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_25_108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Secondly, we are told that in modern physics distances in space and lapses of time have measures depending on the motion of the 'observer'. In modern physics all measurements are subject to inherent variations due to the impossibility of establishing a constant relation between the 'observer' and the object under observation; both the 'observer' and the thing observed-both subject and object-enter into the final result of the observation. But, while these descriptions would apply with a minimum of change to the relations between the historian and the objects of his observations, I am not satisfied that the essence of these relations is in any real sense comparable with the nature of relations between the physicist and his universe; and though I am in principle concerned to reduce rather than to inflate the differences which separate the approach of the historian from that of the scientist, it will not help to attempt to spirit these differences away by relying on imperfect analogies. 둘째로, 우리는 듣는다. 현대 물리학에서 공간에서의 거리들과 시간의 흐름은 관찰자의 운동에 의존하는 측정을 가진다고. 현대 물리학에서는 모든 측정들은 내재적인 변화에 의존한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정립하는 것의 불가능에 의해. 주체와 객체들은 관찰의 최종 결과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은 조그만 변화 시키면 역사가와 그의 관찰의 대상들과의 관계에 응용할 수 있지만. 나는 만족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관계들의 핵심이 물리학자와 그의 우주와의 관계의 본질과 비교 가능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본질적으로 관심이 있다. 줄이는 것. 확대시키는 것보다는. 차이점들을 확대시키기 보다는 줄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역사가의 접근과 과학자의 접근의 차이에 대해 확대시키기 보다는 줄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시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점들을 불완전한 유사성들에 의존하는 것에 의해.
Chapter 3_26_109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But, while it is, I think, fair to say that the involvement of the social scientist or historian in the object of his study is of a different kind from that of the physical scientist, and the issues raised by the relation between subject and object infinitely more complicated, this is not the end of the matter. Classical theories of knowledge, which prevailed throughout the seventeenth,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ies, all assumed a sharp dichotomy between the knowing subject and the object known. However the process was conceived, the model constructed by the philosophers showed subject and object, man and the external world, divided and apart. This was the great age of the birth and development of science; and theories of knowledge were strongly influenced by the outlook of the pioneers of science. Man was set sharply against the external world. 사화과학자와 역사가가 연구하는 대상은 물리 과학자가 대상으로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슈들, 제기된 이슈들, 주체와 객체의 관계들에 대해 제기된 이슈들은 훨씬 더 복잡하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끝은 아니다. 전통적인 지식이론들, 17, 18, 19세기에 유행했던, 이론들은 모두 알려는 주체와 알려진 객체 사이에 뚜렷한 이분법을 가정했다. 하지만 프로세스 어떻게 인식되던지 간에 그 철학자들에 의해 형성된 모델은 주체와 객체, 인간과 외부세계는 서로 나누어져 있고,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때는 과학의 탄생과 발달의 위대한 시대였다. 그리고 지식 이론들은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과학의 선도적인 전망에 의해. 인간은 외부 세계와 정면으로 바로보고 있었다.
He grappled with it as with something intractable and potentially hostile - intractable because it was difficult to understand, potentially hostile because it was difficult to master. With the successes of modern science, this outlook has been radically modified. The scientist nowadays is far less likely to think of the forces of nature as something to fight against than as something to cooperate with and to harness to his purposes. Classical theories of knowledge no longer fit the newer science, and least of all the science of physics 그는 붙들고 싸웠다. 다루기 어렵고 잠재적으로는 적대적인 어떤 것들과 왜냐하면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다루기 힘들었고 지배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적대적이었다. 현대 과학의 성공과 더불어 이러한 전망도 근본적으로 수정되어 왔다. 과학자는 요즘 자연의 힘에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싸워야할 상대라 아니라 같이 협력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고전적인 지식 이론은 더 이상 새로운 과학에 맞지 않다. 그리고 특히 모든 과학 중에서 물리학에는.
