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_19_222p The widening horizon
In an earlier lecture I pointed out that increasing individualization in the sense described did not imply any weakening of social pressures for conformity and uniformity. This is indeed one of the paradoxes of our complex modern society. Education, which is a necessary and powerful instrument in promoting the expansion of individual capacities and opportunities, and therefore of increasing individualization, is also a powerful instrument in the hands of interested groups for promoting social uniformity. 지난 강좌에서 나는 언급한 적 있다. 증가하는 개인화라고 해서 사회적 압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획일성과 통일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 한 적 있다. 이것은 사실 복잡한 현대 사회의 역설들 중의 하나이다. 교육은 필요하고 강력한 도구이다. 개인적인 능력들과 기회들의 확장을 올리는 데 있어서. 그리고 그러므로 증대하는 개인화는 또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이익집단들의 손에 의해서 사용될 때는, 사회적 획일성을 촉진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Pleas frequently heard for more responsible broadcasting and television, or for a more responsible press, are directed in the first instance against certain negative phenomena which it is easy to condemn. But they quickly become pleas to use these powerful instruments of mass persuasion in order to inculcate desirable tastes and desirable opinions-the standard of desirability being found in the accepted tastes and opinions of the society. Such campaigns, in the hands of those who promote them, are conscious and rational processes designed to shape society, by shaping its individual members, in a desired direction. Other glaring examples of these dangers are provided by the commercial advertiser and the political propagandist. 호소들이 자주 들린다. 좀 더 책임 있는 방송과 TV에 대해서, 그리고 좀 더 책임있는 신문에 대해서. 이런 호소들은 우선 첫 번째로 향한다. 어떤 부정적인 현상들에 대해. 그런 것들에 대해 우리는 쉽게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곧 호소가 된다. 이 강력한 도구들을 대중 설득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호소가 된다. 바람직한 취향과 바람직한 의견들을 주입시키기 위한 대중 설득, 바람직하다의 기준은 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취향과 의견들이 된다. 그런 캠페인들은 그들을 고양시키려는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과정들이 된다. 사회를 만들려고 설계된 이성적인 과정. 개인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하려는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과정들. 이와 같은 위험들의 다른 눈에 띄는 예들은 상업적인 광고가와 정치적 선동가에 의해 제공된다.
Chapter 6_20_223p The widening horizon
The two roles are, indeed, frequently doubled; openly in the United States, and rather more sheepishly in Great Britain, parties and candidates employ professional advertisers to put themselves across. The two procedures, even when formally distinct, are remarkably similar. Professional advertisers and the heads of the propaganda departments of great political parties are highly intelligent men who bring all the resources of reason to bear on their task. Reason, however, as in the other instances we have examined, is employed not for mere exploration, but constructively, not statically, but dynamically. Professional advertisers and campaign managers are not primarily concerned with existing facts. They are interested in what the consumer or elector now believes or in events only in so far as this enters into the end-product, i.e. what the consumer or elector can by skilful handling be induced to believe or want. 두 개의 역할들은 중복되어 있다(?) 배가된다(?). 미국에서는 공개적으로, 영국에서는 약간 부끄러운 것으로. 그리고 후보자들은 전문적인 광고업자들을 채용한다. 자기 자신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이 두 과정은 공식적으로는 다르지만,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전문적인 광고가들과 큰 정당의 선정부의 간부들은 고도로 지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성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그들의 목적에 맞게 가져온다. 이성은 하지만 다른 경우에서 우리가 조사해 본 봐와 같이 도입된다. 단지 연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건설적으로, 그리고 정적으로서가 아니라 동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전문적인 광고가들과 선거 운동가들의 관심은 현존하는 사실들이 주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더 관심 있어 한다. 소비자나 유권자가 지금 믿는 것이나 사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을 때만 관심이 있다. 이런 것들이 최종 목적물에 들어가는가? 즉, 소비자나 유권자들을 능숙하게 조정하여 믿거나 원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것들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Moreover, their study of mass psychology has shown them that the most rapid way to secure acceptance of their views is through an appeal to the irrational element in the make-up of the customer and elector, so that the picture which confronts us is one in which an elite of professional industrialists or party leaders, through rational processes more highly developed than ever before, attains its ends by understanding and trading on the irrationalism of the masses. 더욱이 대중 심리학에 관한 그들의 연구는 보여 왔다. 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비이성적인 요소에 호소하는 것이라는 것을. 소비자나 유권자들의 심리 구조에 있는 비 이성적인 요소에 어필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림은 아래와 같다. 전문적인 산업가들이나 정당 지도자들 같은 엘리트들은 이성적인 과정을 통해서 전보다 더 발달된 합리적, 이성적 과정들을 통해서 그들의 목적들을 달성한다. 대중들의 비이성적인 면을 이해하고 파악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다.
