았더라도 재가(在家)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
| 둘은 ‘자재하게 되는 뛰어난 이익[自在勝利]’인데 교문(敎門)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으로 도리를 결판하여, 아무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법복(法服)이 없고……성인의 과위를 얻는다’고 하였다. |
| 셋은 ‘도에 들어가는 뛰어난 이익[入道勝利]’인데 경에서 ‘2승(乘)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菩薩道)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
| 넷은 ‘과를 얻는 뛰어난 이익[得果勝利]’인데 경에서 ‘뒤에 가서 지(地)를 다 채우면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불가사의하나이다. 이런 사람은 출가한 것이 아니면서도 출가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보리좌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심지어 사문들도 마땅히 존경하고 공양해야 |
| 46) 실제(實際)에 향해 들어감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네 번째가 들어가는 방편[入之方便]인데, 이를 다시 들어가게 하는 방편[能入方便]을 설명하는 부분과 방편의 뛰어난 이익[方便勝利]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나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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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것입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왜냐 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이 삼계(三界)를 일으키고, 여래의 옷을 입고서 법공(法空)의 자리에 들고, 보리좌에 앉아 정각(正覺) 일지(一地)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나[二我]를 초월했거늘 어찌 사문이라 해서 존경하고 공양하지 않겠는가?”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득공승리(得供勝利)인데, 세 가지 훌륭한 덕[勝德]을 얻어서 복전(福田)이 될 만하고, 모든 도인[道]과 속인[俗]에게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
| 이 글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보살이 복전(福田)임을 밝히고, 다음에는 2승(乘)은 볼 수 없음을 나타내고, 끝으로 보살만이 볼 수 있음을 드러낸다. |
| 처음에서는 세 가지 복전이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
|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이 삼계를 일으킨다’ 함은 3해탈(解脫)로서, 존삼(存三)의 작용[用]을 말한다. 삼계가 공적(空寂)한 것을 ‘열반의 집’이라 하니, 안심하고 몸을 맡겨 살 수 있는 깨끗한 곳이므로 하는 말이다. 3해탈관으로 삼계가 공(空)한 곳에 들어갔으나 깨달음에 빠지지 않고 세속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삼계를 빠짐없이 교화하므로 ‘마음이 삼계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삼계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지만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존용(存用)이다. |
| ‘여래의 옷을 입고 법공의 자리에 들어간다’ 함은 일심의 여여함을 지키는[守一] 관이다. 삼계를 두루 다니며 널리 교화할 때 인욕(忍尋)의 옷을 입고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으며, 법공(法空)에 귀환해 들어가 일심의 여여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말한 “유화(柔和)와 인욕(忍辱)의 옷”과 같은 맥락이다. |
| ‘보리좌에 앉아 정각일지에 올라간다’ 함은 여래선(如來禪)인 이관(理觀)의 마음을 말한다. 즉 법공에 앉아 방편을 더욱 닦아서 초지에 올라 정각의 진실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모든 법이 공함을 자리로 삼는다”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3위(位)는 모두 2공(空)을 관하여, 인아(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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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我)·법아(法我)의 두 집착을 눌러 없앴기 때문에 ‘마음이 두 가지 나[二我]를 초월했다’고 하였다. 두 가지 나를 초월했으므로 번뇌를 끊는 덕[斷德]이 구족하고, 3관(觀)을 닦았기 때문에 지혜의 덕[智德]이 겸비된다. 그러므로 도인과 속인의 복전이 될 만하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일지(一地)와 공의 바다[空海]를 2승을 닦는 사람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저 2승을 닦는 사람은 삼매(三昧)에 맛들여 거기에 집착하고 삼매의 몸을 얻으므로, 저 공해와 일지에 마치 술병난 사람처럼 정신 없이 취해 깨어나지 못한 채 수겁(數劫)이 지난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다가 술기운이 가시고 나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 행을 닦은 뒤에야 불신(佛身)을 얻는다.” |
| [論] 이 대목은 2승(乘)은 볼 수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나중에 대답한다. |
| 질문 중에 ‘일지(一地)’란 오르는 지위(地位)를 말하는데, 10지(地)가 곧 초지(初地)이므로 ‘일지’라고 하였다. ‘공해(空海)’란 앞서 말한 바 3관(觀)을 통해 들어가는 공이 매우 깊고 넓고 크므로 ‘바다’라고 하였다. |
| ‘그렇다’란 2승은 보지 못한다는 물음을 긍정하신 말씀이다. 그 다음은 2승이 보지 못하는 이유를 풀이한 말씀이다. |
| ‘삼매에 맛들여 거기에 집착한다’ 함은 고요한 선정(禪定)을 좋아해서 이에 집착하고 적정(寂靜)으로만 향하는 것이다. ‘삼매의 몸을 얻음’이란 어떤 것인가? 즐겨 쫓아가는 바에 따라 멸심정(滅心定)에 들어가고, 열반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을 식어버린 재처럼 없애고[灰身滅智], 몸과 마음이 멸한 곳에 멸정(滅定)의 체(體)가 생겨 심과 심법을 막는데, 이런 것을 두고 삼매신(三昧身)을 얻는다고 한다. 고요함을 즐기는 훈습(薰習)이 본식(本識) 안에 있어서 이것 때문에 술병 난 사람이 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듯이 공해와 일지(一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
| ‘수겁(數劫)이 지난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다가’라 함은 수다원(須陀洹)47) |
| 47) 소승의 성과(聖果) 4위(位) 중의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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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8만 겁을 머물고……아라한(阿羅漢)은 2만 겁을 머물고 벽지불48)은 만 겁 동안 열반에 머물러 깨닫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를 전체적으로 표현하여 ‘수겁이 지난 뒤에도’라고 하였다. |
| ‘술기운이 가시고 나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 행을 닦는다’ 함은 즐겨 애착하고 훈습(薰習)하는 정도가 두터우냐 가벼우냐에 따라 그 애착의 기운이 차차 없어져 다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며, 마음을 일으켰을 때 마음을 돌려 대승에 들어가 그제야 앞서 말한 3종관행(種觀行)을 닦는다는 것이다. 『능가경 (楞伽經)』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술기운이 가신 뒤에야 부처의 위없는 몸이 다름 아닌 내 진법신(眞法身)임을 깨닫는 것과 같다(이하 생략).” |
| [經] “그런 사람은 천제(闡提)49)를 버리고 곧 6행(行)에 들어가고, 닦아 나아가는 곳에서 한 생각 깨끗한 마음으로 마침내 명백해지며, 금강지혜의 힘으로 아비발치(阿鞞跋致)50)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니 그 자비가 다함이 없다.” |
| [論] 이 부분에서는 (2승이 보지 못하는 데 반해, 보살은 볼 수 있음을 밝히는데) 보살종성(菩薩種性)을 가진 사람이 천제의 믿지 못하는 장애를 버림으로써 6행의 첫 단계인 10신(信)에 들어가고, 닦아 나아가는 곳[修行地]에서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을 발하는데, 그것이 10주(住)의 초발심(初發心)이다. ‘마침내 명백해짐’이란 10행위(行位)에서 모든 행위가 밝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금강지혜의 힘’이란 10회향(廻過)의 견고한 지력(智力)을 말한다. ‘아비발치’ 초지(初地) 이상에서 참되게 증득[眞證]해서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다.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니 그 자비가 다함이 없다’ 함은 전위(前位)에서 이타행(利他行)을 하기 때문이니, 2승(乘)이 하지 못하는 것과 구별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
| 48) 연각(綠覺)·독각(獨覺)이라 번역, 자연변화의 외연(外綠)을 보고 느껴 혼자 깨달음을 얻은 이이다. |
| 49) Icchanta의 음역으로 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 다시 말해서 구제 받을 수 없는 종자를 말한다. |
| 50) Avinivartaniya의 음역으로 불퇴전(不退轉)·불퇴위(不退位)라 번역. 반드시 성불이 결정된 위치로써 다시는 보살위에서 타락하지 않는 계위(階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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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이런 사람은 마땅히 계(戒)를 고수하지 않을 것이니 저 사문을 공경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계를 설하는 자는 선(善)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며, 바다에 파도가 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사람의 마음자리는 8식(識)의 바다가 맑아지고, 9식(識)의 흐름이 맑아져서 바람이 움직일 수 없고 파도가 일지 않는다. |
| 계의 성품은 공한 것이므로 이를 지키는 자는 미혹되고 전도된 자라 하겠다. 그러나 저 사람에게는 제7식(第七識)과 제6식(第六識)이 생기지 않아서 모든 번뇌가 사라져 조용하며, 3불(佛)을 떠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하며, 3무상(無相) 가운데 마음 따라 깊이 들어가서 3보를 존경하고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
| 보살아, 저 어진 사람은 세간의 움직이는 법에도 머물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법에도 머물지 않으며,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有:삼계)의 마음을 없앤다.” |
| [論] 이것은 세 번째, 허물을 떠난 뛰어난 이익[離患勝利]을 설명한 부분으로서, 인과(因果)를 잘못 이해하는 범부의 허물을 떠난 것을 말한다. |
| ‘계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 함은 앞서 (得果勝利를 설명한 부분에서)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를 다 갖추지 않았더라도…’라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저 사문을 공경하는 일이 없겠다’ 함은 계를 지키지 않으므로 계를 지키는 이를 공경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앞의 물음을 허용하고, 다음에는 뒤의 물음을 부정한다. |
| ‘계를 설하는 자’란 남을 위해 계를 설하는 사람으로, 성문(聲聞)들을 가리킨다. 자기가 계 지키는 것을 자랑삼아 파계한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 때문에 ‘선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람은 모든 법이 공(空)함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면(隨眠)의 바다 위에 7식(識)의 물결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바다에 파도가 인다’고 하였다. 이는 계를 지킨다는 사람의 과실을 보여준 것이다. |
| ‘저 사람의 마음자리’란 보살의 마음을 가리킨다. 모든 법이 공함을 증득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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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대지(大地)에 들어가므로 제8식 내의 두 가지 집착[能取·所取]과 분별기(分別起)51)의 번뇌[隨眠]가 모두 없어지는 까닭에 ‘8식의 바다가 맑아진다[澂]’고 하였다. 징(澂)은 징(澄)이다. 분별 없는 지혜로서 본각에 깨달아 들어가서 지(地)마다 증장하여 모든 더러움을 떠나기 때문에 ‘9식의 흐름이 맑다’고 하였으니, 본각(本覺)이 바로 제9식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분별이 없어서 경계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바람이 움직일 수 없다’고 하였으며, 바람이 움직이지 못하므로 물든 제7식(第七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파도가 일지 않는다’고 하였다. |
| 이 사람은 이미 모든 법이 공함을 증득하고, 일곱 가지 계성(戒性)52)이 모두 공적(空寂)함을 통달했기 때문에 ‘계의 성품은 공한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성문(聖聞)은 법공을 통달하지 못하여 계성(戒性)이 있다고 집착하고는 자신이 잘 지킨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지키는 자는 미혹되고 전도되었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첫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이 과실(過失)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저 사람’ 이하는 이어서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교만함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
| ‘제7식과 제6식이 생기지 않는다’ 함은, 말라식[제7식]의 네 가지 미혹53)이 현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견혹(見惑)의 종자가 이미 끊어져서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가 사라져 조용함[諸集滅定]’이란 생기식(生起識:前六識)의 모든 심(心)과 심소(心所) 등의 쌓임이 다 없어지고 이정(理定)에 들었기 때문이다. |
| ‘3불을 떠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한다’ 함은 발심한 이래로 두루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여래장불(如來藏佛)이 바로 모든 중생이라 여기고 저 발심에 의해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 가지 무상[三無相]에 마음이 순응하여 깊이 들어간다’ 함은 행입(行入)을 얻었을 때 무명(無 |
| 51) 선천적으로 받은 것[俱生起]이 아니라 잘못된 학습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를 분별기(分別起)라 한다. 근본번뇌 중 의(疑),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이 여기에 속하며, 아·법 2공(空)을 증득할 때 끊어진다. |
| 52) 살생·도둑질·사음의 세 가지 신업(身業)과 욕·이간질·꾸미는 말·거짓말의 네 가지 구업(口業)을 방지하는 계의 성품. |
| 53) 아치(我痴)·아애(我愛)·아만(我慢)·아견(我見)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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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明)의 뿌리를 뽑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3해탈(解脫) 중에서 일심법(一心法)에 순응하여 깊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3보를 깊이 존경하는 것이니, 형상으로 된 부처[佛]와 종이나 천에 쓰여진 법(法)과 네 종류의 수행자[僧] 등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3불에 의하여 발심했기 때문에 교만의 뿌리인 무명의 씨앗을 뽑는 것이다. |
| 지금까지는 원인[因]의 잘못됨을 떠남에 대해 밝혔고, 이제부터는 과보[果]의 잘못됨을 떠남에 대해 밝힌다. |
| ‘세간의 움직이는 법에도 머물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법에도 머물지 않는다’한 데서, ‘움직이는 법’이란 욕계의 인천(人天)이 누리는 부와 쾌락을 말하는데, 산심(散心)으로 닦아 얻은 선한 과보[善果]이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법’이란 색계와 무색계의 적정(寂靜)의 과(果)를 말하는데, 정심(定心)으로 닦아 얻은 선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그 둘에 다 집착하지 않으므로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3공취에 들어간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점점 더 증입(增入)하기 때문에 취(聚)라고 하였으며,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겨나지도 않게 하니, 이런 이유에서 ‘3유(有)의 마음을 없앤다’고 하였다. |
|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
| “저 어진 사람은 과만족덕불(果滿足德佛)과 여래장불(如來藏佛)과 형상불(形像佛), 이러한 부처님 앞에서 보리심을 내서 3취계(聚戒)에 들어갔지만 그러한 관념[相]에 머물지 않으며, 3유심(有心)을 멸하였지만 고요한 자리에 기거하지 않으며, 제도할 중생을 버리지 않고 고르지 못한 땅에 들어가니 불가사의하나이다.” |
| [論] 이는 네 번째, 머묾이 없는 뛰어난 이익을[無住勝利] 설명한 부분이다. 이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위에 말한 내용을 이해했음을 밝히고 뒤에 머물지 않음을 밝힌다. 이해했음을 밝힌 데도 두 구가 있으니 먼저는 ‘3불을 떠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이해한 내용이다. |
| ‘과만족덕불’이란 시각(始覺)이 완성[究竟]되어 만 가지 덕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여래장불’이란 모든 중생이 본래 본각(本覺)이기 때문이다. ‘형상불’이란 금·은·진흙·나무 등으로 세존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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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해서 인과(因果)와 이사(理事)에 빠지는 것이 없다. |
| ‘3취계에 들어갔지만 그러한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앞에서 계의 성품이 공하다고 한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서, 계(戒)에 들어가는 네 가지 연이 계상(戒相)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3취계(聚戒)의 네 가지 연은 다음 품에서 설명할 것이다. |
| 여기서부터는 머묾 없는 뛰어난 이익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심(有心)을 없앴지만 고요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6도(度)의 저 숨가쁜 중생들이 살고 있는 곳을 두루 왕래하니 이곳을 ‘고르지 못한 땅’이라고 하였다. 미혹(迷惑)을 남겨둔 채 업(業)에 얽매이지 않고 그 땅에 생(生)을 받으므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미혹을 남겨둔다는 말은, 소승의 수행자들처럼 그것을 빨리 없애는 것이 아니라 3무수대겁 동안에 점차로 미혹을 없애 보리를 얻을 때에 가서야 다 없어진다는 뜻이지, 금강지 이상에서 한결같이 끊지 않는 경지를 두고 ‘남겨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
| [經] 그 사리불(舍利佛)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나서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
| 반야(船若)의 바다가 구족하건만 |
| 열반의 성(城)에 머물지 않는다네. |
| 마치 저 아름다운 연꽃이 |
| 높은 언덕에 나지 않듯이. |
| 모든 부처님, 한량없는 세월 동안 |
|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서 |
| 세간을 제도한 후에야 부처 되시니 |
| 마치 연꽃이 진흙에서 피듯 하네. |
| 저 6행(行)의 경지들은 |
| 보살이 닦는 것이요 |
| 저 3공취(空聚)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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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로 가는 곧은 길[直道]이어라. |
|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54), 사리불이 말씀을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身子領解]인데, 소승들에게 큰마음[大心:대승심]을 내게 하기 때문(에 사리불이 등장한 것)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것이고, 또 하나는 결론짓는 말[述成]이다. |
| 첫 번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앞의 세 게송은 이제껏 설하신 내용을 찬탄한 구절이고, 뒤의 두 게송은 자기의 발심을 진술한 것이다. 앞 세 게송도 셋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앞 두 게송으로 무주도(無住道)를 찬탄한 것이고, 그 다음 두 구절은 6행위(行位)를 찬탄한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은 3공취(空聚)를 찬탄한 것이다. |
| 첫 번째 가운데 ‘반야의 바다가 구족하다’ 함은 3해탈(解脫)이 3혜(慧)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삼계의 마음을 멸하되 고요한 곳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높은 언덕에 나지 않는다’ 함은, 저 2승(乘)들은 번뇌의 진흙에서 벗어났지만 8만 겁을 발심(發心)하지 않기 때문이다. |
|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이생[二二生]55) 중에 속히 번뇌를 끊어 없애버리는 2승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연꽃이 진흙에서 피듯이’라 함은 미혹이 남아 있음으로써 고르지 못한 땅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남김없이 보살행을 닦아서 그것으로 보리의 열매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행(行)과 3취(聚)를 말했으니 문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 [經] 나 이제 부처님 설하신 대로 |
| 머물지 않는 데 머무네. |
| 왔던 곳에 또 다시 와서 |
| 54) 「입실제품(入實際品)」은 크게 네 단원으로 나뉜다. 첫째는 대의를 간략히 내세우고[略標大意], 둘째는 실제의 도리를 자세히 밝히고[廣顯道理], 셋째는 그 도리를 사리자가 이해했음을 나타내고[身子領解], 넷째는 당시 대중들이 이익 얻음을 밝힌다[時衆得益].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
| 55) 성문(聲聞)의 자량위(資糧位)·가행위(加行位)와 연각(緣覺)의 자량위·가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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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행을 갖춘 뒤에야 나가리다. |
| 또 저 중생들로 하여금 |
| 나처럼 둘 없이 하나가 되게 하여 |
| 앞에 온 자나 뒤에 올 자나 |
| 모두 다 정각(正覺)에 오르게 하리. |
| [論] 여기는 사리불이 자기의 발심을 진술한 부분이다. 그 중에 첫 두 구절은 지금 발심하는 자리를 말한 것이요, 이어지는 반 게송과 한 게송은 그 후의 수행을 표시한 것이다. |
| ‘나 이제 머물지 않는 데 머문다’ 함은 지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큰마음을 일으킨 것이 고요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 마음에 머문 것이기에 그렇게 말했다. |
| ‘왔던 곳에 또 다시 왔다’ 함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 유전(流轉)해 온 곳에서 내가 이미 떠났다가 지금 다시 와서 3계(界)에 들어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뜻한다. 변제정(邊際定)56)의 힘으로 받은 몸을 연장하여 알맞은 곳에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모든 행을 갖춘 뒤에야 나가리다’ 함은 보살의 모든 행(行)을 구족한 후에 이 몸을 벗어나 불신(佛身)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
| ‘앞에 온 자’는 과거의 선근(善根)이 이미 성숙한 자를 말한다. ‘뒤에 올 자’는 미래세에 가서야 성숙할 사람을 말한다. 미래가 다할 때까지 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 [經] 그 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
| “불가사의로다. 네가 이 다음에 보살도(菩薩道)를 이루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생사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
| [論] (첫 번째 사리불의 이해에 이어) 두 번째, 부처님께서 사리불의 말을 인정하면서 끝맺음을 하신 부분이다. |
| 56) 색계의 제4 정려. |
| [168 / 263] 쪽 |
| [經] 그 때 대중이 모두 보리를 깨닫고 소승의 무리들이 5공(空)의 바다에 들어갔다. |
| [論] 이 부분은 네 번째, 당시 대중이 이익 얻었음을 밝힌 부분이다. |
| ‘대중(大衆)’이란 대승(大乘)의 무리를 말한다. ‘보리를 깨달았다’ 함은 일지(一地)의 보리심에 깨달아 들어갔다는 말이다. ‘소승의 무리들……’이란 성문(聲聞)의 무리가 세 가지 진여(眞如)의 문(門)에 들어갔음을 말한다. |
| [169 / 263] 쪽 |
| 금강삼매경론 하권 |
| 신라국 사문 원효 지음 |
| 번역 |
| 6. 진성공품(眞性空品) |
| [論] 진여(眞如)의 법(法)이 모든 공덕과 행덕을 갖추어 그것으로 본성(本性)을 삼기 때문에 ‘진성(眞性)’이라 하였고, 이러한 진성이 모든 명상(名相)을 끊었으므로 그런 뜻에서 ‘진성공(眞性空)’이라 하였다. |
| 한편 이 진성은 모양을 떠났고 성품을 떠났다. 모양을 떠났다는 것은 허망한 모양[妄相]을 떠났다는 뜻이며, 성품을 떠났다는 것은 참 성품[眞性]을 떠났다는 말이다. 허망한 상을 떠났으므로 허망한 상이 공하고, 참 성품을 떠났으므로 참 성품도 공하니, 이런 이유에서 ‘진성공’이라 하였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두 가지 뜻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에 이 뜻에 의거하여 품의 명칭을 세웠다. |
| [經] 그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시여, 보살도를 닦는 데는 명상(名相)이 없고 삼취계(三聚戒)에도 위의(威儀)가 없다면 어떻게, (보살도와 삼취계를) 받아 지니고 그것을 중생들을 위해 설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저희를 위하여 부디 설명해 주소서.” |
| [論] 관행을 개별적으로 밝히는 데[別明觀行] 여섯 단원이 있다. 그 중 네 번째인 허망을 버리고 실제에 들어감[遣虛入實]을 설명한 단원이 앞 장에서 끝났고, 여기서부터는 다섯 번째로 모든 성행(聖行)이 진성공(眞性空)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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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옴을 밝힌다. 이 품(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총명한 근기들을 위해 많은 글로 자세히 설명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둔한 근기들을 위해 적은 글로 간략히 요점을 설명한 것이다. 앞의 자세한 설명에도 여섯 단원이 있다. |
| 첫째는 삼취계(三聚戒:攝律儀戒·攝善法戒·攝衆生戒)가 진성으로부터 성립된 것임을 밝혔고, 둘째는 도품행(道品行:三十七助道品, 뒤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覺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덕목)이 진성(眞性)에서 성립됨을, 셋째는 여래의 가르침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넷째는 보살의 지위가 본각의 이익에서 나온 것임을, 다섯째는 대반야(大般若)가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 것임을, 여섯째는 큰 선정(大禪定)이 모든 명수(名數)를 넘어선 것임을 밝혔다. |
| 삼취계를 다루는 첫째 단원은 질문·대답·설명을 청함·설명·이해의 다섯 대목으로 나뉜다. |
| ‘보살도를 닦는 데 명상이 없다’ 함은 모든 행을 통틀어 거론한 것이며, ‘삼취계에 위의가 없다’ 함은 계행(戒行)만 별도로 지적한 것이다. 전품(前品)에서 ‘삼취계에 들어가지만 들어갔다는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이니 이것이 바로 삼계(三戒)이다. |
| 그런데 명상도 위의도 없다면, 무슨 수로 그것을 자신이 받아 지니고, 어떻게 남에게 말해줄 수 있겠는가? 사리불이 대승의 길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수행을 시작할 때, 계(戒)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계(戒)·정(定)·혜(慧) 3학 중에서 첫 행인 계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
| 사리불은 여기 말로 ‘몸에서 난 아들[身子]’이라는 뜻인데, 지금 이 품(品)에서는 모든 수행 방법이 ‘법의 몸[法身]’으로부터 나왔음을 설명하기 위해 ‘몸에서 난 아들’을 등장시켜 묻게 한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선남자야, 너를 위해 설명할 테니, 이제 잘 들어라. 선남자야,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은 마음으로부터 변화하여 생겨나고, 모든 경계는 의언(意言)이 분별하는 것이니 그것을 한곳에 제어하면 모든 연(緣)이 다 끊겨 없어진다. |
| [171 / 263] 쪽 |
| 어째서 그런가? 선남자야, 하나인 근본이 일어나지 않고 세 가지 작용이 벌어지지 않아서 여여한 도리에 머물면, 6도(道)의 문이 닫히고 네 가지 연(緣)이 일여(一如)에 순응하여 3계(戒)가 갖추어진다.” |
| [論] 이 부분은 (첫 번째 질문에 이어) 두 번째, 부처님의 간략한 대답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는데, 먼저 답하고 나중에 물음을 정리한다. |
| ‘선법과 불선법은 마음으로부터 변화하여 생겨난다’ 함은 원인이 되는 3업(業:身·口·意)의 행위가 모두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 ‘모든 경계는 의언(意言)이 분별하는 것’이라 함은 결과로 받는 지옥·아귀·축생·수라·사람·하늘 등 여섯 갈래가 예외 없이 의(意)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로 원인·결과를 지어내서 고통의 바다에 유전한다. 그러므로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고자 한다면 보살도(菩薩道)를 닦아 일여한 곳에 마음을 제어하면, 온갖 인연이 다 끊겨 없어진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름도 상도 없는 길을 닦는 것이다. |
|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전체적인 설명을 했지만 개별적인 수행들[別行]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고 있으므로 ‘어째서 그런가?’하고 다시 문제를 제기하였다. |
| ‘하나인 근본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은 삼계(三戒)의 근본은 하나인 본각[一本覺]인데, 그것이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
| ‘세 가지 작용이 벌어지지 않는다’ 함은 3계(戒)의 작용이 이미 본각에 의존하여 성립된 것이기에 그 작용은 위의로서 벌어진 상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벌이고 짓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인 본각에 순응하여 머무는데, 이런 뜻에서 ‘여여(如如)한 도리에 머문다’고 하였다. 이미 여여한 도리에 머물러 존재[有:三界]의 원인을 제거했으므로 ‘6도의 문이 닫혔다’고 하였다. |
| 일여(一如)한 도리에는 네 가지 연[四緣]의 힘이 갖추어져 있어 일여에 순응하여 삼계(三戒)가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네 가지 연이 일여에 순응하여 삼계가 갖추어진다’고 하였다. |
| [172 / 263] 쪽 |
|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
| “어떻게 네 가지 연이 일여에 순응하여 3취계(聚戒)가 갖추어지게 됩니까?” |
| [論] 이는 세 번째, (자세한 설명을) 거듭 청한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네 가지 연이란 첫째는 택멸하는 힘[擇滅力]으로 취하는 연이니 섭율의계(攝律儀戒)이고, 둘째는 본각의 이익인 정근(淨根:선근)의 힘이 모여서 일어나는 연이니 섭선법계(攝善法戒)이고, 셋째는 본각지혜인 대비(大悲)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섭중생계(攝衆生戒)이고, 넷째는 일각(一覺)의 통달하는 지혜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여여에 순응해 머무는 것이다. 이것을 4연(緣)이라고 한다. |
| 선남자여,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인연의 힘은 현상[事相]에 머물지 않으나 그렇다고 공용(功用)이 없지 않으며, 한곳에 고착해 있지 않으므로 그 특정한 모습을 찾아낼 수 없다. |
| 선남자야, 이 한 가지가 6행(行)을 다 포함하고 있으니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의 바다라고 할 것이다.” |
| [論] 이는 네 번째,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계(戒)의 인연을 밝혀 물음에 답한 것[正答]이고, 둘째는 말이 난 김에 (네 가지 연의 작용력이) 모든 행(行)을 다 포함한다는 사실까지 드러낸 것이다. |
| 물음에 답한 부분에서 ‘네 가지 연[四緣]’이란 일심(一心)·본각(本覺)의 이익 중에 네 가지 힘의 작용을 갖추어 3계(戒)의 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멸의 의지(依止)가 되는 연이고, 둘째는 생(生)의 의지가 되는 연이고, 셋째는 섭(攝)의 의지가 되는 연이고, 넷째는 떠남[離]의 의지가 되는 연이다. |
