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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history_시즌2

[역사란 무엇인가_시즌2] 7월 19일(화)_168p~174(90+6*19)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7.19|조회수112 목록 댓글 0

Chapter 5_3_168p History as Progress

Poetic visions of a brighter future took the form of visions of a return to a golden age of the past-a cyclical view which assimilated the processes of history to the processes of nature. History was not going anywhere: because there was no sense of the past, there was equally no sense of the future. Only Virgil, who in his fourth eclogue had given the classical picture of a return to the golden age, was inspired in the Aeneid momentarily to break through the cyclical conception: 'Imperium sine fine dedi' was a most unclassical thought, which later earned Virgil recognition as a quasi-Christian prophet. It was the Jews, and after them the Christians, who introduced an entirely new element by postulating a goal towards which the historical process is moving-the teleological view of history. History thus acquired a meaning and purpose, but at the expense of losing its secular character. The attainment of the goal of history would automatically mean the end of history: history itself became a theocracy. This was the medieval view of history. The Renaissance restored the classical view of an anthropocentric world and of the primacy of reason, but for the pessimistic classical view of the future substituted an optimistic view derived from the Jewish-Christian tradition. Time, which had once been hostile and corroding, now became friendly and creative: contrast Horace's 'Damnosa quid non imminuit dies? with Bacon's 'Veritas temporis filia'. 더 밝은 미래에 대한 시적인 버젼 형태를 띤다. 과거의 황금시대로의 회귀를. 이것은 순환론적인 견해다. 역사의 과정을 자연의 과정과 유사하다고 보는. 역사는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왜냐하면 과거에 대한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오직 베르길리우스만이 그의 목가 제 4편에서 고전상을 보여줬다. 황금시대의 복귀라는. 그리고 그는 아에네이드에서 잠시나마 고전적인 개념을 탈출하려는 것에 조금 고무되었다. ‘나 끝없는 영토를 남겨 주었노라’는 라는 말은 가장 비고전적이다. 후에 베르길리우스는 반기독교 예언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기독도인들이 있다. 완전히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던 사람들은. 목표를 설정했다. 역사적 과정이 나아가고 있는 목표를 설정했다. 즉 역사의 목적론적인 견해이다. 역사는 그러므로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희생으로 세속적 성격을 잃게 되었다. 역사적 목표의 달성은 자동적으로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 역사는 그 자체로 theocracy이 되었다. 이것은 중세 사관이었다. 르네상스는 고전적인 견해를 복구했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그리고 이성의 우위를. 그러나 비관적인 고전 미래관은 대체했다. 낙관주의 시간은 한 때 적대적이고 침식적이었다. 그러나 이젠 친근하고 창조적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망하지 아니할 것이 무엇이냐?’ 라는 호라티우스의 말과 ‘진리는 시간의 딸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을 비교해 보라.

 

Chapter 5_4_169p History as Progress

The rationalists of the Enlightenment, who were the founders of modern historiography, retained the Jewish-Christian teleological view, but secularized the goal; they were thus enabled to restore the rational character of the historical process itself. History became progress towards the goal of the perfection of man’s estate on earth. Gibbon, the greatest of the Enlightenment historians, was not deterred by the nature of his subject from recording what he called 'the pleasing conclusion that every age of the world has increased, and still increases, the real wealth, the happiness, the knowledge, and perhaps the virtue, of the human race'. 계몽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근대 역사학의 창시자들이다. 유대적-기독교적인 목적론 견해를 유지했다. 그리고 목표를 세속화시켰다. 그들은 그러므로 복구할 수 있었다. 합리적 성격. 역사적 과정 그 자체의 합리적인 성격을 복구할 수 있었다. 역사는 진보가 되었다. 완벽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되었다. 지상에서 인간 지위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되었다. 기번, 계몽시대 역사가 들 중에서 가장 위대했다. 기번은 방해받지 않았다. 그의 주제의 성격에 의해 방해받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기록하는 것에 대해, 소위 기분 좋은 결론. 세계의 모든 시대는 증가시켜왔다. 그리고 여전히 증가시키고 있다. 진정한 부, 행복, 지식, 그리고 아마 미덕, 인류의 진정한 부, 행복, 지식, 그리고 아마 미덕을 증가시켜 왔고, 지금도 증가시키고 있다.

