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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각국사

영국의 역사와 문화 II (대영제국의 기초와 발전)

작성자귀족이되자|작성시간05.03.28|조회수89 목록 댓글 0

■ 대영 제국의 기초

1. 하노버 왕조의 시작 - 조지 1세(1714~27), 조지 2세(1727~60) -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이미 존재했던 왕위 계승률에 의해 하노버 선거후였던 조지가 조지 1세(1714-1727)로 등극했다. 사실 조지 1세는 계통적으로만 잉글랜드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을 뿐이지 독일에서 성장한 독일어만 쓸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통치할 때 그를 대신해서 성심껏 정치를 해 줄 인물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하에 내각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내각은 아직 수상 스스로가 책임지는 책임 내각제가 아닌 국왕의 책임하에 수상이 정치를 대리하는 역할만 했다.

앤 여왕이 서거하고 조지가 즉위하던 사이에 망명 중에 있던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3세의 복귀를 지지하던 토리당의 볼링블록(Bolingbroke)과 옥스퍼드 백작은 막상 조지가 즉위하자 휘그당의 득세로 인해 전자는 망명하게 되었고 후자는 2년간 런던탑에 감금당했다. 이로써 명실공히 왕의 간섭도 받지 않는 휘그당의 세상이 도래하게 되었다.

영국(이제부터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그리고 일부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의 정치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란 호칭에서 ‘영국’이란 호칭으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임)의 역사상 초대 수상이라고 할 수 있는 월폴은 20여년간 조지 1세와 조지 2세 두 왕을 모시면서 수상의 위치는 어떤 것인가를 정립시켜 놓았다. 그는 외교 문제를 처남인 타운센트 경에게 맡기고 자신은 국내 문제에만 주력했는데, 다행히 외교적으로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의 국내 통치가 한층 돋보였다. 그는, 첫째 조세를 감면하고, 둘째 성공회와 토리당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고, 셋째 당쟁 때문에 일어났던 과거의 잔인한 모습들을 배격하면서 국내 정치를 펼쳐 나갔다. 덕분에 조지 1세 시절이 평화롭게 안착되면서 하노버 왕조의 첫 단추가 잘 끼워지게 되었다.

조지 1세를 계승한 조지 2세(1727-1760)는 월폴을 더욱 신임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확고한 위치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엉뚱하게도 상업적 국수주의가 고개를 들게 됨으로써 일어났다.

위트레흐트 조약28) 이후 남미 대륙에서 노예 무역의 독점권을 가진 영국은 이 이권을 이용하여 노예 대신에 여러 가지 상품을 밀무역했다. 그러던 중에 레베카라는 상선을 가지고 장사하던 젠킨스라는 선장이 에스파냐 군인의 검문을 받다가 반항하여 귀가 잘리는 ‘젠킨스의 귀’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실이 영국 의회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의회는 이에 대해 ‘영국에 대한 에스파냐의 도전’이라 하였고, 더욱이 월폴의 반대 입장에 서 있던 토리당의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st Earl of Chatham)는 ‘가만히 있는 것은 굴욕적인 것’이라며 소리를 높였다.

결국 이러한 소리들 때문에 평화를 주장하던 월폴을 자신의 노선을 깨고 1739년 에스파냐와 ‘젠킨슨의 귀’전쟁을 시작했는데, 이 당시 전쟁의 필요성을 소리 높이 외치던 의회는 이 전쟁에서 총체적 지지를 선뜻 허락지 않음으로써 월폴은 의회에 농간당한 꼴이 되었다. 그 결과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이로써 1742년 그가 오랫동안 지켜오던 수상직을 사임하고 옥스퍼드 백작을 서임받아 상원에 진출했다.

대영제국을 향한 첫걸음은 오스트리아 계승전(1740-1748)의 수행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카를 6세가 서거한 후 남자 혈통이 없어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가 왕위에 즉위하였는데, 이에 대해 방계 혈통인 바바리아 선거후가 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 이때 하노버 집안과 이해 관계가 있던 오스트리아를 영국이 도와주었으며, 이는 영국이 전혀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인데도 윌리엄 3세 이후 앤 여왕에 걸쳐 계속되었던 ‘대륙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이라는 외교적 차원에서 프랑스의 반대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이때 영국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인들을 앞세워 북부 잉글랜드로 진격해 오던 스튜어트 왕계인 찰스 에드워드의 반란도 함께 치르게 되었다. 다행히 1746년 컬로든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함으로써 이 문제는 무마되었다. 또 인도에서 마드라스 지역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의 동인도 회사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계승전이 끝나면서 1748년 엑스 라 샤펠(Aix la Chapelle)조약이 맺어지자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도 끝이 났다.

한편, 엑스 라 샤펠 조약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의 영․프 대립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1751년 아르코트(Arcot) 방위전에서 로버트 클라이브(R. Clive)가 이끄는 영국의 식민지 부대가 프랑스의 뒤플렉스(Dupleix, J.F.) 식민군을 물리쳤고, 1757년 플라시에서도 계속해서 승리함으로써 북인도를 점령하게 되자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접수하고 직접 인도 경영에 나섰다. 이로써 영국 제국을 인도에 본격적으로 건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식민지를 향한 두 번째 걸음이었다.

