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판_39p, The column passed the wood-processing factory, built by prison labor, the workers' settlement(the huts had been assembled by prisoners too, but the inhabitants were civilians), the new club (convict-built in entirety, from the foundations to the mural decorations-but it wasn't they who saw the films there), and then moved out into the steppe, straight into the wind heading for the reddening dawn. Bare white snow stretched to the horizon, to the left, to the right, and not a single tree could be seen on the whole expanse of steppe. A new year, 1951, had begun, and Shukhov had the right to two letters that year. He had sent his last letter in July and got an answer to it in October. At Ust-Izhma the rules had been different: you could write once a month. But what was the sense of writing? He'd written no more often then than now. Ivan Shukhov had left home on June 23, 1941. On the previous Sunday the people who'd been to Polomnya to attend Mass had said: War! At Polomnya they'd learned it at the post office but at Temnenovo no one had a radio in those days. Now, they wrote, the radio roared in every cottage-it was piped in. There was little sense in writing. Writing now was like dropping stones in some deep, bottomless pool. They drop; they sink-but there is no answer. You couldn't write and describe the squad you were working with and what kind of squad leader Andrei Prokofievich was. Just now he had a good deal more to talk about with Kilgas the Lett than with his family at home. Neither did the two letters a year they sent him throw much light on the way they were living. The kolkhoz had a new chairman-as if that hadn't happened regularly! It'd been amalgamated with neighboring farms-that'd happened before, too, but afterward they'dreduced it to its former condition. And what else? The farmers were failing to fulfill their quota of work days-or the individual plots had been cut down to one third acre, and some people's right back to the cottage walls. 대열은 죄수들이 지은 목공소와, 노동자 부락(그 오막살이들도 역시 죄수들이 지었다. 그러나 거주자는 민간인들이었다)과, 새 클법을(기초 공사에서 벽장식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죄수들의 손으로 지은 것이다)-그러나 거기에서 영화는 보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지나서, 이윽고 스텝지대로 나와, 바람을 정면으로 받고, 붉어지는 동쪽을 향해 전진했다. 흰 눈이 벌거벗은 듯이 지평선까지,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뻗혀 있다. 저 멀리까지 눈 덮인 광야가 펼쳐져 있다. 좌우로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스텝의 어느 지역에도 나무 한 그루 볼 수 없었다. 1951년 새해가 시작되었었다. 그런데 그 해에 슈호프는 2통의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편지를 7월에 보냈었다. 그리고 10월에 그 편지의 답장을 받았다. 우스찌 이지마에서는 규칙이 달랐었다. 한 달에 한 통씩 쓸 수 있다. 그러나 편지를 써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는 그 때도 지금보다 더 자주 쓰지 않았었다. 이반 슈호프는 1941년 6월 23일 고향을 떠났었다. 그 전 일요일에 미사에 참석하러 뽈롬냐에 갔다 온 사람들이 말했었다. 전쟁이 났다. 뽈롬냐에서 그들은 그 사실을 우체국에서 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네 템네뇨보에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편지에 의하면 집집마다-유선방송이 설치되어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고 했다. 요즘에는 편지 쓰는 것이 어떤 심연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별 의미가 없었다. 돌은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반향이 없다. 함께 일하고 있는 팀과 팀장 안드레이 쁘로꼬피예치가 어떤 사람인지를 편지에는 자세히 쓸 필요가 없었다. 바로 지금은 그는 고향의 가족들보다 라뜨비아인 낄리가스와 함께 할 이야기가 훨씬 더 많았다. 고향에서도 그에게 1년에 2통씩 편지를 보냈으나 가족들의 생활상을 많이는 알지 못했다. 콜호스 위원장은 한 해에 한 번씩 바뀌는 모양이었고, 콜호스는 예전에도 한 번 합쳐졌다가 다시 분할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집단 농장에 새로운 위원장이 생겼다느니-마치 그런 일이 정기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집단 농장을 이웃 농장들과 병합했었으나-그런 일은 역시 전에도 있어 왔다. 그리고 그 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작업량을 완수하지 못한 농부들은-개인 용지를 1,500 평방미터로 축소 당했고, 어떤 사람들은 바로 집 담까지 용지를 축소당했다느니 하는 소식이다.
