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_57p, The prisoner would have preferred to let fate make the choice for him. This escape from committment was most apparent when a prisoner had to make the decision for or against an escape attempt. In those minutes in which he had to make up his mind-and it was always a question of minutes-he suffered the tortures of Hell. Should he make the attempt to flee? Should he take the risk?
I, too, experienced this torment. As the battle-front drew nearer, I had the opportunity to escape. A colleague of mine who had to visit huts outside the camp in the course of his medical duties wanted to escape and take me with him. Under the pretense of holding a consultation about a patient whose illness required a specialist's advice, he smuggled me out. Outside the camp, a member of foreign resistance movement was to supply us with uniforms and documents. At the last moment there were some technical difficulties and we had to return to camp once more. We used this opportunity to provide ourselves with provisions-a few rotten potatoes-and to look for a rucksack.
We broke into an empty hut of the women's camp, which was vacant, as the women had been sent to another camp. The hut was in great order; it was obvious that many women had acquired supplies and fled. There ware rags, straw, rotting food, and broken crockery. Some bowls were still in good conditio and would have been veryh valuable to us, but we decided not to take them. We knew that lately, as conditions had become desperate, they had been used not only for food, but also as washbasins and chamber pots.(There was aa strictly enforced rule against having any kind of utensil in the hut. However, some people were forced to break this rule, especially the typhus patients, who were much too weak to go outside even with helo.) [번역판_107p,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을 내려 주기를 원했다. 이렇게 어떤 일의 실행을 회피하는 태도는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몇 분 동안-이런 문제는 항상 몇 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그는 지옥의 고문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탈출을 해야만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까? 나 역시 비슷한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전선이 우리 수용소에 가까이 왔을 때, 나에게 탈출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수용소에 의사 출신 동료가 있었다. 그는 진료를 하는 길에 수용소 밖에 있는 막사에도 들러야 했는데, 그가 탈출을 시도하면서 나에게도 함께 가자고 했다. 환자의 증세가 전문의의 조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함께 진찰해야 한다는 구실을 붙여 나를 수용소 밖으로 데려간 것이다. 수용소 밖에서는 저항운동단체의 일원인 한 외국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에게 제복과 문서를 주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겨서 다시 수용소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회를 식량-상한 감자 몇 알에 불과하지만-을 준비하고, 배낭을 구하는 데 쓰기로 했다. 먼저 우리는 여자 수용소에 있는 막사로 뛰어 들어갔다. 여자들이 다른 수용소로 옮겨 갔기 때문에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막사 안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많은 여자들이 보급품을 받은 다음 서둘러 떠난 것이 분명했다. 넝마 옷, 지푸라기, 상한 음식, 깨진 질그릇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떤 그릇은 여전히 상태가 좋아서 꽤 쓸모 있어 보이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당시 여자 수용소에는 상황이 나빠지자 그릇을 식기로는 물론 세면대롸 변기로도 사용했다고 한다(수용소에서는 막사 안에 변기를 갖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엄한 규율이 있어싿.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규율을 어겨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발진티푸스 환자처럼 몸이 너무 쇠약해 도움을 받아도 밖에 나가기 힘든 사람들이 그랬다.
[원서_58p, While I acted as a screen, my friend broke into the hut and returned shortly with a rucksack which he id under his coat. He had seen another one inside which I was to take. So we changed places and I went in. As I searched in the rubbish, finding the rucksack and even a toothbrush, I suddenly saw, among all the things that had been left behind, the body of a woman.
