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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history_시즌2

[역사란 무엇인가_시즌2] 60~66(60+6*1)p_7월 1일(금)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7.01|조회수48 목록 댓글 0

Chapter 2_15_60p The Society and Individual

But some historians in periods of rapid change have reflected in their writings not one society and one social order, but a succession of different orders. The best example known to me of this is the great German historian Meinecke(1862년~1954년), whose span of life and work was unusually long, and covered a series of revolutionary and catastrophic changes in the fortunes of his country. Here we have in effect three different Meineckes, each the spokesman; of a different historical epoch, and each speaking through one of his three major works. The Meinecke of Weltburgetthum and Nationalstaat, published in 1907, confidently sees the realization of German national ideals in the Bismarckian Reich and-like many nineteenth-century thinkers, from Mazzini onwards-identities nationalism with the highest form of universalism: this is the product of the baroque Wilhelmine sequel to the age of Bismarck. The Meinecke of Die idee der Staatsrason, published in 1925 speaks with the divided and bewildered mind of the Weimar Republic: the world of politics has become an arena of unresolved conflict between raison d'etat and a morality which is external to politics, but which cannot in the last resort override the life and security of the state. 격변하는 시기의 어떤 역사가들은 하나의 사회, 하나의 질서가 아닌 일련의 여러 가지 질서들을 그들의 글에 반영한다. 나에게 가장 좋은 예는 위대한 독일 역사가 마이네케다. 그의 생애와 작업 기간은 아주 길다. 그리고 그 시기동안 일련의 혁명적이고 재난적인 변화들을 그의 나라에서 겪었다. 여기 우리는 결과적으로 세 명의 마이네케를 보게 될 것이다. 각각은 다른 역사적 시대를 대변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들에 그것이 나타나 있다. 1907년에 발행된 <세계 시민주의와 민족국가>에서 그는 자신있게 비스마르크 시대에서 독일 국가 이상들을 실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19세기 많은 사상가들과 같이 민족주의를 세계주의의 최고로 보았다. ‘마치니’ 이래로. 이것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빌헬름 시대의 산물이다. 1925년에 출간된 <민족적 이성의 이념> 이란 책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분할된 혼란스런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정치의 세계는 국가적 이성과 정치 외적요소인 도덕사이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장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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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ly the Meinecke(1862년~1954년) of Die Entstehung des Historismus(역사주의 성립), published in 1936 when he had been swept from his academic honours by the Nazi flood, utters a cry of despair, rejecting a historicism which appears to recognize that 'Whatever is, is right' and tossing uneasily between the historical relative and a super-rational absolute. Last of all, when Meinecke(1862년~1954년) in his old age had seen his country succumb to a military defeat more crushing than that of 1918, he relapsed helplessly in Die Deutsche Katastrophe of 1946 into the belief in a history at the mercy of blind, inexorable chance.' The psychologist or the biographer would be interested here in Meinecke(1862년~1954년)'s development as an individual: what interests the historian is the way in which Meinecke(1862년~1954년) reflects back three-or even four-successive, and sharply contrasted, periods of present time into the historical past. Or let us take a distinguished example nearer home. In the iconoclastic 1930s, when the Liberal Party had just been snuffed out as an effective force in British politics, Professor Butterfield wrote a book called The Whig Interpretation of History, which enjoyed a great and deserved success. It was a remarkable book in many ways-not least because, though it denounced the Whig Interpretation over some 130 pages, it did not (so far as I can discover without the help of an index) name a single Whig except Fox, who was no historian, or a single historian save Acton, who was no Whig. 마침내 마이네케는 1936년 발간된 <역사주의 성립>이라는 책에서, 그 때 그는 나찌 광풍에 휩쓸려 학문적 명예를 박탈당했었다. 그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역사주의를 거부하면서, 역사주의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고 인정하는 듯하다.