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TV방송원 리춘히(<조선>2008년 4월호)
최근 남한의 주요 언론들을 북한의 여자 아나운서 얘기를 비중있게 보도했다. “북한 조선중앙TV 앵커 이춘히”라는 제하(題下)의 기사에는 북한이 65살이나 된 ‘간판 여성앵커에 승용차 등 특급대우’를 하고 있다는 얘기 등이다.
북한이 정부나 외무성 성명 등을 통해 비중있는 사안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할 때마다 조선중앙TV에 단골로 등장하는 리춘히 얼굴은 가끔 남한 TV 뉴스에서 접하게 되는 인물이다.
북한이 정부나 외무성 성명 등을 통해 비중있는 사안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할 때마다 조선중앙TV에 단골로 등장하는 리씨는 '인민방송원'과 '노력영웅'의 칭호를 갖고 북한TV의 메인뉴스인 저녁 8시 뉴스 앵커도 맡고 있다. 다음은 “TV방송원 리춘히”의 전문(全文)이다.
우리 인민은 TV화면을 통하여 친숙해진 조선중앙방송위원회 방송원 리춘히를 무척 사랑한다. 박력있고 호소성이 강한 쇠소리나는 목청으로 시청자들을 강성대국건설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는 65살의 방송원 리춘히, 인민방송원, 로력영웅으로 되기까지의 그의 성장의 갈피갈피에는 어떤 사연들이 깃들어 있는 것인지?!
일제의 군사적강점하에 있던 조선이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7월 8일 그는 강원도 통천의 한 바다가마을에서 전공의 딸로 태여났다. 옥동녀가 태여난것은 그의 가정의 기쁨이였지만 가난한 살림으로 하여 춘히는 부모의 설음만 더해주였다.
주체34(1945)년 8월 15일 김일성주석께서 나라를 해방시켜주시여 이들의 운명을 달라졌다.나라에서는 무료교육으로 그를 중학교와 조군실고급학교(당시)에서 공부시켜 주었고 그의 남다른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평양연극영화대학 배우과에 입학시켰다.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연극단에서 배우생활을 하던 그는 1971년 2월 방송원이 되였다. 방송에 대한 초보적인 개념도 모르고 마이크를 잡고 일을 시작한지 얼마안되던 그해 5월 18일이였다. 춘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 그를 만나시여 따뜻한 사랑과 믿음을 주시며 일을 잘하라고 고무해주시였던것이다. 그 사랑과 믿음은 그를 훌륭한 방송원으로 될수있게 한 원동력으로 되었다. 37년간 그는 언제나 그날의 영광을 심장깊이 간직하고 화술형상을 익히기 위해 피타는 노력을 바쳤다.
매일 출퇴근길에서는 물론 어쩌다 병원이나 료양소에서 치료를 받는 기간에도 거의 화술형상훈련은 계속되였다. 방송원고의 매글자, 글줄 마다에는 그의 고심어린 사색과 탐구가 깃들지 않은것이 없었다.
이러한 나날들을 거쳐 그는 보도를 할때면 호소성이 강하게 하여 시청자들의 심금을 틀어잡고 인터뷰, 좌담회, 기념무대에 나서면 대중과의 호흡을 다감하게 하여 시간가는줄 모르게 하며 성명, 담화를 발표할때면 적들의 간담이 서늘해지게 맵짜게 답새겨되는 만능의 화술적재능을 소유한 뛰여난 방송원으로 성장하였다.
수도 평양의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있는 그의 가정에는 남편과 두아들 그리고 며느리, 손녀가 살고있다. 현대적인 살림집도 고급승용차도 다 나라에서 선물로 준것이다. 춘히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나무는 땅이 좋아야 무성하고 인생은 령도자를 잘 만나야 복된다고들 하였다. 그는 존경해마지않는 김정일령도자께 로력영웅칭호를 수여받고 감사의 편지를 올리였다. 걸음걸음 키워주고 이끌어주신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와 함께 조국과 끝까지 운명을 같이하는 열렬한 동행자가 되겠다는것을 맹약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