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2022년 4월 4일(월)_15~20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3.26|조회수23 목록 댓글 0

[영문판_15p, <You will take nothing with you except your shoes, your belt or suspenders, and possibly a truss. I am starting to count-now!> With unthinkable haste, people tore off their clothes. As the time grew shorter, they became increasingly nervous and pulled clumsily at their underwear, belts and shoelaces. Then we heard the first sounds of whipping; leather straps beating down on naked bodies. Next we were herded into another room to be shaved: not only our heads were shorn, but not a hair was left on our entire bodies. Then on to the showers, where we lined up again. We hardly recognized each other; but with great relief some people noted that real water dripped from the sprays. While we were waiting for the shower, our nakedness was brought home to us: we really had nothing now except our bare bodies-even minus hair; all we possessed, literally, was our naked existence. What else remained for us as a material link with our former lives? For me there were my glasses and by belt; the latter I had to exchange later on for a piece of bread. There was an extra bit of excitement in store for the owners of trusses. In the evening the senior prisoner in charge of our hut welcomed us with a speech in which he gave us his word of honor that he would hang, personally, "from that beam"-he pointed to it-any person who had sewn money or precious stones into his truss. Proudly he explained that as a senior inhabitant the camp laws entitled him to do so. Where our shoes were concerned, matters were not so simple. Although we were supposed to keep them, those who had fairly decent pairs had to give them up after all and were given exchange shoes that did not fit. [번역판_43, <신발과 머리띠, 멜빵과 탈장대를 제외한 모든 것을 벗도록 한다. 자 시작.>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옷을 벗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초조해진 탓인지 내복과 허리띠, 구두끈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서툴러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으로 채찍 소리가 들려 왔다. 가죽 채찍이 벌거벗은 몸뚱이 위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그 다음에 우리는 몸에 난 털을 깎기 위해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머리털뿐만 아니라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모조리 다 깎아야 했다. 그런 다음 샤워를 하기 위해 다시 줄을 섰다. 서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 중에는 샤워실의 분무기에서 진짜로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샤워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우리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졌다. 우리는 이제 벌거벗은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심지어 털 한 오라기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그 동안의 삶과 현재를 연결 시켜 주는 물건 중 과연 내개 남은 것이 무엇이라 말인가?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안경과 벨트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벨트는 나중에 빵 한 조각과 바꾸어 먹고 말았다. 탈장대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작은 동요가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가 있는 임시 막사의 고참이 우리를 찾아와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탈장대 속에 돈이나 귀금속을 숨겨 놓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목을 자기가 직접 대들보에 매달겠다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대들보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자기가 수용소의 규칙에 따라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위임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신발 문제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물론 자기 신발을 가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신기에 편하고 좋은 신발은 으레 빼앗겼으며, 그 대신 발에도 맞지 않는 신발을 신어야 했다.

 

