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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history_시즌2

[역사란 무엇인가_시즌2] 7월 14일(목)_138p~144(90+6*14)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7.14|조회수131 목록 댓글 0

[역사란 무엇인가_시즌2] 월 14일(일)_138p~144(90+6*14)p

Chapter 4_7_138p Causation in History

When Bertrand Russell observed that 'every advance in a science takes us further away from the crude uniformities which are first observed into a greater differentiation of antecedent and consequent, and into a continually wider circle of antecedents recognised as relevant'," he accurately described the situation in history. But the historian, in virtue of his urge to understand the past, is simultaneously compelled, like the scientist, to simplify the multiplicity of his answers, to subordinate one answer to another, and to introduce some order and unity into the chaos of happenings and the chaos of specific causes. 'One God, one Law, one Element, and one far-off Divine Event'; or Henry Adams's quest for 'some great generalization which would finish one's clamour to be educated'' - these read nowadays like old-fashioned jokes. 버트란드 러셀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최초에 관찰된 조잡한 획일성에서 벗어나 원인과 결과의 보다 큰 분화로 들어서고, 또한 관련된 것으로 인정되는 원인들의 범위를 끊임없이 확대해 간다. 고 말했으며, 이는 그가 역사에서의 상황을 정확히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과거를 이해하려는 충동 때문에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다양한 대답을 단순화하고, 한 대답을 다른 대답에 종속시키고, 질서와 통일성을 도입한다. 사건들의 혼란과 특정한 원인들의 혼란스러움에 질서와 통일성을 도입한다. 하나의 신, 하나의 법칙, 하나의 요소, 먼 옛날의 하나의 거룩한 사건 또는 교육을 받고 싶다는 욕구를 진정시켜 줄 어떤 위대한 일반화에 대한 ‘헨리 아담스’의 추구 같은 것들은 오늘날 낡아빠진 농담으로 들린다.

 

But the fact remains that the historian must work through the simplification, as well as through the multiplication, of causes. History, like science, advances through this dual and apparently contradictory process. History, like science, advances through this dual and apparently contradictory process. At this point I must reluctantly turn aside to deal with two savoury red herrings which have been drawn across our path-one labelled 'Determinism in History; or the Wickedness of Hegel', the other 'Chance in History; or Cleopatra's Nose'. First I must say a word or two about how they come to be here. 사실은 남는다. 역사가는 작업해야 한다는 것을 원인들의 단순화 과정을. 물론 원인들의 확대 과정은 당연히 들어 있다. 역사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진행한다. 이와 같은 이중적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되어 보이는 과정을 통해서. 여기서 나는 기꺼이 이야기를 돌려 우리들의 길에 가로 놓여 있는 매력적인 두 함정을 다루려 한다. 그 하나는 ‘역사에 있어서의 결정론’ 또는 ‘헤겔의 간계’라는 별명이 붙여졌고, 또 하나는 ‘역사에 있어서의 우연 또는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별명이 붙여젔다. 우선 나는 몇 마디 해야겠다. 어떻게 그들이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Chapter 4_8_139p Causation in History

Professor Karl Popper, who in the 1930s in Vienna wrote a weighty work on the new look in science(recently translated into English under the title The Logic of Scientific Enquiry), published in English during the war two books of a more popular character: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and The Poverty of Historicism. They were written under the strong emotional influence of the reaction against Hegel, who was, treated, together with Plato, as the spiritual ancestor of Nazism, and against the rather shallow Marxism which was the intellectual climate of the British Left in the 1930s. The principal targets were the allegedly determinist philosophies of history of Hegel and Marx grouped together under the opprobrious name of 'Historicism'. In 1954 Sir Isaiah Berlin published his essay on Historical Inevitability. 포퍼 교수는 1930년대 비엔나에서 역작을 썼다. 과학에 있어서의 새로운 전망에서(최근에 이것은 영어로 ‘The Logic of Scientific Enquiry’ 란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영어로 출판했다. 전쟁동안에 두 권의 인기 있는 책 <개방된 사회의 그 적들> 및 <역사주의의 빈곤> 이라는 더 권의 책을 전쟁 중에 발간했다. 그들은 씌어졌다. 강한 감정적 영향아래. 헤겔에 대한 반발, 헤겔은 플라톤과 함께 나찌즘의 원조로 비난받았다. 그리고 약간 천박한 막시즘에 대한 반감. 그 당신 막시즘은 지적인 분위기였다. 영국의 1930년대 좌익에게는. 주된 표적은 헤겔 및 마르크스의 이른바 결정론적 역사 철학인데, 이 두 사람을 포퍼 교수는 ‘역사주의’라는 난폭한 명칭으로 묶어 버렸다. 1954년 이샤야 벌린 경은 역사적 불가피성이라는 에세이를 펴냈다.

