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2022년 4월 6일(수)_25~30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3.28|조회수49 목록 댓글 0

[영문판_25p, A few minutes previously the same guard who struck me had told us deprecatingly that we "pigs" lacked the spirit of comradeship. Another time, in a forest, with the temperature (화씨 2도, 섭씨 -17호, F=9/5*C+32, we began to dig up the topsoil, which was frozen hard, in order to lay water pipes. By then I had grown rather weak physically. Along came a foreman with chubby rosy cheeks. His face definitely reminded me of a pig's head. I noticed that he wore lovely warm gloves in that bitter cold. For a time he watched me silently. I felt that trouble was brewing, for in front of me lay the mound of earth which showed exactly how much I had dug. Then he began: "You pig, I have been watching you the whole time! I'll teach you to work, yet! Wait till you dig dirt with your teeth-you'll die like an animal! In two days I'll finish you off! You've never done a stroke of work in your life. What were you swine? A businessman?" I was past caring. But I had to take his threat of killing me seriously, so I straightened up and looked him directly in the eye. "I was a doctor-a specialist." "What? A doctor? I bet you got a lot of money out of people." As it happens, I did most of my work for no money at all, in clinics for the poor." But, now I had said too much. He threw himself on me and knocked me down, shouting like a madman. I can no longer remember what he shouted. I want to show with this apparently trivial story that there are moments when indignation can rouse even a seemingly hardened prisoner-indignation not about cruelty or pain, but about the insult connected with it. That time blood rushed to my head because I had to listen to a man judge my life who had so little idea of it, a man(I must confess: the following remark, which I made to my fellow-prisoners after scene, afforded me childish relief)"who looked so vulgar and brutal that the nurse in the out-patient ward in my hospital would not even have admitted him to the waiting room." [번역판_59p, 나를 때린 그 감시병은 불과 몇 분 전에 우리를 향해 멸시하는 투로 너희 같은 ‘돼지들’에게는 동지애가 없다고 욕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한 번은 화시 2도나 되는 날씨에 숲으로 가서 얼어붙은 땅을 파야 했던 적도 있었다. 땅 밑에 수도관을 박기 위해서였다. 그 때 나는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마침 저쪽에서 통통하고 혈색이 좋은 감독관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정말로 돼지머리를 연상시켰다. 나는 그가 이 혹독한 날씨에 아주 따뜻한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곧 벼락이 떨어질 조짐을 느꼈다. 내 앞에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땅을 팠는지를 입증해 주는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돼지 같은 새끼. 처음부터 너를 지켜보고 있었어. 일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주지. 네 이빨로 쓰레기더미를 팔 때까지 한번 기다려 봐! 그러면 너는 짐승처럼 죽을 거야. 아니 이틀 안에 아주 요절을 내주지.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놈이야 전에는 뭐 했지? 이 돼지새끼야. 장사했나?”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조금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나를 죽이겠다는 위협에는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몸을 똑바로 세우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의사, 전문의였습니다” “의사였다고? 사람들로부터 돈푼깨나 긁어 모았겠군.”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돈을 벌기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위한 진료소에서 일했습니다. 그 말을 하고 아차 싶었지만 이미 너무 많이 말을 해버린 뒤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면 나에게 달려들더니 나를 쓰러뜨렸다. 그 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피가 머리로 솟구쳤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내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백할 것이 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동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나서 내 분노가 어린아이처럼 누그러졌다는 사실이다. “저렇게 짐승 같고 야비하게 생긴 작자가 우리 병원에 오면 아마 간호사들이 대기실에도 들여보내지 않고 쫓아낼 것.”

 

[영문판_26p, Fortunately the Capo in my working party was obligated to me; he had taken a liking to me because I listened to his love stories and matrimonial troubles, which he poured out during the long marches to our work site. I had made an impression on him with my diagnosis of his character and with my psychotherapeutic advice. After that he was grateful, and this had already been of value to me. On several previous occasions he had reserved a place for me next to him on one of the first five rows of our detachment, which usually consisted of two hundred and eighty men. That favor was important. We had to line up;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s was still dark. Everybody was afraid of being late and of having to stand in the back rows. If men were required for an unpleasant and disliked job, the senior Capo appeared and usually collected the men he needed from the back rows. These men had to march away to another, especially dreaded kind of work under the command of strange guards. Occasionally the senior Capo chose men from the first five rows, just to catch those who tried to be clever. All protests and entreaties were silenced by a few will-aimed kicks, and the chosen victims were chased to the meeting place with shouts and blows. However, as long as my Carpo felt the need of pouring out his heart, this could not happen to me. I had a guaranteed place of honor next to him. But there was another advantage, too. Life nearly all the camp inmates I was suffering from edema. My legs wee so swollen and the skin on them so tightly stretched that I could scarcely bend my knees. [번역판_62p, 힘들고 궂은일을 하게 될 상황이 생기면 고참 카포가 와서 대개는 뒷줄에서 사람들을 데려갔기 때문이다. 나에게 다행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우리 작업반의 카포가 내 신제를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막사에서 작업장까지 먼 길을 행군해 가는 동안 나는 그의 연애 이야기와 결혼생활의 불화에 얽힌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성격을 진단하고, 그에게 정신요법에 관한 조언을 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나에게 고마워했으며, 그 때문에 나는 그로부터 작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280명 정도가 되는 우리 작업반이 줄을 설 때, 그는 앞에서 다섯 번 줄 안에 있는 자기 자리 옆에 나를 세워 두었다. 사실 그런 호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일을 나가려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줄을 서야 했다. 우리는 늦게 가서 뒷줄에 서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렇게 뽑힌 사람들은 동료들과 떨어져 다른 작업장으로 가야 했으며, 낯선 감시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물론 어떤 때는 단지 약삭빠르게 행동했던 사람을 뽑기 위해 앞에서 다섯째 줄 안에 있는 사람을 뽑아가기도 했다. 이에 대한 항의와 탄원은 잘 조준된 몇 번의 발길질로 잠잠해졌다. 재수없게 걸린 사람들은 고함 소리를 듣고 주먹질을 당하며 정해진 장소로 끌려갔다. 하지만 내 도움을 받고 있는 그 카포가 가슴에 나에게 쏟아내고 싶은 말을 품고 있는 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의 옆자리가 나에게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또 다른 혜택도 있었다. 수용소에 있는 대부분의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부종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다리가 심하게 부었으며, 그 부분의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져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할 정도였다.