| ‘멸(滅)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모든 번뇌와는 성질이 다른 고요한 공덕이 있어서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율의계[攝律儀戒]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생(生)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모든 선근과 성질이 일치하는 선한 공덕이 있어서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선법계(攝善法戒)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섭(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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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대비(大悲)를 이루는 성질이 있어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데,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중생계(攝衆生界)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떠남[離]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반야(般若)를 이루는 성질이 있어서 모든 현상을 버리고 떠나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3취계로 하여금 모든 현상을 버리고 여여(如如)에 순응하여 머물도록 한다는 것이다. |
| 앞의 셋은 개별적인 의의를 가진 연[別緣]이고, 뒤의 하나는 공통적인 의의를 가진 연[通緣]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3계를 받을 때, 본각의 이익에 순응하여 수지(受持)하기 때문에 이 네 가지 연[四緣]으로 3계를 갖추는 것이다. |
| 첫째 ‘택멸하는 힘으로 취하는 연’이라 함은 본래 번뇌의 계박(繫縛)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본각이 그 자체로 택멸해탈(擇滅解脫)1)을 이루어 별해탈계(別解脫戒)2)를 취하는 작용을 갖는다는 것이다. 마치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듯이 일부러 생각을 내지 않더라도 힘과 작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리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
| 둘째 ‘본각의 이익인 정근의 힘이 모여서 일어나는 연’이라 함은 본래 깨끗한 공덕을 지닌 본각이 모든 행덕[行德]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 근본의 힘 때문에 모든 선법(善法)을 일으켜 모여 일으킨 선법의 연(緣)이 되니 이 연으로 섭선법계(攝善法戒)가 성립됨을 말한 것이다. |
| 대의(大意)는 이상과 같고 다음에는 문장을 따라서 설명해 가겠다. |
| 셋째 ‘본각지혜인 대비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섭중생계’라 함은 본각 중에는 세속을 두루 비추는 지혜, 즉 대비(大悲)가 있어서 항상 중생들에게 사랑의 비를 뿌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緣)으로 섭중생계(攝衆生戒)가 성립하므로 그렇게 말한다. |
| ‘일각의 통달하는 지혜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여여에 순응해 머묾’이라 함은 본각 중에는 본성을 통찰하는 지혜[照通性智]가 있어서 3취계(聚戒)로 하여금 여여에 순응하여 머물게 한다는 뜻이다. |
| 1) 각(覺)의 속성 또는 각의 공덕, 각의 덕과 같은 뜻이다. |
| 2)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 즉 출가 승려들이 반월(半月)마다 설계하며 수도할 때 기준이 되는 계(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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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네 가지 연은 체(體)가 법계(法界)에 두루 미치고, 작용이 만행(萬行)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큰 힘’이라고 한다.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일한 맛이라서 온갖 명상과 차별된 작용을 떠났다. 그러므로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상은 없다고 할지라도 뛰어난 기능[勝能]이 있어서 출세간의 모든 수행공덕을 다 포괄하므로 ‘공용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건대 본각에만 있고 세속의 법 중에는 이러한 면이 없기 때문에 ‘한 곳을 떠나면 구(求)할 수 없다’고 하였다. |
| 이상 3취계의 연(緣)을 각각 밝혔다. 다음으로는 그것이 만행(萬行)을 다 포괄함을 밝힌다. 10신(信)에서 시작하여 등각(等覺)까지 이 6위(位)에 있는 모든 행(行)은 일각(一覺)에 포함되므로, ‘이 한 가지가 6행(行)을 다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살만 이 본각에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도 한결같이 이 바다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이는 부처님의 깨달으신 모든 지혜의 바다’라고 하였다. |
|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
| “현상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공용이 없지 않다면, 이 법(法)은 진공(眞空)이라서 상(常)·낙(樂)·아(我)·정(淨)하니 두 가지 아[二我]를 넘어선 대반열반(大般涅槃)이며, 그 마음이 걸리는 데가 없을 터이니 이것이 큰 힘이 있는 관법[觀]이겠나이다.” |
| [論] 여기는 다섯 번째, (사리불이 말씀을 듣고) 이해한 것을 밝힌 부분이다. 이 중에 둘이 있다. 먼저는 순응할 일여(一如)란 법신이며, 그것이 네 가지 덕[四德:常·樂·我·淨]을 다 갖추고 있어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관념을 넘어선, 대열반임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일여(一如)에 순응해 가는 마음이 일여를 따라 모든 얽매임을 벗어났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크게 자재한 힘임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
| [經] “그리고 이 각(覺)을 관(觀)하는 데는 37도품법(道品法)을 다 갖추었을 것입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37도품법을 다 갖춘다. 어째서 그런가? 4념처(念處)·4정근(正勤)·4여의족(如意足)·5근(根)·5력(力)·7각(覺)·8정도(正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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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은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여서 다 똑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각각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명칭과 수[名數] 때문에 이름과 글자를 붙이는 것이지 그 법은 얻지 못한다. 얻지 못하는 법은 한 가지 뜻으로서 문자로는 나타낼 수 없다.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은[無文之相:어떤 본에는 ‘無文之義’로 되어 있다]진실한 공성(空性)이다. 공한 성품의 뜻은 실제와 다름없이 여여(如如)하며, 여여한 도리는 모든 법을 다 갖추고 있다. 선남자야, 여여한 도리에 머무는 자는 3고(苦)의 바다를 건넌다.” |
| [論] 이는 두 번째 큰 단원, 도품행(道品行)이 진성(眞性)으로부터 성립됨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대답이 있다. |
| 물음에서 ‘이 각을 관하는 가운데[是觀覺中]’라 함은 순응하는 관[能順觀]과 순응할 본각[所順本覺]이니, 능(能)과 소(所)가 평등한 관(觀)과 각(覺) 가운데 37도품행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
| 답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 인정하고 다음에 해석한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두 번째인 해석 부분인데 그 중에 또 둘이 있다. 직접 해석하는 말씀과 거듭 설명하는 말씀이다. |
| 처음에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라고 한 것은 37품(品)으로 나열된 명목들의 의미는 오직 하나인 관각(觀覺)으로서 둘이 아닌 법이기 때문이다. ‘다 똑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각각 다른 것도 아니다’ 함은 관과 각이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인데, 다르지 않다는 측면[不異門]에서 ‘뜻은 하나’라고 하였다. |
| ‘명칭과 수 때문에’ 이하는 거듭 설명한 말씀이다. 넷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다르다는 뜻을 떨쳐주고, 둘째는 하나라는 뜻을 드러내고, 셋째는 하나의 뜻에 모든 법이 갖추어져 있음을 밝히고, 넷째는 하나의 뜻이 모든 잘못과 허물[過患]을 떠났음을 밝혔다. |
| 첫째 설명 중에서 ‘명칭과 수[名數] 때문에 이름과 글자를 붙이는 것이지 그 법은 얻지 못한다’ 함은, 세간에서 닦는 도품행(道品行)의 법은 명칭과 수자를 따르기 때문에 37가지가 있으나, 보살의 각혜(覺慧)로 그 명목들을 찾아보면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 둘째 설명 중에서 ‘얻지 못하는 법은 한 가지 뜻으로서 문자로는 나타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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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없다’ 함은, 저 별개의 법을 구하여 얻어지지 않을 때, 이 법은 일미(一味)라서 모든 말과 문자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 셋째 설명 중에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은 진실한 공성’이라 함은 별개의 법으로 성립할 수 없는 능관심(能觀心)이 모든 말과 문자를 끊고 차별상(差別相)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 ‘공한 성품의 뜻은 실제와 다름없이 여여(如如)하다’ 함은 이 능관심이 실상(實相)인 여여(如如)의 도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형상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본각(本覺)의 여여한 도리는 마치 금을 불려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듯이, 도품 등의 법[道品等法]을 닦아 이루는 법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여여한 도리는 모든 법을 다 갖춘다’고 하였다. |
| 이미 여여한 도리에 머물러 모든 공덕을 다 갖추었다면 잡되게 물든 과실(過失)을 이미 떠나 있다. 그러므로 ‘여여한 도리에 머무는 자는 3고(苦)의 바다를 건넌다’고 하였다. 이것이 (거듭 설명한 부분 중) 네 번째, (하나의 뜻이) 모든 잘못과 허물을 떠났음을 말한 것이다. |
| 이제 도품(道品)의 의미를 간략하게 네 구절로 분별하여 설명하겠다. |
| 첫째, 37법을 10법으로 포괄한다. |
| 둘째, 10법을 4법으로 포괄한다. |
| 셋째, 4법을 한 뜻으로 포괄한다. |
| 넷째, 한 뜻에 37법이 다 갖추어져 있음을 밝힌다. |
| 1. 37법을 10법으로 포괄한다는 것은, ‘37품은 10법을 근본으로 한다……(이하 생략)’는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설에 의거한다. 여기서는 열 가지를 전개하여 서른일곱 가지를 세우는데, 그 법의 체[法體]를 논하자면 오직 열 가지뿐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계(戒)·사(思)·수(受)·염(念)·정(定)·혜(慧)·신(信)·근(勤)·안(安)·사(捨)이다. 어떻게 이 열 가지가 서른일곱 가지로 전개되는가? 계(戒)에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 셋이 있고, 사(思)의 종류에는 정사유(正思惟) 하나를 세우고, 수(受)에 희각분(喜覺分) 하나를 세우고, 염(念)에는 염근(念根)·염력(念力)·염각(念覺)·정념(正念)의 네 가지를 전개하고, 정(定)은 네 가지 여의족[四如意足]·정근(定根)·정력(定力)·정각(正覺)·정정(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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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定)의 여덟 가지로 전개하고, 혜(惠)도 네 가지 염처[四念處]·혜근(惠根)·혜력(惠力)·택법각분(擇法覺分)·정견(正見)의 여덟 가지로 전개하고, 근(勤)에도 네 가지 정근[四正勤]·정진근(精進勤)·정진력(情進力)·정진각분(情進覺分)·정정진(正精進)의 여덟 가지를 세우고, 신(信)에는 신근(信根)·신력(信力) 둘을 세우고, 안(安)과 사(捨)에 각각 하나씩 의각분(倚覺分)과 사각분(捨覺分)을 세운다. |
| 이를 정리해보면 다섯 부류가 있다. |
| 첫째 정(定)·혜(慧)·근(勤) 세 종류는 여덟 가지로 전개된다. 그 스물 네 가지가 이 세 종류에 소속된다. 둘째 염(念) 한 종류는 네 가지로 전개된다. 저 네 가지가 모두 일념(一念)에 포섭된다. 셋째 계(戒) 한 종류는 세 가지로 전개되는데, 세 가지로 되어 있지만 일계(一戒)에 포섭된다. 넷째 신(信) 한 종류는 두 가지로 전개된다. 신이 신근과 신력 둘을 포함한다. 다섯째 사(思)·수(受)·안(安)·사(捨) 네 종류는 하나를 세웠는데, 각각 자성(自性)에 소속된다. 이와 같이 10법이 37법을 포섭한다. |
| 2. 십법이 네 가지에 포섭된다는 것은 이렇다. 첫째는 계(戒)인데, 색법(色法)에 속하며, 밖으로 드러나는 것[表色]과 드러나지 않는 것[無表色]이 있다. 둘째는 사(思)와 수(受)인데, 변행심소(遍行心所)에 속한다. 셋째는 염(念)·정(定)·혜(慧)인데, 별경심소(別境心所)에 속한다. 넷째는 신(信) 등 넷인데, 선심소(善心所)에 속한다. |
| 3. 네 가지 법을 한 가지 뜻에 포섭한다는 것은 이렇다. 각혜(覺慧)로써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을 추구해 보건대, 첫 색법(色法)은 그것이 방분(方分)을 갖건 아니건 다 얻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뒤 세 가지 마음 작용을 보건대, 그것이 시분(時分)을 갖건 아니건 모두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들이 아예 없는 법[無法]은 아니라 해도 얻어질 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평등한 한 맛[平等一味]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법이 한 뜻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라고 하였다. |
| 4. 한 뜻에 37법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이렇다. 능(能)과 소(所)가 평등한 일미의 뜻으로 몸 등이 공(空)함을 관(觀)하면 4념처(念處)이며, 모든 게으름을 여의면 4정근(正勤)이며, 흩어진 생각들이 고요해지고 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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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면 여의족(如意足)이며, 불신(不信) 등을 벗어나면 5근(根)·5력(力)이며, 무명(無明) 등을 없애면 7각분(覺分)이며, 여덟 가지 그릇된 법[八邪法]을 떠나면 이것이 8정도(正道)이다. |
| 이와 같이 모든 잡된 물듦을 멀리 떠나 한 뜻에 무량한 공덕이 구족되므로 ‘이 각(覺)을 관(觀)하는 데는 37도품의 법이 다 갖추어져 있으리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여여(如如)한 도리는 모든 법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
|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
| “만법은 다 글[文]이고 말[言]인데, 글과 말은 특성상 뜻[義]이 될 수 없습니다. 여실(如實)한 뜻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지금 여래께서는 어떻게 설법하시나이까?” |
| [論] 여기서부터는 큰 단원 세 번째,3) 부처님의 말씀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답이 있다. |
| 질문 중에 ‘만법’이란 세간의 언설(言說)로 세운[安立] 법을 말한다. 말이라는 법은 도대체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문자이고 말일 뿐, 뜻이 될 수는 없다. 모든 법의 참 뜻은 언설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것이 만약 글이고 말이라면, 여기에는 참 뜻이 없을 것이며, 참 뜻이 있다면 그것은 글이나 말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설법하시겠나이까?’ 하고 물은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내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너와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니, 이런 이유로 설한다. |
| 나의 말은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이지 문자가 아니며[非文], 중생들의 말은 글로 된 말[文語]이지 뜻이 아니다[非義].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말은 다 공허하고, 공허한 말은 뜻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으니, 뜻을 말하지 않 |
| 3) 진성이 공하다는 도리를 설명하는 여섯 대단원 중에 첫째는 3취계(聚戒)가 진성으로부터 성립된 것임을 밝혔고, 둘째는 37조도품(助道品)이 진성(眞性)에서 성립됨을, 셋째는 여래의 가르침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넷째는 보살의 지위가 본각의 이익에서 나온 것임을, 다섯째는 대반야(大般若)가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 것임을, 여섯째는 큰 선정(大禪定)이 모든 명수(名數)를 넘어선 것임을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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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은 모두 헛말이 된다. |
| 뜻과 일치하는 말은 그 실상이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고, 공이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아서 두 가지 상을 떠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이 중간에 떨어져 있지 않는 법은 세 가지 상[三相]을 떠나 있으므로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없으니, 여여(如如)한 그대로 설한 것이다. |
| 진여(眞如)는 유를 없애지 않는다. 무에서 유를 없애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는 무를 있게 하지 않는다. 유 가운데 무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有)·무(無)가 있지 않으니, 유·무가 있지 않음을 설하기 때문에 진여도 있지 않다. 진여는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는 없게 하지도 않으니, 여여(如如)하게 설한다.” |
| [論] 두 번째로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시고 다음에 글과 뜻이 다름을 나타내신다. |
| 먼저 (이유를 말씀하신 중에) ‘너와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라 한 데서 ‘너’는 사리불을, ‘중생’은 모든 범부를 가리킨다. 이들에게 무위(無爲)를 설하면 법체(法體)가 있다고 생각하고, 유위(有爲)를 설하면 법상(法相)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언설로는 참 뜻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나는 그러한 언설과는 달리 설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는 이유다. |
| 다음에는 글과 뜻이 다름을 드러내는 말씀인데, 먼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標] 뒤에 그 두 가지를 풀이한다[釋]. |
| 먼저 두 가지를 표한 가운데 ‘뜻을 담은 말이지 문자가 아니라’ 함은 말이 단지 공허한 문자[空文]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참뜻[實義]에 합당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며, ‘글로 된 말이지 뜻이 아니라’ 함은 말이 참뜻과 상관없이 공허한 문자에 그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
| 다음으로 풀이하는 주에는 먼저 뒤에 나오는 문장들을 풀이하였다. |
| ‘다 공허하다’ 함은 공허한 문자만 있고 참뜻이 없으므로 하신 말씀이니, 이는 ‘글로 된 말[文語]’을 풀이한 것이다. ‘뜻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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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은 여실(如實)한 뜻에 대해 밝히거나 이야기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니, ‘뜻이 아니다’한 말을 풀이한 것이다. 그 뒤는 결론인데, ‘모두 헛말이 된다’ 함은 개념[想]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뜻[義]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예컨대 본 것을 못 보았다고 말하고, 못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
| ‘뜻과 일치하는 말……’ 이하는 다음으로 앞에 나오는 문장들을 풀이한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는데 먼저 내용을 풀이하고[正釋], 다음에는 거듭 설명한다[重顯]. 내용을 풀이한 중에서도 먼저 ‘(단지) 문자가 아니라[非文]’한 부분을 해석하고 나중에 ‘뜻을 담은 말[義語]’이라 한 부분을 해석한다. |
| 단지 문자가 아님을 해석한다는 것은, 아예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공허한 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뜻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을 해석한다는 것은, 뜻이 말에 맞기 때문이며 말이 뜻과 같기 때문이다. |
| 처음 해석 가운데 ‘그 실상이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다’ 함은 진여(眞如)의 실상도 공하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상 역시 공하다’고 한 뜻과 같으므로 ‘실상이 공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의 도리가 없지 않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고 하였다.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상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 ‘공이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 함은, 진공(眞空)의 이치가 실상이라는 말이다. 공이 실재한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 진공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 ‘뜻과 일치하는 말은 두 가지 상을 떠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함은, ‘공하지 않은 말’은 공상(空相)을 떠나 있고, ‘실상이 없는 말’은 실상을 떠나 있으므로 ‘두 가지 상을 떠났다’ 하였고, 그러나 공상과 실상의 둘 사이에 그 둘이 아닌 중간의 것을 세우지 않으므로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
| 이미 양 극단[二邊]을 떠났고 중간에 떨어지지도 않으므로 ‘세 가지 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닿는 곳은 이 세 가지 상을 벗어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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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 말씀은 이 세 가지[三相]를 멀리 떠나 그 중도에 일치해 있다. 생각과 말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말이 끊긴 뜻에 묘하게 일치하므로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문자’와는 같지 않다. 이상은 ‘비문(非文)’을 풀이한 내용이다. |
| ‘여여하게 설하는 그대로 여이다[如如如說]’ 함은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풀이한 것이다. 맨 앞의 ‘여(如)’는 ‘일치한다’는 말이고, 그 다음 ‘여여(如如)’는 ‘의리(義理)’를 뜻한다. 즉 앞서 세 가지 모양을 멀리 떠난 말씀은 여여한 의리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은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범부의 말과는 달리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
| ‘진여는 …를 없애지 않는다[如無]’ 이하는 두 번째, 거듭 설명하시는 부분이다. 먼저 비문[非文]을 설명하고 뒤에 의어(義語)를 설명해낸다. |
| 먼저 (비문을 설명한 중에) ‘진여는 유를 없애지 않는다. 무에서 유를 없앨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함은 진여의 도리는 유(有)가 아니지만 그 진여가 본래적으로 유를 없게 한다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즉 무법 중에서 유법을 없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는 본래 유(有)가 아닌데, 어떤 유를 없애서 무(無)에 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실상은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다’고 한 말과 들어맞는다. |
| ‘진여는 무를 있게 하지 않는다. 유 가운데 무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함은 진여의 도리는 무(無)가 아니지만 그 진여가 근본적으로 그 무를 있게 했다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즉 유법 중에서 무법을 있게 했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는 본래 무(無)가 아닌데, 어떤 무를 있게 해서 유에 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공은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 말과 부합한다. |
| ‘유·무가 있지 않다’ 함은 진여에는 유와 무가 없으므로 유가 있지 않으며, 진여에는 무와 유가 없으므로 무가 있지 않다는 말이다. 두 가지가 이미 있지 않은데, 어떻게 중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세 가지 상을 떠났다’는 말에 부합한다. 여(如)의 뜻이 이미 그러하다면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에 부합하므로 부처님의 말씀은 실로 공허한 문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비문(非文)’이란 말을 거듭 해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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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명칭과 말이 이와 같이 도리에 맞으므로 후득지(後得智)에서 그러한 명칭을 가지고 진여를 사유하면 진여의 이체(理體)를 직접 관할 수 있기 때문에 4구(句) 중 구구(俱句)에 해당한다. |
| 둘째로,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거듭 설명한 중에 ‘유·무가 있지 않음을 설하기 때문에 진여도 있지 않다’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 이미 유·무가 있지 않다고 설한 것이기 때문에 진여의 이치에는 유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有)가 있지 않다는 것은 진여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며, 무(無)가 있지 않다는 것은 진여를 없게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는 ‘진여를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를 없게 하지도 않는다’고 한 말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진여는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는 없게 하지도 않으니, 여여(如如)하게 설한다’고 하였으며, 앞에서도 ‘여여 그대로 설한다[如如如說]’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거듭 해석하였다. |
| 이상으로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부처님의 언교가 진여의 도리에 부합함을 밝힌) 부분이 끝났다. |
|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
| “모든 중생이 일천제(一闡提)에서 시작하니, 천제의 마음이 어떤 등급의 지위[位]에 머물러야 여래(如來)와 여래의 실상에 이를 수 있습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천제의 마음에서 여래와 여래의 실상까지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문다.” |
| [論] 이하는 대단원의 네 번째, 보살 위(位)가 본각(本覺)의 이익에서 나옴을 밝힌 부분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는 대답하였다. 대답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수를 들어 전체를 밝힌 부분이며, 둘째는 따로따로 풀이한 부분이며, 셋째는 총괄적인 설명이다. 위 문장은 수를 들어 전체를 밝힌 부분에 해당한다. 다섯 지위[五等位]에서 ‘등(等)’은 계급을 말한다. |
| ‘일천제에서 시작한다’ 함은 아직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내기 전에 있는 사람을 모두 천제(闡提)라고 부르는데, 대승(大乘)의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천제에도 크게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대원(大願)을 발한 일천제로서 항상 열반(涅槃)에 들어가지 못한 자이며, 다른 하나는 큰 믿음이 없는 일천제이다. 큰 믿음이 없는 일천제에도 둘이 있다. 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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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째는 별일천제(別一闡提)로서 큰 사견(邪見)을 일으켜 선근(善根)을 끊어버린 자이며, 둘째는 통일천제(通一闡提)로서 아직 대승심을 내지 못해 큰 믿음이 없는 자에서부터 2승(乘)의 4과(果)를 얻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제의 위(位)에 들어간다. |
| 지금 이 글에서는 마지막 경우를 두고 말하기 때문에 ‘천제의 마음에서 여래와 여래의 실상까지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문다’고 하였다. 아직 10신(信)에 들지 않은 자는 모두 천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선 5위(位)의 수준[分齊]를 설명한다. |
| 첫째는 신위(信位)니, 10신행(信行)에 있다. 비록 불퇴전(不退轉)은 아니라 할지라도 큰마음을 일으킨 자들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이들을 ‘신상보살(信相菩薩)’이라고 하였다. |
| 둘째는 사위(思位)니, 30심(心)에 있다. 모든 법이 식일 뿐[唯識]이라는 도리를 사유하지만 이들 모두 아직은 무분별의 수행을 참으로 증득하지는 못한 자들이다. |
| 셋째는 수위(修位)니, 10지행(地行)에 있다. 진증(眞證)을 얻어 열 가지 장애를 대치(對治)하며 닦는 자들이다. |
| 넷째는 행위(行位)니, 등각행(等覺行)에 있다. 인행(因行)은 만족되었으나 아직 과지(果地)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다. |
| 다섯째는 사위(捨位)니, 묘각지(妙覺地)에 있다. 적멸(寂滅)을 취하지 않고 대비(大悲)로써 두루 교화[普化]하는 자들이다. |
| 5등위(等位)를 건립하는 까닭은 퇴위(退位)냐 불퇴위냐, 증위(證位)냐 부증위냐, 등위(等位)냐 미등위냐, 인이 다 찬 지위냐[因滿位], 과가 완성된 지위냐[果圓位]의 차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데, 이 순서대로 5등위를 세운 것이다. 대의(大意)는 이와 같고 이어서 경문을 풀이하겠다. |
| [經] “첫째는 신위(信位)다. 이 몸 안에 진여의 종자가 망심(妄心)에 가려져 있으나 망심을 버리고 떠나면 맑은 마음이 깨끗해짐을 믿고, 모든 경계가 의언(意言)의 분별임을 아는 것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따로따로 풀이한 부분[別解]이다. 첫 번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믿음[信]을, 다음에는 이해[解]를 다룬다. 먼저 믿음을 설명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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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데 소위 세 가지 불성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
| ‘이 몸 안에 진여의 씨앗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본성에 머무는 불성을 믿는 것이다. ‘진여(眞如)’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뜻하며, 종자(種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더할 나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無上正等覺이라고 한역함)를 뜻한다. 자신의 본성인 깨끗한 마음은 본래 법이 그렇기 때문에 ‘진여’라 하며, 3신(身:法身·報身·化身)의 결과를 초래하는 바로 그 원인이 되기 때문에 ‘종자(種子)’라 한다. 그러나 아직 발심하여 머무는 지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본성에 머문다’고 하였다. 자성이 아직 모든 장애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망심(妄心)에 가려져 있다’고 하였다. |
| ‘망심을 버리고 떠나면’이란 이 믿음이 불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0신(信)의 지위에서 등각(等覺)까지 점차 불신(不信)·무지(無知) 등의 장애를 벗어남에 따라 거칠고 망령된 분별심을 버리기 때문이다. ‘맑은 마음이 깨끗해짐을 믿는다’ 함은 이 믿음으로 불성을 얻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도(道)에 도달한 후 모든 때[垢]를 떠나 자성인 맑은 마음이 깨끗하고 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신(信)자가 아래 두 구(句)에까지 걸린다. |
| ‘모든 경계가 의언의 분별’이라 함은 이미 세 가지의 불성을 믿는다면 유식의 도리까지 알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으로 취한 모든 경계가 오직 의언(意言)으로 분별해서 지어낸 것이라서, 분별을 떠난다면 있다할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
| [經] “둘째는 사위(思位)다. 사(思)란 모든 경계가 오직 의언(意言)일 뿐이라, 의언으로 분별하여 의에 따라 나타나 보여지는 경계가 내 본식(本識)이 아님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 본식은 법(法)도 의(義)도 아니고 소취(所取)도 능취(能取)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 |