I ran back to my hut to collect all my possessions: my food bowl, a pair of torn mittens "inherited" from a dead typhus patient, and a few scraps of paper covered with shorthand notes(on which, as I mentioned before, I had started to reconstruct the manuscript which I lost at Auschwitz). I made a quick last round of my patients, who were lying huddled on the rotten planks of wood on either side of the huts. I came to my only countryman, who was almost dying, and whose life it had been my ambition to save in spite of his condition. I had to keep my intention to escape to myself, but my comrade seemed to guess that something was wrong(perhaps I showed a little nervousness). In a tired voice he asked me, <You, too, are getting out?> I denied, but I found it difficult to avoid his sad look. After my round I returned to him. Again a hopeless look greeted em and somehow I felt it to be an accusation. The unpleasant feeling that had gripped me as soon as I had told my friend I would escape with him became more intense. Suddenly I decided to take fate into my own hands fro once, I ran out of the hut and told my friend that I could not go with him. As soon as I had told him with finality that I had made up my mind with my patients, the unhappy feeling left me. I did not know what the following days would bring, but I had gained an inward peace that I had never experienced before. [번역판_109p, 내가 망을 보는 동안 친구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곧 이어 그가 외투 속에 배낭을 숨겨 가지고 나에게 왔다. 그가 막사 안에서 다른 배낭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내가 가져오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역할을 바꾸어 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쓰레기더미를 뒤져서 배낭은 물론 칫솔까지 찾아내는 횡재를 얻었다. 그런ㄷ 바로 그 순간 나는 뒤에 남겨진 쓰레기더미 속에서 여자의 시신을 보았다. 소지품을 모두 챙기기 위해 나는 내 막사로 뛰어 들어갔다. 음식을 받아먹는 그릇과, 죽은 발진티푸스 한자에게 ‘상속 받은’ 낡은 벙어리장갑 한 켤레, 소기 부호가 쓰인 종이 몇 장(이미 얘기했던 것처럼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이 내 소지품이었다. 나는 마지막 회진을 빨리 끝냈다. 한자들은 막사 양쪽에 깔아 놓은 널판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나는 환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와 같은 고향 출신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심각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정말로 살리고 싶었다. 나는 탈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내 고향 친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어쩌면 내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도 나갈 건가요?> 나는 부인했다. 하지만 그의 슬픈 눈초리를 피하기가 힘들었다. 회진이 끝나고 나서 나는 다시 그에게 갔다. 그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나를 맞았다. 어쩌면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 같기로 했다. 내가 친구에게 함께 탈출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나를 엄습했던 그 불평했던 감정이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갑자기 운명을 내 자신의 손으로 잡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막사 밖으로 뛰어나가 친구에게 그와 함께 탈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연한 태도로 환자 곁에 그대로 감기로 했다고 친구에게 말하지마자 그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원서_59p, I returned to the hut, sat down on the boards at my countryman's feet and tried to comfort him; then I chatted with the others, trying to quiet them in their delirium.
Our last day in camp arrived. As the battle-front came nearer, mass transports had taken nearly all the prisoners to other camps. The camp authorities, the Capos and the cooks had fled. On this day an order was given that the camp must be evacuated completely by sunset. Even gthe few remaining prisoners(sick, a few doctors, and some "nurses") would have to leave. A night, the camp was to be set on fire. In the afternoon the trucks which were to collect the sick had not yet appeared. Instead the camp gates were suddenly closed and the barbed wire closely watched, so that no one could attempt an escape. The remaining prisoners seemed to be destined to burn with the camp. For the second time my friend and I decided to escape.
We had been given an order to bury three men outside the barbed wire fence. We were the only two in camp who had strength enough to do the job. Nearly all the others lay in the few huts which were still in use, prostrate with fever and delirium. We now made our plans: along with the first body we would smuggle out my friend's rucksack, hiding it in the old laundry tub which served as a coffin. When we took out the second body we would also carry out my rucksack, and on the third trip we intended to make our escape. The first two trips went according to plan. After we returned, I waited while my friend tried to find a piece of bread so that we would have something to eat during the next few days in the woods. [번역판_110p, 나는 막사로 돌아가 고향 친구의 발끝에 앉아서 그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전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수감자들을 다른 수용소로 옮기는 대규모 수송작전이 진행되었다. 수용소 당직자와 카포들, 그리고 요리사들은 모두 도망을 갔다. 이날 해질 때까지 수용소를 완전히 비워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잔류해 있던 몇 명의 사람들(환자와 의사 몇 명 그리고 간호사들)까지도 모두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밤이 되며 수용소에 불을 지르게 되어 있었다. 오후가 되었는데도 환자를 실어 나르기로 되어 있는 트럭이 오지 않았다. 대신에 갑자기 수용소 문이 닫히고, 어느 누구도 도망을 칠 수 없도록 철조망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수용소와 함께 불태워질 운명에 처한 것처럼 보였다. 내 친구와 나는 두 번째로 탈출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철조망 담장 밖에다 시신 세 구를 묻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용소에 있는 사람 중에서 우리 두 사람에게만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막사에 누워서 고열과 정신착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 시신을 운반할 때 관을 사용하는 낡은 세탁통에다 친구의 배낭을 가져 오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신을 옮길 때 내 배낭을 가져 오기로 했다. 그릭 세 번째 시신을 옮길 때 탈출을 하자는 것이었다. 처음의 두 번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막사로 다시 돌아온 후, 나는 숲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먹을 빵을 구하러 간 친구를 기다렸다.