 

The cult of progress reached its climax at the moment when British prosperity, power, and self-confidence were at their height; and British writers and British historians were among the most ardent votaries of the cult. The phenomenon is too familiar to need illustration; and I need only quote one or two passages to show how recently faith in progress remained a postulate of all our thinking. Acton, in the report of 1896 on the project of the Cambridge Modern History which I quoted in my first lecture, referred to history as 'a progressive science'; and in the introduction to the first volume of the history wrote that 'we are bound to assume, as the scientific hypothesis on which history is to be written, a progress in human affairs'. 진보에 대한 신앙은 가장 정점에 이르렀다. 영국의 번영, 힘, 그리고 자신감이 최고조에 있었을 때, 그리고 영국의 역사가들과 저자들은 가장 열렬한 그 신앙에 대한 지지자들이었다. 그 현상은 너무나 익숙해서 따로 상술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는 단지 하나 또는 두 개의 문장들을 인용하고자 한다. 보이기 위해서 최근에 진보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우리 사고의 전제가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액튼은 1896년의 리포트에서, 그 리포트는 내가 이미 1장에서 인용한 바 있다. CMS 1판에 나오는 내용이다. ‘역사는 진보적인 과학이다’ 그리고 1권에서 썼다. 우리는 가정해야 한다. 과학적인 가정을, 그 가정위에 역사는 쓰여진다. 인간의 일에 관한 진보로.

 

Chapter 5_5_170p History as Progress

In the last volume of the history, published in 1914 Dampier, who was a tutor of my college when I was an undergraduate, felt no doubt that 'future ages will see no limit to the growth of man's power over the resources of nature and of his intelligent use of them for the welfare of his race'." In view of what I am about to say, it is fair for me to admit that this was the atmosphere in which I was educated, and that I could subscribe without reservation to the words of my senior by half a generation, Bertrand Russell: 'I grew up in the full hood of Victorian optimism, and. . . something remains with me of the hopefulness that then was easy.' In 1920, when Bury wrote his book The Idea of Progress, a bleaker climate already prevailed, the blame for which he laid, in obedience to the current fashion, on 'the doctrinaires who have established the present reign of terror in Russia', though he still described progress as 'the animating and controlling idea of western civilization'." Thereafter this note was silent. Nicholas I of Russia is said to have issued an order banning the word 'progress': nowadays the philosophers and historians of western Europe, and even the United States, have come belatedly to agree with him. The hypothesis of progress has been refuted. 1920년에 베리가 그의 책을 썼다. ‘The dea of Progress’. 마지막 권에서, 1914년에 발간되었다. 담피어는-나의 학부 대학시절 튜터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느꼈다. 미래 시대는 한계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 힘의 성장에 있어서, 자연 자원에 대한 인간 힘의 성장과 그들의 지혜로운 사용, 인류를 복지를 위해서.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이 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내가 교육받을 당시, 그리고 나는 주저 없이 동의한다. 나의 선배 버트란드 러셀의 말에 대해. 그는 말하기는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주의 분위기에서 자랐다. 어떤 것이 남아 있다. 희망이 나에게 남아 있다. 뭔가 쉬운 것 같은. 이 당시 이미 황량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분위기에 대한 책임을 그 당시 유행처럼 교조주의자들에게 돌렸다. 러시아의 공포 정치를 수립한 교조주의자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진보를 서구 문명을 활발하게 하고 조종하는 개념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러한 기조는 조용해졌다. 러시아의 니콜라스 1세는 진보라는 단어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진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오늘날 서구의 철학자들과 역사가들, 그리고 미국에서 조차도 이미 뒤늦게 동의한다. 그에게. 진보의 가정은 쭉 부정되어 왔다.

 

Chapter 5_6_171p History as Progress

The decline of the west has become so familiar a phrase that quotation marks are no longer required. But what, apart from all the shouting, has really happened? By whom has this new current of opinion been formed? The other day I was shocked to come across, I think, the only remark of Bertrand Russell(1872~1970) I have ever seen which seemed to me to betray an acute sense of class: 'There is, on the whole, much less liberty in the world now than there was a hundred years ago.' ‘서구의 몰락’이라는 말은 너무나 익숙한 표현이 되어서 더 이상 인용부호가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고함 외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 왔는가? 누구에 의해 이런 흐름이 형성되어 왔는가? 나는 어느 날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하기엔 유일한 언급같다. 버틀란드 러셀이 강한 계급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대체로 지금 시대는 자유가 덜 있는 것 같다. 지난 100년 전보다는’

 