세 번째 걸음은 윌리엄 피트가 활약한 7년 전쟁(1756-1763)이었다.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에서 프러시아가 슐레지엔 지방을 얻은 것에 대해 오스트리아가 불만을 품고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과 동맹을 결성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에 대해 영국은 프랑스가 또 개입하는 것을 보고 세력 균형을 위하여, 이번에는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여했다. 이러한 세력 균형을 위한 두 전쟁을 역사에서는 ‘외교혁명’이라고 하며 프랑스와 영국의 계속적인 대립이 15세기경 일어났던 백년 전쟁과 유사한 대립이 18세기에 다시 이어졌기에 이를 ‘2차 백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2. 조지 3세(1760~1820)와 미국의 독립

당시 아메리카로 이주한 영국민이 300만까지 증가해서 그곳에 지방 의회가 필요하게 되었다. 또 조지 3세가 언급한 것처럼29) 대외 정치면에서 재정 낭비를 줄이려는 움직임을 간파한 식민지인들은 7년 전쟁중에 아메리카에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도움없이 자신의 힘으로 몰아 낸 경험을 살려 7년 전쟁후에도 식민지가 운영하는 독자적인 군대를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식민지 쪽의 생각과는 달리, 영국 정부는 조지 3세의 의도를 기초로 국내 재정의 부족분을 식민지에서 흡수하려는 정책을 세웠다. 이를 ‘타운센트 법(1767. 6)’이라고 하는데, 그 법은 그 동안 당밀, 양모품 등 큰 물품에 부과하던 관세를 없애고 유리, 종이, 잉크, 페인트, 납, 차 등 작은 상품에다 간접세를 부과하려는 것이었다. 이렇듯 교묘한 세금 착취법에 대해 아주 잘 인식하고 있던 식민지 지식인들은 버지니아 의회를 열어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국의 상업적 번영을 위해 식민지가 착취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대표 없는 곳에 과세도 없다”는 선서를 했다.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주 대표들이 모여 본국 상품 및 본국과의 단절을 선언했다.30)

한편, 1770년에 수상이 된 노스(North) 경은 식민지의 불만을 알고 타운센드 법을 철회했으나 미국 식민지인들의 최고의 기호품인 ‘차’에 대한 세금만큼은 그대로 두어도 불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이를 유지시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인도에서 차(tea)가 과잉 생산되어 이를 소비하기 위해 차를 미국 식민지에 대량으로 소비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미국에 대한 차세가 강화된다는 것을 알게 된 식민지 지식인들은 분개하면서 보스턴에 정박해 있던 배에 실려 있던 차들을 모두 바다에 빠뜨리는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때부터 식민지와 영국 본국 간에 대립이 시작되었다.

양국 간의 무력행사는 영국군이 렉싱턴의 군수 물자 창고를 기습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이후 식민지 민병대들이 정규군으로 구성되면서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생명 자유, 행복 추구란 의미를 표현한 ‘독립 선언서’를 1776년 7월 4일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영국과 무력충돌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강세를 보이던 영국의 콘월리스 장군 휘하의 식민지 주둔 영국군이 패하고, 영국 내 여론도 식민지 독립에 동정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북미 식민지군의 승리가 점차 확실해졌다. 또 1780년에 벤저민 프랭클린이 영국과 세력 균형책으로 대립하고 있던 프랑스를 자극하여 유럽 대륙의 각국이 식민지를 도와주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식민지의 승리는 거의 굳어졌다. 이듬해인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이 대패하면서 식민지군의 승리가 확정되었고, 1783년 드디어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운동을 전개시키는 동안 영국 내의 상황을 살펴보면, 1780년 존 더닝(John Dunning)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식민지 독립이 실패하는 데 따른 왕권 강화를 우려하여 국왕권의 제한을 확인하는 절차를 하원에 제출했는데, 하원에서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이 절차를 진행시켰다. 또 요크타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식민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노스 수상이 1782년 3월에 사임했으며, 이 밖에도 미국 식민지처럼 아일랜드의 독립 의지도 우려하면서 카톨릭을 제외한 60여 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비정상적인 더블린 회의에 독립 입법권을 부여하는 유화정책도 쓰고 있었다.

미국이 독립하자 우선 프랑스 왕조에 대한 영국 정부의 원망이 커졌고, 둘째로 2개의 강대한 앵글로색슨 민주 체제, 즉 입헌 군주제와 공화정이 분리되었다는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영․미간의 무역량은 증가했다. 그리고 영국은 미국을 그들의 식민지에서 제외하고 인도 경영에만 주력하게 되었으며, 노스 내각이 실패한 후 국왕 책임하의 내각이 없어짐으로써 진정한 책임 내각제가 도래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한편 영국 의회가 조지 3세의 반동화의 가능성을 막는 법령을 가결시켰지만, 만약 식민지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했더라면 조지 3세의 성격상 틀림없이 의회를 무시하고 친히 전제 정치를 감행했을 것이고, 그러면 영국은 또다른 혁명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의 독립은 영국측에 있어서도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소 피트(William Pitt) 정책과 프랑스 대혁명