[원서_60p, I waited. Minutes passed. I became more and more impatient as he did not return. After tree years of imprisonment, I was picturing freedom joyously, imagining how wonderful it would be to run toward the battle-front. but we did not get that far. The very moment when my friend came back, the camp gate was thrown open. A splendid, aluminum-colored car, on which were painted large red crosses, slowly rolled on to the parade ground. A delegate from the International Red Cross in Geneva had arrived, and the camp and its inmates were under his protection. The delegate billeted himself in a farmhouse in the vicinity, in order t be near the camp at all times in case of emergency. Who worried about escape now? boxes with medicines were unloaded from the car, cigarettes were distributed, we were photographed and joy reigned supreme. Now there was no need for us to risk running toward the fighting line. In our excitement we had forgotten the third body, so we carried it outside and dropped it int the narrow grave we had dug for the three corpses. 친구를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다. 그가 돌아오지 않자 점점 더 조바심이 났다. 무려 3년을 갇혀 지낸 후,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를 머리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전선을 향해서 내달리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상상하면서.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친구다 돌아온 바로 그 순간 수용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적십자 마크가 그려진 번쩍번쩍하는 알루미늄 차가 천천히 점호장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제네바에 있는 국제 적십자사의 대표가 도착한 것이다. 그는 수용소 가까이에 있는 농가에 숙소를 정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누가 탈출을 걱정하겠는가? 차에서 약 상자가 내려지고 담배가 공급되었다. 우리는 사진이 찍혔으며, 기쁨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제 전선을 향해 달려가는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이에 세 번째 시신을 밖으로 갖다 묻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원서_61p, The last remaining prisoners were to be taken to a central camp, from which they would be sent to Switzerland within forty-eight hours-to be exchanged for some prisoners of war. We scarcely recognized the SS. They were so friendly, trying to persuade us to get in the trucks without fea, telling us that we should be grateful for our good luck. Those who were strong enough crowded into the trucks and the seriously ill and feeble were lifted up with difficulty. My friend and I-we did not hide our rucksacks now-stood in the last group, from which thirteen would be chosen for the next to last truck. The chief doctor counted out the requisite number, but he omitted the two of us. The thirteen were loaded int the truck and we had to stay behind. Surprised, very annoyed and disappointed, we blamed the chief doctor, who excused himself by saying that we had been tired and distracted. He said that he ad thought we still intended to escape. Impatiently we sat down, keeping our rucksacks on our backs, and waited with the few remaining prisoners for the last truck. We had to wait a long time. Finally we lay down on the mattresses of the deserted guard-room, exhausted by the excitement of the last few hours and days, during which we had fluctuated continually between hope and despair. We slept in our clothes and shoes, ready for the journey. The noises of rifles and cannons woke us; the flashes of tracer bullets and gun shots entered the hut. The chief doctor dashed in and ordered us to take cover on the floor. One prisoner jumped on my stomach from the bed above me and with his shoes on. [번역판_113p, 마지막 남아 있던 수감자들은 중앙수용소로 보내진 다음 그곳에서 48시간 안에 스위스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전쟁 포로들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나치 대원들을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망설이지 말고 트럭에 타라고 우리를 설득하면서, 이런 행운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한 사람들은 트럭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심하게 아프거나 약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들어올려졌다. 내 친구와 나는-이제는 더 이상 배낭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마지막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 그룹에서 13명을 뽑아 끝에서 두 번째로 오는 트럭에 태우기로 되어 있었다. 트럭이 도착하자 주치의가 열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 중에 우리 둘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뽑힌 열세 사람은 트럭에 올라타고 우리 둘은 뒤에 남아야 했다. 놀라고 화가 나고 실망해서 우리는 주치의에게 따졌다. 그는 너무 피곤하고 정신이 없어서 그랬노라고 변명하면서 우리가 아직도 탈출을 기도하는 줄 알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등 뒤에 배낭을 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트럭이 오기를 기다렷다. 이번에는 아주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초소에 있던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우리는 지난 몇 시간, 며칠 동안의 흥분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끊임없이 오르내렸었다. 그러다가 매트리스 위에서 여행에 대비해 옷과 신발을 그대로 입은 채로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를 잤을까. 시끄러운 대포 소리와 총소리에 잠이 깼다. 예광탄이 터지고 막사 안으로 총알이 날아들었다. 주치의가 뛰어 들어오더니 바닥에 엎드리라고 했다. 위 침대에 있던 사람이 신발을 신은 채로 내 배 위로 뛰어 내렸다.
