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_34p, I began to beg them, to entreat them, to let me stand in front for one moment only. I tried to explain how much a look through that window meant to me just then. My request was refused with rudeness and cynicism: “You lived here all those years? Well, then you have seen quite enough already!” In general there was also a “cultural hibernation” in the camp. There were two exceptions to this: politics and religion. Politices were talked about about everywhere in camp, almost continuously; the discussions were based chiefly on rumor, which were snapped up and passed around avidly. The rumors about the military situation were usually contradictory. They followed one another rapidly and succeeded only in making a contribution to the war of nerves that was waged in the minds of all the prisoners. Many times, hoped for a speedy end to the war, which had been fanned by optimistic rumors, were disappointed Some men lost all hope, but it was the incorrigible optimists where were the most irritating companions. The religious interest of the prisons, as far and soon as it developed, was the most sincere imaginable. The depth and vigor of religious belief often surprised and moved a new arrival. Most impressive in this connection were improvised prayers or services in the corner of a hut, or in the darkness of the locked cattle truck which we were brought back from a distant work site, tired, hungry and frozen in our ragged clothing. In the winter and spring of 1945 there was an outbreak of typhus which infected nearly all the prisoners. The mortality was great among the weak, who had to keep on with their hard as long as they possibly could. [번역판_72p, 그 때 나는 아주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나를 앞에 세워달라고 그들에게 사정하고 애원했다. 바로 그 순간에 창문을 통해 밝을 보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들은 무례한 태도로 나를 비웃으며 내 간청을 묵살했다. “여기서 살았었다고? 그렇다면 실컷 보았겠네!” 수용소에는 대체로 ‘문화적 동면’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두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정치와 종료였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서나 시도 때도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대체로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런 소문들이 어디선가 시작되어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전쟁 상황에 관한 소문은 대개 모순된 것이었다. 이런 소문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면서 결국 수감자들의 마음을 신경과민 상태로 만들었다.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소문이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편 일단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아주 진심으로 그 속에 빠져들었다. 그 믿음의 깊이와 활력이 종종 새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경탄과 감동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종교와 관련된 의식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막사 귀퉁이나 자물쇠가 채워진 컴컴한 가축운반용 트럭 안에서 행해지는 임시 기도나 예배였다. 넝마 같은 옷을 입은 채 멀리 떨어진 작업장에서 피곤하고 굶주리고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막사로 돌아가는 바로 그 트럭 안에서 즉석 예배와 기도회가 이루어지곤 했다. 1945년 겨울과 봄에 발진티푸스가 퍼져 거의 모든 수감자에게 전염되었다. 오랜 시간 중노동에 시달려 왔던 병약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죽었다.
[원서 35p, The quarters for the sick were most inadequate, there were practically no medicines or attendants. Some of the symptoms of the disease were extremely disagreeable: an irrepressible aversion to even a scrap of food(which was an additional danger to life) and terrible attacks of delirium. The worst case of delirium was suffered by a friend of mine who thought that he was dying and wanted to pray. In his delirium he could not find the words to do so. To avoid thee attacks of delirium, I tried, as did many of the others, to keep awake for most of the night. For hours I composed speeches in my mind. Eventually I began to reconstruct the manuscript which I had lost in the disinfection chamber of Auschwitz, and scribbled the key words in shorthand on tiny scraps of paper. Occasionally a scientific debate developed in camp. ONce Iwitnessed something I had never seen, even in my normal life, although it lay somewhat near my own professional interests: a spiritualistic seance. I had been invited to attend by the camp’s chief doctor(also a prisoner), who know that I was a specialist in psychiatry. The meeting took place in his small, private room in the sick quarters. A small circle had gathered, among them, quite illegally, the warrant officer from the sanitation squad. One man began to invoke the spririts with a kind of paryer. The camp’s clerk sat in front of a blank sheet of paper, without any conscious intentn of writing. During the next ten minutes(after which time the seance was terminated because of the medium’s failure to conjure the spirits to appers) his pencil slowly drew lines across the paper, forming quite legible “VAE V.” It was asserted that the clerk had never learned Latin and that he had never before heard the words “Vae Victis”-woe to the vanquished. [번역판_73p, 환자들을 위한 입원실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쓸 만한 약이나 자격을 갖춘 의료보조원도 없었다. 