I have no measuring-rod for liberty, and do not know how to balance the lesser liberty of few against the greater liberty of many. But an any standard of measurement I can only regard the statement as fantastically untrue. I am more attracted by one of those fascinating glimpses which Mr A. J. P. Taylor sometimes gives us into Oxford academic life. All this talk about the decline of civilization, he writes, ‘means only that university professors used to have domestic servants and now do their own washing- up'.' Of course, for former domestic servants, washing-up by professors may be a symbol of progress. The loss of white supremacy in Africa, which worries Empire Loyalists, Africaner Republicans, and investors in gold and copper shares, - may look like progress to others. 나는 자유에 대한 잣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모른다.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지. 소수의 적은 자유와 다수의 큰 자유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에 대해. 그러나 어떠한 측정 기준을 가져오더라도 나는 그 진술은 터무니없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더 매료되는 것을 느낀다. 재미있는 엿보기 중의 하나에. 테일러씨가 옥스퍼드 생활에서 가끔 보여주는 매력적인 엿보기에. 그는 말하기를 모든 이런 문명의 쇠퇴에 대해서 이런 것이 의미하는 바는 옛날에는 집안의 허드렛을 하는 가정부를 두었었다. 그리고 지금은 교수 자신이 빨래를 한다. 물론 전에 가정부였던 사람에게는 지금 교수가 직접 빨래하는 것이 진보로 느껴질지 모른다. 아프리카에서 백인 우위의 상실은 걱정하게 한다. 대영제국 옹호자, 아프리카 공화당원, 금광이나 구리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보로 보일지도 모른다.

 

Chapter 5_7_172p History as Progress

I see no reason why, on this question of progress, I should ipso facto(당연히) prefer the verdict of the 1950s to that of the 1890s, the verdict of the English-speaking world to that of Russia, Asia, and Africa, or the verdict of the middle-class intellectual to that of the man in the street, who, so according to Mr. Macmillan, has never had it so good. Let us for the moment suspend judgement on the question whether we are living in a period of progress or of decline, and examine a little mote closely what is implied in the concept of progress, what assumptions lie behind it, and how far these have become untenable. I should like, first of all, to clear up the muddle about progress and evolution. The thinkers of the Enlightenment adopted two apparently incompatible views. 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진보의 문제와 관련해서 내가 1890년대의 평결보다 1950년대의 평결을 더 좋아해야 하는지 영어 사용국의 의견이 러시아, 아시아, 아프리카, 또는 중산층들의 의견보다 길거리의 사람들의 의견보다 더 좋아야 하는지, 더 길거리의 사람들에 대해 맥밀란은 결코 좋아본 적 없다고 한 적 있다. 잠깐 판단을 보류해 보자. 우리는 진보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후퇴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자. 진보의 개념에 무엇이 내포되어 잇는지, 그리고 무슨 가정들이 배경에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이것들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지. 나는 먼저 진보와 진화에 관한 혼란부터 정리하고 싶다. 계몽시대의 사상가들은 두 가지 양립하기 어려운 견해들을 채택했다.

 

They sought to vindicate man's place in the world of nature: the laws of history were equated with the laws of nature. On the other hand, they believed in progress. But what ground was there for treating nature as progressive, as constantly advancing towards a goal? Hegel met the difficulty by sharply distinguishing history, which was progressive, from nature, which was not. The Darwinian revolution appeared to remove all embarrassments by equating evolution and progress: nature, like history, turned out after all to be progressive. But this opened the way to a much graver misunderstanding, by confusing biological inheritance, which is the source of evolution, with social acquisition, which is the source of progress in history. 그들은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를 옹호했다. 그리고 역사법칙들은 자연의 법칙들과 동일하다고 했다. 반면에 그들은 진보를 믿었다. 그러나 어떤 근거로 자연이 진보한다고 취급했는가? 자연도 끊임없이 나아간다. 어떤 목표를 행해서. 헤겔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확연히 구분하는 것에 의해서, 역사는 진보하지만, 자연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다윈 혁명은 모든 혼란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화와 진보는 동일하다고 하면서. 역사와 마찬가지로 자연도 결국은 진보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오해의 길을 열었다. 생물학적 유전 – 이것은 진화의 원천이다, -과 사회적 획득 – 이것은 역사에서 진보의 원천이다. 이 둘을 혼동하는 것에 의해서.