 

He dropped the attack on Plate, perhaps out of some lingering respect for that ancient pillar of the Oxford Establishment'; and he added to the indictment the argument, not found in Popper, that the 'historicism' of Hegel and Marx is objectionable because, by explaining human actions in causal terms, it implies a denial of human free will, and encourages historians to evade their supposed obligation (of which I spoke in my last lecture) to pronounce moral condemnation on the Charlemagnes, Napoleons, and Stalins of history. 그는 플라톤에 대한 공격은 빠뜨렸다. 아마 약간 남아있는 존경으로. 옥스포드 대학의 과거 기둥에 대한. 그리고 그는 보탰다. 포퍼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것. 그는 말하기를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주의는 불편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행동을 인과적인 용어로 설명함으로써, 자유 의지를 부인하고 역사가들을 북돋운다. 그들의 예정된 의무를 피해갈 수 있도록(지난 강의에서 내가 말했던), 도덕적으로 비난할 의미, 샤를마제, 나폴레옹, 그리고 스탈린에 대해.

 

Chapter 4_9_140p Causation in History

Otherwise not much has changed. But Sir Isaiah Berlin is a deservedly popular and widely-read writer. During the past five or six years, almost everyone in this country or in the United States who has written an article about history, or even a serious review of a historical work, has cocked a knowing snook at Hegel and Marx and determinism, and pointed out the absurdity of failing to recognize the role of accident in history. It is perhaps unfair to hold Sir Isaiah responsible for his disciples. Even when he talks nonsense, he earns our indulgence by talking it in an engaging and attractive way. The disciples repeat the nonsense, and fail to make it attractive. In any case, there is nothing new in all this. 다른 점에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샤야 벌린(1909~1997년) 경은 당연히도 인기 있고 널리 읽혀지는 저술가이다. 지난 5,6년 동안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역사에 관한 논문을 썼거나 하다 못 해 역사적 저술에 진지한 논평을 한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헤겔과 마르크스의 결정론을 잘 안다는 듯이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역사에 있어서의 우연의 역할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했다. 불공평하다. 이샤야 벌린 경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 제자들에 대한 책임을. 벌린 경은 난센스를 얘기할 때도 애교가 있고 매력 있게 표현한다. 제자들은 난센스를 반복한다. 그리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에 실패한다. 어쨌든 통틀어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Charles Kingsley, not the most distinguished of our Regius Professors of Modern History, who had probably never read Hegel or heard of Marx, spoke in his inaugural lecture in I860 of man's 'mysterious power of breaking the laws of his own being' as proof that no 'inevitable sequence' could exist in history. But fortunately we have forgotten Kingsley. It is Professor Popper and Sir Isaiah Berlin who between them have flogged this very dead horse back into a semblance of life; and some patience will be required to clear up the muddle. 찰스 킹슬리는 영국의 흠정 강좌의 근대사를 담당한 교수들 중에서 특출하지도 않고, 아마 헤겔을 읽은 일도 없고, 마르크스의 이름을 들은 일도 없을 테지만, 1860년의 취임 강연에서 역사에는 ‘불가피한 연속’은 있을 수 없다는 증거로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법칙을 무너뜨리는 인간의 신비한 힘’을 말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킹슬리를 잊어버렸다. 그 사이에 끼어 이미 죽은 말에 채찍질해서 산 말처럼 보이게 하려는 자가 바로 포퍼 교수와 이샤야 벌린 경이다. 그리고 이 혼란을 극복하려면 약간의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Chapter 4_10_141p Causation in History

First then let me take determinism, which I will define - I hope, uncontroversial - as the belief that everything that happened has a cause or causes, and could not have happened differently unless something in the cause or causes had also been different. Determinism is a problem not of history, but of all human behaviour. The human being whose actions have no cause and are therefore undetermined is as much an abstraction as the individual outside society whom we discussed in a previous lecture. 먼저 결정주의에 대해 알아본다. 나는 정의할 것이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없으리라 희망한다. 결정주의란 어떤 믿음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원인 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다고. 그리고 다르게 일어날 수 없다. 선행 원인 중의 하나 또는 여러 가지가 다르지 않는 한은 결정주의는 역사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문제이다. 인간의 행동은 원인이 없고 그러므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인간을 상정하는 것이다. 사회밖에 있는. 우리가 지난 강의에서 언급했던 사회밖에 있는 추상적인 개인을 생각하는 것이다.