[영문판_40p, What he couldn't take in was the fact that, as his wife wrote, the number of people in the kolkhoz hadn't grown by a single soul since the war. All the young men and women, without exception, had managed to get away to work in factories or in the peat-processing works. Half the men hadn't come back from the war at all and, among those who had, were some who cold-shouldered the kolkhoz. They lived in the village and worked on the side. The only men on the farm were Zakhar Vasilych, the manager, and Tikhon, the carpenter, who was turned eighty-four, had married recently, and already had children. The kolkhoz was kept going by the women who'd been there since 1930. There was something about this that Shukhov couldn't understand-"living in the village and working on the side." He'd seen life in the days of private farming and in the days of the kolkhozes too, but that men weren't working in their own villages-this he couldn't swallow. Sort of seasonal workers, were they? Going out travelling? But then how did the village manage with the hay-making? They'd given up seasonal work a long time back, his wife had replied. They didn't go out carpentering, for which that part of the country was famous; they didn't make osier baskets, for no one wanted them these days. But they did have a craft, a wonderful new craft-carpet painting. Someone had brought stencils back from the war and from that time it had become so popular that the number of those carpet painters grew and grew. They had no steady jobs, they didn't work anywhere, they helped the kolkhoz for a month or so, just at the hay-making or the harvesting, and for that the kolkhoz gave them a chit saying that so-and-so, a member of the kolkhoz, had been released to carry on his work and that the kolkhoz had no claim on him.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아내가 쓴 편지에 의하며, 집단농장의 인원이 전쟁 이후 단 한 명도 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젊은 남자와 여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공장이나 이탄 채굴장으로 용케도 일하러 떠났었다. 남자들의 절반이 전쟁터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 사람들도 집단 농장을 무시했었다. 그들은 마을에서 살면서 일은 부업으로 했다. 농장에서 일하는 유일한 남자는 팀장 자하르 바실리이치와 목수 찌온이었다. 찌혼은 84살이 넘었는데도 최근에 결혼해서 벌써 아이를 낳았다. 그 집단농장은 1930년 이후 죽 그곳에 있었던 부인네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슈호프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을에 살면서 일은 부업으로 한다 는 것이었다. 그는 개인농의 생활도, 집단농장의 생활도 모두 경험해 보았었다. 그러나 그 남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마을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니-이 사실을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계절적인 노동자에 속하는가? 그런가? 여행을 떠났는가? 그러나 그렇다면 마을의 건초는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었는가? 그의 부인의 대답에 의하면, 그들은 계절적인 작업을 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목수 일러 하러 외출한 것도 아니었다. 그 마을은 목수 일로 유명했던 것이다. 버드나무 가지로 바구니를 짜는 일도 치워버린지 오래고, 이젠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꼬리 버들가지 바구니도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기술, 어떤 새롭고, 굉장한 기술을 도입했다-양탄자 도장 기술이었다. 어떤 사람이 전쟁에서 스텐슬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때부터 그 일은 인기가 좋아져서 날이 갈수록 양탄자 도장공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고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에서도 일하지 않았다. 그들을 한 달 정도, 건초 만들 때나 추수 때만 집단농장 일을 왔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집단농장은 그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해 주었다. 모모 집단농장 회원은 그의 개인의 일을 해도 좋으며 집단농장은 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적힌 신분증이었다.
[영문판_41p, And they traveled all over the country, they even flew in airplanes to save time, and they piled up rubles by the thousand and painted carpets all over the place. Fifty rubles a carpet made out of any old sheet you could spare-and it didn't seem to take them more than an hour to make a carpet of it. And Shukhov's wife nursed the strong hope that when Ivan returned he too would become one of those painters. Then they'd raise themselves out of the poverty in which she was living and they'd send the children to a technical school and build a new cottage instead of the old broken-down one.All the carpet painters were building new cottages and now, near the railway station, the cottages had gone up in price from five thousand to all of twenty-five. Then Shukhov asked his wife to explain to him how he, who'd never been able to draw in his life, was going to become a painter. And what were those beautiful carpets like? What did they have on them? His wife answered that you'd have to be an utter fool not to be able to paint the patterns; all you had to do was to put the stencil on and paint through the little holes with a brush. There were three sorts of carpets, she wrote: the "Troika," an officer of the hussars driving a beautiful troika; the "Reindeer"; and a third with a Persian-style pattern. They had no other designs, but people all over the country were glad to get these and snatch them out of the painters' hands. Because a real carpet cost not fifty but thousands of roubles. How Shukhov longed to see just one of those carpets! During his years in prisons and camps he'd lost the habit of planning for the next day, for a year ahead, for supporting his family. The authorities did his thinking for him about everything-it was somehow easier that way. 그리고 그들은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천 루블을 모았으며 가는 곳마다 양탄자를 도장해 주었다. 어떤 사람이 아끼는 어떤 나락은 시이트를 고쳐서 양탄자를 하나 만들어 주고 50루블을 받았다-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양탄자를 한 장 도장하는데 한 시간 이상은 걸리지 않는듯했다. 슈호프의 아내는 이반이 돌아오면 이반 역시 그런 도장공이 되었으면 하는 강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녀가 지금 처해 있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아이들도 기술학교에 보낼 수 있으며 낡아 부서질 것 같은 집 대신에 새 집도 지을 수 있을 것이었다. 양탄자 도장공들은 모두 새 집들을 짓고 있었다. 지금 철도역 부근의 집들은 그 값이 5,000 루블에서 25,000 루블까지 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슈호프는 자기 부인에게 평생 그림이라고는 그려 본 적이 없는 그리고 훌륭한 벽걸이 카펜을 어떻게 염색한다는 것이냐, 무늬는 어떤 것을 그려넣느냐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가 어떻게 하면 도장공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양탄자가 어떻게 생겼는가? 그들은 거기다가 무엇을 그리는가? 그의 아내는 화답하기를 안전한 바로가 아닌 이상 본 대로 그릴 수는 있다고 했다. 본을 올려놓고 붓으로 작은 구멍을 통하여 칠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세 가지 종류의 양탄자가 있다고 했다. ‘트로이카’는 아름다운 삼두마차를 이끄는 장교의 그림이었다. 그 다음은 ‘순록’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페르시아식 무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국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얻는 것을 대단히 좋아해서 도장공들에게서 강탈하듯 받아 갔다. 왜냐하면 진짜 양탄자의 값은 50루블이 아니고 수천 루블이었기 때문이다. 감옥과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내일과 내년과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습관을 상실했다. 수용소 당국이 그를 대신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생각해 주었다. 어쨌든 그것이 더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