 

Chapter 5_8_173p History as Progress

The distinction is familiar and obvious. Put a European infant in a Chinese family, and the child will grow up with a white skin, but speaking Chinese. Pigmentation is a biological inheritance, language a social acquisition transmitted by the agency of the human brain. Evolution by inheritance has to be measured in millennia or in millions of years; no measurable biological change is known to have occurred in man since the beginning of written history. Progress by acquisition can be measured in generations. The essence of man as a rational being is that he develops his potential capacities by accumulating the experience of past generations. Modern man is said to have no larger a brain, and no greater innate capacity of thought, than his ancestor 5000 years ago. But the effectiveness of his thinking has been multiplied many times by learning and incorporating in his experience the experience of the intervening generations. The transmission of acquired characteristics, which is rejected by biologists, is the very foundation of social progress. History is progress through the transmission of acquired skills from one generation to another. 그 구별은 익숙하고 분명하다. 유럽 아기를 중국인 가정에 입양하면, 그 아이는 하얀 피부색을 가진 중국어를 사용하면서 자랄 것이다. 피부색은 생물학적 유전이고 언어는 사회적 획득이다. 전달된 인간 두뇌에 의해 전달된 사회적 획득이다. 유전에 의한 진하는 몇 천년이든가 몇 백만년을 단위로 측정된다. 어떠한 생물학적 변화도 거의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사시대 이래로. 획득에 의한 진보는 세대로 측정가능하다.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그가 그의 잠점적 능력을 발전시킨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세대들의 경험을 축적하는 것에 의해 현대인은 뇌가 더 크다거나 더 큰 생각의 내재적인 용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5000년 전의 조상보다. 그러나 그의 생각하는 능력의 효과성은 몇 배나 증가했다. 배우고 통합시킴으로써 그이 경험에 앞선 세대들의 경험을 통합시킴으로써 획득된 형질들의 전달은, 이것은 물론 생물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지만, 사회적 진보의 바로 그 기초가 된다. 역사는 진보한다. 획득된 기술들의 전달에 의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의

 

Chapter 5_9_174p History as Progress

Secondly, we need not and should not conceive progress as having a finite beginning or end. The belief, popular less than fifty years ago, that civilization was invented in the Nile Valley in the fourth millennium B.C. is no more credible today than the chronology which placed the creation of the world in 4004 B·C· Civilization, the birth of which we may perhaps take as a starting-point for our hypothesis of progress, was surely not an invention, but an infinitely slow process of development, in which spectacular leaps probably occurred from time to time. We need not trouble ourselves with the question when progress-or civilization-began. The hypothesis of a finite end of progress has led to more serious misapprehension. Hegel has been rightly condemned for seeing the end of progress in the Prussian monarchy-apparently the result of an overstrained interpretation of his view of the impossibility of prediction. 둘째로 우리는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간주하는 것. 진보를 유한한 시작이나 끝이 있는 것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50년 전에는 인기 있었던 믿음인 ‘문명은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나일 강 유역에서 BC 4000년에 발명되었다고. 그리나 이것은 오늘날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BC 4004년에 창세기의 시작이 되었다는 만큼이나 믿을 수 없다. 문명의 탄생은 우리는 아마 진보의 가정을 위해서 시작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문명의 탄생은 분명히 발명은 아니고 무한히 천천히 진행하는 발달의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에 가끔씩 비약적인 도약이 일어났다.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진보 또는 문명이 언제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진보의 유한한 끝을 가정하는 것은 더 심각한 오해를 가져왔다. 헤겔은 정당하게 비난받아 왔다. 진보의 끝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봄으로써, 이런 결론은 겉으로 부기에는 분명히 과도한 해석의 결과이다. 예언의 불가능에 대한 그의 견해의 과도한 해석의 결과로

 

But Hegel's aberration was capped by that eminent Victorian, Arnold of Rugby, who in his inaugural lecture as Regius Professor of Modern History in Oxford in 1841 thought that modern history would be the last stage in the history of mankind: 'It appears to bear marks of the fullness of time, as if there would be no future history beyond it.' Marx's prediction that the proletarian revolution would realize the ultimate aim of a classless society was logically and morally less vulnerable; but the presumption of an end of history has an eschatological ring more appropriate to the theologian than to the historian, and reverts to the fallacy of a goal outside history. 헤겔의 일탈은 최고조에 달했다. 유명한 빅토리안 아놀드 럭비에 의해. 그는 그의 흠정 교수 취임사에서, 1841년 옥스퍼드 대학교 근대사 흠정교수 취임사에서 근대사는 시간이 꽉 찬 듯 보인다. 그것을 넘어서는 미래는 보이지 않는 듯이. 마르크스의 예언인 프로렐타리아 혁명이 계급 없는 사회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예언이 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덜 취약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의 종말을 가정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울림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자들에게 더 적당하다. 역사가보다는. 그리고 이것은 역사 밖에 역사의 목표를 세운다는 면에서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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