 

[영문판_27p, I had to leave my shoes unlaced in order to make them fit my swollen feet. There would not have been for socks even if I had had any. So my partly bare feet were always wet and my shoes always full of snow. This, of course, caused frostbite and chilblains. Every single step became real torture. Clumps of ice form ed on our shoes during our marches over snow-covered fields. Over and again men slipped and those following behind stumbled on top of them. Then the column would stop for a moment, but not for long. One of the guards soon took action and worked over the men with the butt of his rifle to make them get up quickly. The more to the front of the column you were, the less often you were disturbed by having to stop and then to make up for lost time by running on your painful feet. I was very happy to be the personally appointed physician to His Honor the Capo, and to march n the first row at an even pace. As an additional payment for my services, I could be sure that as long as soup was being dealt out at lunchtime at our work site, he would, when my turn came, dip the ladle right to the bottom of the vat and fish out a few peas. This Capo, a former army officer, even had the courage to whisper to the foreman, whom I had quarreled with, that he knew me to be an usually good worker. That didn't help matters, but he nevertheless managed to save my life(one of many times it was to be saved). The day after the episode with the foreman he smuggled me into another work party. There were foreman who felt sorry for us and who did their best to ease our situation, at least at the building side. But even they kept on reminding us that an ordinary laborer did several times as much work as we did, and in a shorter time. [번역판_62p, 신발 끈을 풀어 놓아야만 부어 오른 발이 들어갈 수 있었다. 양말이 없기도 했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양말을 신은 발이 들어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맨살이 드러내 내 발은 늘 젖어 있었고, 신발 안은 늘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동상에 걸려 얼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을 찢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 덮인 길을 행진하는 동안 신발 위로 얼음이 얼어버렸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미끄러졌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그 위로 엎어졌다. 그러면 행진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곤 했다. 하지만 그 상태가 그렇게 오래 지체되지는 않았다. 감사병 중 한 명이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넘어진 사람들이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앞줄에 설수록 도중에 행진을 멈추어야 하는 일이 적게 일어났다. 따라서 지체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아픈 발로 뛰어야 할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친애하는 카포 각하의 주치의로 임명된 나는 앞줄에 서서 일정한 속도로 행진을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도와주고 받는 혜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 작업반에서 수프를 나누어줄 때면 그는 국자를 수프통 밑바닥까지 집어넣어 콩알 몇 개를 내 수프에 넣어 주곤 했다. 전직 육군 장교였다는 이 카포는 심지어는 나와 싸웠던 감독에게 가서 내가 일을 아주 잘 한다고 속삭이는 용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것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그는 어찌어찌 해서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가운데 적어도 한 번은 그의 도움을 받았다. 감독과 싸웠던 바로 그 다음날 그는 나를 몰래 다른 작업반으로 옮겨 주었다. 감독들 중에서도 우리를 측은하게 여기고, 우리의 상황을 개선해 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어도 건축 공사장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도 일반 노동자들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일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영문판_28p, But they did see reason if they were told that a normal workman did not live on

(10+1/2)ounces of bread(theoretically- actually we often had less) and

(1+3/4) pints of thin soup per day; that a normal laborer did not live under the mental stress we had to submit to, not having news of our families, who had either been sent to another camp or gassed right away; that a normal workman was not threatened by death continuously, daily and hourly. I even allowed myself to say once to a kindly foreman, "If you could learn from me how to do a brain operation in as short a times as I am learning this road work from you, I would have great respect for you. And he grinned. Apathy, the main symptom of the second phase was a necessary mechanism of self-defense. Reality dimmed, and all efforts and all emotions were centered on one task: preserving one's own life and that of the other fellow. It was typical to hear the prisoners, while they were being herded back to camp from their work sites in the evening, sigh with relief and say, "Well, another day is over. It can be readily understood that such a state of strain, coupled with the constant necessity of concentrating on the task of staying alive, forced the prisoner's inner life down to a primitive level. Several of my colleagues in camp who were trained in psychoanalysis often spoke of a regression in the camp inmate-retreat to a more primitive form of mental life. His wishes and desires became obvious in his dreams. What did the prisoner dream about most frequently? Of bread, cake, cigarettes, and nice warm baths. The lack of these simple desires satisfied led him to seek wish fulfillment in dreams. [번역판_64p,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일반 노동자들이 하루 에 빵(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것도 안 되는) 10온스 반과 묽은 수프 1과 4분의 3만 먹고는 살 수 없다는 것, 일반 노동자들은 우리가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지 않는다는 것,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거나 혹은 방금 가스실로 보내진 가족에 관한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일반 노동자는 매일매일 시시각각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하면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만약 내가 당신으로부터 도로공사 일을 배운 시간만큼 짧은 시간 안에 당신이 나에게 뇌수술을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존경하겠소.> 그 말을 듣고 그는 씩 웃었다.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그와 같은 긴장 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되어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밖에서 정신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는 데,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문판_29p, Whether these dreams did any good is another matter; the dreamer had to wake from them to the reality of camp life, and to the terrible contrast between that and his dream illusions.

I shall never forget how I was aroused one night by the groans of a fellow prisoner, who threw himself about in his sleep, obviously having a horrible nightmare. Since I had always been especially sorry for people who suffered from fearful dreams or deliria, I wanted to wake the poor man. Suddenly I drew back the hand which was ready to shake him frightened at the thing I was about to do. At that moment I became intensely conscious of the fact that no dream, no matter how terrible, could be as bad as the reality of the camp which surrounded us, and to which I was about to recall him.