| [論] 이는 사위(思位)를 설명한 것인데, 역시 두 구가 있다. 먼저 무상심사관(無相尋思觀)을 밝히고, 다음에 무생여실지(無生如實智)를 드러낸다. |
| 처음에 나오는 ‘관찰[觀]’이란 사량관찰(思量觀察)을 말한다. ‘오직 의언일 뿐’이라 함은 인식되어진 바깥 경계[所取外境]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를 따라 나타난다’고 한 것은 바깥 경계로 나타난 상분(相分)이 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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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見分)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
| ‘내 본식이 아니라[非我本識]’ 함은 식(識)을 떠나고 나면 바깥에 보여진 경계는 이미 나의 식[我識]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본식(本識)이란 제6식을 말하는데, 3유(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제바보살(提婆菩薩)은 게송에서, ‘의식(意識)은 3유(有)의 근본이요, 모든 경계는 그 원인이니, 만일 경계가 없는 것임을 본다면, 3유의 종자도 자연히 사라진다’고 설하였다. 여기까지는 무상심사(無相尋思)와 여실지(如實智)를 전체적으로 설명하였고, 아래로는 그 무생도리(無生道理)를 밝힌다. |
| ‘이 본식은 법(法)도 의(義)도 아니고 소취(所取)도 능취(能取)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법도 아니고 의도 아님을 안다’ 함은 설명하는 공능을 가진 법[非能詮法]도 아니고, 설명의 대상이 되는 뜻[非所詮義]도 아니라는 것이다. 명칭과 뜻이 서로가 서로에게 객(客)이 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소취도 아니며 능취도 아님을 안다’ 함은 인식된 대상[所取塵]이 이미 없으므로 인식하는 것[能取]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식하는 쪽은 인식의 대상을 상대로 해야 하는데, 이미 상대될 것이 없어서 상대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생심사(無生尋思)와 여실지(如實智)를 전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
| 처음 10해(解)로부터 그 위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기까지는 심사(尋思)와 여실한 지혜의 관(觀)을 닦는다. 이 중에도 수혜(修慧)의 관찰이 있기는 하나 아직 사찰분별(思察分別)을 완전히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사위(思位)라는 이름에 통합하였다. |
| [經] “셋째는 수위(修位)다. 수(修)란 항상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데, 일으키는 것과 일으켜지는 것이 동시에 행해진다. 먼저 지혜로 인도하여 모든 장애나 어려움을 물리치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
| [論] 이는 수위(修位)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먼저 수상(修相)을 밝히고 뒤에 수인(修因)을 드러낸다. 여기서 수상이란 정체지(正體智)를 말한다. |
|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운행되어[雙運] 다시는 출입이 없으므로 ‘항상 일으킨다’고 하였다. ‘일으키는 것[能起]’이라 함은 지(止)가 일으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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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능을 갖는다는 뜻인데 관(觀)을 일으키기 때문에 한 말이다. 다음에 나오는 ‘일으켜지는 것[起]’이란 일으킴의 대상이 되는 관을 말하는데, 지와 관이 분리되지 않으므로 ‘동시’라고 하였다. 상(相)을 그치고[止] 진여[如]를 관(觀)하는 일이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이 닦는 모습[修相]을 설명한 말이다. |
| 이어서 수인(修因)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지관(止觀)을 동시에 운용하여 닦아갈 수 있는 이유는 먼저 가행지(加行智)를 써서 모든 장애를 물리치기 때문이다. ‘지혜로 인도한다’ 함은 가행지를 말하는데, 의언(意言)으로 분별하여 명칭과 말을 떠나지 못하므로 ‘지혜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7지(地) 이하의 모든 보살지(菩薩地) 중에는 다 가행(加行)이 있어 먼저 숨어 있던 장애를 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
| ‘모든 장애나 어려움을 물리친다’는 것은 거칠고 무거운 장애를 덜어내고 제압한다는 말이며,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현행의 번뇌를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
| [經] “넷째는 행위(行位)다. 행(行)이란 모든 수행 지위를 떠나 마음에 취하고 버림이 없는 아주 맑은 근본 이익이며, 마음의 동요가 없이 여여한, 결정된 참 성품 그대로의 대반열반(大般涅槃)이어서 그 성품이 공(空)하고 큰 것이다.” |
| [論] 이는 등각위(等覺位)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두 구(句)가 있다. 먼저 계위의 상태를 밝힌 뒤에 그 행을 밝힌다. |
| ‘모든 수행지위를 떠났다’ 함은 행(行)이 10지(地)를 넘어섰기 때문이며, ‘마음에 취하고 버림이 없다’는 것은 이해한 바가 부처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위를 등각행(等覺行)이라 하였다. 그 뒤 결론적으로 ‘지극히 맑은 근본 이익’이라 한 것은 본각의 마음을 가리키는데, 그 인(因)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
| 다음으로 행(行)을 밝힌 데서 ‘마음의 동요가 없이 여여한, 결정된 참 성품’이라 함은 이 지위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대반열반이어서 그 성품이 공하고 크다’ 함은 적멸무위(寂滅無爲)이며, 한 모습[일상]이자 모습이 없기[無相]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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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업경(本業經)』에서는 이를 ‘금강삼매에 들면 한 모습이자 모습이 없으며 적멸무위(寂滅無爲)하니 무구지(無垢智)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
| [經] “다섯째는 사위(捨位)다. 사(捨)란 공성[性空]에 머물지 않고 바른 지혜[正智]가 흘러 변하는 것이며, 대비(大悲)의 여여한 상인데 그 상이 여여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며, 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에도 마음을 비워 증득하는 일조차 없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끝[邊際]이 없어 처소를 볼 수가 없으니 이것이 여래에 이른 것이다.” |
| [論] 이는 불지(佛地)를 설명한 부분으로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먼저 사(捨)의 뜻을 밝힌다. 즉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저 버리는[捨]상태를 나타낸다. |
| ‘성품이 공하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함은 지혜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꺼진 재처럼 하는[灰身滅智]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량지(如量智)4)가 계속 흘러나와 근(根)을 따라 변역(變易)하여 불사(佛事)를 짓기 때문이다. |
| ‘대비의 한결같은 모양은 그 여한 모습에도 머묾이 없는 것’이란 무연대비(無緣大悲)는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차별된 모양을 취하지 않으므로 ‘여여한 상’이라 하였고, 한번도 쉬지 않고 6도중생을 건네 주므로 ‘그 상이 여여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
| 삼먁은 정(正)을, 삼(三)은 등(等)을, 보리는 각(覺)을 뜻한다. 합해서 말하자면 삼먁삼보리는 정등각(正等覺), 즉 원만하기 비할 데 없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머무는 일이 없으므로 ‘마음을 비워 증득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
| 이 세 가지 뜻 중에서 앞의 둘은 열반(涅般)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에서 버린다[捨] 하였고, 뒤의 하나는 보리(菩提)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버린다고 하였다. |
| 다음에는 사위(捨位)의 상태를 밝힌 부분이다. |
| ‘마음에 끝이 없다’는 것은, 일심(一心)의 원천에 돌아가면 마음의 체(體) |
| 4) 여리지(如理智)의 상대로써 속제지(俗諦智)를 말함. 현상계의 수량과 차별에 응하여 그 차별상을 명백히 아는 불(佛), 또는 보살의 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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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두루해지는데, 시방에 두루하므로 끝이 없고[邊], 3세에 두루하므로 끝이 없다[際]고 하였다. 3세에 뻗어있으나 예와 지금의 차이가 없으며, 시방에 미치지만 여기와 저기의 차이가 없으므로 ‘처소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
| 이와 같은 궁극의 과(果)는 다른 것과는 함께 하지 않고, 오직 여여함을 타고 가는 자만이 도달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래에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
| 여기까지가 5등위(等位)를 각각 설명한 부분이다. |
| [經] “선남자야, 다섯 계위가 하나의 각[一覺]이며,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들어가니, 중생을 교화하려면 그 근본 자리[本處]를 따라야 할 것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전체적인 설명인데, 이 중에 둘이 있다. 하나는 본각에서 오는 것임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문답을 주고받으며 거듭 설명한 부분인데 위 경문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
| 5위(位)의 모든 행이 본각을 떠나지 않아서 다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행(行)이 성립될 때 앞에서부터 뒤로 들어가므로 ‘들어간다[入]’고 하였다. ‘들어간다’는 것은 자리(自利)를 말하고 ‘교화한다’는 것은 이타(利他)를 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행(行)이 다 본처(本處)를 따른다는 것이다. |
|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
| “어떻게 하는 것이 그 근본자리에 따르는 것입니까?” |
|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
| “근본이라는 것이 본래 없으니 없는 곳에 처하여 공한 실제에 들어가 보리심을 내서 원만해지면 성도(聖道)를 이룬다. 어째서 그런가? 선남자야, 손으로 허공(虛空)을 잡는 것과 같아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잡을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 [論] 여기는 문답을 통해 거듭 설명하신 부분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법(法)을 말하고 다음에는 비유를 들었다. 법(法)에 네 구절이 있다. 첫 두 구는 본처(本處)가 무처(無處)임을 밝히고, 나중의 두 구는 인과(因果)가 따라서 이루어짐을 나타냈다. ‘어째서 그런가?’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어째서’라 함은 만약 본래 무처(無處)라면 들어갈 수가 없어야 하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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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갈 수가 있다면 본처(本處)가 없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떨쳐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해석하였다. |
| ‘손으로 허공을 잡는다’ 한 데서 ‘손으로 잡는다’ 함은 능입(能入)의 행(行)을 비유하고, ‘허공’은 소입(所入)의 본각을 비유한다. ‘잡을 수 없다’ 함은 허공은 아무 형상이 없어서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함은 쥔 손아귀 안에 허공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본각의 이익도 이와 같아서 본래 근본자리라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며, 근본이 없는 본각은 없지 않으므로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
|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
|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불사(佛事)를 일으키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하니, 이 염(念)은 본래 적멸(寂滅)이요, 적멸은 여여한 것입니다. 모든 덕을 지니고 만법을 망라하여 둘이 아닌 채로 원융(圓融)하니 불가사의합니다. 그러므로 이 법이 곧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이어서, 매우 신비한 주문[大神呪]이며 매우 밝은 주문[大明呪]이며 가장 밝은 주문[無上明呪]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등한 주문[無等等呪]임을 알겠나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큰 단원 다섯 번째, 대반야(大般若)가 원융무이(圓融無二)하다는 사실을 설명한 부분이다. 둘로 나뉘는데 먼저 사리불이 여쭙는 부분이고, 다음에 여래께서 결론적인 대답을 하신 부분이다. 첫째 중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먼저 본각의 이익이 원융(圓融)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했음을 말하고, 다음에 그것이 대반야바라밀다임을 나타낸다. |
| ‘불사를 일으키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한다’ 함이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한 부분이다. 말을 펼쳐서 불사를 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하니, 생사의 염(念)은 본래 적멸하고, 이러한 적멸은 다름 아닌 여여한 도리이며, 이 도리 중에는 본각과 시각(始覺)의 모든 덕이 다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생사의 온갖 법이 다 망라되어 있어 원융무이하므로 매우 깊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
| (다음으로 그것이 대반야바라밀다임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그 안에 한량없는 공덕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은 오직 본각과 시각(始覺)이 다를 바 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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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평등한 체(體)라는 뜻에서 ‘마하반야(摩訶般若)’라고 하며, 이와 같은 반야는 그 근원과 본성을 끝까지 다한 것이므로 ‘바라밀(波羅蜜:到)’이라 한다. |
| 바라밀[到]을 구별해보면 두 가지가 있다. 즉 등각위(等覺位)에서는 만행(萬行)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기 때문이며, 묘각위(妙覺位)에서는 만덕(萬德)의 피안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
| 등각위(等覺位)에서도 크게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큰 신력(神力)으로 세 가지 마[三魔:煩惱魔·五陰魔·天魔]로부터 오는 원한을 항복시키는 것이니, 경문에서 ‘매우 신비한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밝게 비추는 힘으로 4안(眼:肉眼·天眼·慧眼·法眼)의 대상을 두루 관찰하는 것이니, 경문에서 ‘매우 밝은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
| 묘각위(妙覺位)에도 역시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4지(智:大圓鏡智·成所作智·妙觀察智·平等性智)가 구족하고 5안이 원만하여 법계를 남김없이 비추어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것이니, 경문에서 ‘가장 밝은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부처의 3신(身)이 드러내는 무상보리(無上菩提)는 무엇과도 동등하지 않으며 어떤 부처라도 차이가 없는 것이니, 경문에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등한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
| 주문[呪]이란 도(禱)이다. 세간의 신주(神呪)에도 큰 위력이 있어서 주문을 외우고 신에게 빌면 오지 않는 복(福)이 없고, 물리치지 못할 화(禍)도 없다. 이 마하반야바라밀도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덕을 다 갖추어 큰 신력이 있으므로 안으로는 모든 덕이 다 갖추어지며, 밖으로는 모든 환란이 다 없어진다.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명구(名句)를 외우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신(神)을 우러러 바라는 바대로 성취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를 주(呪)라고 한다. 제석천(帝釋天)이 이 명구를 외우고 아수라의 군대를 물리친 사례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그렇다. 진여(眞如)는 공(空)한 성품이다. 성품이 공한 그 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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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불로 모든 번뇌를 태워 없애 평등하고 평등하니, 등각(等覺)의 3지(地)와 묘각(妙覺)의 3신(身)이 9식(識) 중에 아무 영상(影像)없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사리불이 여쭙는 말에 이어 두 번째로) 여래께서 결론적으로 답하신 부분이다. 여기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인 설명[總述], 둘째는 개별적인 설명[別述], 셋째 전체적인 결론[總成]이다. |
| ‘그렇다, 그렇다’라는 말씀이 총술(總述)이다. |
| 별술(別述)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 인(因)이 원만한 경지에 도달함을 말하고 나중에 과(果)가 원만한 경지에 도달함을 말했다. 전자가 등각삼지(等覺三地)를 드러낸 부분이다. 무엇을 등각삼지라 하는가? |
| 첫째는 백겁위(百劫位)요, 둘째는 천겁위(千劫位)요, 셋째는 만겁위(萬劫位)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佛子)야, 마니영락(摩尼瓔珞)이라는 이름은 등각성(等覺性) 안의 한 사람으로서 금강혜보살(金剛慧菩薩)을 지칭한다. 이 보살은 정적정(頂寂定)에 머물러 큰 원력으로 수명이 백 겁이 될 때까지 천삼매(千三昧)를 닦고 나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간다. 거기서 모든 법성(法性)과 2제(諦)·1제(諦)와 1합상(合相)과 동일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천 겁의 수명 동안 머물러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배우고……결국에는 부처님이 가신 곳에 들어가 부처님 도량에 앉고 3마(魔)를 넘어선다. 그리고는 다시 만 겁의 수명 동안 머물러 변화신으로 성불(成佛)하는 모습을 보이고…… 옛날의 모든 부처님과 똑같이 언제나 중도(中道)를 행하고, 대락무위(大樂無爲)를 누리게 되니 생멸(生滅)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
| 지금 이 경에서 ‘진여는 공한 성품’이라고 한 것이 『본업경』에서 말한 첫 번째, ‘일합상(一合相)과 동일하게 되었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즉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과 동일하게 되었으니, 2제(諦)5)가 1제(諦)로 원융(圓融)된 것인데, 이 1제가 바로 1합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진여공성(眞 |
| 5) 속제(俗諦)와 진제(眞諦). 불요의(不了義)와 요의제(了義諦),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 연기의 현실을 아는 것과 그 실상을 아는 것과의 두 가지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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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如空性)’이라고 하였다. |
| ‘성품이 공한 그 지혜의 불로 모든 번뇌를 태워 없앤다’ 함은 『본업경』에서 말한 두 번째, ‘3마(魔)를 넘어선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모든 번뇌[諸結]를 없앤다’는 것은 번뇌마(煩惱魔)를 없애는 것이다. 번뇌를 없애므로 음마(陰魔)에 매이지 않고, 이 두 가지 마를 없애므로 천마(天魔)가 자연히 항복하여 불가사의한 변역사마(變易死魔)6)만이 있을 뿐이다. |
| ‘평등하고 평등하다’ 함은 『본업경』에서 말한 세 번째, ‘언제나 중도(中道)를 행한다’고 한 부분과 일치한다.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다 하였고, 항상 행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거듭 평등하다고 하였다. |
| ‘등각의 삼지[等覺三地]’란 앞의 3지를 망라한 것인데 이 가운데 앞의 둘은 대신주(大神呪)를 말하고, 셋째는 대명주(大明呪)를 말한 것이다. |
| ‘묘각(妙覺)’ 이하는 원만한 과(果)에 도달했음을 밝힌 것이다. ‘3신(身)’이란 법신(法身)·응신(應身)·화신(化身)이다. 모든 부처님이 3신이라는 동일한 길을 가기 때문이니, 이는 무등등주(無等等呪)란 구(句)를 기술한 것이다. ‘9식(識) 중에 아무 영상 없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함은 무상명주(無上明呪)란 구를 기술한 것이다. |
| 앞 등각위(等覺位)에서는 아직도 생멸(生滅)이 있고 아직 심원(心源)을 끝까지 드러내지 못했으므로 제8식(第八識)에 있었다가 지금 묘각(妙覺)에 이르러서는 생멸을 영원히 떠나 본각 일심(一心)의 근원에 완전히 돌아갔으므로 밝고 깨끗한 제9식(第九識)에 들어간 것이다. |
| 한편 앞의 인위(因位)에서는 연(緣)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영상(影像)의 상이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지금 마음의 근원에 돌아와서는 그 본질(本質)을 체득하므로 모든 영상의 상이 다 끊겨 버린다. 그러므로 ‘아무 영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본업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자(佛子)야, 수정(水精)과 영락(瓔珞)이 안팎으로 투명하고 맑듯이, 묘각은 언제나 밝고 맑은 데 머무니 그것을 일체지(一切智)의 경지라 |
| 6) 업에 의해 몸을 받는[業生身] 중생의 생사를 분단생사(分段生死)라고 하는 데 비해, 마음먹은 대로[意生身] 중생을 위해 몸을 바꿔 태어나는 보살의 생사를 변역생사(變易生死)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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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한다. 항상 중도(中道)에 처하고 모든 법에서 4마(魔)를 넘어서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서 모든 상이 다하고, 단번에 이해하고 크게 깨달아 변화신을 끝까지 다하고 신령함을 체득하여 2신(身)으로 항상 머물면서 인연 있는 이를 교화한다.” |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영락경』에서 법성신(法性身)과 응화신(應化身) 2신(身)을 세운 이유는, 법신(法身)이 나머지 다른 2신(身)을 합하여 1신(身)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경에서는 이것을 둘로 나눠놓았기 때문에 3신(身)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3신과 2신이 평등하고 평등하다. 여기까지 해서 도피안(到彼岸)에 대해 개별적으로 설명[別述]하였다. |
| [經] “선남자야, 이 법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니 지(智)가 스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것도 아니니, 작용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義非有無:어떤 본에는 ‘非有非無’라고 되어 있다], 공상(空相)도 공하기 때문이다. |
| 선남자야,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그 중생들이 이 뜻을 보고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 뜻에 들어온 자는 여래를 본다.” |
| [論] 여기는 (如來述成 중 세 번째) 둘이 아닌 원융한 이치를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부분[摠成]이다. |
| 위에서는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측면에서 이야기하여 인(因)이 가득 차면 과(果)가 원만해지는 차별을 밝혔다. 그런데 하나의 법이 둘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인(因)과 과(果)가 둘이 아니고 마음[心]과 경계[境]에 차별이 없다. 인과 과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인이 아니’라 하였고, 마음과 경계가 차별이 없기 때문에 ‘과가 아니’라 하였다. 그 까닭은 앞에서 말했듯이, 인과 과, 심과 경이 오직 하나인 원지(圓智) 자체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체가 작용할 뿐이라면 무엇이 인(因)이 되고, 무엇이 연(緣)이 되랴. 또 이 지혜의 작용이 등각위에 있으면 조적혜(照寂慧)라고 하니, 아직 생멸하는 동상(動相)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묘각위에 이르면 적조혜(寂照慧)라고 부르니, 이미 제9식에 돌아와서 궁극적으로 고요하기 때문이다. |
| 그러나 지금은 둘이 아니라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 먼저 동(動)함이 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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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도 아니고, 후에 고요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요함과 움직임의 작용은 그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성품이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니,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그렇다 치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어째서 그런가? 공상(空相)도 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원융불이(圓融不二)를 설명했다. |
|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이하는 이 이치에 들어가기를 권한 말씀이다. |
|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
| “여래의 뜻을 관(觀)하면 어떤 흐름에도 머물지 않고, 4선(禪)7)을 떠나 유정천[有頂]을 넘어설 것입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법은 명칭과 수[名數]인데, 4선도 마찬가지다. 여래를 보는 자라면 여래의 마음이 자재(自在)하여 항상 멸진처에 있으면서 나오는 일도 들어가는 일도 없이 안팎이 평등함을 보기 때문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번째 대단원, 대선정(大禪定)이 모든 이름과 수(數)를 초월했음을 밝힌 부분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대답이다. |
| 질문 중에 ‘어떤 흐름에도’라고 한 것은 3유(有:欲有·色有·無色有)를 말하는데, 잠시도 멈추지 않고 왔다 갔다 유전(流轉)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유정(有頂)’이란 비상처(非想處)를 말하는데 3유의 정상[三有頂]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 답은 둘로 나뉘는데, 물은 뜻을 전면적으로 인정한 부분[總許]과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別成]이다. 별성 중에도 간략한 설명과 자세한 해석 두 부분이 있다. 간략한 설명에도 두 구(句)가 있으니 먼저 세간의 선[世間禪]은 명수(名數)를 떠나지 못했음을 밝히고, 나중에 출세간의 선[出世禪]은 명수를 초월했음을 드러낸다. |
| 7)4선(禪):색계사선(色界四禪)으로서 초선(初禪)·제2선(第二禪)·제3선(第三禪)·제4선(第四禪)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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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를 보는 자’란 앞에서 말했듯이 여래의 관(觀)에 들어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여래의 마음은 자재하다’ 함은 여래의 마음이 모든 결박에서 떠나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항상 멸진처에 있다’ 함은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오는 일도 들어가는 일도 없다’ 함은 마음의 체(體)는 이치 그대로[如]라 일어나거나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오거나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은 내적인 마음[內心]과 바깥 경계[外境]를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간략한 설명이다. |
| [經] “선남자야, 저런 모든 선관(禪觀)들은 다 옛날 생각에 사로잡힌 선정인데[皆爲故想定:다른 본에는 ‘皆爲想空定’이라고 되어 있다], 이 여여(如如)함은 다시 저런 선정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여여함으로 여실(如實)함을 관하면 관상(觀相)과 여상(如相)을 보지 않아서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니 적멸이 곧 여(如)의 뜻이다. |
| 옛 생각에 사로잡힌 저런 선정은 동(動)이지, 선(禪)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선의 본성은 온갖 동요를 떠났으므로 물들이는 것[能染]도 아니고 물든 것[所染]도 아니며, 마음법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어서 모든 분별을 떠나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觀)하는 선정이라야 선이라 할 수 있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자세한 해석이다.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상을 대치하여 상을 떠남을 밝히고, 둘째 움직임을 대치하여 움직임을 떠남을 드러내고, 셋째 의미를 결론짓고, 넷째 명칭을 결론짓는다. |
| 첫째 상 떠남을 밝힌 가운데서는 먼저 여러 가지 선(禪)이 취하는 상에 대해 열거하는데, ‘저런 모든 선관(禪觀)’이란 세간의 여덟 가지 선[八禪]8)을 말한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선정’이라 함은 옛날 집착을 떠나지 못해서 무시 이래의 망상으로 갖가지 상(相)을 취하기 때문이다. |
| 그 아래는 상 떠남을 밝힌 것이다. ‘이 여여함은 다시 저런 선정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함은 여래에 들어가는 관(觀)은 능(能)과 소(所)가 평등해서 |
| 8)앞의 4선(禪)과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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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如)라고 하기 때문이다. |
| ‘여여함으로 여실함을 관한다’ 함은 평등한 지혜로 여실에 통달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관상(觀相)과 여상(如相)을 보지 않는다’ 함은 평등한 일미(一味)이기 때문에 관하는[能觀] 지(智)와 관의 대상[所觀]인 여(如)의 차별상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능(能)과 소(所)를 잊었기 때문에 견분과 상분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다’고 하였다. 적멸하여 달라지는 일이 없으므로 이것이 여의 뜻이 된다. |
| ‘옛 생각에 사로잡힌 저런 선정……’ 이하는 (두 번째로) 동(動)을 대치하여 동을 떠남을 드러낸 부분이다. 먼저 그 동함을 제시한다. 세간의 선(禪)은 상을 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동요하는 생각[念]이며, 동념은 고요한 것이 아니므로 참된 선이 아니다. |
| 그 아래는 참된 선이 동(動)하는 모든 상을 떠났음을 나타낸다. ‘물들이는 것도 아니라’ 함은 동요하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물들이는 작용[能染]이 없다는 뜻이다. ‘물든 것도 아니라’ 함은 본래 고요하기 때문에 동요에 의해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
| ‘법이 아니라’ 함은 연하는[能緣] 마음 법[心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이 아니라’ 함은 나타난[所現] 영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 의해 모든 동요를 떠나는 것이다. |
| ‘모든 분별을 떠나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란 세 번째로 의미를 결론짓는 말이다. ‘분별을 떠난다’ 함은 상을 떠난다는 뜻을 결론지은 것이니, 분별을 떠남으로 해서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라 함은 동함을 떠난다는 뜻을 매듭지은 말이다. 본래 고요하므로 일어나거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
| ‘이렇게 관하는 선정이라야 선이라 할 수 있다’ 함은 넷째로 이름을 매듭짓는 말이다. 선은 정려(靜慮)를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에, 상을 떠나고 동함을 떠나야 비로소 선(禪)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저 세간의 선정을 선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편의상 붙이는 이름이지 참된 선[眞禪]이 아니기 때문이다. |
| 이 진성공품[一品]을 둘로 나눈 가운데에 하나가 날카로운 근기[利根]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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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위해 긴 글로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그것을 여섯 단원으로 나누었는데 여기까지 해서 마쳤다. |