 

Professor Popper's assertion that 'everything is possible in human affairs is either meaningless or false. Nobody in ordinary life believes or can believe this. The axiom that everything has a cause is a condition of our capacity to understand what is going on around us. 포퍼 교수의 확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인간 세상에서’ 라는 주장은 의미 없거나 거짓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도 이것을 믿거나 믿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는 공리는 우리 능력의 조건이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The nightmare quality of Kafka's novels lies in the fact that nothing that happens has any apparent cause, or any cause that can be ascertained: this leads to the total disintegration of the human personality, which is based on the assumption that events have causes, and that enough of these causes are ascertainable to build up in the human mind a pattern of past and present sufficiently coherent to serve as a guide to action. Everyday life would be impossible unless one assumed that human behaviour was determined by causes which are in principle ascertainable. Once upon a time some people thought it blasphemous to inquire into the causes of natural phenomena, since these were obviously governed by the divine will. 카프카 소설의 악몽은 어떤 사실에 놓여 있다. 일어나는 아무 것도 겉으로 드러나는 원인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어떠한 원인도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을. 이것은 인간성의 완전한 해체로 인도한다. 인간성은 가정에 기초한다. 사건들은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원인들의 많은 것은 확인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어떤 패턴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 과거와 현재의 행동에 대한 가이드 역할을 일관성 있게 하는 어떤 것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 일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사람이 가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행동은 원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 원인들은 원칙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한 때 옛날엔 사람들은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다. 자연 현상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왜냐하면 이 자연현상들은 분명히 신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Chapter 4_11_142p Causation in History

Sir Isaiah Berlin's objection to our explaining why human beings acted as they did, on the ground that these actions are governed by the human will, belongs to the same order of ideas, and perhaps indicates that the social sciences are in the same stage of development today as were the natural sciences when this kind of argument was directed against them. 이샤야 벌린 경의 반대 - 우리의 설명에 대해서 ‘인간은 왜 그들이 행동했던 대로 행동하는가’ 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자유의지에 의해 지배된다. 이샤야 벌린 경의 주장은 같은 수준의 생각에 속한다. 오늘날 사회 과학의 발달은 과거 자연 과학의 발달 단계와 동일한 수준이다. 자연 현상은 신의 의지에 의해 발생하므로 그 원인을 알아 보려는 자세는 불경스럽다 하는 것과. 요즘 사회과학에서 인간의 행동은 자유 의지에 의해 움직이므로 행동들의 원인을 알아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

 

Let us see how we handle this problem in everyday life. As you go about your daily affairs, you are in the habit of meeting Smith. You greet him with an amiable, but pointless, remark about the weather, or about the state of college or university business; he replies with an equally amiable and pointless remark about the weather or the state of business. But supposing that one morning Smith, instead of answering your remark in his usual way, were to break into a violent diatribe against your personal appearance or character. 일상생활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아보자. 당신은 일상적으로 스미스를 만난다. 당신은 스미스에게 인사한다. 친절하지만 무의미한 날씨에 관한 인사등을 한다. 그리고 대학 형편등을 얘기한다. 스미스도 또한 똑같이 친절하지만 무의미하게 같은 반응을 한다. 그런데 가정해 보자. 어느 날 아침 스미스가 일상적으로 반응하던 때와 다르게 당신의 외모나 성격에 대해 심한 욕설을 퍼 붓는다고 가정해 보자.

 

Would you shrug your shoulders, and treat this as a convincing demonstration of the freedom of Smith's will and of the fact that everything is possible in human affairs? I suspect that you would not. On the contrary, you would probably say something like: ‘Poor Smith! You know, of course, his father died in a mental hospital,’ or ‘Poor Smith! He must have been having more trouble with his wife.’ In other words, you would attempt to diagnose the cause of Smith's apparently causeless behaviour, in the conviction that some cause there must be. 당신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것은 강력한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스미스의 자유 의지를.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고 생각할 것인가? 난 당신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반대로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불쌍한 스미스, 자기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죽었지’ 또는 ‘불쌍한 스미스, 자기 부인과 문제가 있음에 틀림없어’ 다시 말해 당신은 시도할 것입니다. 진단하려고 스미스의 겉으로 보기에는 원인없어 보이는 행동에 대한 원인을 진단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확신 하에, 어떤 원인이 거기에 있을 거라고 하면서.