[영문판_16p, In for real trouble were those prisoners who had followed the apparently well-meant advice(given in the anteroom) of the senior prisoners and had shortened the their jackboots by cutting the tops off, then smearing soap on the cut edges to hide the sabotage. The SS men seemed to have waited for just that. All suspected of this crime had to go into a small adjoining room. After a time we again heard the lashings of the strap, and the screams of tortured men. This time it lasted for quite a while. Thus the illusions some of us still held were destroyed one by one, and then, quite unexpectedly, most of us we had nothing to lose except our so ridiculously naked lives. When the showers started to run, we all tried very hard to make fun, both about ourselves and about each other. After all, real water did flow from the sprays! Apart from that strange kind of humor, another sensation seized us: curiosity. I have experienced this kind of curiosity before, as a fundamental reaction toward certain strange circumstances. When my life was once endangered by a climbing accident, I felt only one sensation at the critical moment: curiosity, curiosity as to whether I should come out of it alive or with a fractured skull or some other injuries. Cold curiosity predominated even in Auschwize, somehow detaching tghe mind from its surroundings, which came to be regarded with a kind of objectivity. At that time one cultivated this state of mind as a means of protection. We were anxious to know wat would happen next; and what would be te consequence, for example, of our standing in the open air, in the chill of late autumn, stark naked, and still wet from showers. [번역판_44p, 하지만 진짜로 곤욕을 치른 사람은 따로 있었다. 대기실에서 고참들의 호의적인 충고를 그대로 따른 것이 그만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참이 시킨 대로 부츠의 윗부분을 카로 잘라내고 칼자국을 없애기 위해 잘린 곳을 비누로 문질렀다. 그러자 나치대원들이 마치 그렇게 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 사람들을 옆에 있는 조그만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 후 그 방에서도 채찍 휘두르는 소리와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 우리가 그때까지 갖고 있던 환상이 하나 둘씩 차례로 무너져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섬뜩한 농담기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자신의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재미있게 해 주려고 그야말로 안간힘을 썼다. 어쨌든 샤워기에서 정말로 물이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지 않는가! 이런 종류의 이상한 유머 외에 우리를 사로잡는 또 다른 감각이 있었던가. 그것은 바로 궁금증이었다. 그 전에도 나는 어떤 낯선 상황에서 제일 먼저 궁금증이 고개를 드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언제가 등반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 제일 먼저 고개를 든 것이 바로 궁금증이었던 것이다. 이 위기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면 두개골이 박살이 날까? 부상을 당한다면 어떤 부상일까?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냉담한 궁금증이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것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데,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마음가짐을 가꾸었다. 우리는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결말은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을 무척이나 궁금해 했다. 한 번은 쌀쌀한 늦가을에 샤워를 하고 아직 물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밖에 서 있었는데, 우리는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몹시 궁금해 했다.

 

[영문판_17p, In the next few days our curiosity evolved into surprise; surprise that we did not catch cold. There ware many similar surprises in store for new arrivals. The medical men among us learned first of all: "Text-books tell lies!" Somewhere it is said that man cannot exist without sleep for more than a stated number of hours. Quite wrong! I had been convinced that there were certain things I just could not do: I could not sleep without this or I could not live with that or the other. The first night in Auschwitz we slept in beds which were constructed in ties. On each tier(measuring about six-and-a-half to eight feet) slept nine men, directly on the boards. Two blankets were shared by each nine men. We could, of course, lie on our sides, crowded and huddled against each other, which had some advantages because of the bitter cold. Though it was forbidden to take shoes up to the bunks, some people did use them secretly as pillows in spite of the fact the they were caked with mud. Otherwise one's head had to rest on the crook of an almost dislocated arm. And yet sleep came and brought oblivion and relief from pain for a few hours. I would like to mention a few similar surprises on how much we would endure; we unable to clean our teeth, and yet, in spite of that and a severe vitamin deficiency, we had healthier gums than ever before. We had to wear the same shirts for half a ear, until they had lost all appearance of being shirts. For days we were unable to wash, even partially, because of frozen water-pipes, and yet the sores and abrasions on hands which were dirty from work in the soil did not suppurate(that is, unless there was frostbite) Or for instance, a light sleeper, who used to be disturbed by the slightest noise in the next room, now found himself lying pressed against a comrade who snored loudly a few inches from his ear and yet slept quite soundly through the noise. [번역판_45p, 그러데 그로부터 며칠 후, 그 궁금증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우리 모두 감기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것 말고도 이와 비슷하게 놀라운 일을 많이 경험했다. 나 같은 의학도가 수용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었다.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한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정말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것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이것 혹은 저것이 없으면 살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도착한 첫 날밤에 우리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침상에서 잠을 잤다. 각 층(길이 6.5피트에 폭이 8피트인 곳이다)에 무려 9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닥 위에서 함께 잤다. 9명에 배당된 담요는 단 2장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옆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고,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비비면서 잠을 자야 했다. 날이 혹독하게 추웠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는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신발을 잠자리에 갖고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흙이 떡고물처럼 묻은 신발을 몰래 갖고 들어와 그것을 베개 삼아 잠을 자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팔을 베개 삼아 잠을 자야 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잠이 밀려 왔다. 그리고 그 잠은 몇 시간 동안이지만 우리에게 고통을 잊고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뎠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놀라운 사례를 몇 가지 더 들어 보자. 수용소에서 우리는 이를 닦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 심각한 비타민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잇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했다. 셔츠 한 벌을 가지고 반 년 동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입었다. 수도관이 얼어붙어 세수는 고사하고 손 하나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흙일을 하다가 어쩌다 찰과상을 입어도-동상에 걸린 경우만 제외하면-상처가 곪는 법이 없었다. 밖에서 생활할 때 잠을 제대로 못 잤던 사람이 있었다. 옆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잠이 깰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용소에서는 그런 사람이 동료의 몸 위에 엎어져서 귀에서 불과 몇 인치 떨어진 곳에서 나는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주 깊이 잠을 잤다.