|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
| “불가사의하옵니다. 여래는 항상 여실로써 중생을 교화하시는데, 이와 같이 실의(實義)는 글이 길고 뜻이 풍부하여 근기가 날카로운 중생은 닦을 수 있지만 근기가 둔한 중생은 뜻을 두기 어렵습니다. 어떤 방편으로 저 둔근기 중생들을 이 깨달음[諦]에 들게 하리까?” |
| [論]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 둔한 근기들을 위해 짧게 간추려서 말씀하신 부분이다. 그런데 날카로운 근기와 둔한 근기, 자세한 설명과 간략한 설명의 두 가지 문이 있다. |
| 탐구하여 이해하는 쪽으로 논한다면 이근은 간략한 설명에, 둔근은 자세한 설명에 맞는다. 날카로운 사람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기 때문이고, 둔한 사람은 열을 들어야만 열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 말을 가지고 이해하는 쪽으로 따진다면 이근은 자세한 설명에, 둔근은 간략한 설명에 맞는다. 날카로운 사람은 많이 듣고 많이 이해하기 때문이며, 둔한 사람은 적은 분량을 외워서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의도는 후자에 있다. |
| 위 글은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대답이고, 셋째는 청(請)이고, 넷째는 설명이며, 다섯째는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익을 얻음을 나타낸다. |
| 위 경문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처음에는 부처님이 앞에서 설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나타내고, 나중에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두다[措]’라는 것은 ‘마음을 둔다[存意]’는 뜻이다. 둔한 근기는 재주가 편협해서 긴 글과 넓은 뜻에는 뜻을 두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 말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
| “저 둔근기 중생에게 4구(句)로 된 게송 하나를 받아 지니게 하면 실제(實諦)에 들어가리니, 모든 불법이 이 한[一:다른 본에는 ‘四’로 되어 있다]게송에 다 들어 있다.” |
| [論] 이는 대답이다. 여래의 말솜씨[辯才]는 걸림 없고 자재하기 때문에 게송 하나에 모든 불법을 다 포함하니, 불법의 요지가 이 네 구 안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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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근기에게 게송 하나를 독송하고 지니게 하여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게 하면…… 마침내 모든 불법을 빠짐없이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을 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이라고 한다. |
|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
| “무엇이 네 구로 된 게송입니까? 부디 저희를 위해 설해 주소서.” |
| [論] 세 번째, 청(請)하는 부분이다. |
| [經]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
| 인연으로 생긴 것[因緣所生義] |
| 그것은 생이 아니라 멸이며[是義滅非生] |
| 모든 생멸을 없애는 것[滅諸生滅義] |
| 그것은 멸이 아니라 생이라네[是義生非滅].” |
| [論] 네 번째 (사리불의 청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이 네 구의 뜻에는 각각 설명한 것[別]과 전체적인 설명[總]이 있으니, 전자는 2문(門)9)의 의미를 밝힌 것이고, 후자는 일심법(一心法)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이문(一心二門) 안에는 포함되지 않은 불법이란 하나도 없다. 무슨 뜻인가? 앞의 두 구는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하여 평등의 의미를 나타냈고, 뒤의 두 구는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하여 차별문(差別門)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
|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진과 속이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수하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일심(一心)이 되고, 하나를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체를 둘로 들었으니, 이런 것을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고 한다. 대의(大意)는 이와 같다. |
| 이어서 글을 해석한다. |
| ‘인연으로 생긴 것’이란 속제(俗諦)의 모든 법을 들어 한 말이다. ‘그것은 멸이다’ 함은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한 것이니, 생긴 것이란 본래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생이 아니라’ 함은, 생하는 그것이 바로 멸(滅)의 이유임 |
| 9) 생멸(生滅)과 진여(眞如), 속(俗)과 진(眞)의 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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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나타낸 것이다. 그 생은 생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을 찾아보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긴 것이란 적멸이다. |
| ‘모든 생멸을 없애는 것’이란 진제(眞諦)의 적멸한 법을 들어 말한 것이다. ‘그것은 생이라’ 함은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한 것이니, 적멸한 법은 연(綠)을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멸이 아니라’ 함은 적멸이 생(生)의 이유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 적멸은 적멸이 아니기 때문에 적멸한 것을 찾아보아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적멸은 연(緣)을 따라 생긴 것이다. |
| 적멸이 곧 생이란 생기지 않는 생함이다. 생긴 것이 곧 멸이란 멸하지 않는 멸함이다. 불멸의 멸이기 때문에 멸이 생이며, 불생의 생이기 때문에 생이 적멸이다. |
| 종합해 본다면 생이 곧 적멸이지만 멸을 고수하지 않으며, 멸이 곧 생이지만 생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과 멸이 둘이 아니고, 동(動)과 적(寂)이 따로 없으니, 이런 것을 일심법(一心法)이라고 한다. 사실 둘이 아니나 그렇다고 하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어서 전체가 연(緣)을 따라 일어나 움직이고, 전체가 연을 따라 적멸함을 말한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생이 곧 적멸이고, 적멸이 곧 생이라서, 막힘도 걸림도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다. |
| 이상으로 한 게송의 전체적인 뜻과 각 구절의 뜻을 설명하였다. |
| [經] 그 때 대중들이 이 게송을 듣고 모두 매우 기뻐하여 멸(滅)과 생(生)을 터득했다. 멸과 생의 반야(船若)는 성품이 공한 지혜의 바다였다. |
| [論] 이는 다섯째,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대중들이 이익을 얻는 대목으로서,전체적인 뜻과 각각의 뜻이 담고 있는 도리를 이해했음을 나타낸다. |
| ‘멸(滅)’은 ‘생긴 것이란 적멸’이라는 앞 두 구를 이해했기 때문이고, 이어서 ‘생(生)’은 ‘적멸이 (연을 따라) 생한다’ 한 뒤 두 구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뜻을 이해했음을 밝힌 말이다. |
| ‘멸과 생의 반야’라 함은 두 가지 이해를 얻었다는 말인데, 이는 별문(別門)에 의하여 이익을 얻은 것이다. ‘성품이 공한 지혜의 바다’란 총괄적으로 관(觀)하건대, 멸하는 것이나 생하는 것이나 자기 성품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성이 공(空)한 지혜는 끝없이 깊고 넓으므로 이를 ‘성품이 공(空)한 지혜의 바다’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은 총문(摠門)에 의하여 이익을 얻은 |
| [200 / 263] 쪽 |
| 것이다. |
| 7. 여래장품(如來藏品) |
| [論]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닌 일실(一實)의 법은 모든 부처님께서 돌아가는 곳이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무량한 법과 모든 행이 이 여래장 속에 귀속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들어갈 곳[所入]을 기준으로 품 이름을 붙였다. |
| [經] 그 때 범행장자(梵行長者)가 본제(本際)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
| “존자시여, 생함의 이치는 멸하지 않으며, 멸함의 뜻은 생하지 않으니 이러한 여여함의 뜻이 바로 부처님의 보리입니다. 보리의 성품은 분별이 없으며[無分別], 그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분별이 무궁하니, 무궁한 상은 오직 분별이 멸한 것입니다. 이런 이치의 특성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한 데라야 분별이 없나이다.” |
| [論] 관행(觀行)을 여섯으로 구분하여 각각 설명하는 중에 바로 앞 품에서는 모든 행이 진성공(眞性空)에서 나왔다는 것까지 설명했다.10) 이제 여섯 번째로는 무량한 법이 여래장에 들어감을 밝힌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모든 법과 모든 행이 한결같이 한곳으로 들어감을 설명한 부분이고, 둘째는 들어가는 행[入行]과 들어간 지[入智]의 인과(因果)의 차별을 나타낸 부분이다. |
|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모든 법이 하나인 실제의 뜻에 들어감을 밝혔고, 둘째는 모든 행이 하나인 불도에 들어감을 밝혔다. |
| 첫째에도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질문, 둘째는 대답, 셋째는 말씀을 듣고 이해함, 넷째는 결론적인 서술이다. 질문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앞에서 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표시하고 다음에 의심나는 곳을 묻는다. |
| 10) 별현관행(別顯觀行)을 「무상법품(無相法品)」, 「무생행품(無生行品)」, 「본각리품(本覺利品)」, 「입실제품(入實際品)」, 「진성공품(眞性空品)」, 「여래장품(如來藏品)」 여섯으로 나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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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물음을 던진 범행장자(梵行長者)는 속인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한 맛[一味]에 머물러 있기에 이 한 맛으로 모든 맛을 다 포괄하고 있는 사람이다. 모든 맛, 즉 더럽고 먼지 묻고 속된 모든 것을 다 거쳤으면서도, 한 맛인 범정행(梵靜行)11) 잃지 않은 자이다. 여기서는 이런 의미를 나타내려고 그 사람을 등장시켜 묻게 한 것이다. |
| ‘본제(本際)에서 일어났다’ 함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서 본제에 들어갔다가 이제 묻기 위해 거기서 나왔다는 말이다. |
| ‘생함의 이치는 멸하지 않는다’ 함은 전 품의 게송 뒷부분에서 ‘그것은 멸이 아니라 생이라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했다는 표시이고, ‘멸함의 이치는 생하지 않는다’ 함은 게송 앞부분에서 ‘그것은 생이 아니라 멸이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했다는 표시이다. |
| ‘이러한 여여함의 뜻’이란 게송 전체의 뜻, 즉 불멸(不滅)과 불생(不生)이 둘이 아니라는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한 말이고, 이와 같이 둘이 아닌 뜻을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보리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각(覺)은 나누거나[分] 구별하지[別] 않기 때문에 둘이 아닌 데 순응하므로 ‘무분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분별이 없는 거기서라야 분별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무분별지는 분별이 무궁하다’고 하였다. 분별이 무궁한 이유는 다만 모든 분별을 없앴기 때문이니 ‘무궁한 상은 오직 분별이 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 이러한 이치의 특성은 언설을 떠나고 사려(思慮)를 초월했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불가사의한 가운데 생각과 말을 초월하므로 분별이 없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설한 게송의 의미를 이해했음을 표시하였다. |
| [經] “존자시여, 일체의 법수(法數)가 한량없고 끝이 없으나 끝없는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인 한 성품이니, 오직 이 한 성품[一性]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
| [論] 이는 의심나는 바를 묻는 말씀이다. 소승교(小乘敎)에는 8만(萬)의 법온(法蘊:교법의 묶음)이 있고, 한 묶음[蘊]의 양(量)에 백을 열 번 곱한 |
| 11) 범정행(梵靜行):성(聖)의 경지를 넘어서는 완벽한 수도의 경지를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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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큼의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 대승교(大乘敎)에는 8만뿐이 아니므로 ‘법수가 한량없고 끝이 없다’고 하였다. 끝없는 교법(敎法)으로 나타내는 이치는 다른 갈래가 없는, 오직 하나이며 실제인 뜻[唯一實義]이다. 교법은 많으나 오직 한 가지 성품에 머문다는 점을 매우 알기 어려우므로 그 일을 묻는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장자야, 불가사의하다. 내가 갖가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미혹한 사람을 위해서 방편도(方便道)를 쓰기 때문이나 모든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에서 나온 하나의 지혜[一實義智]이다. 어째서 그런가? 비유컨대 한 도시에 사방으로 대문이 열려 있는 경우, 이 네 개의 대문이 모두 하나의 도시로 통하듯이 저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들어가는 갖가지 맛의 법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 [論] 답 중에는 주장[法]·비유[喩]·비유를 법에 종합함[合] 셋이 있다. |
| ‘내가 갖가지 법을 설하는 이유’란 삼승교(三乘敎)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미혹한 사람을 위해서’란 아직 일미(一味)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설한다는 뜻이다. ‘방편도를 쓰기 때문’이란 모두 일미(一味)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이라는 뜻이니 정관(正觀)에 들 때는 언설의 교법(敎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에서 나온 하나의 지혜[一實義智]’라 함은 모든 교법에 의해 들어가는 곳의 모습은 오직 하나의 실제인 정관(正觀)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
| 비유 중에 ‘한 도시’란 하나인 실제의 이치다. ‘사방으로 대문이 열려 있다’ 함은, 네 가지 교(敎), 즉 삼승교(三乘敎)와 일승교(一乘敎)를 비유한 것이다. ‘네 개의 대문이 모두 하나의 도시로 통한다’ 함은 네 가지 가르침에 의하여 모두 하나의 실제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저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들어간다’고 한 것은 근기(根機)의 얕고 깊은 정도에 따라서 한 교[一敎]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도시를 하나의 실제에 비유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백성이 들어갈 곳이며 모든 중생이 돌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
| 비유를 법에 맞추는 부분[合]에서 ‘갖가지 법’이란 ‘사방의 대문’에 해당하고, ‘맛’이란 들어가는 갈래의 맛이니 ‘한 도시’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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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
| ‘법이 그러하다면, 제가 한 맛[一味]에 머물면 모든 맛을 포함할 수 있겠나이다.” |
| [論] 이는 세 번째, 이해했음을 나타낸[領解]부분이다. |
| ‘모든 맛을 포함한다’ 함은 모든 교[敎]의 맛을 포섭하여 일실(一實)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왜냐하면 한 맛인 참뜻은 그 맛이[어떤 본에는 ‘味’ 자가 없다] 하나의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오지 않는 물줄기가 없기 때문이다. 장자야, 모든 법의 맛은 마치 여러 갈래 물줄기와 같아서 이름과 수량이 다르지만 그 물임에는 차이가 없다. 큰 바다에 머물면 온갖 물줄기가 다 포함되듯이 한맛[一味]에 머물면 모든 맛을 다 포함한다.” |
| [論] 이는 결론적인 서술[述成]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전체적인 서술[總述]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인 서술[別成]이다. 별성 중에도 법(法)·유(喩)·합(合)의 셋이 있다. 합 중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물줄기’에 배대시킨 부분인데, 먼저 법(法)에 배대한 다음 비유를 다시 들었다. 둘째로는 ‘온갖 물줄기가 다 포함된다’한 데 배대시킨 부분인데, 먼저 비유를 들고나서 법에 맞추어 결론짓는다. |
|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
| “모든 법이 한 맛이라면 어째서 3승(乘)의 도(道)가 있으며 그 지혜에 차이가 있나이까?” |
| [論] 이하는 두 번째, 모든 행(行)이 하나인 불도[一佛道]에 들어옴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묻고 다음에 대답하는데, 이 문장은 차이를 물은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장자야, 강(江)·하(河)·회(淮)·해(海)에는 크기가 다르고 깊이가 달라서 이름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이 강 속에 있으면 강수(江水)라 부르고, 물이 회(淮) 중에 있으면 회수(淮水)라 부르고, 물이 하(河) 중에 있으면 하수(河水)라 부르나, 이들이 바다에 있으면 모두에다 바닷물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법도 이와 같아서 진여(眞如)에 있을 때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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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다 불도(佛道)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
| [論] 두 번째로, 답에는 비유가 있고, 비유를 법에 맞추는 부분이 있다. |
| ‘강하회(江河淮)’란 3승의 행(行)을 비유하고, ‘바다’는 불도를 비유한다. ‘크기의 차이’란 3승의 마음을 비유하니 넓고 좁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깊이의 차이’란 3승의 지혜를 비유하니 우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이 두 가지 뜻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바다에 있으면 모두에다 바닷물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함은 저 3승이 다 같이 10지(地)의 법공진여(法空眞如)에 들어오면 3승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오직 불도라고만 부르는 일을 비유한다. |
| 3승으로 차별된 행(行)이 모두 지전(地前)의 방편도(方便道)에서 있으나 마침내 진여를 정관(正觀)하는 경지에 다 들어가므로 삼승이 별도로 들어가는 귀착점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교법(敎法)이 한 맛에 다같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어디가 비유이고 어디가 비유를 법과 맞춘 문장인지는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 [經] “장자야, 하나의 불도(佛道)에 머물면 3행(行)에 통달한다.” |
|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
| ‘어떤 것을 3행이라고 하나이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첫째는 일에 따라 취하는 행[隨事取行]이고, 둘째는 식에 따라 취하는 행[隨識取行]이고, 셋째는 여여에 따라 취하는 행[隨如取行]이다.” |
| [論] 이하는 두 번째12) 들어가는 행[入行]과 들어간 지혜[入智]의 인과차별(因果差別)을 드러낸 부분이다.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
| 첫째는 입행차별(入行差別)이요, 둘째는 입지차별(入智差別)이요, 셋째는 입인사용(入因事用)이며, 넷째는 입과상주(入果常住)이다. |
| 첫째에도 세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인 표방[摠標], 둘째는 질문, 셋째는 대답이다. |
| 12) 「여래장품」을 크게, 제법과 제행이 동일하게 한곳에 들어감을 밝힌 부분[明諸法諸行同入一處]과 들어가는 행과 들어가는 지혜의 인과차별을 드러낸 부분[顯入行入智因果差別] 둘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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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인 불도에 머문다’ 함은 초지(初地) 이상을 불도에 머문다고 한다. 세 가지 지혜를 갖추고 세 가지 행에 통달하기 때문이다. |
| 답에는 개별적인 설명[別明]과 전체적인 해석[摠釋] 둘로 나뉜다. |
| 개별적인 설명 중에, ‘일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4제(諦)와 12연기(綠起)에 의해 인과의 일에 따라서 도품행(道品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식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모든 중생은 오직 하나인 마음이 짓는 것이므로 유식의 도리에 따라 4섭행(攝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여여함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모든 법(法)이 다 평등하므로 평등한 여여(如如)를 따라서 6도행(度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행(行)을 마음에 포섭하기 때문에 취한다는 것이지, 능(能)·소(所)를 분별하는 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 [經] “장자야, 이와 같은 3행(行)은 많은 문(門)을 다 포섭하니, 어떤 법문(法門)도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행(行)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空相)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렇게 들어간 자는 여래(如來)에 들어갔다고 하겠다. 여래에 들어간 자는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이다[入如來者 入入不入:어떤 본에는 ‘入如來藏者 入不入故’라고 되어 있다].” |
| [論] 이는 3행(行)을 전체적으로 해석하는[總釋] 말씀이다. |
| 수사행(隨事行)이란 소승문(小乘門)과 공통되는 행이고, 수식행(隨識行)이란 대승문(大乘門)에만 있는 행인데 이 둘은 다 차별문(差別門)이다. 세 번째는 평등문(平等門)이다. 이와 같은 도리(道理)로 ‘많은 문을 다 포섭한다’고 하였다. |
| 또 도품행(道品行)은 생사에 머물지 않는 문이며, 4섭행(攝行)은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 문이며, 수여도행(隨如度行)은 평등하여 둘이 아닌 문이기 때문에 ‘어떤 법문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
| ‘이런 행(行)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함은 비록 여여에 따라 행을 하지만 항상 일에 따르고 식에 따라서 행하기 때문에 공상(空相)을 취하여 적멸(寂滅)에 머물지 않는다. ‘여래에 들어갔다고 하겠다’는 것은 일에 따르고 식에 따르지만 항상 여여에 따라 평등행(平等行)을 취하기 때문에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만하다. |
|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入入不入]’이라 함은 그 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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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마음이 들어가지 않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능입(能入)과 소입(所入)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들어가지 않음[不入]’이라고 하였다. 능소가 별개로 있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므로 관심(觀心)의 측면에서 임시로 ‘들어가는 마음’이라고 이름 붙여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마음은 들어간다는 관념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이라 하였다. |
|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
| “불가사의합니다.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가는 일은 마치 싹[苗]이 열매[實]를 맺는 것과 같아서, 들어가는 처소가 없이 본래 뿌리의 이로운 힘에 의해서 이익이 성취되어 본래 것을 얻으니, 본래의 실제[本實際]를 이루었을 때 그 지혜가 어느 정도 되나이까?”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들어가는 지혜의 차별[入智差別]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질문하고 다음에 대답했다. 물음 중에도 먼저 앞에서 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표시한 다음에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
| ‘싹이 열매를 맺음과 같다’라고 한 것은 흡사 곡식의 싹이 이삭이 되어 열릴 때 들어가는 자[能入者]도 없고, 들어가는 곳[所入處]도 없다는 것이다. 여래장(如來識)에 드는 것도 그런 줄 알아야 한다. 싹은 본각(本覺)의 이익을 비유하고 열매는 본각을 얻음을 비유하니 들어가는 때가 평등하여 들어가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 지혜가 무궁하나 간략히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여함을 따르는 정지(定智), 둘째는 방편으로 꺾어 부수는 부정지(不定智), 셋째는 전각(電覺)13)을 제거하는[除電覺:어떤 본에는 ‘慧除電覺’이라고 되어 있다] 열반지(涅槃地),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 도를 구족한 구경지(究竟智)다. |
| 장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일의 작용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이는 큰 다리며 큰 나루니,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이 지혜를 써야 한 |
| 13) 5식(識)이 전광(電光)과 같이 일어남을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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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
| [論] 이것은 두 번째인 대답인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즉 전체적인 표방[摠標], 개별적인 해석[別釋], 전체적인 설명[摠明]이다. |
| 총표(摠標) 중에서 ‘그 지혜가 무궁하다’ 함은 통달한 바가 끝없기 때문에 그 지혜도 무궁하다는 말인데, 비슷한 것끼리 묶어 상대적으로 대략 분류해서 말하기 때문에 단지 넷이 된 것이다. |
| 별현(別顯) 중에 ‘정지(定智)’란 평등성지(平等性智)다. 정관(正觀)에만 있고 방편을 짓지 않기 때문에 정지라고 한다. 말나식[末那識]14)의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대치(對治)하고 평등을 관(觀)함을 따르기 때문에 ‘여여함을 따른다[隨如]’고 하였다. |
| ‘부정지(不定智)’란 묘관찰지(妙觀察智)다. 제6식에 있으면서 방편을 써서 진취(進取)하기 때문에 ‘부정’이라 하였고, 방편도(方便道)를 닦을 때 이름이나 일[名事] 등의 상(相)을 추적하여 꺾어 부수므로 ‘꺾어 부순다[摧破]고 하였다. 이 지혜는 사실상 방편관(方便觀)·정관(正觀)에 다 통하나 다만 정지(定智)와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는 생략하고 방편만을 들었을 뿐이다. |
| ‘열반지(涅槃智)’란 성소작지(成所作智)다. 8상(相)을 나타내어 불사(佛事)를 하는데, 그 마지막 모습을 들어서 열반지라고 부른다. 5식(識)을 없애 이 지혜를 얻으니, 그런 뜻에서 ‘전각을 없앤다[除電覺]’고도 한다. 전각(電覺)이란 5식(識)이 번개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
| ‘구경지(究竟智)’란 대원경지(大圓鏡智)다. 마지막 지위[究竟位]에서만 이 지혜를 얻기 때문에 ‘구경’이라 하는데, 끝까지 밝히지 못한 경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인 실제의 이치에 들어가기 때문에 ‘실제에 들어간다[入實]’ 하였으며, 나타나지 않는 경계가 없으므로 ‘도를 구족한다[具足道]’고 하였다. |
| 다음 총명(摠明) 중에서 ‘네 가지 큰 일의 작용[四大事用]’이라 함은 작용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란 모든 부 |
| 14) 마나스식 즉, 제7식이라고도 하며 의(意)라고도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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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님의 길[道]이 같기 때문이다. ‘큰 다리’란 이 네 가지 지혜로 3승(乘)의 사람들을 태우고 1승(乘)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큰 나루’란 이 네 가지 지혜를 써서 6도(道)를 두루 거쳐가며 세간을 벗어나는 길을 보여 주고, 애욕의 강을 건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화하려는 자는 이 지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
| [經] “장자야, 이 대용(大用)을 쓰는 데도 세 가지 큰 일이 있다. 첫째 세 가지 삼매에서는 안팎[內識·外境]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 것이며, 둘째 대의과(大義科)에서는 도리를 따라 택멸(擇滅)하는 것이며, 셋째 여여한 혜(慧)와 정(定)에서는 자비로 양쪽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보리를 성취시킨다. 이 일을 행하지 않으면 저 네 가지 지혜의 바다로 들어갈 수 없으며, 모든 큰 마구니[大魔]가 틈을 타게 될 것이다. 장자야, 너희들 대중은 성불할 때까지 잠시도 놓치지 말고 항상 닦고 익혀야 한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들어가는 원인이 되는 일과 작용[入因事用]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장행(長行)이고, 다른 하나는 중송(重頌)이다. 장행 중에도 세 부분이 있다. 간략한 설명[略明], 거듭 설명함[重顯], 이해했음을 나타냄[領解]이다. 처음 중에도 전체적으로 표방함[摠標], 개별적으로 해석함[別解], 종합해서 밝힘[合明], 결론을 맺으면서 수행을 권함[結勸] 네 부분이 있다. |
| ‘이 대용을 쓰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네 가지 지혜의 대용(大用)을 가리키는 말인데, 지상(地上)에서 불과(佛果)의 지위까지 해당한다. |
| ‘세 가지 큰 일’이란 능히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하는 일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전(地前)의 4위(四位:信·住·行·廻向)에서 닦는 행(行)이다. 이 세 가지 일[三事]은 정(定)과 혜(慧)와 정·혜가 함께 행해지는 일이며 대비(大悲)를 체(體)로 한다. |
| 먼저 ‘정(定)’이란 세 가지 삼매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서로 다른 많은 설이 있다. 혹은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이라고도 하고, 혹은 무작(無作)·무상(無相)·공공(空空)이라고도 하며, 또 혹은 공(空)·무작(無作)·무상(無相)이라고도 하는데, 편의에 따라 세운 것이라 서로 걸릴 것이 없다. 혹 3해탈(解脫)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오직 무루(無漏)에만 해당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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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가지 삼매라고 부르는 경우는 유루(有漏)에도 통한다.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아래 글에서 설명하겠다. |
| ‘안팎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다’ 함은 내식(內識)15)과 외경(外境)16)이 함께 나타나면서 선택적으로 맞고 안 맞음을 취함으로써 모든 선근(善根)을 서로 빼앗지만, 지금은 모두가 공(空)임을 통달하여 서로 빼앗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
| ‘대의과에서는 도리를 따라 택멸한다’ 함은 4대(大)와 3법문(法門:陰·界·入)에 대해서는 도리[理]에 따라 간택(簡擇:틀린 것을 배제하고 옳은 것을 선택함)하여 모든 상(相)을 깨부숨으로써 본식(本識)의 희론종자(戱論種子:虛妄分別)를 눌러 없앤 것이다. 앞의 삼삼매(三三昧)는 현행(現行)의 번뇌[纏]을 누르는 데 비해, 여기서 말하는 간택의 지혜는 종자(種子)를 누르는 것이니, 이렇게 해서 마침내 4지(智)를 이룰 때 종자를 뽑아내고 8식(識)을 (지혜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
| ‘여여한 혜와 정에서는 자비로 양쪽을 이롭게 한다’ 함은 앞의 혜(慧)와 정(定)이 모두 여여(如如)한 도리에 따르기 때문에 여여한 혜, 여여한 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중에 또 대비(大悲)를 닦는 일이 상응(相應)하여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양쪽을 이롭게 한다[俱利]’고 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대비를 떠나 정과 혜만을 닦으면 2승(乘)의 경지에 떨어지고 보살도(菩薩道)에는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또 가령 자비만 일으키고 정·혜를 닦지 않으면 범부(凡夫)의 고질[患]에 떨어져 보살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를 닦아 양쪽에 치우침을 떠나서 보살도를 닦아야 무상각(無上覺)을 이룬다.(여기까지가 두 번째인 別解에 해당한다.) |