이 병의 증상 중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음식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거부감(이것이 사망의 위험을 더욱 가중시킨다)을 보인다는 것과 무서운 정신착락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내 친구의 경우도 여기에 속했다. 자기가 죽어 간다고 생각했던 그는 기도를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정신착락 상태에서 기도를 하려고 하니 기도할 말이 떠오르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런 정신착란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려고 애썼다. 몇 시간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글을 썼다. 아우슈빛 소독실에서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되살리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작은 종이 조각에 요점이 되는 단어들을 속기로 적었다. 수용소 안에서 때때로 과학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내 직업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교령술 회합이라는 것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수용소의 주치의(그 역시 수감자였다)가 내가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그 모임에 초대한 것이다. 모임은 막사에 있는 주치의의 작은 방에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둥글게 앉아 있었는데, 그 중에는 불법으로 여기에 참가한 위생 담당 사관도 있었다. 드디어 한 사람이 주문을 외면서 영혼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도 수용소 서기는 무엇을 쓰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하얀 종이 앞에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 10분 동안 (이 시간이 지나면 영매가 영혼을 불러내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고 모임이 끝난다) 종이 위로 천천히 연필을 움직이더니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는 글씨로 ‘패자에게 슬픔이’ 라는 라틴어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닌가. 서기가 라틴어를 배운 적이 없다는 것과 ‘패자에게 슬픔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었다.
[원서_36p, In my opinion he must have heard them once in his life, without recollecting them, and they must have been available to the “spirit”(the spirit of his subconscious mind) at that time, a few months before our liberation and the end of the war. In spite of all the enforced physical and mental primitiveness of the life in a concentration camp, it was possible for spiritual life to deepen. Sensitive people who were used to a rich intellectual life may have suffered much pain(they were oftne of a delicate constitution), but the damage to their inner selves was less. They were able to retreat from their terrible surroundings to a life of inner riches and spiritual freedom. Only in this way can one explain the apparent paradox than some prisoners of a less hardy make-up often seemed to survive camp life better than did those of a robust nature. In order to make myself clear, I am forced to fall back on personal experience. Let me tell what happened on those early mornings when we had to march to our work site. There were shouted commands: "Detachment, forward march! Left-2-3-4! Left-2-3-4! Left-2-3-4! Left-2-3-4! Left-2-3-4! First man about, left and left and left! Caps off!" these words sound in my ears even now. At the order "Caps off!" we passed the gate of the camp, and searchings were trained upon us. Whoever did not march smartly got a kick. And worse off was the man who, because of the cold, had pulled his cap back over his ears before permission was given. We stumbled on in the darkness, over big stones and through large puddles, along the one leading from the camp. [번역판_75p,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기억이 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아마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말이 우리가 석방되기 전, 전쟁이 끝나기 불과 몇 달 전인 바로 그 시점에 그의 ‘영혼’에 작용을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는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작업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구령 소리가 들렸다. “차렷! 앞으로 갓! 왼발 둘, 세, 넷, 왼발 둘, 세, 넷 왼발 둘, 세, 넷 왼발 둘, 세, 넷 왼발 그리고 오른발, 왼발, 모자 벗어! 지금에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소리다. <모자 벗어> 라는 구령이 떨어질 때, 우리는 마침 수용소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탐조등이 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민첩하게 행진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차 없이 발길질이 가해졌다. 춥다고 허락 없이 모자를 귀까지 눌러 쓴 사람은 더 큰 벌을 받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