 

[영문판_18p, If someone now asked of us the truth of Dostoevski's statement that flatly defines man as a being who can get used to anything, we would reply, "Yes, a man can get used to anything, but do not ask how." But our psychological investigations have not taken us that far yet; neither had we prisoners reached that point. We were still in the first phase of our psychological reactions. The thought of suicide was entertained by nearly everyone, if only for a brief time. It was born of the hopelessness of the situation, the constant danger of death looming over us daily and hourly, and closeness of the deaths suffered by many of the others. From personal convictions which will be mentioned later, I made myself a firm promise, on my first evening in camp, that I would not "run into the wire." This was a phrase used in camp to describe the most popular method of suicide-touching the electrically charged bared-wire fence. It was not entirely difficult for me to make this decision. There was little point in committing suicide, since, for the average inmate, life expectation calculating objectively and counting all likely chances, was very poor. He could not with any assurance expect to be among the small percentage of men who survived al the selections. Th prisoner of Auschwitz, in the first phase of shock, did not fear death. Even the gas chambers lost their horrors for him after the first few days-after all, the spared him the act of committing suicide. Friends whom I have met later have told me that I was not one of those whom the shock of admission greatly depressed. [번역판_47p,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의학적 관찰은 아직 이런 것을 말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전되지 못했다. 우리 중에서 이런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심리적 반응의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잠깐 동안이라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에게도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면서 겪는 고통이 자살을 생각하게 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나는 개인적인 신념을 가지고 수용소에 도착한 날 밤에 앞으로 절대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철조망에 몸을 던진다’는 말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댄다는 뜻으로 당시 수용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자살방법을 이야기하는 관용어구로 쓰였다. 우리에게 이런 결심을 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계산을 하고, 모든 기회를 감안해 보아도 보통 수감자들이 살아나갈 가능성이 아주 희박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자기가 수많은 선별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살아남는 극소수의 사람 중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언젠가 친구들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수용소에 들어갔다는 충격으로 크게 낙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문판_19p, I only smiled, and quite sincerely, when the following episode occurred the morning after our first night in Auschwitz. In spite of strict orders not to leave our "blocks", a colleague of mine, who had arrived in Auschwitz several weeks previously, smuggled himself into our hut. He wanted to calm and comfort us and tell us a few things. He had become so thin that at first we did not recognize him. With a show of good humor and a devil-may-care attitude he gave us a few hurried tips: Don't be afraid! Don't fear the selections! Dr. M-(the SS medical chief) has a soft spot for doctors." (This was wrong; my friends's kindlh words were misleading. One prisoner, the doctor of a block of huts and a man of some sixty years, told me how he had entreated Dr. M-to let off his son, who was destined for gas. Dr. M-coldly refused.) "But one thing I beg of you"; he continued, "shave daily, if at all possible, even if you have to use a piece of glass to do it..even if you have to give your last piece of bread for it. You will look younger and the scraping will make your cheeks look ruddier. If you want to stay alive, there is only one way: look fit for work, if you even limp, because, let us say, you have a small blister on your heel, and an SS man spots this, he will wave you aside and the next day you are sure to be gassed. Do you know what we mean by a 'Moslem'? A man who looks miserable, down and out, sick and emaciated, and who can not manage hard physical labor any longer. . . that is a 'Moslem.' Sooner or later, usually sooner, every 'Moslem' goes to the gas chambers. Therefore, remember: shave, stand and walk smartly; then you need not be afraid of gas. All of you standing, even if you have only been here twenty-four hours, you need not fear gas, except perhaps you." [번역판_49p,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이런 일이 있었을 때도 나는 그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자기 구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몇 주 먼저 이곳에 들어온 동료 한 사람이 몰래 내 막사로 숨어들어 왔다. 그는 우리를 진정시키고 안심시키려고 몇 가지 말을 해주었다. 몸이 너무 말라 있어서 우리는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익살스러우면서도 저돌적인 말투로 우리에게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었다. 내지 말게 선별을 두려워하지도 말게! 의사 M(친위대의 주치의)은 의사에게는 약하다네.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었다. 그 친구의 조언이 틀렸다는 말이다. 나는 나와 같은 막사에 있던 예순 살 먹은 의사로부터 자기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아들이 가스실에 갈 처지가 되었을 때 M에게 아들을 빼달라고 부탁했더니 냉정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자네들에게 당부하겠네. 그는 말을 이었다.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예를 들어 만약 자네들 발뒤꿈치에 물집이 생겼다고 해 보자. 나치대원이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면 당장 그 사람을 따로 분류하고, 그 다음날 틀림없이 가스실로 보낼 거야. 자네들은 ‘회교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불쌍하고, 비실 비실거리고, 병들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고된 육체노동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회교도’라고 한다네. 조만간에 아니 대개는 아주 빠른 시간 안에 회교도들은 가스실로 보내지지. 그러니까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러면 더 이상 가스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여기 있는 자네들 이곳에 온지 스물네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나를 가리키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마 자네만은 예외일 거야.>