Because of the high degree of undernourishment which the prisoners suffered, it was natural that the desire for food was the major primitive instinct around which mental life centered. Let us observe the majority of prisoners when they happened to work near each other and were, for once, not closely watched. They would immediately start discussing food. One fellow would ask another working next to him in the ditch what his favorite dished were. Then they would exchange recipes and plan the menu for the day when they would have a reunion-the day in a distant future when they would be liberated and returned home. They would go on and on, picturing it all in detail, until suddenly a warning was passed down the trench, usually in the form of a special password or number: "The guard is coming." I always regarded the discussions about food as dangerous. [번역판_65p, 그런 꿈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깬 다음 수용소 생활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꿈속의 환상과 현실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놀라면서 그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심한 영양실조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이 온통 먹고 싶다는 본능에 집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대다수 수감자들이 어쩌다 서로 가까이서 일을 하게 되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가? 당장 먹는 얘기를 꺼낸다. 배수구에서 일하는 친구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서로 조리법을 교환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여기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날,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을 위해 식단을 짠다. 그러면서 먹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또 한다. 아주 자세하게 그 모양을 그려가면서, 이런 대화는 “감시병이 온다.” (이 말을 전하는 데에는 대개 특정한 단어나 숫자로 이루어진 암호가 사용되었다.)는 경고가 마지막 사람에게 전달될 때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영문판_30p, Is it not wrong to provoke the organism with such detailed and affective pictures of delicacies when it has somehow managed to adapt itself to extremely small rations and low calories? Though it may afford momentary psychological relief, it is an illusion which psychologically, surely, must not be without danger.

During the latter part of our imprisonment, the daily ration consisted of very watery soup given out once daily, and the usual small bread ration. In addition to that, there was the so-called "extra allowance" consisting of three-fourths of an ounce of margarine, or of a slice of poor quality sausage, or of a little piece of cheese, or a bit of systhetic honey, or a spoonful of watery jam, varying daily. In calories this diet was absolutely inadequate, especially taking into consideration our heavy manual work and our constant exposure to the cold in inadequate clothing. The sick who were "under special care"-that is, those who were allowed to lie in the huts instead of leaving the camp for work-were even worse off.

When the last layers of subcutaneous fat had vanished, and we looked like skeletons disguised with skin and rags, we could watch our bodies beginning to devour themselves. The organism digested its own protein, and the muscles disappeared. The the body had no powers of resistance left. One after another the members of the little community in our hut died. Each of us could calculate with fair accuracy whose turn would be next, and when his own would come. After many observations we knew the symptoms well, which made the correctness of our prognoses quite certain. He won't last long, or This is the next one, we whispered to each other, and when, during our daily search for lice, we saw our own, naked bodies in the evening, we thought alike: This body here, my body, is really a corpse already. [번역판_67p, 이제 간신히 우리 몸이 적은 양의 음식과 낮은 칼로리에 적응하게 되었는데, 맛있는 음식에 대해 그렇게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내장기관에 자극을 주면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이다. 먹는 이야기가 당장은 마음의 위안을 줄지 몰라도 생리적으로는 위험을 수반한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하루에 한 번 아주 묽은 수프와 전처럼 적은 양의 빵을 배급받았다. 그러다가 가끔 특별배급이라는 것을 받을 때도 있었다. 마가린 0.75온 보잘것없는 크기의 소시지, 적은 치즈 조각, 가공 벌꿀 조금, 묽은 잼 한 숟가락 등 그때마다 달랐다. 이런 식단은 열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면서 맨손으로 중노동을 하는 우리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특별간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임시 막사에 남아 있는 환자에게 주는 음식은 더 형편없었다. 마지막 남은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로 가죽과 넝마로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키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우리는 모두 다음에는 누가 죽을 것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 죽을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징후가 보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 오래 못 갈 것 같아’, ‘다음 차례는 저 사람이군.’ 우리는 이렇게 수군거렸다. 매일 저녁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이 몸뚱이. 이제 정말로 송장이 되었구나.

 

[영문판_26p, Fortunately the Capo in my working party was obligated to me; he had taken a liking to me because I listened to his love stories and matrimonial troubles, which he poured out during the long marches to our work site. I had made an impression on him with my diagnosis of his character and with my psychotherapeutic advice. After that he was grateful, and this had already been of value to me. On several previous occasions he had reserved a place for me next to him on one of the first five rows of our detachment, which usually consisted of two hundred and eighty men. That favor was important. We had to line up;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s was still dark. Everybody was afraid of being late and of having to stand in the back rows. If men were required for an unpleasant and disliked job, the senior Capo appeared and usually collected the men he needed from the back rows. These men had to march away to another, especially dreaded kind of work under the command of strange guards. Occasionally the senior Capo chose men from the first five rows, just to catch those who tried to be clever. All protests and entreaties were silenced by a few will-aimed kicks, and the chosen victims were chased to the meeting place with shouts and blows. However, as long as my Carpo felt the need of pouring out his heart, this could not happen to me. I had a guaranteed place of honor next to him. But there was another advantage, too. Life nearly all the camp inmates I was suffering from edema. My legs wee so swollen and the skin on them so tightly stretched that I could scarcely bend my knees. [번역판_62p, 힘들고 궂은일을 하게 될 상황이 생기면 고참 카포가 와서 대개는 뒷줄에서 사람들을 데려갔기 때문이다. 나에게 다행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우리 작업반의 카포가 내 신제를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막사에서 작업장까지 먼 길을 행군해 가는 동안 나는 그의 연애 이야기와 결혼생활의 불화에 얽힌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성격을 진단하고, 그에게 정신요법에 관한 조언을 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나에게 고마워했으며, 그 때문에 나는 그로부터 작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280명 정도가 되는 우리 작업반이 줄을 설 때, 그는 앞에서 다섯 번 줄 안에 있는 자기 자리 옆에 나를 세워 두었다. 사실 그런 호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일을 나가려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줄을 서야 했다. 우리는 늦게 가서 뒷줄에 서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렇게 뽑힌 사람들은 동료들과 떨어져 다른 작업장으로 가야 했으며, 낯선 감시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물론 어떤 때는 단지 약삭빠르게 행동했던 사람을 뽑기 위해 앞에서 다섯째 줄 안에 있는 사람을 뽑아가기도 했다. 이에 대한 항의와 탄원은 잘 조준된 몇 번의 발길질로 잠잠해졌다. 재수없게 걸린 사람들은 고함 소리를 듣고 주먹질을 당하며 정해진 장소로 끌려갔다. 하지만 내 도움을 받고 있는 그 카포가 가슴에 나에게 쏟아내고 싶은 말을 품고 있는 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의 옆자리가 나에게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또 다른 혜택도 있었다. 수용소에 있는 대부분의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부종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다리가 심하게 부었으며, 그 부분의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져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할 정도였다.