Chapter 3_27_110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It is not surprising that during the past fifty years philosophers have begun to call them in question, and to recognize that the process of knowledge, far from setting subject and object sharply apart, involves a measure of interrelation and interdependence between them. This is, however, extremely significant for the social sciences In my first lecture, I suggested that the study of history was difficult to reconcile with the traditional empiricist theory of knowledge. I should now like to argue that the social sciences as a whole, since they involve man as both subject and object, both investigator and thing investigated, are incompatible with any theory of knowledge which pronounces a rigid divorce between subject and object. Sociology, in its attempts to establish itself as a coherent body of doctrine, has quite rightly set up a branch called the sociology of knowledge. This has, however, not yet got very far mainly, I suspect, because it has been content to go round and round inside the cage of a traditional theory of knowledge. If philosophers, under the impact first of modern physical science, and now of modern social science, are beginning to break out from this cage, and construct some more up-to-date model for the processes of knowledge than the old billiard-ball model of the impact of data on a passive consciousness, this is a good omen for the social sciences and for history in particular.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50년 동안 철학자들은 의문을 가져온 것에. 그리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에 지식의 과정은 주체와 객체의 명백한 분리와는 다르고 그들 사이의 상호 관계와 상호의존성의 관련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사회 과학에서 중요하다. 1강에서 나중 제안한 바 있다. 역사 연구는 전통적인 지식 이론과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사회과학은 일반적으로 그들은 주체와 객체, 조사자와 조사대상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어떠한 이론과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사회학은 어떤 시도를 했다. 정립하려는 시도를 했다. 일관된 이론 체계를 갖춘 학문을 만들려는 시도에서 지식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다. 이것은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만족해 오고 있는 것 같다. 전통적인 지식이론의 새장 안에서 안주하면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철학자들은 처음에는 현대 물리학의 충격으로부터,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사회 과학의 충격으로부터 이 새장에서 깨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든다. 약간 더 현대적인 모델, 당구식 모델보다는, 당구식 모델이란 데이타가 부딪혀 오면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모델이다. 이러한 당구식 모델을 벗어나려는 방식은 좋은 징조이다. 사회과학에 특히 역사학에는.
Chapter 3_28_111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This is a point of some importance, to which I shall return later when I come to consider what we mean by objectivity in history. Last but not least, I have to discuss the view that history, being intimately involved in questions of religion and morality, is thereby distinguished from science in general and perhaps even from the other social sciences. Of the relation of history to religion I shall say only the little that is necessary to make my own position clear. To be a serious astronomer is compatible with belief in a God who created and ordered the universe. But it is not compatible with belief in a God who intervenes at will to change the course of a planet, to postpone an eclipse, or to alter the rules of the cosmic game. In the same way, it is sometimes suggested, a serious historian may believe in a God who has ordered, and given meaning to, the course of history as a whole, though he cannot believe in the Old Testament kind of God who intervenes to slaughter the Amalekites(아말렉), or cheats on the calendar by extending the hours of daylight for the benefit of Joshua's army. Nor can he invoke God as an explanation of particular historical events. Father D'Arcy in a recent book attempted to make this distinction: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다. 그것에 나는 나중에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객관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고찰할 때 마지막으로, 중요한 문제는 역사와 종교와 도덕에 긴밀히 관련된 문제들이다. 도덕은 일반적으로 과학하고는 구분된다. 그리고 다른 사회과학들과도 구분된다. 역사와 종교의 관계에 대해 나는 조금만 언급하고자 한다. 내 입장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만큼만. 진지한 천문학자가 된다는 것은 신을 믿는 것과 양립이 가능하다. 그 신은 우주를 창조했고, 우주에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 신은 자의로 행성들의 코스를 변경하고, 일식을 연기하고 또는 우주 게임의 규칙들을 바꾼다 하는 신을 믿는 것과는 양립하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때때로 제기된다. 진지한 역사는 신의 존재를 믿을 지도 모른다. 그 신은 역사 과정에 명령한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다. 구양성서에 나오는 신과 같은 존재는 아말렉 인들의 살상에 끼어든다든가, 조슈아의 군대를 위해서 낮의 길이를 더 길게 하는 것에 의해 달력을 속인다든가 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특별한 역사적 사건들의 설명을 위해서 신을 부르는 것도 할 수 없다. ‘다이시’ 신부는 최근 책에서 이와 같은 구별을 시도했다.
Chapter 3_29_112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It would not do for a student to answer every question in history by saying that it was the finger of God. Not until(후에야?) we have gone as far as most in tidying up mundane events and the human drama are we permitted to bring in wider considerations. The awkwardness of this view is that it appears to treat religion like the joker in the pack of cards, to be reserved for really important tricks that cannot be taken in any other way. Karl Barth(칼 바르트), the Lutheran theologian(루터파의 신학자), did better when he pronounced a total separation between divine and secular history, and handed over the latter to the secular arm. 역사학도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신의 섭리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속세의 문제들을 모두 처리하고 난 뒤에야 더 큰 문제들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을 허락받는 것이다. 이 견해의 어색함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종교를 카드 게임에서 조커같이 취급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중요한 트릭을 보유한 듯이. 루터파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오히려 더 낫다. 그가 선언했을 때, 완전한 분리, 종교적인 역사와 세속적인 역사의 완전한 분리를 선언했을 때, 그리고 세속적인 역사는 세속적인 손에 넘겨준다고 했을 때.