 

[영문판_20p, And then he pointed to me and said, "I hope you don't mind my telling you frankly." To the others he repeated, "Of all of you he is the only one who must fear the next selection. So don't worry!" And I smiled. I am now convinced that anyone in my place on that day would have done the same. I think it was Lessing who once said, "There are things which must cause you to lose your reason or you have none to lost." An abnormal reaction to an abnormal situation is normal behavior. Even we psychiatrists expect the reactions of a man to an abnormal situation, such as being committed to an asylum, to be abnormal in proportion to the degree of his normality. The reaction of a man to his admission to an concentration camp also represents an abnormal state of mind, but judged objectively it is a normal and, as will be shown later, typical reaction to the given circumstances. These reactions, as I have described them, began to change in a few days. The prisoner passed from the first to the second phase; the phase of relative apathy, in which he achieved a kind of emotional death. Apart from the already described reactions, the newly arrived prisoner experienced the tortures of other most painful emotions, all of which he tried to deaden. First of all, there was his boundless longing for his home and his family. This often could become so acute that he felt himself consumed by longing. Then there was disgust; disgust with all the ugliness which surrounded by him, even in its mere external forms. Most of the prisoners were given a uniform of rags which would have made a scarecrow elegant by comparison. Between the huts in the camp lay pure filth, and the more one worked to clear it away, the more one had to come in contact with it. [번역판_51p,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나를 가리키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솔직하게 얘기하는 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런 다음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말했다. <자네들 가운데 다음 번 선별을 두려워할 사람은 바로 저 사람뿐이야 그러니 모두 안심들 하게.> 그 말에 모두 웃었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누구라도 당시 나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나와 똑같이 웃었을 것이다. 레싱이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인 것이다. 심지어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도 비정상적인 상황, 예를 들자면 정신병원에 수용된 상태라거나 평소보다 비교적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는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오게 된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역시 그들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뒤에 얘기하겠지만 어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응들을 며칠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의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 정도 된다.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수용자들에게는 줄무늬 수의가 입혀졌다. 허수아비에게나 입혀야 어울릴 것 같은 넝마 같은 옷이다. 수용소의 막사와 막사 사이에는 오물로 뒤덮여 있었는데, 오물을 치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오물을 묻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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