Chapter 6_21_224p The widening horizon
The appeal is not primarily to reason: it proceeds in the main by the method which Oscar Wilde called 'hitting below the intellect'. I have somewhat overdrawn the picture lest I should be accused of underestimating the danger. But it is broadly correct, and could easily be applied to other spheres. In every society, more or less coercive measures are applied by ruling groups to organize and control mass opinion. This method seems worse than some, because it constitutes an abuse of reason. In reply to this serious and well-founded indictment I have only two arguments. 호소는 주로 이성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 ‘지성의 아래쪽을 친다.’는 방식에 의해 진행된다. 나는 약간의 과장된 그림을 그려왔다. 내가 그 위험을 과소평가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옳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사회는 어느 정도까지는 강제적인 조치들이 적용된다. 지배 집단에 의해서 대중들의 의견을 조직하고 조종하기 위해서. 이 방법이 다른 것보다 더 나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이성의 남용이라는 것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진지하고 정당한 비난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주장을 갖고 있다.
The first is the familiar one that every invention, every innovation, every new technique discovered in the course of history has had its negative as well as its positive sides. The cost has always to be borne by somebody. I do not know how long it was after the invention of printing before critics began to point out that it facilitated the spread of erroneous opinions. Today it is a commonplace to lament the death-roll on the roads caused by the advent of the motor-car; and even some scientists deplore their own discovery of ways and means to release atomic energy because of the catastrophic uses to which it can be, and has been, put. Such objections have not availed in the past, and seem unlikely to avail in the future, to stay the advance of new discoveries and inventions. 첫 번째는 익숙한 것이다. 모든 발명품, 모은 혁신, 모든 기술은 역사상에서 발견되었을 때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긍정적인 면들도 있어왔지만. 희생은 누군가에 의해 있어 온 것이다. 나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모르겠다. 인쇄술의 발명 후에. 비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그것이 나쁜 여론들을 퍼뜨리는 것을 조장한다는 비난 오늘날 슬퍼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도로에서 교통사고의 사망률을 슬퍼하는 것. 자동차의 도래 이래로. 그리고 일부 과학자들은 그들의 발견을 통탄한다. 원자력 에너지의 방법과 수단을 발견할 것에 대해 왜냐하면 원자력이 할 수 있는 또는 해 왔던 재난적인 사용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한 것에 대해 통탄한다. 이런 반대들은 과거에 소용이 없어 왔다. 그리고 미래에도 그럴 것 같다. 새로운 발견들과 발명들의 진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Chapter 6_22_225p The widening horizon
What we have learned of the techniques and potentialities of mass propaganda cannot be simply obliterated. It is no more possible to return to the small-scale individualist democracy of Lockeian or liberal theory, partially realized in Great Britain in the middle years of the nineteenth century, than it is possible to return to the horse and buggy or to early laissez-faire capitalism. But the true answer is that these evils also carry with them their own corrective. The remedy lies not in a cult of irrationalism or a renunciation of the extended role of reason in modern society, but in a growing consciousness from below as well as from above of the role which reason can play. This is not a utopian dream, at a time when the increasing use of reason at all levels of society is being forced on us by our technological and scientific revolution. Like every other great advance in history, this advance has its costs and its losses, which have to be paid, and its dangers, which have to be faced. Yet, in spite of sceptics, and cynics, and prophets of disaster, especially among the intellectuals of countries whose former privileged position has been undermined, I shall not be ashamed to treat it as a signal example of progress in history. It is perhaps the most striking and revolutionary phenomenon of our time. 