Professor Butterfield, if I understand him, means the same thing when he speaks of technical history. Technical history is the only kind of history you or I are ever likely to write, or he himself has ever written. But by the use of this odd epithet, he reserves the right to believe in an esoteric or providential history with which the rest of us need not concern ourselves. Writers like Berdyaev, Niebarhr, and Maritain purport to maintain the autonomous status of history, but insist that the end or goal of history lies outside history. Personally, I find it hard to reconcile the integrity of history with belief in some super- historical force on which its meaning and significance depend - whether that force be the God of a Chosen People, a Christian God, the Hidden Hand of the deist(자연신론자), or Hegel's World Spirit. 버터필드는 교수는 내가 그를 이해한 게 맞다면 그는 세속적인 역사를 기술적인 역사라고 말한다. 기술적인 역사는 오직 어떤 종류의 역사이다. 당신이나 나나 지금까지 쓰 왔던 역사, 지금도 쓰고 있는 역사. 그러나 이런 색다른 명칭에 의해 그는 비교적인, 섭리적인 역사를 믿을 권리를 보존한다. 우리들은 관심 둘 필요 없는. epithet(색다른 명칭), esoteric(비교적인), providential(섭리적인) 베르자예프, 니부어, 마리탱 같은 작가들은 주장한다. 역사의 자율적인 지위를 유지한다는 취지에서 주장한다. 역사의 목적이나 목표는 역사밖에 있다고. Berdyaev(베르자예프), Maritain(마리탱) 개인적으로 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역사의 순결성과 초역사적인 힘에 대한 믿음, 그 초역사적인 것에 의미와 중요성을 의존하는, 그 힘이 선민들의 신이건, 기독교 신이건, deist의 보이지 않는 신이건, 헤겔의 세계 정신이건.
Chapter 3_30_113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For the purposes of these lectures, I shall assume that the historian must solve his problems without recourse to any such deus ex machina, that history is a game played, so to speak, without a joker in the pack. The relation of history to morality is more complicated, and discussions of it in the past have suffered from several ambiguities. It is scarcely necessary today to argue that the historian is not required to pass moral judgments on the private life of the characters in his story. The standpoints of the historian and of the moralist are not identical. 이 강의들을 위해서 나는 역사가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deus ex machina’ 에 의존함이 없이. 즉, 역사는 게임이다. 그 게임 안에는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조커’가 있지 않다. 역사가의 도덕에 대한 관계는 더 복잡하다. 그리고 과거에는 이것에 대한 논의에서 많은 모호성들을 겪었다. 오늘날 거의 주장할 필요가 없다. 역사가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그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관점과 도덕가의 관점은 다르다.
Henry VIII may have been a bad husband and a good king. But the historian is interested in him in the former capacity only in so far as it affected historical events. If his moral delinquencies had had as little apparent effect on public affairs as those of Henry II, the historian would not need to bother about them. This goes for virtues as well as vices. Pasteur and Einstein were, one is told, men of exemplary, even saintly, private lives. But, suppose they had been unfaithful husbands, cruel fathers, and unscrupulous colleagues, would their historical achievements have been any the less? And it is these which preoccupy the historian. Stalin is said to have behaved cruelly and callously to his second wife; but, as a historian of Soviet affairs, I do not feel myself much concerned. 헨리 8세는 나쁜 남편이었고 좋은 왕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는 나쁜 남편이라는 capacity에 대해서는 그것이 역사적 사건들에 영향을 줄 때만 관심을 가진다. 만약 그의 도덕적 결함들이 공적인 일에 겉으로 보기에 거의 양향을 주지 않았다면, 헨리 2세처럼, 역사가는 도덕적 결함들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미덕에 대해서도 악덕과 똑같이 적용된다. 파스테르와 아인스타인은 듣기에 거의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거의 성인에 가까울 정도로 개인 생활을. 그러나 만약 그들이 신의 없는 남편이고, 나쁜 아버지이고 배은망덕한 동료였다고 그들의 역사적 업적이 더 작아질까? 그리고 이아 같은 것들이 역사가를 사로잡는다. 스탈린은 그의 두 번째 부인에게 가혹하게 callously 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 역사가로서 나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