 

[영문판_27p, I had to leave my shoes unlaced in order to make them fit my swollen feet. There would not have been for socks even if I had had any. So my partly bare feet were always wet and my shoes always full of snow. This, of course, caused frostbite and chilblains. Every single step became real torture. Clumps of ice form ed on our shoes during our marches over snow-covered fields. Over and again men slipped and those following behind stumbled on top of them. Then the column would stop for a moment, but not for long. One of the guards soon took action and worked over the men with the butt of his rifle to make them get up quickly. The more to the front of the column you were, the less often you were disturbed by having to stop and then to make up for lost time by running on your painful feet. I was very happy to be the personally appointed physician to His Honor the Capo, and to march n the first row at an even pace. As an additional payment for my services, I could be sure that as long as soup was being dealt out at lunchtime at our work site, he would, when my turn came, dip the ladle right to the bottom of the vat and fish out a few peas. This Capo, a former army officer, even had the courage to whisper to the foreman, whom I had quarreled with, that he knew me to be an usually good worker. That didn't help matters, but he nevertheless managed to save my life(one of many times it was to be saved). The day after the episode with the foreman he smuggled me into another work party. There were foreman who felt sorry for us and who did their best to ease our situation, at least at the building side. But even they kept on reminding us that an ordinary laborer did several times as much work as we did, and in a shorter time. [번역판_62p, 신발 끈을 풀어 놓아야만 부어 오른 발이 들어갈 수 있었다. 양말이 없기도 했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양말을 신은 발이 들어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맨살이 드러내 내 발은 늘 젖어 있었고, 신발 안은 늘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동상에 걸려 얼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을 찢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 덮인 길을 행진하는 동안 신발 위로 얼음이 얼어버렸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미끄러졌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그 위로 엎어졌다. 그러면 행진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곤 했다. 하지만 그 상태가 그렇게 오래 지체되지는 않았다. 감사병 중 한 명이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넘어진 사람들이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앞줄에 설수록 도중에 행진을 멈추어야 하는 일이 적게 일어났다. 따라서 지체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아픈 발로 뛰어야 할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친애하는 카포 각하의 주치의로 임명된 나는 앞줄에 서서 일정한 속도로 행진을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도와주고 받는 혜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 작업반에서 수프를 나누어줄 때면 그는 국자를 수프통 밑바닥까지 집어넣어 콩알 몇 개를 내 수프에 넣어 주곤 했다. 전직 육군 장교였다는 이 카포는 심지어는 나와 싸웠던 감독에게 가서 내가 일을 아주 잘 한다고 속삭이는 용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것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그는 어찌어찌 해서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가운데 적어도 한 번은 그의 도움을 받았다. 감독과 싸웠던 바로 그 다음날 그는 나를 몰래 다른 작업반으로 옮겨 주었다. 감독들 중에서도 우리를 측은하게 여기고, 우리의 상황을 개선해 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어도 건축 공사장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도 일반 노동자들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일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영문판_28p, But they did see reason if they were told that a normal workman did not live on

(10+1/2)ounces of bread(theoretically- actually we often had less) and

(1+3/4) pints of thin soup per day; that a normal laborer did not live under the mental stress we had to submit to, not having news of our families, who had either been sent to another camp or gassed right away; that a normal workman was not threatened by death continuously, daily and hourly. I even allowed myself to say once to a kindly foreman, "If you could learn from me how to do a brain operation in as short a times as I am learning this road work from you, I would have great respect for you. And he grinned. Apathy, the main symptom of the second phase was a necessary mechanism of self-defense. Reality dimmed, and all efforts and all emotions were centered on one task: preserving one's own life and that of the other fellow. It was typical to hear the prisoners, while they were being herded back to camp from their work sites in the evening, sigh with relief and say, "Well, another day is over. It can be readily understood that such a state of strain, coupled with the constant necessity of concentrating on the task of staying alive, forced the prisoner's inner life down to a primitive level. Several of my colleagues in camp who were trained in psychoanalysis often spoke of a regression in the camp inmate-retreat to a more primitive form of mental life. His wishes and desires became obvious in his dreams. What did the prisoner dream about most frequently? Of bread, cake, cigarettes, and nice warm baths. The lack of these simple desires satisfied led him to seek wish fulfillment in dreams. [번역판_64p,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일반 노동자들이 하루 에 빵(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것도 안 되는) 10온스 반과 묽은 수프 1과 4분의 3만 먹고는 살 수 없다는 것, 일반 노동자들은 우리가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지 않는다는 것,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거나 혹은 방금 가스실로 보내진 가족에 관한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일반 노동자는 매일매일 시시각각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하면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만약 내가 당신으로부터 도로공사 일을 배운 시간만큼 짧은 시간 안에 당신이 나에게 뇌수술을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존경하겠소.> 그 말을 듣고 그는 씩 웃었다.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그와 같은 긴장 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되어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밖에서 정신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는 데,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문판_29p, Whether these dreams did any good is another matter; the dreamer had to wake from them to the reality of camp life, and to the terrible contrast between that and his dream illusions.

I shall never forget how I was aroused one night by the groans of a fellow prisoner, who threw himself about in his sleep, obviously having a horrible nightmare. Since I had always been especially sorry for people who suffered from fearful dreams or deliria, I wanted to wake the poor man. Suddenly I drew back the hand which was ready to shake him frightened at the thing I was about to do. At that moment I became intensely conscious of the fact that no dream, no matter how terrible, could be as bad as the reality of the camp which surrounded us, and to which I was about to recall him.