(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그 당시 존재한 나찌 정권을 옳다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 역사적 상대적과 초이성의 절대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마지막으로 노년에 마이네케는 그의 국가가 군사적 패배를 하고 항복하는 것을 보았다. 1918년보다 더 절망적으로. 그는 무기력하게 <독일의 파국>이라는 책에서 맹목적이고 무자지한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면서 절망스러워 했다. 심리학자나 전기 저자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마이케네의 전개 과정을 관심스러워 할지 모른다. 역사가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 번 또는 네 번이나 연속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현재 시기들의 시간들을 역사적 과거 속으로 되돌아보는 방식이다. 우리에게 좀 더 가까운 뚜렷이 드러나는 예를 들어 보자. 1930년 우상파괴의 시대에는 노동당은 영국 정치에서 효과적인 힘을 쓴다는 면에서는 무시당했다. 버터필드 교수는 휘그 역사해석이라는 책을 썼다. 그것은 큰 인기와 끌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눈에 띄는 책이다. 130페이지 전체에서 휘그적 해석을 비난했다. 색인의 도움 없이 찾아본 바에 의하면 그는 폭스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의 휘그도 언급하지 않았다. 폭스는 역사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액튼을 제외하고는 역사가는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휘그가 아니었다. 1, 2, 3, 4(폭스_휘그지만 역사가가 아님), 5, 6, 7(액튼_역사가지만 휘그 아님) 8- 나머지 6명은 휘그도 아니고 역사가도 아님. 휘그적 역사해석 공격한다고 해 놓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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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anything that the book lacked in detail and precision it made up for in sparkling invective. The reader was left in no doubt that the Whig interpretation was a bad thing; and one of the charges brought against it was that it 'studies the past with reference to the present'. On this point Professor Butterfield was categorical and severe: The study of the past with one eye, so to speak, upon the present is the source of all sins and sophistries in history. It is the essence of what we mean by the word 'unhistorical’. Twelve years elapsed. The fashion for iconoclasm went out. Professor Butterfield's country was engaged in a war often said to be fought in defence of the constitutional liberties embodied in the Whig tradition, under a great leader who constantly invoked the past 'with one eye, so to speak, upon the present'. In a small book called ‘The Englishman and His History’ published in 1944, Professor Butterfield not only decided that the Whig interpretation of history was the 'English' interpretation, but spoke enthusiastically of ‘the Englishman's alliance with his history' and of the 'marriag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디테일과 정확성의 부족은 불꽃 티는 독설로 보충했다. 독자들은 틀림없이 휘그적 역사해석은 나쁜 것이며 그것에 대한 주 공격중의 하나는 현재 관점에서 과거를 연구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관련해서 버터필드 교수는 categorical and severe했다. 한 눈을 현재에 두고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모든 죄악과 궤변의 원천이다. 그것은 바로 비역사적이다 라고 하는 것의 원천이다. 12년이 지났다. 우상파괴의 유행은 지나갔다. 버터필드 교수의 조국의 전쟁에 참여했다. 자주 언급되는 소위 헌법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 헌법적 자유는 휘그 전통에 구현되어 있다. 그리고 한 눈을 현재에 두고 과거를 끊임없이 불러오는 위대한 지도자의 아래 전쟁에 참여했다. 영국인과 그의 역사라는 조그만 책자에서 (1944년에 발간되었다) 버트필드 교수는 휘그적 역사해석은 영국적인 해석일 뿐만 아니라 열정적으로 말했다. 현재와 과거의 결혼을 통한 역사 연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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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draw attention to these reversals of outlook is not an unfriendly criticism. It is not my purpose to refute the proto-Butterfield with the deutero-Butterfield, or to confront Professor Butterfield drunk with Professor Butterfield sober. I am fully aware that, if anyone took the trouble to peruse some of the things I wrote before, during, and after the war, he would have no difficulty at all in convincing me of contradictions and inconsistencies at least as glaring as any I have detected in others. Indeed, I am not sure that I should envy any historian who could honestly claim to have lived through the earth-shaking events of the past fifty years without some radical modifications of his outlook. My purpose is merely to show how closely the work of the historian mirrors the society in which he works. It is not merely the events that are in flux. The historian himself is in flux. When you take up a historical work, it is not enough to look for the author's name on the title-page: look also for the date of publication or writing-it is sometimes even more revealing. If the philosopher is right in telling us that we cannot step into the same river twice, it is perhaps equally true, and for the same reason, that two books cannot be written by the same historian. 