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_17_220p The widening horizon
We have rested on the laurels of universal elementary education for the best part of a century, and have still not advanced very far or very quickly towards universal higher education. This did not matter so much when we led the world. It matters more when we are being overtaken by others in a greater hurry than ourselves, and when the pace has everywhere been speeded up by technological change. 우리는 왕관에 안주해 왔다. 보편적인 기초 교육에 대한 자부심으로 왕관에 안주해 왔다. 1세기 동안이나. 그리고 아직 보편적인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멀리 빠르게 가고 있지 못하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세계를 리딩하고 있을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문제가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추월당하고 있을 때는. 그리고 그 페이스가 기술변화에 의해 더 속도를 높여가고 있을 때는.
For the social revolution and the technological revolution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are part and parcel of the same process. If you want an academic example of the process of individualization, consider the immense diversification over the past fifty or sixty years of history, or of science, or of any particular science, and the enormously increased variety of individual specialization’s which it offers. But I have a far more striking example of the process at a different level. More than thirty years ago a high German military officer visiting the Soviet Union listened to some illuminating remarks from a Soviet officer concerned with the building up of the Red air force: We Russians have to do with still primitive human material. We are compelled to adapt the flying machine to the type of flyer who is at our disposal. To the extent to which we are successful in developing a new type of men, the technical development of the material will also be perfected. The two factors condition each other. Primitive men cannot be put into complicated machines.' 사회 혁명과 기술혁명과 과학 혁명은 동일 과정에 있는 내에 있는 일부분이다. 만약 당신이 개인화 과정에 대한 학문적인 예를 원하면 거대한 분화를 살펴보라. 지난 50~60년간 진행되었던, 또는 과학의, 또는 특정한 과학의, 광범위하게 증가된 개인적인 전문화의 다양성을. 그런 것들이 제공한 개인적인 전문화의 다양성을. 나는 더 눈에 띄는 과정의 예를 가지고 있다. 다른 차원에서. 30년 이상 전에 고위 독일 군사 장교가 소련을 방문했다. 그리고 눈에 띄는 말을 들었다. 소련 장교로부터. 그 장교는 적군의 군사 훈련을 책임지고 있었다. 우리 러시아 인들은 아직은 원시적인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우리는 비행기를 가용 가능한 조종사 타입에 적응시켜야 한다. 우리가 새로운 타입의 사람들을 발달시키는 정도에 따라 물질적인 기술 발달도 또한 완벽해 질 것이다. 그 두 요인들은 서로 서로 제약한다. 원시적인 사람들은 복잡한 기계들에 적용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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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a bare generation later, we know that Russian machines are no longer primitive, and that millions of Russian men and women who plan, build, and operate these machines are no longer primitive either. As a historian, I am more interested in this latter phenomenon. The rationalization of production means something far more important - the rationalization of man. All over the world today primitive men are learning to use complicated machines, and in doing so are learning to think, to use their reason. The revolution, which you may justly call a social revolution, but which I will call in the present context the expansion of reason, is only just beginning. But it is advancing at a staggering pace to keep abreast of the staggering technological advances of the last generation. It seems to me one of the major aspects of our twentieth-century revolution. Some of our pessimists and sceptics will certainly call me to order if I fail at this point to notice the dangers and the ambiguous aspects of the role assigned to reason in the contemporary world. 오늘날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안다. 러시아 기계들은 더 이상 원시적이지 않다. 수백만의 러시아 사람들은 이러한 기계들을 설계하고, 생산하고 작동한다. 그들 또한 원시적이지 않다. 역사가로서 가는 후자의 현상에 더 관심이 간다. 생산의 합리화는 더 중요한 인간의 합리화를 의미한다. 전 세계적으로 원시적인 사람들은 복잡한 기계 사용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에 의해 그들의 이성을 생각하고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그 혁명은, 당신은 정당하게 사회혁명이라고 불러도 되지만, 그러나 나는 현재의 문맥을 위해서 이성의 확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단지 이제 시작이다. 그것은 맹렬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30년간의 급속한 기술 발달에 발맞추느라. 이것은 20세가 혁명의 주요한 측면인 듯하다. 어떤 비관주의들이나 회의론자들은 나에게 항의할지 모른다. 만약 내가 어떤 사실을 간과한다면. 현대 세계에서 이성에 부과된 역할의 위험성이나 애매한 측면을 간과한다면.