[원서_62p, That awakened me all right! Then we grasped what was happening: the battle-front had reached us! the shooting decreased and morning dawned. Outside on the pole at the camp gate a white flag floated in the wind. Many weeks later we found out that even in those last hours fate had toyed with us few remaining prisoners. We found out just how uncertain human decisions are, especially in matters of life and death. I was confronted with photographs which had been taken in a small camp not far from ours. Our friends who had thought they were traveling to freedom that night had been taken in the trucks to this camp, and there they were locked in the huts and burned to death. Their partially charred bodies were recognizable on the photograph. I thought again of Death of Teheran. Apart from its role as a defensive mechanism, the prisoners' apathy was also the result of other factors. Hunger and lack of sleep contributed to it(as they do in normal life, also) and to the general irritability which was another characteristic of the prisoners' mental state. The lack of sleep was due partly tot he pestering of vermin which infested the terrible overcrowded huts because of the general lack of hygiene and sanitation. [번역판_114p, 그 덕분에 나는 잠에서 안전히 깰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전선이 코앞에까지 온 것이다. 드디어 총격이 잦아들고 아침이 밝았다. 수용소 문에 있는 깃대에서 하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로부터 여러 주가 지난 후,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에도 운명의 신이 우리를 우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는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것이 생사와 관련된 문제일 때에는 특히 그렇다. 나는 우리 수용소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수용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그날 밤 자유를 향해 간다고 믿었던 우리 친구들은 트럭에 실려 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사 안에 갇힌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사진으로도 군데군데 불에 탄 동료들의 시신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또 다시 테헤란에서의 죽음을 생각했다. 수감자들의 무감각이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는 것 외에 여기에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굶주림과 수면부족(이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이 이런 무감각한 상태로 그들을 이끌었으며, 수감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초조함이 이런 무감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보건시설과 우생시설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이와 벼룩이 사람들로 꽉 찬 막사 안에서 무섭게 퍼져나갔다. 니코틴과 카페인 부족도 이런 무감각과 초조함의 원인이 되었다.
[원서_63p, (The consciousness of one's inner value is anchored in higher, more spiritual things, and cannot be shaken by camp life. But how many free men, let alone prisoners, possess it?) without consciously thinking about it, the average prisoner felt himself utterly degraded. This became obvious when one observed the contrasts offered by the singular sociological structure of the camp. The more "prominent" prisoners, the Capos, the cooks, the store-keepers and the camp policemen, did not, as a rule, feel degraded at all, like the majority of prisoners, but on the contrary-promoted! Some even developed miniature delusions of grandeur. The mental reaction of the envious and grumbling majority toward this favored minority found expression in several ways, sometimes in jokes. For instance, I heard one prisoner talk to another about a Capo, saying, "Imagine! I knew that man when he was only the president of a large bank. Isn't it fortunate that he has risen so far in the world?>
Whenever the degraded majority and the promoted minority came into conflict(and there were plenty of opportunities for this, starting with the distribution of food) the results were explosive. Therefore, general irritability(whose physical causes were discussed above)became most intense when these tension often ended in a general fight. Since the prisoner continually witnessed scenes of beatings, the impulse toward violence was increased. I myself felt my fists clench when anger came over me while I was famished and tired. I was usually very tired, since we had to stoke our stove-which we were allowed to keep in our hut for the typhus patients-throughout the nights. However, some of the most idyllic hours I have ever spent were in the middle of the night when all the others were delirious or sleeping [번역판_116p, (한 사람의 내적 가치에 대한 의식은 보다 차원이 높은, 보다 정신적인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수용소 생활이 이것을 흔들 수는 없다. 하지만 수감자는 차치하고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현상은 수용소라는 사회의 구조를 관찰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다른 수감자보다 ‘우월한’ 수감자와, 카포, 요리사, 군수창고 관리인, 보안대원은 대다수 사람들과는 달리 계층이 하락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상승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약간의 과대망상 증세까지 보이기도 했다.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질투와 불평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때로는 농담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 번은 어떤 사람이 한 카포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상상해 봐! 내가 알고 있기로 저 사람은 그 전에 큰 은행의 총재에 불과했거든. 그런데 지금 저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으니 얼마나 출세한 거야!> 계층 하락한 대다수의 사람들과 계층 상승한 소수의 사람들이 싸우게 되면(수용소에서는 음식을 나누어 주는 문제에서 부터 시작해 이런 일이 벌어질 때가 아주 많았다) 그 결과는 가치 폭발적이었다. 일반적인 불안감(그 물리적인 요인은 앞에서 이야기했다)에 이런 정신적 긴장이 가중되며 그 강도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긴장이 종종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수감자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구타 장면을 목격해 왔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충동이 커진다. 나 자신의 경우만 보더라도 배고프고 피곤한 상태에서 화가 나면 저절로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때가 많았다. 나는 언제나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밤새로록 화로에 불-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 환자를 위해 막사 안에 불을 피우도록 허락했다-을 지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낸 중에서 가장 목가적이었던 시간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헛소리를 하거나 잠을 자고 있는 한밤중이었다.