24세의 나이로 수상의 자리에 오른 소 피트의 중심이 되는 정책은 기존의 영국 정책이었던 세력 균형책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의 기간동안은 네덜란드를 방위하고 앤트워프 지역과 벨기에가 프랑스란 강국의 세력권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소규모의 전쟁만을 치렀다. 그러나 점차 나폴레옹이 대륙의 각국과 영국 점령 지역까지 - 심지어는 영국의 식민지들인 인도나 지중해 지역 섬까지 - 세력을 미치자, 이것을 막고자 전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소 피트는, 첫째로 제해권의 확실한 확보와, 둘째로 무상 원조나 특혜 차관 등을 통해 군비를 지원하는 유럽 대륙 내 동맹군을 얻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셋째로 군비를 얻기 위해 영국 내 모든 조세를 3배로 증액하고, 자진 헌금의 장려와 10%에 가까운 소득세를 신설했다. 이러한 노력 중에서도 세 번째 정책에 대한 영국민의 태도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막대한 세금 부담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민들은 불평 없이 피트의 정책에 따랐는데, 이것은 영국이 이러한 상황을 감당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31)

나폴레옹의 본토 침입이 영국에게는 대단한 위기의 상황이었으나,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프랑스 함대를 봉쇄하고,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승리하면서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영국의 재해권은 다시 유지되어 나폴레옹은 인도 항로마저 포기해야 했다. 영국에 대한 침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취하면서 영국을 고립하려 했으나 여기에 대해 영국은 제해권의 이점을 살펴 프랑스와 프랑스에 예속된 유럽 국가들의 대양을 통한 무역로를 차단하는 해상 봉쇄령(추밀원령)으로 대응하자, 유럽 내 모든 국가들이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농업에 의존하던 러시아가 가장 심한 고통을 느껴 프랑스가 내린 대륙 봉쇄령에 반발하여 영국과 몰래 해상을 통한 상거래를 시작했다.

결국 1811년 프랑스는 이것을 문제삼아 러시아를 공략했으나 결과적으로 1813년 나폴레옹은 패하게 되고, 이후 영국 주도하에 결성된 유럽 공동 방위군에 의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며 나폴레옹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영국은 이제 유일한 전승국이 되었는데, 그가 수상 시절에 시작한 1차 대륙 회의가 2차, 3차, 4차 까지 계속되면서, 프랑스가 약화될 때마다 대륙 내 국가들과 꾸준히 공조체제를 형성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승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공조 체제는 ‘빈 체제’라고도 하며 ‘유럽 협조 체제’라는 19세기 국제 회의 시대를 열게 해 주었다.




■ 대영제국의 발전

1. 농업 혁명과 산업 혁명의 의미

영국은 1700년경 인구가 550만이었던 것이 1821년경에는 1400만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자연 식량 수요도 증가하여 생산량과 경지 면적의 확장이 절실해졌다. 1750년 이후 타운센트 경이나 털(Tull, J.) 등을 통해서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과학적 농업 기술을 꾸준히 받아들였으며 밭작물을 교대로 심는 윤작법으로 가축의 겨울 사료나 비료 생산에도 혁신이 일어나 농업 경영 및 가축 사육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과학적 영농법이 개발되자 일부 농업 대지주들은 농민들의 많은 손을 쓰지 않고도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었고, 또 일부 대지주들은 아예 농업보다는 목축업을 통해 양모산업으로 뛰어드는 부류들도 생겨났다. 게다가 양모업에 뛰어든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의회 대표권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울타리를 치는 인클로저 법을 정함으로써 제2차 인클로저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소 농민층이 서야 할 땅들이 점차 줄어들자 일부의 자포 자기한 사람들은 북부 도시로 흘러들어가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노동자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농업 혁명은 농민들의 도시 노동자화를 촉진시킴으로써 산업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농사를 계속 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캐나다나 북미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소작인이나 자유 농민의 길을 걸었는데, 이로써 북미에 영국민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 산업혁명