Chapter 6_19_222p The widening horizon
In an earlier lecture I pointed out that increasing individualization in the sense described did not imply any weakening of social pressures for conformity and uniformity. This is indeed one of the paradoxes of our complex modern society. Education, which is a necessary and powerful instrument in promoting the expansion of individual capacities and opportunities, and therefore of increasing individualization, is also a powerful instrument in the hands of interested groups for promoting social uniformity. 지난 강좌에서 나는 언급한 적 있다. 증가하는 개인화라고 해서 사회적 압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획일성과 통일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 한 적 있다. 이것은 사실 복잡한 현대 사회의 역설들 중의 하나이다. 교육은 필요하고 강력한 도구이다. 개인적인 능력들과 기회들의 확장을 올리는 데 있어서. 그리고 그러므로 증대하는 개인화는 또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이익집단들의 손에 의해서 사용될 때는, 사회적 획일성을 촉진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Pleas frequently heard for more responsible broadcasting and television, or for a more responsible press, are directed in the first instance against certain negative phenomena which it is easy to condemn. But they quickly become pleas to use these powerful instruments of mass persuasion in order to inculcate desirable tastes and desirable opinions - the standard of desirability being found in the accepted tastes and opinions of the society. Such campaigns, in the hands of those who promote them, are conscious and rational processes designed to shape society, by shaping its individual members, in a desired direction. Other glaring examples of these dangers are provided by the commercial advertiser and the political propagandist. 호소들이 자주 들린다. 좀 더 책임 있는 방송과 TV에 대해서, 그리고 좀 더 책임있는 신문에 대해서. 이런 호소들은 우선 첫 번째로 향한다. 어떤 부정적인 현상들에 대해. 그런 것들에 대해 우리는 쉽게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곧 호소가 된다. 이 강력한 도구들을 대중 설득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호소가 된다. 바람직한 취향과 바람직한 의견들을 주입시키기 위한 대중 설득, 바람직하다의 기준은 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취향과 의견들이 된다. 그런 캠페인들은 그들을 고양시키려는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과정들이 된다. 사회를 만들려고 설계된 이성적인 과정. 개인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하려는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과정들. 이와 같은 위험들의 다른 눈에 띄는 예들은 상업적인 광고가와 정치적 선동가에 의해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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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wo roles are, indeed, frequently doubled; openly in the United States, and rather more sheepishly in Great Britain, parties and candidates employ professional advertisers to put themselves across. The two procedures, even when formally distinct, are remarkably similar. Professional advertisers and the heads of the propaganda departments of great political parties are highly intelligent men who bring all the resources of reason to bear on their task. Reason, however, as in the other instances we have examined, is employed not for mere exploration, but constructively, not statically, but dynamically. Professional advertisers and campaign managers are not primarily concerned with existing facts. They are interested in what the consumer or elector now believes or in events only in so far as this enters into the end-product, i.e. what the consumer or elector can by skilful handling be induced to believe or want. 두 개의 역할들은 중복되어 있다(?) 배가된다(?). 미국에서는 공개적으로, 영국에서는 약간 부끄러운 것으로. 그리고 후보자들은 전문적인 광고업자들을 채용한다. 자기 자신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이 두 과정은 공식적으로는 다르지만,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전문적인 광고가들과 큰 정당의 선정부의 간부들은 고도로 지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성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그들의 목적에 맞게 가져온다. 이성은 하지만 다른 경우에서 우리가 조사해 본 봐와 같이 도입된다. 단지 연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건설적으로, 그리고 정적으로서가 아니라 동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전문적인 광고가들과 선거 운동가들의 관심은 현존하는 사실들이 주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더 관심 있어 한다. 소비자나 유권자가 지금 믿는 것이나 사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을 때만 관심이 있다. 이런 것들이 최종 목적물에 들어가는가? 즉, 소비자나 유권자들을 능숙하게 조정하여 믿거나 원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것들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Moreover, their study of mass psychology has shown them that the most rapid way to secure acceptance of their views is through an appeal to the irrational element in the make-up of the customer and elector, so that the picture which confronts us is one in which an elite of professional industrialists or party leaders, through rational processes more highly developed than ever before, attains its ends by understanding and trading on the irrationalism of the masses. 더욱이 대중 심리학에 관한 그들의 연구는 보여 왔다. 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비이성적인 요소에 호소하는 것이라는 것을. 소비자나 유권자들의 심리 구조에 있는 비 이성적인 요소에 어필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림은 아래와 같다. 전문적인 산업가들이나 정당 지도자들 같은 엘리트들은 이성적인 과정을 통해서 전보다 더 발달된 합리적, 이성적 과정들을 통해서 그들의 목적들을 달성한다. 대중들의 비이성적인 면을 이해하고 파악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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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ppeal is not primarily to reason: it proceeds in the main by the method which Oscar Wilde called 'hitting below the intellect'. I have somewhat overdrawn the picture lest I should be accused of underestimating the danger. But it is broadly correct, and could easily be applied to other spheres. In every society, more or less coercive measures are applied by ruling groups to organize and control mass opinion. This method seems worse than some, because it constitutes an abuse of reason. In reply to this serious and well-founded indictment I have only two arguments. 호소는 주로 이성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 ‘지성의 아래쪽을 친다.’는 방식에 의해 진행된다. 나는 약간의 과장된 그림을 그려왔다. 내가 그 위험을 과소평가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옳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사회는 어느 정도까지는 강제적인 조치들이 적용된다. 지배 집단에 의해서 대중들의 의견을 조직하고 조종하기 위해서. 이 방법이 다른 것보다 더 나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이성의 남용이라는 것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진지하고 정당한 비난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주장을 갖고 있다.