[원서_64p, I could lie stretched out in front of the stove and roast a few pilfered potatoes in a fire made from stolen charcoal. But the following day I always felt even more tired, insensitive and irritable. While I was working as a doctor in the typhus block, I also had to take the place of the senior block warden who was ill. Therefore, I was responsible to the camp authority for keeping the hut clean-if "clean" can be sued to describe such a condition. The pretense at inspection to which te ht was freqently submitted was more for the purpose of torture than of hygiene. More food and a few drugs would have helped, but the only concern of tghe inspectors was whether te dirty, ragged and verminous blankets of tghe patients were tucked in neatly at their feet. As to the fate of the inmates, they were quite unconcerned. If I reported smartly, whipping my prison cap from my worn head and clicking my heels, "Hut number VI/9 52 patients, two nursing orderlies, and one doctor," they were satisfied. And then they would leave. But until they arrived-often they were hours later than announced, and sometimes did not come at all-all I was forced to keep; straightening blankets, picking up bits of straw which fell from the bunks, and shouting at the poor devils who tossed in their beds and threatened to upset all my efforts at tidiness and cleanliness. Apathy was particularly increased among the feverish patients, so that they did not react at all unless they were shouted at. Even this failed at times, and then it took tremendous self-control not to strike them. For one's own irritability took on enormous proportions in the face of the other's apathy and especially in the face of the danger(i.e., the approaching inspection) Which was caused by it. While I was working as a doctor in the typhus block, I also had to take the place of the senior warden who was ill. There, I was responsible to the camp authority for keeping the hut clean-if "clean" can be used to describe such a condition. The pretense at inspection to which te hut was frequently submitted was more for the purpose of torture than of hygiene. [번역판_117p, 나는 난로 앞에 몸을 쭉 뻗치고 누워서는 슬쩍해 온 감자 몇 알을 역시 훔쳐온 숯불에 구워 먹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한층 더 피로감을 느꼈으며, 감각이 둔해지고 마음이 초조해졌다. 발진티푸스 한자 막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병으로 쓰러진 고참 관리인 대신 그가 하던 일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막사를 항상 ‘청결’-그런 상황에서도 ‘청결’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며-하게 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막사 안에서 검열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수시로 행해지는 행위는 위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수감자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환자들에게 음식이나 약 몇 알 더 주는 것이 도움이 되련만 검열관은 복도 중간에 지푸라기가 떨어져 있지 않는지, 이가 득실거리는 더럽고 다 떨어진 담요가 한자 발밑에 곱게 개어져 있는지에만 간심을 주었다. 수감자들의 운명?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빡빡 깎은 머리에서 모자를 잽싸게 벗는 것과 동시에 발뒤꿈치에서 찰카닥하는 소리를 내면서 “막사 번호 VI/9, 환자 52명, 간호사 1명, 의사 1명, 이상 없음” 이라고 하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막사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온다고 한 시간보다 몇 시간씩 늦게 오거나 아예 안 올 때도 있었다-나는 담요를 정리하고, 침상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고, 침상에 누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애써서 깨끗하게 해놓은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불쌍한 녀석들에게 소리를 질러대야만 했다. 고열에 시달리는 환장에게서는 무감각 증세가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지 않으며 전혀 반응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때로는 이것조차 실패로 끝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을 때리지 않기 위해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 무감각한 것을 보면, 특히 그 때문에 위험한 상황(예를 들어 검열이 임박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면 걷잡을 수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발진티푸스 환자 막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병으로 쓰러진 고참 관리인 대신 그가 하던 일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막사를 항상 ‘청결’-그런 상황에서도 ‘청결’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하게 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막사 안에서 검열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수시로 행해지는 행위는 위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수감자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환자들에게 음식이나 약 몇 알 더 주는 것이 도움이 되려만 검열관은 복도 중간에 지푸라기가 떨어져 있지 않은지, 이가 득실거리는 더럽고 다 떨어진 담요가 환자 발밑에 곱게 개어져 있는지에만 관심을 두었다. 수감자들의 운명?