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2022년 3월 22일(화)_44~46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3.17|조회수14 목록 댓글 0

[원서_44p, In the building site(especially when the supervisor made his tour of inspection) the foreman encouraged us to work faster by shouting: "Action! Action!" I told my friend, "One day you will be back in the operating room, performing a big abdominal operation. Suddenly an orderly will rush in announcing the arrival of the senior surgeon b shouting, 'Action! Action!' Sometimes the other men invented amusing dreams about the future, such as forecasting that during a future dinner engagement they might forget themselves when the soup was served and beg the hostess to ladle it "from the bottom". The attempt to develop a sense of humor and to see things in a humorous light his some kind of a trick learned while mastering the art of living. Yet it is possible to practice the art of living even in a concentration camp, although suffering is omnipresent. To draw an analogy. If a certain quantity of gas is pumped into an empty chamber, it will fill the chamber completely and evenly, no matter how big the chambe. Thus suffering completely fills the human soul and conscious mind, no matter whether the suffering is great or little. Therefore the "size" of human suffering is absolutely relative. It also follows that a very trifling thing can cause the greatest of joys. Take as an example something that happened on our journey from Auschwitz to the camp affiliated with Dachau. We had all been afraid that our transport was heading for the Mauthausen camp. We became more and more tense as we approached a certain bridge over the Danube which the train would have to cross to reach Mauthausen, according to the statement of experienced traveling companions. [번역판_87p, 건축공사장에서(특히 총감독이 나와 순시할 때에는)는 감독이 일을 빨리 하라고 우리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빨리 빨리 움직여!>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가 수술실에 들어가 큰 개복 수술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갑자기 노무원이 달려와 외과과장이 도착했다고 알려 주면서 소리치는 거야. 빨리 빨리 움직여!> 때로는 다른 동료들이 미래와 관련 있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풀려난 후 어느 날 저녁 초대를 받았는데, 자기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는 그 집 안주인에게 이렇게 부탁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밑바닥에서 퍼주세요”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번 유추를 해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인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코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 예로 아우슈비츠에서 다카우에 있는 한 수용소로 갈 때 체험했던 일을 얘기해 보겠다. 당시 우리를 태운 기차가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뉴브 강에 걸쳐 이쓴ㄴ 다리가 점점 가까워 올수록 우리는 긴장했다. 여행에 경험이 있는 친구로부터 마우트하우젠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뉴브 강을 건너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원서_45p, Those who have never seen anything similar cannot possibly imagine the dance of joy performed n the carriage by the prisoners when they saw our transport was not crossing the bridge and was instead "only" for Dachau. nd again, what happened on our arrival in that camp, after a journey lasting two days and three nights? there had not been enough room for everybody to crouch on the floor of the carriage at the same time. The majorrity of us had to stand all the way, while a few took turns at squatting on the scanty straw which was soaked with human urine. When we arrived the first important news that we heard from older prisoners was that this comparatively small camp(its population was 2,500) had no "oven," no crematorium, no gas! That meant that a person who had become a "Moslem" could not be taken straight to the gas chamber, but would have to wait until a so-called "sick convoy" had been arranged to return to Auschwitz. This joyful surprise put us all in a good mood. the wish of the senior warden of our hut in Auschwitz had come true: we had come, as quickly as possible, to a camp which did not have a "chimney"-unlike Auschwitz. We laughed and cracked jokes in spite of, and during, all we had to go through in the next few hours. When we new arrivals were counted, one of us was missing. So we had to wait outside in the rain and cold wind until the missing man was found. He was at last discovered in a hut, where he had fallen asleep from exhaustion. Then the roll call was turned into a punishment parade. All through the night and late into the next morning, we had to stand outside frozen and soaked to the skin after the strain of our long journey. [번역판_89p,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 기차가 다리를 건너지 않고 “그냥” 다카우로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기차 안에서 벌어졌던 기쁨의 춤 잔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2박 3일 동안의 여행이 끝나고 마침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그 동안 기차 안이 너무 좁아서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앉을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사람 오줌으로 축축하게 젖은 짚단에 교대로 앉아 있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내내 서 있어야만 했다. 