|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보리를 성취시킨다’고 하였다. |
| 이 세 가지를 함께 행하지 않는 자는 생사에 머물고 열반에 집착하여 4지(智)의 대해(大海)에 흘러 들어갈 수 없으므로, 네 가지 마[四魔]가 틈을 타 들어올 수 있다. 이는 셋째로 합명(合明:총표와 별해를 합하여 설명함)에 해당하고, 그 다음 나오는 문장(“장자야, 너희들 대중 ……”)이 수행을 권하는 |
| 15) 자기 주관을 이루는 모든 식(識). |
| 16) 주관적 의식의 대상이 되는 바깥 경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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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勸修]으로서 네 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
|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
| “무엇을 세 가지 삼매라고 하나이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세 가지 삼매란 이른바 공삼매(空三昧)와 무작삼매(無作三昧)와 무상삼매(無相三昧)다.” |
| [論] 여기서부터는 거듭 설명하는 부분[重顯]인데, 두 개의 문답으로 앞의 두 문(門)을 설명하였다. 위 경문은 첫 문을 밝힌 것인데, 이 세 가지 차별에 대략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체용상(體用相)이고, 둘째는 심인과(心因果)이고, 셋째는 식견상(識見相)이다. |
| ‘체용상’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법이 이 세 가지 법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인데, 그 체가 공하므로 공삼매를 세우고, 작용하는 바가 없으므로 무작삼매를 세우고 형상이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세운다. |
| ‘심인과’를 말하는 이유는 인과로 일어나는 것은 심행(心行)에서 일어나기 때문인데, 심행이 공하므로 공삼매를 세우고, 모든 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작삼매를 세우고, 모든 과(果)를 얻을 수가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세운다. |
| ‘식견상’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식[諸識] 자체가 공한 까닭에 공삼매를 세우고, 견분(見分)을 제거하는 까닭에 무작삼매를 세우고, 상분(相分)을 제거하는 까닭에 무상삼매를 세운다. 이는 제3문(第三門)으로 앞에서 ‘안팎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다[內外不相奪]’고 한 글에 맞춘 것이다. |
|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
| “무엇을 대의과(大·義·科)라고 하나이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大)란 4대(大)를 말하고, 의(義)란 음(陰)·계(界)·입(入) 등을 말하고, 과(科)란 본식(本識)을 말하니 이것을 대·의·과라고 한다.” |
| [論] 이는 두 번째 문(門)을 설명한 것이다. 4대를 따로 세운 이유는 처음 닦아 갈 때 먼저 거친 경계를 가려내기 위해서이다. 모든 법 중에 안의 지체(支體) 등과 밖의 산하(山河) 등 색법(色法)이 가장 거칠다. 이런 법들이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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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를 떠나 있지 않음을 관(觀)하며, 이 4대가 방분(方分)을 갖건 아니건 간에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4대를 얻을 수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려내고[簡擇] 난 뒤에 미세한 뜻을 관찰한다. ‘미세한 뜻[義]’이란 음(陰)·계(界)·입(入)을 말하는데,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과 중간 것이 있다. 간략하게 묶어보면 다섯[五蘊]이고, 자세하게 관찰해 보면 열여덟[十八界]이고,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의 중간으로는 12입(入)을 관하는데, 이 모든 것이 얻어질 수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
| 다음에 ‘등(等)’이란, 그 밖의 다른 법문인 12지(支) 등을 가리킨다. 이렇게 간택하여 관찰하는 힘 때문에 본식(本識) 안에 있는 무시(無始) 이래의 희론명언종자(戱論名言種子)17)를 덜어내고 누른다[損伏]. 처음에는 덜고 누르고 하다가 마침내는 끊어 없애므로[斷滅], 앞에서 도에 따라서 택멸한다[隨道擇滅]’고 하였다. |
|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
| “불가사의합니다. 이런 지혜의 일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삼계(三界)의 경지를 넘어서나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게 합니다. 이런 법상은 분별이기 때문에 생멸하는 법이니, 분별을 떠나면 법이 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
| [論] 이는 세 번째, 이해했음을 나타낸[領解] 부분인데 여기에 둘이 있다. 먼저는 관행(觀行)을 이해한 것이고, 다음은 경계(境界)를 이해한 것이다. |
| ‘이런 지혜의 일’이란 이 세 가지가 4지(智)를 성취하는 일과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 함은 앞의 둘[定·慧]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세 번째 것[大悲]은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
| ‘삼계의 경지를 넘어선다’ 함은 앞의 둘, 즉 정(定)과 혜(慧)가 범부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세 번째의 대비(大悲)는 2승(乘)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저 극단을 떠나서 보살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
| ‘이런……’ 이하는 저 경계를 이해했다는 말이다. 처음에 정(定)의 경계가 |
| 17) 명언(名言)에 의한 훈습(熏習)으로 생기는 종자(種子). 일체법이 생하는 직접적인 인연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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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식의 견분과 상분임을 알고, 다음에 지혜의 경계가 대(大)·의(義)·과(科)의 법임을 안다. 이런 모든 법상(法相)은 모두 생멸하는 법이니, 망분별(妄分別)로 말미암아 마음의 바다를 동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고요한 것이라서 분별을 떠난다면 빌미가 될 것이 없으니, 무엇을 근거로 생멸(生滅)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법이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
| [經]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
| 법은 분별로부터 생기고 |
| 다시 분별을 따라 없어지므로 |
| 모든 분별법을 없애면 |
| 이 법은 생멸이 아니다. |
| [論] 여기서부터는 (入因事用을 長行과 重頌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인 중송이다. 이 중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간략히 펴신 게송이고, 둘째는 장자가 자세히 연설한 게송이다. |
| 지금 이 게송에서 말씀하신 ‘법’이란 일심법을 가리킨다. 허망한 분별이 마음바다를 요동시키기 때문에 생하거나 멸하는 모든 모습이 예외 없이 분별에 의해 일어나지만, 만약 본각(本覺)의 본래 고요한 쪽으로 본다면 모든 분별을 떠나 있으므로 이 법은 생하거나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본래부터 모든 분별을 멸해서 생멸할 만한 원인이 없으므로 생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생(生)과 멸(滅)의 관계를 모두 분별이 지어낸 것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유가론(瑜伽論)』의 설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는가? 『유가론』 「사소성지(思所成地)」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남을 멸(滅)하는 작용도 없고, 스스로 멸하는 작용도 없다. 묻겠다. ‘그렇다면 갖가지 연[衆緣]이 있어서 생하고 갖가지 연이 있어서 멸하는가?’ 대답한다. ‘갖가지 연이 있으므로 생겼고, 생겨나서는 저절로 없어진다.’” |
| 두 설이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유가론』에서는 인연(因緣) 도리를, 이 경에서는 유식(唯識) 도리를 설명한 것이므로 두 가지 설에 모두 일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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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그 때 범행장자가 게송을 듣고 매우 기뻐서 그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
| 모든 법은 본래 적멸이요 |
| 적멸 또한 생함이 없나이다. |
| 생멸하는 이 모든 법 |
| 그 법은 무생(無生)이 아닙니다. |
| 저것은 이것과 함께하지 않나니 |
| 단(斷)·상(常)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
| 이것은 양쪽을 떠났으며 |
| 하나에 머물지도 않나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장자가 자세히 펼친 게송이다. 여덟 수로 되어 있는데 (의미상)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 첫째 두 송[1,2]은 앞 내용을 직접적으로 펼친 것이고, 둘째 두 송[3,4]은 그릇된 이해[邪解]들을 깨주는 것이고, 셋째 한 송[5]은 자신이 정확히 이해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넷째 두 송[6,7]은 정설(正說)해 주신 분에게 경례를 하는 것이고, 다섯째 마지막 한 송[8]은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을 말씀해주십사 청한 것이다. |
| 이 게송은 앞 내용을 직접적으로 펼친 첫 번째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 두 구는 앞에서 부처님께서 간략히 펼친 게송 중 뒷부분을 읊은 것이고, 둘째 두 구는 그 앞부분을 읊은 것이다. 셋째 한 송은 이 두 가지 뜻을 전체적으로 연설한 것이다. |
| 첫째에서 ‘모든 법은 본래 적멸’이란 음(陰)·계(界) 등의 법이 본래 적멸하다는 뜻이다. ‘적멸 또한 생함이 없다’ 함은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할 뿐만 아니라, 적멸하다는 도리 역시 생함이 없다는 말이다. |
| 둘째에서 ‘생멸하는 이 모든 법’이란 음·계 등 세속법을 말한다. ‘그 법은 무생이 아니다’ 함은 분별을 따라 동(動)하여 일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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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眞)과 속(俗)이 하나가 아니라는 쪽에서 동(動)과 정(靜)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
| 셋째에서 ‘저것은 이것과 함께하지 않는다’ 함은 생겨남 없는 저 적멸법은 이 생멸법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 ‘단·상에 빠지기 때문’이란, 저 적멸법이 이 생멸법과 함께한다고 주장한다면, 생멸하는 이 법은 단멸에 치우치게 되고[斷邊], 상적(常寂)한 저 법은 상주에 치우치게 된다[常邊]. 이는 2승(乘)의 잘못[過]과 같아서 중도(中道)에 위반되므로 ‘단·상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한 게송의 의미는 단과 상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므로 ‘이것은 둘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동정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하나에 머물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나에 머물지도 않는 이유는, 일실(一實)인 일심(一心)의 성품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을 떠난 이유는 전체가 움직이고 전체가 고요하여 두 개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불가사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
| [經] 법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
| 그 모양은 모륜(毛輸)18)과 같을 것이며 |
|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으니 |
| 모두 다 허망한 것입니다. |
| 법이 없다고 본다면 |
| 이 법은 허공과 같으니 |
| 해가 없다하는 장님의 뒤바뀐 견해라 |
| 법을 거북 털과 같다고 하는 격입니다. |
| [論] 두 송은 둘째, 그릇된 이해들을 깨뜨려주는 말이다. |
| 그릇된 이해가 매우 많지만 크게는 두 가지가 있다. 매우 깊은 부처님의 |
| 18) 눈병 난 사람에게 보이는 헛것. 가느다란 털이 바퀴모양처럼 어른거리듯 하므로 이렇게 표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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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침을 듣고는 문자 그대로를 뜻이라 착각하고 스스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런 이들은 교화하기 어렵다. 첫째 큰 잘못은, 동정무이(動靜無二)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은 하나다, 즉 일실(一實)한 일심(一心)이다’라고 생각하여 2제(諦)의 도리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
| 둘째 큰 잘못은 공(空)과 유(有) 2문(門)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일실(一實)이 있는 게 하니라 2법(法)이 있다’고 생각하여 무이중도(無二中道)를 비방하고 배격하는 것이다. |
| 이 두 가지 그릇된 이해는 약을 먹고 오히려 병에 걸리는 것과 같다. 고치기 어려우므로 지금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밝힌다. 이 두 게송에서 차례로 그것을 설명한다. |
| ‘법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한다’ 함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의 실제[一實]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자기 생각대로 하나의 법[一法]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송했다. ‘그 모양은 모륜과 같을 것’이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일실법의 모습이 눈병 난 사람에게 보이는 모륜(毛輪)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함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 생각하여 쫓아 달려가는 것이 미혹과 전도일 뿐인데, 일심(一心)이 있다는 생각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
| ‘모두 다 허망한 것’이라 함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로 보는 것과 눈병 난 사람이 모륜을 보는 것과 배우는 이가 하나를 있다고 생각하는 등 이런 견해들이 똑같이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
| 다음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無見]를 깨뜨린다. |
| ‘법이 없다고 본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2제(諦)는 있고 일심법(一心法)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법은 허공과 같다’ 함은 그가 생각하는 일심이 공의 이치와 같을 것이며, 그 공리 밖에는 본래 일실(一實)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
| ‘해가 없다하는 장님의 뒤바뀐 견해’란 태어날 때부터 눈 멀고 가난한 거지라서 한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해가 있다고 알려 주어도 없다고 하면서 해가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도(顚倒)일 뿐이다. 저들도 마찬가지로 본래 공(空)과 유(有)만 배우고 무이중도(無二中道)를 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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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적이 없어서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해를 중도(中道)에 비유한 이유는 둥근 해는 원만한 데다 큰 빛이 있어서 눈 먼 사람말고는 다 보기 때문이다. 일심(一心)도 이와 같아서 결함 없이 두루 원만하고 본각과 시각의 큰 빛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 말고는 다 들어간다. |
| ‘법을 거북 털과 같다고 하는 격’이란, 없다는 견해에 빠진 자가 일심법을 두고 ‘이름일 뿐 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마치 거북이 털이 있다고 하는 격이라, 해가 없다고 하는 장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
| [經] 제가 이제 부처님 말씀을 듣고 |
| 법을 2견(見)으로 알지도 않고 |
|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아서 |
| 머묾 없음에서 이해합니다. |
| [論] 이 게송은 셋째로 자기 자신이 정확히 이해했음을 표시한 것이다. |
| ‘법을 2견(見)으로 알지 않는다’ 함은 중도(中道)의 법은 있다, 없다는 견해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는 말이다. 즉 앞 두 번째에서 ‘해가 없다’고 한 전도견을 떠난 것이다. |
|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는다’ 함은 양 극단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중도인 일실(一實)에 머무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견해를 깨뜨려주는 가운데) 첫 번째[8수 중 제3, 제4] 게송에서 비유로 든 눈병 난 사람과 목마른 사슴의 허망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극단에 떨어지는 과실(過失)을 떠났으므로 ‘머물 바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밝혀진 머묾 없는 이치를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머묾 없음에서 이해합니다’라고 하였다. |
| [經]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
| 모두 다 머묾 없음을 따르니 |
| 저도 머묾 없는 곳[無住處]을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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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여래께 예배드립니다. |
| 허공같이 동요하지 않는 지혜이신 |
| 여래의 모습에 예배하나이다. |
| 어느 곳에도 집착 없으신 분 |
| 머묾 없는 그 몸에 예배하나이다. |
| [論] 이 게송은 네 번째로, 설해 주신 분에게 예배를 하는 부분인데 그 중에 세 부분이 있다. |
| 첫째는 설법해 주신 분에게 경례하는 앞의 한 송이고, 둘째는 설법하신 분의 지혜에 경례하는 다음 두 구이고, 셋째는 설법해 주신 분의 몸에 경례하는 마지막 두 구이다. |
| 첫째 설해 주신 분에게 경례하는 부분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 다 머묾 없음을 따른다’ 함은, 부처님의 교법이 머묾 없음에 순종(順從)하기 때문이다. ‘저도 머묾 없는 곳을 따라 이곳에서 여래께 예배드립니다’ 함은 가르침을 듣고 무주처(無住處)에 순종하게 되어, 가장 존중받을 만한 분이 여래임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설하신 분께 이 무주처(無住處)에서 예배하는 것이다. 이 중에 ‘무주(無住)’라고 한 것은 2제(諦)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중간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양 극단을 떠난 것을 말하니, 이런 것을 무주처라고 한다. |
| 두 번째(설법하신 분의 지혜에 경례하는 부분)에서 ‘여래의 모습’이란, 상호(相好)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지(不動智)를 말한다. ‘허공 같이’라 함은 여래의 지혜는 한량없고 끝없어 허공계(虛空界)와 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한 말이다. ‘동요하지 않는다’ 함은 끝없는 3세(世)에 두루 통달했다는 뜻이다. 시간에는 흐름이 있으나 지혜의 작용은 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
| 세 번째(설법해 주신 분의 몸에 경례하는 부분)에서 ‘집착 없다[不着]’ 함은 법신(法身)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도……없으신’이라 함은 중간에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묾 없는 그 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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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하나이다’라고 하였다. |
| [經] 저는 그 어느 곳에서나 |
|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오니 |
| 모든 여래께서는 부디 |
| 저를 위해 상법(常法)을 설해 주소서. |
| [論] 이는 다섯 번째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묻는 대목이다. 그 중 앞부분에서는 항상 여래를 뵙는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상법(常法)을 말씀해주십사 청하였다. |
| 스스로 말한 부분은 자기가 모든 극단을 떠나 머묾 없는 지혜를 얻었으므로 하나하나의 미진(微塵) 중에 항상 시방세계의 무량한 부처를 뵈오며, 시방세계의 모든 미진 중에서 무량한 부처를 보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오니’라고 하였다. |
| “일미진(一微塵) 중에 두루 무량한 부처님을 뵈옵고, 그 일미진 중에서와 같이 일체진(一切塵) 중에서도 그러하다”고 한 『화엄경』의 말씀과 같다. 그러므로 이런 힘이 있어야 상법(常法)을 들을 만하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실 상법을 듣고자 한 것이다. |
| [經] 그 때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 “선남자들아, 너희들은 잘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상법을 설하리라.” |
|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19), 입과상법(入果常法)인데, 이 중에 셋이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설하는 부분, 둘째는 장자가 부연하는 부분, 셋째는 대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이다. 첫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말해주겠다고 허락하는 부분과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위 문장은 허락에 해당한다. |
| 19) 무량한 법이 여래장에 들어감을 설하는 『여래장품(如來藏品)』은 크게 제법과 제행이 한곳에 들어감을 밝히는 대목[諸法諸行同入一處]과 들어가는 행과 들어가는 지혜의 인과차별을 밝히는 대목[入行入智因果差別]으로 나뉜다. 후자는 다시 입행차별(入行差別), 입지차별(入智差別), 입인사용(入因事用), 입과상법(入果常法)의 넷으로 나뉜다. |
| [219 / 263] 쪽 |
| [經] “선남자야, 상법(常法)은 상법이 아니어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치[諦]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로 나타난 것도 아니어서, 모든 망집(妄執)과 단견(斷見)의 경계를 떠났다. 이 법은 무상(無常)이 아니므로 모든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떠난 것이다. 모든 식(識)을 투철하게 보면 상(常)이 되나니, 이 식(識)은 항상 적멸하며, 적멸이라는 그것도 적멸하다.” |
| [論] 이 아래는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상과(常果)를 설명하고, 다음에 상인(常因)을 보여 준다. 먼저 상과를 설명하는 가운데 두 구절은 법상(法常)과 불상(佛常)을 말하고 있다. |
| 처음 중에 ‘상법은 상법이 아니라’ 함은, 부처님이 스승으로 삼는 법신의 체(體)는 생멸상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라 하고, 상주성(常住性)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 아니라’ 하였다. |
|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설명하는[能詮] 명언(名言)을 끊었기 때문이고, ‘이치[諦]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라’ 함은 설명될[所詮] 실의(實義)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로 나타난 것도 아니어서 모든 망집(妄執)과 단견(斷見)의 경계[際]를 떠났다’ 함은 아예 없는 것[畢竟無:토끼 뿔 같은 것)도 아니며,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경계가 있지 않으므로 망집의 경계를 떠났으나, 무가 아니므로 단견의 경계를 떠난 것이다. ‘제(際)’는 경계의 다른 이름이다. |
| ‘이 법은 무상이 아니므로 모든 상견과 단견을 떠난 것이라’ 함은 무상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단견을 떠났으나, 이 법 때문에 모든 상견을 떠난다. 상견이 취한 바는 이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법상(法常)을 밝혔다. 다음에는 불상(佛常)을 드러낸 부분이다. |
| ‘모든 식을 투철하게 보면 상(常)이 된다’ 함은 그 상법을 남김없이 보아서 완전히 보았을 때 모든 식(識)이 항상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무명을 따라 본래 고요한 마음이 동요했지만 지금 투철히 봄에 따라서 본래의 고요함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식은 항상 적멸하며’란 모든 식은 본래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생멸이 없기 때문에 성(性)이 항상 적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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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다는 뜻이다. 지금 똑똑히 보아서 그와 같은 적멸한 식(識)이 영원히 없앴으므로 ‘적멸이라는 그것도 적멸하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저 적멸식(寂滅識)이 무상한 법이므로 저것을 없앨 때 항상함을 얻기 때문이다. 이하 「총지품(總持品)」에 이르기까지 이 뜻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
| 또 본래 적멸한 이 성품은 항상성[常性]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적멸하다’고 하였다. |
| [經] “선남자야, 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는 마음을 적멸하게 하지 않으니 마음이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적멸을 얻은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되게 관한다.” |
| [論] (常果를 설명한 데 이어서) 여기서부터는 상인(常因)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인 설명[別明]과 전체적인 결론[摠結]이다. 별명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진증관(眞證觀)이고, 둘째는 방편관(方便觀)이다. |
| 첫째 중에 ‘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함을 알기 때문이다. 일어남이 없음을 이미 알기 때문에 마음을 없애지 않는다. 마음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적멸하기 때문인데, 이는 알아야 할 것[所知]이 적멸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
| ‘적멸을 얻은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되게 관한다’ 함은 증득하는 마음[能證心]이 상주(常住)하여 증득할 도리[所證理]에 순응하므로 생멸하는 모양을 떠나 항상 진조관(眞照觀)을 잃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
| [經] “(적멸을 얻은 자는) 모든 명색(名色)이 다름 아닌 어리석은 마음임을 안다. 어리석은 마음의 분별로 모든 법을 분별하므로 명색말고는 다른 것이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법(法)이 이런 줄 알아서 문자와 언어를 따르지 않으며, 모든 마음을 오직 뜻[義]에 두어서 나[我]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
| [論] 둘째로 방편관을 밝힌 가운데도 둘이 있다. 먼저 유식(唯識)의 심(尋) ·사(思)를 설명하고, 다음에 그 여실(如實)한 지혜를 나타낸다. |
| 첫째 중에 ‘명색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한 데서 명(名)은 4온(蘊)을 말하고, 색(色)은 색온(色蘊)인데, 모든 불상응[不相應行法]은 다 임시로 세운 것[仮立]이라서 이 명색을 떠나서는 별도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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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위(有爲)의 사태들은 다 명과 색에 속한다. 이런 모든 법은 오직 한마음이 만든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면 경계도 없고, 경계를 떠나면 마음도 없다. 이러한 것을 유식(唯識)의 심사(尋思)라 한다. |
| 『화엄경』에서는 이 뜻을 이렇게 말한다. “마음은 화가처럼 갖가지 5음(陰)을 그려낸다. 일체 세간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마음이 그렇듯 부처도 그렇고, 부처가 그렇듯 중생도 그러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
| 여기까지 심사(尋思)를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여실지(如實智)를 나타낸다. |
| ‘법이 이런 줄 알아서 문자와 언어를 따르지 않는다’ 함은 명언(名言)의 심사(尋思)로 이끌어지는 여실지이고, ‘모든 마음을 뜻에 두어서 나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함은 뜻[義]의 심사로 이끌어지는 여실지이다. 인아(人我)·법아(法我) 두 가지가 모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방편관을 닦는 중에) 그것들을 분별하지 않는다. |
| [經] “나라는 것이 가명(仮名)임을 알면 적멸을 얻을 것이며, 적멸을 얻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을 것이다.” |
| [論] 이는 두 번째, 앞 두 가지를 전체적으로 결론지은 부분이다. 앞의 방편관(方便觀)으로 진관(眞觀)을 얻는 것을 결론짓고, 또 진관으로 보리과(菩提果)를 얻음을 결론지은 것이다. |
| [經] 그 때 범행장자가 이 말씀을 듣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
| 명상(名相)과 분별사(分別事) |
| 그리고 법(法)이 셋이 되며 |
| 진여(眞如)와 정묘지(正妙智)가 |
| 저것과 다섯을 이루나이다. |
| 제가 지금 알기로 이 법들은 |
|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묶인 것이라 |
| 생멸하는 길에 들어 있으므로 |
| [222 / 263] 쪽 |
| 이는 단(斷)이며 상(常)이 아니오나 |
| 여래께서 말씀하신 공(空)한 법은 |
| 단견과 상견을 멀리 떠났나이다. |
| [論] 이 글은 (入果常法을 如來說, 長者演, 大衆得益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로 장자가 연설한 부분이다. 도합 여덟 송(頌)으로 되어 있는데, 세 가지 뜻으로 나뉜다. 첫 두 송 반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가름한 것이며, 다음 다섯 송은 양 극단에 치우친 집착을 깨뜨린 것이며, 마지막 두 구는 무이관(無二觀)을 나타낸 것이다. |
| 처음 가운데 둘이 있으니 앞의 두 송은 양 극단에 떨어진 교리를 밝힌 것이 고, 뒤의 두 구는 양 극단을 떠난 교리를 나타낸 것이다. |
| 처음 가운데 ‘명상(名相)’은 명(名)과 구(句)와 자(字)를 말한다. 구(句)란 명(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자(字)란 명(名)이 의지하는 것인데, 모두 명(名)을 나타내주므로 ‘명상’이라고 통칭한 것이다. ‘분별사’란 모든 유루(有漏)의 마음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법의 사건[心法事]을 말한다. ‘그리고 법’이란 앞의 둘을 제외한 모든 법상으로서, 명구(名句)로 나타내지거나 분별의 연(緣)이 되는 것이다. 즉 10색처(色處)와 법처(法處) 중의 색과 불상응 등 모든 법상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같은 부류지만 잡염상(雜染相)을 밝히기 위해 셋으로 나누어 따로따로 설명하였다. |
| ‘진여(眞如)’란 정지(正智)의 경계를, ‘정묘지(正妙智)’란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를 말한다. ‘저것과’는 ‘저 앞의 셋과’라는 말이니, 이 뒤의 둘과 저 앞의 셋을 합하여 다섯 가지[五事]가 된다. 이는 삼승교(三乘敎)의 교문(敎門)에서 말한 법상(法相)을 열거한 것이다. |
| ‘제가 지금 알기로는 이 법들은 단견과 상견에 묶인 것이라’ 함은 저 교문에서 말한 다섯 가지가 단견과 상견의 집착에서 떠나지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저 네 가지 법[진여를 제외한 나머지]은 생멸하는 모양을 띠고 있어 단견(斷見)으로 집착하는 경지를 떠나지 못하고, 진여법은 상주하는 성품이라고 하여 상견(常見)으로 취하는 경지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멸하는 길에 들어있다’고 하였다. ‘이는 단이며 상이 아니라’ 함은, |
| [223 / 263] 쪽 |
| 앞의 셋과 정지(正智)의 법은 다 4상(相:生·住·異·滅)을 띠고 있어 생멸의 길에 들어가므로 상변(常邊)과는 다른 단변(斷邊)임을 구별하고, 그럼으로써 진여(眞如)가 언제나 있다고 하는 길[常有道]에 들어가므로 단변과 다른 상변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
| ‘여래께서 말씀하신 공한 법은 단견과 상견을 멀리 떠났나이다’ 함은 일승(一乘)의 교설인 3공(空)의 법이 단·상 두 극단에 치우친 과실을 멀리 떠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에서 말했듯이 공상(空相)도 공하고, 공공(空空) 역시 공하고, 소공(所空)도 공하다는 이러한 3공은 진(眞)·속(俗)을 파괴하지 않고 그렇다고 진·속을 존립시키지도 않으며, 동(動)·정(靜)을 떠났으나 중간에 머물지도 않아서 단변과 상변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이다. |