일반적으로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상의 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경제 구조상의 변혁을 우리는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라고 말한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유럽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라틴 아메리카로 확산되어 갔다. 이런 의미에서 산업혁명을 광의(廣義)로 해석하여 농업중심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한 산업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광의(廣義)의 산업혁명은 흔히 공업화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이를 간단히 정의하기는 곤란하지만 물질적 재화의 생산에 무생물적 자원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조직적 경제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산업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세계 최초의 공업화라는 점보다도 근대적 경제성장의 기점이라는 사실에서 찾기도 한다. 영국 산업혁명 과정에서 이루어진 기술진보와 자본축적의 결과 인구보다 빨리 생산이 증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반적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전례없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의 이같은 발전적 측면보다 부정적 귀결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 의하면, 산업혁명을 계기로 자본가가 노동자를, 또 공업화된 선진국이 농산물과 같은 1차산품을 주로 생산하는 후진국을 착취하는 경제관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 영국 산업혁명은 석탄이라는 화석연료의 본격적 이용을 가져온 에너지 혁명이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환경문제의 역사적 기원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산업혁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는 일반적인 점에서 산업혁명의 기원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 및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① 기원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봉건제도가 해체되면서 농촌에서는 자유로운 농민층이 많이 나타났다. 이들 자유농민층을 모체로 하여 농촌 모직물공업이 발달하게 되는데, 농민층 분해의 진전과 함께 선대객주제(先貸客主制)32)와 메뉴팩처의 형태를 취한 초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그 밖의 유럽 여러 나라보다 순조롭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17세기 중엽 절대권력을 일소한 시민혁명․해외시장․식민지 획득, 외국 특히 네덜란드․프랑스와의 상업경쟁에 대한 유효한 중상주의적 정책이 서로 작용하여 본원적 축적이 현저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중요성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사실로서, 르네상스 이래 싹튼 사물(事物)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와 사회 및 자연환경에 대한 무한(無限)한 통제 및 지배의 욕구(欲求)는 17세기의 과학혁명(科學革命)과 18세기의 계몽사상(啓蒙思想)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과학과 기술은 상호보완적으로 꾸준히 발달하면서 환경에 대한 무한한 지배의욕과 결합하여 산업혁명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공업화를 촉진한 가장 중요한 현상은 16세기 이후의 목재자원의 고갈이었으며, 이로 인해 야기된 것이 연료 위기였다. 이 연료 위기를 극복한 기술혁신이 무생물적 자원인 석탄의 조직적 이용이었으며, 그 결과 영국은 1540~1640년에 석탄산업을 중심으로 한 여러 관련산업의 발전이 촉진되어, 18세기 산업혁명에 맞먹을 정도의 생산확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석탄에 대한 수요와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기술적으로 해결을 요하는 당면과제로, 탄갱(炭坑)의 배수문제(排水問題), 석탄의 수송문제, 철광석 용해에 있어서의 기술개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과제들이 사회적․기술적으로 해결되어 가는 가운데 산업혁명에의 조건도 정비되어 갔다. 탄갱의 배수처리는 T.세이버리가 고안한, ‘광부의 친구’라 부르는 펌프, T.뉴커먼의 대기압기관 등 초기 증기기관의 발명을 촉진시키고, 마침내 J.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수력․풍력․축력(畜力)․인력 등 농업사회의 기본적인 동력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동력혁명(動力革命)을 가져왔으며, 산업혁명이라 부를 수 있게 한 기술적인 기초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33) 다른 한편 석탄 수송문제는 도로의 개수, 운하의 건설 등 사회적 간접자본에의 투자를 촉진시킴과 동시에 국내시장의 확대에도 기여했다. 아브라함 다아비(Abraham Darby)에 의한 철광석 용해에서의 코크스로(爐) 제련법의 개발은 철과 석탄 시대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기술혁신이었다. 그 밖에도 농업부분에서의 기술혁신 인클로저34)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토지제도의 근대화 및 대농경영이 농업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한 여러 조건이 정비되고 충실해지는 과정에서 산업혁명은 먼저 면공업(綿工業)에서 일어나게 된다. 영국의 전통적 산업인 모직물 공업에서가 아니라 신흥 면공업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영국이 동인도무역에 의해 17세기 말에 들여온 인도산 캘리코 면직물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있어 의료혁명(衣料革命)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면제품의 수요를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인도 제도에서 나는 설탕․담배 등과 마찬가지로 노예노동에 의한 플랜테이션에 의해 재배된 면화를 원료로 하여, 인도산 캘리코 면직물과 경쟁할 수 있는 면제품을 제조하는 일이 18세기 초의 국민적 과제가 되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도록 추진시킨 것은 전래의 지배계급인 지주나 전통적인 직물업자가 아니고, 주로 상인과 요먼35)이라고 부르는 자영농민층이었으며, 그들 대부분이 비국교도이자 국가의 원조도 없이 자조정신으로 기업을 이룩한 사람들이었다.


② 경과

산업혁명을 주도한 것은 면공업이었다. 18세기 후반의 면공업의 비약적 성장은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크럼프턴의 뮬 방적기와 같은 방적기술의 혁신에 주로 힘입은 것이었다. 방적기술 발전의 결과, 방적부분의 노동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는데, 18세기 인도 수공업자들의 생산력의 약25배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직포부분에서는 카트라이트의 역직기의 발명에 의해서 증기력을 동력으로 하는 기계제 공장생산이 확립되었다.36) 면공업의 급속한 발전은 관련된 모든 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특히 기계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제 생산부문에서는 철공업․석탄업․기계공업의 발전이 현저하여, 석탄과 철의 생산은 급속하게 증대하였다. 철공업의 기술혁신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선철(銑鐵) 생산과정에서의 코크스로(爐) 제련법과 단철(鍛鐵)생산과정에서의 H.코트의 교반 및 압연법이다.37) 또 기계공업에서는 종래의 시계공업 등 정통적인 기술을 전수받으면서 정밀도가 높은 자동선반과 공작기계가 제작되고, 1830년 이후에는 기계에 의한 기계의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산업혁명의 진행은 원료와 상품을 보다 더 빨리, 그리고 석탄과 철과 같은 무거운 화물을 대량으로 수송할 수 있는 육로의 교통수단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1830년 영국의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해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는 리버풀과 맨체스터사이를 시속 약 12마일로 달리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증기기관은 또한 선박에도 이용되었다. 미국의 풀턴이 고안한 증기선은 1807년 허드슨강의 항해에 성공하고, 증기선은 곧 미국과 유럽의 내륙수로(內陸水路)에 이용되었다. 이러한 육로 및 해로에서의 교통수단의 혁신은 원료와 상품의 수송을 쉽게 그리고 빠르게 하고, 나아가서 전세계를 잠재적 시장으로 개방함으로써 산업과 경제의 발달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으며, 세계의 거리를 단축시켜 문화교류에도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변화의 결과 영국에서의 농업인구의 비율은 18세기 중엽의 약 70%에서 급격하게 감소하여, 50년에는 22%로 저하되었다.