Because of the high degree of undernourishment which the prisoners suffered, it was natural that the desire for food was the major primitive instinct around which mental life centered. Let us observe the majority of prisoners when they happened to work near each other and were, for once, not closely watched. They would immediately start discussing food. One fellow would ask another working next to him in the ditch what his favorite dished were. Then they would exchange recipes and plan the menu for the day when they would have a reunion-the day in a distant future when they would be liberated and returned home. They would go on and on, picturing it all in detail, until suddenly a warning was passed down the trench, usually in the form of a special password or number: "The guard is coming." I always regarded the discussions about food as dangerous. [번역판_65p, 그런 꿈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깬 다음 수용소 생활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꿈속의 환상과 현실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놀라면서 그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심한 영양실조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이 온통 먹고 싶다는 본능에 집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대다수 수감자들이 어쩌다 서로 가까이서 일을 하게 되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가? 당장 먹는 얘기를 꺼낸다. 배수구에서 일하는 친구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서로 조리법을 교환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여기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날,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을 위해 식단을 짠다. 그러면서 먹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또 한다. 아주 자세하게 그 모양을 그려가면서, 이런 대화는 “감시병이 온다.” (이 말을 전하는 데에는 대개 특정한 단어나 숫자로 이루어진 암호가 사용되었다.)는 경고가 마지막 사람에게 전달될 때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영문판_30p, Is it not wrong to provoke the organism with such detailed and affective pictures of delicacies when it has somehow managed to adapt itself to extremely small rations and low calories? Though it may afford momentary psychological relief, it is an illusion which psychologically, surely, must not be without danger.

During the latter part of our imprisonment, the daily ration consisted of very watery soup given out once daily, and the usual small bread ration. In addition to that, there was the so-called "extra allowance" consisting of three-fourths of an ounce of margarine, or of a slice of poor quality sausage, or of a little piece of cheese, or a bit of systhetic honey, or a spoonful of watery jam, varying daily. In calories this diet was absolutely inadequate, especially taking into consideration our heavy manual work and our constant exposure to the cold in inadequate clothing. The sick who were "under special care"-that is, those who were allowed to lie in the huts instead of leaving the camp for work-were even worse off.

When the last layers of subcutaneous fat had vanished, and we looked like skeletons disguised with skin and rags, we could watch our bodies beginning to devour themselves. The organism digested its own protein, and the muscles disappeared. The the body had no powers of resistance left. One after another the members of the little community in our hut died. Each of us could calculate with fair accuracy whose turn would be next, and when his own would come. After many observations we knew the symptoms well, which made the correctness of our prognoses quite certain. He won't last long, or This is the next one, we whispered to each other, and when, during our daily search for lice, we saw our own, naked bodies in the evening, we thought alike: This body here, my body, is really a corpse already. [번역판_67p, 이제 간신히 우리 몸이 적은 양의 음식과 낮은 칼로리에 적응하게 되었는데, 맛있는 음식에 대해 그렇게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내장기관에 자극을 주면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이다. 먹는 이야기가 당장은 마음의 위안을 줄지 몰라도 생리적으로는 위험을 수반한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하루에 한 번 아주 묽은 수프와 전처럼 적은 양의 빵을 배급받았다. 그러다가 가끔 특별배급이라는 것을 받을 때도 있었다. 마가린 0.75온 보잘것없는 크기의 소시지, 적은 치즈 조각, 가공 벌꿀 조금, 묽은 잼 한 숟가락 등 그때마다 달랐다. 이런 식단은 열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면서 맨손으로 중노동을 하는 우리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특별간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임시 막사에 남아 있는 환자에게 주는 음식은 더 형편없었다. 마지막 남은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로 가죽과 넝마로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키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우리는 모두 다음에는 누가 죽을 것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 죽을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징후가 보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 오래 못 갈 것 같아’, ‘다음 차례는 저 사람이군.’ 우리는 이렇게 수군거렸다. 매일 저녁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이 몸뚱이. 이제 정말로 송장이 되었구나.

[영문판_26p, Fortunately the Capo in my working party was obligated to me; he had taken a liking to me because I listened to his love stories and matrimonial troubles, which he poured out during the long marches to our work site. I had made an impression on him with my diagnosis of his character and with my psychotherapeutic advice. After that he was grateful, and this had already been of value to me. On several previous occasions he had reserved a place for me next to him on one of the first five rows of our detachment, which usually consisted of two hundred and eighty men. That favor was important. We had to line up;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s was still dark. Everybody was afraid of being late and of having to stand in the back rows. If men were required for an unpleasant and disliked job, the senior Capo appeared and usually collected the men he needed from the back rows. These men had to march away to another, especially dreaded kind of work under the command of strange guards. Occasionally the senior Capo chose men from the first five rows, just to catch those who tried to be clever. All protests and entreaties were silenced by a few will-aimed kicks, and the chosen victims were chased to the meeting place with shouts and blows. However, as long as my Carpo felt the need of pouring out his heart, this could not happen to me. I had a guaranteed place of honor next to him. But there was another advantage, too. Life nearly all the camp inmates I was suffering from edema. My legs wee so swollen and the skin on them so tightly stretched that I could scarcely bend my knees. [번역판_62p, 힘들고 궂은일을 하게 될 상황이 생기면 고참 카포가 와서 대개는 뒷줄에서 사람들을 데려갔기 때문이다. 나에게 다행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우리 작업반의 카포가 내 신제를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막사에서 작업장까지 먼 길을 행군해 가는 동안 나는 그의 연애 이야기와 결혼생활의 불화에 얽힌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성격을 진단하고, 그에게 정신요법에 관한 조언을 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나에게 고마워했으며, 그 때문에 나는 그로부터 작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280명 정도가 되는 우리 작업반이 줄을 설 때, 그는 앞에서 다섯 번 줄 안에 있는 자기 자리 옆에 나를 세워 두었다. 사실 그런 호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일을 나가려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줄을 서야 했다. 우리는 늦게 가서 뒷줄에 서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렇게 뽑힌 사람들은 동료들과 떨어져 다른 작업장으로 가야 했으며, 낯선 감시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물론 어떤 때는 단지 약삭빠르게 행동했던 사람을 뽑기 위해 앞에서 다섯째 줄 안에 있는 사람을 뽑아가기도 했다. 이에 대한 항의와 탄원은 잘 조준된 몇 번의 발길질로 잠잠해졌다. 재수없게 걸린 사람들은 고함 소리를 듣고 주먹질을 당하며 정해진 장소로 끌려갔다. 하지만 내 도움을 받고 있는 그 카포가 가슴에 나에게 쏟아내고 싶은 말을 품고 있는 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의 옆자리가 나에게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또 다른 혜택도 있었다. 수용소에 있는 대부분의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부종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다리가 심하게 부었으며, 그 부분의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져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할 정도였다.

