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2022년 3월 20일(일)_42~44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3.16|조회수37 목록 댓글 0

[원서_42p, While we sipped it greedily, a prisoner climbed onto a tub and sang Italian arias. We enjoyed the songs, and he was guaranteed a double helping of soup, straight "from the bottom"-that meant with peas! Rewards were given in camp not only for entertainment, but also for applause. I, for example, could have found protection(how lucky I was never in need of!) from the camp's most dreaded Capo, who for more than one good reason was known as "The Murderous Capo." This is how hit happened. One evening I had the great honor of being invited again to the room where the spiritualistic seance had taken place. There were gathered the same intimate friends of the chief doctor and, most illegally, the warrant officer from the sanitation squad was again present. The Murderous Capo entered the room by chance, and he was asked to recite one of his poems, which had become famous(or infamous) in camp. He did not need to be asked twice and quickly produced a kind of diary from which he began to read samples of his art. I bit my lips till they hurt in order to keep from laughing at one of his love poems, and very likely that saved my life. since I was also generous with my applause, my life might have been saved even had I been detailed to his working party to which I had preciously been assigned for one day-a day that was quite enough for me. It was useful, anyway, to be known to the Murderous Capo from a favorable angle. So I applauded as hard as I could. Generally speaking, of course, any pursuit of art in camp was somewhat grotesque. I would say that the real impression made by anything connected with art arouse only from the phostlike contrast between the performance and the back ground of desolate camp life. [번역판_84p, 우리가 게걸스럽게 수프를 먹고 있는 동안 한 사람이 술통 위로 올라가 이탈리아 아리아르를 한곡 불러제켰다. 우리는 그 노래를 정마로 좋아했으며, 그에게는 곧 ‘바닥을 긁어서 퍼주는’-이것은 콩알 몇 개가 더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수프 두 국자가 상으로 돌아갔다. 여흥거리에만 보상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흥거리에만 보상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칭찬에도 보상이 돌아갔다. 한 번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용소에서 ‘살인마 카포’라도 불리는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해 주어야 할 일(내가 그런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은 처지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이 생겼다. 일의 전말은 이랬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가시 그 교령술 회합이 열리는 방으로 초대되는 영광을 얻었다. 거기에는 지난번처럼 주치의의 절친한 친구들이 다 모였으며, 역시 불법적으로 참석한 지난번의 그 위생 담당 사관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살인마 카포가 우연히 그곳에 들렀다가 시를 한 편 낭송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수는 수용소 안에서 이미 유명(혹은 악명 높은) 시였다. 두 번 청할 필요도 없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일기장 비슷한 것을 꺼내더니 거기에 적혀 있는 자기 예술의 시험작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자기가 지은 사랑의 시를 읊는 동안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대체로 칭찬에 너그러운 편이어서 만약 내가 그의 작업반에 배치되었다 하더라도(사실 그 전에 하루 동안 그의 작업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하루로 충분했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던 그 살인적인 카포에게 호의적인 측면에서 좋은 인상을 심어준다는 것은 아주 유용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어라고 박수를 쳤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용소 안에서 행해지는 예술 행위는 어떤 종류의 예술 행위든 어느 정도 기괴한 측면을 띠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예술과 관련된 행위에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은 음울한 현실과 예술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원서_43p, I shall never forget how I awoke from the deep sleep of exhaustion on my second night in Auschwitz-roused by music. The senior warden of the hut had some kind of celebration in his room, which was near the entrance of the hut. Tipsy voices bawled some hackneyed tunes. Suddenly there was a silence and into the night a violin sang a desperately sad tango, an unusual tune not spoiled by frequently playing. The violin wept and a part of me wept with it, for on that same day someone had a twenty-fourth birthday. That someone lay in another part of the Auschwitz camp, possibly only a few hundred or a thousand yards away, and yet completely out of reach. That someone was my wife. To discover that there was any semblace of art in a concentration camp must be surprise enough for an outsider, but he may be even more astonished to hear that one could find a sense of humor there as well; of course, only the faint trace of one, and then only for a few seconds or minutes. Humor was another of the soul's weapons in the fight for self-preservation. It is well known that humor, more than anythng else in the human make-up, can afford an aloofness and an ability to rise above any situation, even if only for a few seconds. I practically trained a friend of mine who work ed next to me on the building site to develop a sense of humor, I suggested to him that we would promise each other to invent at least one amusing story daily, about some incident that could happen one day after our liberation. He was a surgeon and had been an assistant on the staff of a large hospital. So I once tried to get him to smile by describing to him how he would be unable to lost the habits of camp life when he returned to his former work. [번역판_86p, 나는 지금도 아우슈비츠에서 맞은 두 번째 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 왜 내가 잠에서 깨어났는지를, 나는 음악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막사 입구에 있는 고참 관리의 방에서 무언가 축하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술에 취해 왁자지껄하는 소리 중에 흔해 빠진 노랫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방이 조용해졌다. 곧이어 바이올린이 흐느끼듯 토해내는 애끓는 탱고 선율이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너무 많이 연주되어서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곡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흐느꼈다. 바로 그날은 어떤 사람이 24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었다. 그 사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다른 편 막사에 누워 있다. 어쩌면 겨우 몇 백 야드 혹은 몇 천 야드에 불과한 거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그곳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내 아내였다. 이부 사람들 중에서 강제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더욱 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건축 공사장에서 일을 할 때, 실제로 나는 옆에서 일하는 친구를 대상으로 유머 감각을 개발시키는 훈련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적어도 하루에 한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자고 했다. 이야기의 소재는 우리가 풀려나고 난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일로 하기로 했다. 그는 외과의사로 큰 병원의 보조 스태프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풀려난 후 전에 일하던 병원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수용소 생활에서 얻은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들려주어 그를 웃게 만들었다.