| [經] 인연은 없는 것이라 나지 않으니 |
| 나지 않으므로 멸하지도 않나이다. |
| 인연을 유(有)라고 고집하는 것은 |
| 허공에서 꽃을 따려는 격이며 |
| 석녀(石女)에게 아이를 기대하는 격이라 |
| 결국 얻을 수 없으리이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양 극단에 치우친 집착을 깨뜨리는 말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 네 송은 유변(有邊)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둘째 한 송은 공변(空邊)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대목이다. |
| 첫째에도 둘이 있으니 앞의 두 송 반은 저 유(有)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뒤의 한 송 반은 저 진공(眞空)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 가운데 또 둘이 있으니 처음 한 송 반은 인연(因緣)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다음 한 송은 나머지 세 가지 연[三緣]을 깨뜨린 것이다. |
| 처음 가운데 ‘인연은 없는 것이라 나지 않는다’ 함은 무슨 뜻인가? 본식(本識) 중의 모든 종자는 이숙식(異熟識)과 붙어있든[卽] 떨어져 있든[離] 다 얻을 수 없다. 붙어 있다면 이숙(異熟)과 같을 것이며, 떠나 있다면 토끼 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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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붙어 있지도 않고 떠나 있지도 않다고 해도 역시 있는 것이 아니니, 병(甁)이나 집 등과 같이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생(生)함도 멸(滅)함도 없는 것이지만 3승(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자들은 실제로 인연종자가 있다고 고집한다. 이들은 허공에서 꽃을 따려고 하거나 석녀(石女)에게 아이 낳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인연’을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중에 허공에서 꽃을 따려한다는 것은 물든 종자를 따서 없애려 함을 비유하고, 석녀에게 아이를 바란다는 것은 깨끗한 종자를 얻어서 기르려 함을 비유한다. |
| [經] 모든 인연을 취하는 일에서 떠나고 |
| 다른 것[他]을 따라서 멸하지도 않으며 |
| 자체인 의(義)와 대(大)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 |
| 여(如)에 의하기 때문에 실(實)을 얻습니다. |
| [論] 이는 나머지 세 가지 연을 깨뜨린 것이다. 모든 종자의 인연이 있다는 생각은 떠났으나 다른 세 가지 연(緣)으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하면서 집착을 하면 그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다. 경(經)에서 “타(他)에 따라서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한 ‘타(他)’란 증상연(增上緣)과 소연연(所緣緣)을 가리킨다. |
| 가령 눈[眼]에 의지하고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길 때, 이러한 눈과 색은 식과 동시적이기는 하지만 식성[識]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타(他)’라고 한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은 비록 식의 부류이기는 하지만 체(體)가 이미 없으므로 멸(滅)이라고 한다. ‘타(他)’니 ‘멸(滅)’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다. 그러므로 식(識)은 저것들을 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
| 다음으로 ‘자체인 의와 대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及於己義大]’라 함은 무슨 뜻인가? 다음과 같이 잘못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온(蘊)·계(界) 등의 법은 미래세 중에 각각 자기 체(體)가 있으나 아직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이 자기 체로부터 현재세에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이러한 잘못된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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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을 막기 위하여, 자체의 의(義)와 대(大)를 따라 나오는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위 구절에 나오는 ‘따르지 않는다[不從]’는 말이 여기까지 걸린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는 음(陰)·계(界)·입(入)을, 대(大)란 4대(大)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법들이 본래 자체(自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자체인 의와 대[己義大]’라고 하였다. |
| ‘여에 의하기 때문에 실을 얻는다’ 함은 (범행장자) 자신이 여여한 도리에 의해 유에 대한 모든 집착을 깨뜨렸기 때문에 실의(實義)를 얻었다는 뜻이다. |
| [經] 그러므로 진여의 법은 |
| 항상 자재하고 여여(如如)하지만 |
| 온갖 모든 만법은 |
| 여여가 아닌 식(識)이 변화해낸 것이라 |
| 식을 떠나면 그 법이 공(空)하므로 |
| 공한 곳으로부터 설하나이다. |
| [論] 이는 진공법(眞空法)을 나타낸 것이다. |
| ‘그러므로’는 앞에서 유(有)에 집착하는 것 모두가 허망하여 그것을 깨뜨리는 자만이 실(實)을 얻기 때문에 한 말이다. 진여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망법(妄法)이 성립되지 않는다. |
| ‘식이 변화해낸’이란 식(識)이 이리저리 생각해내는[計] 것을 말한다. 그렇게 생각해낸 상[所計相]은 이치상[理]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망정[情]에 따라 있는 것이기에 ‘변화해낸 것[所化]’이라고 한다. 모든 법은 진여가 아니라 식이 변화해낸 것이기 때문에, 식을 떠난 법은 공(空)하고 무소유(無所有)하므로, 체가 공한 곳으로부터 진여를 설한다고 하였다. |
| [經] 생멸하는 모든 법을 멸하고 |
| 열반에 머물지만 |
| 대비(大悲)가 그것을 빼앗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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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반이 사라져 머물지 않게 하고 |
| [論] 앞글에서 이미 유(有)에 대한 범부(凡夫)의 집착을 깨뜨렸으므로 이번 게송에서는 공(空)에 머무는 2승(乘)의 집착을 빼앗는다. 2승을 닦는 사람들은 육신과 지혜가 생멸하는 모든 법을 없애버리고 열반에 들어 8만겁(萬劫)을 거기 머물고, 내지 10천겁(千劫)을 머문다. 모든 부처님의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저들의 열반을 빼앗아 마음을 다시 일으키게 하니, 마음을 일으킬 때 열반이 사라진다. 마치 큰 상인이 환술로 지어낸 성[化城]을 없애고 다시는 그 안에 머물지 않듯이. 그들이 무심(無心)일 때는 바로 깨뜨릴 수가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들이 저들의 열반을 빼앗음을 나타냈다. 그렇게 하여 아직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뜻을 막았다. |
| 여기까지 해서 유(有)·무(無) 극단에 떨어지는 것을 깨뜨리는 말씀이 끝났다. |
| [經]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전변하여 |
| 여래장(如來藏)에 들게 하나이다. |
| [論] 이는 셋째로 무이관(無二觀)을 보여준 것이다. 이미 범성(凡聖)이 가지는 두 극단에 대한 집착을 없앴으므로 이번에는 저 범성(凡聖) 두 부류들을 능(能)·소(所)가 평등한 관(觀)에 들게 한 것이다. 위의 여덟 송이 장자(長者)가 연설한 부분이다. |
| [經] 그 때 대중이 이러한 뜻을 듣고 모두 정명(正命)을 얻어 여래와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
| [論] 이는 (入果常法을 셋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대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大衆得益]이다. |
| ‘정명을 얻었다’ 함은 유·무의 극단을 떠나고 중도(中道)의 바른 혜명[正慧命]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래에 들어갔다’ 함은 이미 부분적으로 여래의 지혜[如來智]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함은 본각의 깊고 넓은 뜻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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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총지품(摠持品) |
| [論] 이 품(品)에서는 앞의 여러 품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하여 요점을 잃지 않고 다 지니게[摠持] 하기 때문에 「총지품(總持品)」이라 하였다. |
| 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이미 문의다라니(文義陀羅尼)를 얻었으므로 모든 품(品)에 나온 글 뜻을 총지하고, 대중이 의심 낸 곳을 기억하여 차례로 물어서 모든 의심을 잘 해결해주므로, 묻는 이를 기준으로 이 품을 ‘「총지품」’이라 하였다. |
| [經] 그 때 지장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이르러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
| “존자(尊者)시여, 제가 보기에 대중들은 마음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여래께서 의심을 제거해주시려 하니, 제가 대중을 위해 의심나는 대로 묻겠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 불쌍히 여겨 부디 허락하소서.”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마하살아, 네가 이렇게 중생을 구제하려고 하니, 이것은 대비(大悲)로써 그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 불가사의하다. 너는 자세히 물어라. 너를 위해 말해주겠다.” |
| [論]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둘로 나누었고, 그 중 하나인 각각의 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부분[別明觀行]이 앞에서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정설분 중 두 번째로 모든 의문을 총괄적으로 해결하는 부분[摠決諸疑]이다. |
| 이 중에도 넷이 있는데 청하는 부분[請], 허락하는 부분[許], 의심을 해결하는 부분[決], 이해하는 부분[領]이다. 위 경문에 나오는 문답은 청함과 허락함이다. 여기서 청하는 사람은 지장보살이다. 이 사람은 이미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얻었으므로, 대지[地]가 초목을 키우듯 모든 중생의 선근(善根)을 다 키우고 자라게 한다. 다라니로써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큰 보배 창고[藏]에 진귀한 보배가 끝없듯이 모든 중생에게 끝없이 은혜를 베푼다. 이러한 두 가지 뜻을 따서 그의 이름을 ‘지장(地藏)’이라 한다. 지금 이 품(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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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는 모든 의혹을 해결하여 온갖 믿음과 이해를 생기게 하고, 의심을 풀고 번뇌를 끊는 모든 보배를 꺼내서 법을 구하는 대중에게 베풀므로 뜻이 그의 이름과 맞기 때문에 그가 등장해서 청하고 물은 것이다. |
|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모든 법은 어찌하여 연(緣)으로 생기지 않습니까?” |
|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설하셨다. |
| 만약 법이 연으로 생긴 것이라면 |
| 연을 떠나서는 법이 없으리라. |
| 법의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
| 연(緣)이 법을 생할 수 있으랴. |
|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갖가지 의심을 정면으로 결단하는 부분이다. |
|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6품(品)에서 일어난 여섯 가지 의심을 역순으로 결단하고, 둘째는 한 품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의심을 순서대로 결단한다. |
| 첫째 가운데 또 둘이 있으니, 첫째는 따로 결단하는 것이고, 둘째는 전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처음 따로 결단하는 중에서는 여섯 품의 여섯 가지 의심을 따로따로 결단하는데, 뒤에서부터 앞으로 점차 거슬러 올라가는 차례로 한다. 지금 이 문답은 「여래장품」에서 일어나는 의문을 결단한 것이다. |
| 「여래장품」에서 ‘인연은 없는 것이라 생기지 않으니, 생기지 않으므로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생기게 하는 인연이 있다고 집착하여, 그 과(果)가 어떻게 인연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이가 있으므로, (지장보살이) 저들의 의심에 따라 연생(綠生)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여래께서는 한 게송으로 이 의심을 바로 결단했다. |
| 이 게송 중 위의 반은 그들의 본래 고집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아래 반에서는 그 여세를 타고 연으로 생긴다는[緣生] 견해를 깨뜨렸다. 그렇게 하신 의도는 연(緣)이 법(法)을 생(生)하지 않는다고 하면, 토끼 뿔 같은 무법(無法)을 기대하겠기에, 이와 같은 비량(比量)으로 저들의 의심을 결단해준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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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
|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법이 만약 생기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법을 설하되 그 법이 마음에서 생긴다고 하십니까?” |
| 이에 존자(尊者)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
| 마음에서 생긴 이 법, |
| 이 법은 능취와 소취이니 |
| 취(醉)한 눈에 보이는 헛꽃과 같아라. |
| 이 법도 그러하여 저것과는 같지 않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진성공품(眞性空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결단한 것이다. 「진성공품」에서 “내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너희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가 법을 설한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저 글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 설하는 그 법이 부처님의 마음에서 생기고 있는데, 어찌하여 법이 무생(無生)이라고 하시는가?”라는 의문을 낼 수가 있다. 이러한 의문을 제거하기 위하여 게송을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의심을 단도직입적으로 떨쳐주는 부분[直遣]이고, 둘째는 거듭 결단해주는 부분[重決]이다. 첫 게송은 직견이다. |
| ‘마음에서 생긴 이 법, 이 법은 능취와 소취’라 함은 지금 너희들이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긴 법’이란, 마치 술 취한 눈에 보이는 헛꽃과 같이, 단지 망심(妄心)이 취하는 것[能取]과 그 대상[所取]이라는 것이다. |
| ‘이 법도 그러하여 저것과는 같지 않다’ 함은 너희가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긴 법’은 저 헛꽃과 같은데, 이 법도 그러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아니며, 너희가 생각하는 생함[生]과 같다는 말씀이다. |
|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너희가 생각하는 법은 헛꽃과 같이 (망심에 의해) 취해진 바이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반면, 내가 설하는 법은 말과 생각이 끊어져서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
| [230 / 263] 쪽 |
| 있다. |
|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법이 그렇다면 그 법은 상대가 없을 것이며[無待], 상대가 없는 법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겠나이다.” |
|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설하셨다. |
| 법에는 본래 유무(有無)가 없고 |
| 자타(自他)도 그러하다. |
| 시작도 아니요, 또한 끝도 아니며 |
| 성패(成敗)가 머무르지 않느니라. |
| [論] 이는 (첫 번째 直遣에 이어) 두 번째 거듭 결단해주는 부분[重決]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따져 묻고[難], 다음에 의심을 결단[決]한다. |
| 따져 묻는 의도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언교(言敎)의 법이 소취(所取)가 아니기 때문에 헛꽃과는 달리 아예 없는 것[畢竟無]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법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 상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진여(眞如)와 같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
| 이와 같은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게(偈)를 설하셨다.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설한 법은 명언(名言)을 끊었으므로 그 법에 본래 있고 없음, 자기와 남, 시작과 끝이 없다. 이루어짐에나 무너짐에나 머물지 않는데, 어떻게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
| 이는 논란하는 자가 든 이유[因]가 자기주장을 증명하는 데 맞지 않는 오류[相違過]를 범했음을 드러낸다. 무슨 말인가? 법에는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없다.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소취가 없는 것과 같이, 또는 진여와 같이. 이와 같은 도리로 저 논란은 성립되지 않는다. 논란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의 심했던 바가 해결되었다. |
|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모든 법의 모습은 본래 열반이며, 열반과 공상(空相)도 그러하여 이러한 법들이 없으니 그 법이 여여할 것입니다.” |
| [231 / 263] 쪽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이러한 법이 없으니 그 법이 여여하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입실제품(入實際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하는 글이다. 「입실제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 대력보살(大力菩薩)이 “중생의 심상(心相)은 여래(如來)와 같으므로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혹 이 글을 보고 이런 의심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다. ‘본래 깨끗한 마음이란 바로 이치와 같다[如理]. 본래 청정한 자성열반(自性涅槃)이거늘, 열반을 또 공하여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그릇된 무[邪無]가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의심을 몰아내기 위해 모두 여여하다고 말씀하셨다. |
| 글에 네 부분이 있다. 묻고[問], 허락하고[許], 이해하고[領解], 결론짓는[述成] 부분이다. 첫째, 묻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공(空)의 이치로 본다면 모든 법의 모양은 본래 청정한 열반이다. 다시 열반과 그 공한 모양을 융합하면 열반과 공(空)의 차별이 없어져 일미법이므로 이 법은 여여한 것이리라’ 이렇게 고집하는 것에 반론을 펴기 위해 물음을 던진 것이다. 둘째, 답에서는 물은 그대로라고 허락을 하신다. |
|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불가사의하나이다. 이와 같이 여여한 모양은 함께하는 것[共]도 함께하지 않는 것[不共]도 아니며, 뜻으로 취한 것[意取]과 업으로 취한 것[業取]이 모두 공적(空寂)하며, 공적한 마음법은 구취(俱取)·불구취(不俱取)도 적멸할 것입니다.” |
| [論] 이는 셋째로 지장보살이 이해한 부분인데, 숨은 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한 말이다. 혹시 앞 설명을 듣고 이렇게 따질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본래 열반(涅槃)이 이미 일여(一如)한데, 만약 열반과 그 공상(空相)을 융합하면 제2의 여(如)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여(如)가 함께하는가, 함께하지 않는가? 함께 한다면 두 개가 병립하므로 여여한 이치가 아닐 것이며, 함께하지 않는다면 오직 하나의 여(如)이기 때문에 공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
| [232 / 263] 쪽 |
| 것이다’라고. |
| 이런 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함께 하는 것도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함은 두 가지 여[二如]가 없기 때문이며,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 함은 둘 다 없애기 위해서이다. 없앤 것은 둘이지만 없앤 곳은 둘이 없다. 그러므로 저들의 논란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
| ‘뜻으로 취한 것과 업으로 취한 것이 모두 공적하다’함은 둘 다 없앴으나 없앤 곳은 둘이 없음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뜻으로 취함[意取]’이란 열반을 가리킨다. 적멸을 연하는 마음으로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업으로 취함[業取]’이란 생사를 말한다. 모든 번뇌의 업으로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하니, 공적하여 둘이 없다. |
| ‘공적한 마음법은 구취(俱取)·불구취(不俱取)도 적멸할 것이라’ 함은, 일심법 역시 그 하나를 고수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생사와 열반은 공적하여 둘이 없으니 둘 없는 곳이 바로 일심법이다. 일심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 그러나 두 문을 동시에 취한다면 둘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심(心)을 얻을 수 없다. 두 문을 폐기하여 다 취하지 않는다 해도 무(無)는 심이 아니기 때문에 심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뜻에서 둘 없는 마음법은 동시에 취하는 것과 동시에 취하지 않는 것에서도 적멸하다. |
| [經] 이 때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
| 공적한 모든 법, |
|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으니 |
| 저 마음이 공하지 않을 때 |
| 마음이 있지 않음을 얻는다. |
| [論] 이는 네 번째, 여래가 결론짓는 부분이다. |
| ‘공적한 모든 법’이란 생사와 열반의 모든 공적한 법을 말한다.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다’ 함은 둘 아닌 심법은 아예 없는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바로 그 때 마음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
| [233 / 263] 쪽 |
| 된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구취와 불구취가 모두 적멸일 것이라’한 말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
| [經] 이 때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
| “이 법은 3제(諦)가 아니니 색이 공하고 심도 적멸합니다. 이 법[색법·심법]이 본래 적멸해 있을 때 이 법[본각]도 적멸할 것입니다.” |
| 그러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
| 법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
| 저것(본각)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 |
| 이런 곳에는 |
| 저런 것이 있지 않네. |
| [論] 이는 네 번째 결단으로서 「본각리품(本覺利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풀어준 부분이다. 「본각리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모든 경계가 공하며, 모든 몸이 공하며, 모든 식(識)이 공하다면 각(覺)도 공해야 할 것입니다”하자, 부처님께서 “일각(一覺)이라고 할 만한 것은 훼손되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공도 아니고 공 아닌 것도 아니어서, 공이다 불공이다 할 것이 없다”라고 하셨다. 이 글을 빌미로 거기에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일심 역시 있는 것이 아니라서 적멸하다면, 어째서 앞에서는 일각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색(色)과 심(心)의 공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는가?’라고. 여기서는 이렇게 의심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져 본 것이다. |
| ‘이 법은 3제가 아니라’ 함은 앞 게송에서 ‘일심법은 색·심과 같은 식으로 공한 것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3제(諦)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제의 문(門)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제(色諦)와 심제(心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둘째는 유제(有諦)와 무제(無諦)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다. 셋째는 이 품(品) 중 뒤의 글에서 설한 것과 같다. |
| 지금 묻는 뜻은 이 세 가지 중 첫째 문에 의거하고 있다. |
| [234 / 263] 쪽 |
| ‘색이 공하고 심도 적멸하다’ 함은 이 법[一心法]이 이미 3제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상(色相)이 본래 공하고 심(心)도 적멸(寂滅)이므로 이 색법과 심법이 본래 적멸할 때 일심법도 마땅히 적멸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게송에서 ‘마음이 있지 않다’고 했으므로 곧 앞에서 말한 ‘공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은 헛된 말이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의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물리치기 위해 이 게송에서는 그것과 같지 않음을 밝혔다. |
| ‘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 함은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이 본래 자성이 없다는 말이다. ‘저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 함은 저 본각(本覺)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란 뜻이다. 생긴 색과 심은 차별상(差別相)인데 저 본각의 마음은 형상과 성품을 떠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차별된 곳에는 저렇게 형상을 떠난 일각(一覺)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색과 심의 차별상을 공(空)하게 할 때, 형상을 떠난 일각마저 같이 쫓아버릴 수는 없다. 이러한 도리로 보건대 앞에서 한 말은 헛말이 아니다. |
|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모든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면 어째서 동일하지 않나이까?” |
|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
| 법이 머무는 곳은 아무데도 없으며 |
| 상(相)과 수(數)는 공하므로 없는 것이다. |
| 명(名)과 설(說), 이 두 가지와 법은 |
|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니라. |
| [論] 이것은 다섯 번째, 「무생행품(無生行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한 것이다. 「무생행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연(緣)이 일어난다[起]고 해서 생하는 것도 아니고, 연이 없어진다[謝]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다. 존재가 처소를 갖는 것이 아니라서 머무는 것을 보지 못하니, 결정성(決定性)이기 때문이다. 이 결정성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 글을 보고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색(色)·심(心) 등의 법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평등하고 결정한 실성(實性)이다. 이는 횡적으로 색·심의 차이가 없고, |
| [235 / 263] 쪽 |
| 종적으로 생·멸의 구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차이가 없고 구별이 없다면 일미(一味)로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마땅하겠지만 어째서 동일하지 않다고 하느냐?’하는 의심이다. |
| 송(頌)에서는 이에 대하여 동일하지 않다는 뜻을 나타낸다. |
| ‘법이 머무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함은 모든 법의 머묾과 머무는 곳이 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 ‘상(相)과 수(數)는 공하므로 없는 것’이라 함은 색심(色心) 등의 상(相)과 일이(一異) 등의 수(數)가 다 공하므로 없다는 것이다. 상과 수가 이미 없는데 어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또 색(色)이 없으므로 심상(心相)도 없다. 이미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가? 그런데 ‘명(名)과 설(說) 두 가지와 설한 법이 있다’는 것은 취하는[能取] 망심(妄心)이 취한 것[所取]이지 여실한 뜻[實義]에서 하나니, 둘이니 하는 것이 아니다. ‘명(名)과 설(說)’이라 한 데서 명(名)은 설명하는 기능[詮用]으로서 의식(意識)이 취하는 것이며, 설(說)은 말소리[語聲]로서 이식(耳識)이 요별하는 것이다. 하나라고 하자니 이 두 가지가 있고, 그 가운데 설명되는[所詮] 법도 있다. 이와 같은 수(數)는 망심(妄心)이 취하는 것이지 저 실의(實義)에 이러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가운데 일미(一味)가 있겠는가? |
|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모든 법상(法相)은 양쪽 언덕[二岸]에 머물지 않으며, 중류(中流)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심식(心識)도 그러하다면 어째서 모든 경계가 식으로부터 생긴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식이 무언가를 생겨나게 한다면 이 식도 무언가로부터 생겨난 것일텐데 어떻게 무생(無生)의 식이 무언가를 생겨나게도 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하겠습니까?” |
|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
| 소생(所生)과 능생(能生) 두 가지는 |
|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라 |
| 모두 본래 이름뿐이요 자성(自性)이 없으니 |
| 있다고 취(取)하면 헛꽃이나 허깨비니라. |
| [236 / 263] 쪽 |
| 식(識)이 생기기 전에는 |
| 경계도 그 때는 생기지 않고 |
| 경계가 생기기 전에는 |
| 그 때는 식 역시 멸해 있다. |
| 저 두 가지 다 본래 없는 것이라 |
| 있게 하지 못하며 생하게 하지 못한다. |
| 생함이 없으니 식도 없는데 |
| 어떻게 경계가 그것을 따라 있으랴. |
| [論] 이것은 여섯 번째 「무상법품(無相法品)」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한 부분이다. 그 품(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엇이 생멸려지(生滅慮知)의 모양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이치에는 가부(可不)가 없다. 만약 가부가 있다면 갖가지 망념[念]이 생기는 것이니, 천사만려(千思萬慮)가 바로 생멸(生滅)의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뒤의 말을 근거로 저 말에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만약 식(識)이 가부의 경계를 생기게 하고 경계의 모양이 다시 여러 가지 망념의 식을 생기게 한다면, 심식(心識)에 생멸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양쪽 언덕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가? 모든 심식이 생함도 멸함도 없다면 어떻게 모든 식(識)이 경계를 생기게 하는가?’ 이러한 의심에서 위와 같이 물은 것이다. |
| ‘양쪽 언덕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기 때문이다. ‘중류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하나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식(心識)도 이와 같아서 생하고 멸함이 없는데, 어떻게 식에서 생겨나는 가부의 경계가 있다 하겠는가? 만약 식이 경계를 생기게 한다면 식도 경계로부터 생겨날텐데, 어떻게 무생(無生)의 식이 (경계를) 생기게 하고 (경계로부터) 생겨나겠는가? 이러한 의심을 내쫓기 위하여 세 게송을 설하셨다. 이 세 게송은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한 게송은 그 도리를 보여주는 것이요, 나중의 두 게송은 형상이 집착을 생기게 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
| [237 / 263] 쪽 |
| ‘이 둘은 능연과 소연이라’ 함은 ‘식(識)은 능생(能生)이고, 경계는 소생(所生)’이라는 너희들의 생각은 망심에서 취한[妄取]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 본래 이름 뿐이요,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있다고 집착한다면 헛꽃이나 환상을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생겨남이 없고 멸함이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