우리가 배워왔던 대중 선전의 기술들과 가능성들은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소규모의 개인주의 시대 로크의 민주주의 시대나 자유주의 이론 민주주의 시대로 돌아 갈 수 없다. 이런 것들은 19세기 중간 영국에서 일부 실현된 것이었다. 당연히 말이나 마차의 시대나 자유방임주의 초기의 발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정답은 이와 같은 폐단은 그것의 교정책과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교정책은 비이성주의 숭배나 현대 사회에서 확대된 이성의 역할 폐기가 아니라 이성이 행사할 수 있는 역할의 철두철미한 인식의 증가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토피아적인 꿈이 아니다.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이성의 역할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성의 사용이 증가하는 것은 기술적인, 과학적인 혁명에 의해 강제되고 있는 중이다. 모든 다른 역사에서의 진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진전은 비용과 손실이 있다. 지불되어야 할. 그리고 위험이 있다. 직면해야 할. 하지만 냉소주의자들, 파멸의 예언자들 특별히 한 때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있다 점점 그 위치를 잃어가는 나라에 속해 있던 나라의 지성인들 사이에 많이 발견되는 냉소주의자들, 파멸의 예언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역사에서 진보의 눈에 띄는 예로서 간주하더라도. 아마 이런 것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눈에 띄고 혁명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
Chapter 6_23_226p The widening horizon
The second aspect of the progressive revolution through which we are passing is the changed shape of the world. The great period of the fifteenth and sixteenth centuries, in which the medieval world finally broke up in ruins and the foundations of the modern world were laid, was marked by the discovery of new continents and by the passing of the world centre of gravity from the shores of the Mediterranean to those of the Atlantic. Even the lesser upheaval of the French revolution had its geographical sequel in the calling in of the new world to redress the balance of the old. But the changes wrought by the twentieth- century revolution are far more sweeping than anything that has happened since the sixteenth century. After some 400 years the world centre of gravity has definitely shifted away from western Europe. Western Europe, together with the out-lying(외딴, 외곽) parts of the English-speaking world, has become an appenage(부속물) of the North American continent, or, if you like, an agglomeration(덩어리) in which the United States serves both as power- house and as control-tower. Nor is this the only, or perhaps the most significant, change. It is by no means clear that the world centre of gravity now resides, or will continue for long to reside, in the English-speaking world with its western European annex. It appears to be the great land-mass of eastern Europe and Asia, with its extensions into Africa, which today calls the tune in world affairs. The 'unchanging east' is nowadays a singularly worn-out cliché. 진보적인 혁명의 두 번째 측면은 우리가 현재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변화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15~16세기의 위대한 시기에 중세는 파산했다. 그리고 근대 세계의 기초가 세워졌다. 이 시대는 신대륙의 발견이 눈에 띄며 세계사의 무게 중심이 지중해시대로부터 대서양으로 옮겨가는 시대였다. 프랑스 혁명과 같이 더 작은 동란은 지리적인 연속성을 가져왔다. 신세계와 구체제의 균형을 새로 맞추는. 그러나 20세기 혁명에 의해 초대된 변화들은 훨씬 더 광범위했다. 17세기 이래로 일어났던 어떤 것들보다도. 400년 정도 후에, 세계의 무게 중심은 분명히 서유럽으로부터 멀어졌다. 영어권 국가들과 함께 서유럽은 북미대륙의 속령이 되어 왔다. 또는 당신이 다른 표현을 좋아한다면 미국의 발전소와 관제탑의 역할을 하는 국가군으로 변해 왔다. 하지만 이것만이 중요한 변화의 전체가 아니다. 결코 분명하지 않다. 세계의 중심이 영어권 국가에 있을지, 아님 오래 동안 계속될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듯 보인다. 동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팽창 등은 세계사와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동방’이라는 말은 요즘 아주 낡아빠진 표현에 불과하다.