 

Chapter 4_12_143p Causation in History

By so doing you would, I fear, incur the wrath of Sir Isaiah Berlin, who would bitterly complain that, by providing a causal explanation of Smith's behaviour, you had swallowed Hegel's and Marx's deterministic assumption, and shirked your obligation to denounce Smith as a cad. 그렇게 하는 것에 의해 당신은 이샤야 벌린 경의 분노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벌린 경은 심각하게 불평할 것이다. 원인 결과식의 설명을 스미스의 행동에 제공함으로써, 당신의 헤겔과 마르크스의 결정주의 가정을 수용했고, 당신의 의무를 피했다. 스미스를 나쁜 놈이라고 욕해야할 당신의 도덕적 의무를 방기했다고 하면서 벌린 경은 화를 낼 것이다.

 

But nobody in ordinary life takes this view, or supposes that either determinism or moral responsibility is at stake. The logical dilemma about free will and determinism does not arise in real life. It is not that some human actions are free and others determined. The fact is that all human actions are both free and determined, according to the point of view from which one considers them. The practical question is different again.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도 이와 같은 견해를 가정하지 않는다. 결정주의 또는 도덕적 책임이라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의지와 결정주의의 논리적 딜레마는 일상생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인간 행동들은 자유롭고 다른 것들은 결정되어 있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이렇다. 인간의 모든 행동들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도 하고 결정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상 어떤 관점에 따라 보기에 나름이다. 실제적인 문제는 다르다.

 

Smith's action had a cause, or a number of causes; but in so far as it was caused not by some external compulsion but by the compulsion of his own personality, he was morally responsible, since it is a condition of social life that normal adult human beings are morally responsible for their own personality. Whether to hold him responsible in this particular case is a matter for your practical judgement. But, if you do, this does not mean that you regard his action as having no cause: cause and moral responsibility are different categories. 스미스의 행동은 하나의 원인 또는 다수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외부적인 어떤 강압이 아니라 그 자신의 성격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면, 그는 도덕적으로 책임 있다. 왜냐하면 사회생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성인은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들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스미스에게 책임을 지우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당신의 현실적인 판단의 문제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그의 행동에 원인이 없다고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원인과 도덕적 책임은 서로 다른 카테고리이다.

 

Chapter 4_13_144p Causation in History

An Institute and Chair of Criminology have recently been established in this university. It would not, I feel sure, occur to any of those engaged in investigating the causes of crime to suppose that this committed them to a denial of the moral responsibility of the criminal. Now let us look at the historian. 최근에 이 대학에 범죄 심리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나는 확신하건대 범죄의 원인을 조사하는 사람들은 범죄자의 도덕적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제 역사가를 살펴보자.

 

Like the ordinary man, he believes that human actions have causes which are in principle ascertainable. History, like everyday life, would be impossible if this assumption were not made. It is the special function of the historian to investigate these causes. This may be thought to give him a special interest in the determined aspect of human behaviour: but he does not reject free will-except on the untenable hypothesis that voluntary actions have no cause. Nor is he troubled by the question of inevitability. 보통 사람들과 같이 역사가도 인간의 행동들은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 원인들은 확인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과 같이 역사도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가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원인들을 조사하는 것은 역사가의 특별한 기능이다. 이것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인간 행동의 결정된 측면에. 그러나 그는 자유 의지를 부인하지 않는다. 자율적인 행동들은 원인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빼고는.

 

Historians, like other people, sometimes fall into rhetorical language and speak of an occurrence as 'inevitable' when they mean merely that the conjunction of factors leading one to expect it was overwhelmingly strong. Recently I searched my own history for the offending word, and cannot give myself an entirely clean bill of health: in one passage I wrote that, after the revolution of 1917, a dash between the Bolsheviks and the Orthodox Church was 'inevitable'. 역사가들은 다른 사람들같이 때때로 수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어떤 사건이 ‘불가피하다’ 고 말한다. 그 사건에서 요인들의 결합이 너무나 강할 때. 최근에 나는 내 역사책에서 이 불쾌한 단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완전히는 깨끗한 진단서를 발급할 수 없었다. 한 페이지에서 나는 썼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볼세비키와 정교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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