| 집착을 깨뜨리는 가운데 ‘식(識)이 생기기 전에는 경계도 생기지 않고’라 함은 능생(能生)의 식이 아직 있지 않을 때는 소생(所生)의 경계도 그 때는 생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경계가 생기기 전에는 그 때는 식 역시 멸해 있다’ 함은 능생의 경계가 아직 있지 않을 때는 그 소생의 식도 그 때는 멸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멸(滅)이란 적멸(寂滅)로서 본래 없음을 뜻한다. |
| ‘저 두 가지 다 본래 없는 것이라 있게 하지 못하며[不有] 생하게 하지 못한다[無有]’ 함은 저 두 가지 능생이 본래 다 없는 것이라, 이미 무언가를 생기게 할 능력[能生]이 없다면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불유(不有)’라 하였고, 있게 하지 못하므로 다음 찰나에 생기게 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유(無有)’라 하였다. ‘생함이 없으니 식도 없다’ 함은 생기게 한다는 이치가 이미 없는데 어떻게 식이 있을 수 있느냐는 뜻이다. 식이 없으므로 경계가 그것을 따라서 있지 않다. |
| 이 중에는 두 가지 논증식[比量]이 있다. 하나는 이렇다. ‘식은 생하지 않는다. 생겨나게 하는 공능[能生]이 없기 때문이다. 불탄 종자[燋種]와 같이.’ 또 하나는 이렇다. ‘경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근거[所從]가 없기 때문이다. 거북 털과 같이.’ |
| 이상 여섯 대목은 의심들을 따로따로 해결한 부분이다. |
|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법상(法相)은 이와 같이 안팎이 다 공(空)하며, 경(境)·지(智) 두 가지 허다한 것들은 본래 적멸합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실상(實相)의 진공(眞空)은 그와 같은 법들이 모인 것이 아니겠습니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설법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확정짓는 부분[摠定所說]이다. 위 여섯 가지 의문의 해결이 병(病)이 아니라 약임을 총괄적으로 판정한 것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정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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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다음에 그것이 약이라는 사실을 확정한다. 앞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지장보살이) 자세히 묻는 부분이고 다음은 (여래께서)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
| ‘법상은 이와 같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씀하신 여섯 부분의 법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했음을 나타낸다. ‘안팎’이라 한 이유는 식(識)은 안이고 경계는 밖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허다한 것들’이란 경계와 지혜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모인 것이 아니라[非集]’ 함은 잡되고 물든 생사의 질환을 모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공(空)에 집착하여 도리어 여러 가지 환난을 모아 놓은 것과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여실(如實)한 법은 무색(無色)이며, 무주(無住)이며, 소집(所集)이 아니며, 능집(能集)도 아니며, 의(義)가 아니며, 대[大:어떤 본에는 ‘文’으로 되어 있다]도 아니며, 하나의 근본인 과법[科法:어떤 본에는 ‘科’가 ‘利’로 되어 있다]이며, 깊은 공덕의 더미[聚]이다.” |
| [論] 이는 여래께서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부분[定許]이다. 유(有)에 집착하는 병을 내지 않기 때문에 ‘무색’이라 하였고, 악취공에 집착하는 환란을 떠났기 때문에 ‘무주’라 하였다. 고제(苦諦)가 공하기 때문에 ‘소집(所集)이 아니라’ 하였고, 집제(集諦)가 공하기 때문에 ‘능집(能集)이 아니라’ 하였다. |
| 음(陰)·계(界) 등의 차별된 뜻을 떠났기 때문에 ‘의가 아니라[非義]’ 하였고, 지·수·화·풍(地水火風) 등 지어내는 상[能造相]을 떠났기 때문에 ‘대가 아니라[非大]’ 하였다. |
| ‘하나의 근본인 과법[一本科法]’이란 하나의 본각[一本覺]을 말한다. 이것을 뿌리로 삼아 모든 작용과 모든 공덕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잡염(雜染)의 과로서 모든 본식(本識)을 말하니 그 뜻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고, 둘째는 순정(純淨)의 과로서 하나의 본각을 말하니 이 글에서 설한 것과 같다. |
| 저 본식 중에는 모든 잡염의 종자가 쌓여 있고, 이 본각 중에는 오직 매우 깊은 성품의 공덕 더미만 있다. 형상과 성품을 떠났으므로 ‘깊다’ 하고,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많기 때문에 ‘더미’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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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더미입니다. 제7식과 제5식이 생하지 않으며,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相)이 공하여 없습니다. 유(有)도 공하여 있지 않고 무(無)도 공하여 있지 않으니, 존자께서 설하신 대로 법(法)과 의(義)가 모두 공하나이다. |
| 공에 들어가 행이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업(業)을 잃지는 않으며, 아(我)와 아소(我所), 능·소의 신견(身見)이 없고 안팎의 번뇌가 모두 다 고요하며, 따라서 바라는 마음 또한 그칩니다. 이러한 이관(理觀)은 혜(慧)와 정(定)이 진실하고 여여하니, 존자께서 항상 설하신 이러한 공법(空法)은 좋은 약이 되겠습니니다.” |
| [論] 이 부분은 이 법이 약(藥)이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보살이 자세히 묻고, 다음에 여래께서 그 물은 뜻을 승인하신다. |
| 물음은 셋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앞에서 말한 깊은 공덕의 더미[深功德聚]를 이해한 것이고, 둘째는 이어서 이관(理觀)에 깊이 들어감을 밝힌 것이고, 셋째는 양약(良藥)의 훌륭한 효능[德]을 묻는 것이다. 첫째 부분도 총표(摠標)와 별현(別顯), 그리고 다시 총결하는 부분[摠結]의 셋으로 나뉜다. |
| ‘불가사의한 더미’는 형상을 떠나고 성품을 떠난 공덕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별현(別顯) 중에서는 먼저 모습을 떠났음을 밝히고 나중에 성품을 떠났음을 드러낸다. |
| 먼저 (모습 떠났음을 밝히는) 가운데 ‘제7식과 제5식이 생하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지말적인 식[末識]이 공함을 합해서 말한 것이다. 항상 작용하는 식[恒行識] 중에서는 제7식이 지말이 되고, 항상 작용하지 않는 식[不恒行] 중에서는 전5식이 지말이 되기 때문이다. ‘제6식과 제8식이 적멸하다’ 함은 두 가지 본식(本識)이 고요함을 합해서 설명한 것이다. 항행식 중에서는 제8식이 근본이 되고 불항행식 중에서는 제6식이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
| 다음에는 성품을 떠났음을 드러낸다. ‘제9식의 상이 공하여 없다’ 함은 제9식의 상 또한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
| ‘유도 공하여 있지 않다’ 함은 모습 떠났음을 거듭 말한 것이다. 상(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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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는 여덟 가지 식[八識]의 법이 공하여 있다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무도 공하여 있지 않다’ 함은 성품을 떠났음을 거듭 설명한 것이다. 모습을 갖지 않는 제9식의 성품이 공하여 있다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
| 일심(一心)이 이와 같이 형상을 떠났고 성품을 떠났으므로 무량한 공덕의 더미가 되니 이러한 것을 두고 부사의취(不思議聚)라고 부른다. |
| ‘존자께서 설하신 대로 법과 의가 모두 공하다’ 함은 셋째로 모습과 성품을 떠났음을 전체적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
| 다음에는 이관(理觀)을 밝히는데 이 중에 둘이 있다. 하나는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부분이다. 별명 가운데 3 구가 있다. |
| ‘공에 들어가 행이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업(業)을 잃지는 않는다’ 함은 공삼매(空三昧)를 말한다. 이관으로 공(空)에 들어가 능·소의 작용이 없다. 능·소가 없기는 하지만 6바라밀 등의 업(業)을 잃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 다음에는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밝힌다. ‘아와 아소, 능소의 신견이 없다’ 함은 견(見)에 속한 모든 번뇌의 모습을 떠나고, 아상과 아소상이 지니는 능견(能見)·소견(所見)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 ‘안팎의 번뇌가 모두 다 고요하다’ 함은 애(愛)에 속한 모든 결사(結使)의 모습을 떠났음을 말한다. 안쪽으로 얽어매는[結] 모든 번뇌와 바깥쪽으로 부려먹는[使] 모든 번뇌 등 삼계 번뇌의 모습들이 공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를 ‘무상삼매’라고 부른다. |
| ‘따라서 바라는 마음 또한 그친다’ 함은 무원삼매(無願三昧)를 설명한 것이다. 삼계의 법이 모두 적정(寂靜)하기 때문에 원하고 구하는 마음이 자연히 영구하게 멈춰버린다. 이런 것을 ‘무원삼매’라고 한다. |
| ‘이러한 이관(理觀)은 혜와 정이 진실하고 여여하다’ 함은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구절이다. 앞에서 본 세 가지 삼매는 모두 이관으로서, 지(止)와 관(觀)에 치우침이 없으며, 능·소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
| ‘존자께서 항상 설하신 이러한 공법은 좋은 약입니다’ 함은 셋째 자세히 여쭙는 말이다. 이와 같은 공법(空法)은 모든 공덕을 갖추어 모든 번뇌[結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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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치료하는 것이므로 양약이 되지 않겠나이까 하고 묻는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왜냐하면 공하기 때문이다. 공성(空性)이 생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생함이 없으며, 공성이 멸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멸함이 없으며, 공성이 머묾이 없으므로 마음 또한 머묾이 없으며, 공성이 작위가 없으므로[無爲] 마음도 작위가 없다. 공(空)하여 출입이 없어서 모든 득실(得失)을 떠났으며, 음(陰)·계(界)·입(入) 등이 모두 다 없는 것이다. 마음이 여여하여 집착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 보살아, 내가 여러 가지 공(空)을 설하는 것은 갖가지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
| [論] 이는 여래께서 확정하고 허락하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셋이 있다. 첫째는 전체적으로 허락한 부분[摠許](이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허락한 부분[別許], 셋째는 의심을 결단하여 확정하는 부분[決定])이다. |
| ‘공하기 때문’이란 양약(良藥)이 되는 것은 오직 공이기 때문이며, 유(有)는 병을 낳기 때문이다. |
| ‘공성(空性)……’ 이하는 둘째 별허(別許)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다. 먼저 ‘공’이라는 양약을 먹었기 때문에 유전(流轉)하는 좋지 않은 결과를 떠남을 밝히고, 다음에는 ‘공’이라는 양약을 먹었기 때문에 집착이라는 원인의 병을 치료함을 밝힌다. |
| 처음 중에 ‘공성이 생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생함이 없다’ 함은 공에 들어간 마음은 공과 같아서 생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멸함 없음을 따라서 마음이 항상 멸함이 없으니, 생멸은 바로 무상(無常)의 뜻이기 때문에 저 둘을 뒤집어서 상(常)이라고 하였다. |
| ‘마음 또한 머묾이 없다’ 함은 처음과 끝의 모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머무는 모양도 없다는 말이니, 이는 3상(相)을 떠났음을 따로따로 설명한 것이다. ‘마음도 작위가 없다’ 함은 저 세 가지 유위상(有爲相)을 떠났음을 총괄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는 공이라는 약을 먹고 덧없다고 생각하는 병[無常病]을 고침을 밝힌 것이다. |
| 다음에는 집착하는 병도 떠났음을 밝히는 대목이다. ‘출입이 없다’ 함은 출관(出觀)과 입관(入觀)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득실을 떠났다’ 함은 새 것 |
| [242 / 263] 쪽 |
| 을 얻고 낡은 것을 잃었다는 생각을 떠났다는 말이다. |
| ‘마음이 여여하여 집착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 함은 관하는 마음도 공의 이치와 같아서 출입득실(出入得失)의 모양을 취하지 않으며, 음(陰)·계(界)·입(入) 등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공이라는 약을 먹고 집착하는 병을 떠났음을 밝힌 것이다. |
| ‘내가 여러 가지 공(空)을 설하는 것은 갖가지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서’라고 한 구절은 셋째, 결론지어 확정하는 부분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공의 이치는 둘이 아니지만 다섯 가지, 세 가지 등으로 공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유(有)에 집착하는 병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병이 여러 가지이므로 공을 설할 때도 그에 따라 많은 공을 설한 것이다. |
| 또 이치는 실로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건만, 다만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 억지로 공(空)이라 하였다. 이는 공이라는 말에 공성(空性)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
|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모든 공에 대한 가르침을 결론짓는다. |
|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존자시여, 아지랑이가 물이 아님을 알듯이 유(有)가 실(實)이 아님을 알고, (나무 안에) 화성(火性)의 왕[王:다른 본에는 ‘生’이라고 되어 있다]이 있음을 알듯이 실(實)이 비무(非無)임을 안다면, 이와 같이 관(觀)하는 자를 지혜로운 자라 하겠나이까?” |
| [論] 여섯 품(品)에 걸친 여섯 가지 의문을 역순[逆]으로 해결하는 중에 의심을 각각 풀어주고[別決] 전체적으로 확정짓는[摠定] 부분까지가 앞에서 끝났다. |
|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로, 한 품(品)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의문을 순서대로 제거해 가는 부분이다. 이 중에 세 부분이 있다. 즉 「여래장품」 하나에서 세 가지 의문이 일어나므로 차례로 그것을 없애가기 때문이다. |
| 첫째 의문은 이렇다. 저 범행장자(梵行長者)가 게송에서 “법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지랑이를 물로 본 것과 같이 미혹에서 일어난 뒤바뀐 생각이다”라고 한 것과 “법을 없다고 본다면, 그것은 장님이 해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뒤바뀐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이런 의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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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으킬 수 있다. ‘장자는 속인이니 이와 같은 판단이 망견(妄見)이 되나이까, 진지(眞知)가 되나이까?’하는 것이다. 이같이 의심하여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므로 그런 이의 의심을 쫓아버리기 위해 (지장보살이)그 일을 들어 물은 것이다. 아지랑이와 물의 비유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
| ‘실이 무가 아님을 안다[知實非無]’ 함은 일실(一實)의 뜻과 성[義性]이 무(無)가 아님을 안다는 것이다. 그가 ‘실(實)이 없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자는, 마치 해가 없다고 잘못 아는 장님과 같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장자가 실(實)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없지 않다는 뜻을 화성(火性)의 왕에 비유한다. 나무 속에 불[火大]의 성품이 있는데, 나무를 쪼개고 나누어서 찾아보아도 불의 모습은 없다. 그러나 실은 나무 속에 화성이 없지 않아 비벼서 구하면 불이 반드시 나타난다. 일심(一心)도 그와 같아서 모든 모양을 분석해보아도 심성(心性)을 얻을 수가 없으나 사실은 모든 법 중에 마음이 없지 않으니 도를 닦아 찾아보면 일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의 성품은 모습을 감추고 있으나 세력이 커서 마치 나라의 주인과 같으므로 ‘왕’이라고 하였다. 양 극단을 떠난 장자의 이러한 관(觀)이 지혜로운가 하고 물은 것이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참된 관[眞觀]으로 하나의 적멸을 관하기 때문이다.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을 동등하게 공(空)으로 취(取)하니, 공을 닦으므로 언제나 놓치지 않고 부처를 보며, 부처를 보기 때문에 3류(流)를 따라가지 않는다.” |
| [論] 부처님의 대답에도 둘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결정 내리는 부분[直決]과 이유를 해석하는 부분[釋決]이다. |
| ‘그렇다’한 것은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결정을 내린 말이며, ‘왜냐 하면’ 이하는 지혜로운 이유를 풀이한 것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다. 간략한 해석[略釋]과 자세한 설명[廣演]이다. |
| 처음 (略釋) 가운데 ‘하나의 적멸을 관한다’ 함은 일심법이 적멸하다는 뜻을 관(觀)하기 때문이다.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을 동등하게 공으로 취한다’ 함은 모양이 있는 속(俗)과 모양이 없는 진(眞)을 동등하게 존립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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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지 않아서 하나로 융합하기 때문이다. |
| 이처럼 공(空)을 닦아 불심(佛心)에 어김없이 따르므로 한번도 놓친 적 없이 항상 불신(佛身)을 본다. 그러므로 ‘놓치지 않고 부처를 본다’고 하였다. |
| 항상 부처를 보기 때문에 더욱 공관(空觀)이 늘고, 공관이 늘어나면 갖가지 유(有)와는 위배되므로 ‘3류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3류(流)’란 삼계(三界)의 번뇌를 다 포섭한 것으로, 욕류(欲流)·유류(有流)·무명류(無明流)를 말한다. 그 뜻은 일반적인 설과 같다. |
| [經] “대승(大乘) 중에 3해탈(解脫)의 도(道)는 하나의 체(體)로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며, 공이므로 모양도 없으며, 모양이 없으므로 작위도 없으며, 작위가 없으므로 구함도 없고, 구함이 없으므로 바람도 없다. 이 업(業)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을 뵙기 때문에 미래에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
| 보살아, 이 깊은 법에서 3화(化)를 부지런히 닦으면 혜(慧)와 정(定)이 원만히 이루어져 삼계(三界)를 초월한다.” |
| [論] 이것은 둘째, 자세한 설명[廣演]인데,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3해탈도(解脫道)를 닦아 얻는 훌륭한 이익[勝利]을 밝히고, 다음에는 3화(化)를 부지런히 닦아 얻는 훌륭한 이익을 드러낸다. |
| ‘하나의 체로서 자성이 없다[一體無性]’ 함은 저 소승(小乘)의 3해탈문이 각각 다른 체(體)를 가지며 자성이 있는 데 반해, 대승보살의 관행(觀行)은 하나의 체임을 드러낸 것이다. 마음을 관(觀)하여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증득했을 때 뜻에 따라 세 가지 해탈을 가설할 뿐이다. 그 체성(體性)을 잊었다는 뜻에서 공해탈(空解脫)을 세우고, 체상(體相)을 잊었다는 뜻에서 무상해탈(無相解脫)을 세우고, 체용(體用)을 잊었다는 뜻에서 무작해탈(無作解脫)을 세우니 이것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고도 한다. |
| 오직 하나인 무분별관(無分別觀)으로 모든 법의 체성(體性)·체상(體相) ·체용(體用)을 버리게 하지 않는 바 없으며, 융합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3해탈문을 건립한다. |
| ‘이 업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다’ 함은 모든 체·상·용을 잊은 까닭에 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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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觀)에서 나와 세속에 관여하는 마음을 정화하여 물듦과 집착을 떠난다는 뜻이다. 이렇듯 물들고 집착함을 떠난 마음이면 보불(報佛)20)을 볼 수 있고, 보불을 보게 되므로 정토(淨土)에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을 3해탈도의 뛰어난 이익이라고 한다. |
| ‘이 깊은 법에서 3화를 부지런히 닦는다’ 함은 공법(空法)에 있어서 3공(空)을 부지런히 닦는다는 말이다. 무엇이 3화인가? 공상도 공함[空相亦空]을 닦는 것이 그 첫째 화[一化]요, 공공도 공함[空空亦空]을 닦는 것이 둘째 화[二化]요, 공해진 것도 공함[所空亦空]을 닦는 것이 셋째 화[三化]이다. 닦는다는 뜻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으므로 따로 논하지 않는다. 3화를 부지런히 닦아 가면 일심(一心)을 통달하고, 일심을 통달하기 때문에 혜(慧)와 정(定)이 원만히 이루어진다. 원만히 이루어진 경지에서 삼계를 벗어나니, 이것이 3화를 부지런히 닦아 얻는 뛰어난 이익이다. |
|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여래께서 말씀하신 무생무멸(無生無滅)은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다 없어지고 나면 적멸이 항상할 터이며, 항상하므로 끊기지 않을 것입니다. 끊기지 않는 이 법은 삼계의 모든 움직이는 법과 움직이지 않는 법을 떠나 있습니다. |
| 유위법(有爲法)을 불구덩이 피하듯 하려면 어떤 법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꾸짖고[呵責] 저 일문(一門)으로 들어가야 하나이까?” |
| [論] 여기서부터는 「여래장품(如來藏品)」에서 일어나는 둘째 의문에 대한 해명이다. 그 품(品)에서 “식(識)을 확실히 보면 그것은 항상하다. 이 식이 항상 적멸하니, 적멸한 그것 또한 적멸하다”고 하였는데, 이 글을 근거로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그와 같이 항상 머무는 적멸의 법은 비록 기뻐하고 즐길 만하지만, 이것은 잘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중생의 마음은 거칠고 얕아서 조복(調伏)하기 힘든데 어떻게 마음을 길들여 그 문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빙자하여 (지장보살이) 이런 물음을 던진 것이다. |
| 20) 보신물(報身佛) 즉, 훌륭한 수행의 과보로 얻는 불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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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은 둘로 나뉜다. 처음은 과(果)가 멀다는 것을 표시하고 다음은 들어가는 인(因)을 물었다. |
| ‘무생무멸은 무상한 것’이란 앞에서 말한 ‘식(識)이 항상 적멸하다’고 한 말을 이해한 것이다. 본래 적멸하기 때문에 생함도 멸함도 없다. 그러나 본래 항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無常)이 된다. |
|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다 없어지고 나면 적멸이 항상하다’고 함은 앞에서 말한 ‘적멸한 그것도 적멸하다’는 말을 이해한 것이며, 또 ‘식(識)을 확실히 보면 그것은 항상하다’고 한 말을 이해한 것이다. |
| ‘유위법……’ 이하는 저 일문(一門)으로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물은 말이다. 앞에서도 방편정관(方便正觀)을 설하긴 했으나 간략하기 때문에 다시 자세히 설해주시기를 청하였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보살아, 세 가지 큰 일[三大事]에서 자기 마음을 꾸짖어야 하고,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에 그 행(行)을 들어가게 해야 한다.” |
|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어떻게 하는 것이 세 가지 일에서 자기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까?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세 가지 진리에 하나의 행[一行]을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세 가지 일이란 첫째 인(因)을 말하고, 둘째 과(果)를 말하며, 셋째 식(識)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본래부터 공하여 없는 것이라서 나[我]의 진아(眞我)가 아닌데, 어찌하여 이에 대하여 좋아하고 물든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
| 이 세 가지 일을 관할 때,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고해(苦海)에 표류한다고 보아서, 이와 같은 일로 항상 스스로를 꾸짖는다. 세 가지 진리란 무엇인가? 첫째는 보리의 길로서, 불평등한 진리가 아닌 평등한 진리다. 둘째는 삿된 지혜로 얻는 진리가 아니라 크게 깨달은 바른 지혜로 얻는 진리다. 셋째는 잡된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가 아니라 혜(慧)와 정(定)이 다르지 않은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다. 이와 같은 3제(諦)로 불도를 닦아 가면 그 사람은 이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다. 정각의 지혜를 얻고서 크고 지극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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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大極慈)를 흘려 보내니 자리(自利)·이타(利他)가 다 갖추어져 부처의 깨달음을 성취한다.” |
| [論]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물음이고, 다음은 답이고, 셋째는 청(請)이고, 넷째는 설명[說]이다. 이 마지막 설명 부분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呵厭方便]을 말하고 다음에 향해 들어가는 방편[趣入方便]을 보여 준다. |
| 이 첫 번째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을 설하는 가운데 ‘인(因)’이란 5계(戒)와 10선(善)의 인을 말하고, ‘과(果)’란 인간·천신들이 누리는 부유하고 즐거운 과를 말하고, 식(識)이란 이 인과를 간직하는 것, 즉 본식(本識)을 말한다. 중생은 이 본식을 자기의 내아[內我]라고 착각하고 있으나, 이것의 성품은 공하기 때문에 ‘나’가 아니다. 무아(無我)의 도리라야 비로소 그것이 참된 나[眞我]이다. 그러므로 나 아닌 것에 대하여 애착하고 물들어서는 안 된다. |
| ‘세 가지 일을 관할 때,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라 함은 네 가지 얽매임[四繫] 때문에 이정(理定)에 지장을 줌으로써 저 세 가지 일[因 ·果·識]들을 고해(苦海)로 표류하게 하기 때문이다. |
| 그 네 가지 얽매임[四繫]이란 무엇인가? 『대법론(對法論)』「제품(諦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계에 네 가지가 있다. 탐욕신계(貪慾身繫)·진에신계(瞋恚身繫)·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차실집취신계(此實執取身繫)21)로, 정의성신(定意性身)을 장애하므로 계(繫)라고 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 때문에 정심(定心)의 자성신(自性身)을 장애하기 때문에 계(繫)라고 한 것이지, 색신(色身)에 장애를 주어서가 아니다. |
| 왜냐하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네 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재물(財物) 등을 탐애(貪愛)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둘째, 싸움질과 옳지 못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셋째, 수도할 때 행하기 어려운 계금(戒禁)으로 고뇌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넷째, 바른 이치를 따르지 않고 경계를 추구(推求)하는 것이 원인이 되 |
| 21) 아견신박(我見身縛)과 같음. 나라는 실체가 있어서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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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저마다 달리 보기 때문에 그 인식할 대상에 대하여 바른 이치대로 보지 않고, 갖가지로 헤아려 망령되게 집착을 일으켜 이것만이 진(眞)이고, 다른 것들은 다 어리석고 망령된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이유로 마음이 산란하고 동요한다. 무엇에 대해서 산란하고 동요하는가? 정심(定心)의 여실한 지견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
| ‘이와 같은 일로 항상 스스로를 꾸짖는다’ 함은 네 가지 계박에 휘말려 있음을 가책하고, 세 가지[因·果·識]에 표류하는 일에 염증을 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해서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呵厭方便]을 설명했다. |
| 그렇다면 향해 들어가는 방편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 진리[三諦]를 자세히 깨닫는 데 있다. |
| ‘첫째는 보리의 길[道]로서, 불평등한 진리가 아닌 평등한 진리다’ 함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자성이 맑은 보리[性正菩提]는 크게 통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道)’라 하였고, 모든 중생이 이 성품과 같아서 궁극적인 이 길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불평등이 아닌 평등’이라고 하였다. 이는 2승(乘)들이 따로따로 향해 들어가는 일을 대치(對治)한 것이다. |
| ‘둘째는 삿된 지혜로 얻는 진리가 아니라 크게 깨달은 바른 지혜로 얻는 진리’라 함은, 일체지(一切智)인 대각(大覺)의 과(果)는 오직 평등을 증득하는 바른 지혜로 얻는 것이지, 명제(冥諦)나 대유(大有)22) 등을 사유하는 삿된 지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모든 외도(外道)의 고집을 대치한 것이다. |
| ‘셋째는 잡된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가 아니라 혜(慧)와 정(定)이 다르지 않은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라 함은 바른 지혜를 얻어 평등에 들어갈 때 혜(慧)와 정(定)이 원융하여 별개의 행상(行相)이 없어야 비로소 평등제(平等諦)에 참되게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는 세간에서 분별하듯 심왕(心王)과 심수(心數)를 별개의 체로 보고 정과 혜(慧)의 다른 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잡행은 참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증득하 |
| 22) 명제(冥諦)는 수론(數論)외도가 주장하는 만물의 근원. 대유(大有)는 승론(勝論)외도가 주장하는 총상(總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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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못하고서 증득했다고 여기는 증상만(增上慢)에 사로잡힌 세간의 관행(觀行)을 대치(對治)한다. |
| 이와 같은 세 가지를 통틀어 진리[諦]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세히 살펴 깨달아 가는 관(觀)으로 보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다른 집착들을 두루 대치해야만 유일한 부처님의 길을 바로 닦아 간다. 그러므로 ‘3제로 불도를 닦아간다’고 하였다. |
| 다음에는 도를 닦아 얻어진 과(果)를 드러낸다. |
| ‘그 사람은 이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다’ 함은 자리(自利)인 지덕(智德)의 과(果)를 드러낸 것으로, 3법(法)에서 불도(佛道)를 닦으면 정각(正覺)의 열매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정각의 지혜를 얻고서 크고 지극한 자비[大極慈)를 흘려 보낸다’ 함은 이타(利他)인 은덕(恩德)의 과를 나타낸 것으로, 크고 지극한 무연(無緣)의 자비를 두루 흘려 보내 법계에 가득 차게 하여 이익을 주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
| ‘자리와 이타가 다 갖추어져 부처의 깨달음을 성취한다’ 함은 앞의 둘을 묶어서 결론지은 것이다. 자리와 이타의 두 이익이 원만하여 등각(等覺)을 이루기 때문이다. |
|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
| “존자시여, 이와 같은 법은 인과 연이 없습니다. 연이라는 법이 없다면 인도 일어나지 않을텐데 어떻게 움직이지 않는 법[不動法]으로 여래(如來)에 드나이까?[入:어떤 본에는 ‘得入’으로 되어 있다]” |
| [論] 이 부분은 「여래장품」에서 생긴 세 번째 의문을 제거한 것이다. |
| 저 품의 게송 끝머리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전변하여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붙들고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의 길이란 평등한 진리로서 여래장을 뜻한다. 이는 인과 연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인데 어찌하여 저 품에서는 능취와 소취를 전변하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여래장법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가?’ 이렇게 의심을 내므로 (지장보살이) 그렇게 물었다. |
| ‘인과 연이 없다’ 함은 평등하기 때문에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평등하므로 나머지 연(緣)이 없고, 나머지 연이 없으므로 인(因)이 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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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일어남도 움직임도 없는 저 법에 인연을 가지고 여래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인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인과 연을 의지하므로 부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 [經]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설하셨다. |