이와 같은 견해의 역전에 주의하는 것은 불친절한 비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첫 번째 버터필드를 두 번째 버터필드와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리고 술 취한 버터필드와 맑은 정신의 버터필드를 대조하고자 함도 아니다. 나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내가 썼던 글에 대해 전쟁 전후에 썼던 글들에 대해서, 그는 어렵지 않게 나를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했던 것과 동일한 모순이나 불일치를 발견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확신이 가지 않는다. 내가 어떤 역사가에 대해 부러워해야 할지에 대해서. 그 역사가는 솔직하게 주장한다. 살아 왔다고, 지구를 흔들만한 사건들, 지난 50년 동안 지구를 흔들만한 사건들 속에서 그의 전망의 근본적인 수정 없이 살아 왔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을 부러워해야 할지에 대해서 나는 확신이 가지 않는다. 내 목적은 단지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얼마나 밀접하게 역사가의 작업이 그가 작업하고 있는 사회를 비추는지에 대해서. 사건만 흐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그 자신도 그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역사책을 집어들 때, 그 타이틀 페이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만 찾아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책의 출판연도와 그 책이 씌어진 날짜를 찾아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줄지 모른다. 만약 철학자가 말한바가 맞다 면, 우리는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 그것은 똑같이 사실이다. 같은 이유로, 어떤 두 책도 같은 역사가에 의해 씌어 질 수 없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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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if we move for a moment from the individual historian to what may be called broad trends in historical writing, the extent to which the historian is the product of his society becomes all the more apparent. In the nineteenth century, British historians with scarcely an exception regarded the course of history as a demonstration of the principle of progress: they expressed the ideology of a society in a condition of remarkably rapid progress. History was full of meaning for British historians, so long as it seemed to be going our way; now that it has taken a wrong turning, belief in the meaning of history has become a heresy. After the First World War, Toynbee made a desperate attempt to replace a linear view of history by a cyclical theory-the characteristic ideology of a society in decline. Since Toynbee's failure, British historians have for the most part been content to throw in their hands and declare that there is no general pattern in history at all. A banal remark by Fisher to that effect has achieved almost as wide a popularity as Ranke's aphorism in the last century. If anyone tells me that the British historians of the last thirty years experienced this change of heart as the result of profound individual reflexion and of the burning of midnight oil in their separate garrets, I shall not think it necessary to contest the fact. But I shall continue to regard all this individual thinking and oil-burning as a social phenomenon, the product and expression‎ of a fundamental change in the character and outlook of our society since 1914. 만약 우리가 잠시 동안 개인적인 역사가로부터 소위 역사적 글쓰기 쪽으로 잠시 이동해보면, 역사가가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명확해 진다. 19새기에 영국 역사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역사적 과정을 진보의 원리를 보여주는 과정이라고 간주했다. 그들은 사회 이데올로기를 눈에 띄게 빠른 진보의 이데올로기로 표현했다. 역사는 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영국 역사가들에게는, 그것이 잘 굴러가는 한에 있어서는 그리고 그것이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하자. 역사의 의미는 이단의 믿음이 되었다. 1차 대전 후에 토인비는 필사적인 시도를 했다. 단선적인 역사관으로부터 순환적인 역사 이론으로. 그리고 이것은 몰락하는 역사 이데올로기의 특성이었다. 토인비 이래로 역사의 역사가들은 대부분 만족했다. 손 놓는 것으로 그리고 선언했다. 역사에는 전혀 일반적인 패턴이 없다고. 피셔가 말한 진부한 언급은 지난 세기 랑케의 경구만큼이나 폭넓은 인기를 끌었다. 만약 누가 나에게 예기한다면, 영국 역사가들의 지난 30년간의 경험했다. 이와 같은 변화의 핵심을 심오한 개인적인 성찰로서 그리고 다락방에서 열심히 연구한 덕택에 이러한 성과를 얻었다고 얘기하면 난 그것에 대해 다툴 생각이 없다. 그러나 나는 계속할 것이다. 