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2022년 3월 14일(월)_30~32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3.10|조회수19 목록 댓글 0

[원서_30p, Is it not wrong to provoke the organism with such detailed and affective pictures of delicacies when it has somehow managed to adapt itself to extremely small rations and low calories? Though it may afford momentary psychological relief, it is an illusion which psychologically, surely, must not be without danger. During the latter part of our imprisonment, the daily ration consisted of very watery soup given out once daily, and the usual small bread ration. In addition to that, there was the so-called "extra allowance" consisting of three-fourths of an ounce of margarine, or of a slice of poor quality sausage, or of a little piece of cheese, or a bit of systhetic honey, or a spoonful of watery jam, varying daily. In calories this diet was absolutely inadequate, especially taking into consideration our heavy manual work and our constant exposure to the cold in inadequate clothing. The sick who were "under special care"-that is, those who were allowed to lie in the huts instead of leaving the camp for work-were even worse off. When the last layers of subcutaneous fat had vanished, and we looked like skeletons disguised with skin and rags, we could watch our bodies beginning to devour themselves. The organism digested its own protein, and the muscles disappeared. The the body had no powers of resistance left. One after another the members of the little community in our hut died. Each of us could calculate with fair accuracy whose turn would be next, and when his own would come. After many observations we knew the symptoms well, which made the correctness of our prognoses quite certain. He won't last long, or This is the next one, we whispered to each other, and when, during our daily search for lice, we saw our own, naked bodies in the evening, we thought alike: This body here, my body, is really a corpse already. [번역판_67p, 이제 간신히 우리 몸이 적은 양의 음식과 낮은 칼로리에 적응하게 되었는데, 맛있는 음식에 대해 그렇게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내장기관에 자극을 주면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이다. 먹는 이야기가 당장은 마음의 위안을 줄지 몰라도 생리적으로는 위험을 수반한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하루에 한 번 아주 묽은 수프와 전처럼 적은 양의 빵을 배급받았다. 그러다가 가끔 특별배급이라는 것을 받을 때도 있었다. 마가린 0.75온 보잘것없는 크기의 소시지, 적은 치즈 조각, 가공 벌꿀 조금, 묽은 잼 한 숟가락 등 그때마다 달랐다. 이런 식단은 열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면서 맨손으로 중노동을 하는 우리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특별간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임시 막사에 남아 있는 환자에게 주는 음식은 더 형편없었다. 마지막 남은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로 가죽과 넝마로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키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우리는 모두 다음에는 누가 죽을 것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 죽을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징후가 보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 오래 못 갈 것 같아’, ‘다음 차례는 저 사람이군’. 우리는 이렇게 수군거렸다. 매일 저녁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이 몸뚱이. 이제 정말로 송장이 되었구나.

 

[원서_31p, What has become of me? I am but a small portion of a great mass of human flesh. . . of a mass behind barbed wire, crowded into a few earthen huts; a mass of which daily a certain portion begins to rot because it has become lifeless. I mentioned above how unavoidable were the thoughts about food and favorite dished which forced themselves into the consciousness of the prisoner, whenever he had a moment to spare. Perhaps it can be understood, then, that even the strongest of us was longing for the time when he would have fairly good food again, not for the sake of good food itself, which had made us unabe to think of anything other than food, would at last cease. Those who have not gone through a similar experience can hardly conceive of the soul-destroying mental conflict and clashes of will poser which a famished man experiences. They can hardly grasp what it means to stand digging in a trench, listening only for the siren to announce 9:30 or 10:00-the half hour lunch interval-when bread would be rationed out(as long as it was still available); repeatedly asking the foreman–if he wasn’t a disagreeable fellow-what the time was; and tenderly touching a piece of bread in one’s coat pocket, first stroking it with frozen gloveless fingers, then breaking off a crumb and putting it in one’s mouth and finally, with the last bit of will power, pocketing it again, having promised oneself that morning to hold out till afternoon. We could hold endless debates on the sense or nonsense of certain methods of dealing with the small bread ration, which was given out only once daily during the latter part of our confinement. [번역판_68p, 나는 무엇일까? 나는 인간 살덩이를 모아 놓은 거대한 무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철조망 너머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막사에 갇혀 있는 거대한 무리의 한 부분. 그 구성원의 일부가 죽어서 몸뚱이가 썩기 시작하는 바로 그 거대한 무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시시때때로 의식을 파고드는 먹는 것과 좋아하는 요리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앞에서 얘기했을 것이다. 우리 중에서 정신력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도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될 그 날을 그리고 있었다. 단지 맛있는 음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 때가 되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상황이 마침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영혼을 파괴시키는 정신적 갈등과 의지력의 충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 사람들은 모른다. 참호 속에서 땅을 파고, 빵이 배급되는(만약 배급이 된다면) 오전 9시 반이나 10시-30분 동안의 점심시간-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손꼽아 기다리고, 감독에게-그가 마음씨 좋은 사람일 경우-지금이 몇 시냐고 물어보고, 외투 주머니 안에 있는 빵을 장갑도 끼지 않은 언 손으로 살살 만지다가 손톱만큼 떼어서 먹어 보고, 그러다가는 마지막 남은 의지력으로 빵을 도로 주머니에게 넣으면서 오후까지 참겠다고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런 상황을 말이다.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는 하루에 한 번밖에 빵이 배급되지 않았다.