③ 산업혁명의 결과 및 의의

산업혁명은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생산수단과 생산조직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즉, 기계를 사용하고, 다수의 노동자를 한 장소에 집중시켜, 감독과 일정한 규율하에 협동적으로 생산작업에 종사케 하는 공장제도(工場制度, factory system)를 출현시키고, 이로 말미암아 자본주의는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 물론 공장제도는 일시에 낡은 생산양식인 가내공업적인 수공업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혁신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공장제도는 가내공업적인 수공업을 압도하게 되었다.38) 뿐만 아니라 공장제도는 모든 공업부문에 확산되고, 새로운 부문을 창출하였다. 새로운 기계와 기술은 또 다른 새로운 발명과 기술의 혁신을 불러 일으키고,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혁신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새로운 제품을, 그것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고 교통기관의 발달은 이를 전세계에 확산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물질면에서의 발전은 경제․사회․정치, 그리고 문화면에서도 광범위하고 복잡한 변화를 야기시키고, 그것은 다시 기술의 혁신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정치적 변화로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산업 부르주아지가 발흥한 결과 종래의 귀족․지주 지배의 정치체제에 동요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신흥 산업 부르주아지는 32년의 선거법 개정에 의해 피선거권을 얻었으며39), 노동자 계급도 일반남자 보통 선거권을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으로 결집되었다. 이렇게 하여 정치투쟁은 자본주의 체제가 그 내부에 잉태한 자본과 임금노동의 모순․대립과 연결되면서 영국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또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산업 부르주아지는 정부가 취한 종래의 중상주의적인 모든 규칙과 통제가 그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한다고 하는 입장에서, 이의 철폐를 위한 강력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 결과 지주적․중상주의적인 모든 규칙은 점차 폐지되었다. 그 주요한 것으로 엘리자베스 도제법(徒弟法)의 폐지(1813~4), 구빈법(救貧法) 개정(1834), 곡물법 폐지(1846), 항해조례(航海條例)의 폐지(1849) 등이 있다. 그밖에 수출입 관세가 인하되었으며, 1860년에는 거의 자유주의의 경제체제가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다만 국제적인 자유주의의 실현에 대해 주의할 점은, 영국의 산업 부르주아지가 자유무역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으면서도 그들 자신이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할 경우에만 자기들을 위해 중상주의적인 보호규제를 이용하면서 자유주의 체제를 실현하였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기계의 수출은 1774년 이후 금지되었으며, 특정 기술을 습득한 노동자의 해외이주를 금지함으로써 다른 나라가 기계제 생산의 유력한 경쟁 상대로 성장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40) 어쨌든 영국의 산업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무역의 추진 과정에서, 세계경제는 선진적․자립적 공업국과 이에 종속된 식민지적․반식민지적 후진국으로 재편되어 갔다. 후진 농업국들은 선진 공업국에 원료를 공급하고 그들의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형태의 국제분업 속에 강제로 편입됨으로써 한층 더 종속적인 지위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영국의 산업혁명은 단순히 영국 한 나라에만 자본주의 확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세계자본주의를 성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산업혁명의 진행과 이에 따른 공업의 발달은 국민소득과 국민생산에서의 공업의 몫을 크게 증가시키고, 농업인구와 노동력을 공업으로 흡수하게 되었다. 새로운 공업지대에는 새로운 도시가 출현하여 농촌인구를 흡수하면서 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고, 공업화이전단계에 비하여 사망률이 급격하게 감소하고, 관료제는 보다 능률적이 되고 중앙집권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날로 새로워지고 발달하는 기술과 공업의 인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교육제도가 마련되고 널리 보급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산업혁명은 오늘의 산업사회가 안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제시하였다. 공장노동자의 수는 공업의 발달에 비례하여 날로 증가하고, 몰락하는 수공업자를 그 진영에 흡수하여 점차로 뚜렸한 계급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 즉 임금노동자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꽤하고, 이를 위한 노동조합의 결성과 파업할 권리, 그리고 나아가서 정치권력에의 참여를 요구하게 되었다.41)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라는 용어는 산업(industry)부문에서 일어난 급격하고 단절적인(revolutionary) 변화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급격한 변화는 앞에서 살펴본 여러 요인에 의한 기계화․공업화로 함축할 수 있다. 이 이른바 공업화는 보다 더 광범위하고 복잡한 변화인 근대화(近代化)의 핵심이었다. 근대화는 유럽의 경우 근대초부터 시작되고 있었으나, 산업혁명으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2. 자유주의로의 움직임

1)노동자들의 불만

나폴레옹과의 전쟁 중 농민들이 전투에 투입되었기에 농업 인력의 부족을 이유로 지주들은 곡물 가격에 폭리를 취했다. 전쟁이 끝나자 1쿼터당 120실링하던 밀 가격이 60실링으로 하락하자 전쟁으로 고물가 시대가 지속할 것으로 생각하고 비싸게 곡물값을 정했던 농업 지주들이 거의 파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이 그들이 의회의 주역들인 젠트리나 소작인(당시 선거권은 40실링 이상을 벌어들이는 자유 농토 보유자에게만 있었음)이었기에 자신들의 권리를 정부에 요구하여 소득세 감면의 혜택을 받음으로써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경우 흉년이 들면서 밀값이 130실링으로 다시 폭등하자 노동자들은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항의하기 시작했다. 전쟁 당시 군수품을 만들고 있던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자 실업자들이 속출했고, 또 오랜 전쟁으로 유럽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피폐해지자 영국 제품을 수용할 능력이 없어져 자연히 영국의 노동자들은 임금면에서도 압박을 받게 되었다.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마저도 정부가 대책을 세워주지 못하자 실업자로 전락하였고 산업 혁명으로 기계에게 인간이 직장을 빼앗기는 상황이어서 노동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을 택했다. 1811년 러다이트(Luddite, 기계 파괴) 운동이 그 시작이며, 이때부터 이러한 운동을 대변하는 혁신주의자들이 나타났다. 헨리 헌트는 ‘보통 선거의 제도화’를 프랜시스 버데트 경과 카트라이트 소령은 ‘직접세 납부자들에게 모두 선거권을 부여하라’고 주장했다.