 

[영문판_27p, I had to leave my shoes unlaced in order to make them fit my swollen feet. There would not have been for socks even if I had had any. So my partly bare feet were always wet and my shoes always full of snow. This, of course, caused frostbite and chilblains. Every single step became real torture. Clumps of ice form ed on our shoes during our marches over snow-covered fields. Over and again men slipped and those following behind stumbled on top of them. Then the column would stop for a moment, but not for long. One of the guards soon took action and worked over the men with the butt of his rifle to make them get up quickly. The more to the front of the column you were, the less often you were disturbed by having to stop and then to make up for lost time by running on your painful feet. I was very happy to be the personally appointed physician to His Honor the Capo, and to march n the first row at an even pace. As an additional payment for my services, I could be sure that as long as soup was being dealt out at lunchtime at our work site, he would, when my turn came, dip the ladle right to the bottom of the vat and fish out a few peas. This Capo, a former army officer, even had the courage to whisper to the foreman, whom I had quarreled with, that he knew me to be an usually good worker. That didn't help matters, but he nevertheless managed to save my life(one of many times it was to be saved). The day after the episode with the foreman he smuggled me into another work party. There were foreman who felt sorry for us and who did their best to ease our situation, at least at the building side. But even they kept on reminding us that an ordinary laborer did several times as much work as we did, and in a shorter time. [번역판_62p, 신발 끈을 풀어 놓아야만 부어 오른 발이 들어갈 수 있었다. 양말이 없기도 했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양말을 신은 발이 들어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맨살이 드러내 내 발은 늘 젖어 있었고, 신발 안은 늘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동상에 걸려 얼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을 찢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 덮인 길을 행진하는 동안 신발 위로 얼음이 얼어버렸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미끄러졌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그 위로 엎어졌다. 그러면 행진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곤 했다. 하지만 그 상태가 그렇게 오래 지체되지는 않았다. 감사병 중 한 명이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넘어진 사람들이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앞줄에 설수록 도중에 행진을 멈추어야 하는 일이 적게 일어났다. 따라서 지체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아픈 발로 뛰어야 할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친애하는 카포 각하의 주치의로 임명된 나는 앞줄에 서서 일정한 속도로 행진을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도와주고 받는 혜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 작업반에서 수프를 나누어줄 때면 그는 국자를 수프통 밑바닥까지 집어넣어 콩알 몇 개를 내 수프에 넣어 주곤 했다. 전직 육군 장교였다는 이 카포는 심지어는 나와 싸웠던 감독에게 가서 내가 일을 아주 잘 한다고 속삭이는 용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것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그는 어찌어찌 해서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가운데 적어도 한 번은 그의 도움을 받았다. 감독과 싸웠던 바로 그 다음날 그는 나를 몰래 다른 작업반으로 옮겨 주었다. 감독들 중에서도 우리를 측은하게 여기고, 우리의 상황을 개선해 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어도 건축 공사장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도 일반 노동자들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일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영문판_28p, But they did see reason if they were told that a normal workman did not live on

(10+1/2)ounces of bread(theoretically- actually we often had less) and

(1+3/4) pints of thin soup per day; that a normal laborer did not live under the mental stress we had to submit to, not having news of our families, who had either been sent to another camp or gassed right away; that a normal workman was not threatened by death continuously, daily and hourly. I even allowed myself to say once to a kindly foreman, "If you could learn from me how to do a brain operation in as short a times as I am learning this road work from you, I would have great respect for you. And he grinned. Apathy, the main symptom of the second phase was a necessary mechanism of self-defense. Reality dimmed, and all efforts and all emotions were centered on one task: preserving one's own life and that of the other fellow. It was typical to hear the prisoners, while they were being herded back to camp from their work sites in the evening, sigh with relief and say, "Well, another day is over. It can be readily understood that such a state of strain, coupled with the constant necessity of concentrating on the task of staying alive, forced the prisoner's inner life down to a primitive level. Several of my colleagues in camp who were trained in psychoanalysis often spoke of a regression in the camp inmate-retreat to a more primitive form of mental life. His wishes and desires became obvious in his dreams. What did the prisoner dream about most frequently? Of bread, cake, cigarettes, and nice warm baths. The lack of these simple desires satisfied led him to seek wish fulfillment in dreams. [번역판_64p,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일반 노동자들이 하루 에 빵(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것도 안 되는) 10온스 반과 묽은 수프 1과 4분의 3만 먹고는 살 수 없다는 것, 일반 노동자들은 우리가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지 않는다는 것,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거나 혹은 방금 가스실로 보내진 가족에 관한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일반 노동자는 매일매일 시시각각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하면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만약 내가 당신으로부터 도로공사 일을 배운 시간만큼 짧은 시간 안에 당신이 나에게 뇌수술을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존경하겠소.> 그 말을 듣고 그는 씩 웃었다.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그와 같은 긴장 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되어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밖에서 정신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는 데,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문판_29p, Whether these dreams did any good is another matter; the dreamer had to wake from them to the reality of camp life, and to the terrible contrast between that and his dream illusions.

I shall never forget how I was aroused one night by the groans of a fellow prisoner, who threw himself about in his sleep, obviously having a horrible nightmare. Since I had always been especially sorry for people who suffered from fearful dreams or deliria, I wanted to wake the poor man. Suddenly I drew back the hand which was ready to shake him frightened at the thing I was about to do. At that moment I became intensely conscious of the fact that no dream, no matter how terrible, could be as bad as the reality of the camp which surrounded us, and to which I was about to recall him.

Because of the high degree of undernourishment which the prisoners suffered, it was natural that the desire for food was the major primitive instinct around which mental life centered. Let us observe the majority of prisoners when they happened to work near each other and were, for once, not closely watched. They would immediately start discussing food. One fellow would ask another working next to him in the ditch what his favorite dished were. Then they would exchange recipes and plan the menu for the day when they would have a reunion-the day in a distant future when they would be liberated and returned home. They would go on and on, picturing it all in detail, until suddenly a warning was passed down the trench, usually in the form of a special password or number: "The guard is coming." I always regarded the discussions about food as dangerous. [번역판_65p, 그런 꿈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깬 다음 수용소 생활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꿈속의 환상과 현실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놀라면서 그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심한 영양실조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이 온통 먹고 싶다는 본능에 집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대다수 수감자들이 어쩌다 서로 가까이서 일을 하게 되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가? 당장 먹는 얘기를 꺼낸다. 배수구에서 일하는 친구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서로 조리법을 교환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여기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날,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을 위해 식단을 짠다. 그러면서 먹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또 한다. 아주 자세하게 그 모양을 그려가면서, 이런 대화는 “감시병이 온다.” (이 말을 전하는 데에는 대개 특정한 단어나 숫자로 이루어진 암호가 사용되었다.)는 경고가 마지막 사람에게 전달될 때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영문판_30p, Is it not wrong to provoke the organism with such detailed and affective pictures of delicacies when it has somehow managed to adapt itself to extremely small rations and low calories? Though it may afford momentary psychological relief, it is an illusion which psychologically, surely, must not be without danger.

