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_54p, I generally answered all kinds of questions truthfully. But I was silent about anything that was not expressly asked for. If I were asked my age, I gave it. If asked about my profession, I said "doctor", but did not elaborate. The first morning in Auschwitz an SS officer came to the parade ground. We had to fall into separate groups of prisoners: over forty years, under forty years, metal workers, mechanic, and so forth. Then we were examined for ruptures and some prisoners had to form a new group. The group that I was in was driven to another hut, where we lined up again. After being sorted out once more and having answered questions as to my age and profession, I was sent to another small group. Once more we were driven to another hut and grouped differently. This continued fro soem time, and I became quite unhappy, finding myself among strangers who spoke unintelligible foreign languages. Then came the last selection, and I found myself back in the group that had been with me in the first hut. They had barely noticed that I had been sent from hut to hut in the meantime. But I was aware that in those few minutes fate had passed me in many different forms.
When the transport of sick patients for the "rest camp" was organized, my name(that is, my number) was put on the list, since a few doctors were needed. But no one was convinced that the destination was really a rest camp. A few weeks previously the same transport had been prepared. Then, too, everyone had thought that it was destined for the gas ovens, When it was announced that anyone who volunteered for the dreaded night shift would be taken off the transport list, eighty-two prisoners volunteered immediately. A quarter of an hour later the transport was canceled, but the eighty-two stayed on the list for the night shift. [번역판_102p, 나는 모든 종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딱 꼬집어서 질문을 받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만약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나는 나이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내 직업을 물었을 때는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의사”라고만 대답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처음 아침을 맞았을 때, 친위대 장교 한 사람이 점호장에 나타났다. 우리는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마흔살 이하, 마흔살 이상, 정신노동자, 기계공 등 이런 식이었다. 그 다음 우리는 탈장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새로운 그룹이 형성되었다. 내가 속해 있던 그룹은 다른 막사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줄을 섰다. 여기서 또 한 번 분류를 한 다음, 내 나이와 직업을 물었다. 나는 또 다른 작은 그룹으로 보내졌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다른 막사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또 다른 그룹이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으며,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왜냐하면 알아들 수 없는 외국말을 사용하는 이상한 사람들 그룹에 내가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다시 마지막 선별 작업이 진해되었다. 결국 나는 처음에 막사에서 개장 속했던 바로 그 그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그 동안 이 막사에서 저 막사로 옮겨 다녔다는 것을 거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 몇 분 동안, 여러 가지 형태의 운명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병든 사람을 ‘요양소’로 호송하게 될 때 내 이름(즉 내 번호)이 리스트에 올라갔다. 의사 몇 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지가 요양소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몇 주 전 비슷한 호송계획이 있었는데, 그 때도 사람들은 호송되는 환자들이 모두 가스실로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수용소 측에서 호송될 환자 중에서 자원해서 야간작업반에 가겠다는 사람들은 호송자 명단에서 빼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82명의 사람들이 자원을 해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분 후, 환자 호송계획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82명은 야간작업반 리스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원서_55p, For the majority of them, this meant death within the next fortnight.
Now the transport for the rest camp was arranged for the second time. Again no one knew whether this was a ruse to obtain the last bit of work from the sick-if only for fourteen days-or whether it would go to the gas ovens ro to a genuine rest camp. The chief doctor, who had taken a likint to me, told me furtively one evening at a quarter to ten, "I have made it known in the orderly room that you can still have your name crossed off the list; you may do so up till ten o'clock."
I told him that this was not my way; that I had learned to let fate take its course. "I might as well stay with my friends," I said. There was a look of pity in his eyes, as if he knew. . . He shook my hand silently, as thought it was a farewell, not for life, but from life. Slow I walked back to my hut. There I found a good friend waiting for me.
<You really want to go with them?> he asked sadly.
<Yes. I am going.>
Tears came to his eyes and I tried to comfort him. Then there was something else to do-to make will:
<Listen, Otto, if I don't get back home to my life, and if you should see her again, then tell her that I talked of her daily, hourly. You remember. Secondly, I have loved her more than anyone. Thirdly, the short time I have been married to her outweighs everything, even all we have gone through here.> Otto, where are you? Are you alive? What has happened to you since our last hour together? Did you find your wife again? And do you remember how I made you learn my will by heart-word for word-in spite of your childlike tears? The next morning I departed with the transport. This time it was not a ruse. [번역판_103p, 대다수의 환자들에게 야간작업을 한다는 것은 곧 2주안에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두 번째로 환자 호송 계획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 때는 이 계획이 환자들의 남은 노동력-비록 14일 동안이지만-을 쥐어짜려는 것인지 정말로 요양소로 가려는 것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저녁 10시 15분 전 평소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주치의가 다가오더니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직실에 얘기를 잘 해두었고. 당신을 리스트에서 빼도록 했으니 10시까지 당직실로 가보시오.” 나는 그에게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나는 운명이 정해 놓은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들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연민의 빛을 띠었다. 마치 내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그는 말없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을 삶을 위한 악수가 아니라, 삶과 작별하는 악수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에는 친한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정말로 그 사람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나?> 그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는 갈 거야>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 할 일이 있었다.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며, 그리고 자네가 자네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 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 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 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 마디 한 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이튿날 아침 나는 호송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이번에는 속임수가 아니었다.
[원서_56p, We were not heading for the gas chambers, and we actually did go to a rest camp. Those who had pitied me remained in a camp where famine was to rage ever more fiercely than in our new camp. They tried to save themselves, but they only sealed their own fates. Months later, after liberation, I met a friend from the old camp. He related to me how he, as camp policeman, had searched for a piece of human flesh that was missing from a pile of corpses. He confiscated it from a pot in which he found it cooking. Cannibalism had broken out. I had left just in time. Does this not bring to mind the story of Death in Teheran? A rich and mighty Persian once walked in his garden with one of his servants. The servant cried that he had just encountered Death, who had threatened him. He begged his master to give him his fastest horse so that he could make haste and flee to Teheran, which he could reach that same evening. The master consented and the servant galloped off on the horse. On returning to his house the master himself met Death, and questioned him, “Why did you terrify and threaten my servant?” “I did not threaten him; I only showed surprise in still finding him here when I planned to meet him tonight in Teheran,” said Death. The camp inmate was frightened of making decisions and of taking any sort of initiative whatsoever. This was the result of a strong feeling that fate was one master, and that one must not try to influence it in any way. but instead let it take its own course. In addition, there was a great apathy, which contribute in no small part of the feelings of the prisoner. At times, lightning decisions had to be made, decisions which spelled life or death. [번역판_105p, 가스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요양소로 가는 것이었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새로 들어간 수용소보다 훨씬 혹독한 기근에 시달렸던 그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을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결국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나는 그 전의 수용소에 있던 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자기가 수용소의 보안원으로 시체 더미에서 없어진 인육 조각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를 나에게 말해 주었다. 요리 중인 냄비 안에서 찾아내 압수했다는 것이다. 기아에 시달린 나머지 드디어 수용소 안에서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모양이다. 내가 때맞추어 그 수용소를 잘 떠난 셈이다. 이것이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한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이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하인이 비평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밤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을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견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죽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