1819년의 대표적인 노동 운동은 피털루(Peterloo)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 5만명의 노동자가 맨체스터 공업지역을 대표할 사람들을 임의로 뽑아 의회에 보내겠다고 맨체스터 부근 성 피터 광장에 모이자, 정부가 이 모임을 과격하게 해산하면서 5-6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한 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 사건후 노동자 집회와 출판의 자유에 대한 제한 등의 6개 조항으로 된 ‘결사 금지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법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자 1824년 정부는 이를 폐지했다.


2) 제1차 선거법 개정

1830년 조지 4세가 서거하고 윌리엄 4세(1830-1837)가 즉위했다. 이때 새로운 국왕이 즉위한 틈을 타서 농업 노동자들이 14실링의 노동최저임금을 보장해 줄 것을 호소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정부는 이를 불법이라 규정하고 진압하자, 이러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해 줄 어떤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도시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새로운 선거법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은 휘그당원이면서 ‘자유주의적 캐닝파’라 불리며 토리당의 개혁파와 맥을 같이하는 그레이 수상(1830-1834)이었다. 1832년 6월 4일 의회에서 중요 도시에 배정할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중산 도시 시민 계층이 드디어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도시 노동자들의 권익이 하나씩 생겨나게 되었는데, 1833년 공장법을 개정하여 18세 미만의 취업을 제한하고, 이에 따라 처음으로 공장 감독관을 임명했다. 1842년에는 여자와 10세 미만 연소자의 광산 고용이 금지 되었고, 1844년에는 노동시간이 10시간으로 제한되었다. 1850년에는 ‘잉글리시 위크(English Week)’라 해서 토요일은 반휴일, 일요일은 전휴일제가 도입되었다.

한편, 선거권이 도시 중산층에게만 주어지자 이에 불만을 가진 소시민들이 급진적인 방법으로 좀더 개방적인 선거를 요구했다. 이들은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이라는 것을 통해 보통 선거와 비밀 선거, 선거구 평등화, 의회 매년 소집, 하원 의원 유급제, 피선거권의 재산 자격 제한 폐지 등 당시로 봐서는 거의 혁명적인 것들을 요구했다. 이러한 운동을 ‘차티스트 운동(1835-1848)’이라 했는데, 처음에는 집회 시위 등도 허락되어 일부 중소 노동자 계층들과 합류하면서 그 세력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에서 노동자들의 위협적인 폭동 사태가 일어남으로써 이러한 상황이 영국에서도 차티스트들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중산층들이 차티스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1867년 제2차 선거법 개정과 1884년 제3차 선거법 개정 등의 단계적인 절차가 이루어지게 된 것도 이 차티스트들이 영향을 미쳤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3) 반곡물법 운동 전개

선거법 개정 이후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많은 혜택이 주어졌으나 아직 풀리지 않은 근본적인 문제는 식생활 문제와 임금과의 관계였다. 국내 곡물가격의 인상률과 외국 수입 곡물에 대한 철저한 관세장벽으로 노동자들은 임금에서 많은 비중을 식생활에 투자해야만 했다. 결국 수입 곡물에 대한 관세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는 되지만, 이것은 랭커셔 지방의 제조업자들이나 맨체스터의 신흥 공업 도시들은 환영했으나, 농촌지역 지방 귀족들은 ‘곡물세를 폐지하면 영국의 농업은 망한다’며 반대하게 된다.

당시 필(Peel) 수상은 관세를 통한 보호 무역이 결코 영국의 장래를 밝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관세 개혁을 정부 차원에서 과감하게 시작했다. 17세기에 크롬웰 때 항해 조례가 맺어져 보호 무역이 시작된 후 19세기에는 관세 품목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필이 수상직에 있던 당시 1200개나 되는 관세 품목을 1842년에는 750개로 감소시키고, 관세부문에서의 부족한 세액은 150파운드 이상 소득에 대해서 1파운드당 7펜스를 더 부과하는 소득세를 신설함으로써 충당했다. 그리고 1845년에는 450종까지 관세 품목을 줄이면서 점차 필은 보호 무역제를 풀어 나갔지만, 그도 곡물 관세만큼은 국내 농민층의 심한 반발에 부딪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45년에서 1846년 사이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인 감자 농사가 흉년이 들었고, 영국 내에서도 병충해로 인해 곡물을 지원해 줄 정도의 작황이 되지 않자 필은 식량 수입을 자연스럽게 주장하여 곡물법 폐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곡물법의 폐지로 인해 수입 곡물이 영국에 무제한으로 들어오자 그동안 고통을 받던 도시 노동자들은 식생활 비용이 현저하게 감소하여 비록 예전과 같은 임금을 받더라고 실질적으로는 풍족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질 좋은 상품을 생산하게 되었고, 어느 나라와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신감이 들게 되자, 모든 관세를 철폐하고 자유 무역 정책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유주의 사상을 뿌리내리게 해 주었으며, 1850년대부터 유럽 여러 국가들이 국민 국가를 형성하여 자유주의에 도전하기 전인 1850년에서 1880년까지 30여 년 간 영국에게는 황금 같은 시절이었다.