 

[원서_32p, There were two schools of thought. One was in favor of eating up the ration immediately. This had the twofold advantage of satisfying tge worst hunger pangs for a very short times at least once a day and of safeguarding against possibility theft or loss of the ration. The second group, which held with dividing the ration up, used different arguments. I finally joined their ranks. The most ghastly moment of the twenty-four hours of camp life was the awakening, when, at a still nocturnal hour, the three shrill blows of a whistle tore us pitilessly from out exhausted sleep and from the longings in our dreams. We then began the tussle wth out wet shoes, into which we could scarcely force out feet, which were sore and swollen with edema. And there were the usual moans and groans about petty troubles, such as the snapping of wires which replaced shoelaces. One morning I heard someone, whom I knew to be brave and dignified, cry like a child because he finally had to go to the snowy marching grounds in his bare feet, as his shoes were too shrunken for him to wear. In those ghastly minutes, I found a little bit of comfort; a small piece of bread which I drew out of my pocket and munched with absorbed delight. Undernourishment besides being the cause of the general preoccupation with food, probably also explains the fact that the sexual urge was generally absent. Apart from the initial effects of shock, this appears to be the only explanation of a phenomenon which a psychologist was bound to observe in those all-male cams: that, as opposed to all other strictly male establishments-such as army barracks-there was little sexual perversion. [번역판_69p, 그런데 우리는 그 빵을 어떻게 먹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끝도 없이 논쟁을 벌였다. 생각은 두 편으로 나뉘었다. 그 중 한 편은 그 자리에서 빵을 다 먹어치우는 것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도둑맞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다른 한 편은 배급받은 빵을 나누어서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편 중에서 나는 결국 후자에 들기로 했다. 수용소 생활의 스물네 시간 중 가장 끔찍한 시간은 바로 기상 시간이었다. 아직 밖이 깜깜할 때 날카롭게 울리는 세 번의 호루라기 소리가 잠이 부족한 우리의 몸을 달콤한 꿈에서 깨우곤 했다. 그 다음 우리는 부종으로 부어오른 아픈 발을 젖은 구두 안에 쑤셔 넣으려고 한바탕 씨름을 했다. 그럴 때면 으레 신발끈으로 쓰던 철사가 끊어지는 것 같은 사소사 문제가 발생했으며, 그 때문에 여기저기서 끙끙대거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아침에는 평소 꽤 용감하고 의연한 것으로 알려진 한 친구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을 보았다. 신발이 그가 신기에는 너무 작아 할 수 없이 맨발로 눈 위를 걸어 작업장까지 가야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가 슬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다른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빵 조각을 꺼내서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영양실조가 수감자들의 정신을 먹는 것에만 집중시키는 현상만 초래했던 것은 아니다. 수감자들에게 성욕이 없었던 원인도 아마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기의 충격이 성욕을 감퇴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모든 남자 수용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영양실조밖에 없다. 남자들만 있는 다른 집단 예를 들어 군대와는 대조적으로 수용소에서는 성도착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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