The first is the familiar one that every invention, every innovation, every new technique discovered in the course of history has had its negative as well as its positive sides. The cost has always to be borne by somebody. I do not know how long it was after the invention of printing before critics began to point out that it facilitated the spread of erroneous opinions. Today it is a commonplace to lament the death-roll on the roads caused by the advent of the motor-car; and even some scientists deplore their own discovery of ways and means to release atomic energy because of the catastrophic uses to which it can be, and has been, put. Such objections have not availed in the past, and seem unlikely to avail in the future, to stay the advance of new discoveries and inventions. 첫 번째는 익숙한 것이다. 모든 발명품, 모은 혁신, 모든 기술은 역사상에서 발견되었을 때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긍정적인 면들도 있어왔지만. 희생은 누군가에 의해 있어 온 것이다. 나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모르겠다. 인쇄술의 발명 후에. 비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그것이 나쁜 여론들을 퍼뜨리는 것을 조장한다는 비난 오늘날 슬퍼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도로에서 교통사고의 사망률을 슬퍼하는 것. 자동차의 도래 이래로. 그리고 일부 과학자들은 그들의 발견을 통탄한다. 원자력 에너지의 방법과 수단을 발견할 것에 대해 왜냐하면 원자력이 할 수 있는 또는 해 왔던 재난적인 사용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한 것에 대해 통탄한다. 이런 반대들은 과거에 소용이 없어 왔다. 그리고 미래에도 그럴 것 같다. 새로운 발견들과 발명들의 진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역사란 무엇인가_시즌2] 225~230(90+29*5)p_3월 28일(월)
Chapter 6_22_225p The widening horizon
What we have learned of the techniques and potentialities of mass propaganda cannot be simply obliterated. It is no more possible to return to the small-scale individualist democracy of Lockeian or liberal theory, partially realized in Great Britain in the middle years of the nineteenth century, than it is possible to return to the horse and buggy or to early laissez-faire capitalism. But the true answer is that these evils also carry with them their own corrective. 우리가 배워왔던 대중 선전의 기술들과 가능성들은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소규모의 개인주의 시대 로크의 민주주의 시대나 자유주의 이론 민주주의 시대로 돌아 갈 수 없다. 이런 것들은 19세기 중간 영국에서 일부 실현된 것이었다. 당연히 말이나 마차의 시대나 자유방임주의 초기의 발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정답은 이와 같은 폐단은 그것의 교정책과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The remedy lies not in a cult of irrationalism or a renunciation of the extended role of reason in modern society, but in a growing consciousness from below as well as from above of the role which reason can play. This is not a utopian dream, at a time when the increasing use of reason at all levels of society is being forced on us by our technological and scientific revolution. 그 교정책은 비이성주의 숭배나 현대 사회에서 확대된 이성의 역할 폐기가 아니라 이성이 행사할 수 있는 역할의 철두철미한 인식의 증가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토피아적인 꿈이 아니다.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이성의 역할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성의 사용이 증가하는 것은 기술적인, 과학적인 혁명에 의해 강제되고 있는 중이다.
Like every other great advance in history, this advance has its costs and its losses, which have to be paid, and its dangers, which have to be faced. Yet, in spite of sceptics, and cynics, and prophets of disaster, especially among the intellectuals of countries whose former privileged position has been undermined, I shall not be ashamed to treat it as a signal example of progress in history. It is perhaps the most striking and revolutionary phenomenon of our time. 모든 다른 역사에서의 진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진전은 비용과 손실이 있다. 지불되어야 할. 그리고 위험이 있다. 직면해야 할. 하지만 냉소주의자들, 파멸의 예언자들 특별히 한 때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있다 점점 그 위치를 잃어가는 나라에 속해 있던 나라의 지성인들 사이에 많이 발견되는 냉소주의자들, 파멸의 예언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역사에서 진보의 눈에 띄는 예로서 간주하더라도. 아마 이런 것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눈에 띄고 혁명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