 

[원서_44p, In the building site(especially when the supervisor made his tour of inspection) the foreman encouraged us to work faster by shouting: "Action! Action!" I told my friend, "One day you will be back in the operating room, performing a big abdominal operation. Suddenly an orderly will rush in announcing the arrival of the senior surgeon b shouting, 'Action! Action!' Sometimes the other men invented amusing dreams about the future, such as forecasting that during a future dinner engagement they might forget themselves when the soup was served and beg the hostess to ladle it "from the bottom". The attempt to develop a sense of humor and to see things in a humorous light his some kind of a trick learned while mastering the art of living. Yet it is possible to practice the art of living even in a concentration camp, although suffering is omnipresent. To draw an analogy. If a certain quantity of gas is pumped into an empty chamber, it will fill the chamber completely and evenly, no matter how big the chambe. Thus suffering completely fills the human soul and conscious mind, no matter whether the suffering is great or little. Therefore the "size" of human suffering is absolutely relative. It also follows that a very trifling thing can cause the greatest of joys. Take as an example something that happened on our journey from Auschwitz to the camp affiliated with Dachau. We had all been afraid that our transport was heading for the Mauthausen camp. We became more and more tense as we approached a certain bridge over the Danube which the train would have to cross to reach Mauthausen, according to the statement of experienced traveling companions. [번역판_87p, 건축공사장에서(특히 총감독이 나와 순시할 때에는)는 감독이 일을 빨리 하라고 우리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빨리 빨리 움직여!>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가 수술실에 들어가 큰 개복 수술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갑자기 노무원이 달려와 외과과장이 도착했다고 알려 주면서 소리치는 거야. 빨리 빨리 움직여!> 때로는 다른 동료들이 미래와 관련 있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풀려난 후 어느 날 저녁 초대를 받았는데, 자기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는 그 집 안주인에게 이렇게 부탁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밑바닥에서 퍼주세요”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번 유추를 해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인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코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 예로 아우슈비츠에서 다카우에 있는 한 수용소로 갈 때 체험했던 일을 얘기해 보겠다. 당시 우리를 태운 기차가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뉴브 강에 걸쳐 이쓴ㄴ 다리가 점점 가까워 올수록 우리는 긴장했다. 여행에 경험이 있는 친구로부터 마우트하우젠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뉴브 강을 건너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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