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퍼는 2010년 말더듬이 영국 왕 조지 6세와 언어치료사간의 인간적 관계를 감동적으로 그린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 2010)를 연출하여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작비 1천5백만 달러를 들인 이 영화는 미국에서만 1억3천8백7십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특히 이 영화는 201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서 최우수남우주연상(콜린 퍼스), 최우수각색상을 수상했다. 후퍼는 이 작품으로 최우수감독상을 거머쥐면서 다시 한 번 탁월한 연출력을 입증했다.
그리고 이어서 후퍼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고전소설을 뮤지컬 형식으로 각색한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을 내놓음으로써 전 세계 관객을 열광케 했다. 제작비 6천1백만 달러를 들인 이 대작영화는 미국에서만 1억4천8백만 달러 이상을 벌어 들었다. 이 영화는 2013년 아카데미(Academy Awards) 시상식에서 최우수 조연여우상(앤 해서웨이), 분장상, 음악효과상을 수상했다. 후퍼의 최근작은 <대니쉬 걸>(The Danish Girl, 2015)인데, 트랜스젠더(transgender)인 한 예술가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열연한 앨리샤 비칸더(Alicia Vikander)는 2016년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우리를 울리는 장발장의 삶
책의 분량
<레 미제라블> 완역판을 읽었다. <안나 까레니나>도 한 수 접어야 하는, 어이없는 분량이다. 지난 1년간 읽은 두꺼운 책 세 권의 "분량"에 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뺄 살이 없다. 표준근육형.
<안나 까레니나> - 빼야 할 살이 좀 있다. 그러나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레 미제라블> - 심각한 고도비만.
<레 미제라블>은 크게 서사 부분과 저자의 개인 소감 부분으로 나뉜다. 저자의 개인 소감 부분은 전체 분량의 1/3 내지 40%에 이른다.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부분들은 챕터 하나씩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어, 그냥 그 챕터를 날려버리면 되니 편집 방법도 아주 간단하다.
워털루 전투, 루이 필립, 19세기 프랑스의 은어, 파리의 하수도 체계에 관해서 흥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호기심을 굳이 빅토르 위고의 도움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이 소설에 저런 잡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등장인물의 입을 빌렸어야 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늘어 놓는 대주교 이야기는 단연코 이 소설의 핵심 장면 중 하나다.
<레 미제라블>의 힘
<레 미제라블>은 장발장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발장의 죽음으로 끝난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이 장발장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장발장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또한 없다. 핵심이 되는 인물들을 추려 보자. 장발장, 미리엘 주교, 자베르, 팡틴, 코제트, 마리우스, 테나르디에 부부, 가브로슈, 에포닌 정도다. 이중 가브로슈와 에포닌을 제외하면 모두 장발장이라는 캐릭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9명이 너무 많으니 5명 정도로 줄여야 한다면, 장발장, 자베르, 팡틴, 코제트, 마리우스다. 장발장을 중심으로 하는 수레바퀴가 완성된다.
<레 미제라블>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가지는 흡인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물론 서사다. 그것도 장발장이라는 인물의 서사다. 미리엘 주교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지만, 장발장을 변화시키는 데서 그의 임무는 끝난다. 팡틴의 서사는 매우 강력하지만, 서사의 길이 만큼 그 울림도 제한적이다. 주인공의 대척점에 선 캐릭터로서 자베르는 대단히 중요한 캐릭터이자 상징이지만, 장발장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자베르는 독자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코제트의 서사는 장발장 다음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장발장의 죽음 이후, 공주와 왕자는 다만 행복하게 살았을 따름이다. 코제트는 장발장이라는 캐릭터가 미리엘 주교에게 받은 미션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퀘스트에 가깝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에는 장발장과 함께 코제트가 등장하지만, 이 장면들에서 독자가 이입하는 대상은 코제트가 아니라 장발장이다. 게다가 코제트의 캐릭터성은 등장인물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약한 편에 속한다. 코제트보다 평면적인 캐릭터는 아젤마 정도밖에 생각하기 어렵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마리우스의 서사는 이 소설의 주요 서사 중 가장 약하다. 이 서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아이러니이고, 그 아이러니의 대상인 테나르디에는 마리우스에게 있어 코제트보다 중요하다. 마리우스의 캐릭터성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라면, 그와 혁명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약하고 우연적인 연결고리다. 코제트에 대한 오해가 아니었다면, 그는 바리케이드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장발장에서 시작하고 그에게로 되돌아온다.
테나르디에 부인은 배우빨
장발장의 삶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이판 <장발장>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축복을 받으며 죽어가는 그의 모습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아련히 기억 나는 삽화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이제 다시 읽은 소설에서 그의 죽음은 따뜻하다고 하기에 너무 불쌍하다. <레 미제라블>을 처음 한글로 번역한 최남선은 소설 제목을 <너 참 불쌍타>라고 했다는데, 불쌍한 그 사람이 바로 장발장이다. (원제에서 복수인 불쌍한 사람들이 단수로 축약된 것은 넘어가자.) 죄수의 신분으로 쫓기는 장발장이 아니라, 모든 고난을 극복했으나 코제트를 떠나보내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다.
장발장은 그야말로 <생불>이다. 자신에 대한 악의로 가득한 스토커 자베르를 살려 보냈고, 완벽한 타인인 포슐르방, 연적이나 다름없는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며, 누명을 쓴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마들렌 시장이라는 명예를 버리고 장발장이라는 정체를 드러내고 도망자가 되었으며, 언제나 남에게 베풀었고, 스스로는 거지나 다름없는 검소한 삶을 살았다. 이 모든 장면들이,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들이다.
나는 포슐르방을 구하기 위해 마차를 들어 올리는 장면, 그리고 장발장이라는 누명을 쓴 사내의 소식을 듣고 밤새 고민하는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그러나, 가장 눈물 나는 장면은 코제트와 연을 끊은 그가 홀로 살아가며 고통 받는 장면이다. 테나르디에의 이기적인 술수 덕분에, 마리우스는 장발장의 진실을 알고 그를 찾아가게 된다. 그래서 장발장은 죽기 직전에 코제트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