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원서_65p, In attempting this psychological presentation and a psycho-pathological explanation of the typical characteristics of a concentration camp inmate, I may give the impression that the human being is completely and unavoidably influenced by his surroundings. (In this case the surroundings being the unique structure of camp life, which forced the prisoner to conform his conduct to a certain set pattern.) But what about human liberty? Is there no spiritual freedom in regard to behavior and reaction to any given surroundings? Is that theory true which would have us believe tghat man is mo more than a product of many conditional and environmental factor-be they of a biological, psychological or sociological nature? Is man but an accidental product of these? Most important, do the prisoners' reactions to the singular world of the concentration camp prove that man cannot escape the influences of his surroundings? Does man have no choice of action in the face of such circumstances?
We can answer these questions from experience as well as on principle. The experiences of camp life show that man does have a choice of action. There were enough examples often of a heroic nature, which proved tha apathy could be overcome, irritability suppressed. Man can preserve a vestige of spiritual freedom, of independence of mind, even in such terrible conditions of psychic and physical stress. We who lived in concentration camps can remember the men who walked through the huts comforting others, giving away their last piece of bread. [번역판_119p,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지니고 있던 전형적인 심리적 특징에 관한 문제를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소개하고, 정신병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은 인간은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이런 경우, 주변 환경이 수용소 생활의 유일한 구조가 되며, 이것이 수감자들에게 일정한 유형의 행동을 하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 즉 인간의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이 만들어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반응이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단 말인가? 이론은 물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통해서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입중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원서_66p, They may have been few in number, but they offer sufficient proof that everything can be taken from a man but one thing: the last of the human freedoms-to choose one attitude in any given set of circumstances, to choose one's own way. And there were always choices to make. Every day, every hour, offered the opportunity to make a decision, a decision which determined whether you would or would not submit to those powers which threatened to rob you of your very self, your inner freedom; which determined whether or not you would become the plaything of circumstance, renouncing freedom and dignity to become molded into the form of the typical inmate. Seen from this point of view, the mental reactions of the inmates of concentration camp must seem more to us than the mere expression of certain physical and sociological conditions. Even though conditions such as lack of sleep, insufficient food and various mental stresses may suggest that the inmates were bound to react in certain ways, in the final analysis it becomes clear that the sort of person the prisoner became was the result of an inner decision, and not the result of camp influences alone. Fundamentally, therefore any man can, even under such circumstances, decide what shall become of him-mentally and spiritually. He may retain his human dignity even in a concentration camp. Dostoevski said once, "There is only one thing that I dread: not to be worthy of my sufferings." These words frequently came to my mind after I became acquainted with those martyrs whose behavior in camp, whose suffering and death, bore witness to the fact that the last inner freedom cannot be lost. It can be said that they were worthy of their sufferings; the way they bore their suffering was a genuine inner achievement. It is this spiritual freedom-which cannot be taken away-that makes life meaningful and purposeful. [번역판_120p,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중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자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 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 보며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원서_66p 끝
[원서_67p, It can be said that they were worthy of their sufferings; the way they bore their suffering was a genuine inner achievement. It this spiritual freedom-which cannot be taken away-that makes life meaningful and purposeful. An active life serves the purpose of giving of man the opportunity to realize values in creative work, while a passive life of enjoyment affords him the opportunity to obtain fulfillment in experiencing beauty, art, or nature. But there is also purpose in that life which is almost barren of both creation and enjoyment and which admits of but one possibility of high moral behavior: namely, in man's attitude to his existence, an existence restricted by external forces. An creative life and a life of enjoyment are banned to him. But not only creativeness and enjoyment are meaningful. If there is a meaning