3. 외교정책

자유주의와 산업 혁명 이후 막 성장해가던 상업주의가 합류할 때야 비로소 새로운 영국만의 외교정책이 나올 수 있었다. 이것을 주도한 사람이 파머스턴(1830-1852)이었다.

파머스턴의 정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유주의적인 상업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시장 획득에 있어 방해가 되는 외교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면서도 자국에 피해가 올 때에는 외교적으로 간섭하는 정책으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칫 전쟁을 유발하는 협조 체제하의 동맹(Alliance)이나 정치적인 협력을 통한 세력 균형책은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영국의 고립정책’이라고 한다. 특히 그의 주요한 외교 정책은 ‘영국이 점유하고 있는 인도나 상품 시장으로서 가치 있는 국가들을 보호하는 것과, 이 상품시장을 통과하는 길목에 있는 여타 국가들이 자국의 상업 정책을 추진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파머스턴의 이러한 정책이 정립되었을 때 가장 방해되는 국가는 당시 지중해나 인도양, 심지어는 태평양으로 부동항을 찾아 남하 정책을 펴고 있던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터키와 전쟁을 하면서 지중해를 넘겨다 보고 있었다.

한편, 애버딘(1852-1855)이 수상에 취임하였을 때 잠시 파머스턴이 외교에서 손을 놓은 적이 있는데, 이때 러시아가 터키를 손에 쥐기 위해서 흑해 지방으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 이것은 영국이 북미 식민지를 포기한 후 가장 중시하는 인도로 가는 길목이 러시아에 의해 차단될 위기 상황이었다. 애버딘은 당시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서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실수를 범하게 되고 또 당시 전제 군주이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1822년 이후 영국이 지켜 오던 고립 정책에 대해 역행하는 꼴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러시아가 터키 내 그리스 정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흑해로 내려오자 로마 카톨릭 교도의 보호를 주장하며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했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이 크림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고 여기서 영국은 전비로 7천만 파운드, 2만 5천명의 전사자를 내게 되었다.

이후 파머스턴이 수상으로 복귀하면서 1856년 파리회담을 통해서 터키의 영토 보전과 러시아의 흑해로 진출한 함대의 철수, 마지막으로 전시 항해 법규42)를 채택했다. 결과적으로, 파머스턴이 원하던 대로 러시아가 흑해나 지중해로 내려오는 것을 완전히 봉쇄하게 되었으며, 자유 무역의 외교적 지원도 확실하게 해준 효과를 가져왔다. 이후 파머스턴은 특유의 고립 외교 정책으로 프랑스와의 동맹마저도 결별함으로써 자유주의의 길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4. 자유주의 전성기와 그 후퇴

파머스턴 이후 보수당의 디즈레일리(1868, 1874-1880)와 자유당의 글래드스턴(1868-1874, 1880-1885, 1886, 1892-1895)이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디즈레일리는 국가의 정치기반은 변화시키지 말아야 하며, 변화가 있을 때에도 인간의 본질인 자유가 지켜지는 한도 내에서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영국의 자유 무역 정책이 확고부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영국이 세계적 위신과 의무를 지는 경찰 국가의 역할을 해야 한다며 파머스턴의 외교적 맥락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이는 ‘영국형 제국주의’를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 다른 인물인 글래드스턴은 국민의 요구에 의해서 정책을 자유롭게 변화하는 정부를 믿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처리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전통적인 영국 제도가 파괴되더라도 국민이 원하는 개혁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평화를 원했으며 자국의 도덕적 위신이 제국의 특권보다 크다는 의식을 가지고 국내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서로 생각이나 추구하는 바가 달랐지만 모두 자유주의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예로서는 선거법의 확대를 통해 좀더 도시 노동자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생각한 것을 들 수 있다. 디즈레일 리가 수상직에 있던 1867년에 제2차 선거법이 개정되어 100만 도시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얻을 수 있었고, 1884년에는 글래드스턴에 의해 농업 노동자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진 제3차 선거법 개정이 실시되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파머스턴이 이탈리아가 통일되어 가는 과정을 방해하지 않았던 사실과 그 뒤를 잇는 디즈레일리나 글래드스턴도 프러시아가 보․오 전쟁이나 보․불 전쟁을 거치면서 독일 제국 형성 과정을 그대로 방치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본적으로 다른 사고의 차이가 외교 정책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디즈레일리는 러시아가 크림 전쟁 후 다시 흑해 함대를 건설하고 터키와 싸움을 벌이자 러시아와 전쟁을 불사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뿐만아니라 1857년 인도 내 자치군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가혹하게 진압하고 이후 동인도 회사를 없애고 정부가 직접 통치하게 된다. 이는 그의 제국주의적 사고와 국제적 위신이 충분히 발휘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디즈레일리의 외교는 확보부동한 강경책이었다.