During the latter part of our imprisonment, the daily ration consisted of very watery soup given out once daily, and the usual small bread ration. In addition to that, there was the so-called "extra allowance" consisting of three-fourths of an ounce of margarine, or of a slice of poor quality sausage, or of a little piece of cheese, or a bit of systhetic honey, or a spoonful of watery jam, varying daily. In calories this diet was absolutely inadequate, especially taking into consideration our heavy manual work and our constant exposure to the cold in inadequate clothing. The sick who were "under special care"-that is, those who were allowed to lie in the huts instead of leaving the camp for work-were even worse off.

When the last layers of subcutaneous fat had vanished, and we looked like skeletons disguised with skin and rags, we could watch our bodies beginning to devour themselves. The organism digested its own protein, and the muscles disappeared. The the body had no powers of resistance left. One after another the members of the little community in our hut died. Each of us could calculate with fair accuracy whose turn would be next, and when his own would come. After many observations we knew the symptoms well, which made the correctness of our prognoses quite certain. He won't last long, or This is the next one, we whispered to each other, and when, during our daily search for lice, we saw our own, naked bodies in the evening, we thought alike: This body here, my body, is really a corpse already. [번역판_67p, 이제 간신히 우리 몸이 적은 양의 음식과 낮은 칼로리에 적응하게 되었는데, 맛있는 음식에 대해 그렇게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내장기관에 자극을 주면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이다. 먹는 이야기가 당장은 마음의 위안을 줄지 몰라도 생리적으로는 위험을 수반한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하루에 한 번 아주 묽은 수프와 전처럼 적은 양의 빵을 배급받았다. 그러다가 가끔 특별배급이라는 것을 받을 때도 있었다. 마가린 0.75온 보잘것없는 크기의 소시지, 적은 치즈 조각, 가공 벌꿀 조금, 묽은 잼 한 숟가락 등 그때마다 달랐다. 이런 식단은 열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면서 맨손으로 중노동을 하는 우리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특별간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임시 막사에 남아 있는 환자에게 주는 음식은 더 형편없었다. 마지막 남은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로 가죽과 넝마로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키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우리는 모두 다음에는 누가 죽을 것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 죽을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징후가 보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 오래 못 갈 것 같아’, ‘다음 차례는 저 사람이군.’ 우리는 이렇게 수군거렸다. 매일 저녁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이 몸뚱이. 이제 정말로 송장이 되었구나.

 

[영문판_27p, I had to leave my shoes unlaced in order to make them fit my swollen feet. There would not have been for socks even if I had had any. So my partly bare feet were always wet and my shoes always full of snow. This, of course, caused frostbite and chilblains. Every single step became real torture. Clumps of ice form ed on our shoes during our marches over snow-covered fields. Over and again men slipped and those following behind stumbled on top of them. Then the column would stop for a moment, but not for long. One of the guards soon took action and worked over the men with the butt of his rifle to make them get up quickly. The more to the front of the column you were, the less often you were disturbed by having to stop and then to make up for lost time by running on your painful feet. I was very happy to be the personally appointed physician to His Honor the Capo, and to march n the first row at an even pace. As an additional payment for my services, I could be sure that as long as soup was being dealt out at lunchtime at our work site, he would, when my turn came, dip the ladle right to the bottom of the vat and fish out a few peas. This Capo, a former army officer, even had the courage to whisper to the foreman, whom I had quarreled with, that he knew me to be an usually good worker. That didn't help matters, but he nevertheless managed to save my life(one of many times it was to be saved). The day after the episode with the foreman he smuggled me into another work party. There were foreman who felt sorry for us and who did their best to ease our situation, at least at the building side. But even they kept on reminding us that an ordinary laborer did several times as much work as we did, and in a shorter time. [번역판_62p, 신발 끈을 풀어 놓아야만 부어 오른 발이 들어갈 수 있었다. 양말이 없기도 했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양말을 신은 발이 들어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맨살이 드러내 내 발은 늘 젖어 있었고, 신발 안은 늘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동상에 걸려 얼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을 찢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 덮인 길을 행진하는 동안 신발 위로 얼음이 얼어버렸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미끄러졌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그 위로 엎어졌다. 그러면 행진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곤 했다. 하지만 그 상태가 그렇게 오래 지체되지는 않았다. 감사병 중 한 명이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넘어진 사람들이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앞줄에 설수록 도중에 행진을 멈추어야 하는 일이 적게 일어났다. 따라서 지체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아픈 발로 뛰어야 할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친애하는 카포 각하의 주치의로 임명된 나는 앞줄에 서서 일정한 속도로 행진을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도와주고 받는 혜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 작업반에서 수프를 나누어줄 때면 그는 국자를 수프통 밑바닥까지 집어넣어 콩알 몇 개를 내 수프에 넣어 주곤 했다. 전직 육군 장교였다는 이 카포는 심지어는 나와 싸웠던 감독에게 가서 내가 일을 아주 잘 한다고 속삭이는 용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것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그는 어찌어찌 해서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가운데 적어도 한 번은 그의 도움을 받았다. 감독과 싸웠던 바로 그 다음날 그는 나를 몰래 다른 작업반으로 옮겨 주었다. 감독들 중에서도 우리를 측은하게 여기고, 우리의 상황을 개선해 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어도 건축 공사장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도 일반 노동자들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일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영문판_28p, But they did see reason if they were told that a normal workman did not live on