in life at all, then there must be a meaning in suffering. Suffering is an ineradicable part of life, even as fate and death. Without suffering and death human life cannot be complete. The way in which a man accepts his fate and all the suffering it entails, the way in which he takes up his cross, give him ample opportunity-even under the most difficult circumstances-to add a deeper meaning to his life. It may remain brave, dignified and unselfish. Or in tghe bitter fight for self-preservation he may forget his human diginity and become mo more than an animal. Here lies the chance for a man either to make use of or to forgo the opportunities of attaining the moral values that a difficult situation may afford him. and this decides whether he is worthy fo his sufferings or not. Do not think that these consideratins are unworldly and too far removed from real life. It is true that only a few people are capable of reaching such high moral standards. Of the prisoners only a few kept their full inner liberty and obtained those values which their suffering afforded, but even one such example is sufficient proof that man's inner strength may raise him above his outward fate. [번역판_122p,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이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도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제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렇게 도덕적 수준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예만으로도 인간이 지닌 내면의 힘이 외형적이 운명을 초월해 그 사진의 존재를 높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원서_67 끝
[원서_68p, Such men are not only in concentration camps. Everywhere man is confronted with fate, with the chance of achieving something through his own suffering.
Take the fate of the sick-especially those who are incurable. I once read a letter written by a young invalid, in which he told a friend tha the had just found out he would not live fro long, that even an operation would be of no help. He wrote further that he remembered a film he had seen in which a man was portrayed who waited for death in a courageous and dignified way. The body had thought it a great accomplishment to meet death so well. Now-he wrote-fate was offering him a similar chance.
Those of us who saw the film called Resurrection-taken from a book by Tolstoy-years ago, may have had similar thoughts. Here were great desinies and great men, For us, at that time, there was no great fate; there was no chance to achieve such greatness. After the picture we went to the nearest cafe, and over a cup of coffee and a sandwich we forgot the strange metaphysical thoughts which for one moment had crossed our minds. But when we ourselves were confronted with a great destiny and faced with the decision of meeting it with equal spiritual greatness, by then we had forgotten or youthful resolution of long ago, and we failed.
Perhaps there came a day for some of us when we say the same film again, or a similar one. But by then other pictures may have simultaneously unrolled before one’s inner eye; pictures of people who attained much more in their lives than a sentimental film could show. [번역판_123p, 그런 사람들이 비단 강제수용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그리고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나게 된다. 병든 사람의 경우, 특히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언제가 병에 걸린 한 젊은이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편지에서 젊은이는 친구에겡 방금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수술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그 젊은이는 언제가 자기가 본 영화 이야기를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아주 용감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죽음을 그렇게 의연하게 맞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 위대한 성취였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운명이 자기에게 그와 똑같은 기회를 주었다고. 영화 <부활>-톨스토이 소설을 각색한-을 본 사람들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거기에는 위대한 운명과 위대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위대한 운명이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런 위대함을 성취할 만한 기회도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근처의 카페로 갔다. 커피 한 잔에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우리는 머리를 잠깐 스치고 지나갔던 그 기이하게 형이상학적인 생각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운명과 직접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그와 똑같은 영적인 위대함을 가지고 그것과 만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바로 그때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내렸던 젊은 시절의 결의를 잊어버렸으며, 그래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아마 우리 중 몇몇은 그 후 그때 우리가 보았던 똑같은 영화를 다시 보았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영화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화를 보는 내면의 눈에 또 다른 영상이 동시에 펼쳐졌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통해 감상적인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것ㅂ다 휠씬 더 많은 것을 보여 주었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 말이다.
[원서_69p, Some details of a particular man’s inner greatness may have come to one’s mind, like the story of the young woman death I witnessed in a concentration camp. It is a simple story. There is little to tell and it may sound as if I had invented it; but to me it seems like a poem.