Chapter 6_24_227p The widening horizon
Let us take a quick look at what has happened to Asia in the present century. The story begins with the Anglo-Japanese alliance of I902 - the first admission of an Asiatic country to the charmed circle of European Great Powers. It may perhaps be regarded as a coincidence that Japan signalized her promotion by challenging and defeating Russia, and, in so doing, kindled the first spark which ignited the great twentieth-century revolution. The French revolutions of 1789 and 1848 had found their imitators in Europe. The first Russian revolution of 1905 awakened no echo in Europe, but found its imitators in Asia: in the next few years revolutions occurred in Persia, in Turkey, and in China. The First World War was not precisely a world war, but a European civil war-assuming that such an entity as Europe existed-with world-wide consequences; these included the stimulation of industrial development in many Asian countries, of anti-foreign feeling in China, and of Indian nationalism, and the birth of Arab nationalism. The Russian revolution of 1917 provided a further and decisive impulse. What was significant here was that its leaders looked persistently, but in vain, for imitators in Europe, and finally found them in Asia. 현 세기에 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이야기는 1902년 영·일 동맹으로 시작한다. 이 때가 아시아 국가의 첫 번째 유럽강대국들이라는 매력적인 열강으로 진입이다. 아마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일본이 그들의 상승을 나타낸 것이. 러시아에 도전하고 격퇴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위대한 20세기 혁명의 불길을 처음으로 당긴 것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848년의 혁명은 유럽에서 그들의 모방자들을 찾았었다. 1905년 첫 번째 러시아 혁명은 유럽에서 어떤 반향도 일깨우지 못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그들의 모방자들을 찾았다. 몇 년 후에 페르시아, 터키, 중국 등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1차 대전은 정확히는 세계대전이 아니었다. 유럽 내전 - 유럽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 이었다. 물론 전쟁 결과는 세계적이었다. 이것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산업 혁명을 촉발시켰다. 중국에서는 반외세 감정을, 그리고 인도에서는 민족주의의 시작을 가져왔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더 크고 더 결정적인 충격을 제공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지도자들은 끈기 있게, 그러나 소용없게도 유럽에서 모방자들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아에서 그들의 모방자들을 찾았다.
Chapter 6_25_228p The widening horizon
It was Europe that had become 'unchanging', Asia that was on the move. I need not continue this familiar story down to the present time. The historian is hardly yet in a position to assess the scope and significance of the Asian and African revolution. But the spread of modern technological and industrial processes, and of the beginnings of education and political consciousness, to millions of the population of Asia and Africa, is changing the face of those continents; and, while I cannot peer into the future, I do not know of any standard of judgement which would allow me to regard this as anything but a progressive development in the perspective of world history. The changed shape of the world resulting from these events has brought with it a relative decline in the weight, certainly of this country, perhaps of the English-speaking countries as a whole, in world affairs. But relative decline is not absolute decline; and what disturbs and alarms me is not the march of progress in Asia and Africa, but the tendency of dominant groups in this country-and perhaps elsewhere-to turn a blind or uncomprehending eye on these developments, to adapt towards them an attitude oscillating between mistrustful disdain and affable condescension, and to sink back into a paralyzing nostalgia for the past. 유럽은 변하지 않고, 아시아는 변화 과정에 있다. 나는 이 익숙한 이야기를 현재 다시 계속할 필요가 없다. 역사가는 아직 어떤 위치에 있지 않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혁명의 범위와 중요성을 평가해 볼 위치에 있지 않다. 현대 기술과 산업과정의 확장과 교육과 정치적 각성의 시작의 확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백만 사람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그 대륙의 모양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미래를 꿰뚤어 볼 수는 없지만, 그리고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을 세계 역사의 전망에서 진보라고 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고. 이와 같은 사건들로부터 일어나는 세계의 변화는 모양은 무게감에서 상대적 저하를 가져왔다. 이 나라(영국)에서. 그리고 아마 영어권 국가들에서 상대적인 무게감의 저하를 가져왔다. 그러나 상대적인 쇠퇴는 절대적인 쇠락이 아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놀라게 하는 것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의 진보의 진군이 아니라 이 나라에 있는 주류들의 경향이다. 맹목적으로 눈을 감고 또는 애써 이해가 안 가는 듯이 발달에 대해 바라보는 자세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진행되고 있는 진보들에 대해 의심스러운 경멸이나 다정한 저자세(제법인데?)를 취하는. 그리고 과거에 대해 무분별한 향수에 젖어 들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