우리가 비교적 작은 규모(수용인원이 2,500명밖에 안 되었다)의 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들은 첫번째 뉴스는 그 곳에는 살인용 오븐도, 화장터도, 가스실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몰골이 ‘회교도’로 변한 사람도 곧바로 가스실로 갈 염려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우슈비츠로 돌려보내기 위한 ‘환자수송차’가 올 때까지는 적어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이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아우슈비츠에 있던 우리 고참 관리인이 소망하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와는 달리 ‘굴뚝’이 없는 그 수용소로 가능한 한 빨리 뛰어 들어갔다. 그 후 몇 시간 동안을 아주 힘들게 보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웃으면서 연신 농담을 주고받았다. 도착 후 인원점검을 하면서 한 사람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차가운 바람과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는 막사 안에서 발견되었다. 피곤에 지친 나머지 그만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그 다음 점호는 기합 행렬로 바뀌었다. 오랜 여행의 긴장도 풀지 못한 채 우리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꽁꽁 언 채로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원서_46p, And yet we were all very pleased! There was no chimney in this camp and Auschwitz was a long way off. Another time we saw a group of convicts pass our work sit. How obvious the relativity of all suffering appeared to us then! We envied those prisoners their relatively well-regulated, secure and happy life. They surely had regular opportunities to take bats, we thought sadly. They surely had toothbrushes and clothesbrushes, mattresses-a separate one for each of them-and monthly mail bringing them news of the whereabouts of their relatives, or at least of whether they were still alive or not. We had lost all that a long time ago. And how we envied those of us who had the opportunity to get into a factory and work in a sheltered room! It was everyone's wish to have such a lifesaving piece of luck. The scale of relative luck extends even further. Even among those detachments outside the camp(in one of which I was a member) there were some units which were considered worse than others. One could envy a man who did not have to wade in deep, muddy clay on a steep slope emptying the tubs of small field railway for twelve hours daily. Most of the daily accidents occurred on this job, and they were often fatal. In other work parties the foreman maintained an apparently local tradition of dealing out numberous blows, which made us tale of the relative luck of not being under their command or peerhaps of being under it only temporarily. Once, by an unlucky chance, I got into such a group. If an air raid alarm had not interrupted us after two hours(during which time the foreman had worked on me especially), making it necessary to regroup the workers afterwards, I think that I would have returned to camp on one of the sledges which carried those who had dies or were dying from exhaustion. [번역판_90p,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 수용소에는 굴뚝이 없고, 또 아우슈비츠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한번은 한 무리의 죄수들이 우리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들과 비교해서 우리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커보였는지! 우리는 그 죄수들이 누리는 상대적으로 잘 규정된,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부러워했다. 저 사람들은 틀림없이 정기적으로 목욕을 할 거야 하고 생각하니 내 신세가 처량해졌다. 분명 칫솔과 옷솔을 갖고 있을 거야. 매트리스도 각자 하나씩 있겠지.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편지를 받을 거야.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니 적어도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있는 편지 말이야.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공장에 들어가 안전한 실내에서 일하는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는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그런 한 조각의 행운을 얻는 것이 당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상대적인 행운의 척도는 이것 말고도 많이 있었다. 수용소 밖으로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나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중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작업반이 있었다. 매일 12시간씩 가파른 언덕에서 진흙탕을 오가며 좁은 선로를 따라 운반되는 통을 비우는 일을 했던 사람들은 그보다 편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사고의 대부분은 바로 여기서 일어났으며, 그 사고의 결과는 대개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감독이 그곳의 전통이라면서 수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작업반에 배치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런 작업반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한번은 운 나쁘게도 내가 우연히 그런 작업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약 두 시간(그 동안 감독이 줄곧 나를 주시해서 보고 있었다)만에 공급경보가 울려 작업이 중단되고, 그 후 작업조가 다시 편성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지쳐서 죽었거나 아니면 죽어가는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대형수레에 실려 수용소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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