This young woman knew that she would die in the next few days. But when I talked to her she was cheerful in spite of this knowledge. “I am greatful that fate has hit me so hard,” she told me. “In former life I was spoiled and did not take spiritual accomplishments seriously.” Pointing through the widow of the hut, she said, “This tree is the only friend Ihave in my loneliness.” Through that wondow she could see just one branch of a chestnut tree, and on the branch were two blossoms. “I often talk to this tree,” she said to me. I was startled and didn’t quite know how to take her words. Was she delirious? Did she have occasional hallucinaions? Anxiously I asked her if the tree replied. “Yes” “What did it say to her” She answered, “It said to me, ‘I am here-I am here-I am life, eternal life’
We have stated that that which was ultimately responsible for the state of the prisoner's inner self was not so much the enumerated psychophysical causes as it was the result of a free decision. Psychological observations of the prisoners have shown that only the men who allowed their inner hold on their moral and spiritual selves to subside eventually fell victim to the camp's degeneration influences. The question now arises, what could, or should, have constituted this 'inner hold'?
Former prisoners, when writing or relating their experiences, agree that the most depressing influence of all was that a prisoner could not know how long his term of imprisonment would be.[번역판_125p, 그런 영화를 보면서 영혼의 위대함을 보여 주었던 어떤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다. 강제수용소에서 내가 직접 그 죽음을 목격했던 한 젊은 여자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야기할 것이 너무 없어서 마치 내가 지어낸 것 같이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이 젊은 여자는 자기가 며칠 안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녀는 아주 명랑했다. <나는 운명이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타격을 가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그 전에 나는 제멋대로였고, 정신적인 성취 같은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그녀는 창밖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이 나무가 내 외로움을 달래줄 유일한 친구랍니다> 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밤나무 가지 한 개와 그위에 피어 있는 꽃 두 송이였다. <저는 저 나무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답니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환각에 빠졌나?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나무가 대답을 하는지 물었다. <물론이지요.> 나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녀는 말했다. <나무가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여기 있단다. 내가 여기 있단다. 나는 생명이야. 영원한 생명이야>
[번역판_126p, 우리는 앞에서 수감자의 내면적 자아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심리적, 육체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는 깃이라는 말을 했다.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의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무엇이 ‘내적 소유’를 이룰 수 있으며 또 이루어야만 하는 것일까?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원서_70p, He had been given no date for his release. (In our camp it was pointless even to talk about it.) Actually a prison term was not only uncertain but unlimited. A well-known research psychologist has pointed out that life in a concentration camp could be called a "provisional existence." We can add to this by defining it as a "provisional existence of unknown limit."
New arrivals usually knew nothing about the conditions at a camp. Those who had come back other camps were obliged to keep silent, and from some camps no one had returned. On entering camp a change took place in the minds od the men. with the end of uncertainly there came the uncertainty of the end. It was impossible to foresee whether or when, it at all, this form of existence would end.
The Latin word ‘finis’ has two meanings: the end or the finish, and a goal to reach. A man who could not see the end of his ‘provisional existence’ was not able to aim at an ultimate goal in life. He ceased living for the future, in contrast to a man in life. Therefore the whole structure of his inner life changed; signs of decay set in which we know from other areas of life. Unemployed worker, for example, is in a similar position. His existence has become provisional and in a certain sense he cannot live for the future or aim at a goal. Research work done on unemployed miners has shown that they suffer from a peculiar sort of deformed time-inner time-which i s a result of their unemployed state. Prinoners, too, suffered from this strange "time-experience". In camp, a small time unit, a day, for example, filled with hourly tortures and fatigue, appeared endless. A larger time unit, perhaps a week, seemed to pass very quickly. [번역판_127p, 우리는 언제 석방되는지를 몰랐다.(내가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형 기간은 불확실했으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저명한 연구 전문 심리학자는 강제수용소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provisional existence)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마디 더 붙이자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수용소 환경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다른 수용소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고, 어떤 수용소로 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의 불확실성은 결망이 났지만, 이번에는 결말에 대한 불확실성이 뒤를 잇는다. 이런 형태의 삶이 끝날 것인지 말 것인지, 끝난다면 과연 언제 끝날 것인지 미리 예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라틴어 ‘finis’ 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 현상을 볼 수 있다. 예들 들자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 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도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예를 들자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도 없고, 목푤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감각-내면의 시간-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