이 모든 개인적인 사고와 오일 버닝을 사회적 현상이고, 근본적인 변화의 산물이고 표현이라고 1914년 이래로 우리 사회의 전망과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의 산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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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more significant pointer to the character of a society than the kind of history it writes or fails to write. Geyl, the Dutch historian, in his fascinating monograph translated into English under the title Napoleon For and Against, shows how the successive judgements of French nineteenth-century historians on Napoleon reflected the changing and conflicting patterns of French political life and thought throughout the century. The thought of historians, as of other human beings, is moulded by the environment of the time and place. Acton, who fully recognized this truth, sought for an escape from it in history itself: History [he wrote] must be our deliverer not only from the undue influence of other times, but from the undue influence of our own, from the tyranny of environment and the pressure of the air we breathe. This may sound too optimistic an assessment of the role of history. But I shall venture to believe that the historian who is most conscious of his own situation is also more capable of transcending it, and more capable of appreciating the essential nature of the differences between his own society and outlook and those of other periods and other countries, than the historian who loudly protests that he is an individual and not a social phenomenon. Man's capacity to rise above his social and historical situation seems to be conditioned by the sensitivity with which he recognizes the extent of his involvement in it. In my first lecture I said: Before you study the history study the historian. Now I would add: Before you study the historian, study his historical and social environment. The historian, being an individual, is also a product of history and of society; and it is in this twofold light that the student of history must learn to regard him. Let us now leave the historian and consider the other side of my equation-the facts of history-in the light of the same problem. Is the object of the historian's inquiry the behaviour of individuals or the action of social forces? Here I am moving on to well-trodden ground. 어떤 종류가 역사가 씌여지고 씌여지지 않는지 만큼 그 사회의 성격을 드러내는 지표는 없다. 게일, 네덜란드의 역사가였다. 그는 그의 매력 있는 논문, 영어로는 ‘나폴레옹에 대한 찬성과 반대’라는 타이틀로 번역되었다. 에서 보여주었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들이 나폴레옹에 대한 연속적인 평가를 보여 주었다. 프랑스 정치 환경의 변해가는 갈등의 패턴들에 따라 나폴레옹의 대한 평가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보여 주었다. 역사가들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시간과 장소에 의해 형성된다. 액튼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인지하고 역사에서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추구했다. 역사가는 전달자여야 한다. 다른 시대의 부당한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또 자기 자신 시대의 부당한 영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기의 환경과 압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역사가의 역할에 대해 너무 낙관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나는 감히 믿는다. 역사가가 그의 시대적 환경을 잘 파악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더 그 시대를 잘 초월할 수 있고, 그 잘 차이들의 본질에 대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 자신의 사회와 전망과 다른 시대 다른 나라들의 차이를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된다. 아래와 같은 사람보다. 그는 단지 개인이며 사회적 현상이 아니다 라고 큰 소리로 항의하는 역사가보다는. 어떤 사람의 능력, 그 자신의 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잘 파악하는 사람은 민감도에서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 민감도로 그는 그 자신의 시대적 상황을 파악한다. 나의 첫 번째 강의에서 나는 말했다.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를 연구하라. 나는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한다. 역사가를 연구하기 전에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 역사가는 개인이기 때문에 역사의 산물이고 사회의 산물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을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에 관해서 공부할 때 유의해야 한다. 이제 역사가는 잠시 내려두자. 그리고 내 방정식의 다른 면을 살펴보자.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같은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역사가의 탐구 대상은 개인들의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적 세력들의 행동에 관한 것인가? 여기서 나는 잘 닦여진 길을 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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