| 모든 법의 모양은 |
| 성품이 공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
| 이 법은 지금 이 때 있는 것이나 |
| 이 때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라. |
| 법에는 다른 때가 없으니 |
| 다른 때에 일어나지 않고 |
| 법에는 동(動)·부동(不動)이 없어서 |
| 성품이 공적(空寂)하므로 적멸이니라. |
| 성품이 공하여 적멸한 때 |
| 이 법이 이 때 나타나나니 |
| 모양을 떠났으므로 고요히[寂靜] 머물며 |
| 적정에 머물기 때문에 연(緣)을 따르지 않는다. |
| [論] 이 아래는 여래께서 정면으로 의심을 결단(決斷)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평등하고 부동하지만 득입(得入)할 수 있다는 뜻을 설명하신다. |
|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세 게송은 약설(略說)이고, 뒤의 다섯 게송은 광선(廣宣)이다. |
| 약설 중에도 둘이 있으니, 앞 두23) 게송은 부동(不動)의 뜻을 밝히고, 뒤 한 게 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드러낸다. |
| 앞의 것에도 표(標)·석(釋)·결(結)의 세 부분이 있다. 첫 두 구는 부동 |
| 23) 원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본에 ‘二’로 되어 있다. 앞 뒤 내용을 살펴 ‘二’로 번역한다. |
| [251 / 263] 쪽 |
| 의 뜻을 표방한 것이요, 다음의 네 구는 부동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 법은 지금 이 때 있는 것이나 이 때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 한 데서 ‘이 때[是時]’란 ‘이 시간[此世]’, 즉 현재를 말한다. 그런데 이 현재라는 시간은 언제나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를 분석해서 제거하면 중간(中間)이 없다. 마치 빛과 그늘[光陰]을 제거하면 중간처(中間處)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때’에 일어남이란 있을 수가 없다. |
| ‘법에는 다른 때가 없으니, 다른 때에 일어나지 않는다’ 한 데서 ‘다른 때’란 소위 과거와 미래를 말한다. 미래는 아직 있지 않으므로 일어남이 없고, 과거는 이미 없으므로 일어남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런 이치에서 법(法)에는 일어나고 움직이는 일이 없다. 생하고 일어나는 움직임이 이미 없으므로, 영원히 머물며 움직이지 않음도 당연히 없다. 그러므로 ‘법에는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없어서, 성품이 공적하므로 적멸하다’고 하였다. |
| 이 두 구는 부동(不動)의 뜻을 매듭지은 것이다. |
| 다음 한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밝힌 것이다. |
| ‘성품이 공하여 적멸한 때’란 성품이 공하여 적멸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았을 때라는 말이다. 부동(不動)의 법이 이 때 나타나는데, 마음에 나타나므로 득입(得入)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위의 반은 ‘득입’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
| 그러나 이는 법(法)이 모든 상(相)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모든 상을 떠났으므로 적정(寂靜)한 채로 머물며, 적정에 머물기 때문에 항상 연(緣)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들어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연을 떠났다는 뜻을 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아래 반은 연을 떠나 있다는 의미를 밝히고 있다. |
| [經] 연(緣)에 의해 일어난 모든 법 |
| 이 법에는 연(緣)이 생기지 않으니 |
| 인연은 생멸이라 머묾이 없으며 |
| 생멸하는 성품은 공적하기 때문이다. |
| [252 / 263] 쪽 |
| 연의 성품은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며 |
| 그 연은 본래 연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
| 그러므로 법(法)의 일어남은 연 때문이 아니며 |
| 연이 일어나지 않음도 그러하다네. |
| 인연으로 생긴 법 |
| 이 법은 인연이니 |
| 인연으로 생멸의 모습을 나타내나 |
| 그것은 생멸이 없다네. |
| [論] 이 아래는 (略說에 이어) 두 번째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宣]인데, 이 중에도 둘이 있다. 앞 세 게송은 부동(不動)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 다음 두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편다. |
| 처음에도 둘이 있으니 앞 두 게송은 근본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가지고 부동의 뜻을 나타내고, 뒤 한 게송은 지말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가지고 부동의 뜻을 나타낸다. |
| 처음에도 셋이 있으니 표방·해석·결론이다. ‘연(緣)에 의해 일어난 모든 법, 이 법에는 연(緣)이 생기지 않는다’ 함은, 여러 가지 과법(果法)에는 그 연(緣)이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다음의 네 구는 생하지 않는다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
| ‘인연은 생멸이라 머묾이 없다’ 함은 모든 인연은 생멸하여 머물지 않는 것이므로 과(果)를 낳는 공능이 없다는 뜻이다. ‘생멸하는 성품은 공적하기 때문’이라 함은 머물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없으니, 성품이 공적하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시 과를 낳지 않는다는 뜻이다. |
| ‘연의 성품은 능연과 소연’이라 한 데서, 인연의 종자(種子)가 숨어 있는 것을 ‘성품’이라고 한다. 증상연(增上緣)의 근(根)이 경계를 대하는 공능을 가지므로 그것을 ‘능연(能緣)’이라 하고, 연이 되는 경계[所緣境界]는 근의 대상[所對]이기 때문에 ‘소연(所緣)’이라고 한다. |
| 차제연(次第緣:等無間緣)은 법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
| [253 / 263] 쪽 |
| 논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종자인 성품의 연(緣)과 그 능·소의 두 연은 모두 본연(本緣)이 일어난 것이므로, ‘그 연은 본래 연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근본이 되는 모든 연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생멸하며, 그 자성이 공(空)하기 때문에 과법을 생하는 작용이 없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뜻에서 연에는 생겨남이 없다는 뜻을 말한다. |
| ‘그러므로 법이 일어남은 연 때문이 아니라’ 함은 과법(果法)의 일어남이 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을 결론짓는 말이다. ‘연이 일어나지 않음도 그러하다’ 함은 연이 일어남 없는 것도 그 과법과 동일함을 결론짓는 말이다. |
| 다음 한 게송은 지말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들어 부동(不動)을 나타낸 부분이다. ‘인연으로 생긴 법, 이 법은 인연이니’란 모든 과법도 인연이 된다는 사실을 밝힌 말이니, 뒤에 생하는 법에 대하여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법이 이미 인연이 되고 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생멸하는 성품이 공하다’. 그러므로 ‘인연으로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내나, 그것은 생멸이 없다’고 하였다. |
|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할[略說] 때는 과법(果法)이 공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냈고, 지금 자세히 설명하는[廣宣] 데서는 인연설(因緣說)을 가지고 모든 법의 인과(因果)가 부동한 것이 곧 평등한 보리의 길이며, 이 법 말고 따로 구할 깨달음이 있지 않음을 밝히려 하였다. 이것이 이 게송의 대의(大意)이다. |
| 조법사(肇法師:僧肇)가 이렇게 말하였다. “도(道)가 먼 것인가? 일마다 진(眞)이다. 성(聖)이 먼 것인가? 체득하면 신(神)이로다.” |
| [經] 저 여여의 진실한 모습은 |
| 본래 출몰(出沒)이 없건만 |
| 모든 법이 이 때에 |
| 스스로 출몰을 내느니라. |
| 그러므로 지극히 청정한 근본은 |
| 본래 여러 힘에 기인하지 않나니 |
| [254 / 263] 쪽 |
| 나중에 얻을 그 자리에서는 |
| 얻는다 해도 본래 얻은 것을 얻느니라. |
| [論] (不動의 뜻을 밝힌 데 이어) 이 두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편 것이다. 그 중에 셋이 있으니, 첫째 한 송은 움직임이 있는 저 모든 법에 대하여 진여(眞如)의 부동함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 그 다음 두 구는 움직이지 않는 근본이 모든 연을 상대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셋째 마지막 두 구는 연(緣)을 떠난 법에 득입(得入)의 의미가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
| ‘나중에 얻을 그 자리[後得處]’란 도를 닦은 뒤에 얻는 지위를 말한다.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가운데 ‘적멸시’라 한 것을 여기서는 ‘후득지처(後得之處)’로 표현한 것이다. 이미 적멸이라면 어찌 장소와 때가 있겠는가만, 때와 장소를 떠났기 때문에 ‘때와 곳’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설명했을 뿐이다. |
| ‘얻는다 해도 본래 얻은 것을 얻는다’ 함은 시각(始覺)이 완성[究竟]되었다는 뜻에서 ‘얻었다[得]’고 하였는데, 이는 능득(能得)을 말한다. 시각이 완성되면 본각(本覺)과 같아지는데, 이런 이유에서 ‘본래 얻은 것[本得]을 얻는다’고 하였다. |
| 여기까지가 세 번째 의심을 해결하는 부분이었다. |
| [經] 그 때 지장보살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즐거워졌다. 모든 대중들도 의문을 품는 자가 없었는데, 대중의 이런 마음을 알고나서 지장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
| 대중들이 품은 의심을 내 알았기에 |
| 정성껏 간절히 물었더니 |
| 여래께서 자비로운 선심으로 |
| 남김없이 분별해주시어 |
| 이 두 무리들 모두가 |
| 다들 분명히 알아들었네. |
| [255 / 263] 쪽 |
| 내가 이제 확실히 안 곳에서 |
|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교화하여 |
| 매우 자비로우신 부처님 같이 |
| 본원(本願)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
|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에서 |
| 번뇌 속에 머물고자 하네. |
| [論] 이는 네 번째, 지장보살이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領解]이다. 이 세 송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한 송 반은 앞에서 의문을 해결한 이익에 관해 매듭짓고, 다음의 한 송 반은 나중에 널리 교화할 행(行)에 대해 말한 것이다. |
|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一子地]’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일체 중생이 평등함을 이미 깨달았으므로 그 중생들을 외아들 보듯이 한다는 뜻이다. 이를 가리켜 청정증상의락(淸淨增上意樂)이라고 하는데, 비유적인 표현으로 그 마음을 ‘외아들같이 여기는 경지’라고 한 것이다. |
| ‘번뇌 속에 머문다’ 함은 보살은 모든 법의 평등함을 얻었다고는 할지라도 방편의 힘을 쓰기 때문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번뇌와 수면(隨眠)을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면 본원(本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
| 『유가론(瑜伽論)』 삼마혜다(三摩呬多) 결택분(決擇分) 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 “멸진등지(滅盡等至)24)는 무루(無漏)라고 해야 한다. 번뇌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응하지 않으므로 연할 대상이 없다. 모든 번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원행지(遠行地)에 들어온 보살만 빼고는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이생(異生)들도 행할 수 없다. 보살은 출세간법을 일으켜 현실로 앞에 나타나게 하나 방편선교(方便善巧)의 힘 때문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 |
| 24 등지는 삼매(三昧)의 다른 이름. 멸진등지는 멸진정(滅盡定)을 말함. |
| [256 / 263] 쪽 |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버리지 않는다[不捨]’고 한 것은 아라한처럼 완전히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지, 전혀 버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한 것과 같다. |
| 버리지 않기 때문에 ‘번뇌에 머문다’고 하였으니, 그럼으로써 열반에 들지 않고 시방세계를 두루 교화하기 때문이다. |
| 이 한 권의 경을 크게 (서분·정설분·유통분)셋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인 정설분(正說分)이 여기서 끝났다. |
| [經] 이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
| “이 보살은 불가사의하니 항상 대비[大悲:어떤 본에는 ‘大慈’라고 되어 있다]로 중생의 고통을 뽑아 준다. 이 경전의 법을 간직하고 이 보살의 이름을 외우는 중생은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장애와 곤란이 다 없어질 것이다. 다른 잡념 없이 오로지 이 경만 염(念)하며 법대로 닦고 익히는 중생이 있다면, 그 때 보살이 항상 몸을 변화로 나타내서 잠시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를 위해 법을 설하고 그를 보호하여, 위없이 바르고 온전한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善提]을 속히 얻게 할 것이다.” |
|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유통분(流通分)이다. 그 중에 여섯 부분이 있다. |
| 첫째는 사람을 칭찬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에게 권유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이름을 세워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수지(受持)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참회로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받들어 행함으로써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
| 위 경문은 첫째로 사람을 칭찬하여 유통하게 한 부분인데, 이 경을 유통하게 하는 보살에게 네 가지 훌륭한 공덕이 있음을 칭찬한다. 대비(大悲)로 일체중생을 빠짐없이 교화하는 공덕, 이 경을 간직하는 자를 별도로 도와 주는 공덕, 몸을 변화시켜 설법하는 공덕, 궁극적인 결과를 얻게 하는 공덕이다. |
| [經] “너희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모두 이와 같은 대승(大乘)의 결정된 요의(了義)를 닦고 익히게 해야 한다.” |
| [論] 이는 두 번째, 대중들에게 권유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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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결정된 요의’란 가장 깊고, 가장 궁극적이어서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 말이다. |
| [經] 그 때 아난(阿難)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
| “여래께서 설하신 대승의 복 더미는 결정코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며, 무생(無生)의 본각(本覺) 이익은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법을 무슨 경이라 이름해야 하며, 이 경을 수지(受持:마음속에 이해하고 새김)하면 얼마만한 복(福)을 얻나이까?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를 위해 부디 말씀해 주소서.” |
| [論] 이는 세 번째, 이름을 세워 유통하게 한 것이다. 먼저 묻고 뒤에 대답했다. 물음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이해한 것을 나타내고[領解], 나중에 물음을 던진다. |
| 이해한 중에서는 이 경이 가지는 네 가지 훌륭한 공능을 밝힌다. 첫째는 이 경을 간직하는 자로 하여금 무량한 복을 얻게 하는 것이니, 경에서 ‘대승의 복 더미’라고 하였다. 둘째는 이 경을 간직하는 자로 하여금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리게 하는 것이니, 경에서 ‘결정코 모든 번뇌를 끊는다’고 하였다. 셋째는 밝히신 취지가 바로 본각(本覺)의 이익이라는 것이니, 경에서 ‘무생의 본각 이익‘이라고 하였다. 넷째는 밝히신 가르침이 사량(思量)하기 어렵다는 것이니 경에서 ‘불가사의’라고 하였다. |
| 다음으로 물음 가운데서는 두 가지 일을 물었다. 먼저 경의 요점[經要]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여 경(經)의 이름을 물었고, 다음에 복을 구해 이 경을 수지하였고 이 경을 지녀 얻는 복을 물었다. |
|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선남자야, 이 경의 이름은 불가사의하니,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이며,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 이 경을 지니는 중생이 있다면 그는 다른 모든 경에서 바라고 찾을 것이 없다. |
| 이 경전의 법은 많은 법을 총지(摠持)하며, 모든 경의 요점[要]을 다 포함하니, 이 모든 경의 법 중에서 법의 계종(繫宗)25)이 된다. 이 경의 이름을 『섭 |
| 25) 모든 종지(宗旨)를 다 연결한 것이라는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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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승경(攝大乘經)』이라고 하며, 또 『금강삼매(金剛三昧)』,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부른다.” |
| [論] 여기서부터는 대답인데,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차례로 두 가지 물음에 대답한다. 첫 번째 대답에 또 둘이 있으니 먼저 이름과 뜻을 찬탄하고, 다음에 이름을 세운다. |
| 명의(名義)를 찬양한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총괄적으로 이름을 찬탄하고 다음에 개별적으로 의미를 설명한다. |
|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能入……]’ 이하는 개별적으로 의미를 설명한 것인데, 세 가지 뜻을 밝힌다. |
|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바라고 찾을 것이 없다’ 함은 ‘금강삼매’라는 이름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깨뜨리지 않는 법이 없고, 끝까지 밝히지 않는 이치가 없으므로 여래의 지해[智海]로 들어가게 하고 이 밖에 더 희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
| ‘이 경전의 법은 많은 법을 총지하며, 모든 경의 요점을 포함한다’고 한 것은 ‘섭대승경(攝大乘經)’이란 이름의 뜻을 나타낸다. ‘법의 계종’이라고 한 것은 ‘무량의종(無量義宗)’이란 이름의 뜻을 나타낸다. |
| 이 두 이름의 뜻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앞의 것이 모든 경의 뜻을 광범하게 포함한다는 뜻을 밝힌 데 비해, 뒤의 것은 모든 경이 종주[宗]로 삼는 극치임을 밝혔다. |
| 다음에 세 가지 이름을 들었으니, 그 중 자세한 것은 앞의 2문(門) 중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하였다. |
| [經] “이 경전을 수지(受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수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공덕은 허공같이 끝이 없고 불가사의하니, 내가 부탁하는 것이 바로 이 경전이다.” |
| [論] 이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이 중에 네 가지 훌륭한 덕을 밝힌다. |
| 첫째는 이 경은 모든 부처의 마음을 포함한다는 뜻에서, 부처를 수지하는 뛰어난 덕[持佛勝德]을 갖는다. 경에서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수지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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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는 이 경이 넓고 큰 뛰어난 덕[廣大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끝이 없다’고 하였다. 셋째는 매우 깊은 뛰어난 덕[甚深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넷째는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뛰어난 덕[無比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바로 이 경전’이라고 하였다. |
| [經] 아난이 여쭈었다. |
| “어떤 마음으로 행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수지(受持)합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선남자야,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마음에 얻고 잃는 것이 없고, 항상 범행(梵行)을 닦으며, 희론(戱論)에 대해서도 항상 맑은 마음을 즐기며, 마을에 들어가도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으며, 또 집안에 머물러 살아도 3유(有)에 집착하지 않는다.” |
| [論] 여기서부터는 수지(受持)하므로써 유통하게 하는 것이니, 그 중에 둘이 있다. 첫째는 수지하는 일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둘째는 문답을 통해서 거듭 설명한 부분이다. |
| 첫 번째 것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
| 물음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경을 수지하는 사람의 심행(心行)에 관해 묻고 나중에 경을 수지하는 사람의 복리(福利)에 관하여 묻는다. |
| 답 중에서는 차례로 이 두 가지 물음에 대답을 해 가는데, 첫 번째 답 가운데서는 다섯 가지 심행(心行)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첫째로 (이 경을 수지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장단점[長短]을 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에 얻고 잃음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안으로 상(相)을 여읜 깨끗한 행을 닦기 때문에 항상 청정한 행을 닦는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동(動)에 있으면서도 부동(不動)하기 때문에 항상 고요한 마음을 즐긴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산란한 경계에 들어갔어도 산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정에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탁한 곳에 거처하면서도 물들지 않기 때문에 3유(有)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 [經] “이 사람에게는 현세(現世)에 다섯 가지 복(福)이 있다. 첫째는 대중에게 존경을 받으며, 둘째는 육신이 횡액을 당하거나 요절하지 않으며, 셋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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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그릇된 논의에 잘 대답할 줄 알며, 넷째는 기꺼이 중생을 제도하고, 다섯째로는 성도(聖道)에 들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이 경을 수지한다.” |
| [論] 이는 둘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앞에서 든 다섯 가지 심행(心行)에 따라서 이 다섯 가지 복을 얻는다. |
| 첫째는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보지 않기 때문에 대중의 존경을 받는다. 둘째는 항상 상을 떠난 행을 닦기 때문에 몸이 횡액을 당하거나 요절하지 않는다. 셋째는 고요한 마음을 즐기기 때문에 그릇된 논리에 대하여 답변을 잘한다. 넷째는 산란한 곳에 들어가서도 항상 선정에 있기 때문에 중생들을 즐겨 제도한다. 다섯째는 3유(有)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聖道)에 들어간다. |
| [經] 아난이 여쭈었다. |
| “그런 사람은 중생들을 제도할 때 공양을 받을 수 있습니까?[得受供不:어떤 본에는 ‘供’ 아래 ‘養’이 붙어있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이런 사람은 중생에게 큰 복전(福田)이 되며, 언제나 큰 지혜를 발휘하며, 방편[權]과 진실[實]을 함께 연설하니, 이들은 4의승(依僧)26)으로서 모든 공양(供養) 뿐만 아니라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도 다 받을 수 있거늘, 어찌 옷이나 밥을 받을 수 없겠는가? |
| 선남자야, 이런 사람은 너희의 선지식이며, 너희의 교량(橋梁)이거늘 어찌하여 범부가 되어 공양하지 않으랴.” |
| [論] 이 아래는 문답을 통해 거듭 밝힌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복전의 체(體)가 무엇인가를 밝혔고, 다음에 복(福)을 낳는 능력에 관하여 말했다. 이 부분은 첫 번째 대답이다. |
| ‘4의승(依憎)’에서 첫째의 의지할 대상[第一依]은 번뇌성(煩惱性)을 갖춘 지전(地前)의 지위를 말하고, 나머지 3의(依)는 지상(地上)의 지위를 말하니, 『열반경(涅槃經)』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
| [經] 아난이 여쭈었다. |
| 26) 중생에게 의지가 되는 네 부류의 수행자라는 뜻에서 4의승이라 한다. 첫째는 3현과 4선근위, 둘째는 수다원과 사다함, 셋째는 아나함, 넷째는 아라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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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경을 수지하는 저 사람에게 공양하면, 그 사람은 얼마나 되는 복을 받습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성(城) 안을 가득 채울 만큼의 금은으로 보시하는 자가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이 경에서 네 글귀로 된 게송 하나를 수지(受持)한 그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 [供養是人:어떤 본에는 ‘供養是人’ 대신에 ‘不可思議’가 들어가 있다]보다는 못하다.” |
| [論] 이는 두 번째, 경을 수지하는 자가 많은 복을 생기게 한다는 사실을 밝힌 부분이다. 성 안을 가득 채운 금은으로 경을 수지하지 않는 자에게 보시하여 얻는 복(福)은 밥 한 끼와 옷 한 벌로 이 네 글귀로 된 게송 하나를 수지하는 이에게 공양하여 얻는 복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 [經] “선남자야, 모든 중생들에게 이 경을 수지하게 한다면,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어서 본심(本心)을 잃지 않을 것이다. 본심을 잃는다면 참회할 것이니, 참회의 법은 맑고 시원하다[淸凉].” |
| [論] 이 아래는 참회하므로써 이 경을 유통하게 하는 부분[懺悔流通]이다. 이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 참회의 공덕을 찬양하고, 둘째로는 문답을 통해 거듭 밝힌다. 참회의 공덕을 말한 가운데 ‘청량(淸凉)’이라고 한 것은 불선(不善)의 원인이 되는 혼침과 탁함을 없앴기 때문에 ‘맑다[淸]’ 하였고, 생사의 결과인 뜨거운 고뇌를 떠났으므로 ‘시원하다[凉]’고 하였다. |
| [經] 아난이 여쭈었다. |
| “먼저 지은 죄를 참회하면 그것은 과거(過去)에 들어가지 않나이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그렇다.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게 켜지면 어둠이 즉시 사라지는 것과 같다. |
| 선남자야, 앞에서 지은 모든 죄들을 뉘우친다고 해서 그것들이 과거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말라.” |
|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문답을 통해 거듭 설명하는 부분[往復重顯]이다. 여기에 두 차례의 문답이 있다. 첫 번째는 참회의 도리를 드러냈고, 두 번째는 참회하는 행법(行法)을 나타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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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중에서 질문한 뜻은 앞서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을 참회라고 한다면, 앞서 지은 죄는 과거 속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뜻이다. ‘먼저’라는 것은 과거에 들어갔으므로 지금이 아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는데 어떻게 참회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
| 답에서 ‘그렇다’ 하신 것은 이와 같이 앞에서 저지른 죄가 과거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無]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서 지은 죄는 본식(本識)에 훈습(熏習)되고, 그 종자(種子)가 항상 흘러서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이치로 보아 그것은 과거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지금 참회하여 다스리는 능력이 생기면 그 죄의 종자를 현재에 흘러 내려오지 않게 할 수 있다. 마치 등불이 켜지자 캄캄한 방의 어둠이 이내 사라지듯이, 그 죄의 종자가 현재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야 비로소 과거에 들어가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은 죄를 참회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서 있었던 것을 앞서 있었던 것이 아니게 할 수는 없으므로 참회로는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먼저 있었던 것을 지금에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을 뿐인데,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 참회의 행이다. |
| 이는 번뇌를 끊는다[斷結]는 뜻과는 다르다. 번뇌를 끊는 것은 생멸도(生滅道)라는 면에서,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을 현재에까지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여기서 말하는 참회는 상속도(相續道)라는 면에서, 앞서 있었던 것을 현재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한 번뇌를 끊는 것이 종자를 영구히 끊어버린다는 뜻인데 비해, 앞서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은 종자의 커지고 강해지는 기능을 덜어내고 눌러서 현재에 이르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
| [經] 아난이 여쭈었다. |
| “어떻게 하는 것을 참회라 하나이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 “이 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실관(眞實觀)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번 이 관(觀)에 들 때 모든 죄가 사라지고 모든 나쁜 길을 떠나 정토(淨士)에 태어나서 속히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이루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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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 이는 둘째, 참회하는 법[行法]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행법(行法)을 설명하고 나중에 참회로 얻는 훌륭한 이익을 보여 준다. |
| ‘이 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실관에 든다’ 함은 금강삼매(金剛三昧)의 가르침[敎旨]에 의해 모든 법상(法相)을 깨뜨리는 것을 진실에 든다고 하였다. 이는 지전(地前)보살이 닦는 상사진관(相似眞觀)이다. |
| ‘한번 이 관에 들 때 모든 죄가 사라진다’ 함은 모든 죄장(罪障)이 망상(妄想)으로부터 생겼으나 이제 모든 상을 깨뜨리고 진실관(眞實觀)에 들어가서 모든 망상경계를 단번에 깨뜨리므로 모든 죄가 싹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훌륭한 이익에 관하여 설명한 것인데 여기에 두 구가 있다. |
| ‘모든 나쁜 길을 떠나 정토에 태어난다’ 함은 화보(華報)27)를 얻는다는 뜻이고,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善提)를 이루게 된다’ 함은 과보(果報)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
|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자 아난과 여러 보살과 사부대중(四部大衆)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마음에 확신을 얻어,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며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다. |
| [論] 이는 받들어 행함으로써 유통하는 부분인데, 여기에 네 구가 있다. 법을 듣고 기뻤기 때문에 ‘매우 기뻐했다’ 하였고, 모든 의혹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에 확신을 얻었다’ 하였고, 법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에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였다’ 하였고, 행할 때 더욱 기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다’고 하였다. |
| 매우 깊고 미묘한 금강의 가르침 |
| 이제 받들어 믿고 간략히 기술하오니 |
|
이 선근[善] 법계에 두루하여 모든 중생 남김없이 이롭게 하여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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