(10+1/2)ounces of bread(theoretically- actually we often had less) and

(1+3/4) pints of thin soup per day; that a normal laborer did not live under the mental stress we had to submit to, not having news of our families, who had either been sent to another camp or gassed right away; that a normal workman was not threatened by death continuously, daily and hourly. I even allowed myself to say once to a kindly foreman, "If you could learn from me how to do a brain operation in as short a times as I am learning this road work from you, I would have great respect for you. And he grinned. Apathy, the main symptom of the second phase was a necessary mechanism of self-defense. Reality dimmed, and all efforts and all emotions were centered on one task: preserving one's own life and that of the other fellow. It was typical to hear the prisoners, while they were being herded back to camp from their work sites in the evening, sigh with relief and say, "Well, another day is over. It can be readily understood that such a state of strain, coupled with the constant necessity of concentrating on the task of staying alive, forced the prisoner's inner life down to a primitive level. Several of my colleagues in camp who were trained in psychoanalysis often spoke of a regression in the camp inmate-retreat to a more primitive form of mental life. His wishes and desires became obvious in his dreams. What did the prisoner dream about most frequently? Of bread, cake, cigarettes, and nice warm baths. The lack of these simple desires satisfied led him to seek wish fulfillment in dreams. [번역판_64p,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일반 노동자들이 하루 에 빵(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것도 안 되는) 10온스 반과 묽은 수프 1과 4분의 3만 먹고는 살 수 없다는 것, 일반 노동자들은 우리가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지 않는다는 것,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거나 혹은 방금 가스실로 보내진 가족에 관한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일반 노동자는 매일매일 시시각각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하면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만약 내가 당신으로부터 도로공사 일을 배운 시간만큼 짧은 시간 안에 당신이 나에게 뇌수술을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존경하겠소.> 그 말을 듣고 그는 씩 웃었다.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그와 같은 긴장 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되어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밖에서 정신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는 데,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문판_29p, Whether these dreams did any good is another matter; the dreamer had to wake from them to the reality of camp life, and to the terrible contrast between that and his dream illusions.

I shall never forget how I was aroused one night by the groans of a fellow prisoner, who threw himself about in his sleep, obviously having a horrible nightmare. Since I had always been especially sorry for people who suffered from fearful dreams or deliria, I wanted to wake the poor man. Suddenly I drew back the hand which was ready to shake him frightened at the thing I was about to do. At that moment I became intensely conscious of the fact that no dream, no matter how terrible, could be as bad as the reality of the camp which surrounded us, and to which I was about to recall him.

Because of the high degree of undernourishment which the prisoners suffered, it was natural that the desire for food was the major primitive instinct around which mental life centered. Let us observe the majority of prisoners when they happened to work near each other and were, for once, not closely watched. They would immediately start discussing food. One fellow would ask another working next to him in the ditch what his favorite dished were. Then they would exchange recipes and plan the menu for the day when they would have a reunion-the day in a distant future when they would be liberated and returned home. They would go on and on, picturing it all in detail, until suddenly a warning was passed down the trench, usually in the form of a special password or number: "The guard is coming." I always regarded the discussions about food as dangerous. [번역판_65p, 그런 꿈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깬 다음 수용소 생활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꿈속의 환상과 현실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놀라면서 그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심한 영양실조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이 온통 먹고 싶다는 본능에 집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대다수 수감자들이 어쩌다 서로 가까이서 일을 하게 되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가? 당장 먹는 얘기를 꺼낸다. 배수구에서 일하는 친구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서로 조리법을 교환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여기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날,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을 위해 식단을 짠다. 그러면서 먹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또 한다. 아주 자세하게 그 모양을 그려가면서, 이런 대화는 “감시병이 온다.” (이 말을 전하는 데에는 대개 특정한 단어나 숫자로 이루어진 암호가 사용되었다.)는 경고가 마지막 사람에게 전달될 때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영문판_30p, Is it not wrong to provoke the organism with such detailed and affective pictures of delicacies when it has somehow managed to adapt itself to extremely small rations and low calories? Though it may afford momentary psychological relief, it is an illusion which psychologically, surely, must not be without danger.

During the latter part of our imprisonment, the daily ration consisted of very watery soup given out once daily, and the usual small bread ration. In addition to that, there was the so-called "extra allowance" consisting of three-fourths of an ounce of margarine, or of a slice of poor quality sausage, or of a little piece of cheese, or a bit of systhetic honey, or a spoonful of watery jam, varying daily. In calories this diet was absolutely inadequate, especially taking into consideration our heavy manual work and our constant exposure to the cold in inadequate clothing. The sick who were "under special care"-that is, those who were allowed to lie in the huts instead of leaving the camp for work-were even worse off.

When the last layers of subcutaneous fat had vanished, and we looked like skeletons disguised with skin and rags, we could watch our bodies beginning to devour themselves. The organism digested its own protein, and the muscles disappeared. The the body had no powers of resistance left. One after another the members of the little community in our hut died. Each of us could calculate with fair accuracy whose turn would be next, and when his own would come. After many observations we knew the symptoms well, which made the correctness of our prognoses quite certain. He won't last long, or This is the next one, we whispered to each other, and when, during our daily search for lice, we saw our own, naked bodies in the evening, we thought alike: This body here, my body, is really a corpse already. [번역판_67p, 이제 간신히 우리 몸이 적은 양의 음식과 낮은 칼로리에 적응하게 되었는데, 맛있는 음식에 대해 그렇게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내장기관에 자극을 주면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이다. 먹는 이야기가 당장은 마음의 위안을 줄지 몰라도 생리적으로는 위험을 수반한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하루에 한 번 아주 묽은 수프와 전처럼 적은 양의 빵을 배급받았다. 그러다가 가끔 특별배급이라는 것을 받을 때도 있었다. 마가린 0.75온 보잘것없는 크기의 소시지, 적은 치즈 조각, 가공 벌꿀 조금, 묽은 잼 한 숟가락 등 그때마다 달랐다. 이런 식단은 열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면서 맨손으로 중노동을 하는 우리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특별간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임시 막사에 남아 있는 환자에게 주는 음식은 더 형편없었다. 마지막 남은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로 가죽과 넝마로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키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우리는 모두 다음에는 누가 죽을 것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 죽을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징후가 보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 오래 못 갈 것 같아’, ‘다음 차례는 저 사람이군.’ 우리는 이렇게 수군거렸다. 매일 저녁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이 몸뚱이. 이제 정말로 송장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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