한편, 글래드스턴은 평화 정책을 소중히 여기며 정권을 시작했지만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들의 봉기와 수단에서 발생한 수에즈 운하에 대한 위협 그리고 1885년 아프카니스탄과 조선의 거문도에서의 사태는 그의 외교정책에서 일관성의 상실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정책은 19세기 영국 자유주의 전성기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지만, 결국은 외교문제에 있어서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국내 정치에 밝았던 글래드스턴이 대외적 위신을 존중하며 제국주의자라 불리던 디즈레일리에게 밀리게 된 것은 영국이 점차 제국주의화되어 가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란 굴레 속에서 1870년 초에 독립한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이 점차 산업 혁명의 과정들을 쉽게 극복하며 급속하게 영국의 독점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이때부터 영국은 자유주의 하에서의 제국주의에 위협을 받게 된다.43)

아래에 제시된 표는 지로(R.Girault)교수가 원용한 유럽 주요국가의 권력지표이다. 지로 교수는 5가지 기준으로서 이 권력지표를 작성하였는데 각 기준이 권력지표에 차지하는 비율은 다음과 같이 상이하게 잡았다. ① 인구는 권력지표의 25%, ② 석탄생산은 20%, ③ 주철(鑄鐵) 생산은 10%, ④ 소맥(小麥) 생산은 25%, ⑤ 무역총액은 20% 등으로 하여 작성하였다.


1871년경

1885년경

1900년경

1914년경

영 국

66.2

62.1

59.8

57.3

러 시 아

51.0

52.0

53.8

57.6

독 일

34.6

42.2

54.6

63.7

프 랑 스

48.8

48.7

46.2

46.5

오 ? 헝

26.3

21.7

29.6

27.8

위 지표가 보여 주는 추세는 독일이 급격하게 성장하여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영국을 앞질러 가장 강대한 국가로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영국은 그 힘이 쇠퇴된 것을 말한다.

영국의 전통적인 고립 정책을 마지막으로 주장한 사람은 19세기 말의 솔즈베리 수상(1885-1886, 1886-1892, 1895-1902)이었다. 솔즈베리는 ‘만일 영국이 고립 정책을 포기한다면 어떤 나라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데, 그러면 영국이 그 동안 평화를 유지해 오던 상황이 깨져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더욱더 고립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양자강 주변 지역들이 열강에게 모두 잠식됨에도 불구하고 고립을 주장하던 솔즈베리는, 미 국무장관 헤이(Hay, J.)의 문호개방 선언(1899), 보어 전쟁, 중국에서의 의화단 운동, 그리고 10만 러시아 병력의 만주 투입(1900.8)으로 극동에서 러시아에 대한 무방비 상태 등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이 결국 고립 탈피를 주장하는 체임벌린 식민상이나 1900년부터 외무장관이 된 랜즈다운 등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 보어전쟁(1899~1902)

1880년대 영국은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무력 충돌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가장 심각한 것이 보어인들과의 갈등이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때 희망봉을 합병하여 케이프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는데, 남아프리카에는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17세기에 그곳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을 중심으로 한 보어인(Boers: 네덜란드 어로 ‘남편’ 혹은 ‘농부’를 뜻한다. 네덜란드 계통과 위그노 계통으로 지금은 흔히 아프리카너(Afrikaner)로 부르는 백인 거주민들)도 살고 있었다. 영국으로부터의 이주민과 보어인들과의 갈등이 심화된 것은 1870년~80년대 금과 다이어몬드가 발견되면서였다. 외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자 보어인들의 트란스발 공화국은 외국인에게 경제적, 정치적 차별정책을 취하였는데, 영국인들이 이에 대해서 항의하게 되었다. 이때 케이프식민지의 총독 세실 로즈가 트란스빌을 합병하려고 함으로써 위기가 고조되어, 결국 보어인들이 영국령 나탈(Natal)을 공격한(1899) 결과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육군의 취약성을 보여준 초기 전세에 이어 2년 간에 걸친 전쟁에서 영국은 힘겹게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이 확인시켜준 것은 영국의 힘은 실상 거대하지만, 그 힘은 군사적이 아니라 경제적인 힘이었고 이제 경제적 힘조차도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보어 전쟁은 영국이 당면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인식시켰다. 첫 번째 어려움은 지원병들의 가공할 만한 신체적 상태로서 많은 사람들의 신체적 조건은 군인으로 복무하기에 적합하지 못하였다. 이제 공업지역 환경이 노동계급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병사들의 2/3가 전선에 나가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19세기를 통해서 영국 외교정책은 ‘찬란한 고립’을 추구하였는데, 영국의 고립이 별로 찬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조차 하다는 것이 보어 전쟁에서 입증되었다.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무엇보다도 문제시된 것은 제국을 방어하기 위한 적절한 군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육군이 특히 취약했는데, 그 사실은 보어전쟁 초기에 명백해졌던 것이다. 1871년 솔즈베리의 계산에 의하면 유사시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각각 1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러시아는 150만 명의 동원이 가능한 데 비해, 영국은 단지 10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영국이 친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동맹국을 원하게 된 영국은 처음에는 독일을 그 상대로 생각했지만, 비스마르크가 은퇴하고 빌헬름 2세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독일과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특히 독일 해군력의 증강이 의혹을 낳았다. 독일과의 동맹 가능성이 결렬되자 영국은 일본과 영일동맹(1902)을 체결하였다. 영일동맹은 영국이 고립으로부터 탈퇴하기 위해서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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